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비우신 하나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5-7)
여러해 전에 불교계에서는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위헌 소송을 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모든 종교가 평등하고 자유가 있는데, 특정 종교의 교주의 탄생일을 국경일로 정하는 것은 종교적인 평등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내용의 소송이었습니다. 그때에 법원에서 오랫동안 심리를 한 끝에 판결을 내렸는데 그 판결을 보면서 저는 매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판결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성탄절은 종교적인 절기라기보다는 이미 세속화 되어서, 세속의 명절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12월 25일을 공휴일로 지정해도 그것은 특별 종교를 비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법원의 판결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셔야 되셨는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그날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한번 마음껏 방탕하게 살아보는 허가받은 날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별로 실감이 안 납니다. 옛날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지 않았습니까? 12시에서 4시까지는 사람이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그 때 25일 날만 통금이 해제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자유라고 하는 것은 뭐 말할 수도 없이 기쁘죠! 그런 은혜 받은 날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설교를 통해서 “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됐는지” 말씀해 드렸습니다. 우리의 의를 위해서, 율법의 마침 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우리가 지은 죄를 속량하기 위해 율법의 요구대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예수께서 여기지를 않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지만, 그러나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의 일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냈고, 성령 하나님은 그를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셨고 성결의 영으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 부활하게 하셨지,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과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본체로 여기지 않음을 스스로 감당하시고 이 세상에 오시기로 그렇게 아버지 앞에 복종하시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령은 그를 구원하게 하셨으나,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구원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기대와 사랑을 품고 계신 것을 아시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죄와 슬픔이 많아서 거룩하고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을 ‘아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들아 네가 이 세상의 죄와 슬픔 가운데 살아가고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죄의 지배를 받으며 그 죄 아래서 종노릇하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는 내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 슬픔 많은 세상으로 내려가야겠다’ 말씀하실 때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멘’ 하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분이 자신이 하나남과 동등한 분으로 여기시고 이 세상에 내려가는 것을 거절하셨더라면 아기 예수의 오심도 없었고, 그의 죽으심도 없었고, 우리의 구원도 없고,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신이 하나님과 똑같이 여김을 받는 것을 스스로 거절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 분 스스로 하나님이시기를 거절하고 하늘에 계신 천군과 천사의 경배 소리를 거절하고 죄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 오시기를 스스로 원하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고 그리고 자녀의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는 말합니다. 그가 율법 아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속량하고 구원을 받아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이 빌립보 교회 교인에게 이런 마음을 늘 품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왜 사도가 이 빌립도 교회를 향해 윤리적인 권면을 하다가 이렇게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서 살아가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내가 분명히 알고, 그럼으로써 내가 과연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거절하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없이는 소망이 없는 인생들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오셔서 제사로서도 벗어날 수도 없고, 울어도 할 수 없고, 참아도 할 수 없는 죄와 슬픔과 고통의 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시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져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오신 것을 사람들은 축하하고 그리고 즐거워하고 노래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현장에 가 보십시오. 노래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분을 위해서는 상아로 깎아 만든 아름다운 침대가 준비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궁궐은 물론이거니와 방 한 칸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보좌를 모두 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들을 건지기 위해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리스도 예수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은 추운 마구간에 그리고 아마도 말이 먹던 음식 찌꺼기가 말라붙은 그러한 초라한 말구유 하나이었습니다. 그를 쌀 따뜻한 옷도, 이불도 없었습니다. 추운 날에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거친 보자기에 싸여서 그렇게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기 위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를 짐승과 한 우리에서 탄생을 맞이하도록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세상이 예수를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어디 노래할 이유가 있고 찬송할 이유가 있습니까?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헤롯은 창과 칼로써 아기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노래할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찬송할 만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 하신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자리에 계셨는지를 아는 천사들 그리고 경건했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그렇게 낮고 천하게 오신 것을 보며, 이 세상에 살았더라면 아마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찬송했고, 목동들은 이 아기 예수의 오신 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전갈을 천사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에 기뻐하고 하늘의 성도들도 기뻐하고 하늘의 성도들도 노래하고 기뻐합니다. 이 성탄을 말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슬프고 아무런 노래할 이유가 없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현장을 기뻐하고 경배하고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모든 성도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오신 모습 자체는 노래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에게서 고통이었고 슬픔이었지만 그러나 그 슬픔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찬송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버리셨기 때문에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오늘 성경은 ‘종’이라고 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 세상 성탄절 주께서 오신 이 소식을 전하면, 이때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모두가 육체에 목말라 노예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보다 더 이 세상에서 부귀를 누리고 영광을 누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즐기기 위해 가장 탐심들이 그들의 생활을 주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모든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타오르는 것 같은 욕망입니다. 이것들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질병과 사망의 고통의 노예가 되어 있고 착하게 살아 보려는 사람들도 이 세상의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피할 수 없는 고난과 가난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질병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노예적인 형체를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로는 세상에 오시자 마시자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시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땅에 왔지만 사람들은 그 땅을 예수님의 땅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서 왔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고 노예처럼 여기고 종처럼 여겼습니다. 자신들은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구원자로 대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원수와 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낮아지셨습니다. 부자 대신 더러운 구유에 놓이시던 그 순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사실 것인가 하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그 분은 전혀 하나님 같지 않았습니다.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싸우는 군사로 불러내는 권세를 스스로 포기하셨습니다. 낮아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가 그를 낮추시는 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아기 예수 오신 것을 엎드려 경배하기 위해서 가보니 그를 감싸고 있는 것은 거친 강보였고, 그를 눕히고 있는 것은 통나무로 만든 말구유였습니다.
아무런 선한 것, 우리의 눈길을 끌고 흠모하게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화려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키고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흠모할 만한 어떤 것들은 바라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 십자가의 복음 앞에 언제나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꽃처럼 향기 나는 화려함이 구유에 있을 까닭이 없고 강보에 싸여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그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정사요, 권세요, 모사라는 사실을 인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구유에 이후로 그 분의 삶은 한없이 낮춰지는 삶이었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셨습니다. 평생을 사셨지만 마지막 죽을 때에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옷 한 벌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구유는 초라하고 가난한 사람의 자식임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구유에 누우시고 강보에 싸이신 그 분은 분명 구약의 성도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사모하고 꿈꾸며 기다리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한없이 낮아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께서 오신 이 탄생의 날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이 그렇게 낮아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신 사실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리스도 예수를 볼 때마다 왜 우리를 한없이 낮추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은 하나님께 범죄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 사랑하는 종들을 보내서 예수의 귀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 때문에 그 구원의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교만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왔는가 보십시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건져서 우리를 그의 백성 되게 하기를 원하셨지만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교만이 우리에게로 미치는 하나님의 좋은 은혜를 가로 막았습니다. 우리의 교만한 죄악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고, 우리의 벗어지지 않는 이 거만하고 교만한 자아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거룩한 구속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기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예수여 오셨삽나이까? 이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었나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옵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구유에 오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으니 여러분과 저도 이 성탄절에 낮아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우리를 낮추고 우리를 낮춤으로 예수가 높아진다면 기꺼이 그것을 즐거워하며 한없이 자신을 낮춰 주님의 은혜가 낮아진 우리의 눈물로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게 되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두 번째 일은 ‘복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이신 그 분은 본성상 죽음을 혐오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빛이었기 때문에 그 분의 인격 안에 어두움이 양립할 수 없었던 것처럼, 생명이셨기 때문에 그 분은 죽음과 양립할 수 없는 인격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죽음의 위협과 죄의 슬픔과 맛보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다 통 털어 봐도 예수님이 잡수신 기록도 나오고 그리고 주무신 기록도 나오고 우신 기록도 나오는데 웃으신 기록이 나오지 않아요. 왜 그래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웃는 장면을 연상해서 그려 놓고 ‘래핑 크라이스트’, ‘웃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려 놓고 초상화로 보기도 합니다. 근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웃을 만한 일이 별로 없는 생애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오직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때에 오셔서 이루기를 원하는 그 생존의 목표가 분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저와 여러분 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복종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이렇게 생명의 본질을 거스르는 죽음에 복종하는 그리고 죄와 슬픔에 익숙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 세상에 있는 죄와 슬픔을 나누고 그들은 아픔을 덜어주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복종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종의 절정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할 수 있거든 아버지여 내게 임박한 이 잔을 내 앞에서 지나가게 해 달라는 기도에서 절정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이 그의 자멸하심을 깨닫게 되자 자신을 복종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력에 복종시키셨던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의 뜻을 성취하시기 바람으로써 자신의 뜻을 꺾고 자신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더 큰 일들이 이루어지길 원해서 자신의 작은 일들을 버렸습니다. 오늘도 복음은 이런 곳에서 역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기를 꺾고 아버지의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뜻을 포기하고 복종하셨던 그리스도 예수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다 큰 계획이 무엇이고, 그 분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무엇이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분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작은 계획을 포기하고 나를 꺾을 때 얼마나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기의 작은 계획을 포기하며 복종시키셨을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은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나의 계획을 더 존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성탄을 통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산타크로스로서 오신 곳이 아닙니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자신을 복종시키니 하나님의 아들의 표징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렇게 아기 예수를 기뻐하는 사람마다 그렇게 자기를 자기 뜻을 버리고 나를 항상 부인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가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이 오신 이 날에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는 그렇게 말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를 버리고 예수처럼 하나님의 계획에 복종하고 있는가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오늘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말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이 인간의 몸에서 동정녀의 태를 빌어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말로 세상을 구원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온 세상은 그 분의 말 한마디로 창조되었습니다만 한 사람의 구원도 말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죽이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 감격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성탄절의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인하여 마음 아파 해본 사람만이 아기 예수의 오심을 찬송하고 노래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서 종의 형체를 입고 죽기까지 복종하고 자기를 비우고 한없이 자신을 낮춘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마지막 결과였습니다.
낮아지고 낮아지셨지만 그의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심이었습니다. 거스르는 자신을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셨지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허락된 것은 십자가에 죽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모든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한 없이 낮아지기고 자기를 버리고 사람들과 같이 되어서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그 마지막 결과가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우리의 신앙의 진정한 열매는 현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이렇게 죽음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아날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됐습니까? 이 시대에는 노예가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노예는 요즘으로 말하자면은 짐승을 내다 팔듯이 우시장에 가면 소들을 쭉 끌고 나와서 호가를 하면서 사람들이 서로 가격 경쟁을 해서 사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노예를 파는 상인들도 있었고 시장이 있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을 이렇게 세워놓고 그리고 노예의 목에다가 때로는 목에다가 가격표를 매겨 놉니다. 그래놓고 그 노예들을 이제 매매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만약에 “이거 얼마예요?” “백만 원만 내시오.” “뭐 이까짓 것이 백만 원이나 해요. 이렇게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그러면 그 노예를 팔려고 하는 그 상인은 채찍을 들고 마구 후려쳐서 치면 이 노예가 아프다고 막 길길이 뛰면 “보십시오. 이렇게 쌩쌩하지 않습니까?” 노예를 파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이런 식으로 노예가 거래되었습니다. 그렇게 노예 시장에 어떤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인자하고 그리고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 그러면서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수표를 두둑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근데 자기는 노예를 살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지나가다보니까 상인에게 비참하게 두들겨 맞는 거야 이렇게 보는데 그 슬픈 서글픈 자기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너무 자기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거야 너무나 불쌍한 거야 그래 주인에게 가서 물어 봅니다. “노예가 이거 얼마요?” “한 마리에 백만 원만 내쇼.” “그 이놈 얼마요?” “백만 원이요” 그랬더니 이 노예가 애원을 하면서 이제 자기 아내도 같이 사가 달라고 자식도. “이게 다 얼마요?” “ 사백만원이요.” 그 자리에서 거금의 돈인데 사백만원을 긁어서 사인을 하고 줍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사 오는 것입니다.
사 가지고 노예들이 한 가족이 함께 같은 집에서 노예살이 하는 것도 참 기쁘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 다행이다 그리고 노예를 살 각오를 하고 오는데 집에 까지 와서 이 주인이 하는 말이 종이를 하나씩 써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인님 이게 뭡니까?” “나는 이제 너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노예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거는 너희들이 자유민이라고 하는 해방증서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돈 주고 샀으니까 이제 주인이 난데 주인인 내가 너희를 해방시켜 주노니 너희는 가서 이제 평안하게 살고 누가 와서 너희 보고 너희 노예지? 하면” 그 당시 노예는 이마나 등에 표가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화인이죠. 불도장을 찍어 놓는 단 말입니다. 그 등을 확 벗겨보면 누구 집 노예라고 하는 것이 딱 나타나서 도망가도 금방 잡힌 단 말입니다. “그럼 등을 벗겨 보면 너희가 노예라고 표시가 있어도 그 때 이 증서를 보여줘라. 그러면 이제는 너희가 노예가 아닌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거다. 가라.” 그리고 놔 준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속량’ 혹은 ‘속죄’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상인 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단입니다. 거기에 눌어붙어 그렇게 묶여 지내는 노예처럼 살아가는 그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그 인자한 돈 많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써서 건네준 수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속량하시기 위해서 마귀를 향해서 지불한 속전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값을 치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모르시는 그 분이 죄와는 관계없는 그분이, 죄인이 죽는 가장 고전적인 상징 중에 하나였던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의미를 감당했던 이유를 두고 성경은 말합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모두 저주받은 자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하나님의 속죄물이 되어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여야 할 저주를 십자가에서 당하시고 그리고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과 고난은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말구유간에서,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점점 더 낮아지고 낮아지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시고 그리고 가난한 집에서 생활하시고 그리고 죄 많은 사람들과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면서 그 분을 이 세상에 오시게 했던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대신으로 갚았던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꼿꼿이 자신의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살았고, 그가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고 그가 사망에 자신을 복종시키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악은 사라지고 슬픔은 없어지고 생명과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되어서 이제는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우리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모든 옛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송사하는 율법을 대하여 율법을 피하고,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를 송사하는 우리 자신의 양심에 대하여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마귀들에 대하여서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대적하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말하며 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앞에 남은 삶은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오시는 이 아기 예수를 전파하고 그리고 그 아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자랑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그 십자가를 우리 모두는 모두 사랑하고 자랑하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낮아지시고 복종하시고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예수의 뒤를 쫓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만물을 그 분의 이름 아래 복종하게 하시는 영광스러운 부활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이 세상의 낮아지고 복종해서 죽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부활의 소망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예수 오신 이 날에 예수의 뒤를 따라 살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언젠가는 이 세상이 진정으로 아기 예수의 오심을 알고 찬송과 경배를 돌려 드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