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사랑으로 이루는 일치
녹취자: 허혜숙
* 내용 이해를 위한 토의
1. 신자들이 교제를 통해서 누려야 하는 교회의 일치란 무엇입니까?(171)
결국 기본적으로 교회의 일치는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모두 다 지순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자기가 되고 싶은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올바른 지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랑, 그것은 올바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와 결혼할 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모든 남자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동일한 감정이 아닙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남자의 경우를 말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한 여성을 향한 사랑과 모든 여성을 향한 껄떡거림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욕망에 의해서 울컥울컥 솟아나는 정념에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들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한 앎이 사랑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 방향이 따로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인생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갔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방향이 바뀔 것 아닙니까? 이런 변화된 존재의 목적이 지순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누리면서 얻게 되는 지순의 사랑의 일치, 까리따스의 사랑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은 두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사도들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를 볼 수 있었습니까? 그 때 드러난 교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172~173)
처음에 제자들이 있습니다. 제자들 속에는 사도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제자라는 의미가 크게 세 가지로 쓰입니다. 제자는 성경에는 가룟 유다를 포함한 열 두 제자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조금 더 넒은 의미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아니라 배와 그물을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들이 Full time 추종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누가가 쓴 사도행전에서 확 넓어지는데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나를 봐야 됩니다. 제자들은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일체의 긍휼의 삶을 사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이것은 결국 희생의 삶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눈에 직접 들어 온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위해 긍휼을 베푸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교회는 어떨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들의 시대에 그리스도는 무엇을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납니까?(173~174)
예수 그리스도는 가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그 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신자가 있고 기도하지 않는 불신자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 가시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눈에 띱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못 보지만 이 교회는 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추측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아마 이런 분이실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가 어떨 지를 예측했고 지금은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이 추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에는 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이야기는 교회가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해야 된다거나 혹은 교회가 세상에 아첨을 해야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 교회가 그런 것에 너무 많이 신경을 쓰면 안 됩니다. 솔직히 오늘날 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아주 표독스럽게 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데에는 교회가 반성해야 될 점이 물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여러 가지 부패라든지 부정이라든지 오늘날 여러 가지로 돈에 얽힌 추문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교회는 깊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종교계의 모두가 그런 점에서 가장 많은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점을 100% 인정을 하면서 그 다음에 애기하는 것은 어느 시대이건 교회가 문제가 없었던 적은 없는데 오늘날은 더 강력한 표적이 되는 이유, 그 중에서도 불교나 천주교나 이런 종교들에 대해서는 덜하고 개신교에 집중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이 ‘이것만이 진리다,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입장자체가 현대사상에 커다란 거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배타적으로 사람들 눈에 비치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반감을 가지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처지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런 처지에서 교회는 ‘아, 세상의 눈이 무섭구나, 세상에 잘 보여야 되겠구나.’ 라며 이런 것에 하나님께 신경을 쓰는 것보다 더 많이 신경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들의 경우 굴을 파고 묘지에 넣었습니다. 그것은 석회질 같이 잘 부스러지는 토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늘 봤습니다. 그것을 깨끗하게 회칠하는 것입니다. 회칠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시체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에 그들이 율법을 반듯하게 행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들의 행위는 본받으라’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왜? 저들이 갖고 있는 교훈은 본받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부합하는 행위를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탐욕, 사람들에게라도 잘 보여서 자신의 평판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탐욕,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개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날 도덕적인 많은 추문이 일어나서 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위축되거나 그것을 무시하거나 하는 태도를 가지면 안 됩니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하나님이 오늘날 교회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읽어내는 기회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잘 보여야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그런 세상의 비판들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이 가리키는 교회의 상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비난을 향해서 옷깃을 여미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모두 들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는가를 반성하며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해야 하고 혹시 그런 것을 보면서 세상이 막 박수를 치고 우리를 높여준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마음을 많이 쓰거나 우쭐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더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미담을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따라서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고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시는 새로운 인류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어떠한 비난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거기에 움츠러들거나 굴복하거나 혹은 세상에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사랑했을 때 우리가 걸어가기로 헌신했던 그 길을 꾸준히 흔들림이 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의 울림입니다.
3. 교회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1)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 일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175~176)
여러 번 나온 그림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교회에 보여 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여기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사랑이 생겨나면 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뿐 아니라 또한 지체들을,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하고, 그 표준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또 하나는 이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해야 합니다.
어제 저녁에도 코코가 가족은 다 자는데 나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제가 자기 전에 준비하는 것이 있는데 우선 침구를 깨끗이 정리를 하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입니다. 물을 끓여서 물주머니에 넣어서 꼭 잠그고 그것을 발아래 놓고 수면제 두 알을 놓고 물을 한 컵 떠서 가지고 가고, 그 다음에 세수를 깨끗이 하고 로션을 바르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과입니다. 그 때까지 코코가 계속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간식을 하나 주면서 “코코야 이제 자거라”하고 세수를 하러 갔다 오니까 내 방 앞에서 쭈그리고 엎드려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가엾어서 안아주며 “코코야 이제 네 집에 가서 자야지”하며 집에 놓아주고 불을 모두 끄니까 코코가 ‘자는 시간이구나.’ 하고 압니다. “코코야 잘 자” 낮에는 손가락을 막 물고 장난을 치는데 잘 때에는 손가락을 막 핥습니다. 개가 핥는 것은 최고의 애정표현입니다. ‘주인님 저도 알아요, 이제 잘 시간이란 이야기죠? 네 알았어요. 오늘 주인님과 함께 너무 즐거웠어요. 갈 곳 없는 저를 돌봐주셔서 이렇게 아껴주셔서 감사해요,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핥는 것입니다. 물론 개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저는 손등과 바닥에 닿는 개의 혓바닥의 촉감을 통해서 그 언어를 읽는 것입니다. 가슴이 뭉클한 것입니다. 엄마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낳은 지 며칠 만에 휙 버려지다시피 애견센터에 온 이 강아지가 내가 이 아이에게 마음을 열고 짧은 인생이 아니라 견생이니 우리 서로 사랑하며 살자 하면서 이 아이를 가슴에 받아들이고 선의로 대해주니까 이 미물이 그렇게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싹 씻기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개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시간에도 도륙당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개와 우리 개 사이의 운명은 세상말로 한 끝 발 차이입니다. 이렇게 갈라지지 않습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의 만물을 선의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풀 한포기 꽃 한 송이 생물하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진정한 창조의 목적과 질서를 아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이런 것이 너무 약했습니다. 린 화이트 같은 사람에 의해서 오늘날 자연의 광범위한 파괴가 기독교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의 지평을 사람에게서 자연만물에 대한 선의로까지 가기고 가야 된다 이것을 가슴에 새겨보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가페를 깨닫고 까리따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창조목적으로 돌아가고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만물을 선의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2) 교회가 일치를 이룸으로써 이 세상에 보여주는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176~177)
첫째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탁월한 지혜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인간의 도리를 다해서 삽니다. 그러면 많은 무지한 사람들이 깨달으면서 ‘아, 저렇게 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이심을 인정함.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고 자연만물에 대해서 선의로 대하면서 삽니다. 왜 그럴까? 마지막에 아 그리스도가 이들을 다스리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교회는 독특한 목적을 가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세상의 돈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명예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인류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교회가 독특한 존재의 목적을 가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교회의 공동체적인 이상이 개인의 인생의 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4. 교회의 일치를 ‘사랑의 하모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78~180)
하모니는 뭡니까?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데 화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도, 미, 솔 이것이 하모니입니다. 예술에서 하모니는 음의 어울림입니다. 비유를 해서 부부가 가족이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원래 하모니라는 말은 음악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연극에 적용을 해서 각 역할, 역할이 멋있게 어울려서 일치를 이루는 것을 앙상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모니는 음악에 관한 것이고 앙상블은 연극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사회를 볼 때 하나님은 놀라운 하모니와 앙상블을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아내를 향해 저 인간은 나하고는 성격적으로 어울리지가 않아 라고 말합니다. 이혼사유 중에 제일 많은 이유가 성격차이라는 것입니다. 성격이 동일한 사람은 더 빨리 이혼합니다. 지금 아내와 이혼하고 자기와 성격이 똑같은 여자를 만나면 전처와 살았던 것의 1/3도 못 살고 이혼합니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벌써 결별설이 돕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용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1년밖에 안 됐는데 말입니다. 짜증이 납니다. 우리같이 객관적인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상처는 무엇으로 보상을 받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모니를 이루면 각기 성격이 다른 아들, 남편, 딸, 심지어 강아지까지 기가 막힌 앙상블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묘미가 바로 인생을 사는 멋이고 자유입니다. 사랑의 하모니라는 이야기가 어디에서 나왔나 찾아봤더니 아우구스티누스 설교 집 184번부터 229권 Z의 제 3권 270 여기에 하모니가 나옵니다. 하모니는 첫 째는 개별적으로 고유한 본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함께 도를 큰 소리로 내면 하모니가 아니라 함성이 됩니다. 물론 함성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궐기대회 하는 것 같아 무섭습니다. 도, 미, 솔 음악에 재주가 없는 여러분들이 하는데도 최소한의 하모니가 들립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함, 선을 드러내는 영광의 일치 이것이 사랑의 하모니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7장 7절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너무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과 달 별자리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5. 교회가 섬기는 세 가지 대상은 무엇이며, 그 섬김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181)
하나님을 섬깁니다. 세상을 섬깁니다. 교회를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목양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을 섬기는 것은 전도와 봉사로 나타나고 교회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