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2019년 주일오전)
설교기간|2019년 7월 14일- 9월 8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20년 2월 4일
목 차
설교프레임
1. 하나님의 요구(신 10:12) 2019.07.14 주일오전 1
2. 누구를 위한 명령인가(신 10:12-13) 2019.07.21 주일오전 8
3. 주님의 기쁨과 선택(신 10:14-15) 2019.07.28 주일오전 14
4.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신 10:16) 2019.08.04 주일오전 21
5. 하나님 여호와를 알라(신 10:17) 2019.08.11 주일오전 29
6. 정의를 행하심(신 10:18) 2019.08.18 주일오전 38
7. 사랑을 베푸심(신 10:18-19) 2019.08.25 주일오전 45
8. 마지막 당부(신 10:20) 2019.9.01 주일오전 52
9. 찬송 받으실 하나님(신 10:21-22) 2019.09.08 주일오전 61
<설교 프레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1 2019. 7. 14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의 요구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신 10:12)
I. 본문해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시내산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하였다.
첫 번째 돌판을 우상숭배 현장에서 던져 깨뜨려버렸다(신 9:17).
격노한 죄를 깊이 회개하며 다시 40일을 금식하였다(신 9:18).
두 번째 돌판을 갖고 올라가 십계명을 다시 받고 법궤를 만들었다.
주님은 모세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예고하셨다.
그 사건을 회상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요구를 일깨웠다.
II. 하나님의 요구
A. 두려워함
히브리어 “yareh”의 원뜻은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그분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이는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두려움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는 데서 온다.
인간과 비교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심을 알 때 두려워하게 된다.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렸음을 인식하게 된다.
예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거룩한 두려움이 없을 때 인간은 보이는 세상에만 빠져서 산다.
그런 인간에게 높으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말씀이다.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혜를 받고, 거룩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우주의 일부이며, 시간적으로 유한한 존재다.
모든 사물처럼 사라질 것이며, 시간 흐르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만물 위에 영원한 하나님이 계심을 알라. 두려워하라.
B. 도를 행함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Hebrew “그의 모든 길에서 걸어가며”
“길”(derek)은 제유법적 표현으로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뜻한다.
주님은 살아야 할 길을 계시하시고, 인간은 그 길로 행해야 한다.
a.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신 삶의 도리.
b. 그 길로 행함으로써 인간이 행복하게 됨.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 107:10-11)
이 도리를 따라 삶으로써 하나님 자녀로서 독특한 인생을 산다.
그러한 삶으로써 세상이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C. 사랑함
“그를 사랑하며”(12) 궁극적인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복을 앞두고 있었다.
다시 한번 자기 백성의 본분을 상기시키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두려움은 “온전한 경외”가 되고 “도를 행함”은 기쁨이 된다.
신앙의 영원한 숙제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불신자도 사랑하지만 참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을 모르고, 신자는 하나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오직 하나다. 다른 사랑은 거기서 비롯된 하위의 것이다.
하위의 사랑은 최상위의 사랑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에 상충하는 하위의 것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죄와의 싸움, 은혜에 대한 갈망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미 주어졌으나,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자를 사랑하신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나님은 당신을 최고로 사랑하는 자를 인정해 주신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길이다.
D. 섬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12)
Hebrew: “네 모든 마음(lebab)과 네 모든 영혼(nepesh)으로써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마음과 정신에 남겨진 부분이 없이 모두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의미한다. <예화> “전관 예약되었음”
마음과 영혼이 바쳐진 상태에서 섬기며 살 것을 요구하신다.
섬긴다는 것은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제로 한다.
사는 동안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다.
그 사랑에 깊이 감화 받을 때 우리는 기꺼이 노예처럼 섬긴다.
그것이 기쁘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매여 섬긴다.
사랑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즐거워하며 살게 한다.
인생의 막이 내릴 때 우리의 보람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하찮게 여기며 살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뜻 이루는 데서 보람을 느끼며 살자.
III. 적용과 결론
가나안 땅을 주시기 전, 이스라엘의 마음을 일깨우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일깨우셨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며, 섬기며 살도록 일깨우셨다.
구원의 큰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 살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2 2019. 7. 21 주일 낮 예배
< 누구를 위한 명령인가?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2하-13)
I. 본문해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를 제시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계명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으시는 선교적 계획이 성취될 수 있었다.
II. 여호와를 섬김
이 모든 하나님의 요구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하)
“네 모든 마음과 네 모든 영혼으로써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KNJ 私譯)
마음과 영혼이 바쳐진 상태에서 섬기며 살 것을 요구하신다.
<예화> “이 테이블은 예약되었음”
섬긴다는 것은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제로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뜻을 이루는 섬김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다.
그러나, 그 사랑에 깊이 감화 받을 때 기꺼이 종처럼 섬긴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매여 섬기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은 그분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즐거워하며 살게 한다.
인생의 막이 내릴 때, 우리의 보람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하찮게 여기며 살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뜻 이루는 데서 보람을 느끼며 살자.
III. 누구를 위한 명령인가
땅을 주시며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13)
“명령”은 도덕과 종교생활에, “규례”는 제사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이는 가나안 땅을 주셨으니 그 댓가를 지불하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땅”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이다.
이스라엘이 땅이 없어 노예로 산 것은 불신자 때 우리 모습이다.
광야를 방황한 것은 은혜를 떠나 불순종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하시는가?
명령과 규례를 따르도록 요구하심은 하나님의 욕심이 아니다.
온 우주가 그분의 것이다.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무슨 욕심을 가지시겠는가?
하나님 자신에게 없는 무엇을 우리가 갖고 있기에 요구하시겠는가?
하나님께는 모자란 것이 없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은 그분이 주신 것인데 우리에게 바라실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네 행복을 위하여”는 Hebrew 원문에 “너의 선(善)을 위하여”다.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킬 때, 우리가 가장 선한 상태에 있을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善)하게 살도록 태어났다.
그 선(善)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인간이 이기적인 행복에 집착할 때 끊임없이 좌절을 겪거나 불행하게 된다.
인간은 행복보다, 참된 의미를 따라 살 때 보람을 느끼게 된다. 거기서 선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최고의 행복이시다. 자기 뜻을 따라 사는 선(善)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신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한 선(善)과 하나님의 선(善) 사이에서 갈등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자기 생각에 가장 좋은 것은 선택하고 하나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은 버리기에 불행해진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왜 방황하는가?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IV. 적용과 결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우리를 섬기는 자로 부르셨다.
언제까지 방황하려는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자. 다른 데서 행복을 찾지 말자.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자가 되라. 현실을 이길 힘을 받으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3 2019. 7. 28 주일 낮 예배
< 주님의 기쁨과 선택 >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신 10:14-15)
I. 본문해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과 이에 따르는 의무를 귀찮게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게 하심은 우리 자신을 위함이다.
신자의 삶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어야 한다.
II. 주인이신 하나님
먼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시한다. 그분의 지위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 10:14)
“보라! 그 하늘과 그 하늘의 하늘, 그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KNJ 私譯)
“하늘”은 땅과 대조되는 천상(天上)이다. 우주와 하늘나라를 가리킨다.
“그 하늘의 하늘”은 “가장 높은 하늘(the highest heaven)”을 뜻한다. 아무리 높은 하늘이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준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유지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主人)이시다.
신앙은 인간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신앙은 절제(節制)를 가져온다.
절제는 자기 본분을 알고 자신으로 머물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단지 그의 피조물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다시 선(善)하게 살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이 창조(創造)하심으로 주인이 되셨고, 구속(救贖)하심으로 또다시 주인이 되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라.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
III. 사랑하고 선택하심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다.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5)
A. 사랑하심
여기서 “네 조상들”은 직접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을 가리킨다. 간접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모든 선조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들을 기뻐하셨다. 그들과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을 기뻐하셨다.
기쁨(delight)은 사랑의 징표다. 소중히 여기는 것(valuation)은 기쁨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9하)
왜 그들을 기뻐하셨을까? 그들의 어떤 의(義)로움이나 장점(長點)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알 수 없다.
사랑의 관계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범죄로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몰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불행이다.
하나님은 한 백성을 선택하고 사랑하셨다. 이로써 당신을 아는 지식을 수여받고, 보존하고, 전파하게 하셨다.
왜 우리일까?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우리는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행위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자격 없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입을 다물 수 없다. 신앙은 그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B. 선택하심
“조상들을 기뻐하셨던” 사랑은 선택(選擇)으로 나타났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선택된 것을 가리킨다.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5하)
그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다. 기쁨과 사랑, 선택이 특별했기 때문에 소명(招命) 또한 특별했다.
우리가 선택받은 것도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 때문이다.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인생의 의미는 우리를 선택하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있다. 그분을 사랑할 때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도 모르는 채 살다가 형벌에 떨어질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간직하라. 세상의 근심이나 염려로 이 은혜가 잊혀지지 않게 하라. 다시 은혜를 받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 12:28)
IV. 적용과 결론
안개처럼 사라지는 인생이다. 기쁨과 감격이 없이 살지 말자.
하나님의 경륜의 빛으로 인생을 보자. 오늘 하루의 의미를 찾자.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고 사랑하신다. 소망을 갖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4 2019. 8. 4 주일 낮 예배
<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 10:16)
I. 본문해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선택하셨다.
인생의 의미는 그분의 경륜 안에서 발견된다.
II.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A. 완고한 마음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말라”(lo taqsh od).
“완고하다”라고 번역된 동사 “qashah”는 “강퍅하다, 강경하다, 굳세다”라는 의미다. 여기서는 마음의 완고함을 뜻한다.
하나님께 잘못된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의지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대적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마음이 “온유한 자”(hoi praeis)는 현재적으로 천국을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 이 말의 뜻을 해설할 것
목이 곧은 사람은 마음이 강퍅한 자이며 그는 하나님과 불화하다. 또한 사람들에게도 선한 감화를 끼치지 못한다.
아무리 큰 죄인도 하나님 말씀 앞에 마음이 녹을 때 용서받는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마음이 굳어진 자는 계속 하나님께 불순종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 3:7)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행 19:9)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을 때 마음의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영혼(靈魂)의 어둠+지성(知性)의 무지+마음(heart)의 굳어짐.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ㄴ(엡 4:18)
내 마음의 주인(主人)은 누구인가?
a. 온유한 것은 은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b. 굳어진 것은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강퍅해질 때 그들이 어떻게 반역하는지를 긴 세월 동안 직접 겪었다.
그 결국은 하나님의 징계(懲誡)를 받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간절히 유언처럼 당부하였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 현실을 이기며 살게 하는 생명을 주신다. 겸비한 마음으로 주를 찾는 자에게 주신다.
여전히 교만하려는가? 더 이상 목을 곧게 하지 말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라.
B. 마음의 할례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여기서 “할례(割禮)”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태어난 지 8일째 된 사내아이 성기(性器)의 포피(包皮)를 베어내는 것이다.
할례 제도가 공식적으로 도입된 것은 아브라함 때이다. 아브라함은 자식과 집안 남자들과 더불어 99세에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9-10)
이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자손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무할례자는 할례자들과 대조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은 영혼을 살리심으로써, 신자의 마음에 영원한 표를 새기실 것을 뜻한다.
몸의 할례가 마음의 할례를 뜻하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 명백하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 4:4상)
여기서 진정한 “할례(割禮)”를 “마음에 행하는 할례”로 묘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세례(洗禮)로 전환된다. 신약의 세례는 그 사람의 마음이 구별되어 오직 하나님께만 바쳤다는 표이다.
하나님께 목을 곧게 하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더러운 마음 가죽을 베어 내야 한다. 이것은 곧 회개와 마음의 쇄신이다.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써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요구를 기쁘게 행하게 된다.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받는 길이 무엇인가?
a. 마음에 할례가 필요함을 알라.
b. 말씀의 칼로 베이길 허락하라.
c. 마음에 변화 받고 새 삶을 살라.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하나님께 목을 곧게 할 때, 세상에 대해서는 비굴해진다. 그렇지만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라. 다시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
말씀에 은혜를 받으라. 마음 가죽을 베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5 2019. 8. 11 주일 낮 예배
< 하나님 여호와를 알라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신 10:17)
I. 본문해설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
영적 변화를 받아 “완고함을 버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억하며 살라고 가르친다.
II. 하나님 여호와를 알라
A. 능하고 두려우심
먼저 하나님의 존재(存在)를 상기시킨다. 교만을 버리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신 10:17상)
a.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b. 신(神) 가운데 신이시며 주(主) 가운데 주시다.
c. 크신 하나님이시며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d.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비참(悲慘)의 원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다.
마음이 완고하여 교만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 하나님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라.
B. 외모로 보지 않으심
감각들(senses)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시각(視覺)이다. 그래서 시각 중심주의(ocular-centrism)로 살아간다.
인간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그리스도가 사람의 외모(外貌)를 취하지 않으셨음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도 인정하였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눅 20:21)
육체의 감각(感覺)에만 사로잡혀서 올바른 판단을 져버리는 것은 진리 대신 안목(眼目)의 정욕을 따르기 때문이다(요일 2:16).
하나님과 교제하는 비결은 진실(眞實)함이다. 감각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의미로 재해석하라.
감각에 빠질 때 의미(意味)에서 멀어진다. 진리(眞理)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붙들어야 한다.
*행복과 기쁨(pleasure)의 관계에 대한 설명
진리(眞理)의 빛을 받아들이라. 순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라.
그래서 하나님은 정의(正義)로우시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 정의는 아무도 소외하지 않고 보호한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신다(신 10:18).
C. 뇌물을 받지 않으심
뇌물(bribe)의 의미는 이것이다.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 위해 권력을 가진 자에게 제공하는 금품이나 향응”이다.
뇌물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하나님의 정의(正義)를 훼손한다. 그것은 공정을 상실하게 한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성경에서는 재판관이나 관리가 뇌물을 취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 16:19)
뇌물을 통해 출세도 하고(잠 18:16), 화난 자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도 있다(잠 2:14). 그러나 성경은 권장하지 않는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신(神)에 대한 뇌물 개념을 배웠다. 이는 자신들의 부패성 때문이다.
* 당시 고대 중근동지방의 신관과 뇌물에 대한 설명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신관(神觀)으로 하나님을 대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公義) 때문이다.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신 10:17하)
하나님은 결코 뇌물 같은 예배나 섬김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마음과 뜻을 다하는 섬김을 기뻐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드리는 예배나 봉사를 그치라는 뜻이 아니다.
심판을 피하거나 이득(利得)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하게 섬기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다. 오직 그리함으로써만 우리가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만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뇌물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6 2019. 8. 18 주일 낮 예배
< 정의를 행하심 >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신 10:18상)
I. 본문해설
하나님은 만물 위에 뛰어나신 위대한 절대자시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진실(眞實)하시다. 그 사실을 개인의 삶에 적용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신 10:18상)
II. 정의를 행하심
“정의”(mishpat)는 원래 “재판의 판결”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
재판의 이상(理想)은 판결을 통하여 인간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법의 공정(公正)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로써 세상에 대해 정하신 하나님의 질서를 보여주고 잘못된 바를 바로 잡으신다.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지만 세계의 질서에 관여하신다.
말씀으로 질서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거기에 어긋나는 것을 바로 잡으신다. 이로써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신다.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正義)를 행하신다. 그들은 억눌린 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질서를 굽게 하는 자들이 억압해도 보호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에 “고아와 과부”라는 표현이 구약에 14회, 신약에 1회나 등장한다. 이들은 부모나 남편의 보호와 돌봄 없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들을 특별히 보호하신다. “고아와 과부”들이 사회적으로 소외(疏外)되지 않도록 돌보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신약에서는 이들에 대한 태도가 경건(敬虔)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이는 당시 유행하는 거짓된 경건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신 10:18상)
소극적으로
그들을 특별히 붙들어주신다(시 146:9). 타인이 압제하지 못하게 하신다(렘 22:3). 힘 있는 자들이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모든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게 하신다(신 16:11). 가진 자들에게 곡식과 열매를 얻게 하신다(신 26:11). 백성이 바치는 성물(聖物)을 레위인과 함께 먹게 하셨다.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신 26:13)
그들을 편애(偏愛)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이 늘 억눌리고 무시당했기에 하나님이 돌보셨다. 그것은 사회의 정의(正義)의 척도였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은 정의의 생활이다. 이는 어떤 특정 계층의 편을 드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秩序)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회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사랑은 질서다. 진리(眞理)는 객관적으로 질서를 부여하지만 사랑(Love)은 주관적으로 그것을 결정한다. 전자가 “도(道)”이고 후자가 “덕(德)”이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받아들인 질서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한 삶은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의 총합이 사회의 현실이다.
이기적 사랑에는 “고아와 과부”를 위한 공간이 없다. 그들을 돌보는 것이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를 따른다. 사랑의 질서가 정의(正義)고, 정의는 사랑의 지배(支配)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정의(正義)의 삶을 산다. 사랑은 의(義)의 질서다. 따라서 사랑은 질서를 거스르는 불의(不義)에 항거한다.
당신이 따르는 삶의 질서는 무엇인가? 그 질서가 사회에서 그대로 구현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가?
당신의 삶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사랑에서 비롯된 생활인가?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의 삶은 정의(正義)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다. “고아와 과부를 위한 정의”다.
“내 안에 사랑을 질서롭게 하소서”. 이 질서가 나의 삶에, 이웃에게 이뤄지게 하소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7 2019. 8. 25 주일 낮 예배
< 사랑을 베푸심 >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하-19)
I. 본문해설
진실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정의(正義)를 요구하신다.
마음과 뜻을 다하는 사랑은 정의로운 삶을 살게 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은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다.
정의와 함께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가르치신다.
II. 사랑을 베푸심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하-19)
A. 나그네를 돌보심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특징이다.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한다.
사랑의 삶을 말하면서 나그네가 등장한다.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그네는 두 가지 의미다. a. 이민족으로서 잠시 머무는 자들. b. 이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자들.
인종과 문화, 심지어 종교조차 다른 자들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하나님은 온 인류(人類)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그네들에게도 떡과 옷을 주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대해 회고하게 한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29:5)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4)
이는 나그네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실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보여주신다(신 8:3).
나그네들을 먹이고 입히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온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 그 사랑을 받는 것만큼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라.
B. 나그네를 사랑함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9)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보여주신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이웃을 향해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 나그네인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
고아와 과부에게 정의(正義)가 이루어지면 사회는 정의로운 것이다. 나그네까지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 사회다.
나그네는 어느 나라에서나 무시당한다.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자기 나라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후, 많은 나그네들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이방인들의 종교와 도덕의 풍습은 거절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나그네들도 사랑 받는 사회(社會)를 건설해야 했다.
사랑은 정의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회의 표징이다.
a.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8하)
하나님은 나그네가 이스라엘의 땅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를 바라셨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셨다(창 12:3).
여기서 "옷과 떡"은 일종의 제유법이다. 인간으로서 생명과 존엄성을 누리며 살기 위한 조건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
문화가 다른 것을 편견으로 보지 말라. 하나님을 본받아 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보호와 돌봄을 받게 하라는 뜻이다.
b. 자신들도 나그네였음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9하)
이스라엘도 나그네였다. 가깝게는 광야에서, 애굽에서, 멀게는 가나안 땅에서 그 조상들도 나그네였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
나그네는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이스라엘 땅에서 경제적인 돌봄을 받게 하셨다. 곡식을 남겨두게 하셨다(신 24:19).
믿음의 사람들은 나그네로 자처했다. 신약에서는 이것을 천국을 찾는 믿음으로 묘사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라. 세상에서 모두 나그네와 같은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스도 밖에, 이스라엘 밖에, 언약의 외인, 하나님 없는 자들”이였다(엡 2:12-13).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영적 나그네다. 나그네조차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 때문에 나그네까지 사랑해야 한다.
이로써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신자로서 일상의 삶이어야 한다. 이미 받은 하나님 사랑 때문에 이웃에게 긍휼을 실천하라. 삶의 의미를 찾으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8 2019. 9. 1 주일 낮 예배
< 마지막 당부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 10:20)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①여호와를 경외함. ②모든 도(道)를 행함. ③여호와를 섬김. ④명령(命令)과 규례를 지킬 것.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幸福)을 위한 것이다.
이를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결하고 교만한 마음이다.
마음의 가죽을 벗겨내야 한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16).
마음의 교만을 버려야 한다. “목을 곧게 하지 말라”(16).
II. 마지막 당부
이제껏 전해 준 가르침을 정리하듯이 반복하여 교훈한다.
A. 경외하라
그들은 잠시 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한 마음이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나안 정복을 기다리는 때다.
풍요롭고 번영하여 시련이 없을 때,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한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들이, 형통할 때 그분을 잊어버리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그래서 모세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잊지 말도록 당부한다.
모든 윤리(倫理)와 덕스러운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온다.
당신의 삶이 위기 속에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라.
하나님은 모든 삶의 상황을 통해 당신께 돌아오게 하신다.
당신의 삶이 형통한가? 하나님 경외하기를 잊지 말라.
B. 섬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노동과 수고를 요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섬김은 여전히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단지 소비(消費)하며 즐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소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는 쾌락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교회를 세우신 뜻을 생각하라.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意味)를 발견하며 살게 하셨다.
섬기던 사람도 죽고 한때 열광하던 가치도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하시다(약 1:17).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마음은 원망, 불평, 감사치 않음, 시기와 질투, 게으름과 정욕과 허무함이다.
우리 모두는 쓸모가 있게끔 태어났다. 자신의 쓸모를 찾고 거기서 보람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비교하지 말라.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허무하게 낭비하지 말라. 힘 있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게 살라.
C. 의지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의지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依支)하며 살도록 태어났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독립하는 것만큼 추(醜)하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것만큼 자기를 의존한다. 이것이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이다. 이것이 바로 죄(罪)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시 84:12)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했던 사람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12)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전심으로 순종하는 마음이다.
전심으로 사랑하며 온전히 순종하려는 자보다, 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운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한(怨恨)을 품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마음을 지킨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 10:14)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모아진 마음이고, 그렇지 않은 마음은 흩어진 마음이다. 세상에 찢어진 마음으로 어찌 행복하겠는가?
회개(悔改)는 하나님 의지하지 않던 마음을 돌이켜서 다시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만 의지하라.
III. 적용과 결론
이러한 가르침을 전심으로 따를 것을 맹세하라고 명하신다.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 10:20하)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는 강복(降福)과 재앙(災殃)을 건 맹세다.
이 세 가지 마지막 당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의지하며 살기 위하여 구원 받았다. 이 세 가지 소명을 따라 살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9-끝 2019. 9. 8 주일 낮 예배
< 찬송 받으실 하나님>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21-22)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마지막 당부는 세 가지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말씀에 순종하라, 주님을 섬기라.
이것을 명하심은 우리를 행복(幸福)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II. 찬송 받으실 하나님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라”(신 10:19상)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목숨을 다해 찬송해도 다 갚을 수 없다. 왜 하나님을 그렇게 찬송해야 하는가?
A. 큰일을 행하심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신 10:19하)
“크고 두려운 일”은 쉽게 할 수 없고 큰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救援 行動)이다.
이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 멀리 아브라함과 조상들을 선택하셨다.
아무 공로 없는 그들과 언약(言約)을 맺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셨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하셨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그들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고 불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셨다.
광야 생활 중 수많은 전쟁(戰爭)에서 지켜주셨고 승리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했으나 회개(悔改)할 기회를 주시고 다시 사랑하셨다. 우리도 그렇다.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은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신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恩惠)였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셨다.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 말씀으로 먹이시고 사랑해 주셨다.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외함으로 찬송(讚頌)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의 지난날을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 행하신 큰일을 생각해 보라. 은혜와 능력(能力)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는가? 찬송하라.
B. 번성하게 하심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22)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됐다. 천하에 기근이 왔다. 가족들은 우여곡절 끝에 요셉을 만났다.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창 46:27)
이때 식구들의 수가 70명이었다. 사도행전 7:14에는 “일흔 다섯 명”이라고 나온다. 이는 야곱 자신과 그의 아내들 및 애굽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포함한 숫자다.
그렇게 소수였던 야곱의 집안은 애굽에서 탈출할 때, 이미 큰 민족을 이루었다. 이때는 야곱의 식구들이 애굽에 이주한 지 430년이 끝나는 때였다(출 12:40-41).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애굽에서 처음에는 영광(榮光)을, 후에는 고난(苦難)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울 수 있으리만치 번성하게 하셨다.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22)
그러면 애굽을 탈출할 당시 인구가 얼마나 되었을까?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출 12:37)
여기서 “보행하는 장정”이라 함은 아마도 전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인구는 250만에서 300만 정도 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땅이 없어 유리(遊離)하며 사는 소수민족의 설움을 알았다.
“…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하)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 번성하게 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서막(序幕)을 보여준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겨자나무는 거목(巨木)은 아니지만, 새들이 가지에 깃들 수 있는 크기다. 씨는 팔레스타인의 식물 중 가장 작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은 정말 미약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중에는 창대(昌大)하게 됨을 보여준다.(욥 8:7)
기독교 초기에도 믿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번성하여 전 세계적으로 분포한 교회가 되었다.
선교(宣敎)의 역사도 이러하다. 우리도 26년 전에는 소수였다.
우리 교회의 영적 번영(spiritual prosperity)을 바란다. 그러나 개교회의 비대한 양적 팽창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세상의 모든 복음적인 교회를 가득 채우기를 기도하자.
우리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작은 것이었나? 그런데 얼마나 놀랍게 번성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혜다.
III. 적용과 결론
큰일을 행하신 것에 감사하자. 하나님을 찬송하자.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자.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번성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1 (2019.07.14._주일오전설교)
1. 하나님의 요구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이 끝나갈 때였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모세는 유언과 같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이 교훈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회고하며 가르침을 반복하는 형태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을 신명기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나오는 ‘신’(申)이라는 말은 우리가 “신신 당부한다”라고 할 때에 그 ‘신’입니다. 첫 번째 돌판을 하나님이 새겨주셨고, 모세가 그것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에는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격노하여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돌판을 던졌고 깨졌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이유이기는 했지만 그 방식은 육신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격노했던 죄를 깊이 회개하며 다시 한 번 40일을 금식한 후 하나님의 명령대로 만들어 가지고 간 돌판에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때 법궤를 만들도록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임박한 모세의 죽음과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을 앞두며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사건을 회상하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려주었습니다.
II. 하나님의 요구
A. 두려워함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히브리말로 ‘야레’(yareh)인데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그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막연한 무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 비롯되는 합당한 두려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초월적인 존재임을 인식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그 위대하고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간은 그분의 처분을 바랄 수밖에 없는 아주 미천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씩씩하게 살아있고, 건강하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될 수 있을 때에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현듯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 우리는 살아있는 것과 죽는 것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깊이 병들어 생사를 가늠하기 어렵게 되어있을 때에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고 하는 겸손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으로 의존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즘은 하나님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이웃집 아저씨 부르듯이 그렇게 부르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농담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로 삼는 경망스러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들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수없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계시고, 기도하는 우리는 이 땅위에 있다는 사실만큼 엄연한 사실은 없습니다. 땅에 있는 존재는 유한한 존재이고, 땅에 있는 존재는 필멸의 존재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 영원한 것만 못하고, 시간에 매이는 것이 불변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없을 때에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얼핏 보기에는 너무나 자유롭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살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는 진저리치도록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사는 자유는 가장 커다란 속박이요, 잠시 누리는 자유의 기쁨은 다가올 커다란 두려움에 공포와 비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높으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은혜를 받고, 또 그 은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모든 우리의 편견과 오해를 거둬내고 우리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모든 우주의 만물 중 하나일 뿐이며 그리고 우리라고 하는 존재는 시간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유한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결국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처럼 사라질 것이며 소멸되고 사라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입니다.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고, 마지막 하나님께로 돌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티끌처럼 이 세계 공간에 태어나 먼지처럼 사라집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마치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인류를 파멸하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수증기 한 방울이면 충분할 정도로 그렇게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육체의 힘으로는 한 마리의 당나귀만한 힘도 가지지 못하고, 지혜로는 천사에 이르지 못하며, 수명으로는 짐승 중 오래 사는 짐승만큼도 살지 못합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잠시 태어났다가 살고, 사라진 후에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두려움은 모든 경배의 첫 번째 동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기 직전에 모세를 통해 그들의 가슴에 말씀을 아로 새기십니다. “너희는 나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다만 사람일 뿐임을 기억하고 높고 위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잠시 살다 돌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도를 행함
두 번째는 모든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면 다음 뜻이 됩니다. ‘그의 모든 길 안에서 너는 걸어가며’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길’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데레크’(derek)는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즉, ‘인간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명백한 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도리는 성경에서 계명으로 나타납니다. 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힘들거나 때로는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안전한 것은 사람들이 걸어가도록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서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참으로 살아야 할 길을 계시하시고, 인간은 그 길로 행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모든 도라고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신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삶의 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길로 행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굳이 인간에게 자기 안목에 좋은 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도록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곤고한 일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곤고하고 고통 받는 것이 상황 때문이고, 환경 때문이고,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이유를 아주 명백하게 말합니다. 시편 107년 10절과 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영적인 사망에 어두운 그늘에 앉아있는 것, 이것은 곧 지하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의 모습으로 투영됩니다. 양손에는 쇠사슬에 묶여있고, 그리고 발은 차꼬에 채워져 있습니다.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습한 지하 감옥에 갇혀서 언젠가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행복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그렇게 인간을 본래 창조하신 뜻과는 완전히 배치되게 이렇게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도를 없이 여기며 자기의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도리를 따라 삶으로써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삶으로써 그들을 보는 세상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미천한 자신의 존재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을 보며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행복에 대한 기대만을 가지고 살면 진정으로 현실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번번이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 의미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먼지처럼 태어나 티끌처럼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이고, 코끝에 숨결 하나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놓쳐버릴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그런 미약한 인간이 여전히 의미를 찾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멸의 존재가 불멸의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찾고 사라질 존재가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은 사라져도 의미는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의미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머물다가는 이 세상의 육체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고 나의 육체는 쇠잔해 가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인생인가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사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진실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언젠가 말씀을 전하러 지방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어느 항구에 들렀습니다. 워낙 생선회로 유명한 집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내려갔던 강사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몇 가지 반찬이 나오고, 그 다음 아주 맛있게 구워진 생선 한 마리가 나왔습니다. 생선을 젓가락으로 쿡 찔렀더니 내장과 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거의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달 동안 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아주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 받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농담하는 것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겉모습으로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졌으나 젓가락을 찌르는 순간 피와 내장이 생것으로 쏟아지는 덜 익은 생선 구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중 아무도 그런 요리를 즐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화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든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이 도달했던 믿음의 진수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발을 세상에, 한 발을 교회에 둔 사람으로, 겉모습은 그리스도인처럼 내면의 세계는 불신자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거짓이라면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찾아가야 할 것이고, 부인할 수 없이 이것이 진리라면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그 진리를 사야 합니다. 마치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사듯이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도를 따라 사는 것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 보기 좋은 풍광, 짜릿한 쾌락이 선사하지 못하는 신령하고 놀라운 기쁨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깊이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두 번째 요구입니다.
C. 사랑함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요구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주어질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의 이름에 따라다녔던 노예라고 하는 이름은 사라질 것이고, 이제 어엿이 가나안의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루며 땅을 소유한 민족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 직전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두려움은 온전한 경외가 되고,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원한 숙제는 어떻게 우리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사랑하지만 참 사랑의 대상을 모릅니다. 신자는 그 참 대상이 하나님임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입니다. 다른 모든 사랑은 거기에서 비롯된 하위의 사랑입니다. 이 온 우주에 오직 하나님이 한분이라고 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논증됩니다. 만약 하나님 한분이 아니고 그처럼 영원하고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가 하나 더 있다면 그 둘은 꼭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분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하나입니다. 둘 다 사랑이라면 두 사랑 어느 것도 꼭 있어야 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위의 사랑은 최상위의 사랑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것에 상충하는 하위의 사랑은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자가 죄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질 때에 갈급함을 느끼고, 고통을 체험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목 말라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모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으로 한 시대를 풍비했던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고민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오늘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 하는 것입니다.’ 신자인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주어졌고,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일종의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누구도 그 사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환란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 사랑에서 여러분들을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인생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은 14장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인생을 가장 즐거워하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사랑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당신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인정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고 말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져 가는 인간, 풀꽃 같은 사람이 인정하는 것도 우리에게 큰 명예가 되는데 영원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은 그 많은 수치를 떨쳐버릴 것이었습니다. 땅이 없어 나그네로라 일컬음을 받고 애굽에서는 노예로 불리웠던 이 사람들이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하며,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많은 축복을 내려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때로는 열애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그 사랑을 우상에게 바치고 그리고 세상에게 바치는 이스라엘의 속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음란하듯이 그렇게 참된 남편인 하나님을 떠나는 이스라엘의 백성의 모습은 오늘날 끊임없이 믿음을 배반하는 우리의 마음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가나안을 주시며 당신만을 사랑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전에는 넘어졌으나 일어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어제는 미끄러졌으나 다시 세움을 받을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여 타락했으나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변천하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현실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소비와 이 세상이 주는 만족을 찾으며 쾌락에 빠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이외에 어디에도 참된 행복은 없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온전히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넘어졌다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사는 것보다도 더 쉬운 인생의 길은 없습니다.
(D. 섬김 부분은 설교 안 하셨음-다음주 설교로 넘어감)
III. 적용과 결론
가나안 땅을 주시기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일깨우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일깨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가까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빼앗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으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큰 은혜를 기업으로 받았으니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보다는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없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고백하며 기쁨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2 (2019.07.21._주일오전)
2. 누구를 위한 명령인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2~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요구를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계명을 지키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신 선교적인 계획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II. 여호와를 섬김
본문 12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읽으면 “네 모든 마음과 네 모든 영혼으로써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바쳐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모든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종종 우리들이 물건을 사러갔는데 눈앞에 물건이 분명히 있는데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기 물건이 있지 않습니까?’ 하면 ‘저 물건은 다른 손님에 의해서 이미 예약된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식당에 갔는데 분명히 빈 테이블이 있는데 우리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테이블은 이미 예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이미 누군가가 배타적으로 그것을 독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영혼을 이렇게 독점하기를 원하십니다. 섬긴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대상의 뜻을 아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기 위함이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과도 어울리셨고, 부유한 사람도 그분을 따랐지만 그분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그분에게는 일용할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삶을 사신 것은 당신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 앞에 다시 살리심을 얻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감화를 받을 때 우리는 오히려 자녀라 부름을 받기를 떨려하며 오히려 기꺼이 종처럼 섬기고 싶어 합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탕자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들을 받아주는 그 아버지 앞에 했던 고백을 생각나게 합니다.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을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 아버지여 다만 나를 아버지의 집에 품꾼 중 하나로 여기소서”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자녀로 불러주셨으나 그분의 종처럼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감격하며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이 기쁨이 없기 때문에 헛되고 헛된 것들을 구하며 우물가의 여인처럼 일평생 희망이 없는 것들을 바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신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기뻐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생에 막이 내릴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보람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던 모든 것들이 끝날 때에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보람이 무엇입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하찮게 여기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위대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섬기는 데서 보람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만이 이렇게 담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빛나게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큰 종이 아니라 비록 이 지구 한 모퉁이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있을지라도 그 마음에 합한 그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우리 하는 일은 우리의 일 자체의 크기나 존귀함에 의해 성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 모든 섬김의 가치가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진 것 없고, 누리는 것 없이 살아도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 한 모퉁이를 섬기고 있다면 그는 온 세상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늘의 뜻을 이 세상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기쁨을 다시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수없이 말씀을 드립니다. 무위도식 하지 마십시오. 무위도식할 때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렇게 의미 없이 세월을 보내고 만족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고, 그리고 불만 때문에 아까운 인생을 써버리고 사는 여러분의 삶을 누가 되돌려 주겠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가장 값진 것은 우리의 인생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의미, 그리고 태어났다는 그 의미를 생각하며 살 수 있다는 것, 갈대처럼 연약하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처럼 보잘 것 없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뜻을 따라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존귀한 것입니다. 이보다 값진 것은 없습니다. 죽은 사자보다는 살아있는 개가 더 나은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삶의 목표를 점검하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누구를 위한 명령인가
마지막으로 이것은 누구를 위한 명령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거저 주시며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명기 10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명령과 규례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가장 우리들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해석입니다. ‘명령’은 도덕과 종교 생활에 관한 주님의 분부이고, ‘규례’는 제사에 관한 규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지키면서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되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땅을 주셨으니 그 대가로서 이렇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땅은 신약 백성들이 누리게 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지냈던 것, 그 조상들이 여러 땅을 우거할 때에 나그네로라 일컬음을 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땅이 없어서 그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것은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광야를 방황한 것은 은혜를 떠나 불순종하는 신자된 우리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지겹도록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니라, 나의 모든 계명을 지킬 것이니라.”고 이렇게 반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명령과 규례를 따르도록, 모든 계명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온 우주가 그분의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신데 무엇을 욕심을 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없는 무엇을 우리가 갖고 있기에 우리에게 달라고 요구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결핍이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은 그분이 주신 것인데 우리에게 바라실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토록 당신을 사랑하라고,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모든 계명을 준수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그렇게 살 때에 우리가 가장 행복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발 우리가 불행해지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우리에게 그렇게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네 행복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는 이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너의 선(善)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창조가 이루어진 것을 보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을 때에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는 상태’, 혹은 ‘그것을 이루어 드린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이 의도하신 가장 선한 상태에 있을 수 있고, 그 안에서 우리가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행복은 객관과 주관에 걸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 자기만 좋은 것도 행복이 아니고, 그리고 자신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데 가치 있는 것 그것 때문에 인간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 선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선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의도한 바가 있어서 만들었거나 구입한 것입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여러분들은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은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셔서 당신 마음속에 있는 관념들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모르셔서 알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보며 기쁨을 얻으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당연히 당신의 의도를 따라 만드신 모든 것들이 행복하고 선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도 그렇게 선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게끔 창조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 잠시 있는 것인지, 무엇을 진정으로 목적으로 삼으며 살아야 할지, 수단으로 삼으며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서 깨우치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명령과 규례를 주셨습니다.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명령과 계명을 따라서 살면 당신의 사랑 안에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최고의 행복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뜻을 따라서 사는 선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십니다. 당신 안에 있게 하셔서 당신이 행복한 것처럼 그들도 행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자기가 생각한 선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선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인간은 자기에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의 것은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결코 만족이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알라딘>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천 만명 이상이 시청했다고 해서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램프를 문지르면 지니가 나타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영화가 끝날 때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나에게 저 램프가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세 가지 소원을 지니가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내 인생은 바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니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를 원합니다.’라고 해도 이런 소원은 어차피 안 들어줍니다. 기껏해야 내가 갖고 싶은 것,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위 같은 것들을 주는 것인데 세 번씩이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우리의 인생이 바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을 힘들게 하는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내면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것은 여러분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언젠가 은혜 안에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까? 처음 없었습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무엇을 더 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충분히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무엇을 더 갖고 싶은 것이 있겠습니까? 혹시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없다고 해서 삶이 불편하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우리들이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릅니다. 인간의 불행은 자기 생각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하나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을 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서 선택하는 것은 대부분 착시 현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신기루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제주도에 비행기를 내리면 생소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왜냐하면 수평선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높이 있어서 마치 바닷물이 쏟아질 것 같은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바다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수평선은 계속 내려갑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같은 실력으로 골프를 치면 제주도 사람이 이긴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실이 아닌 착시 현상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착시 현상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싫고, 내 욕심을 따라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사는 것이 훨씬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을 끊임없이 보면서도 우리는 그 신기루 속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신기루 속에서 착각 속에 계속 살며 불행해지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착각하는 즐거움이 없더라도 신기루를 벗어나서 실제에 있는 것을 보며 사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있는 한, 그리고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착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의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착시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착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욕망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있는 물건에 내 욕망을 비추어서 그 물건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게 하거나 혹은 사실보다 훨씬 낮은 가치를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정말 그것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만드는 것이 진리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빛을 받으면 그러한 착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훌륭한 것은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비췰 때 얻게 되는 유익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은 그분께로부터 나왔고 그분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고, 그리고 바로 그렇게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모든 명령과 규례를 분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명령과 모든 규례를 지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붙어 있도록 만들기 때문에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73편 28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방황합니까? 예전에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밝히 드러났고 핑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잠자기로 운명 지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잠시 하나님을 찾다가 다시 예전보다도 더 깊은 수면에 떨어지는 그것이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깨어나야 합니다. 수없이 반복적으로 실험해 봐도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행복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그런 곳에서 행복을 찾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안에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이 행복한 것처럼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쫓아오실 수 없고,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당신 안에 끌어들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도 그런 착시 속에서 끝없이 실패하고 부딪치고 좌절하고 낙심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을 얻어 똑같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없으십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에게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당신의 모든 명령과 계명을 지키라고 분부하시는 것은 그 안에서만 여러분들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분 섬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언제까지 방황을 해야지만 끝날까요?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인생도 이 세상도 잠시 후에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착시 현상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엄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모든 신령한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3 (2019.07.28._주일오전)
3. 주님의 기쁨과 선택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신 10:14-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과 이에 따르는 의무를 귀찮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중 하나가 귀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의 힘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계명과 이에 따르는 자신의 본분에 대해서 귀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매우 올바르지 않은 태도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따르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자녀의 삶입니다.
II. 주인이신 하나님
오늘 말씀은 이러한 진리에 이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절이 시작하기 전에 간투사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히브리말로 ‘헨’(hen)인데 우리말로 ‘보라’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번역이 한글 성경에는 빠졌는데, 원래 이 ‘보라’라고 하는 간투사는 뭔가 장엄한 사실을 도입할 때 나타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14절이 매우 장엄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직접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보라! 그 하늘과 그 하늘의 하늘, 그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번역됩니다.
하늘은 땅과 대조되는 천상입니다. 히브리말로 ‘샤마임’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땅과 대조되는 천상의 세계, 온 우주를 가리키기도 하고, 혹은 별들이 떠있는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파란 창공에 대해서는 히브리 사람들이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파란 하늘 너머에 있는 우주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이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그냥 ‘그 하늘의 하늘’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늘 중 가장 높은 하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높은 하늘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원인이 없이 이런 결과가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오늘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발생적인 측면에서도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고, 그것을 유지한다는 면에서 현실적으로도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십니다.
신앙은 이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지위를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치를 아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이 위치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이 이 모든 우주가 복종해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행동이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지위를 아는 신앙은 절제를 가져다줍니다. 이 절제는 인간이 자신의 본분을 알고 자신으로써 만족하는 것입니다.
눈 감을 때까지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에 의해 지음 바 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대로 내버려 두셔서는 도저히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본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행복했더라면 오늘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던 그 이유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주인 삼고, 내가 그 모든 것들 위에 가장 높은 자가 되어서 사는 동안 창조주는 멸시되었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지은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주의 지위에 오르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그것을 꿈꾼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미끄러지고 굴러 떨어지고 나뒹굴어져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불쌍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선하게 살게 하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서는 다시 이 모든 만물을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이 자기를 왜 창조하시고, 구원하셨는지를 매일매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웅장한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주인이 되셨고, 또 우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 내심으로 또 다시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죄에서 구하셨으니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다른 곳에는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III. 기뻐하시고 선택하심
(본문 말씀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증거 하였고) 이제는 위대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고 말입니다.
A. 기뻐하심
제일 먼저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에 “네 조상들”이라고 하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 되서 이삭과 야곱, 요셉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더 넓은 뜻으로 보면 아담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은 아브라함 이전에 이미 아담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모두 망가뜨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범죄한 그에게 구원의 희망을 보여주시고, 그를 향한 사랑을 접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그 부분을 주석하는 가운데 범죄 하였지만 그는 계시의 빛 아래서 살았고, 구원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들과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징표입니다. 숨길 수 없는 사람의 두 얼굴이 있습니다. 사람을 증오하는 사람의 얼굴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입니다. 전자의 사람의 얼굴에는 미움과 원망이 얼굴 가득히 스며들어 있고, 후자의 사람의 얼굴에는 기쁨이 깃들여 있습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기쁨과 함께 사랑의 중요한 두 가지 특성 중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사랑하는 기쁨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0장 9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단어가 나옵니다. ‘다시 기뻐하사’ 하나님이 기뻐하신 백성들인데 왜 다시 기뻐하셨다는 표현을 쓰실까요? 조상들도 기뻐하셨고, 너희도 기뻐하셨다는 의미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회복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을까요? 그들의 어떤 의로움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셨을까요? 왜 다른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사람보다 더 공로가 많거나 선한 행실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 영원히 비밀이 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다는 것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며, 이것 외에 우리는 다른 것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무 공로 없이 거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 전부가 하나님을 닮아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범죄로 타락한 인류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불행이었습니다. 모든 이방의 종교와 그리고 철학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기억 속에 남은 희미한 빛으로 자기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따라 자기 뜻대로 구성해간 진리의 체계입니다. 당연히 그들로부터는 어떤 것들은 놀라운 통찰의 빛을 배울 수 있지만 그 대부분의 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그 진리에 대한 순수한 지식과 올바른 체계를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겠습니까?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인류에게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한 가정을, 한 백성을 선택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이로써 당신을 아는 지식을 수여하시고, 보존하게 하시고,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왜 우리일까요?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사랑이 우리의 장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때문에 자격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하필이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을까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도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십자가 앞에서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한 구원의 사랑을 하나님의 기쁨 때문에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셨으니 나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이외에 우리에게 어떤 행복이 또 남아있겠습니까?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우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내가 살아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나에게 너무 괴로워서 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지워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이 기쁘지 않아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그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과 바꾸셨습니다. 신자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인생의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찾으셨습니까? 그래서 좀 행복해지셨습니까?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고, 그것을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도 영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영원한 행복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실망시킵니까?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많은 것을 사람에게 기대를 하십니까? 그냥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기뻐하셨으니 그래서 사랑하셨으니 주님께 받은 사랑과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날마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을 이용해서 그들이 유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그래서 신자는 땅을 바라보고 소란해진 마음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정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시간 안에서 사라질 것들밖에 보지 못하지만 신자는 영원의 빛 안에서 사라질 것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 미워하지 마십시오.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무얼 그렇게 많이 기대하기에 실망을 하고, 무얼 그렇게 많이 바라기에 원망을 하며, 무얼 그렇게 찾기에 낙심합니까?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셨습니다. 매일 넘어지고, 매주 쓰러지는데도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아름다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세상에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이 된 것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줄 알고 그 사랑을 기억하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선택하심
두 번째는 선택하심입니다. 조상들을 기뻐하셨던 사랑은 선택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선택된 것을 뜻합니다. 본문 15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그 끝없는 광야 생활에서의 실패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만민에게는 없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자신들에게는 없고 만민에게는 있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긴 광야 생활을 지리멸렬할 정도로 불순종하고, 징계 받고, 회개하고 다시 불순종하고 징계를 받는 악순환을 되풀이 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히 찾겠습니까? 우리의 고민은 대부분 현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 때문에 우리는 이 현실 너머에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없고 부족한 것, 때로는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황제처럼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모자라는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것들이 죽어가고 사라져 갈 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되 영원히 사랑할 것이 아님을 압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지혜를 가졌던 믿음의 사람들, 세상 대신 하나님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바로 결핍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찾았던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왜 이스라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세상의 낙을 즐기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즐겨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모자란 것이 없고 그 세상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렸다면 믿음을 선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과자 하나 주고 잠깐 놀게 해주는 것으로 엄마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제 장성하고 나서는 더 깊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엄마를 신뢰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아기 같은 신앙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삐치고, 토라지고 그리고 근거도 없이 고집을 부리며 자기 뜻대로 살겠다고 그렇게 힘을 쓰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이렇게 선택받은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한 것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은혜를 받은 우리의 소명 또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선택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기쁘셨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선택받았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도에서 인생의 목표와 의미를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미를 따라서 살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천국과 지옥도 모르는 체 고집대로 살다가 죽었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우리의 의로운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그런 선택을 받은 우리의 반응은 어때야 합니까? 그렇게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아서 다시 하나님을 찾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고 살 수 있게 해주신 일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르는 체 살아갔을 때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생각하고, 다시 그 절대적인 고독 속으로 그 완벽한 소외와 허무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놓쳐도,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도 ‘나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리라’ 하는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니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낀다면 하나님이 가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떠나 멀리 멀리 우리의 욕심을 따라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구원 받은 것에 대해서 그 은혜에 감격을 간직하십시오.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의 근심이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세속적인 염려로 이 은혜가 잊히지 않게 하십시오. 다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핍박이 시작되어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에 대해서 말한 후 예수를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환란과 시련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히브리서 12장 28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선택하셔서 여러분들을 당신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그 손 안에서 주님의 것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안개처럼 사라지는 인생입니다. 기쁨과 감격이 없이 사는 것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이 모든 세계 너머에 계셔서 모든 만물과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빛 아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라보십시오. 오늘 하루 의미 없이 살아가지 말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들풀과 같은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들을 지명하여 불러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고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새 소망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4 (2019.08.04._주일오전)
4.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 10: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분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인류 중 우리를 기뻐하셔서 사랑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는 이렇게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14절과 15절에서 말씀하신 후 오늘 본문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II.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A. 완고한 마음
첫째는 먼저 완고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을 곧게 하다’라고 번역된 동사 ‘까샤’(qashah)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강퍅하다, 강경하다, 굳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마음의 완고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하나님께 잘못된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음에서 그리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굳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 가장 커다란 대적이 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설교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인격적인 특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흔히 팔복이라고 부르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온유하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온순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합니다. 이 온유한 자는 현재적으로 천국을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땅을 많이 소유하게 된다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온유함의 극치를 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라고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온유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칠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누구를 경배하지 않는 사람이며 이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목이 곧은 사람은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며 그는 하나님과 불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지 못합니다. 땅을 소유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천국 백성의 영적인 특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이 녹아내릴 때 그는 용서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죄인을 용서하심으로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스스로 교만하여 굳어진 자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합니다. 에스겔 3장 7절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선지자가 아무리 피를 토하듯이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도 그들은 마음이 이미 굳어져 선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은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망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9절에서도 똑같은 사실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오히려 더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고 복음의 도를 비방함으로 자신이 악한 사람임을 현저히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파국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을 때 마음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무지와 마음의 굳어짐입니다. 에베소서 4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총명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 너머에 있는 신령한 세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지성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 지식의 빛들을 사용하여 수많은 행동들과 생각들을 만들어 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마음이 굳어졌다고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없게 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 자기를 버리고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완고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마치 브레이크가 망가진 채 과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아서 얼마간은 잘 달리는 것 같지만 위기를 만났을 때 스스로 멈출 수가 없어 커다란 사고를 당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자신도 이러한 완고한 마음이 싫습니다. 그래서 이 완고한 마음을 한 번에 버리려고 애써보지만 그러나 쉽게 버려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완고한 마음의 주인은 누구이고, 한때 주님을 사랑하던 나의 마음의 주인은 누구일가요? 두말할 필요 없이 내 마음의 주인은 나이니 내가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온유한 것은 우리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고하게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한 것이니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 떠나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입니다. 온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고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거기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이 강퍅해질 때에 그들이 어떻게 반역하는지를 지도자로서 모세는 긴 세월동안 직접 겪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그들의 완고한 마음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그 마음을 책망하시고 모세도 그 마음을 버리라고 하였지만 그리하지 않았을 때 그들의 끝은 커다란 불행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한 모세는 가나안 땅을 얻은 후에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유언처럼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엄혹해도 그것을 이기며 살게 하는 영적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함께함으로 이 모든 현실을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와 사랑을 겸비한 마음으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주시지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주님이 우리의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나는 나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라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목을 곧게 하고 있습니까? 그 마지막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맞으며 긴 세월을 살아왔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또 다시 하나님 앞에 교만의 죄를 지으려고 합니까? 이유 불문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신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하나님과 겨루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태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 앞에 드리워진 어두운 긴 그림자를 피할 수 없듯이 여러분도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고, 주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간다면 그 어두움과 불행의 그늘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오히려 이렇게 완고한 마음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예전에는 나의 목을 곧게 세우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았을지라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 목을 곧게 하지 않고, 오히려 완고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강퍅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돌멩이 같은 마음은 버리고, 살코기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큰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이 가장 선하고 좋은 것을 믿으며, 그분의 말씀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얻기에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모세는 혹시나 그들이 모든 것을 얻은 후 그들의 번영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교만한 마음이 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모든 마음의 완고함을 버리고 하나님께 어린 아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주시는 복을 영원히 누리며 살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집을 위해 바치고 이제는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 온 노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교만하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목을 곧게 하고 완고하게 살아간 대가로 여러분들이 얻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끊임없는 고난과 역경 경제적인 어려움과 심령의 고통, 이런 것들이 쉬지 않고 계속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덕 보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된 인간의 길로 돌아온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마가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목을 곧게 세우고 주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 때 어떤 하나님의 음성에도 마음이 꺾어지지 않을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제 이 말씀을 듣고 완고한 마음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B. 마음의 할례
두 번째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그러므로’가 무슨 뜻입니까? 이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이 너희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사 너희를 선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태어난 지 8일째 되었을 때 사내 아기의 성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것입니다. 산부인과에서 흔히 써컴(circum)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면 저절로 포피가 벗겨집니다. 잘라내지 않아도 벗겨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청소년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끄러워서 부모님께 말을 못하고 부모는 의학적인 상식이 없어서 아이를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벗겨져야 할 포피가 성기끝 부분까지 덮여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별 문제가 없는데 성장하면서 몸에서 많은 체액들이 분비되고, 몸 밖으로 불순물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것은 생식기 부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청소년들은 몹시 성기가 가려운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부끄러워서 별로 말을 못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신의 몸에서 아주 심한 악취가 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너무 가려워서 성기 끝부분의 포피를 뒤로 제쳐서 보면 거기에는 곰팡이 같은 여러 물질들이 하얗게 잔뜩 쌓여있는 것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악취는 이 세상에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아주 불쾌한 악취입니다. 그것들이 몸에 붙어서 화학 작용을 일으키면서 그 성기 끝부분에 피부병이 생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하면 많은 염증과 함께 병원을 찾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쯤 되면 아예 그 포피를 벗겨내는 시술을 하는데 그것은 포경 수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표를 이스라엘의 남자의 몸에 새기게 하신 것은 그것을 선택된 백성의 표로 삼으신 것입니다. 아울러서 이것이 의학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을 내버려 둘 때에 그런 불순물을 가지고 성적인 부부생활을 할 때 당연히 여자의 자궁에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것까지 고려하셔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생산 능력을 정결하게 유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할례 제도가 이스라엘에서 공식적으로 도입된 것은 아브라함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식과 집안 모든 남자와 더불어 99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할례는 그냥 할례만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고백과 함께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 9절과 10절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자손임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할례 받은 표를 보며 하나님을 향해 고백한 신앙을 가슴에 새기고, 그분이 주신 모든 언약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의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언약 백성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약속과 은혜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은 영혼을 살리심으로서 신자의 마음에 영원한 표를 새기실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몸의 할례가 단지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함께 뜻한다는 것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명백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예레미야 4장 4절 상반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할례를 마음에 행하는 할례로 묘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할례 받지 않은 남자의 성기가 포피에 덮여 있어서 온갖 더러운 것들이 쌓이고 악취 나면서 그의 몸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몸으로는 할례를 받았으나 마음의 할례를 지속적으로 받지 않을 때 그 마음에 죄의 껍질들이 덮여져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지 못하고, 그 마음에서 수많은 악과 더러운 것들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특징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되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백성들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할례를 받을 때에 포피를 모두 잘라내고 깨끗하게 된 것처럼 너희의 마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이 포피를 벗겨내는 수술을 할 때에는 가위로 그것이 사각 사각 잘려지는 소리를 귀로 직접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덮고 있는 죄의 가죽,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각양 더러운 탐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그렇게 마음 가죽을 베어냄으로 더 이상 마음에 있을 곳이 없도록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죄에 속했던 사람, 자아에 속했던 사람이 마음 가죽을 베어냄으로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연합된 가운데 살아가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할례에 대한 사상은 신약에 와서 ‘세례’로 전환이 됩니다. 신약의 세례는 죄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로 모시고 그 분께만 자기 자신이 바쳐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 세례의 감격을 유지하면서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향해 다시 산 기쁨 속에서 인생을 영위해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피는 베어냈으나 마음 가죽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그 마음속에서 온갖 더러운 것들이 기생하여 하나님 백성답지 않게 사는 것처럼 신자도 세례를 받았으나 그 마음은 여전히 죄의 가죽에 덮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불결하고 더러운 것들을 마음에 품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 받은 사람은 다시 마음 가죽을 벗겨내야 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 마음이 씻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목을 곧게 하는 것은 마음에 가죽이 덮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받았으나 마음에 다시 껍질이 덮여 더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포피를 잘라냈던 것처럼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더러운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야 하는데 이것이 곧 영혼의 변화이고 회개이고, 마음의 쇄신인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음으로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신 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 그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분의 뜻을 행하며 살라는 것은 특징이며 특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언제까지 지리멸렬한 신앙생활을 이어가겠습니까? 우울하게 교회에 왔다가 예배가 끝나고 나면 더 침체된 마음으로 교회당을 떠나는 것은 누가 기뻐하는 일일까요? 이미 하나님 앞에 말씀을 통해 모두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할례를 받고 새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길이 무엇일까요? 세 가지인데 첫째로는 마음의 할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마음 가죽에 덮여 온갖 불결한 것들이 마음에서 악취를 풍기며 번식하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서 여러분들의 마음은 피부병에 걸린 사람처럼 병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결국 할례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할례를 행하지 않고는, 그 표피의 가죽을 벗겨내지 않고는 남성의 불결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여성에게 전염이 될 것입니다. 장성하여 결혼을 했다면 말입니다. 마음의 할례 역시 그렇습니다. 마음의 할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눈을 떠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헤아려야 보십시오. 수많은 말씀도 피해가고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도 피해갔던 단단히 덮여져 있던 마음의 껍질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십시오. 그리고 껍질 밑에 감추어져 있는 그 모든 불결하고 악취 나는 것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우니 ‘주여, 나를 살게 하시려면 내 마음을 할례하여 주소서’ 라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말씀의 칼로 자신의 마음의 가죽들이 베이기를 허락해야 합니다. 통상 청소년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어서 이 시술을 하게 될 때 한 달 동안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한 2주 동안은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내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의 가죽을 벗겨내는 일은 항상 통증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입맛에 즐거운 맛집의 맛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몸과 영혼의 약입니다. 좋은 약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약의 맛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맛을 따지는 것은 음식에 적용되는 것이지 커다란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가치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이 약을 대할 때 그 가치는 달콤한 맛이 아니라 확실하게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마음의 살을 칼로 베이는 이 영적인 수술은 육체의 살을 칼로 베는 것보다 때로는 더 큰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라도 마음의 할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 마음 가죽을 베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한 사람들뿐입니다.
신앙은 나를 얼러주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설교자는 매일매일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떠먹이는 한두 수저의 약물로 건강을 되찾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수술대 위에 누워 팔과 다리를 묶고 마취제도 없이 이렇게 마음 가죽을 벗겨내야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사각사각하며 잘려 나가는 마음의 가죽이 베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여러분들은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 마음 가죽을 덮은 채 지리 하게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보람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칼로 마음의 가죽을 베이기를 깊이 허락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결코 분위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아주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할 때 이렇게 마음 가죽이 사각사각 베어지는 큰 고통을 겪고서라도 하나님 앞에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 이 말씀 앞에 결정을 해야 합니다. 왜 또 내일입니까? 왜 또 이번 주는 그냥 지나갑니까? 다음 주에 또 설교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언젠가 불현듯 저도 더 이상 여기서 설교하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맛볼 수 있는 영원무궁한 특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는 오늘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부르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엇이라고 인격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칼로 마음 가죽이 기꺼이 베어지기를 허락하는 사람은 새로운 삶에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로는 마음의 변화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근원적으로 고치심으로써 불구처럼 살아갈 수 없는 삶을 다시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신앙의 모습이 오늘 말씀 앞에 드러났으니 여러분 모두 마음의 할례를 받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행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하나님께 목을 곧게 할 때 세상을 향해서는 비굴해집니다. 그렇지만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마음 가죽 깊이 간직하고 있는 그 악취 나는 죄악 때문에 그분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길은 이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다시 마음 가죽을 베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명하시는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며 사는 것이 여러분들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잔인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마음의 살가죽을 베는 아픈 일을 행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당신의 속한 자로 살기를 바라시기에 오늘 마음의 할례를 받고 당신께 속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5 (2019.08.11._주일오전)
5. 하나님 여호와를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신 10: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 지난 시간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적인 변화를 받아 사랑하던 것들을 도려내고 거짓된 것들을 잘라내며 마음에 겸손함을 가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하나님 여호와를 알라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 여호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성경은 먼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그의 존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높아진 마음을 버리고 헛된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도려내라는 것입니다. 본문 17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꽤 길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 누가 이 사실을 몰랐겠습니까? 따라서 성경이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잊고 살아가는 당연한 사실을 그 마음에 다시 작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A. 능하고 두려우심
먼저 하나님은 ‘여호와’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말과 여호와라는 말은 모두 한 분, 우리의 절대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 이름은 모든 이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름이고,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하나님의 본명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만약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을 뜻한다면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하는 이 단어는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이 특별한 백성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그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내어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이십니다. ‘가운데’라고 하는 이 말은 ‘the best’, 곧 최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들이 있는데 비교적 뛰어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신들이라 부르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하나님이시고, 너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거나 너희들이 상상해 낸 개념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제 있는 신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고, 혹은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여 주권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그들의 주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신데 이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고 그것들을 지으셨기 때문이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태어날 수 없고,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주들 중에 주시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끝없이 펼쳐진 세계, 밤하늘에 끝없이 전개되는 그 무한한 우주조차도 하나님 안에 있고, 그 하나님에 비하면 그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모든 세계를 만드실 수도 있었고, 있는 것을 사라지게 하실 수 있으며, 없는 것을 다시 있게 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시고, 만들어진 모든 것 사이에 질서를 지으시고, 그 질서를 지탱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인간이 모든 비참은 하나님을 모르는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데 있고, 의미를 안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는데 인간의 비참이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무지입니다. 자기가 인간으로서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리고 눈앞에 전개된 이 세계는 자기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였던 프리드리히 니체조차도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쨌든 인생을 살아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무지가 얼마나 커다란 인생의 비극인가 하는 것을 그 철학자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시며 그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양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고민이 고개를 듭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의 인생은 그것들에 도전을 당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을 뛰어넘으시는 능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할례의 살가죽 아래 깃들여 있는 더러운 이물질처럼 그렇게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면서도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때문에 복되기를 원하는 이런 모순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그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인생이 그분 앞에는 들풀에 매달린 이슬과 같은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부여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모든 기원이 그분에게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그 높고 위대하고 두려우신 하나님, 그분을 알고 기억하고, 사랑하는데 신앙의 요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더욱더 삶의 힘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외모로 보지 않으심
두 번째로는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왜 굳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과 하나님의 이 성품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확고한 증거로 삼습니다. 우리 인간은 외부 세계를 향한 다섯 개의 창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창문을 통하여 자신은 외부의 세계로 나가고, 또 외부의 세계는 자신에게 정보를 실어 나르면서 인간은 다양한 감정의 변화와 의지의 선택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은 어떤 외부의 세계와도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다섯 가지 감각이 모두 동원된 가운데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감각을 통하여 이 세계를 알게 되고 그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감각들 중 가장 압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각중심주의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간이 얼마나 시각중심적으로 살아가는지,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무서운 힘을 발하는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 이렇게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고, 텔레비전도 거의 없던 시대에 우리는 그저 시골 마음에 태어났거나 서울에서 태어났어도 자기 동네 밖에 잘 모릅니다. 그때는 우리의 외모에 대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비교 대상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 시골에서 밭 갈고, 땅 파고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보아도 그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네 생각하면서 자신이 무슨 중대한 결함을 가진 그런 외모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관심을 끄고 살아갑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이 나오고, 미디어가 발달함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땀구멍 아니라 그 땀구멍에서 솟아나는 습기까지 찍을 수 있는 퀀텀 TV까지 나오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지 우리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과 실물을 놓으면 그것이 화면인지 실물인지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영상과학이 발달했습니다. 이렇게 발달한 기술 속에서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빼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외모와는 아무 상관없이 어떤 특징적인 캐릭터 때문에 텔레비전에 등장해서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광고와 드라마에 동원되는 스타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눈길을 강하게 사로잡는 용모가 빼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연산도 있지만 성형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쁜 얼굴을 만들기 위해서 턱을 잘라내고, 광대를 갈아내고, 코에 살을 붙이고, 눈을 찢어버리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치러서 그렇게 미모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여하튼 원래 예쁘게 태어난 사람들이든지 아니면 성형을 하여 예뻐진 사람들이든지 상관없이 수만 명에 한두 명 될까 말까 하는 탁월한 미모의 사람들이 모여서 끊임없이 방송을 타면서 우리의 미의 기준을 바꿔놓습니다. 그 가운데 그 사람들의 모습이 모든 인간 외모의 표준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못생겼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욱더 시각중심주의 소위, 오콜라센트리즘(ocular-centrism)이라고 하는 것들을 부추겨서 모든 것들을 시각으로 판단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인지 중대한 범죄를 하고 도망 다니던 여성이 있었는데 얼굴이 너무 예쁘게 생겨서 팬클럽이 생겨나고 심지어는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탄원이 이루어질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런 시대와는 정반대로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화장기 없는 시커먼 얼굴로 그냥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강력한 가치의 기준이 나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까지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집안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게 하려고 사무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뛰어난 사무엘조차도 이 시각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맏아들 엘리압의) 허우대를 보고 과연 왕이 될 만한 용모를 가졌으니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라고 느끼며 그에게 기름을 붓고자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러니 이 시각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욕심은 사실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냄새 맡고 싶은 욕구, 만져보고 싶은 욕구, 먹어보고 싶은 욕구, 이 모든 것도 결국은 시각이 먼저 있을 때에 그런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르셨습니다. 그분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도 인정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0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나쁜 종교 지도자조차도 사람을 외모로 치하하는 것에 반하는 것이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상관관계를 설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예쁜 것을 보고 좋게 느끼는 이 감정이 왜 나쁜 감정이겠습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의 감각에 사로잡혀서 올바른 판단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리 대신 보는 것을 따라감으로써 우리들이 잘못된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요한 1서 2장 16절에서는 ‘안목의 정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목의 정욕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육체의 감각에만 사로 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면 인간은 결코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쾌락에 빠지는 모든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쾌락을 경계해야 하고, 심지어 그것이 심할 때에는 죄악시하고 그것을 멀리하도록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에 깊이 빠질 때 인간의 정신은 의미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의미는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취발트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라고 하는 구 프린스턴의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 인간을 진리로 구성하셨다. 그래서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을 믿을 수 있게끔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요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가장 진리의 요체인 이 복음을 알게 될 때에 진리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을 제일 먼저 줍니다. 무질서하던 모든 것들을 질서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각 중심주의에 사로잡혀서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비로소 진리 때문에 눈을 뜨고, 내 위에 계신 분과 내 옆에 있는 인간들과 그리고 내 아래 창조된 이 모든 만물들이 나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 있기를 원하시는지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행복과 기쁨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기쁘지 않으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고통만 있는 행복, 그것이 행복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기쁨은 행복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쁘기만 한 것은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라는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히브리의 젊은 학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학문의 세계를 통해서 그동안 인간들이 잘 몰랐던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 자신에 관한 많은 설명을 내놓습니다. 어떤 것들은 우리가 배울만한 것이고, 어떤 것들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가 한 설명 가운데 저의 눈길을 끌었던 설명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한 행복은 내 앞에 전개되어 있는 상황이 나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즉, 이것은 깊은 의미의 행복이라기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에 그 광경이 나를 기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그 음식 때문에 쾌감을 느끼는 그런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서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어떤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그 광경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을 보는 가운데 우리의 몸속에서 생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너무 그립고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게 되고, 더 이상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면서 그 사람하고만 있고 싶어집니다. 우울했던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기뻐집니다. 세라토닌 같은 물질들이 우리의 몸에서 배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물학적 중심의) 생각을 갖게 되면 우리는 극단적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됩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물질들이 우리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그 비밀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굳이 아름다운 곳으로 가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우리 속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한 알의 약으로 우리 속에 생화학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감각 세계가 그것을 가져다주지 않았는데도 이 안에서 극도의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약의 원리가 그것입니다. 그렇게 마약을 하면서 황홀경 속에 빠져 들어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을 정도로 기쁨을 누리는 그것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기쁨 없이는 행복일 수 없는데 그렇게 기쁜데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기쁨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없는 것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의미와 단절하고 그런 강력한 기쁨 속에 들어갈 수 있을 때에 그것은 그가 의미를 찾아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의 힘을 잃어버리는 폐인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쾌락을 멀리하게 하도록 가르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깊이 동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적인 쾌락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결코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찾고 굳건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살다가 너무 통증이 심하면 몰핀도 맞습니다. 저도 수술할 때 맞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강력한 진통제를 먹어서 통증을 잊게 만듭니다. 그런 약물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환각 효과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 물질이 살면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안 하면 병상에서 고통을 이길 수가 없고, 죽기 직전에 살이 뜯겨 나가고 뼈가 부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통증을 잊게 해준다고 해서 그것으로만 연명을 하면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반드시 기쁨이 있어야 행복이지만 기쁨이 있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은 행복이 아닙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의미를 일치한 마음으로 붙들고 살아갈 때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라는 이 말씀은 그냥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시지 않는다라는 말 이상의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사람을 외모로 보며 살 위험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그것 때문에 참된 행복에서 멀어질 위험이 매우 높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어떤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자, 눈을 열고 보면 수많은 것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에서 다양한 인상들을 남깁니다. 당연히 비참한 것에는 눈을 돌리게 하고 - 물론 호기심으로 인해 비참한 것을 알면서도 보고 싶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눈길을 끌어 거기에 가고 싶고 또 그것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어떤 것들이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을 끌 때에는 그것이 없이는 내 인생에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느낌까지 갖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환각입니다. 착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눈을 열고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가 피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들어온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부패성과 만나서 우리가 그것들을 보지 못했을 때는 갖지 못했던 수많은 욕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 없이 살아왔는데 한 번 보고 나니까, 혹은 한 번 쓰고 나니까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마음을 갖게 되고,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는 내 인생이 의미가 없다고 여기거나 아주 불편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 속에 끊임없이 불어넣어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가져야 되는데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오지만 그것들이 내가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시 해석되어서 어디까지가 내가 용인해야 할 것이고, 어디까지 내가 갖지 말아야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름다운 집을 보았을 때, 그 집을 보면서 ‘야, 정말 예쁘다. 어떻게 이렇게 설계를 잘했을까? 정말 놀랍다. 참 많은 것을 배웠구나’까지는 괜찮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저 집을 가져야지’ 욕망을 품고 그 다음에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집을 자기가 소유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쁨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자신에게 가져다 준 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야, 정말 아름답다. 어떻게 정말 빼어날까?’ 그냥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든지 저 여자를 소유해야지 라고 마음을 먹고 부도덕한 행동을 한다든지, 죄를 범하게 되면 그것은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보는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음욕이 일어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보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해석해 주어서 적도에 맞는 생각을 갖게끔 해주는 진리의 작용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교만함이 대게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가 이루어 놓은 성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자긍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량 이상의 마음을 품게 될 때 이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낙심하는 것도 우리의 상황을 보면서 좌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이 큰 풍랑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을 압도하는 그 순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죽을 것이라는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 시각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한은 이 시각이 우리의 마음에 활용이 되어서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눈 속에 들어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바르게 비춰서 해석하게 해주는 진리의 빛이 우리 안에 머무를 때에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를 압도하면서 밀려오는 모든 시각적인 것으로부터 우리를 어느 정도 절제하고 떼어놓을 수 있어야 됩니다. 메스미디어에 거의 자기 하루를 다 바치면서 사는 사람들치고 깊은 경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리의 힘의 빛을 받아서 우리의 감각들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받아들여 탐욕에 빠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비결은 일체의 진실함입니다. 감각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말씀으로 재해석하고, 거기에서 자신이 얼마만큼 이것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할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순간 마음을 하나님의 진리에 묶는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믿음의 눈으로 보는 바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압도적으로 여러분들의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많은 것들에 매여 사는 여러분들이 되지를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것들을 재해석하며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뇌물을 받지 않으심
마지막으로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뇌물이 무엇일까요? 뇌물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가진 자에게 제공하는 대가를 바라고 주는 금품이나 향응입니다. 뇌물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이익에 몰입하기 때문에 뇌물은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그 삶을 부도덕하게 만들고, 사회적으로는 공평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3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특히 성경에서는 재판관이나 관리가 뇌물을 취하는 것을 더 중대한 범죄로 봅니다. 신명기 16장 19절이 말합니다.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에게서 신에 대한 뇌물 개념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 뇌물 개념은 이런 의미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신들을 공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신들에게 주지 않으면 계속 불만을 품고 자기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들을 달래는 의미에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런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물이 헌제자의 마음과 동떨어졌을 때 그 제물은 오히려 하나님께 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7절 하반절이 말합니다.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식으로 드리는 제사와 헌물은 하나님 앞에 뇌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만하게 가지신 분이시고,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뇌물 같은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뇌물 같은 예배, 뇌물 같은 섬김, 마음은 드려지지 않는 형식적인 삶, 그것으로 자랑을 삼는 신앙,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자신의 뜻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 바치고, 자신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드리는 그 헌제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피하거나 자기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마음의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더러운 가죽들을 말씀의 칼로 도려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며, 온전히 마음 하나를 당신께 드리며 온 심령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마음을 다 드려 당신을 사랑하고 뜻을 다 바쳐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에게 과연 그런 공경과 그런 헌물이 필요하셔서일까요? 그렇게 모자라시는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이렇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가진 것 없고, 겸비한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지 않는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이십니까? 누구든지 가진 것 없어도, 내세울 공로가 없어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마음의 할례를 받으며 주님께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받으십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용서해 주실 것이고, 능력이 없다면 능력을 주실 것이고, 물질이 없다면 물질을 주실 것이고, 무지하다면 진리를 깨우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심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진실한 사람으로서 마음의 가죽을 베고 우리의 중심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찾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중심을 보십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뇌물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없어도, 드릴 것이 없어도 마음을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그분에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므로 거짓과 허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비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여러분이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6 (2019.08.18._주일오전)
6. 정의를 행하심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 10: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위대한 여호와이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뇌물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개인의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II. 정의를 행하심
그 첫 번째가 바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행하시니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정의를 행하심입니다. ‘정의’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말로 ‘미쉬파트’(mishpat)입니다. 원래 ‘재판, 혹은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판결’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재판의 이상은 판결을 통해 이해관계를 다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대로 산 사람들은 보호하고, 법을 어긴 사람들에게는 징벌을 가함으로써 공정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공의를 통해 세상에 정하신 당신의 질서를 보여주고 잘못을 바로 잡으십니다. 하나님은 세계와 모든 만물에 뛰어난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이 만드신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질서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삶이든, 개인의 삶이든 그 법도에 어긋나는 것을 바로 잡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고아와 과부일까요? 이것은 일종의 하나의 예로든 표현입니다. 즉, 고아와 과부들조차도 충분히 돌봄을 받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정의가 이루어진 사회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고아와 과부는 오늘날의 고아와 과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이었고, 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압제하고 혹은 그들에게 고통을 가해도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대명사였습니다.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라는 두 단어가 나란히 나오는 구절이 구약에는 열네 번, 신약에는 한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문맥은 모두 그들이 약자이고, 그들을 돕고 보호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문맥 속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특별히 보호하십니다. 고아이고 과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적으로 당시 가장 약한 자들이었고, 가장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고 그들을 책임지신다고 말씀함으로써 이스라엘 사회를 각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사회적으로 소외가 되지 않도록 돌보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에 대해 해를 입히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장 3절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야말로 압제 당하기 쉽고, 학대 받기 쉽고, 혹은 무제한 피를 흘림을 당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 미명 아래 탈취 당한 자들의 손에서 이들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성령 강림이 있고난 후 충만한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헌신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야고보서에는 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이 태도가 하나님께 얼마나 경건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나옵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보다 먼저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서 돌아보는 내용이 등장함으로써 경건을 개인주의화 하려는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길 어귀에서 개인 옷을 입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그것이 경건한 사람임을 입증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몸에 차고 있으면 그것이 그 사람의 경건이라고 믿어졌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선생은 이 거짓된 경건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부패와 거짓을 모두 보았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서 돌보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이는 고아와 과부가 환란 중에 얼마나 잊기 쉬운 존재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거짓된 경건에 대한 진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삶은 찬란하게 사람들 앞에 그 의미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병들고 굶주리고 무지하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에게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분의 긍휼이 넘치는 지상 생애와 그들을 위한 아낌없는 헌신은 그리스도가 얼마나 정의로우신 분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실까요? 먼저 소극적으로 보자면, 시편 146편 9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들을 특별히 붙들어 주십니다. 예레미야 22장 3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다른 힘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압제하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힘이 있는 자들이 고아와 과부를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이 정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16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들을 모든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즐겁고 기쁜 일이 있어도 명절이 와도 부모가 없는 고아나 남편을 여윈 홀로된 여자는 함께할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소외되지 않고 그 공동체 속에서 함께 즐거워함에 있어서 차별이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26장 11절에는 가진 자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곡식과 열매를 베풀게 하여 그것들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구제를 베풀면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우월감을 가져다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구제는 하나님이 주신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다시 배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물질을 이 세상에 주실 때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그러한 누림이 있는 사회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바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인 레위인에게 바친 그 성물을 그 레위인과 함께 이 고아와 과부들이 먹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고아와 과부를 걸인이나 부랑자 취급하지 않으시고 마치 특권층인 것처럼 다루시면서 레위인들과 함께 먹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26장 13절에 이 말씀에 대한 근거가 나옵니다.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레위인과 함께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백성들이 바치는 이 헌물로서 자신의 쓸 것을 충당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들을 편애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가까움을 더 많이 느끼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편애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성경이 그렇게 느껴졌다면 그 당시 고아와 과부들이 얼마나 억압받고 소외당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늘 무시당하고 억눌리고 압제되었고, 그리고 그들의 복지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사회 정의의 척도였습니다. 만약에 고아와 과부들조차도 사회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복지를 누린다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 사랑의 삶이 정의의 삶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에게는 늘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사랑과 정의가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것일까요? 그 이치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밖에서 주어진 질서와 자신이 생각하는 질서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법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나의 동의와는 상관이 없이 명령합니다. 내 안에서는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남의 것을 훔치고 싶은 마음과 훔쳐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남의 것을 훔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올바르다면 대가없이 남의 것이 거저 주어지는 것도 매우 싫어할 것입니다. 그래서 공짜를 좋아하는 것은 탐욕에 이르는 길입니다. 누가 무엇을 거저 주거든 이것을 내가 왜 받아야 되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것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질서입니다. “너희는 나 여호와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고, 또 세상에 대해 이런 뜻을 가지고 계셨으니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등의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마음에 있는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남편이나 아내, 혹은 연인을 뜨겁게 사랑할 때 어떤 심리적인 작용이 일어납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면 내가 원하던 것이 이루어진 때보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기뻐하는 것을 보는 때가 더 즐겁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은 정의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로운 삶이란 마치 거대한 판타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거대악과의 싸움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정의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그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의 삶의 열매는 정의입니다. 정녕 사랑은 정의와 충돌하지 않으니 사랑은 결국은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확산되어 나아가고, 정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맺히는 윤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니 거짓과 불의를 좋아하고,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속임수를 쓰고, 남에게 불이익을 안겨주는 불공정한 이 모든 삶은 당연히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의 불공정에 대해서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좋은 나라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을 법대로 집행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법이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사람들의 권력을 위해,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이 경제적인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유리하도록 법이 만들어지거나 만들어진 법조차도 돈과 권력의 힘으로 마음대로 휘게 할 수 있다면 나쁜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이러한 나라에 항거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이루어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의 나라가 격차를 보일 때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신앙의 나라를 망가뜨려 세상 나라에 일치시키려는 행동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찌하든지 이 현실의 나라를 끊임없이 정의롭게 만들고 올바르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근접시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 나라를 그렇게 근접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지만, 이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에 근접시키려고 끊임없이 정의를 행하는 사람들, 그 정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이 많으시고 정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선교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개인의 삶에 있어서 이 정의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도덕적인 삶은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없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정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의로워 보이는 삶을 산 모든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용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잃어버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용감합니다.
여러분, 그 얘기를 아십니까? 어느 나라든 목숨을 걸고 적진을 넘나드는 아주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가족도 없어서 그가 실종 되어도 찾을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감옥에서 쉽게 나올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특수 임무에 적합한 사람들을 선발하고 설득해서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주고 그 일에 헌신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나라가 공유하는 바입니다. 왜 그런 사람들을 그렇게 위험한 특수 임무에 차출할까요?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어린 아들이나 딸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혈혈단신인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질서입니다. 내가 누군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제껏 있었던 질서는 무너지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질서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당시 취미 우표 수집가였는데 얼마나 우표 수집을 좋아했는지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의 방 3개 중에 하나를 빼서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고, 세 방을 나눠쓰던 가족들을 두 방으로 합치게 한 후 그 돈으로 특수 금고를 샀습니다. 이렇게 취미 하나에 빠져도 그 사람의 삶의 질서를 바꾸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질서가 바뀌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한다고 고백은 하는데 그 사랑이 그의 삶의 어떠한 질서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상대는 그 사랑의 진정한 대상이 아니라 한 시간 노리개 감입니다.
사랑은 질서입니다. 인간은 사랑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끓어오르는 용광로입니다. 사랑으로 끓어오르는 용광로입니다. 그런데 그 용광로 안에서 들끓는 쇳물이 쓰러진 용광로에서 쏟아져 나와 이리저리 흘러 다닌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그러나 주조하고자 하는 틀이 아주 견고하고 안전하다면, 또 만들고자 하는 그 기구의 틀에 쇳물이 정확히 부어진다면 이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의 삶에 아주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인간의 마음속에 용광로처럼 사랑이 일어나도 그 사랑이 어디로 흘러야 될지 질서를 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질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에게 비취면 혼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진리는 질서를 부여하고 사랑은 그 질서를 따라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사랑은 따로 떼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진리를 떼어버리고 사랑만 요동칠 때 그 삶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질서는 참된 진리 없는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진리는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마음에 받아들인 사랑의 질서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개인의 삶의 총합이 사회의 현실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는 고아와 과부를 위한 공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돌보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의 질서를 따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릅니다.
그런데 과연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자가 남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의 질서가 정의고, 정의는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누구나 정의의 삶을 삽니다. 그가 비록 정의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더라도 따로 배울 필요도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정의의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살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정의의 질서입니다. 악은 이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의로운 질서를 추구하기 때문에 참된 사랑은 이 질서를 거스르는 불의에 항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무질서와 그리고 거짓, 위선과 그리고 모든 불의에 항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왜 은혜를 주셨을까요? 여러분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과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바꾸어 놓으셨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여러분들에게 주님과 만나는 놀라운 감격을 그냥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을까요? 그렇게 가슴이 저밀 정도로 밀려오는 놀라운 신비한 느낌은 얼마나 더 계속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세상에서 가진 것 많지 않고, 높은 지위나 사람들에게 주목 받을만한 재능이 없어도 우리는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용기가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고 떨어지는 별 떨기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과 그리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모든 탐욕들로부터 벗어나 정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짓밟아도 괜찮다고, 압제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조차도 모두 하나님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라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으면 여러분의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의 이 정의의 질서를 따라서 사셔야 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작은 이익을 뿌리치고, 대의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단호한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정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보다 훨씬 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전심으로 사랑의 질서를 따라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과 뜻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의 삶은 정의로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입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위한 정의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받을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굽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질서롭게 해주시옵소서. 이 질서가 나의 삶에 이루어지게 해주옵소서. 이 질서가 모든 이웃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서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7 (2019.08.25._주일오전)
7. 사랑을 베푸심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8-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진실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정의(正義)를 요구하셨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의 질서를 따라 살고 그것은 정의로운 삶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들에게까지 돌봄과 보호가 있다면 그 사회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사회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II. 사랑을 베푸심
오늘은 그 정의와 함께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고 말입니다.
A. 나그네를 돌보심
먼저 말씀은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특징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삶을 말하면서 나그네가 등장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나그네는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째는 이민족으로서 잠시 머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종과 문화, 피부색깔, 심지어 종교조차 다른 사람들까지 돌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을 복주시지만 죄인들이 사는 땅에도 은총을 베푸셔서 그들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그네들에게 떡과 옷을 주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대해 회고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그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신명기 29장 5절에서 말합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8장 4절에서는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입히고 먹이고 돌보신 것처럼 또한 이스라엘은 모든 나그네들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가 이렇게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들을 먹이고 입히심으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민족들에게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아버지이시며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단지 종교적인 만족이 되지 말고 이웃에게 뻗어나가는 사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나그네조차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먹고 입고 그리고 누리고 사는 인간적인 생명의 보호와 존엄을 보장해 주는 사회가 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서 가장 무시받기 쉬운 계층의 사람들, 고아와 과부들조차 합당한 돌봄을 받게 되면 그 사회는 정의가 이루어진 사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시하고 돌보지 아니하는 이방의 나그네조차 이스라엘 땅에 우거할 때에 떡과 옷으로 공급받고 보호를 받는다면 그 사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성취된 사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신 바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나만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는 만나는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요, 구원 받은 나의 자녀가 된 징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나그네에게 긍휼을 베풀고, 만나는 모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은 신앙에 있어서 선택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삶이 아니면 신자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의 삶은 삶의 의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으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웃을 사랑하며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나그네를 사랑함
두 번째는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나그네에게 떡을 주라, 나그네에게 물을 주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네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네 땅에 거하는 나그네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 후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후 이루어질 사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기업으로 받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며 살게 될 때 그 땅을 지나는 혹은 우거하는 나그네들을 가엾이 여기며 그들조차도 사랑하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그들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 하시고, 마지막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시는 그 은혜에 대한 신앙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자비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베풀되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받는 나그네에게까지 이 사랑을 베풀어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그네입니까?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나그네입니까? 이것은 고아와 과부를 거론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사회가 비교적 정의롭게 된다고 할지라도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뒤쳐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힘없는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복지가 골고루 베풀어지고, 그들이 소외되지 않고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랑을 받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모든 사람들 중 어쩌면 노예보다도 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인간 존엄성이 짓밟히는 사람들이 바로 나그네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조차 자비와 긍휼이 베풀어진 사회라면 그 사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된 사회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이방인들의 종교와 부도덕한 풍습은 거절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화가 다르고, 종족이 다르고,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억압받고 멸시받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사회는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나그네들조차 충분히 사랑을 받고, 인간으로서 생명의 보호를 받으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회를 건설해야만 이스라엘이 예전에 가나안에 있었던 타락한 나라와는 다른 나라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정의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의 은혜로운 사회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나그네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18절 하반절에서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지만 그 사랑은 이스라엘 안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에게서 온 나라와 땅으로 두루 번지며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도 한때는 나그네였음을 말씀하십니다. “...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10:19下). 광야에서 그들은 정착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그네였고, 그래서 위협을 느낀 나라들과 수없이 전쟁하며 가나안을 향하여 가야 했습니다. 멀리 보면 애굽에서도 그들은 나그네였습니다. 더 멀리 보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그 조상들이 나그네로 산 사람들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3장 4절에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은 비록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고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으나 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에 거하는 동안에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의 신분은 나그네였습니다. 거류하는 자였고, 그리고 가족을 매장하기 위해서는 그 원주민에게 땅을 사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그네와 같은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나라를 구원하고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이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를 가나안에 세워지는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나그네는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이스라엘 땅에서 경제적인 돌봄과 사회적인 보살핌을 받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밭에서 추수를 하면서도 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곡식의 일부를 남겨두게끔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나그네로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믿음을 천국을 향하는 신앙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과 14절에서 성경은 이 사람들의 삶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누구였습니까? 우리도 역시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때는 이 세상이 우리의 전부인줄 알았으나 인생의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여기가 우리의 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영적인 나그네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나그네와 같이 이스라엘처럼 광야를 방황하지 않습니다. 정착된 나라에 살고 있고 나라가 백성들을 지켜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나그네들이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인권이 짓밟히고, 꽃다운 젊은 목숨들이 죽음으로 스러져 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전 세계 많은 바다에서 정착지를 찾지 못해 떠도는 수많은 보트피플들이 여전히 있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은 채 이름 모를 바다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난민들이 보트를 타고 그렇게 어린 아이로부터 여자, 그리고 노인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죽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필사적으로 그 보트에서 탈출해서 상륙하다가 땅에 얼굴을 묻고 죽은 서 너살 먹은 남자 아이의 죽음은 차라리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현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어디 이것이 남의 나라의 문제이겠습니까?
우리나라에도 공식적으로 백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우리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에 종사하며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이 땅에 왔습니다. 이들 때문에 우리의 산업이 떠받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색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우리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에 멸시하고 천대하고 기본권을 유린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존엄권을 짓밟는다면 어떻게 이 사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이민족이라도 피부색깔에 따라서 유난히 차별대우를 하는 이 나라는 이점에서 깊이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며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의 삶을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와서 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이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고 아이를 낳았는데도 그 아이의 생김새가 다르고, 부모 중 한쪽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사회적인 냉대를 당하고, 하층민 취급을 받고,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복지의 기회에 있어서 차별을 당하고,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회라면 어떻게 그 사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발견하고, 그분의 형상을 찾아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존중하도록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열등한 민족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90년 전에는 선교사들과 외교관의 보고에 따르면 희망도 없고 열등하고 더럽고 체면을 차릴 줄 모르는 그런 백성들이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사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사회가 부정직하고, 속이고, 그리고 차별대우를 받고 있지만 그때 사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더 나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회는 가진 소유와 피부색깔과 인종과 교육의 수준과 성별, 그리고 연령의 차이 때문에 혹은 육체적인 장애의 유무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나그네였습니다. 가난한 나라를 등지고 성공을 꿈꾸며 미국에서 나그네로 살았고, 선택된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성공의 꿈을 안고 독일의 땅에서 광부로, 간호사로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의 설움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있는 나그네들을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누리고, 불법 체류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 땅에서 살아있으면 그들에게 최소한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들의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고, 그리고 치료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조차 아무 의식이 없이 이렇게 자기 나라밖에 모르는 맹목적 국수주의에 사로잡힌다든지 근거 없는 이론으로 나그네들을 비방하고 우범자 취급을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그네들을 돌보도록 이스라엘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땅에 있었던 모든 악한 나라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땅을 누리게 될 때에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넉넉한 것들을 가지고 자신들이 누릴 뿐 아니라 그 땅에 가엾게 나그네가 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며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다른 나라와 다른 백성들인지를 온 땅에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말씀하셨는데 그 ‘너로 말미암아’라는 단어는 ‘네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나라에서 이방 백성들 가운데 구별하셔서 선택하셨지만 구별하셔서 선택하신 이유는 모든 민족을 이스라엘 안으로 불러들이게 하기 위해서 구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구별하셨지만 구별하신 이유는 모든 민족을 이스라엘 안으로 불러들이게 하기 위해 구별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며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구별된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분명히 여러분들은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구별하신 것은 영원히 구별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구별된 여러분 속으로 이 세상에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시기 위해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땅에 살고 있는 나그네들이 그런 자비와 긍휼을 받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올 때에 이스라엘이 행복해진 것처럼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올 때 모든 이방의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세상이 알 수 없는 은혜를 주신 것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을 통해 그런 사랑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아니하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여러분도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주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과 13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으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불쌍한 나그네들을 선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굶주린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시고, 짐승과 같은 헐벗은 우리의 삶을 거룩한 행실로 옷 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짐승처럼 살던 우리에게 인간이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셔서 여전히 짐승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있는 사람들로 삼으셨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의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두 우리가 나그네이던 시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여서 하신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무한한 사랑, 그 끝없는 자비, 짐승 같은 사람을 선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가슴 저미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에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미움은 그릇된 기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그렇게 많이 갖습니까? 주님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되돌아오는 대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미천한 인간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를 그냥 살게 하지 않기에 우리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고, 아무로부터 그 사랑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아도 사랑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우리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잃어버리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사랑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갖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주께서 그리하라고 하시는 동안 이 땅에 잠시 머물다가 지나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주가 계시는 곳, 주가 자비와 긍휼을 무한히 베푸시는 곳, 의심할 수 없는 명료한 진리가 가득한 거기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 같이 나그네 된 자를 사랑하십시오.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며 긍휼히 여기는 여러분들이 되실 때에 여러분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나그네입니다. 잠시 머물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나그네의 길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나그네의 길에 많은 것을 쌓아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고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서 같은 나그네 된 사람들을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며 사는 것은 인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비결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아무에게도 사랑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냥 사랑함으로써 충분히 행복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사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해도 좋은 그 충만한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일상의 삶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숨 쉬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불행한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며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이웃에게 긍휼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자비를 베푼 사람은 자기가 베푼 선과 자비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때문에 그것을 베푼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것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 거래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려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고, 우리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며 그분의 것이 나의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바치는 모든 일에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고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8 (2019.09.01._주일오전)
8. 마지막 당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 10:2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도와 말씀과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안에서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대로 살지 못했던 지난날은 바로 불결하고 교만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갈피갈피에 있는 잘못된 사랑의 살가죽들을 도려냄으로 정결한 마음이 되도록 주님이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을 자신의 판단보다 낫게 여기고 굴복하라는 겸손의 말씀이었습니다.
II. 마지막 당부
이제 모세는 이제껏 가르쳐 준 가르침을 총 정리하듯이 반복하며 교훈을 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당부였습니다.
A. 경외하라
제일 먼저 경외하라고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지루할 정도로 모세의 가르침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도 여러 번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이 시점은 그들이 잠시 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가나안에서 유업으로 받을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유리하는 백성들이었으나 땅을 받음으로써 이제는 정식으로 나라가 될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라 정착한 농경민족으로, 또 유목민족으로서 부와 평화를 누리며 살 전망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간만에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광야의 때와는 비교되지 않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풍요롭고 번영하고 시련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 모든 것이 형통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더욱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뼛속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히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이 어떤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부요할 때든지 가난할 때든지 광야를 지날 때든지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잊지 말도록 신신당부하였습니다. 모든 윤리와 덕스러운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공경 받지 않으셔도 홀로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어떤 모욕을 받으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할 때에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선 안에 있게 되고, 그렇게 살아감으로써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당신을 경외함으로 행복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당신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또 그분을 두려워하고 사랑함으로써만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으며, 잠시 머물다 가는 이 나그네 세월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행복해져 보려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거늘 그 목적에 도달함이 없이 행복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행복해지려는 욕망이 강한 인간일수록 불행해지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더욱이 불신자들은 이 진리를 아직도 모르기 때문에 이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면 지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여러분들의 죄를 짊어져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 공로로 여러분들을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그분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이 위기 속에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왜 그런 위치에 처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자신은 정결하고 어떠한 죄도 없다고 교만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행복해 보려고 했던 모든 날들에 대해서 후회하게 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고 살든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렇게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경외함으로 하잘 것 없는 자신의 인생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미를 가진 인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모든 마음과 삶을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다시 처음 때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섬기라
두 번째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하셨습니다. 이 가르침도 모세가 수없이 남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본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호와의 온 집에 충성한 사람’이었다고 구약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 일생동안 당신을 섬겼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일하게 살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일평생 그를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스러운 종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언제나 노동과 수고를 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마음이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아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말고는 모두 허무한 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간 것만큼 힘든 일이고, 영혼을 섬기는 일은 그만큼 치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우리를 섬기도록 불러주신 이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들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섬기든지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단지 소비하며 즐기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이 세상에서 소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그런 권리가 없겠습니까? 그래도 때로는 그런 즐거움들이 우리에게 휴식을 주고, 육신의 생명의 자원들을 보호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더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비의 즐거움은 우리의 인생의 가는 방향이 분명하고, 그 방향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 격려를 받을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결코 소비와 쾌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까지 교회를 세우시려고 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왜 수많은 죄인들 중 한 사람인 나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불러주셔서 구원하사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도록 연합시키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허무한 인생을 살게 하시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태어나고, 흘러가고, 죽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던 설교자도 결국은 죽고, 설교를 들었던 여러분들도 죽을 것입니다. 젊은 사람은 늙어갈 것이고, 늙은 사람은 죽어갈 것이고, 죽은 사람은 그 육체가 먼지가 되어 허공중에 흩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때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도 좋아하던 세상 사랑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던 이 세상도 사라지고, 우리의 가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고, 영원히 변함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태어나고 죽고, 소멸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변함없이 그렇게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설마 하나님이 우리의 섬김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섬기기를 원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지만 불완전하고 죄가 있는 우리 인간들이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을 섬김으로써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섬기며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에 불을 지핀 그런 위대한 회심의 경험도 그 자체만으로는 오래 보존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불꽃은 섬김이라는 화로에 담겼을 때 오래도록 그 불꽃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17절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기 쉬운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입니다.
왜 무위도식하십니까? 그렇게 무위도식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위도식한지 10년이 지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사시는 동안 진정 행복하셨습니까?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복은 무위도식하는데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가까이 가는 사람일수록 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마음의 친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이런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 순결함, 오직 타인을 위한 헌신, 참된 가치에 대한 열망, 하나님의 도를 이루고자 하는 거룩함의 열심, 행복, 안정, 영원한 쉼, 복락 등 이런 것들이 무위도식하는 삶 속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마음의 친구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끝없는 원망, 정처 없는 불평, 감사치 않음, 불타는 시기와 불붙는 질투, 한없는 게으름과 나태, 그리고 불길처럼 타오는 정욕과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허무함뿐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위해 부르셨고, 그 행복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죽게 하셨건만 우리는 이 행복을 등지고 이런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속히 지나갑니다. 살같이 빠르게 지나가고, 똑딱똑딱 흐르는 1초의 시간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 초침 소리 속에서 여러분들은 늙어갈 것이고, 죽어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 앞에 감사치 않으며,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으면서 힘겨운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오늘이 어제까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살고 싶었던 내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천국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그날 밤 예수와 함께 낙원에 이르게 된 강도는 어떠했을까요? 지옥으로 가는 것보다야 행복한 것이지만 만약에 그에게 단 하루라도 이 세상에 살 수 있었다면 그가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목이 터져라 외치며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너희의 잠시 지날 인생 끝에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외쳤을 것입니다. 하루를 그 강도는 불꽃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지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쓸모 있게끔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금 그릇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쓸모가 있게끔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며 비교하며 부러워하거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나의 인생이 아니고, 그를 창조하신 목적과 나를 지으신 목적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지으신 목적은 같겠지만 그가 아니고 나일 수밖에 없는 목적은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모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그 자식들 중에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 자식은 사랑스럽고 겨우 겨우 먹고 사는 자식은 보기 싫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친부모가 아닙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자신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끊을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도 있다면,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가 이 정도라면, 그 그림자의 본체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어떠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 때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 순간 그렇게 죄인된 자기를 위해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해일처럼 밀려와 여러분들을 뒤덮었고, 여러분들은 그 사랑의 물에 잠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큰 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신자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 때문에 나의 인생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거나 심지어는 더 바보같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교만합니까? 그가 나보다 훨씬 낫다고 느끼며 근거 없는 낙심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 혹은 내가 그보다 훨씬 더 낫다고 여기며 근거 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교만의 죄에 빠지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하나님이 쓸모 있게끔 창조하셨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사람들을 밟고 군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히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앞에서 인간을 지으신 뜻을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인간 중 하나인 내가 없어서는 안 되게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거기에 대답을 발견하는 것에 있습니다. 거기서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과 구원하신 것과 아직까지 살려두신 것을 감사하며 그 하나님의 쓸모를 따라서 사는데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이 보람을 느낄 수 없고, 보람을 느낀 모든 사람은 결코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C. 의지하라
마지막 세 번째는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지하라’고 우리말에 번역된 이 본문의 히브리어 동사 원형은 ‘다바끄’입니다. 이것은 붙어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떨어져 있는 두 사물을 떨어질 수 없도록 붙여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 히브리어에서 ‘다바끄’의 명사형은 ‘데베끄’인데 ‘접착제’ 혹은 ‘풀’을 의미합니다. 떨어져 있는 두 사물을 접착제로 붙여서 두 개가 함께 움직이고 함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풀의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제대로 번역한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붙어 있고’ 이런 뜻입니다. 성경에서 ‘붙어있다’라고 하는 다바끄의 이 의미는 자신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떨어질 수 없도록 단단히 붙어 있어서, 다시 말해 연합되어 있어서 하나님 가는 곳에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영적인 연합, 사랑의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동물위에 뛰어납니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한 110cm정도 크기의 체구를 가졌다고 합니다. 큰 독수리가 낚아 채가기에 딱 맞고, 맹수가 만만히 여기며 공격하기에 아주 알맞은 체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인류가 살아남은 것은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의 힘으로는 당나귀 한 마리의 힘만 못하지만 그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자신보다 수십 배나 혹은 수백 배나 큰 짐승들을 포획하고 그 짐승들을 농사에 활용하고, 자신을 위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게 할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뛰어난 인간이니까 아무것도 의지할 필요가 없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고통을 당하지만 그 의미를 모릅니다. 아주 지혜로운 짐승은 때때로 그 고통을 어떻게 피하는 것까지는 알지만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그런 고도의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더 혼자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제가 회심하기 직전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매일매일 영혼이 파리해져 갈 때에 제가 제일 부러운 것이 길가에 자라고 있는 이름 모를 풀들이었습니다.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들, 그리고 특히 가을에 풀벌레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저런 것들은 얼마나 좋을까?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살아 있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이듬해 다시 피어나고, 자신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저것들은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입니다. 제가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이 이야기가 어찌 저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눈부시게 과학이 발전하고, 어렸을 때 국민 소득이 300불, 400불밖에 안 되는 시대에 살던 제가 이제 31,000불이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손끝하나에서 이루어지는 발전한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었을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우리를 훨씬 더 외롭게 하지 않았을까요? 평균 수명 45세를 못 넘기고 이름 모를 질병으로 죽어간다 할지라도 내 옆에 사랑하는 엄마가 있고, 아버지가 계시고, 그리고 사랑할 동생들과 형들이 있고, 그리고 친척들이 있고 이웃들이 있어서 좋았던 그때, 지금처럼 더 많은 탐욕도 필요 없고, 용모도 거의 비교할 필요도 없이 살아가던 그때가 이렇게 발전한 물질문명의 시대보다 행복하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미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과학의 도움을 받아 120세를 살고, 원하는 것을 손가락 하나를 움직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사회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영혼에 평강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그 마음이 하나님께 달라붙어 있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게끔 창조되었습니다. 그 행복을 버린 인류의 첫 조상으로부터 이제까지 모든 세상의 이야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얼마나 괴로웠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으라고 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세상의 부모들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녀인 여러분들이 부모의 마음에 붙어있어야지만 그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행복 자체이십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을 당신의 마음에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붙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불행한지를 보여주시고, 오늘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때려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좋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이 행복하고, 평안하고 안식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만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누릴 수 있고, 그 품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그것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딘가에 있다고 여러분들을 꾀이지만 정작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에 빠지는 순간 더 이상 여러분들은 유혹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는 영혼은 쓰레기 같은 상태가 됩니다. 마음은 혼란과 어두움에 사로잡히고,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허무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시편 84편 12절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붙어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84편 11-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자보다 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운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그 마음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통스러운 날에 시편 10편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지할 곳 없이, 돌볼 부모도 없이 세상에 버려진 그 고아들을 부모는 버렸으나 여호와는 돌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은 하나님께 결코 버림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하나님이 돌이킬 힘을 주실 것이고, 그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해주실 것이고, 그가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마음이 붙어 있으려고 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독생자도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 무엇을 더 아끼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붙어있는 마음이고, 그 마음은 모아진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은 마음은 흐트러진 마음입니다. 세상 사랑에 찢겨진 마음으로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회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던 마음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 붙어있게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행복을 언제나 누리고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에 붙어있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시련 속에서 교회를 섬길 때 언제나 부르며 눈물을 흘렸던 찬송입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옵소서. 지치고 고단한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날 인도 하소서’ 하나님 이외에 여러분들의 손을 끝까지 붙들어 주실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외치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여러분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응답하실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인생의 괴로움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가진 것이 없고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사실 그 진정한 원인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사랑으로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모든 갈등과 괴로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에게 당신께 붙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고 어떤 마음이 되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부디 복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주님에 붙어있는 것 이외에 어디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없었나이다. 떠나온 길은 멀지만 주께 가는 길은 멀지 않는 것이니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죄인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십니다. 자기의 모든 의의 신발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뿌리신 그 핏 길을 걸어 보좌 앞으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당신의 마음에 붙어있게 하시사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여러분 모두가 그 하나님의 마음에 다시 붙어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가르침을 전심으로 따를 것을 맹세하라고 명합니다. 20절 하반절에서 말합니다.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6장 13절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언약적 충성함을 다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낭독하고 그리고 피가 뿌려집니다. 그러면 그 뿌려지는 피 앞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 아멘 아멘 하고 화답을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적인 맹세는 언약을 수립하기도 하고, 이미 수립한 언약에 대해서 재 헌신을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아무것도 새로운 것은 없었습니다. 이미 모세가 수없이 말씀 전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이 가까워오는 무렵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긴 광야 생활을 끝내고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번영을 앞두고 모세는 이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맹세를 다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광야에 유리할 때든지 가나안에 들어가 번영된 나라를 이룰 때이든지 잊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게만 붙어있겠노라고 삶과 죽음을 걸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고, 피 끓는 젊음의 때가 지나고 장년의 때를 맞이하고, 또 노년의 때를 맞이하게 된다 할지라도 행복의 원리는 그때그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랑으로 붙어있고, 그분을 섬기고 경외하는 사람은 어느 때든지 인생은 살만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시련을 만나도 그 풍랑을 인하여 더 빨리 더 가까이 항구에 다가가는 것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붙어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찬송 받으실 하나님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신 10:21-2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마지막 당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에게 붙어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맹세할 만큼 중요한 이스라엘의 의무였습니다. 이 훌륭한 본문은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송 받으실만한 분으로 가르쳐 줌으로써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명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함이었습니다.
II. 찬송 받으실 하나님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실만한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여호와이십니다. 만입이 있어도 다 찬송할 수 없고 목숨을 다해 찬송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토록 찬송 받으실만한 분이실까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찬송 받으실 분임을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합니다.
A. 큰일을 행하심
첫째는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21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큰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굉장한 일을 의미합니다. 두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일의 의미가 매우 심각하여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크고 두려운 일은 결국 이스라엘을 위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인도하고 보호하신 것에서 나타납니다.
더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에게 유업으로 주신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저 멀리 아브라함과 그들의 조상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공로 없었지만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들을 기뻐하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일이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그들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을 때 그들은 애굽의 바로의 압제 아래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바로를 꺾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열대 재앙으로 애굽 땅을 쓸어버리시고 이스라엘은 보호하셨으며 홍해를 마른땅 같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조상들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양식을 공급 받았으니, 매일 이른 아침 내리는 만나였습니다. 그 만나로 그 많은 백성들을 먹이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광야에 지나가는 그 길에서 그들을 미워하는 수많은 족속들을 만났고, 숱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입고도 그들은 끊임없이 불순종했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님은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으로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들을 회개하게 하셨고, 회개해야 할 때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신 언약을 따라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큰일은 우리가 받게 될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의 그림자였습니다.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은 하나님이 그들을 가까이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자신의 장년을 모두 바치고 이제 죽음을 앞 둔 그때에 모세는 목 메이는 언어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셨는지를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친근하게 여겨주시는 특권이었습니다. 신명기 4장 7절에서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큰일을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바로의 압제보다도 더한 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이었고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며, 죄를 짓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보람으로 여기며 살던 무가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그 사단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시고, 죄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났으나 우리는 광야보다도 험한 인생길을 지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을 그렇게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셨으나 주님은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보호하셨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그들은 기적적으로 솟아나는 샘물을 먹으며 해갈했으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생수를 주심으로 갈한 영혼의 목을 축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기적의 떡을 먹었으나 곤고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주셨습니다. 굶주린 영혼이 그 하나님의 양식으로 새 힘을 얻고 사랑하며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크게 보일 때에는 하나님이 작게 보이고, 그리스도가 위대해 보일 때에는 세상이 하찮아 보이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배어들어온 염려와 근심, 은근히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지나가는 세상에 대한 탐닉과 욕정 때문에 마음속에서 그 은혜들이 아스라이 잊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가슴 시리도록 우리를 구원하시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수많은 영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고통스러운 삶의 사태들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과 은혜로 우리의 인생을 붙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어갔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한 사람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 엎드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큰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요체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것에 감동을 받고, 그 높고 크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먹한 현실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불붙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 엎드려서 죽어갔던 그 모든 불신앙의 이스라엘과 같이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큰일을 기억하며 현실을 능히 감당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자신을 다 드리는 인생을 산 후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위대한 사도 바울은 항상 회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핍박자요, 포행자이던 시절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구원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자기가 행한 위대한 업적을 기억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로라’고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 우리의 정신도 쇠약해질 것입니다. 모든 기억이 흐려져서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고, 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온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은 기억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정말 흉악한 죄인이었던 것과 그리스도께서 이런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말입니다. 우리에게 큰일 같았던 일은 사실은 다 지나가는 일이고,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큰일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것과 구원 받은 나를 인도하신 것과 인도 받는 나를 보호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가슴 저미는 사랑으로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큰일을 여러분들을 위해 행하신 것을 오늘 기억하고 있습니까? 모두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오롯이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여러분들을 위해 하나님이 이전에 행하셨던 그 큰일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과 같으신 분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들이 그 태양에 관심을 갖든 관심을 가지지 않든 혹은 지나가는 미친개가 태양을 보고 짓든, 짓지 않든 상관없이 태양은 언제나 거기에 변함없이 빛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찬송을 받으신다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멸시해도 하나님은 홀로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내용 중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찬송하라고 하신 이유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부패하고, 하나님께 붙어있지 못하는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부착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선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고 그 하나님 때문에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현실에서 잠시 눈을 떼고 내가 직면한 모든 일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이라고 통 큰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인생이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를 지나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지난 날 행하신 큰 일이 무엇인지를 회고하십시오.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면 이제 여러분들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며 살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번성하게 하심
두 번째는 번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22절은 말합니다.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천하의 기근이 닥쳤습니다. (그 때에 요셉의) 가족들은 우여곡절 끝에 요셉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애굽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광경을 창세기 46장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이때 식구들의 수가 7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14절에는 이 사람들의 숫자가 75명이라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아마도 야곱 자신과 그의 네 아내들을 포함했는지에 달린 것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애굽에서 태어난 요셉의 자식들을 두 명으로 볼 것이냐 혹은 70인 역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9명으로 볼 것이냐에 의해서 이 숫자는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다섯의 차이는 사실상 이런 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지 결코 모순이 아닌 것입니다.
하여튼 이렇게 소수였던 야곱의 집안은 애굽에서 탈출할 때 이미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야곱의 식구들이 애굽에 이주한지 430년이 끝나는 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처음에는 영광을 받았으나 (요셉이 죽은) 후에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울 수 있으리만치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애굽을 탈출할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한 암시를 우리는 출애굽기 12장 37절에서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했습니다. 노인과 어린 아이들, 부녀들을 모두 빼고 보행할 수 있는 장정, 아마도 이것은 전투할 수 있는 남자들의 수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전체 인구는 아주 적게 잡아도 250만에서 많으면 300만이 넘을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민족이었습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땅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유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설움은 단지 땅이 없어 유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소수였기 때문에 많은 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의 사건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야곱의 딸, 디나가 동네를 구경하기 위해 외출했다가 가나안 원주민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오라비들은 디나의 그 모습을 보면서 당장 달려가서 복수를 했습니다. 후에 그 소식을 듣게 된 야곱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왜요? 자신들은 소수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그 소식이 알려져 그 족속들이 모두 규합을 하여 복수를 한다면 자신의 가문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창세기 34장 30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소수였고, 그렇게 적은 민족들과의 싸움도 무서워하리만치 힘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이제는 바로에게 대항하여 탈출하게 하시고 광야를 누비며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번성한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이름 없이 낯선 땅에서 사라질 방랑객과 같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그렇게 큰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의 빛을 발하는 나라가 세워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리 위대할 지라도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미래에 보여줄 영적인 번영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번창함을 보여주는 서곡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특성을 설명하시면서 굳이 겨자씨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번성하는지를 말씀하시고 싶으셨다면 이스라엘에는 거목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겨자나무의 예를 드셨습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어느 한 학생이 카드를 보냈습니다. 여러 좋은 말과 함께 카드를 보냈는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카드 안쪽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진 손마디 하나만한 비닐봉지에 쌓인 그 무엇이었습니다. 솜 같기도 한 것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펴보니 그것은 겨자씨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작은 식물의 씨앗을 본 적이 없습니다. 겨자씨가 조약돌에 비한다면 참깨는 바위와 같다고 할 수 있으니 그렇게 겨자씨는 작습니다. 그냥 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습니다. 돋보기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작은 크기의 씨앗입니다. 손 한 마디만한 작은 비닐봉지에 쌓여있는 그것이 약 3000개의 겨자씨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거목도 많았지만 예수님이 겨자씨를 비유로 든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겨자 나무가 다 자라면 직경이 2.5cm-3.5cm, 그리고 높이가 2.5m-3.5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나무 자체로만 보면 큰 나무들과 비교할 때 거목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겨자씨를 옆에 놓고 나무를 보면 어떤 나무보다도 정말 커다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될 정도로 큰 나무입니다. 작은 새들이 와서 깃들 수 있을 정도의 그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은 이렇게 미약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창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8장 7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게 되리라”한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온 땅에 전파되어 어디에 가든지 교회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이런 식의 종교를 믿는 자가 없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난 한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것으로서 그 젊은이의 인생은 끝나는 줄 알았고, 그가 가르치고 영향을 미쳤던 모든 가르침도 수명이 다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분이 죽으시자 상상할 수 없었던 큰 교회라고 하는 나무가 자라게 되고, 그 나무는 숲을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빛을 던져주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자기의 땅에 떨어졌고, 그 씨앗은 자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나무를 이루고 숲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방법입니다.
신학교 선생으로 잘 봉사하고 있는 저에게 교회를 개척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삼일 밤을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지하실에서 8명의 교인과 함께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을 읽고 우리 교회 오고 싶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대니까 직원이 친절하게 교회 오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면서 자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왜냐하면 직원이 가르쳐 준 주소가 자신이 예전에 다녔던 교회로 자꾸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와보니까 그 지하실 교회는 자신이 옛날에 다니던 교회였고 곧 문을 닫은 교회가 맞더라는 것입니다. 관심도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가 세워진 그 자리는 다른 교회가 두 번이나 세워졌다가 문을 닫은 자리였습니다. 많으면 일주일에 네 번씩 교회에 물을 퍼내야 하는 그런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모두 그렇게 미약한 것입니다. 어제 선교사 파송식이 있었고, 격려사를 하기 위해 안산동산교회 담임 목사님으로 봉사하셨던 김인중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대학시절에 주님을 영접하고 불타는 가슴을 안고 신학교 들어갔고 그리고 신학교 다닐 때 개척이 꿈이 있었답니다. 어디서 어떻게 개척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시절에 우연히 신문을 보았는데 기사가 났더랍니다. 반월 쪽에 공업단지가 생긴다고 말입니다. 기도해 보니 하나님이 거기로 가라고 하셨고, 그래서 아내와 함께 돌도 안 된 아이를 안고 용달차에 짐을 싣고 무작정 가셨답니다. 나중에 공장도 세워지고 했지만 당시엔 진짜 허허벌판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전도하셔서 본받을만한 교회를 이루어 놓으시는 데에 38년 헌신하셨답니다. 당시 안산으로 개척을 나갈 때에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 중 단 한명도 ‘정말 잘 결심했습니다.’라고 격려해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서울에도 개척할 곳이 수없이 많은데 왜 사람도 없는 그 벌판에 왜 가느냐고 말렸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묻는답니다. ‘어떻게 목사님은 놀라운 선견지명으로 그 옛날에 여기에 터를 잡으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분의 직설적인 표현에 의하면 ‘선견지명은 무슨 개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왔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34살에 안양, 이 도시에서 신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전 이 도시가 참 싫었습니다. 사실 이 도시를 위해서 기도는 정말 많이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그 건물 난간으로 다가서면 이 도시가 한 눈에 보였습니다. 학교가 산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눈물로 이 도시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난 여기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이 강남에서도 환영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가고 싶지 않았던 이 평평한 촌으로 주님이 보내셨습니다. 교회를 하겠다고 개척을 했고, 교인이 많이 모이자 도저히 갈 데가 없어서 여기로 왔는데 솔직히 심란했습니다. 주변은 모두 다 부서진 공장, 영업 중인 공장이 아니라 다 떠난 공장뿐이었고, 저 멀리는 논과 밭들이 있었으며 마치 쓰레기 더미 같은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왜 여기로 보내셨는지, 왜 강남에서 목회하면 안 됐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서초구에서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계속 있게 하시지 왜 이 평평한 시골로 보내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합니다. 젊은 교수 시절, 수업이 끝날 때 혹은 수업 중 간간히 그 난간에 매달려서 이 도시를 보며 눈물로 기도하던 그것이 제가 여기서 교회를 하게 될 –우스갯소리지만- 불길한 징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는 다 알 수 없지만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아주 적은 소수에서 교회를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을 붙여주시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이제껏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저는 열린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매일 기도합니다. 그리고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열린 교회가 단지 양적으로 팽창하는 것은 추구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땅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 복음주의적인인 교회를 가득 채우고, 그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합시다.
우리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미약한 것이었습니다. 온 집안 중 저 하나 밖에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핍박도 받고, 가족들에게 야단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완악하던 가족들이 하나씩, 둘씩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그늘 아래 돌아와 단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미약한 우리를 번성하게 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처음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하찮은 것이었지만 주님이 우리를 거기에 불러주신 것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땅에 떨어진 밀알처럼 사용하셔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그렇게 사용해 주신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같이 하잘것없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하게 하시고, 우리가 섬기는 그 모든 봉사를 통해 약했으나 강하게 만들고, 미약하였으나 창성하게 만드신 그 하나님을 우리는 얼마나 찬송해야 합니까? 그 하나님을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보람은 무엇을 누리고, 누구를 지배하고, 수많은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명예와 사람들의 박수, 모든 좋은 소리, 칭찬, 모두 강물 같은 세월을 따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썩어질 것들을 위해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도록 태어났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생명의 도구가 되도록, 세상이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랑의 도구가 되도록 주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잠시 있다 사라지는 풀끝에 매달린 이슬 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은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그런 존재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면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소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사용하셔서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번성하게 하시고, 여러분들은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나를 위한 이 큰 구원을 끊임없이 생각합시다. 그 큰일을 행하신 것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우리를 구원하고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우리 하나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찬송합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번성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여러분 모두 이렇게 고귀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