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신 하나님Ⅱ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실하신 하나님(애3:19-22) 2001.2.25 주일오전 1
2. 아침마다 새로운 신실하심(애3:23) 2001.3.4 주일오전 13
3.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애3:23下) 2001.3.11 주일오전 28
4. 영원하신 기업 (애3:24) 2001.3.18 주일오전 44
5. 자기를 찾는 자에게 선하신 하나님(애3:25) 2001.4.1 주일오전 57
1.성실하신 하나님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19-22)
이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가 유다 나라가 멸망된 후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보며 기록한 시입니다. 이 시는 답관체라고 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답관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알파벳이 22개인데 그 22개의 순서를 따라서 시를 짓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하고 한줄 시를 짓고 다음 줄은 ‘나’하고 한줄 시를 짓고 ‘다’하고 한줄 시를 지으니까 이렇게 시를 짓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것은 외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한줄씩 나가는 것도 있고 두줄씩, 혹은 여기서처럼 세줄씩 나가는 것도 있고 시편 119편 같은 것은 8줄씩 나갑니다. 그래서 22글자가 8줄로 해서 176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 애가를 잘 외우기를 원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레미야 애가가 이 시를 쓸 때에 그 연대는 대게 주전 586년 경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약 한140년 경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그리고 그 후로부터 약 140년 후인 586년에 이제 바벨론의 군대들이 쳐들어와서 그래서 유다 나라를 멸망시키고 성을 부수고 그리고 성전을 유린하는 사건이 있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 이제 이 예레미야가 멸망당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눈물로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 애가는 처음 시작을 “애카” 그리고 히브리 말로 시작을 하는데 그 애카는 “슬프도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이 시 전편에는 슬픔의 정서가 가득 배어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이 3장 가운데 19절서부터 22절 사이에서 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불변하는 진리를 몇가지 발견해서 증거하므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힘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유다 나라의 멸망, 예루살렘의 함락은 그들에게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신앙적인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신들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한 신학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그 신학은 바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토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신학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시는 장면을 많이 볼 것 같으면 무조건적인 호의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기는 집안에 태어난 한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가 무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자질이 있다든지 아니면 무슨 행위가 있다든지 그런 것들이 입증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냥 그 한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면서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런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인데도 네가 복의 근원이 되겠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너로 인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무조건적인 호의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이오 신학이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킬 것이고 예루살렘 성을 함락당하게 하셔서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예레미야의 외침은 거짓말처럼 들렸고 급기야는 자신들의 신앙적인 교리를 혼돈시키는 이단과 같은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에도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증거를 인해서 박해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고 야단치신 역사가 있는데 왜 그들은 무조건적인 호의만을 생각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징계하시고 그리고 훈련시키신 기록들이 나옵니다만 땅을 주신 후에 그 땅을 멸망시키시고 더욱이 하나님의 언약이 깃들어있는 예루살렘 성, 더욱이 하나님의 성전이 포함되어 있는 그 예루살렘 성을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신 사건은 처음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국권을 잃어버리고 나라가 완전히 멸망되는 것,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성소까지 쓸어버리시는 이런 일들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오늘 성경에 보면 선지자가 말하기를 “내 고통과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라고 나오는데 여기 “재난”이라고 번역된 그 말이 히브리 말로 “마루드”라는 말인데 이것은 “방황”입니다. 그래서 여러 성경 번역에서 이것을 “원더링”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방황입니다. 그러니까 이 백성들이 멸망당할 것을 예언한 선지자조차 막상 그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고 나니까 고통했을 뿐만 아니라 큰 정신적인 방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인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인가 그러면서 이제 쑥과 담즙을 경험했습니다. 쑥과 담즙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아주 쓴 것입니다.
여러분, 웅담을 드셔보셨습니까? 원하시면 맛을 보여드릴 수가 있는데, 저는 웅담은 비싸서 못 먹어봤고 어렸을 때 보통 돼지 쓸개를 먹어보았습니다. 어려서 아파서 할머니께서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 쓸개를 말리려고 쓸개보를 뜯으면 그 속에서 즙이 고약과 같은 상태가 되어서 그것을 먹는데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쑥은 거기에 되면 양반입니다. 쑥보다 훨씬 더 합니다. 그런 표현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내면의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방황, 재난으로 번역되는데 고통과 방황이 이 선지자의 외면적인 상태를 말한다면 쑥과 담즙은 내면적인 그 고통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그런 고통이 계속 되는 가운데 선지자는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방황인가 하면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인가, 이것으로서 정말 어떻게 되는 것인가, 회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어떤 회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가끔 회의도 가질 수 있습니다. 회의를 갖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회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아니 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위한 것입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정말 오늘 우리 죄가 용서받으실 수 있을까, 참 이상하다.’ 이게 회의입니다. 그런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입니다. 그래서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신앙도 보면 이상하다고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신앙 생활을 잘 합니다. 회의를 가지고 있다가 에이 모르겠다고 하면서 퍼져버리면 못하지만 그러나 그런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탐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신앙이라고 그러는데 불신앙은 안 믿겠다라고 하는 고집이고 회의는 믿으려고 하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혼돈하면서 ‘목사님, 그것이 참 이상하네요. 그것은 왜 그럴까요?’ 이렇게 물어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럼 믿으라면 믿어야지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그것은 아닙니다. 회의는 정죄받아야 할 대상의 것이 아닙니다. 불신앙하고는 다릅니다. 불신앙은 안 믿겠다는 것이고 회의는 믿으려고 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이런 말을 어느 철학자가 했습니다. “확신에서 시작한다면 회의로 끝이 끝이 날 것이고 그러나 회의가 든다면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모두 이름난 회의주의자들이었습니다. 회의를 가졌기 때문에 그 회의하는 방황 속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 가운데도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하박국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아주 쓸데없는 정죄의식을 느끼고 사람들을 막 정죄하고 이런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선지자가 지금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것을 토대로 저는 이 본문 전체에서 세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낙심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오늘 말하기를 “낙심이 됩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왜 낙심하게 되었습니까? 왜 방황하게 되었습니까? 극심한 고통, 극심한 시련이 선지자로 하여금 낙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낙심이라고 하는 것은 희망이 사라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속으로 들어가던 그때에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남아 있는 단 한사람의 의인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지금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당한 가운데서 이렇게 1절서부터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 선지자 자신의 개인적인 죄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따라서 “나”라고 하는 것은 선지자 개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과 영적인 연대를 이루고 있는 지체로서의 예레미야입니다. 선지자의 뛰어난 영적인 상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그 죄와 그들이 당하고 있는 그 심판,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고 있는 관계의 단절을 자신이 모두 경험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히 중보기도를 하다가 보면 기도하지 않을 때는 ‘아이고 그렇게 살아봐라, 좋은 일이 일어나나 봐라, 하나님이 반쯤 죽이실 것이다’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 되지만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그와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면서 느끼는 그 고통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면서 느끼시는 아픔을 자기가 한꺼번에 경험해서 하나님과 그리고 자신의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 혼연일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체된 감정입니다. 영적 연합입니다.
선지자가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낙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유서깊은 예루살렘은 원수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고 거룩하게 제사를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이 모두 약탈해감으로서 1장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겁탈을 당한 아낙네와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디서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이 민족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시며 아직까지도 이 백성을 사랑하고 계신다고 하는 증거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낙심했습니다. 낙심한 상태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정결하게 살면서 일평생 진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하고 그들에게 참 하나님을 가르치는 일에 생명을 걸고 골수에 사무치는 불을 안고 그 불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살았던 이 선지자도 낙심할 때가 있었다면 이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연약함과 죄가운데 둘러싸여서 수시로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낙심하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입니다. 살아있는 만큼이나 자연스런 것입니다.
낙심 속에서는 선지자가 고백한 바와 같이 방황합니다. 예전에 명료하게 알았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흐려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혹은 흐려지지 않더라도 이전에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이 예전에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생생하게 살아서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삶에 영향을 주었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살아 있지만 그 명료한 지식이 더 이상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낙심했을 때 말입니다.
능력의 사람 엘리야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시대에 소개했던 선구자 세례 요한을 생각합니다. 탁월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속되는 큰 고통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회의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정말 오신 그이신지를 물어봐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모두 죽고 나만 남았습니다. 내 생명이 족합니다” 주님 앞에 죽음을 구할 정도로 낙심했습니다. 이처럼 오래 지속되는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의 탁월한 은혜 속에서 계속 살지 않는다면 계속 되는 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낙심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런 걸출한 사람들에게서도 지속적인 고통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침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낙심은 그 영적인 침체에 바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같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잘 일어나겠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속되는 고통, 때로는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고통, 때로는 자신이 원하고 있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서 오는 긴장을 동반한 고통, 때로는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깨트려진 관계, 어떠한 방향으로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지속적인 관계의 고통이 우리를 낙심으로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영적인 깊은 침체는 낙심의 좌절로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한번 하나님의 은혜의 비추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낙심할 때에 예전에 가졌던 우리의 확신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 혼자 남아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단절도 경험합니다. 예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간절히 눈물로 매달리면서 사연이 많은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왔던 그 놀라운 신앙의 경험들은 모두 잊혀지고 이제 끝없이 계속되는 커다란 고통과 시련 앞에서 쑥과 담즙이 솟아나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낙망하게 됩니다. 그때에 기뻐하고 박수치는 것은 원수와 마귀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선지자는 이런 낙심에서 벗어나는 실제적인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회상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선지자는 “중심에 회상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중심은 히브리 말로 “레브”라는 단어인데 마음입니다. 한번 설명을 할테니까 잘 이해를 해보십시오. 모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느끼고 인식하고 생각하는 모든 작용들이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일한 깊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자, 좀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중국 영화에 잘 나오는 테마는 어린아이가 부모가 비참하게 자객의 손에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한을 품고 엄마 아빠를 죽인 원수를 향해서 이를 갈면서 수염이 긴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칼싸움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안으로 안으로 응어리가 져서 이제는 그 원수를 찾아가리라, 그것도 항상 얼굴을 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발자국 하나를 보고 찾아간다든지, 아니면 신발끈 하나 떨어트린 것을 보고 찾아간다든지 그래서 서부 영화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찾아갑니다. 그 아이의 마음 속에는 자라서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원수에 대한 것이 철저히 배어있습니다. 모든 삶이 그 생각을 중심으로 재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죽인 원수만 단칼에 처치하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도 좋다는 것이 주인공의 마음입니다. ‘저 사람들이 내 부모를 죽인 원수들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그를 미워하는 느낌을 갖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난 작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라고 해서 복수심 하나만 갖고 일평생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이 먹고 싶을 것이고, 주막을 지나가면 빵이라도 사먹고 싶을 것입니다. 예쁜 여자를 보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들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저 여자와 결혼을 했으면 하고 느끼는 사모하는 감정이나 빵을 보면 먹고 싶다는 감정이나 모두 마음으로 오고가는 작용이지만 빵과 여자, 안락한 삶 이런 것들은 마음으로 생각은 하는데 그런데 그 생각하는 마음의 깊이가 복수심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더 깊은 중심 속에 있는 그 욕망 때문에 그 표피에서 일어나는 욕망은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모두 거룩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신자라고 해서 모두 세상 사랑에 대한 집착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성도도 없고 또 하나님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 성도도 없습니다. 그것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지배적인 중심적인 사랑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히브리어 레브를 여기에서 중심으로 번역한 것은 아주 기가막힌 번역입니다. 세계 번역사상 유례가 없는 아주 탁월한 번역입니다. “중심” 그럴 때 딱 들어오잖아요. 중심 그러면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마음입니다. 마음인데 마음이라고 표현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심을 아시는 주님’ 이게 무엇입니까? 마음 중에서도 그 마음에 깊은 핵심입니다. 더 이상 파고 들어갈 수 없는 핵심을 여기서 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 속으로, 그 중심을 향해서, 중심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중심 속에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묵상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무엇을 발견한 것인가 하면 소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까 낙심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선지자가 표피적으로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을 바라볼 때에는 절망밖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다 뿔뿔히 흩어져서 끌려가고 그리고 여기저기 피흘리며 뒹구는 시체들이 가득하고 성은 불타고 그리고 성전은 훼파되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 선지자는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뭉개구름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이 고통받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마음 전체를 절망과 낙심이 가득 채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중심에 깊이 파고 들어가서 회상을 해보니까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무엇을 회상을 했겠습니까? 회상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이미 경험한 것들을 돌이켜서 다시 생각으로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절망 속에 있고 시련과 지속되는 고통으로 낙심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지혜가 바로 이런 회상의 지혜입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남의 나라에 가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아들이 다시 희망을 갖게된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 생각이 없을 때에는 돈이 떨어졌고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고 흉년이 왔고 쥐엄 열매조차 먹으려고 했는데 그것 조차 없었습니다. 그 현실을 다 확인하는 동안에는 그냥 엎드려져서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 곧 회상이라고 하는 것은 예전에 경험한 일에 대한 회상입니다. 무엇에 대한 회상입니까? 예전에 아버지의 집에서 풍족한 삶을 살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던 그때, 이미 경험 속에 있는 그때를 회상한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그의 생애에 있어서 자신은 몰랐지만 절대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그리고 허랑방탕한 삶에 대한 연모함이 생겨났다고 할지라도 궁핍이 다가오고 모든 소망이 끝나고 나니까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 기억을 상기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중심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회상이 그로 하여금 다시 회상하게 된 것입니다.
회상을 하니까 어떤 희망이 생겨나는가 하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입니다. 돌아가자. 그리고 말하자. 아버지와 다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말하자. 뭐라고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내가 감당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품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고 여기서 머슴이라도 일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여러 가지의 희망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자기를 받아주실 것이다 그런 모든 희망들이 다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회상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없이 신앙 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이 닥치고 시련이 오면 우리의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머리가 아주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닥칠 때 바쁘게 움직이던 머리는 대부분 악한 지혜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닥치고 시련에 잠길 때에는 조용히 회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회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염려와 방황, 고통에 대한 아픔 시련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그것들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악한 지혜 이런 모든 것들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의 표피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고 중심 속에 있는 생각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생각을 떠나서 아직 그런 염려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깊은 중심 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생각을 하니까 자신의 고통받는 상황에 대한 아주 본질적이고 현실적인 통찰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 선지자가 중심에 회상하니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알켄”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게 재미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긴가 하면 앞에 것을 받는 것입니다. 앞에 고통과 재난을 당하고 곧 쑥과 담즙이 솟아나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묘미입니까? 그러니까 선지자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낙심했을 때에 그 상황을 바라보는 해석과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는 상황의 해석은 다른 것입니다. 엄청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엄청 다른 것입니다.
(예화: 좋은 외제 차를 타고 가던 사람이 앞에 가던 티코와 충돌을 했는데 자신의 잘못 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염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차를 어루만지며 속상해 했다 는 이야기- 미국에 간 어느 형제가 도로에서 과속 운전을 해서 앞에 가는 차를 받았는데 부서진 차에서 흑인 한사람이 나오기에 겁을 먹고 무서워하는데 그 흑 인이 다가와 어디에 다친데가 없냐고 오히려 걱정해주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똑같은 상황을 가지고도 마음이 다르니까 나오는 반응이 다른 것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 차를 긁힌 것을 걱정하고 속에 다친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이 사람은 자기 차를 박살내었어도 ‘그거야 고치면 되지, 이정도로 받았으면 저쪽에 오는 사람은 큰일났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는 괜찮은데 당신은 괜찮은가.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 우리들이 낙심해 하는 사람이 있고 희망을 갖는 사람이 있는데 이 선지자가 똑같은 상황인데 그 상황에서 중심에 깊이 생각을 하니까 표피적인 절망의 감정들이 물러가고 희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묵상한 것이 무엇일까요? 다음에 보면 알 수 있지만 그가 묵상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가 묵상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그 어느 한 성품을 묵상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새로운 음성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멸망당한 이 상황, ‘알켄’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성품이 무엇입니까? 자비와 긍휼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히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쭉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들어보십시오. 전에는 무너진 예루살렘, 훼파당한 성전, 뿔뿔히 흩어진 이산가족들을 보면서 ‘아! 우리가 잘못했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구나’ 그것까지만 생각하니까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심에 깊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그리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긍휼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자비와 긍휼” 이것을 한마디로 묶으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생각하고 그것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나니까 이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베푸실 수 있는 최고의 심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마서 1장에 의하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이방인들의 그 절망적인 상태에 내버려두사, 내버려두사 하나님이 다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악인의 많은 형통함들이 하나님의 버려두심이었다는 사실을 성경의 기록자들이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의로우시면서도 이 세상에 어떻게 악이 있을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해답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선지자가 큰 희망을 갖게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 잘못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혼내시는구나. 그렇다면 결국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표다. 결국은 이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야가 그 사람의 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큰 은혜를 받고 각성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다니엘입니다. 참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이 중심에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 영원한 하나님의 그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마르지 않는 은혜를 생각하고 나니까 전에는 절망을 가져다 주었던 그 상황,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을 간섭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거나 남이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련과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여러분은 죄가 없는데 애매하게 당하는 고통이거나 시련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런 것을 당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자기는 죄가 없는데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은 이것은 특권입니다. 핍박을 받는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혹은 또 자기의 죄로 잘못된 것은 아니어도 (?)잘못으로 인해서 자기가 덩달아서 당하는 그런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로마로 끌려가는 죄수의 몸이었는데 그런데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게 되니까 그 풍랑은 사실은 사도 바울의 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 기뻐하셔서 그런 것들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풍랑을 통해서 죄수인 바울이 그 배에서 정신적인 스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중심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낄 때 그 군인들이 자기를 호송하는 그런 군인들이 오히려 묶인 사도 바울에게 안심하라, 염려하지마라, 뭘 좀 먹어라,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이 풍랑으로 인해서 너희의 생명을 하나님이 가져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가족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다면 그 풍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런 사람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가정에 고난이 오기 전까지는 교회에 다니는 나를 쳐다도 안 봤는데 고난이 닥치니까 엄마가 와서 기도해달라고 그러고 아빠가 와서 너희 하나님 앞에 간구해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정신적인 가장으로 떠오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섭리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원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면 하나님께서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완전히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래도 고쳐서 쓰시려고 때리시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매를 참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악하고 완고하니까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서, 그런데 그렇게 징계를 받은 날들이 하나님 앞에 이제 와서는 참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 징계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 몹쓸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징계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그러니까 그 징계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징계보다도 더 진한 사랑입니다. 때리시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시면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러니까 그 선지자의 쑥과 담즙을 담은 것 같은 내면의 세계에 소망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보면 소망의 이유가 참 신기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의 자비와 긍휼히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게 무슨 이야긴가 하면 살아있는 것이 그의 소망의 이유였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서 깊은 언약의 도성이 뭉개졌고 거룩한 성전이 훼파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진멸되지 않고 살아 있는 것, 이게 희망의 증거입니다. 살아있는 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죄와 불순종, 그리고 신앙적인 바르지 않은 것들을 일깨우시기 위해서 혹은 때리시고 혹은 책망하셨다고 칩시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의 삶 속에 곤고함이 가득하고 그리고 시련과 고난이 몰려닥쳐서 잠시 여러분들이 이전에 누리고 있었던 신앙적인 확신이 흔들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칩시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하십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버려두시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훨씬 더 흉악하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훼방하는 악랄한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여러분보다 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증거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징계도 주시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관계를 갖고 싶은 사람들을 책망이라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 그가 바르게 될 수 있다라고 믿어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책망도 하시고 징벌도 하시고 야단을 치시면서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에 또다른 표현입니다.
아직까지 선지자는 살아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어떤 사람은 전쟁 속에서 죽어갔습니다만 그러나 이스라엘 그 자체는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루터기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에 말씀이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다 부서지고 성전은 다 뜯겨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목소리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어떤 영혼의 한계 속에서 몸부림을 하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진멸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말씀을 듣고 있는 한 돌이킬 기회가 있을 것이며 돌이킬 기회가 있는 한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자신들의 죄를 위해서 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을 완전히 치유하시기 위해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희미하게 밖에 알지 못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밝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묘사되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중심에 깊이 회상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하나님이 잠시 징계를 받는 것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다시 건지시고 회복시키셨는지에 대해서 많이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를 면밀히 살피면서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애써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분명한 표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던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해를 성취하시기 위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모르면서 우리들은 살아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를 향한 이 놀라운 신실하신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이 나의 신앙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만세전부터 계속 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죄악 가운데 있고 무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사랑을 잃어버리고 무지의 어두움 속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거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살아있습니다. 아직 살아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화받을 수 있는 증거입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오, 지금은 우리가 망가진 사람과 같아도 언젠가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셔서 슬픔 대신에 기쁨의 화관을 우리에게 씌우시고 주님 앞에 근심과 염려를 끼쳐드렸던 우리의 오래된 인생에 방황을 끝내고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수많은 기쁨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표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한번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회상해봅시다. 선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오는 은혜도 경험했습니다. 지난 날의 부끄러웠던 삶을 십자가 아래 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일꾼이라고 인정받게 된 것도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경험해온 바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아직까지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신 놀라운 증거를 우리는 이 삶이라고 하는 기회 속에서 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살아있게 하시는 것, 이 땅에 발딛고 숨쉬며 살아있게 하시는 것, 그것이 결국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하나님 없는 것처럼 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라는 기회이며 무지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는 총명과 지혜의 도달하라는 기회입니다. 패역 가운데 있어서 스스로도 돌이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치료를 경험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기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지자는 오늘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절망에 딛고 일어서서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고 있는 사랑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이라고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 짐승처럼 그냥 살아있게 하셨습니까? 어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짐승처럼 그냥 살아있게만 하고 우리를 버려두셨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찾아가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이 예배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시고 여러분들의 양심을 찔러 가책을 느끼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자신의 삶을 돌이킬 수 있는 회상의 기회를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 예배 속에서 생각나게 하십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놓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게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되 그냥 살아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리의 빛을 살아있는 우리에게 비추셔서 쉼없이 먹보다도 더 검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죄가 들어온 이후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깨졌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비참하리만치 궤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서진 하나님의 형상은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대로 운행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로 말미암아 부서진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만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나 학벌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유에 의해서 그런 것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 속에서 회복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그런 회복의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오늘도 여러분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여기에 모여서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십니까? 왜 이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의 양심을 찌르시고 여러분들의 신앙적인 생각들을 자극하시며 왜 여러분들에게 어두움을 밝혀서 옳고 그름과 시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께 속한 삶을 그리워하고 주님을 떠났던 삶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영혼에 참된 변화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기회로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그림이 이해가 됩니까? 유서깊은 예루살렘의 문은 부서지고 성안에 도처에 피가 잇대어 흐르고 시체들이 나딩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치솟아 타오르고 있습니다. 성전의 금은 보석들은 모두 다 뜯겨서 겁탈당한 아녀자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옛날의 예루살렘이 아니고 옛날의 성전이 아닙니다. 그 폐허가 된 예루살렘 그 성 한복판에서 선지자가 불변하는 성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낙심을 딛고 일어서는 이 광경을 한번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잠시의 실패나 순간적인 징계가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소망을 발견하고 주님을 위해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기대를 가지고 아직까지도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새롭게 출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아침마다 새로운 신실하심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심판을 당하여 폐허가 된 예루살렘 위에서 오늘 이 뜻밖의 고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자비와 긍휼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비와 긍휼은 오래참음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낙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바였지만 그 예고를 따라서 백성들이 멸망하고 이방의 군대들이 성전을 유린해 버리고 성 여기저기 불타고 있었을 때 그는 탄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잠시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 심판을 받아 폐허가 되어버린 그 예루살렘을 보며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인 이야기가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외적이 쳐들어왔고 나라는 결단났습니다. 이제 언제 다시 회복할지도 모르게 끔 국건을 잃어버렸고 수많은 동족들이 개처럼 돼지처럼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망해버린 이 예루살렘에서 이 통곡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예루살렘이 부서지고 성전이 파괴되고 모든 사람들이 죽고 끌려가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이방의 적들이 칼과 창으로 파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남아있다라고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하는 이것의 하나는 육신적인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이런 모든 환난과 재난을 통해서 파괴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 중에서도 예레미야는 아주 영적인 세계가 아주 심오한 그런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를 연구하면 우리들이 아주 깊은 복음의 보화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오늘 그렇게 모두 파괴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읽은 23절에서는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그리고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여기서 성실이라고 번역된 우리말은 성실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해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함은 큽니다 “크다”라는 말도 “라바”라는 말인데 이 단어가 어디에서 쓰였는가 하면 처음에 창세기에 “내가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리니” 그 말씀이 나오는데 사실 더한다는 말은 있는 그 위에 보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징벌 이전에, 다시 말하면 타락 이전에도 고통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그러면 거기가 낙원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니고 그럼 무엇인가 하면 있는 것에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고 “라바”라는 단어는 한꺼번에 확 부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없는데다가 한꺼번에 확 부어버리는 것을 “라바”라고 하는데 여기 “크도소이다”라는 단어가 바로 그 단어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번역을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즉 자비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신실하심이 확 넘칩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이런 고백도 우리들이 좀 엄밀히 분석을 해보면 좀 말이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침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새롭다 그리고 주의 신실하심이 확 넘친다 그것은 좋은데 그럼 보십시오. 정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변화무쌍하게 감정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 묘사가 됩니다. 진노하시기도 하고, 또 기뻐하시기도 하고, 또 열렬히 사랑하시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마음이 차갑게 식기도 하고 그런 것으로 이렇게 묘사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아침마다 변하신다는 것이나 날마다 뭐가 이렇게 변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신 성품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란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이 수시로 변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새로우니까 인식되기는 그 하나님이 날마다 새로운 것처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적절하게 비유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한번 우리들이 연장선상에서 보면 그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것의 세 비유가 나오는데 하나는 드라큐마의 비유, 또 하나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탕자의 비유인데 셋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인데 드라큐마의 경우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잃어버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양의 경우에는 과실과 무능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바 되었는데 주인이 그것을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다 다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의지적으로 스스로 아버지를 떠난 것이고 그리고 스스로 잃어버린 바 되었는데 그런데 스스로 인격적으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러니까 이 세 가지가 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보면 아들이 이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고 그리고 이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주리니까 비로소 무엇이 생각이 났는가 하면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버지도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이 아들 생각에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최대한 호의를 베풀어준다면 그러면 아마 자기를 그 집안의 품군 중 한 사람쯤으로 써주지 않겠는가 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니까 동구밖에서 아직까지도 거리가 먼데 아들이 먼저 아버지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달려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거기서 아들은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는 자기가 그렇게 아버지의 유산을 허비하고 이렇게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도 자신의 죄와 타락이 끊어놓을 수 없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거기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 뜨거운 사랑을 경험했는데 그것이 그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직 집을 나갈 생각도 안 하고 집에 있을 때조차도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일관되게 이런 사랑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일관되게 그 자식을 사랑하고 있었는데도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진실되게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 탕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자기가 그 아버지의 자기를 향한 그 뜨겁고 진실한 사랑,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자신이 직접 인격적으로 경험하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아무리 많이 사랑하셔도 여러분의 인생은 바뀌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여러분이 그 사랑을 맛보아 알기까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라고 묘사한 것은 아주 특이한 사랑의 부어주심의 그 감격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은혜와 놀라운 사랑이 너무 크니까 어제에 받았던 것이 생각나지 않은 것입니다. 고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오늘 죽어라고 고난을 당하면 어제 그저께 당했던 고난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난도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고생했던 것을 이렇게 회상하는 때는 언젠가 하면 지금 평화로울 때 회상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정신이 없으면 그것을 회상할 여유가 없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사랑의 감격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다”라고 하는 이 사랑의 감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런 감격은 평화로운 때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고 내 원하는 일들이 기도가 응답되어서 뜻대로 다 이루어지는 때에 이렇게 하나님께 감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것은 소유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무슨 문제입니까? 관계의 문제입니다. 소유나 환경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렇게 자비로우신 분이 왜 나라를 전부 다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셨습니까? 그 긍휼의 풍성하신 분이 왜 나라를 모두 잃어버리고 백성들을 이방의 포로로 끌려가고 피가 피가 잇대이는 그런 사륙의 도성이 되게 끔 만드셨을까요? 그런 명백한 반론들을 다 뒤집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의 감격입니다. 그것을 다 뒤집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선지자가 “아침마다 새롭다”고 고백을 하는데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현재적으로 계속 재현되어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번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그 기억만을 가지고는 우리들이 오늘을 성결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 조차도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그런 은혜의 경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에 대한 경험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가 신자다운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권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결코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의 특권이오 그리고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결코 발견될 수 없는 그 무엇의 실제를 우리들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고 하는 그 실제를 이 선지자가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알아가는 감격이 있습니까? 특별히 그의 자비와 긍휼에 대해서 그의 사랑에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가는 희망의 감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 신령한 신앙의 사람들은 이런 은혜로운 감격을 주님을 위해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면서 그의 신앙을 참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고난 중에 이러한 하나님의 그 자비와 긍휼을 읽은 것입니다. 형통한 가운데 그런 것들을 읽는 것도 쉽지 않지만 지금 심판을 당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 보면 처음에는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주 깊이 절망하면서 몸부림칩니다. 그러다가 3장에 와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으로 하나니의 자비와 긍휼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발견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사면을 돌아보아야 불타고 있는 성, 피흘리고 쓰러진 시체들, 겁탈당한 처녀처럼 유린당한 그 황폐한 성전 그런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라를 다 잃어버리고 왕과 관료들은 꼭두각시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이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환경을 능가하지 못하는 신앙은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 슬퍼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모두들 평화롭다고 말할 때 주님 때문에 슬퍼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눈에 보이는 현실, 그것을 넘어서서 그 배후에 존재하는 세계를 보고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그러면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면서 그 불변하는 부르심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그런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향해서 실망하는 예가 아주 현격하게 적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로 인해서 제가 실망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참 잘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기 때문에, 사람을 향해서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 살면 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인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 형편없는 인간들, 그렇게 얕잡아 본다는 뜻이 아니라, 또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랑하고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뭔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분에 넘치는 그런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아주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아주 그리고 나서 제 마음에 많이 상처를 받는 일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참 그것이 어쩌다가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잘 살고 충만하게 살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진실된 신자가 되어 가는데 그것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저 사람이 저런 삶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가 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것을 다 털고 그리고 이제 잘못 살거나 상처를 주거나 실망을 줄 때 그때에 ‘드디어 이제 은혜가 떨어지니까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 우리 목사님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마음이 편하데’ 그러지 말고,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말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이 악함과 인간의 그 절망적인 상태라고 하는 것은 진짜 뼈속 깊이 배어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쓸모없고 하나님 앞에 희망이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어떤 전적 타락이라는 이 성경의 교리가 정말 현실적인 교리입니다. 인간은 속속들이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해도 얼마나 치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조금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이제 살만해집니다. 살만해지면 예전에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고 그러던 마음이 이상하게 사라집니다. 하나님 떠나서 사는 것을 아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징벌을 하신다든지 고난을 당한다든지 길을 잃어버린다든지 그래서 아픔이 밀려오면 그러면 다시 또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용서해주십니다. 다시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살만해지면 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이제까지 우리의 인생이 온 것이 아닙니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제 뭔가 전진하고 성장하면서 발전해오고 어떤 사람들 속에는 성장이라고 하는 것도 거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고 고통을 당하고 용서를 비는 그런 회복시켜주시는 이런 아주 불복종하는 삶을 계속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제 마음 속에는 어떤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보면- 이것은 아주 진심입니다. -그 사람이 위대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위대해 보이시는 것이 실제로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제 마음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오늘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하면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희망이 없는 죄인들이 실패를 반복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데 그 죄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용서로 표현되는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 자비와 긍휼을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그 죄인들에게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죄가운데 살다가 구원받을 때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힘겨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런 주님의 자비와 긍휼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해서 눈뜨고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인하면서 그래서 모든 소망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두고 그 자비와 긍휼이 자신의 인생을 인생답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하나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가 모두 황폐하게 부서진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제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더 분명하게 드러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경험은 보다 더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큰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그러나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도례하는 이 새로운 은혜의 시대의 특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관계가 있고 또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동기간으로부터 그리고 배우자로부터 받은 사랑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렇게 크지만 여전히 상처받은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기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사랑의 감격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광신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루에 한번쯤은 펑펑 울고 그리고 주님의 그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행복해서 감격하는 것은 이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지 오히려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 이것이 핍절하고 메마른 삶입니다. 환경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선지자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모두 멸망을 당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끌려가고 그리고 성전이 훼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모든 재난을 통해서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군대들이 뺏아갈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자신들이 비록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고 고난과 시련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자신들이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언약의 백성이라는 이 사실은 무엇으로도 취소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진멸당하지 않은 자신들의 생존과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언약의 관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폐허 위에서 주의 자비와 성실을 발견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우리들은 더 많이 그런 자비와 긍휼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전에 주님의 사랑은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는 사랑만큼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과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의 절정입니다. 앞으로도 이보다 큰 계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오래참음과 희망이 없는 죄인들을 향한 자비, 그리고 그들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그 자비와 긍휼에 대한 감격 그것을 가지고 절대의존적인 마음으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진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성경도 보이지 않고 그리고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의 감격할 줄도 모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킬지 모르는 이 백성들을 결국은 주님이 눈물을 머금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만드시고 이제 언약 백성들의 나라의 역사를 마름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죄악된 삶이 당시 심판을 받았던 유다 백성들의 삶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멸되지 않고 이렇게 살아남아서 오늘도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하나님께서 몽둥이와 그리고 억압의 밧줄이 아니라 사랑의 줄, 은혜의 띠, 그리고 때리시는 사랑의 매로 우리를 돌이킬 기회를 소유하게 된 것도 우리가 그 백성들보다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그 이후로 죄인들을 돌이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뜨겁게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그 죄인인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고 거기에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자비,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이 어두운 죄악의 길에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향한 긍휼이 드러났습니다.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감격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이시라면 그 이외에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왜 주시지를 않겠는가 하는 반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레미야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진멸되지 않고 목숨이 붙어있는 자신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언약관계를 붙들고 하나님의 자비와 성실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다면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노래할 이유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모두에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자 하고 그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그 사랑의 성품을 따라서 살고 싶어하는 진실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 점에 있어서는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자주 주님을 멀리 떠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한편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기를 갈망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을 꿈꾸고 그리워하며 부르심의 주님의 품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이중 인격적인 사람들입니다. 두 가지 욕망이 한 가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늘 충돌하고 때로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데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세상의 타락의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뵈옵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히게도 만들지만 그러나 마지막 남은 억압까지도 풀어버리고 육신의 사로잡힌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그런 마음도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런 마음들은 각양 많은 탐심과 죄를 이루고 여러분들의 마음과 영혼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로 여러분들을 빚어갑니다. 어떤 때는 이 힘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들이 목마르게 바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같은 이 몸은 정금같게 하시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하나님 붙들지 않고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살아온 인생 전체가 감추어진 것들이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살지, 만약에 이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아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수많은 용서, 인색하신 적이 없습니다.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으로 갚았는데도 가서 용서를 빌고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하면 주님이 다시 사랑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게 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소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이 증거입니다. 내가 진멸되지 않고 아직까지 이렇게 살아서 다시 주님을 위해서 주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아직까지도 받고 있다는 사실 이 자체가 사랑의 놀라운 증거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의 인생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자기가 예전에 그렇게 살고 싶었던 삶을 포기하고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을 만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방황하고 정죄된 자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고 그리고 눈뜨면 직면하는 그 죄의식과 정죄함 속에서 살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어두운 여러분의 영혼에 복음의 빛이 비치고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울 수도 없고 울어본 적도 없는 여러분들의 뺨에 눈물이 흐르고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경험되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신 그 이후로 이제껏까지 살아온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삶에 무슨 선한 것이 있었습니까? 주님의 그런 가슴 저미는 사랑을 받으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자기를 다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사랑을 기념하면서 산 날들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철없는 아이들이 부모의 희생 속에서 성장하면서 어버이날이 되면 의무적으로 글짓기를 하면서 상기하는 그런 식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 말고, 진짜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이 관계의 축복이 ‘이 세상에 모든 것보다 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면 나는 만족입니다’라는 그런 고백이 있었던 때가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감격이 있을 때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의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데 신자가 살아가는 이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된 신앙의 연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아무리 오래된 연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현재적으로 주님의 자비와 성실, 그런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라는 이 고백이 없이는 그의 삶이 아주 진보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가 얼마나 감격이 많은 삶을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오셨다는데 왜 그렇게 우리가 기뻤습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 주님을 만난 소식을 듣고 아무 상관없는 우리가 얼마나 기뻤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사랑의 감격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고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효자라고 하면 매일 자동이체를 해서 돈이나 넉넉히 부쳐주는 자식, 그것만 한다고 해서 효자가 아닙니다. 효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랑의 제악을 받기도 하고 그 사랑의 자유를 얻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관계에 대해서 늘 감격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관계 말고 남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나라는 다 빼앗기고 다 포로로 끌려가고 이산가족이 되고 자기의 생명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파괴된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무엇이 남았습니까? 집이 하나 남았습니까? 아니면 전토가 남았습니까? 뭐가 남았습니까? 이제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바벨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 신앙에 있어서 마지막도 포기될 수 없는 정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환경에 의해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으니까 환경에 의해서 다 벗겨내고 나면 관계 자체가 나와야지 되는데 그 관계 자체가 없으니까 환경이 어려우면 한꺼번에 신앙이 와르륵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만 비로소 자기가 그리스도인 같은 느낌이 들고 이런 곳에서 사라지고 나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닙니다.
저도 하나님께 돌아오고 나서 가장 많이 감격했던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까 나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고 나의 뭐 그것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 관계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요한 사도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신앙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줄 몰랐던 사람들을 감격을 회복하고 주님의 자비없이도 살 수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을 아주 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주님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한순간도 나를 놓지 마시옵소서. 주님 없이 홀로 천국의 동산을 거닐기보다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 지옥의 불가운데를 지나고 싶습니다라는 절대의존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회복입니다. 우리의 많은 죄와 불순종, 우리의 많은 허물, 그리고 때로는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경향성들 때문에 한편으로는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하나님 거스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망가진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작년에 제가 5월 가정의 달에 제가 설교한 것이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기억이 안 나시는 분은 가서 사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파괴당하고나서부터는 그것을 회복해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필요하고 또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역사할 수 있게 끔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환경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충분히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라고 생각되는 동안에는 세상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감격이 한없이 넘치고 내가 한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라고 하는 신앙의 감격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는 세상 사랑은 없습니다. 그게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것을 이 선지자는 나라가 다 부서지고 파괴된 가운데 그 신앙의 정수를 경험 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가 물질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가 건강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하나님과 여러분들의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지탱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내가 받고 있으면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내가 받고 있다라고 하는 경험은 그런 모든 것들에 의해서 지탱되지 않아도 됩니다. 왜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경험이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중하게 사랑을 받는가 하는 그 경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을 받고 있다라고 하는 이 느낌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줍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 사랑을 사람에게로부터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불안전합니다. 갈망하지만 그러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우리의 턱없는 욕망과 그리고 사랑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인줄 알면서도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죄악된 경향성 때문에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관계와 사람들은 상처를 받기 쉬운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 본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렸던 그 아름다운 관계 그 좋은 사랑의 관계들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고 그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준 세상을 죄와 타락으로 더럽힌 장본인입니다. 사랑하며 살도록 작정된 모든 관계들을 파괴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런 타락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갈망은 갖고 있지만 반대로 사람을 사랑할수 있는 능력은 잃어버린 무능력한 존재들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가장 휼륭하게 살았다고 그래봐야 그저 이 세상에서 안일하게 자기의 욕망을 즐기고 그러다가 그저 사라져버리는 것 그 외에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사랑과 세상에 있는 모든 관계들은 모두 변천하지만 그러나 불변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조금만 시간을 내어 눈을 감고 처음 주님을 만난 그 날부터 이제껏까지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일관성이 있는 사랑과 자비가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싫고 그리고 주님의 순종하라고 하는 분부가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때마다 저는 주님을 만난 날부터 이제까지 회상합니다. 그리고 한번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섭섭한 적이 있었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나쁜 일을 하신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누구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돌지 않는 한 하나님에게서 어떤 결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대해준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사랑을 준 사람들은 상처도 함께 주었고 우리를 보호하고 베풀어준 사람들은 때로는 우리에게 증오도 함께 주었습니다. 사랑과 미움 이런 것들은 은혜와 복수, 항상 나뉘어서 존재하지 않고 어느 관계 속에서 같이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불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필요하고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껏까지 살아온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래 참으심에 증거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을 불러 일으킬만한 사람들이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안 그날부터 이제껏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우리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자비, 거스르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에 빚지면서 우리의 일생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앙의 비밀은 곧 사랑의 비밀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조금만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하찮은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존재 자체가 하찮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일생동안 일하다가 살아가는 그 일도 참 하찮습니다. 인간이 이루어 놓은 많은 일 가운데 상당부분 악한 일이고, 그리고 상당부분은 있으나마나한 일이고, 상당부분은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죽음과 함께 혹은 이 세상의 끝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의미가 있으면서 영원을 향해서 잇대어서도 의미가 있는 그런 삶을 인간이 그렇게 많이 살다가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무능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이 얼마나 자만심이 강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과 긍휼이 없이도 혼자서 얼마든지 씩씩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을 때에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신자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빚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빚져서 한 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된 것입니다. 어두움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깨어난 그의 마음 속에 지속적으로 거룩한 성품들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런 긍휼 그것을 힘입으면서 한 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소유 때문에 감격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 때문에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사람들이 되기 보다는 관계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이것 때문에 한없이 감격하며 살아가는 진실한 신앙 생활 이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신앙 생활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 위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신앙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한번 보십시오. 주님이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얼마나 허전합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그럴싸한 신앙 생활을 해도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는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모든 소유, 눈에 보이는 수많은 만족, 그리고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환경들도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없는 나 자신이 허한 영혼의 상태를 감출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헐벗은 사람이 모두 헐벗은 사람이 아니고 부한 사람 모두 부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부자라고 자랑하던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난하다고 말씀하셨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그들에게 사실은 벌거벗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마음이 무엇에 대한 감격에 넘치냐에 따라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그 욕망과 이런 것들로 가슴이 가득차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비한 마음이 가득차면 아주 기필코 야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있으면 어떤 고난을 치루어도 진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정직한 마음이 있으면 눈앞에 수많은 이익이 기다려도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이런 것들이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이 지나가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말 희망이 없는 죄인인지를 알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그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나가도 그런 죄인들을 버리지 않고 용납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한없이 빚진 마음을 가지고,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정말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제게 부당한 것입니다라고 하는 주체할 수 없이 황공스러운 그런 마음에 감격이 없이 한달, 일년을 지나는 이런 그리스도인이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결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이 우리에게 아침마다 새로웠을 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는 눈물이 샘솟듯 하였습니다. 왜 이 쓸모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죄없으신 그 아들을 주셨을까? 그리고 그 탁월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나는 왜 내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살지 않고 어찌할 수 없는 죄악된 이 경향에 사로잡혀서 살고 나면 후회하고 살고 나면 뉘우치는 이런 삶을 되풀이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내가 받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살까. 그 눈물이 늘 있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관한 이야기를 한토막 들려줄 때도 우리의 마음은 녹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희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 못박히심으로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그것이 평생에 듣던 말씀인데도 늘 새로웠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특별한 삶이 아니라 우리들은 늘 누리며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은혜의 감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샘물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믿고 살아온 이래로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증거들을 보여주셨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미친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미치고 그 은혜 때문에 미치고, 하루를 살면서도 수시로 넋나간 사람처럼 주님의 사랑에 황홀해하는 사람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으니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하나님의 사랑, 흔히들 교회가 썩었고 타락했다고 그러면서 감격이 없는 자신의 삶을 호도하는데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었습니다. 1500년의 언약이 깃들어 있는 그 놀라운 성이 다 부서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랑이 선지자로 하여금 감격이 넘치게 하였습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인간이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하나님, 그리고 자신의 민족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 그것이 오늘 이 선지자를 감격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한없이 밀려왔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가득찰 때 우리는 항상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고 나니까 우리가 얼마나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인가도 잊어버리고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지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오만심과 그리고 근거없는 절망들이 대신 자리를 잡았습니다. 죄인들을 낙담시키고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거만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들이 매순간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다만 며칠에 한번 몇 주일에 한번이라도 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체험의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지 됩니다. 신자가 자기의 가슴을 녹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 속으로 가끔 들어가지 않으면 영악해집니다. 아주 영악해집니다.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틀은 있습니다. 모두 잘합니다. 그런데 영악해집니다. 그리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는 고백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모두이십니다. 나는 정말 무가치합니다.’ 그런 고백이 어느 순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뭘 원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겠습니까? 세상 끝날까지 우리 주님 섬기면서 살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힘이 없지만 아침마다 결심합니다. ‘오늘은 좀더 잘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으면, 정말 내가 이 세상에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우리들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을 할 것입니다. 잠시 쓰러지고 넘어져도 영원히 그렇게 되지 않고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열망을 가지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주를 위해 살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셨던 것처럼 또 우리도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의 일로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마음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불순종하던 그 자식들이 그게 너무나 하나님 자신의 성품 때문에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으시면서 이들을 심판하시고 언약이 깃들어있는 성에 파멸을 가지고 왔습니다. 섬김을 받으시던 성전은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절망 속에서 이제 하나님 원망하면서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에 보면 그 예루살렘이 다 파괴당했는데 사람들이 막 분주하게 돌아다닙니다. 그게 뭐하러 그런가 하면 감추어놓은 보물들을 꺼내어서 곡식을 사러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가 너희에게는 내게 임한 슬픔이 왜 없는가 하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파괴된 상황 속에서 한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이 평안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가슴 벅찬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굶주리고 핍절한 가운데서 그 무지몽매한 백성 한 가운데서 선지자가 모든 외적인 껍질들을 깨고 드러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모든 것이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멸망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성전이 훼파당하고 부서진 것은 하나님이 정결한 제사를 너무나 너무나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심판에 죽고 막 칼날에 흩어져서 날아가 부서진 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정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라고 하는, 그 백성들을 원하신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이 상황 속에 이 선지자가 주의 자비와 긍휼을 인해서 한없이 감격하며 하나님 앞에 노래하는 이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먹을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같이 늘 범죄하고 죄가운데 쉽게 빠지고 늘 하나님께로부터 넘어지는 이 쓸모없는 죄인들에게 일용할 양식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아들의 보혈을 기억하셔서 우리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 그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견딜 수 없는 삶의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혹은 많은 죄와 허물로 인해서 개선될지 모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해서 슬퍼하고 애달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결핍 속에서 아파하며 하루하루 죽기보다도 고통스러운 일들을 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하시고 새롭게 시작하게 하십니다. 기회를 주시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긍휼입니다.
선지자는 이것을 오늘 “성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무나”라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이것이 “신실함”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그 태도를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그 태도를 측정하고 평가하려고 하는 악한 경향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 신앙적인 태도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늘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선지자가 감격하고 있는 장면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함이 큽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크게 보여졌습니다.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실함이 특별히 여기에서 찬송의 제목이 되고 있는 것은 그 당시의 종교관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고대 근동에서의 이 신관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신들이 야비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신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준다고 그러다가 안 해주고 벌을 주지 않는다고 그러다가 벌을 주고 그렇게 심통을 부리는 그런 신들입니다. 신실함과는 상관이 없는 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지자가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레미야 선지자가 노래했던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현재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교만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아무렇게나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어떤 삶의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그 삶의 상황 속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의 식어진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감격에 불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므로서 여러분의 마음 전체가 그 사랑으로 불붙은 마음이 되어서 그 사랑의 지배를 받으며 그 사랑에 시키는 바대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여러분들이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지 여러분들에게 가장 절박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변함없는 시실함으로 자비와 긍휼을 여러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넘치는 관계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오늘도 내게 보여주시옵소서 갈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3.진실하심과 신실하심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3下)
배를 여러분들이 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배라고 할지라도 바다 한가운데 나가서 파도가 치면 육지 가까이에서 볼 때 그렇게 큰 배가 바다 앞에서 얼마나 가랑잎 같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배를 부두에 묶어둔 것처럼 그저 평탄할 때에는 우리가 아주 굉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목양의 관계도 사라지고 가까히에서 우리를 붙들어줄 수 있는 지체들의 섬김도 없고 혈혈단신으로 신앙의 세계를 떠나서 우리 자신만의 신앙으로 버텨보려고 하면 환난과 어려움이 올 때에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를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하는 위기가 그 위에 가세되고 나면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평탄하고 좋았을 때에 끊임없이 은혜를 받으면서 정박해 있는 배와 같았던 때에는 우리의 신앙이 꽤 되는 줄 알았는데 은혜의 세계로 멀어지고 세상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나면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가랑잎 같이 그렇게 연약한 것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린다. 우리의 믿음이 요동하기 시작한다’고 할 때의 그 믿음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믿음일까요? 우리들이 믿음이 흔들린다고 할 때에 그 흔들리는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 흔들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고 인생에 어느 지경에 들어가든지 간에 놓치지 말고 붙들고 있어야 할 두 가지의 확신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그 확신이고,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이 두 가지의 확신, 이것만 흔들리지 않으면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 쉽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이 성실하심이라고 하는 이 번역은 히브리 말로 “에므나”라고 하는 단어인데 “에므나”라고 하는 이 단어는 사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신실함”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신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함”이라는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이 됩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성품을 약속의 관계에 대입시켜서 말할 때에는 신실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함이 내면의 성품이라면 신실함은 그 진실한 성품을 서로 언약을 맺은 관계 속에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마음의 정직과 진실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신실한 행동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가 진실한 사람이 아니면 항상 그가 하고 있는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그가 하고 있는 말을 통해서 말은 그것이지만 마음에는 뭐가 있을까를 다시 계산하면서 파악을 해야 되는 수고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하나님이 이런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그 진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거나 진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진실해지려고 애를 쓸 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아주 진실한 사람과 가식으로 가득찬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속을 털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식적인 사람이 진실해지려고 애를 쓰기 전에는 진실한 사람과 결코 교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세계에서 산을 옮기는 믿음이나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 그리고 자신을 불태우듯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종교적인 열심, 심지어는 더 세속적으로 나가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부를 누리고 사는가, 심지어는 교회에서 얼마나 큰 직분을 가지고 사는가, 또 얼마나 목회자에게 인정을 받는가 이런 것들이 신앙에 있어서 커다란 가치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얻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가 진짜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그런 모든 것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이 진실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없고 나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는 헌신이 없다고 할지라도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람에게 가질 수 없는 특권이 있으니 진실하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던 종교 지도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율법사들, 종교 지도자들은 실제 삶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훨씬 적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구원의 은혜 속에 들어갈 수 없었던 가장 커다란 원인은 그들의 삶이 불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진실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실함이 결핍되고 나니까 그들의 겉모습은 의로웠지만 그의 삶 속에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의로운 삶을 뽐내는 동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각양 더러운 죄들이 가득하게 되었고 그런 더러움과 불결로 가득찬 마음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창기나 세리, 이런 사람들은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부도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앞서 말씀드린 종교 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죄와 악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모습만 더러웠을 뿐 아니라 그의 속사람도 죄악과 불결로 가득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셨고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그런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은 불의하였지만 그들은 앞서 말씀드린 종교 지도자들처럼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거나 거짓되지 않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정직하게 고백을 하고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오는 용서와 은혜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진실함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바는 진실하지 않은 의로운 사람보다는 오히려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훨씬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으로부터는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에 있어서도 인간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죄와 악을 제외하고는 완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순전한 죄인은 존재하지만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미 죄와 타락 이후에 인간이 이렇게 변화된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제 원하시는 것은 완전한 삶이 아니라 진실한 삶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진실하지 않은 것은 모두 미워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육신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간 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의 차이가 있지만 이 진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자랑을 구하는 사람들이오,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 앞에서 자랑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항상 진실함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항상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진실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라고 하는 그런 가치에 대한 인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보십시오. 내게 산을 옮길만한 믿음, 귀신을 내어 쫓을만한 능력이 없어도 내가 진실하고 그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무력하여도 나와 함께하시는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자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진실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 그것이 목표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진실한 예배를 드리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신자일수록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마음에 불타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움직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득찬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빛이 비칠 때에 그때에 자기가 그 빛이 비치지 아니하였더라면 알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니까 그러니까 무지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가운데서 진실해지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비록 죄를 지었다든지, 혹은 고난을 받는다든지, 어려움을 당한다든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는다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간에 그리스도인들은 진실함이 그 인격에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진실함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 진실함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에 손해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데도 그것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마음과 겉에 있는 삶을 진실하게 일치시키려고 하는 삶이 정직한 삶입니다. 그래서 그런 진실하고 정직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들끼리는 함께 교제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겉에 있는 말과 그 말을 하는 사람 속에 있는 생각을 분리해서 추적해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삶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우리들이 떡먹듯 하는 거짓말이나 신실하지 못한 것을 더러운 오물보다도 더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종교의 특성이다. 그렇게 인식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참다운 변화도 항상 진실해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완전히 진실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자신이 진실하시기 때문에 진실해지려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 앞에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자기가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신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진실함으로 약속을 맺은 이 언약의 관계에서 그 진실함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신실함입니다. 그러니까 이 신실은 성품 뿐만 아니라 그 성품이 약속을 맺은 언약의 관계 속에 삶으로서 실천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서 “그 신실하심이 큽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가슴 벅차게 찬양하고 있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선지자가 그 신실함을 찬송할 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자기 사이에 맺은 언약의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신실하심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아! 저 사람 신실해’ 이것은 무엇입니까? 약속을 하면 정확하게 지키고 빌린 것은 제때 주고 그리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고 입으로 한 이야기는 실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손해가 날지라도 자기의 할 일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 신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신실함을 여러분들이 잘 성경을 읽으신 기억을 더듬어보시면 성경 전체에 이 신실함이 등장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신실하다”라고 하는 형용사가 혹은 명사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 시편입니다. 시편은 이것도 사실 시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형태는 시입니다. 그런데 운이 딱딱 맞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해서 이것을 그대로 옮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편을 비롯한 성도들의 노래에 신실함이 등장해서 그 신실함에 대해서 하나님을 많이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이 신실함이라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 예를 들자면 신실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뭐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그 잘못을 법대로 해결하고 그대로 끝까지 끌고 나가서 법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실 인간은 얼마나 힘들고 골치 아픕니까. 적당히 뇌물을 주고 해결을 하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대에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실함에 대해서 그렇게 감동을 받고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하는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민족들을 향해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야,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 문명에 사대 발상지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류 문명에 발상지는 모두 종교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만큼 이 종교는 인간과 떨어트려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는 것 자체가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떠날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는 아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종교를 모두 말살시키고 그것이 헛것이라고 하는 것을 지난 세기 동안에 줄기차게 입증하려고 애를 썼고 그런 종교를 갖는 사람들을 향한 처벌을 강화했지만 결국은 종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그런 공산주의 치하에서 종교가 사라진 시대 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선교적으로 보면 종교에 대한 허기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같은 곳에서도 최근에 한 5년 동안에 ‘범민공’이라고 하는 이상한 이단이 나와서 1억의 신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종교가 옳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인간이 그처럼 결별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섬기고 있었던 신들은 창조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을 믿는 이 신앙, 이 종교는 한번도 사라지지 않고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소수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제멋대로 자기가 좋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성경이 쓰여지던 이 시대가 결국은 바벨론 시대입니다. 그 시대 전체는 광범위한 바벨론 문화권 속에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그 중동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숫자를 헤아린다고 하는 것은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신들을 섬기는 다신 사회였습니다. 다신 신앙을 가진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 신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처럼 고도의 도덕적인 성품을 가진 진실하고 고매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신이라고 하는 자체가 자기의 종적적인 이기주의,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만든 신들이기 때문에 그런 신들이 이런 도덕적인 성품을 가지고 약속의 관계에 있어서 신실하고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예화:아는 교수 분이 대만에 가셨는데 어떤 사람이 손 위에 금도금을 한 상을 올려놓고 계속 때 리며 길거리를 지나가고 있기에 왜 그런가 하고 물으니 이 신이 요즘 복을 주지 않아서 그 래서 때린다고 한 이야기)
인류 역사가 다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과 비슷한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신관입니다. 샤머니즘 속에서 가졌던 신관, 조상신, 지신, 청신, 그리고 삼신할머니가 어떻고 장독대에도 신이 있고, 화장실에도 귀신이 있고, 초마 끝에도 귀신이 있고, 땅에는 터줏대감이 있고, 산에는 산신이 있고 별의별 신이 다 있습니다. 그런 신들이 많이 있는데 그 속에서 우리의 조상이 그 많은 신들에 둘러싸이면서 신들 때문에 행복한 조상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은 없습니다. 그럼 신들이 무엇인가 하면 그 신들은 모두 젯밥이나 얻어먹으려고 걸근거리는 아주 탐욕스러운 신들입니다. 인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와서 인간들에게 약속을 하고 복을 주고 보살펴주는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자기들을 잘 섬기면 가만히 있어주고 수틀리면 난리를 치는 그런 신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집을 지을 때 터줏대감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그럴 때도 무슨 복을 받기를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 먹고 가만히 누어있으라고 달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신들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저급하고 더러운 신들입니다.
세계 문명에 발상지라고 하는 그리스 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에 나타나는 그 신화가 그게 결국은 모방을 해서 로마 시대가 나온 것입니다. 본뜬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철학이 발달하고 인류의 정신사를 움직이는 사상들의 발상지인 그곳에서, 신화를 보십시오. 얼마나 조잡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들끼리 음모, 질투, 시기, 간음, 살인, 근친상간 이런 것들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던 신이 바로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의하기를 그 시대의 신들에 대한 신들 앞에 서 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심정은 오늘날 조직 폭력배 두목 앞에 서 있는 똘마니 심정과 아주 유사합니다. 오늘 처음 조직 폭력배의 입회를 해서 저 말석에서 이제 걸레를 들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있어서 조직 폭력배 두목은 정말 위대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분입니다. 거기까지는 사실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비슷한데 그 다음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그 똘마니는 그 조직 폭력배 두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알 수가 없는가 하면 막 웃다가, 요새 궁예하고 비슷합니다. ‘너도 웃어’ 그러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안 웃으니까 막 웃다가 ‘저 놈이 웃지를 않다니 죽여’ 그러는 것입니다. ‘술 먹어’ 그래서 술을 먹으니까 ‘감히 네 놈이 내 앞에서 술을 먹어’ 그러면서 또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첨을 하면 아첨을 한다고 두들겨패고 그리고 자기 주장을 이야기하면 건방지다고 얻어맞고 그러니까 자신의 모든 생사가 그 두목의 기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그 사람에게서 일관성 있게 자신이 어떻게 그를 대해야지만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고 그를 도울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찾을 수 있으면 왜 거기서 그것을 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 똘마니는 항상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 두목이 성질을 부리지 말아야 할텐데’ 오직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일등도 말고 꼴등도 말고 중간 줄에 서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그런 신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단순한 능력만이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다른 신들과 하나님은 비교되지 않지만 도덕적인 성품의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일관성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내면에 진실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그럴듯한 삶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계속되는 그 갈등이 무엇인가 하면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아야 되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도 이 우상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근원에 있어서 완전히 이방신입니다. 아세라라든지 아니면 그런 우상같은 것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질적으로 우상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론이 광야에서 만들었던 송아지 같은 이런 것은 완전히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끔 형상화해서 만들어서 보이는 형상을 가지고 이것이 자기네 신이라고 섬기는 그 사람들을 향한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했던 그런 우상이 있습니다.
그런 동기에서 만든 우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사왕이 무흐스단이라고 그러면서 두둘겨 버린 광야의 놋뱀, 모세가 높이 들었던 놋뱀, 그것은 우상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의 우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셨다”라고 하는 그 기념으로 남겨놓은 그런 의미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떠한 식으로든지 그런 종류의 우상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을 싫어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까 말씀드린 그런 부도덕한 신들을 섬기는 그런 신들의 사회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그런 많은 형상화된 신들 위에 어깨를 겨루고 서 있을 수 있는 한 신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시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백성들에게 집요하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당신의 성품을 닮은 백성이 되는 것, 그래서 자신처럼 자신을 닮은 도덕적인 백성이 되는 것, 그것이 좀더 성경에 나와 있는 용어로 말하면 그게 “거룩”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비한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진실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으려는 노력이 있어야지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이니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 사람들은 진공 속에서 하나님을 섬긴은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자꾸 가리켜 주는데 신은 이런 존재라고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하면 자기네 신들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하나님도 나는 이런 하나님이라고 가리켜 주는데 신앙이 떨어지면 하나님이 가리켜 주시는 말씀보다 세상이 가리켜 주는 가르침에 더 많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은혜 안에서 살면서 주님의 계시를 따라서 하나님이 어던 분이신지를 깨닫고 또 삶 속에서 경험하고 나니까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하면 인간이 아무리 변덕을 부리고 하나님을 버렸다 택했다 인간이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기의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신실하심입니다. 왜 하나님이 한번 택한 백성들을 버리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민족을 만들어서 애굽에서 끌어내실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성경에서 가장 큰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큰 약속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켜서 “구약” “신약” 이렇게 말할 때 그 “약”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그 약속을 맺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백성들이 떠났다가 돌아오고 돌아왔다가 떠나고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 약속에 충실하게 지키시면서 자신의 진실하신 성품을 약속을 지키는 행동 속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실함입니다. 이것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비록 예루살렘이 망하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서 이 백성은 망한다. 아무리 애굽 사람에게 가서 원조를 청하고 바벨론에 대항해보려고 몸부림을 쳐도 결국은 망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계시를 주셔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들에게 선포했고 또 동시에 하나님이 회복도 약속하셨기 때문에 회복에 대한 예언도 했지만 막상 자기의 예언이 성취가 되어서 예루살렘이 다 부서지고 성전이 유린된 가운데 거기 주저앉아서 예루살렘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통치가 끝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에 이방인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것을 볼 때에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증거가 1장에 보면 그 선지자의 견딜 수 없는 애끓는 탄식과 고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예루살렘이 망하고 나서 선지자가 그 순간 당한 충격과 아픔이 자신이 그런 사실을 예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커다란 충격과 아픔 속에서 1장 2장을 보내고 3장에 와서 지금 이 선지자가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멸망당하고 뿔뿔히 흩어지고 피묻은 시체가 나뒹구는 그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하나님
쭉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것에 대한 깨달음이 오늘 실제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두둘겨 패시는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되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성전이 다 약탈 당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선지자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두 가지의 신앙이 흐르고 있었는데 한가지는 보편적이었고 한가지는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의 신앙이 흐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것만 가지고 만든 신앙관이고, 또 하나는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모세에 이르기까지 입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 속에서 세워진 신앙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과 모세인데 그러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를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부르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방 신상을 만들면서 그것을 업으로 알면서 살아가는 가장 타락한 문명지역에 살고 있는 그저 평범한 그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갑자기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너를 복의 근원으로 내가 만들어주겠다. 그리고 너로 말미암아 많은 민족들이 복을 받겠다. 그러면서 너는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시는데 그것은 순종을 하기만 하면 준다는 조건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 엄밀하게 보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것입니다. 가난해서 쩔쩔매는 사람에게 카드를 주면서 ‘너 이것을 갖고 가서 은행에 가서 돈을 찾으라’ 그럴 때 은행가는 것이 돈을 주는 조건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가면 주고 안 가면 안 준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가라는 자체는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그를 특별 대우를 해주신다고 하면 (?)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너 그렇게 힘들게 살아서 어떻게 하니. 이따가 내 방에 내려와 내가 돈좀 줄게’ 그럴 때 방에 내려가는 것이 축복의 조건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갈랐을 때 이야기입니다. 물론 안 내려가면 못 받으니까 그런 점에서는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억지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해주시는 땅으로 가라는 것은 거기서 복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제가 여기서 논증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냥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브라함이 씨가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하나님의 특권을 자신들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 속에서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항상 호의를 베푸시는 분이시다라고 하는 신앙을 계속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망한다고 피를 토하면서 예언을 해도 그렇게 사람들이 믿지 안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신앙 때문입니다. 잘못된 신앙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이 망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무엘 시대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싸우던 전투 가운데 아벡의 전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아벡의 전투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갑니까? 법궤를 지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입니다. 이 법궤가 곧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이기 때문에 이것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며 하나님이 전쟁터에 계시면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하는 것,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왕의 친전을 생각한 것입니다. 왕이 친히 전쟁터에 장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백성들이 얼마나 격려를 받습니까. 황제가 칼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는데 이것은 모든 부분을 거기에 건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런 친전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그 법궤를 메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반드시 이기리라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고 법궤는 빼앗긴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이 포로가 된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종교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영적인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법궤가 거기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럼 법궤가 아무 능력이 없었는가. 그 블레셋 땅에서 법궤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보십시오. 법궤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법궤를 사용해서 전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고 있는 인격적인 관계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신앙적인 관계가, 그것이 다 무너진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교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것을 다 버린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오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하나님 앞에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진실함을 상실합니다. 수많은 거짓과 가식 그리고 방종을 낳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가 된 것은 애굽에서가 아니라 애굽을 떠나서 그 시내산에 머물면서 율법을 수여받음으로서 이제 그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 속에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방법이 나오는데 그것은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해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주시는데 율법을 지키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영광스러운 민족으로 안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가면 출애굽에 나타난 약속들이 모세의 목회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면 너희가 말을 잘 듣고 순종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복종이 강조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 답게 만들어주시고 축복해주시는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사상이 신앙으로 전승되어 내려오는데 전자가 맞는 것이 아니라 사실 후자가 맞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아이 때 다루던 신앙이고 모세의 언약이 있던 때는 성숙할 때에 다루던 그런 약속입니다. 그 질에 있어서는 같지만 (?)흐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자면 그런 것이 아닙니까? 갓난 아이는 울면 엄마가 전전긍긍합니다. 물을 달라는 것일까, 젖을 달라는 것일까, 귀저기를 갈아달라는 것일까? 다 자란 초등학교 애가 앵 하고 울면 얻어맞는 것밖에 없습니다. 목이 마르면 가서 물을 먹고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뒤져서 뭘 먹으면 되지, 왜 울고 있냐. 그렇게 성숙함에 따라서 하나님이 다르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것을 보면서 여기에서 감격하고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는데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를 않고 그들을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긴가 하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이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계속 하고 있고 그 관계로 그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갈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나게 하는 성경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미 가나안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러나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430년 후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실현되는 것이 가나안 정복입니다. 그런데 왜 즉시 430년으로 미루셨는가 하면 그 이유가 가나안 사람이 악하기는 한데 아직은 그 죄악이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꽉 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거꾸로 놓고 보면 하나님이 뭘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죄를 지어서 꽉 찰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뭐하시려고? 심판해서 싹 쓸어버리시고 이제는 자기가 특별히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그 땅을 대신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이 환난이, 고난이, 비참한 전쟁이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셨던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심판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그 앞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무궁합니다”라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감사했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지금 비참하게 바벨론에게 짓밟아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지만 이것은 가나안 백성들이 당하였던 그런 의미의 진멸이 아닙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자기와의 관계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시기로 맘을 먹으시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잠시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세상에서 환난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는데 환난도 없고, 시련도 없고, 고난도 없고, 양심의 번뇌도 없어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 그러면 우리는 백퍼센트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확신해도 괜찮습니다.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그럴 수 없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버리시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그런 점에서 1장에서 실망하고 가슴이 아팠던 언약 백성의 그 파괴와 멸망을 보면서 3장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이 징계와 환난이 큰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화가 나서 그 백성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징계를 통해서 이 백성들을 자기와의 관계 속으로 부르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번성하던 때와 고난받는 때, 융성하던 때와, 멸망의 때 이 모든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초월해서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신 성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선지자가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 희망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복주십니다. 그러나 복받을 때에만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망해서 이방인들이 와서 다 빼앗아가고 여기 저기 피묻은 시체가 나뒹굽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가 혼자 가슴 벅차 오르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가슴에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변함없는 하나님이시다며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게 매국노며 나쁜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이 예레미야 선지자 속에 있는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강력한 회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맨 처음에는 어떤 회의가 일어나는가 하면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걸까’ 그런 회의가 일어납니다. 그 회의가 계속 반복되면 보다 더 궁극적인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존재에 대한 회의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세 가지의 회의가 일어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한 회의,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두 번째에 일어나는 회의는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대하시는 것이 정말 옳을까’ 하나님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결국은 처음에는 의심,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 그 다음에는 무신론에 대한 유혹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에도 그대로 신실함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되풀이 되는 유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진실하지 않고 신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실하지 않고 신실하지 않은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성품 자체가 진실하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변화되어야지만 그런 성품을 가진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대로 막 걸어 나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멋대로 살면서 당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짜고짜 몽둥이를 들고 와서 때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 한 사람을 징계하시기 전에 그 전에는 실로 지루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주심과 깨닫게 하시려는 의지와 그리고 오래 참으시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는 것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징벌을 받은 다음에 그 다음에 나중에 깊이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자기를 돌이키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은 오늘인데 그런데 오늘 회개하고 나니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과거의 모습이 보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오래 전부터 얼마나 돌이키시려고 애를 쓰셨는지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때 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하시고 그리고 타이르시고 권고하시고 때로는 말로 책망하시고 그러시다가 이제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이 자녀를 잃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되시면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매를 드시는데 그 매를 들고 자기의 백성들을 때리시는 그 하나님을 보면서 그 매가 무서워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왜 애들이 개판으로 놀다가 몽둥이만 들면 잽싸게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비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 애들은 계속 그렇게 삽니다. 교육에 진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깊은 깨달음과 그리고 자기를 때리고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고 그런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빨리 빌어라 안 빌면 맞는다 그런 공식 하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진지한 뉘우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애들이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을게요’라고 말하는 것은 ‘안 맞도록 노력하며 살게요’ 하는 것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교리적으로 “율법적인 회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돌이킴과 회개는 무엇인가 하면 맨 처음에는 율법적인 회개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사니까 사업이 망하는구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면서 ‘내가 신앙 생활을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이런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자기를 때리시고 징계하시면서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오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는 두려움 속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보이는 앞에서 우리를 때리시고 돌아 앉아서 흐느껴 우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고 하는 가책에서 오는 통증을 안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돌이킴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돌이키면서 돌아갈 때에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하면 항상 거기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남북 이산 가족들의 이야기 중에서 어느 어머니가 아들과 헤어진 오랜 세월을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이사를 가지 않고 살았다는 이야기)
탕자의 비유에서 자식이 내 아버지 집에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지 되겠다 그러고 갔는데 아버지가 이사를 가고 없다고 합니다. 동리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식이 오지도 못하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미국에서 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생각하면서 동구밖에서 흐느껴 운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돌아오기를 원하고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그 곳에 변함없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많이 징계를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깨닫게 하시는 훈련의 채찍을 맞고도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고 눈물을 씻으며 무엇을 보는가 하면 언제나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 신앙이 사라지고 은혜가 떨어졌던 때는 매일 ‘주님이 나를 떠났다. 주님이 나를 버리셨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홀로 버려두셨다’고 생각했는데 깊이 회개하는 눈물로 자신의 마음에 죄악을 씻고 나면 주님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떠났고 주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서 느낀 나의 고독감은 내 발로 걸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그런 상황 속에서 느낀 고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수시로 하나님을 떠나면서 사는 죄인들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 그 속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래 참으심입니다. 긍휼과, 은혜와, 오래 참으심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래 참으심.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당신의 신실함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선지자가 파악하고 나니까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민족적인 재난이나 환난, 이 어려운 고난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폐허가 된 예루살렘 위에 높이 가득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허가 된 위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눈으로 판단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때문에 성공하고 하나님 때문에 승승장구 할 때만 하나님 찬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모두 이방신들을 믿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오늘 선지자를 보십시오. 폐허가 되고 자기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피묻은 시체가 나뒹굴고 거룩한 성전이 비참하게 유린당한 가운데서 오히려 이 성이 멸망 당하지 않을 때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그 진실한 성품을 가슴 벅차 오르는 감격으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포로로 끌려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 깨트려진 이스라엘을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그들에게 영적인 비전으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년 모월 모시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약속의 뿌리가 어디로까지 거슬러가는지 기억하십니까? 우리의 처음 조상이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천추의 반역의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그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의 그 성품을 따라서 죄와 형벌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는 광채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온 땅이 더러움으로 가득찼고 창조세계에 가득찼던 하나님의 영광은 빛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들 안에 주셨던 그의 거룩한 형상과 모양은 여지 없이 파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 자신과 같이 되려고 하였던 그 죄에 비쳐볼 때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이제 창조받은 아름다운 자녀가 아니라 원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파괴한 흉악한 죄인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손에 거룩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파괴한 그 핏자국이 남아 있던 그때에 하나님이 즉시 찾아오셔서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된 그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그 후손들을 어떻게 건져내실지를 예언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하시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역의 죄를 지은 그 원수들, 그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을 따라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를 흘리며 오신 메시야를 증거하며 죽어 갔고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약속으로 제시된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며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그 백성들 속에 구원의 이 놀라운 언약들을 보존해서 전승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싫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오해하여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그 방법이 자기들의 편견에 맞지 않아서 메시야를 증거하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을 예고한 수많은 선지자들을 칼로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죽고 피가 피를 잇대었지만 그럴수록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메시야를 보내셔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불꽃처럼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희미하던 메시지는 선명하게 어둠을 가르고 흐르는 유성의 섬광처럼 빛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언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증언을 따라서 반역하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창칼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고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만방에 알려야 할 대제사장의 고난을 받으셔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번도 인간을 구하고 선택한 자기의 백성들을 보존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진실한 이 언약을 파괴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인간의 죄악, 인간의 반역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당신이 언제나 그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같이 연약한 사람들, 우리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쉽게 잃어버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만약에 행한 대로 대우하셨다면 아마 여기에는 피묻은 돌맹이와 머리가 상한 시체들만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여러분들을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그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어주신 것, 그것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번만 이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아들의 기도를 오히려 물리치시고 그 아들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자기의 옥체를 짓눌러 드릴 마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끔 그 아들을 골고다 언덕으로 손잡고 올라가신 것도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한번 택한 자기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시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고 인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고 좀더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도 또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처럼 명백하게 시련과 고난 속에서 혹은 영혼의 곤고함 속에서 당신 자신과의 관계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여러분들이 거둘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항상 긴 칼과 커다란 몽둥이로만 자기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의 피가 나도록 때리는 몽둥이도 무섭지만 그러나 자기가 낳고 자기가 온 마음을 다해서 기른 자녀인 우리들이 부모인 그 분들을 실망시키는 것을 보고 부모가 아파하는 그 마음을 깨닫는 것은 몽둥이나 칼보다 우리에게 더 큰 아픔입니다.
보십시오. 물론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동안 수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경고와 그리고 사랑의 권면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주심을 멸시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때리셨고 그래서 삶에 여러 방면에서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만나고 아파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면 여러분들을 이방인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회초리를 들어서 여러분들을 때리시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때리시는 것은 그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 우리가 당하게 될 그 엄중한 그 심판과 우리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게 될 교회와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우리를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짐승과 동물이 다른 것은 고난을 받을 때 그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짐승은 매맞을 때에 그 매로부터 도망치기를 원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치시는 그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때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그 분께로 돌아가던 행복의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관계로 우리를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시련과 재난을 당하면서 아버지 앞에 깊이 뉘우치고 돌이킬 때에 오히려 시련과 고난을 이길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아직 이런 재난을 당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영혼의 곤비함을 회피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매를 들고 종아리에 피가 흐르는 것만이 징계가 아닙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왜 여러분들을 외면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느껴지지 않고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지속적으로 확신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되었을까요? 무엇인가 하나님이 빠진 행복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행복하십니까? 주님 때문에 만족하십니까? 하나님 때문에 기쁨이 있으십니까? 기도 속에서 주님이 나를 받으시고 주님이 말씀 속에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증거를 그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런 홀로 있는 것 같은 거절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을 생각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선지자가 어떤 때에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신 분이신데 그것을 느끼게 되는 때, 그것을 경험해서 하나님을 환난 중에서라도 찬송하는 때는 언제라고 말합니까?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다시 말하면 긍휼과 자비가 새롭게 새롭게 우리의 마음 속에 경험될 때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난 중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에는 그런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의심할 수 없으며 그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내어주신 그 분이 우리들의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키고자 할 때 주님이 우리를 버려두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완전한 사람들일 수가 없습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떠나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들어도 깨닫는 것이 아니고 깨닫는 모든 사람들이 그 진리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옳은 것은 아닙니다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돌이켜 신실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그 사랑 속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진한 죄가 주홍과 같이 붉고 살아온 모든 비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빛나간 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우리가 당신의 품으로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시면서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속에서 그의 신실함을 노래하면서 사는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4.영원하신 기업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3:24)
오늘 말합니다. 제가 이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지자이지만 그러나 이 예레미야 애가가 시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어째든 선지자인 이 사람은 오늘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라고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장시간의 설교를 들었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깊이 젖어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고 그리고 우리 자신은 하나님 앞에 정말 희망이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또 그 신실하심 속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그 인자와 긍휼 하심으로 우리들이 진멸되지 않고 이처럼 살아서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깊이 감동을 받은 후에 오늘 선지자는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심으로 내가 저를 바라리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 의미심장한 단어, “기업”에 대해서 많이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도행전 20장을 강의하면서 몇 주전에 기업에 대해서 장시간 설교했습니다. 이 기업은 성경에서 나오는 아주 의미 깊은 단어 중에 하나이고 그리고 이 기업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성경 전편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시라’고 하는 그 흔한 고백들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원래 이 기업은 히브리 말로 “헬레끄”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할라끄” “제비를 뽑다”라는 동사에서 오는 단어입니다. 이 기업은 일차적으로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업은 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 그리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무형의 가치가 있는 명예나 재산 지위 같은 것들을 다 가리켜서 기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성경에서 이 기업이란 말이 아주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제공받고 나서부터입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스라엘 백성의 시조로 불러주셨지만 신기하게도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동안 그들에게 땅을 주시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들은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서 광야 생활을 끝낸 후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성취가 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아직 정복하지 않은 땅을 놓고 제비를 뽑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각자의 기업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기업이라고 할 때에 일차적인 의미는 땅입니다. 그 땅을 가지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기업을 누리는 삶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다변화된 산업 사회에서는 땅이 가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지 않고도 잘 살 수 있고 그리고 땅이 없어도 이런 저런 삼차 산업에 종사하면서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경 사회로 돌아가 보면 이 땅은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고 그것이 생계의 수단이었던 때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이 땅은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생명에 근원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남한도 마찬가지고 북한도 마찬가지고 경험자 유전의 원칙에 따라서 땅을 모두 배분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옛날에 몇몇 사람들이 넓은 땅을 소유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노예와 다름없는 그런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자기 땅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 땅을 기준으로 해서 땅을 통해서 사람들이 노예와 다름없는 그런 신분 관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왕이 왜 왕인지 아십니까? 왕은 그 나라 땅 전체가 임금 것입니다. 거기에 사는 식민들은 빌려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적으로 보면 이 땅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소유주이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임차인입니다. 모두 세를 들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정신만 유지된다면 환경도 이렇게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고 농경 문화사회로 들어가게 되면 이 땅을 빼앗기고 뺏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계급이 생겨나고 그리고 누가 누군가에게 삶이 종속 당하는 상황이 생겨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생겨나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운 화목의 유니티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땅에 대해서 아주 엄격한 규례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땅을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는 지파별로 줍니다. 그렇게 지파별로 나누어 가진 것을 다시 제비를 뽑아서 씨족별로 종족별로 그리고 가족별 단위로 땅을 나누어주어서 모든 사람이 다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서 붙여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지계표 사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계표는 이 땅이 누구의 땅이라고 하는 경계입니다. 그것은 침공해도 안 되고 빼앗겨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사이좋게 거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해치지 않고 서로 융화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일하기 싫어서 땅을 버리고 거지가 되어서 유리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농사를 지을 때 귀퉁이 한쪽을 남깁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그것을 따먹고 식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화목하게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 땅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을 사람들이 그대로 있지 못하고 자기가 못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탐욕에 의해서 그 땅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갑니다. 엄밀하게 보면 사용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으라고 주었는데 죽어도 농사를 짓기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그 땅을 판다든지 아니면 그 땅을 잡힌다든지 이렇게 해서 땅을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빚에 넘어간다든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누군가의 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신분상으로 낮은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행히 인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면 문제가 없는데 강포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 땅을 가지고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 나라 사회가 그랬습니다. 죽어라 하고 농사를 집니다. 주인이 칠 정도를 가지고 가고 삼 정도를 남깁니다. 삼정도 남긴 것을 가지고 가족들이 먹고살려고 하니까 곡식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춘 군기에는 그 지주에게 가서 곡식을 대여 받습니다. 그것을 먹고 그 다음에 농사를 지으면 작년에 먹은 것을 올해 갚아야 합니다. 그 빚이 늘어가면서 결국은 농사를 계속 지어서 옛날에 꾼 것에 대해 빚을 갚으면서 그 노예처럼 종속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인이 ‘너 이제 더 이상 내 땅에 붙이지 마라’하고 자르면 그러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주 비참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를 잴 때에 몇 석 지기나 천 석 지기나 만석지기나, 그렇게 해서 많은 농토를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농토를 넓히면서 종속 관계를 만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굉장히 패괴한 것입니다. 이런 식의 착취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때에 그렇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못나거나 부득이한 상황에 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때에는 안식년이면 가서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무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율법에 반드시 물러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소유가 없어도 칠 칠이 사십 구 그래서 일곱 번째 안식년 희년이 돌아오게 되면 무료로 그 땅을 모두 원주인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땅을 영구히 소유하면서 그 땅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착취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경 사회 속에서 자기의 땅이라 이렇게 말할 때 이 땅은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거기에서 그 수확을 먹으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고 그리고 자신도 그 땅을 가지고 있어야만 자기에게서 태어나는 미래의 후손들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우리 조상의 삶의 기반인 동시에 내가 살아있는 기반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후대에 태어날 수많은 후손들의 삶의 기반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업을 단순히 먹고사는 한 양태로 보기보다는 성경에서는 이 기업을 생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속에서 이 땅의 문제가 넓게 대두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 안에서 거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신약시대에 완전한 안식과 구속의 모형입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 시인을 비롯해서 다른 많은 시인들이 혹은 선지자들이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오 주는 나의 기업이시라”라고 부를 때 그렇게 고백할 때의 그 고백은 굉장한 고백입니다. 단순히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분이십니다.’라고 하는 일상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심이니다”라고 하는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존재는 상상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 없는 제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고백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고백은 굉장한 고백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내 땅입니다. 쉽게 줄이면 ‘하나님은 내 땅입니다. 여호와는 내 땅입니다. 여호와는 내 기업입니다.’ 그 고백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내 조상과 나와 그리고 내 모든 후손의 생명의 근거입니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땅은 풀 한 포기 심을 수 없는 악산을 기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땅을 나두었다가 상업적으로 가치가 올라서 팔면 그 땅을 팔아서 차액을 얻는 것이 기업이라고 하는 이런 사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도 보면 어른들이 쭉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면 요즘 같은 때는 그것이 꼭 통하는 공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논을 팔아서 장사하고 집을 팔아서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기억나시지요. 그만큼 땅과 사람은 일치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에레쯔”라고 하는 땅이라는 단어와 “거민” “주민들”이라고 하는 단어가 “에레쯔” 같은 단어입니다. 그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흙에서 취한바 되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왜 땅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하면 땅은 풀 한 포기 심을 수 없는 악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심으면 곡식을 많이 맺는 농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업이라고 그럴 때, 그리고 물을 흘려 보내주는 그런 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땅을 그렇게 기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땅이 소출을 많이 내줍니다. 그 수확으로 자신들이 살고 후손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어떻게 ‘여호와는 내 땅입니다. 여호와는 내 기업입니다.’ 이렇게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는 분도 아니고 땅도 아니고 곡식을 소출 할 수 있는 토지도 아니지만 그러나 인간은 땅에서 나는 곡식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을 기업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제공을 받으면서 사는 존재들이고 인간 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 의존적인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이 기업 사상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자신이 기업이라고 하는 사상을 비유적으로 잘 함축해서 예수님께서 쉽게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탕자의 비유는 아주 굉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이아몬드와 같아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아주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그 중에 한 면을 제가 오늘 보여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여호와의 기업 사상과 탕자의 비유가 무슨 연관이 있는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두 아들이 살았는데 한 아들은 큰아들이고 나중에 태어난 작은아들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착실하게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는 법이 없이 그저 농사를 지으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그래서, 달라고 그런 게 아니라 사실 빼앗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그리고 굶어죽을 지경이 되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세상 말로 기어들어 온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하면 돌아올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큰아들이 누구의 비유인가 하면 좁게 보면 그 당시의 하나님의 율법대로 산다고 자부하던 도덕적인 종교적인 그 시대의 유대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그리고 탕자는 창녀와 세리와 같은 그 시대에 예수님 가까이 구원을 경험한 부도덕한 구원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좀더 확대해 보면 그 큰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 돌아온 탕자는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묘미가 있는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나간 것도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허랑 방탕하게 다 날려버린 것도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그 둘째 아들은 비난받아 마땅한데 그런데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작은아들은 허랑 방탕하게 모든 제물을 허비하고 나중에는 굶어죽을 지경이 되면서 어떤 고백을 하게 되는가 하면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 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말하리라.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품 군중의 하나로 여기소서”
이게 언뜻 보면 배고프니까 양식이 넉넉한 일군들이 생각났구나.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일군이 많은고 할 때에 그 풍족한 이유가 아버지의 인자한 성품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잘먹고 사는 일군이 아니라 그들과 자비로운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혜택을 누리게 하시는 아버지의 성품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뜬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가 하면 옛날에 자기 자신이 그 아버지에게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품 군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런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아버지와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생각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그 행복과 기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탕자의 비유를 순전히 먹는 것을 가지고 해석을 하는 것은 복음의 빛을 가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큰 환난과 어려움을 만나 그래서 돈도 다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게 되면 그러면 물론 다 먹을 것이 떨어지니까 배가 고프니까 죽을 지경이지만 사실 그것보다도 더 밀려오는 것은 서러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배고픈 서러움’이라고 말합니다. 배고픈 것은 육체적인 것이고 서러움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이게 자기가 가난하다가 보니까 넉넉하고 보면 그런 서러움이 없는데 돈이 없고 배고프고 보니까 정신적인 서러움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라도 있으면 먹으려고 뒤지다가 없어서 그 돼지우리 바닥에 엎드려서 통곡하며 우는 그 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단지 한 조각의 빵이 없어서 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관계를 다 잃어버리고 이렇게 홀로 외톨박이가 되어서 나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나를 도울 자가 없는 상황이 된 것에 대한 깊은 서러움이 그 배고픈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해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하면 자기는 이미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 끊어졌는데 아직까지도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품 군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이 인자하면 무엇을 하나 시켜도 한푼 더 줍니다. 그런 풍부함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을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은총이라도 받으면서 비껴서라도 그 은총에 작은 빛이라도 받으면서 살면 좋겠다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기업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자신에게 기업이 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방인들이 그 깨달음이 있고 그 기업의 행복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탕자가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당시의 창녀와 기생들은 도덕적으로 정말 비난받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나 그런 유대인들이 이 사람들보다 훨씬 정말 도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받는 비난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도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이 창녀와 기생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부도덕하고 더러운 정죄 받을 삶을 살았지만 무엇을 알았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예수를 믿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다 걸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붙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회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의 집에서 다 산 것입니다. 그런데 고단하게 일을 하고 돌아오는데 막 잔치 소리가 들리고 고기를 굽는 냄새가 나서 이게 뭐냐,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왠 잔치냐.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합니다. 그때 이게 치솟은 것입니다. 확 뻗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아버지께 따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버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내가 일평생 아버지께 순종하고 일했지만 닭 한 마리 잡아주신 적이 없더니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다 먹어버린 저 자식에게 송아지를 잡고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반지를 끼워요. 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그러면서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땅바닥을 치며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큰아들하고는 대화가 안 통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거늘, 그렇지만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느니라.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무슨 이야긴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은 이 큰아들에게 있어서 하나도 행복이 아닙니다. 그냥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일하고 시키는 대로 하지만 그러나 한번도 아버지 때문에 행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반대입니다.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거니와.....” 무슨 이야기입니까? 자기가 아들과 함께 같은 집에서 동거하며 사는 것이 큰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복이기를 기대했고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곁에 그렇게 있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못된 아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선명하게 우리에게 어떤 한줄기 빛이 아닙니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에 대해서 그렇게 아주 치열하게 우리들이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잘 나오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까? 가끔 빠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 나옵니다. 꾸준한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주일 학교 선생도 하면 한 10년을 해야지. 그렇게 한 7년하고 안식년 이렇게 해야지. 이게 뭐 6개월, 1년 허덕허덕하고, 꾸준한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한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꾸준한 것만 있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감격이 없다면 차라리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와서 진심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기업이라는 사실에 감격하며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 살리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훨씬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모태 신앙인데 도대체 하나님이 계신 것도 같고 안 계신 것도 같고 그래서 아무래도 해결의 길이 없어서 세상으로 한번 나가볼까 합니다. 그래서 많이 방탕한 후에 감격을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이지 나간 탕자가 모두 돌아온 탕자가 아닙니다. 영원히 간 사람도 많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기업 사상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 은근과 끈기로 버티는 직분, 그런 것들이 그런 자체만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감격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행복,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 자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라는 이런 진실한 고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이다”라고 하는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이 훨씬 더 많은데 그것 보다 드물기는 하지만 그러나 또 동일하게 나오는 하나님의 고백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내 백성들이 나의 기업이라” 여러분들도 자식을 낳으면 나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그 기업이 자꾸 기업 주인을 고달프게 해서 그렇지 어째든 기업은 기업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이 거기 계심으로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한없이 감격하듯이 하나님도 구속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인해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없는 창조의 세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비유를 하면 아주 적합하겠습니다. 애들이 어디로 여행을 갔습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수 십억의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150평 아파트를 사고 그렇게 떵떵거리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부모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것이 무슨 가정이겠습니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 주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없는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있음으로서 이 창조의 세계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피조의 세계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요? 누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주님을 찬양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인간이 거기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찬미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인간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나 같은 쓸모 없는 인간을 하나님 자신이 기업으로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자신도 그 하나님을 기업으로 기뻐하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기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그 연합의 관계, 이것이 신앙의 진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의 응답 말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 말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신앙으로 살면 축복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전망 말고,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 구속의 사랑으로 나와 하나님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이런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그때 우리는 다른 어떤 조건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것 때문에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이다”라고 하는 찬송을 부르는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물질과 보이는 것들에 의존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안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의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행복감이나 기쁨들이 싸늘하게 식어버립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실하지 않습니다.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로 앞부분에서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우니 즉 주의 자비와 긍휼히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심이니이다”라고 감격 어린 고백을 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조건들 때문에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정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동일하게 항상 때로는 우리가 순종하고 주의 뜻대로 살 때 당신의 기쁨을 보이시고 우리들이 죄와 불순종 가운데 걸어갈 때 주님이 아파하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를 당신의 기업으로 여기시고 그리고 그 기업을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실하심, 즉 신실하심에 대해서 찬송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를 비롯해서 우리들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우리 인간을 그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라고 찬송하실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관계 개선이 필요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셔도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 그리고 긍휼을 충분히 경험하고 느끼고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업이 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업 자체가 아니시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모든 기업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고되어 있는 이런 수많은 하나님 자신에 기업에 대한 사상, 이런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쉼과 축복, 안식과 구원,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은 모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그 진노 아래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우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데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여호와는 나의 기쁨이오 하나님은 나의 즐거움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본성 상 하나님을 거스르고 그 하나님과 대적하며 살아서 주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었던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심으로 두려워하는 대신 기뻐하고 하나님의 면전에 살므로 공포에 떠는 대신 행복해할 수 있는 놀라운 관계의 변화가 어떻게 왔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온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육체를 깨트리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휘장을 찢고 피를 흘려서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피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서 원수 되었던 하나님,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죄 때문에 도저히 기업으로 여기며 살 수 없었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행복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인간의 참된 행복의 근원을 화해로 찾게 해주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 십자가로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의 기업이라도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셨다면 우리는 그 기업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 자신으로 말미암은 행복, 이것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고 그 고백이야말로 최상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 말고, 그것 말고 매일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행복,
우리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은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해
우리와 같이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명예, 안일함과 즐거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의 기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행복이고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면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큰아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경험,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시고 내가 주님의 기업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없이 행복해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며 신앙의 진수입니다.
(?)구름과 안개, 그리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검은 먹구름들이 수시로 하늘의 태양을 가립니다. 그러나 거치고 나면 거기에 변함없이 찬란한 태양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 그런 신비함을 느낍니다. 막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와서 장대비가 퍼붓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뜹니다. 비행기 창으로 빗방울이 몰아칩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하얀 구름 속으로 들어가다가 그 다음에는 잠시 후에 아주 새카만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야 이곳이 별세상이구나! 그런데 잠시 후에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그때는 검은 구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털과 같이 하얀 구름이 찬란한 태양이 빛을 발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찬란한 태양, 한번도 빛을 잃어본 적이 없는 찬란한 태양이 비치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했습니까? 외롭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주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는 먹구름을 지나고 있는 동안입니다. 솟아올라보십시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찬란한 그것을 시인이 본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이 구속의 은혜를 한없이 찬송하는 것도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지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 속에서 입증하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기업 삼으신 것입니다. 정말 좀 감격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살기 싫은 결혼 생활, 어거지로 하는 것, 혹은 얻어 터질까봐 할 수 없이 눈치를 보면서 물통 지고 거름통지고 들판으로 나아가는 이 첫째 아들처럼, 이런 신앙생활이 오늘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의무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기업을 삼으시려고 약속을 따라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그 피로 나 같은 인간을 구속하셨습니다. 오늘 다른 사람들은 나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고 희망이 없다고 말해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요 그리고 언제든지 돌아가서 그 하나님의 품에만 안길 수 있게 만들어주신 이 기업의 관계, 그것을 한없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 감격에 넘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이 교회입니다. 이 감격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이 세상에 먹고 입을 것들, 잠시 후면 부스러져 사라질 이 세상에 있는 재물에 덩어리들을 붙들고 이것이 인생의 기업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보다 더 뛰어난 참 기업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죄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식과 허위, 위선 그리고 이 세상에 세속적인 풍조가 가르쳐준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신앙생활에 껍질들을 벗겨내면 이런 복음의 속살이 나옵니다. 아,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듯한 성실한 교회생활로도 전혀 주님의 마음에 끌지 못하면서 수 십 년 동안 살았는데 내가 오늘 한순간에 내가 얼마나 죄인인줄을 알고 그리고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내 마음이 깨트려질 때에 주님의 시선이 나에게 모아집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 관계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누리며 그 기업 자체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나라는 이방인에게 빼앗기고 도성은 짓밟혔습니다. 수많은 시체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나뒹굴고 말발굽 아래 짓밟혀서 성전이 유린당했습니다. 곳곳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하나님이 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업이 된다고 하는 증거가 상황적으로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파죽지세로 적군들을 쳐부수고 영토를 넓혀가고 이스라엘의 깃발을 높이 펼쳐드는 때라면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눈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니 하나님의 도움은 끊어진 것 같고 나라는 불탔습니다. 아름다운 성은 짓밟혔습니다. 그 선지자가 가슴이 터지는 감격으로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십니다”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불탄 것도 사실이고 동족이 죽임을 당하고 성전이 유린당한 것도 사실인데 여기에서 눈물을 씻고 나니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이 관계,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이 징계는 하나님이 이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그런 애정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타는 도성 한가운데서도 이방인의 말발굽이 짓밟아버릴 수 없고 이방인의 군대들이 파멸할 수 없었던 한가지를 보며 즐거워하는데 그것은 여호와가 내 하나님이시며 내 기업이고 우리 민족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이 관계를 창칼로 도저히 없애버릴 수 없었던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우는 두 번째 선명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기업 되심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신앙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안 되는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돌아봐도 입증이 되는 것은 우리들이 잘먹고 잘살고 복 받을 때에 가장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도 너무 잘 아는 일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경험, 또 우리 자신이 경험에 의하면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주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재산도 없고 명예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나의 친한 친구들이 발꿈치를 들고 나를 대적으로 삼을 때,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산 경험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한 25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27년 정도 신앙 생활을 했지만 전 이것은 분명합니다. 환경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상황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큰사랑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이 다 있는 데도 핍절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환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환경 그것 하나에만 달린 것은 아닙니다.
이 선지자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기업 되심이 어디에 나타났습니까? 다 파괴당하고 이방인들은 조롱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이제 버리셨다. 이럴 상황인데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관건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사람들, 폭풍이 몰아치고 시련의 칼바람이 부는 광야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나를 홀로 두시지 않으시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이 축복으로 주신 한없이 좋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방종하게 살아가는 막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폭풍우 흑암 속을 지나는 가슴 졸인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주님과의 평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계의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은혜 안에 살 때에 이런 감격과 관계에 대한 확인이 가능합니다. 은혜 안에 살 때에 그렇습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을 핑계를 삼으며 하나님과의 부실한 관계를 위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은 신앙의 감격이 있을 리가 막무입니다. 정말 신자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입니까? 신자의 참된 행복이 어떤 것입니까?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아래 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 전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래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을 이 세상에서 잠시 낙을 누리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신앙,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경과는 상관이 없이 그것을 능가하여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필요한데 이 선지자가 바로 그런 일의 증인인데 어떻게 하다가 이 선지자가 그런 행복을 느끼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 자비와 긍휼히 무궁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신실하게 대해주신다는 사실에 눈뜰 때에 환경을 뛰어넘는 감격 속에서 주님의 주님 되심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껏 까지 살아온 우리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이 은혜라고 하는 증거들입니다. 매순간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그 이후는 물론이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도 세밀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에 발걸음을 하나하나 인도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 하나하나 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한 진정한 간섭하심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의 빛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변절하고 그리고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주님의 명예보다 자신의 영광을 선택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예화: 어느 소설의 내용-어느 아버지가 재산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산을 모두어려운 사람 들에게 나누어주고 아들에게는 언덕에 있는 작은 밭을 주고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화가 나 서 밭에 씨앗을 내던지고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다 잃은 채 고향으 로 돌아와 언덕에 있는 밭에 올라가니 무성하게 자란 밀밭의 변한 모습을 보고 아버지 생 각을 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땅과 같습니다. 언제든지 거기에 계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은 마치 생각도 없고 말씀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우리가 주님을 떠날 때든지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진심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기다림이 아닙니까? 어느 순간에 번쩍 하며 비쳐오는 진리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것과 기업 되신 주님을 버리고 살아가는 인생에 허한 에 대해서 깨닫고 깊이 회개하면서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우리가 떠났지 하나님은 언제나 땅처럼 거기에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지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서 기다리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 고백을 받아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인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시고 주님이 구속받은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는 것처럼 당신이 또한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신앙은 그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행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처럼 여러분 자신의 기업이시고 여러분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분 전 인생과 여러분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업이십니다. 영원히 기업이십니다. 원수도 이 세상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업입니다. 이 하나님 자신의 기업 되심을 인해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이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히 소망을 걸고 그 분을 바라보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5.자기를 찾는 자에게 선하신 하나님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애3:25)
이어서 선지자는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혹은 자기를 찾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선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고있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여호와는 선을 베푸시는도다”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히브리 성경에는 ‘토브 야훼’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대로 야훼 즉 여호와는 ‘선’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자에게나 찾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선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통해서 이 선지자가 하나님이 선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나라는 빼앗겼고 성은 무너졌으며 성전은 유린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이 선이시라고 하는 사실, 주님께서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이처럼 노래할 수 있었겠는지 우리는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선이라고 하는 낱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한번 생각하고 넘어가야만 성경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선을 발견할 때에 우리들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의미들을 마음에 전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선이라고 하는 말은 그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 선은 하나님의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에 가지고 계신 전체적인 계획을 이루어 가는 한 단계 한 단계로서의 그 선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시지요? 쉽게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에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시니까 빛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에 그 “좋았더라”가 “토브”입니다. 여기서 쓰여진 단어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좋았을까요? 원래 땅이 어땠습니까?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 암의 깊은 위에 있는 흙과 물 모든 창조를 위한 재료들이 혼합된 가운데 있는 아주 혼돈스런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 위에 빛이 비쳤습니다.
빛이 비치면서 모든 것들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에 그 모습은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우리들이 우주에 탐사 선을 보내었을 때에 그 위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황폐한 그런 지구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거기서 만약에 우리들이 보았더라면 우리는 좋았더라고 말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이 창조해 가시면서 좋았더라, 좋았더라 하셨는데 그것은 결국은 하루 창조한 것이 흡족하고 “좋았더라”는 의미도 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6일 동안에 창조를 통해서 마지막에 만들고 싶은 이 세상이 마음속에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첫 시작이 무엇인가 하면 빛이었고 그 다음에 뭍이 드러나는 것이었고 등등... 이렇게 하나님께서 한 단계 한 단계 창조해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를 모두 끝내셨을 때에 마지막에 인간까지 창조하신 후에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림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창조해 가시면서 그 하나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통해 그의 또 다른 계획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시면서 전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날 수 있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한 단계 한 단계를 보시면서 “좋았더라, 선하였더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은 “선이시다”라고 말하는데 성은 무너졌고 성전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짓밟혔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한 상황이 아니라 가장 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선지자는 오히려 하나님이 선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커다란 마음에 일어났던 새로운 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장에서 자신이 이미 민족을 향해 예고했지만 예고된 대로 나라가 망했을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끝나지 않은 간섭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즉 범죄하고 타락한 자기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간섭하셔서 그들을 책망하고 꾸짖고 징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주 정확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그렇게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오늘날 당하고 있는 이 커다란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불붙는 확신을 갖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는 나라 최대의 불행스런 상황, 재난과 환난을 당한 이 상황 속에서 오히려 여호와는 선이시며 그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에게 악을 베푸실 수 없는 분임을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선에 대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약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오늘 곤궁한 중에 있고 우리들이 시련을 당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그 시련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는 잘못이 없는데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고통을 지불하고 있거나 혹은 우리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책망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 속에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선하심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요셉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고 상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고백합니다. 그대들은 나에게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의 악을 내게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형들의 모함을 받아서 이제 버림을 받고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팔렸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이국의 땅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흉년이 되어서 온 세상이 굶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과 형통한 사람으로서 대비책을 세워 수많은 인류를 구원하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요셉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라고 할 때에 그 선은 마지막에 국무총리가 되어서 출세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형들에 의해서 팔려서 노예로 끌려갈 때 그것은 결코 선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흉년으로 굶어 죽어 가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는 요셉이 필요했고 요셉이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굽의 국무총리를 삼으셔야 했고, 그가 그렇게 국무총리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왕의 인정함이 있어야 했고, 왕이 그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왕에게 그를 천거해주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통한 능력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옥되어야 했고 투옥되기 위해서는 모함을 받아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모함이 필요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그 집안에서 모든 종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있어서는 안 되었고 주인의 집안을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지위가 필요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그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총무로 삼으시는 일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총무가 되기 위해서는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성실하게 자기 일들을 감당하고 하나님이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그 집의 종으로 팔려와야 했고 종으로 팔려오기 위해서는 상인들이 필요했고 상인들에 의해 끌려오기 위해서는 형들이 그를 파는 일들이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그 선하심이 우리의 인생 속에 경험되기 전에는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살아가기 전에는 주님이 선하시다 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는 없습니다. 사랑과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언제든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바뀌는 것은 그 사랑을 여러분들이 알 때에 여러분들의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언제나 사실인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고 나면 하나님이나를 회개하는 그 순간에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전부터 나를 사랑하셨지만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면서부터 그 사랑 때문에 이제 나의 인생이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주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선하신 분이시지만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경험하고 그 선하심을 의뢰하면서 살 때에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형들에 의해서 팔려서 사랑하는 가정을 등지고 통곡하면서 노예로 팔려갈 때에 그것을 선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노예 종살이를 하다가 성시하게 주님께 하듯이 종살이를 했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 속에 갇힌 것, 그것을 선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마음속에 그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신앙이 없었더라면 한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믿음을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슨 믿음인가 하면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고 형들의 곡식 단이 모두 일어서서 자신의 곡식 단에 절하는 그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기억하면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종적인 종착역은 아닐 것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지금은 형들에게 형들에 의해서 팔려서 소망이 없는 노예로 끌려가지만 이것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형들의 곡식 단이 일어나서 내 곡식 단에 절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종으로 팔려 가는데 어떻게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 이루어지고 형들이 자신에게 꿇어 경배하는 일들이 일어날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러나 이렇게 내가 노예로 팔려 가는 이 상황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그 큰 궁극적인 꿈을 그 선을 이루는데 기여할 것이다라고 굳게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 전체를 보면서 우리가 큰 감동을 받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선 크게 원망할 사람들이 셋이 있었습니다. 우선 누가 있었습니까? 자기를 팔아버린 그 형들, 우리 한국식 격렬한 표현으로 하자면 갈아 마셔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표현은 참 화끈합니다. 그것을 누가 영어로 표현해보십시오. 갈아 마셔도 시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또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여자가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사랑을 했는데 남자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니까 그만두자고 했으면 가슴속에 묻어두고 간직하고 사랑해야지 자기가 겁탈하려고 그랬지 언제 요셉이 겁탈하려고 했습니까. 그렇게 놓고 그 사람을 감옥 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끌려가면서 ‘저 여자가 죽일 여자다’ 그리고 그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 장과 떡 맡은 관원 장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꿈을 꾸고 근심하기에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떡 맡은 관원 장은 소망이 없고 술 맡은 관원 장이 소망이 있는데 당신은 복직이 된다. 그리고 왕을 다시 섬기게 될텐데 내 이야기를 해달라고 그럴 때 저 같으면 제일 먼저 해야할 핵심적인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그 보디발의 아내의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왜 그것을 이야기를 해야지 누명이 풀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합니다. 그러면서 단 하나 덧붙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끌려와서도 나는 옥에 갇힐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 여자를 생각하며 감옥 속에서 이를 갈았더라면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안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그 꿈을 해석해주고 그대로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뒷간에 들어갈 때 마음이 다르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그때는 그것을 해석해준 요셉을 보면서 막 너무 감사하면서 그대를 내가 꼭 기억하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서 왕에게 복직을 하고 다시 부귀 영화를 누리고 나니까 감옥 속에 있었던 히브리 녀석을 새카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렸기보다도 모처럼 복직을 했는데 왕에게 가서 그 감옥 속에 그 히브리 종 하나가 있는데 그 사람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사실 바보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부러 안 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친구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사람입니다. 왜 그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이를 갈았어야 했는데 그 사람을 원망하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랬는데 그 후에 왕이 꿈을 꾸고 깊은 번뇌에 사로잡혔을 때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히브리 사람, 청년 요셉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때 나이가 30세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애굽의 문헌이 발견되고 나니까 당시에 나이 30은 공직을 담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정 연령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전에 이 사람이 나왔다고 할 것 같으면 다시 노예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2년을 더 기다린 것입니다. 후에 이 사람이 애굽의 국무총리로 발탁이 된 것입니다.
이 요셉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씹히면서 고통을 당하면서 사람들 때문에 인생 전체가 시궁창에 박히는 것 같은 고통스런 상황을 살면서도 일체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상처의 사람이면서도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선을 믿는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난 지금 내 신앙의 정절을 지켰는데도 저 여자에 의해서 모함을 받아서 이 감옥 속에 처박혔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당하도록 내버려두셨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향한 궁극적인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라고 하는 신앙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왜 그게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가가 관심사가 아니라 지금 그렇게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선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 우리들이 생각해볼 것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선을 베푸시는가.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섭리 속에서 궁극적으로 내 인생을 향한 계획을 성취하심으로서 선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셉이 경험한 불행한 사건 하나 하나가 모두 궁극적으로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만드셔서 굶주려 죽을 수많은 이 땅의 인류를 구원해내시는 하나님의 그 선한 계획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한 계단 한 계단이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신자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구원해놓으신 계획이 있으십니다. 아무리 사람들 보기에는 초라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그 은혜 주시는 것을 통해서 마지막에 꼭 이루고 싶어하시는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 계획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으셔서 우리를 거기로 우리들을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획을 이루심으로서 우리에게 결국은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런 길로 이끄셨구나 그것을 우리들이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고백하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향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한 단계 한 단계에서도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기만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심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그런 기쁨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런 이야기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팔려서 보디발의 집에 끌려와 견디기 힘든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그가 인내하는 이유에 대해서 창세기 39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요셉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은 성취되지 않은 미완성의 상태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그에게 큰 위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신기하게도 고난을 많이 당할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마치 고통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된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교통의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임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요셉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 자신에게 있는 내면의 세계가 신령한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인격과 그의 삶 속에서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선을 의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시련과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고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거기에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난이 오고 시련을 당하고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상황이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하나님과 만남이 있고 그 거룩한 교제에서 오는 기쁨이 있으면 우리는 상황을 초월하는 신앙으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선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백 번 양보해서 우리들의 지금 상황이 고통스럽고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시련 속에서 괴로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고 칩시다. 그래도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이 예루살렘을 한번 보십시오. 파괴당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유린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고난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하면 쉽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데 그 이유는 현실에 너무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대해오셨는지를 한번 상기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환난 이런 재앙이 오기 전에 끊임없이 상기시켰던 것이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떤 능력과 편 팔로 건져내셨는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홍해를 갈라 광야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리고 신발이 헤어지지 않게 의복이 낡아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 수많은 백성들을 굶주리시는 법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도해오셨는지를 상기시키셨습니다. 수많은 선진 민족들이 강력한 요새와 발달한 병기로 지키고 있는 그 땅을 어떤 하나님의 능력으로 몰아내시고 하나님이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는지를 상기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이 가나안에 정착해서 한 나라를 이루기 전까지 나라를 이룬 그 후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와 긍휼을 양식으로 삼으면서 그 백성들이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불평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아픔들이 있지만 그러나 한번 지난날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어떻게 인도하셔서 오늘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슨 악을 행하셨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불의한 일들을 행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을 억울하게 하시고 여러분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신 적이 있습니까? 여기 수많은 죄와 지속적으로 거스르는 불순종 가운데서 살던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신 날들을 돌아보면 우리는 주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 한번 조용히 무릎을 꿇고 이런 고백을 해보십시오. ‘하나님 주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내 일생을 다 돌아보아도 주님과 같이 제게 은혜를 베푸신 분은 없습니다. 죄와 불순종을 은혜와 용서로 갚으시면서 주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자비와 긍휼이셨고 우리는 반역과 불순종으로 일관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알게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양식이 물과 떡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과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해오셨습니다.
우리들 중에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한때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향해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같이 하나님 앞에 흉악한 죄인이 이런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도 괜찮은지 하나님께 묻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한 증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과거의 고백이 오늘 우리를 향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을 우리의 입으로 고백했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에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잔멸되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침체의 늪에서 혹은 죄악의 구덩이에서 헤맬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에서 낙인을 찍으시는 대신에 회복의 소망을 주시고 지금은 비록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 살지만 주님께서 거기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확신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그 선하심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선지자는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유린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히 무궁하시다고 하며 주님의 선하심을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이 선지자보다는 나은 상황에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그 이후로부터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행한 악한 일에 대한 결과도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들로 사용하셔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오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산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시적인 잘못과 과오를 가지고 우리를 영원히 징벌하시는 대신에 침체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회복의 기회를,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다시금 계시의 빛을 받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죄 범한 영혼들에게는 용서의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핍절한 사람들에게는 다시 충만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영혼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날마다 확인합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아무 희망이 없던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들조차도 이제 저 영혼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무슨 회복의 여망이 있을까 라고 낙담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개케 하시고 그들을 다시 뜨거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그렇구나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히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것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우리들이 인간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명백하게 주님을 거스르고 완악해져서 진리를 대항하고 있는데도 우리들은 진리를 거스르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분노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길인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한데 저렇게 진리를 거스르고 그분을 대적할까 생각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사는 악한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즉시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한때는 그렇게 악독하게 주님을 거스르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와 그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래서 예전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버리고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과거의 선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헛된 욕망을 버리게 만들고 좋으신 우리 주님을 향한 불 신앙을 씻어버리도록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선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우리들을 향해서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여러분들이 모두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하심을 우리 자신이 깊이 믿으면서 그러면서 주님이 선하신 분으로서 우리와 같은 인간을 향해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감격하며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난 이 세상에 아무 쓸모 없다고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인생이 얼마나 황량하고 슬픈 인생이 되겠습니까? 난 하나님 앞에 소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서 미천하고 하나님 앞에 쓰레기 같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사노라면 주님이 내가 아니면 이루실 수 없는 계획이 있다라고 믿으면서 사는 사람,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런 선을 누구에게 베푸시는지를 말합니다. 기다리고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고 되어 있는데 앞에 나와 있는 “기다리는 자”는 히브리 성경에 복수로 나오고 그리고 “구하는 영혼에게는” 단수로 나옵니다. “기다리는” 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에 히브리어는 “까봐”라는 단어인데 이사야서에서 “앙망하는”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운명에 맡기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향해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고대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뒤에 나오는 구하는 자에게는 “다라쉬”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추격하다는 뜻입니다. “추적하다, 따라가다”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기다리고 구하는 자에게”라는 것을 설명하자면 앙망하면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앙망과 추구의 대상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 하나님 자신을 앙망하고 그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을 베푸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중대한 하나의 의문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을 제기하게 됩니다. 즉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당하고 있는 불행을 한번 생각해보면 이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 나라는 망했고 성전은 유린되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 이가 울고 있고 통곡하고 있는 이유도 언약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무너졌기 때문이고 나라가 국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도록 성전의 문은 닫혔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은 바벨론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우국지사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의병을 조직하고 나라를 해방시켜줄 투쟁의 일군들을 규합하고 그들을 엮어서 나라의 광복을 위해서 투쟁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무너졌으면 그는 아마 속히 건축헌금을 해서 성전을 수리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나라가 망했고 성전이 부서져서 통곡하며 울던 선지자였지만 선지자가 진정으로 찾고 싶었던 것은 이 세상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나라가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어도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을 찾고 추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우리가 당하고 있는 불행과 견디기 힘든 고통의 대부분의 원인이 우리의 상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잘못된 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고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고난과 시련에 처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부지런히 애쓰고 몸부림치지만 그러나 그 몸부림은 너무나 절망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늪 속에 빠진 사람이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야 마는 것처럼 또한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인생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환경과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에 지난날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전에도 우리들이 시련을 당하고 곤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힘겨워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그 눈물겨운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서 광활한 평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온통 힘을 내어서 이제껏 까지 나를 불행하게 만들던 사람들을 처단하고 그리고 내가 고통받던 물질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로 하여금 이처럼 불행하게 만들던 상황들을 개혁시키고 나서 우리들이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문제들에 둘러 쌓여서 숨쉴 수 없는 인생에 괴로운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자신이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이 상황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자기가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이렇게 고통스러운 처지에 있게 된 것은 자기가 뭔가 핵심적인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는 내 인생을 이처럼 시련 속에 몰아넣은 사람들과 씨름하는 끝도 나지 않는 그 신물나는 일들을 버리고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 라는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구하지만 상황은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놀랍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 속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선지자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 자기를 앙망하고 하나님 자신을 전심으로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신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놓여진 상황, 여러분들이 고통받고 있는 위기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이 가르침대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리고 이제껏 까지 방향도 없이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과 팔자를 원망하면서 살던 끝이 없는 그런 지루한 싸움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 인생을 살 때에 손뼉치는 피조물은 마귀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시련과 곤고함과 고난이 여러분들의 죄와 불순종을 인해서 당하는 것일지라도 괜찮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고치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와서 정직하게 오늘날 내가 당하고 있는 이 큰 고난과 그리고 큰 시련은 나의 죄와 그리고 불순종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상황과 씨름하면서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진전이 없습니다. 이제는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데로 제가 하나님을 찾겠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간에 우리가 간절히 찾아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우리들이 고난 속에서 회개해야 할 죄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며 살지 않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을 앙망하면서 살지 않았던 우리의 죄,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면서 살지 않았던 우리의 많은 허물들을 고백하면서 주께서 주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것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주님을 찾고 주님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지워버릴 수 없는 특징이 되도록 살겠습니다. 그런 고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 오는 길이면 꼭 철공소 앞을 지났습니다. 그러면 꼬맹이들이 집에 가는 길이 쭈그리고 앉아서 아저씨들이 철물을 가지고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라고 하면서 야단을 맞으면서도 안 가고 쪼그리고 앉아서 보는데 우리들이 제일 신기한 것은 산소 용접이었습니다. 커다란 통에서 가스가 나오면 라이터 불로 불을 붙이면 ‘쉭’ 하고 불길이 솟기 시작합니다. 불길을 조절해서 작게 만든 다음에 커다란 쇳덩이에 댑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안경을 낀 그 아저씨가 한참동안 그것을 대고 있으면 이윽고 그 새카만 쇳덩어리가 불꽃 닿는 그 부분에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그 부분이 아주 눈부신 빛을 발합니다. 그러다가는 잠시 후에 그 단단하던 쇠가 물처럼 녹아 내리기 시작하고 구멍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줄을 따라서 서서히 이동하면서 망치로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쇠를 잘라내는 광경을 봅니다.
모 천으로 회기 하는 연어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북태평양까지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모 천으로 돌아옵니다. 모 천으로 돌아올 때에 대양을 지나면서 자기를 삼키려고 하는 수많은 커다란 물고기들의 추격을 피합니다.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노라면 커다란 폭포가 있습니다. 바윗덩이에 몸을 부딪치면서 폭포를 거슬러 개천을 오르고 개천을 지나갈 때쯤이면 강태공들이 드리운 낚시바늘의 미끼가 유혹하지만 뿌리치고, 뿌리치고 자기가 태어났던 그 모 천을 향해서 회기 합니다. 떠날 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에 더러워진 개천의 오물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태어난 모 천을 향해서 회기 합니다. 무엇으로도 자신의 모 천을 향해서 회기 하려고 하는 그의 추구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기 때문에 당하게 된 시련과 큰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 우리들이 정말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전심으로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추구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마음속에는 선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감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주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고 그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그 하나님을 닮으며 그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고 싶은 일들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상황이 어떠하든지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추구하고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성실하신 하나님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