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
녹취자: 장미연
I. 본문 해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세 번째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었지만 그 부활이 가지는 신학적인 의미를 아직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바와 같이 우리는 그것을 꼭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2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던졌더니 넘치도록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아마 베드로와 그 일행들에게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때와 데자뷰의 사건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II. 제자들을 찾아오심
오늘 우리가 읽은 15절은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첫째, 식탁을 차리셨고, 둘째, 이름을 부르셨으며, 셋째, 질문을 던지시고, 넷째,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A. 식탁을 차리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제자들은 이제 바다에서 나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어디서 마련하셨는지 예수님은 숯불위에 떡과 생선을 맛있게 구우며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구우시며 제자들을 한 식탁으로 불러 모으시는 그림은 선지자나 하나님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엄마의 그림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식사라고 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형제 됨, 가족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종교지도자들에게 받으셨던 중요한 비난의 사유가운데 하나는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건강한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의원이 쓸모가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 왔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불결하다고 버렸던 죄인과 세리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주시며 식탁을 마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람들을 감화시킴으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을 만났다고는 하시지만 베드로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사실상 처음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것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자신이 예수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했던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식사 자리를 만드시고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잘못하고 배신했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것이 상처조차 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여전히 가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불러 당신의 교제 속에 모으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에게는 항상 선하시고 우리와 맺은 한 번 그 가족의 언약을 저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우리의 모든 믿음의 닻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B. 이름을 부르심
두 번째는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조반을 마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는 이 이름은 예수님께서 버리게 하신 이름이었고 그에게 “베드로”라 하는 이름을 새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여기에서 “바요나 시몬아” 이 말씀을 반복하고 계실까요? 마태복음 16장 그 유명한 가이사랴 빌립보의 고백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요한의 아들이란 말이 바로 “바요나 시몬”입니다. 요한의 아들은 그리스어로 푼 것이고 “바요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요나의 바를 아들 “시몬아”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약에 베드로에게 “반석아” 라고 부르신다면 그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그래서 맨 처음 부르심을 받았던 그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이 이름은 매우 친근한 이름이었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불러 주시는 그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 앞에 오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고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커다란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요한복음 21장은 뜯어버려도 훌륭하게 요한복음의 마무리가 됩니다. 마지막 절을 읽어보시면 요한복음 전체의 마무리일 뿐만 아니라 4 복음서 전체의 마무리로서 가장 적합한 성경 구절이 20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런데 21장을 하나님이 부록처럼 삽입시키셨습니다. 만약에 21장이 없다면 우리는 매우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에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갔던 실패한 제자들이 뜬금없이 사도행전 1장에서부터 예루살렘 교회에 기둥과 같은 지도자들로 등장하여 영적인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혼란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요한복음 21장을 부록으로 달아놓으셔서 그 모든 의문을 해결 되겠금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로 대표되는 모든 제자들의 실패한 리더십을 회복시켜 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 모두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한 사람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더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그이 졸병이 되었다더라. 우리는 감동이 밀려 올 겁니다. 그러나 만약에 역사가 그렇게 전개 되었다면 우리는 베드로의 행적을 보면서 한없는 절망을 느낄 뿐이지 우러러 볼 뿐이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도 이 복음의 감격을 경험하면서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교회에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던 베드로도 한 때는 실패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을 모질게 배반하고 주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이라는 것 그런 사람을 예수께서 불러 회복시키시고 용서해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겨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가는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에 역사의 전개 과정 그 자체가 복음이라는 사실에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전도사요, 목사요, 혹은 한 교회의 사역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여러분들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며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화) 나는 14살 2개월 되던 해에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져서 한 없이 울었습니다. 그때 울었던 이유는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군가?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교회는 나의 이런 질문에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긴 세월 교회 다녔지만 한 편의 설교도 어린 나의 가슴에 찌르는 설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준 선생님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마음에도 죽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사는 게 무서웠습니다. 사람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 여전히 내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이 14살 2개월 된 아이의 마음속에 어마어마한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단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눈을 뜨는 날도 눈을 감는 날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통곡을 하고 난 후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난 결심했습니다. “난 무신론자로 일평생을 산다. 하나님은 없다. 있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7년 가까운 세월을 혹독한 방황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많은 정신적인 방황의 과정을 거치면서 문학과 사상, 철학을 휘 돌면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스스로 전도하는 사람 없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다시 믿을 때 나 행복하려고 믿었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믿은 적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건 나중에 신앙이 들어가고 믿음이 생기고 성경을 알고 나니까 ‘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인간의 행복이 없구나.’ 라고 느꼈을 뿐이지. 원래 내 모습은 ‘어떻게 내 인생을 살 것인가?’ 인류를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예수 믿은 것도 아니고 살수가 없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게 원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목회의 순수성, 소명을 간직하며 사는 열정적인 삶,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그 시점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했지만 뒤에 출발한 푯대가 불분명한 사람은 앞에 있는 푯대도 흐릿합니다. ‘내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전에 그 인생에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러면 돌아가 보라는 겁니다. 그게 여러분들의 이름입니다. 지금 전도사, 신학생, 목사 그런 게 여러분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 인생의 실존적인 인생의 방황 속에서 마지막 도저히 갈 길이 없어서 주님 앞에 인생의 길을 묻던 구도의 마지막 순간 그 때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그걸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그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그때를 생각 하거라. 그 때를 기억 하거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던 그 시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질문을 던지심
세 번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같았으면 이 말을 꼭 했을 거 같습니다. 제 성격 같았으면 베드로에게 “네가 뭐라 그랬니?” 아니 그거보다 더 한 말을 했겠지요. “죽는데 까지 따라오겠다더니 살아있네.” 제 성격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죽는데 까지 따라오겠다며 그런데 살아있네.” 예수님은 일체 말씀 안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형으로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론 세 개의 질문에 “사랑 하느냐”는 히랍어 단어가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은 너무 그리스 문학적 관점입니다. 그냥 같은 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지나온 과오에 대해서 묻지 않으셨습니다. 물고기나 혹은 사람 보다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고 계셨습니다. 이게 뭘까요? 그렇게 실패했는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받고 싶으셨던가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누구이시 길래 우리를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나이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커다란 손해나 되십니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마치 커다란 벌이라도 내릴 것처럼 우리를 위협하면서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옵나이까.”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어거스틴은 그 긴 철학적인 방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닻을 내릴 수 있었는데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는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헤겔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커다란 전체의 한 부분도 아니고 실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무 의미 없이 잉여의 존재로 우주 공간에 던져진 채로 태어난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셔야 지만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세계와 인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모든 질문 심지어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독교는 최고의 신본주의인 동시에 최고의 휴머니즘이라고 나는 자부합니다.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무한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초청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로서 당신의 택한 자들을 당신 사랑하게 만들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작용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인생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바깥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무엇입니까? 목회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자면 전도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님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이고 목양은 구원과 함께 붙든 사랑의 불길을 계속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 목양입니다. 모든 찬란한 진리에 대한 사상과 그리고 윤리적인 삶인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할 때 이 사랑으로 성도를 사랑하고 성도가 나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우리가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져 있지만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사랑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셨을 때 모든 인류가 서로를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는 고백 속에서 살게 하고 싶으셨던 사회의 그림입니다. 죄 때문에 이것이 깨졌고 그것을 마지막 날에 완성하는 그 상태가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입니다. 교회는 그 사랑을 선취적으로 맛보고 그 사랑이 깨진 사랑 속에서 구현해 나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사랑이 이미 침투했고 아직은 그 사람이 완전히 이루어져지지 않은 all ready but not yes 이 구조 속에서 그 사랑을 완성해 갑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은혜로 완성하십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고백은 가장 결정적인 고백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목회에 있어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 그것이 설교자, 목회자, 복음 사역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조건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바로 이 질문 앞에 매일 매 순간 서는 것입니다.
D. 사명을 맡기심
마지막 네 번째,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여라.” 하필이면 하나님은 실패한자를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려고 하셨습니다. 실패한 자에게 사명을 맡겨 주셔서 자신의 자신이 된 것이 자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에 대한 야망이나 비전 그리고 심지어는 교인들에 대한 사랑으로 우린 목회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섬김을 감당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도저히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는 살 수 없는 마음 그게 소명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목회 길에 들어서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하면서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타락으로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진리를 탐구하게 하고 교회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 교회를 위해 우리 육체에 채우며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기쁨 속에서 살게끔 만들어 주는 겁니다.
III. 결론
(예화) 제가 직장 생활을 그만 두고 야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6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드리던 채플시간, 기도소리, 설교의 음성 그리고 첫 학기 긴장 속에서 첫 번째 등장하신 교수님의 수업을 듣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바람같이 지나가고 3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잠깐입니다. 여러분도 정말 잠깐입니다. 졸업을 하고 졸업하기 전에 전도사를 하시고 졸업을 하면 목사가 되시겠지요. 그리고 한 교회 혹은 2,3교회 또는 활동적이신 분들은 여러 교회를 왔다 갔다 하다가 40대, 50대, 60대 지나서 사역이 끝나겠지요. 그리고 죽습니다. 어떤 분들은 수만 명의 교회를 해서 한국교회가 주목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2-30명 교인들을 모아 놓고 목회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대부분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되실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삶의 양상입니다. 마지막 한 목회자의 성공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공하는 인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일구어도 마지막 죽는 순간에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 마음이 가득차지 않는다면 사도바울이 말했던바가 아닐까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 까봐 두려워하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웨일즈의 부흥이 있기 전 인도 가시 지방에서 1900년도 초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존 스탄이라는 선교사가 그 현장을 방문했을 때 동네에는 어른이 없고 애들만 모여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 왜 여기서 울고 있니? 엄마, 아빠는 어디 갔니?” “우리 엄마 아빠는 부흥회 갔어요.” “너희는 왜 우니?” “우린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울어?” “예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니 그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우리는 울고 있어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 사랑하고 사명감당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