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백성들을 만나주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우리가 읽은 신명기 32장은 모세가 이제 그야말로 사역의 마지막 끄트머리에서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고 있는 유언과 같은 것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유언을 하다가 보니까 이제껏 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그 놀라운 은총에 대해서 회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많이 경험했고, 그리고 그 베푸신 많은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지 않도록 가르쳐주어서 주님이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가지셨던 그 기대를 따라서 살게 해 주고 싶었던 마음이 바로 이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는 모세의 마음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모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고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그랬습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사랑을 오늘 이 10절에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만나주신 은혜였고,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주신 은혜였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만나주신 은혜에 대해서 모세는 회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만나주시고’ 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를 찾아내셨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만남의 선도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 선도적인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찾으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찾아오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분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회고하는 첫 번째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모세는 그 만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났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황무지 곧 짐승들이 우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주셨다. 어디에서? 광야의 땅 안에서 그들을 만나주셨는데 그 광야의 땅은 황량하며 짐승들이 울부짖으며 몹쓸 땅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의 땅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광야를 삼중적으로 다시 세밀하게 묘사를 하는데, 첫째는 황량한 땅이었고, 그 땅은 짐승들이 울부짖는 땅이었으며 마지막 세 번째로는 몹쓸 땅 이었다 이거죠. 버려진 땅 이었다 이겁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난 그 삶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며 광야에서 아무것도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없었던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만난 것을 모세가 감격하며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말아달라고 모세가 당부하고 있는 그런 장면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 그 땅은 그야말로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그 광야의 길은 짐승을 사육할 수도 그리고 경작할 수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또 경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땅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마냥 거주하면서 작물을 경작해서 먹고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들이 구원을 받아서 가나안으로 이르는 광야에 들어섰지만, 그 광야는 그야말로 황량한 벌판이었고, 짐승들이 밤이면 울부짖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서 살기를 거절한 버림받은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꽃 피고 새가 우는 동산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고 물이 흐르고 기름진 논밭이 있어 작물이 무성하게 자란 그러한 기름진 들판을 지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의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먹는 물 하나에서 마지막에 양식 한 점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보면, 이렇게 황량한 벌판과 같고 짐승이 우는 광야와 같고 버려진 땅과 같은 들판에 거하는 것 같지 않던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어리던 시절이었던 즉, 야곱의 손에 이끌려서 국무총리 된 요셉의 애굽을 찾았을 때 그들은 광야에서 유리하는 백성들은 아니었습니다. 고센 땅에 정착해서 바로의 호의를 입으며 국무총리인 요셉의 보호아래 행복하게 살아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 후에 기름진 논밭에서 작물을 거두며 왕국을 이루고 있을 때에도 그들의 상황은 이렇게 거친 광야를 해매는 것과 같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에 이끌려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광야에 들어섰을 때 그는 그야말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런 황량한 벌판과 같은 상황에 있었고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부한 만남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는 땅, 양식이 없는 벌판, 그늘 하나 없고 풀포기 하나 없는 사막의 땅을 지나면서도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고, 주님을 찬송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은혜가 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교회를 이렇게 개척을 해서 목회를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리라고 하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기대해 본 적도 없고 예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모자랄 것이 없는 그런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너른 집에서 넉넉한 생활비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존경받으면서, 뭐 어려움 없이 일해가고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학교에서 자라나는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그 일은 보람된 일이었고, 또 제가 평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깊이 느끼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93년이 거의 저물어 갈 무렵에 하나님께서 뜬금없이 교회 개척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그렇게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르치는 대로 가서 목회하지 않는 그 목회자와 사역자들을 보면서 사실을 여기서 이렇게 신학생들을 일평생 가르치는 것은 별로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라는 생각은 물론 했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전파하고 싶은 그런 욕망 때문에 사실은 내 자신도 신학대학교에서 정년퇴직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제가 꿈꾸던 바는 이렇게 교회를 개척을 해서 험하게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임목사로 가기 적합한 나이, 그저 마흔 너 댓 되었을 때 그 때까지 푹 묵었다가 잘 나 자신을 준비해서, 좀 외모도 담임목사 풍채가 풍길 때쯤 되면 그러면 솔직히 말해서 큰 교회도 말고, 작은 교회도 말고, 그저 한 4,5백 명 되는 교회에서 물론 오라는 데는 두고 봐야 알지만, 뭐 그래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포도원을 하나 주시지 않을까. 그러면 가서 열심히 김매다가 교회에서 내 사역을 마무리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무슨 하나님의 섭리가 계신지, 뜬금없이 교회개척에 대한 마음이 생겨나서 그 때에 선배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개척은 아무나 하나?’ 그렇지. 나는 ‘아무’밖에 안 되니까 아마 안 될 거야. 그리고 저는 이 성격적으로 사근사근하고 그러지를 못해요. 정말. 사귀어 보면 안 그런데. 처음에 대할 때는 말이죠. 사실 붙임성 있는 성격이 안 되거든요. 나 같은 사람이 개척교회 해 놓고 교인 몇 명 모아놓고 맨 날 이렇게 무뚝뚝하게 이러고 살면 교회가 되겠는가. 그러면서 ‘하나님, 제가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데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그렇게 하고, 그리고 기도는 해야 될 것 아니에요. 기도를 했는데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거예요. 선배들이 개척교회 하도 코에서 단내난다고 그래서 사실 내가 주님을 사랑했지만 사실 여러분과 똑같이 사랑할 뿐이지 고난 받기는 싫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이 떠올라요.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머리가 초롱초롱해요. 그래서 일어나서 침대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기도를 하는 데 거의 한 밤을 다 새웠어요. 그런데 그 한 3일 동안 그런 생활이 계속 되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뭘 생각나게 하시는가 하면, 넓은 세상에서 수많은 울부짖는 함성이 들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가 떠오른 성경 구절이 뭐냐 하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심히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니라.’ 그 말씀이 떠오르면서 고통 하는 수많은 영혼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3일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정말 혼이 나간 것처럼 기도를 하고, 결국은 마지막 순간에 무릎을 꿇고 ‘제가 정말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이것은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인 줄을 제가 믿습니다. 그러면 제가 만사 제쳐 놓고 순종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제게 있어서는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었어요. 왜냐하면, 학교의 교수로 들어갈 때, 그렇게 단독으로 사역을 안 하겠다고, 각서를 썼어요. 그 때 제 마음에 든 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게 약속한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 학교는 내가 곧 정리를 하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리고 개척을 한 거죠. 기도를 한 날이 11월 15일 경인데 12월 12일에 개척예배를 드렸으니, 얼마나 불에 콩 볶아 먹듯이 빨리 이루어졌는지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학교에서 사택을 얻으라고 빌려 준 돈을 갚기 위해서 붓던 적금을 깨뜨려서 그것을 가지고 이제 교회 보증금을 주고, 지하실에 실 평수 25평정도 되는 지하실을 얻어서 의자 스무 개 놓고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렸죠. 그 때에 함께 하던 사람이 일곱 명인가 여덟 명쯤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껏 까지 하나님이 사역을 해 오도록 만들어 주셨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리는 교회가 두 번 들어왔다가 안 되어서 나간 그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교회에서 우리가 교회를 한 거죠. 그래서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책을 읽고, 방송을 듣고 열린 교회를 찾아왔는데 이상하게 옛날에 자기 다니던 교회 쪽으로 가지더래요. 몇 년 뒤에 왔는데. 그래가지고 와 보니까 자기가 옛날에 다니던 그 교회래요. 교회 이름만 바뀌었더래요. 그래서 들어와서 신앙생활 해서 안수집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나 간 7년, 8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몰라요. 하나님 앞에 회고할 만큼 길게 사역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의무적으로 회고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지금 기념일이니까. 회고를 이렇게 해 볼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 앞에 빼 놓을 수 없는 최상의 감사는 뭐냐 하면, 주님이 그 지하실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주셨다는 것, 새벽에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서 철문을 벌컥 열고 발을 들여 놓으니까 첨벙하고 발이 빠져요. 이게 왠일인가 하고 불을 켜 보니까 물이 차 가지고 무릎까지 지하실에 물이 올라와서 의자가 둥둥 떠 다녀요. 참 융통성도 없지. 그랬으면 빨리 물부터 퍼 내지. 거기다 발을 다 담그고 새벽예배 드리고 물 빼야 된다고, 지금 생각하니까 그 때 만약 전기 같은 게 올라왔으면 큰 일 나는 겁니다. 그 물을 저벅거리고 올라가서 그 강대에 서서 새벽예배 설교, 설교가 또 길기는 좀 길어요. 그 새벽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물을 펐어요. 그러기를 진짜 심할 때는 하루에 네 번까지 그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하나님 언제나 거기서 단 한 번의 예배에서도 사람들을 만나주시지 않는 예배가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설교 시간에 흐느끼는 목소리 때문에 그것을 정돈 시키고서야 설교를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한 만남을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이죠. 그것도 참 이상한 게 말이죠. 여러분들이 이 다음에 교회를 옮기게 되면, 그러지 말고 조그마한 교회도 좀 가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한 영혼 한 영혼 늘어나는 것은 좋은데, 어쩜 그렇게 인생의 막차 탄 사람들만 모이는지 몰라. 옛날에 부자였던 사람. 지금은 쫄딱 망하고 끼니가 없는 사람. 옛날엔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미끄러져서 실업하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 많은 상처가 있고 고통이 있어. 그야말로 오늘 하루하루 살아있으면 살았나보다. 생각하고, 살 미래보다는 죽음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할 유혹을 받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만 모였어요. ‘하나님 옛날에 부자였던 사람들 말고 요즘도 부자인 사람 좀 보내 달라’고, ‘옛날에 건강했던 사람들 말고 요즘도 건강한 사람 좀 보내 달라’고. 왜 하나님이 보내시는데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안 보내시고,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만 보내십니까.’ 그랬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렇게 음성을 들려주신 것은 아닌데 내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 봐라 이게 내가 네게 들려주는 응답이 아니냐. 내가 너에게 교회를 세워라 할 때 내가 너에게 보여주기를 목자 잃은 양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영혼들을 내가 네게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아멘’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길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많은 양떼를 부탁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모여요. 그러니까 잘 보세요. 시련을 당하면서 곤곤한 가운데 인생을 살아 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의해서 회복한 일정 기간이 없이는 성격도 어쩜 그렇게 나 유별난 것도 교회가 감당할 수가 없는데 하여튼 나보다 진짜 더 안 나오면 누가 뭐라 그래요? 그거라도 담임목사보다 나아야겠다, 그러고 성격도 아주 유별난 사람. 유별난 나도 감당해 낼 수 없는 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는 거야.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은 뭐냐 하면, 그 거친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을 걷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교회에서 만나주시는 거예요. 난 거기서 보았어요. 물론 개중에는 하나님이 크게 만나주셨지만 지금은 미끄러진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눈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제목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미끄러졌는지는 주님이 아실 것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미끄러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대로 순종하며 살지 않아서 미끄러진 사람도 있겠지만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제가 잘 돌보지 못해서 미끄러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낱낱이 헤아림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들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예전과 같이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하나님 앞에 왜 이 쓸모없는 사람을 이 길에 세우셔서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소중한 양떼들을 잘 돌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셨는지 하나님 앞에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끄러진 사람보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그것이 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인생을 이만큼 살아왔지만 저는 제 생애 가운데 다시 태어나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정말 기쁘고 그리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나 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들어서 인생의 벼랑에서 신음하고 있는 많은 지체들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어떤 때는 나의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말씀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마음에 꽂혔고,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생의 벼랑에서 벗어났습니다. 시련의 파도 속에서 던져진 구명정을 움켜쥐는 물에 빠진 사람의 단호함처럼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고 그리고 그들 중의 많은 수가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아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꿈꾼 교회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도 아니고, 그런 소망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왔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큰 교회를 꿈꾸는 꿈이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전 그런 꿈 없습니다. 내일 일은 모릅니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영혼들을 사랑하고, 부족하지만 힘이 있는 데까지 돌보고 같이 아파하고 그리고 돌보며 갈 뿐입니다. 나머지 계획은 나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르고 오직 나를 이 세상에 보내고 여러분들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그런 인생의 거친 광야, 짐승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가 으르렁거리고 삼킬 듯이 고통을 받는 그런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여러분들은 교회를 찾았고, 그리고 손에 손을 잡고 전도지를 들고 혹은 테잎을 들고, 혹은 책을 읽고 혹은 방송에서 듣고 혹은 전도를 받아서 교회를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미끄러져서 떠난 사람도 있지만, 훌륭하게 주님의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이 부르심을 주셔서 사명감을 가지고 걸어 나가 주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지금도 조국교회의 한 모퉁이를 거들고 있는 그런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가운데 최상의 은혜가 이 만남의 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한 것도 아니고, 저의 설교가 한 것도 아니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그래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 7년이 바로 그런 끊임없는 만남이 계속된 가운데 하나님이 주님의 사람들을 고쳐 오신 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커지면서 제가 세운 교회이면서도 말 안 듣는 팔 다리처럼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왜 교회가 딴 곳으로 가는 것도 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교회가 크면서 목회자가 여러분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기대에 흡족하게 여러분들을 섬기지 못하는 부분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세월이 흘러가고 지체들이 많아질수록 그러한 어려움은 점점 많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도처에 내가 필요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를 돌아보면 저쪽에 있는 영혼들이 마음에 걸리고, 이 사람을 만나서 심방하고 나면 저쪽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 몸이 열 개라도 있어서, 어느 전도사님이 그러대요. 복제를 해서 교구에 하나씩 주어서 원본만 집에 남겨 놓고 그렇게 쓰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말 그러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만남의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을 한 번 해 보십시오. 짐승이 울부짖는 황량한 광야와 같은 인생의 막다른 벼랑에서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찾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녹여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삼지 아니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 인생의 벼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고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을 미워하며 우리의 인생을 어두운 그늘과 철장 안에 마쳤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공로는 없지만, 하나님이 그 고통 하는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여기에 보내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치료하시고 문둥병자와 같은 우리들을 만나주셔서 아직도 변화되려면 멀었지만, 날마다 자기 깨어짐 속에서 우리를 이만큼 변화 받도록 만들어 오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만남의 은혜에 빚 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만남의 은혜에 빚 진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 은혜를 입고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 인고 하니, 이러한 만남을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늘 주시도록 교회의 건강함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보다도 더 고통 하던 영혼들이 이 세상에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눈을 감고 고요히 귀를 기울이면,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깔깔대는 그 웃음소리 뒤에 들려오는 인간들의 비참한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유일한 해답은 그들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배우고 길을 알아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망가진 사람은 주님을 만나서 고쳐져야지만 그 불행이 계속되지 않을 수가 있고, 아버지 앞에 무너진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야지만, 다시 새롭게 세워질 수가 있는 것이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만남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정말 수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다 부서진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어요. 그래서 사당역 앞에 ‘열린 교회’가 있다고 그러니까 역에서 내려서 휙 돌아보고 빨간 벽돌 높은 건물이 안 보여서 집에 그냥 돌아갔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우리 교회가 굉장히 큰 교회인 줄 알았던 모양이에요. 골목을 지나고 지나서 계단을 내려와서 화장실을 지나서 아래로 내려오면 지하 예배당인 줄은 몰랐어요. 그러나 거기에까지 교회를 찾아서 오던 사람들은 거의 뜻을 정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전 여럿을 보았는데 지하 예배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자리에 앉자마자 아직 설교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통곡을 하면서 울면서 은혜를 받는 지체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그 때 제가 심방을 하면서 지체들에게 많이 했던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이젠 좀 쉬어라,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받아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주님을 믿고 좀 쉬어라.’ 그렇게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언하건데 그 곳에서 여러분들을 목회하던 그 때가 제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시면, 깨뜨려질 준비가 되어있던 사람들,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안고, 예배의 자리에 오던 수많은 지체들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흐르고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지나다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 ‘열린’ 이라는 말이 멋있어서 왔다는 사람, 본 교회 가기에 시간이 늦어서 들어왔다는 사람, 뭐가 열렸는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사람, 뭐 열린 공간에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 거기가 좋아서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다는 사람,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의 특별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어느 때 보다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는 옛날 지하실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회고하는 예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때의 사람들이 옛날에 주님을 만난 감격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여기가 베델이도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도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더 큰 감화의 능력을 가진 예배로서 바뀌어 지지 않으면, 우리들이 마음에 정함이 없이 교회에 들어 온 그 사람들이 여기서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신 그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기억하며, 연약한 지체들을 끌어안고 커져가는 교회의 여러 가지 부족한 부분들도 인내하고 심지어는 여러분들을 낱낱이 돌보지 못하는 목회자의 부족함까지 여러분들이 그 너그러움으로 받아주고 그렇게 하면서 이제 새롭게 옛날에 우리처럼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를 오가며 고통하고 있는 수많은 지체들을 건져내어 그 지체들이 이 교회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그러한 돌봄과 희생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고,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이런 때를 위함인 줄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만남의 은혜에 빛진 자로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러한 은혜로운 만남은 처음 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은 그 시간에 일어났던 경험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감격적인 은혜의 만남은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그 은혜의 감격은 우리의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고 이 교회에서 뿌리를 내릴수록 더 풍부해져서 그래서 주님을 믿고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이 오히려 그 후에 강퍅해지면 처음부터 강퍅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몹쓸 사람이 되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한 번 은혜의 빛을 보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맛 본 사람들이 강퍅해지고 나면, 그 강퍅함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주님 앞에 받아야 할 책망도 그만큼 크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그 만남의 은혜는 처음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주님을 많이 만나고 교회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하나님을 매일 만나고 그 은혜 속에서 살아서 처음 사랑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더 많이 복 주셔서 여러분들이 처음 이 교회에서 주님 만나고 깨뜨려질 때에 가졌던 가장 귀한 소원.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그 소원을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그렇게 지속적인 주님과의 만남이 있어야지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에요.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은 보호의 은혜입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또한 삼중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이거죠. 여기서 ‘호위’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사바브’에서 온 말인데, 이것은 군대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포위하다' 그런 뜻이고요. 영어에서는 이것을 'shield' 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런 것을 머리에 두면 아마 이해가 그림같이 다가올 거예요. 왕이 있는데 그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많은 군사들이 왕을 에워싸고 자기 앉은키보다 훨씬 큰 방패로 팔방으로 둘러싸서 왕을 보호하는 광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바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싸워주시는 용사로서 성경에 묘사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보호하셨을 때 제일 먼저 하셨던 일은 이런 유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는 그 일이었습니다. 보호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둘로 묘사가 되는데, 하나는 ‘호위하다’ 이고 하나는 ‘보호하다’ 인데 이 ‘보호하다’는 히브리말로 ‘보살핌’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이에요. ‘care'. 앞에 있는 ‘사바브’ ‘포위하다’가 외부의 적극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적극적인 호위를 의미한다고 할 것 같으면 뒤에 나오는 이 ‘돌봄, 보살핌’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 아이라고 할 때 그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기까지 베푸는 일상적인 보살핌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사바브’라고 되어있는 ‘호위하다’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용사 내지는 용감무쌍한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뒤에 나오는 그 ‘돌봄’속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차라리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자상함이 깃들어 있는 care를 의미하는 것이라 이런 말씀이죠.
그러면 이제 첫째 ‘사바브’ 즉 호위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런 식으로 방패가 되어서 보호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섰을 때 광야와 같은 땅을 지났지만 그러나 그 땅은 대부분 임자 없이 버려진 땅 같았지만, 그러나 남의 나라 영토를 지나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정중하게 요청을 하며 도움을 줄 테니, 이 백성들을 여기를 지나가게 하고 물을 마시면 물 값을 내겠다고 제안을 해도 수많은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네 나라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그 영토에 들어섰을 때에 그것은 곧 적군에게 포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대들은 잘 훈련되고 조직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군대는 군대라기보다는 민병에 불과했습니다. 변변한 마차나 무기가 별로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적군에게 에워싸이는 가운데 광야를 지나면서도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이처럼 그들을 에워싸 호위해 그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처음 세우려고 할 때부터 시작해서 7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를 쓰러뜨리고자 하는 악한 세력들의 끊임없는 공격입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그리고 여러분들의 지혜로운 섬김으로 교회는 한 번도 갈라지거나 집단적으로 교회를 이탈한 사람 없이 지극히 건강하고 평안한 가운데 성장해 왔습니다. 아이로 치자면 크게 넘어지거나 교통사고 나거나, 육신의 질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는 적 없이 그렇게 잘 성장해 온 것처럼. 그렇게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교회가 이 만한 덩치가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저는 가끔 ‘교회가 이만큼이나 커졌는데, 커졌는데’ 하며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갑갑합니다. 교회가 이만큼 커지긴 했지만 이건 말이죠, 못 자란 어린아이와 같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여러분 가운데는 이 열린 교회에 5년을 다닌 사람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지난번에 안수집사를 투표했을 때 2년 6개월 열린 교회에 다닌 분이 안수집사로 선출이 되었어요. 역사 50년, 60년 가진 교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거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가 감사해서 이 교회에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 섬기고 사랑하고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은 이 열린 교회라고 하는 이 단일체로 볼 때에는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린 교회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그런 연약한 교회라는 것이죠. 아주 쉽게 얘기하면 5,60년 역사를 지니고 아버지, 할아버지, 줄줄이 교회 다니는 그 교회는 감격이 있든지 뭐가 있든지 하여튼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어요. 그리고 그들이 그 교회가 자신의 유업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 교회 이외에 자기가 다른 교회에서 충성한다든지 헌신한다든지 그런 생각 거의 하지 않고 그 교회에서 살아요.
제가 예전 전도사로 있던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뭐 꼭 돈 얘기 때문에 하는 건 아니고요. 젊은 마음에 느낀 것이 커서 얘기하는 거예요.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으니까, 뭐 지금 우리 교회에 비하면 뭐 턱도 없이 작은 교회지요. 그런데 50년 된 교회였습니다. 난 진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2층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가 막 그냥 일어나서 고함치고 싶은 분노를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다 자. 아니 어떻게 그렇게 예배를 드리느냐고. 세상에 그리고 30분도 안 되는 그 설교를 그렇게 못 견뎌하고 하여간 55분에는 딱 예배를 마쳤으니까. 안 되면 찬송가라도 줄여서 말이죠. 11시 55분에 딱 예배를 마치는 거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런데 나는 정말 그 때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알고 있는 신학 지식과 영적인 감각으로서는 내가 아주 단언할 수 있는데 ‘이 교회는 죽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인데 25억 들어가는 교육관을 건축해야 하는데 딱 한 번 헌금 했는데 45억이 나왔어요. 평소에 뭐라고 성경을 가르쳤느냐 하면, 신앙이 식으면 사람들이 절대 헌금을 안 한다. 그렇게 가르쳤거든요. 그런데 이게 꽝이야. 이게 아니야. 그 때 제가 느낀 게 뭐냐 하면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나중 문제이고, 야, 이 사람들이 거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교회를 자기의 교회로 생각을 하는구나. 집사님 한 분이 너무 괴로워해.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500만원밖에 헌금을 못한 것이 너무 가슴 아프고 죄송스러워서 교회를 나갈 수가 없대. 야, 그것 보면서 제가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 많이 깨뜨려 졌어요. 야, 이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구나. 어떻게 그렇게 예배시간에 고개 숙이고 한 없이 자던 사람들이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냐. 전 이것을 잘했다, 잘못했다. 그걸 얘기하자는 게 아니에요.
요점은 지금 헌금이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여러분 교회 사랑해요.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제가 있는 교회를 사랑하는 거예요. 이 교회가 아니라. 너무 핵심을 찔렀나요. 그것을 넘어 서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운 이 교회를 붙들고 계신 분이 주님이시고, 그리고 세운 이 교회를 주님이 목회자를 사용하시기는 하시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전의 꿈은 이 교회가 주님의 손에 꼭 붙들려서 이곳에서 자라나는 우리의 후손들도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예수 크신 복음을 만백성 듣게 해 주옵소서. 담임목사 한 주만 외국에 나가면, 150명, 200명씩 교인이 주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교회의 상태가 한없는 묘목으로 보이지, 거목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직까지.
그런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묘목에 지나지 않는 교회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사단의 수많은 궤계들. 저를 향해 겨누어지는 독 바른 수많은 화살들을 저는 봅니다. 저는 요즘에 목회의 새로운 지평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게 뭐냐 하면, 설교 시간에 몇 번 말씀드렸지만, 고난이 뭐가 있느냐고 말씀드렸잖아요. 사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고난은 무슨 그까짓 게 고난. 그 고생 안하고 밥 먹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렇게 생각 했는데 요즘 뭐냐 하면, 목회라고 하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가시밭길이구나. 제가 이제껏 신학교 선생 하면서 소명을 가지고 한 일이 하여튼 신학생들 신학교 그만 두고 목회 못하게 하는 것. 그게 소명감을 가지고 했어요. 그리고 제가 그렇게 소명감을 가지고 할 때에 내 말을 듣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소명이 없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소명감을 가지고 달래기도 하고 야단도 치기도 하고, 그러면서 했는데 이제는 그 일에 더 열심을 내어야 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정말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니구나.
제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종교개혁 이전에 16세기죠. 이탈리아의 제가 존경하는 설교자 ‘기롤라무사무라볼라’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제 프롤리스의 설교자로 가면서 그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이제껏 내 인생은 안전한 포구에 정박한 배와 같았다. 이제 주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이제 나는 안전한 포구를 떠나 저 거친 망망한 바다로 간다. 거기에는 쉼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과 시련만이 있을 것일 뿐인데 오 주님 내가 다시 주님의 손에 이끌려 영원한 귀향지에 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모든 안식은 없구나. 쉬워지고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견디기 힘든 고통들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대적들의 휘파람 소리를 매일 매일 듣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보다는 강하지 않지만 우리보다는 훨씬 강합니다. 그대들은 기도를 쉬는 적이 있어도 그들은 쉬지 않고 우리를 노리고 있으며 우리들은 봉사를 쉬는 적이 있어도 그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자리를 이탈하는 적이 없이 저와 여러분들의 심장에 독 묻은 화살을 겨누고 이 교회를 허물기 위해서 모든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이 가장 사랑하는 형제의 마음을 택해서 그로 하여금 교회를 허무는 도구가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가룟유다를 택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흔들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런 수많은 공격들을 보면서 우리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도 그런 영적인 도전을 의식하지 않고 평화롭게 넘어 간 날이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그리고 유리하고 있는 지체들의 마음속에도 그리고 저를 향해서도 그리고 여러분과 이 교회를 향해서도 아마 이 교회가 서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할 전투일 것이며, 그리고 누가 내가 선 이 자리에 선다고 하더라도 그 싸움을 회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도를 간절히 하고 주님을 전심으로 의뢰할 때는 그들이 우리보다는 강하지만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보다는 약하기 때문에 그 권위 아래 짓밟히는 것이 느껴져요.
수많은 궤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야 마는 성령의 역사,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마음을 지키며 아버지 앞에서 세워주신 그 자리에 서서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고난 받는 사랑하는 많은 지체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그 눈도 뜰 수 없는 시련, 견디기 힘든 고난을 헤치면서 어떻게 만난 하나님인데, 내가 이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 마음으로 어린 아이처럼 분투하면서 사는 그들의 그 분투하는 모습을 보면, 분명히 그들 안에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주님이 계셔서 그를 겨누고 있는 사단의 수많은 궤계를 무찌르셔요. 이제는 여러분들의 수가 많아져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 받아야 할 필요성은 점점 더 증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그래서 그들을 겨누고 있는 악한 화전들을 소멸하고 그들을 겨누고 있는 악한 세력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그런 특별한 보호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지만, 주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런 일들을 해 나가시는 것이죠.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신령한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바로 목회자와 더불어서 이런 용사로까지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때 너무 힘들다고 느껴지면 하나님 앞에 이런 투정을 합니다. ‘하나님, 내게는 양떼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용사들도 필요합니다.’ 많은 양떼를 그것도 다리 절고 머리 터진 양떼들을 보내서 치료하고 고치게 되었으면, 어느 덧 그 양떼들이 자라서 목회자 옆에 서서 그렇게 수없이 날아오는 악한 무리들의 화전을 막으며 싸우는 용사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할 텐데 너무 오랫동안 돌봐서 이제는 푹 늙었는데 아직도 젖 좀 달라고 아직도 엉덩이 좀 두드려 달라고 아직도 왜 나는 분유 안 주냐고, 그리고 날카로운 뿔을 세우고 있는 늙은 양들을 볼 때, 너무 마음이 아파요.
어느 목사님이 저한테 간증을 하는 가운데 자기 교회에는 자기와 더불어 같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열두 명 있다고 하더라고. 100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님인데, 외국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인데. 열두 명은 아마도 제가 죽자하면 같이 죽을 것입니다. 난 이제껏 태어나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를 부러워 해 본 적이 없어요. 진짜에요. 내가 정말 그랬다면 성을 갈아요. 없어요. 요새 자꾸 생각이 나요.
새벽 닭 울때 난 괴로웠소.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중에 당신이 베푼 고귀한 사랑.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정말 우리 같이 죽지 않을래요.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셨던 것처럼. 우리가 더불어 주를 위해 죽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지금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축복을 이 교회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엇입니까. 문을 열고 나가면 인근각처에 고통하는 영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더럽히고 있는 악한 무리들이 가득한데 그들이 넘어뜨리는 수는 다수이고, 우리들이 추수하는 영혼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교회를 세우신 것이, 교회가 얼마만큼 커지면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교회를 세워주셨습니까. 교회가 커지고 교인들이 모이면 이보다 더 큰 예배당을 지어서 느긋하게 앉아서 예배드리면서 이제 좀 쉬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만남의 은혜를 주셨고,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어떤 때는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양떼들 말고 용사들도 필요합니다. 세상 사랑에 자유해진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목자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 그리고 어떠한 말에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 관계를 붙들고, 저와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함께 걸어서 주님의 어린 양떼들을 위해서 초대교회 장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훌륭한 동역자도 별로 없고, 저 자신도 여러분들을 지켜 보호해 줄 수 있는 뛰어난 영력도 모자라는 미천한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의 영혼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들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번 건지신 여러분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특이한 보호하심. 그것이 여러분들을 향해 날아오는 수많은 불화살들을 막아주었고, 그 수많은 어려움들 속에서 여러분들을,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를 날개 아래 품음 같이 그렇게 업어 나름과 같이 암탉이 날개아래 새끼를 품음같이 그렇게 여러분들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은혜를 깊이 찬송하고 용사이신 주님의 그런 군사적인 보호아래서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한 그 은혜의 빚을 졌으니, 이제 여러분들도 늙은 양이 아니라 정말 각성하세요. 정말 일어나요. 나는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가슴이 정말 찢어지는 것 같아요. 다시 늙은 양이 되려나. 정말 이제는 그런 속에서 자유롭게 떨치고 일어나서 나는 한 마리 어린 양으로 부름을 받았고, 지금도 주님의 손에 의해서 목양되고 있는 양이지만, 그러나 나는 이제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용사로 세워진 사람이라. 그리고 군인정신에 투철한 사람들이 되어서 이 교회를 에워싸는 용사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는 것이 주님의 이 호위의 은혜에 보답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작게 두 번째는 돌보심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돌보심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 눈동자같이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길을 걸을 때에는 이 길은 위험하니까 비껴가야지,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 길은 높으니까 조심해서 올라가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 몸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대뇌와 의논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우리를 보호합니다. 그 중 하나가 눈꺼풀이죠. 뭐가 확 날아 올 때, 저것을 맞으면 눈이 터질까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눈꺼풀을 내리는 사람은 없어요. 뭐가 스쳐가면 그냥 눈부터 감아버리는 것이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심이 거의 본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여기서도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는 그 광경이 사실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의 자애로움이 느껴진다 이거죠.
하나님이 그 애굽에서 큰 팔을 들어서 역사하셔서 애굽 전역을 다 뒤집어 놓으셨죠. 잿더미로 만드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고, 홍해도 가르셨어요. 그런 하나님의 행동은 아버지 내지는 용사를 생각나게 만들어요. 그렇죠. 그리고 이제 광야에 내 놓았어요. 누가 지금 광야에서 칼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황량한 벌판에 내려 놓으셨어요. “야, 여기까지 내가 해 주었으면 되었지. 여기서부터는 이제 저리로 쭉 가면, 가나안 땅이 나오니까 가라.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너희 문제를 다 해결해 주지 않았냐.” 그리고 그들을 거기에 놓고 하나님 가나안에 가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는 하나님이 그들을 입히시고 신기시고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고 고기가 필요하다고 하면 고기를 주시고, 심정적으로도 그들을 어르시면서 돌보시는 광경이 완전히 어머니야. 그러니까 모세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유모입니까. 이 인간들의 유모입니까.” 그럼 왜 유모처럼 살았어요. 누구한테 배운 거예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시키신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다는 것이죠. 그런 돌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 온 거죠.
그러니까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 큰 능력과 팔로 어두움 가운데 건져주시고 교회를 둘러 싼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으로 인도하셨어요. 우리의 인생의 큰 기도제목만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기도제목도 응답하셨어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터치를 느끼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어요. 이끌어 오셨어요. 돌봐 오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이제껏 까지 지켜 오시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 것이죠. 이 일에 대해서 모세가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이런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은혜를 베푸셨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벼랑 끝에서 여러분들을 만나주시고 난 다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제 내가 너를 이만큼 회복시켰으니, 이제는 네 멋대로 살아라.’ 하나님이 그렇게 해 두시지 않으셨죠. 여러분의 모든 인생의 문제에 개입하셔서 매 순간 여러분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여러분들이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닦아주시면서 여러분 위로하고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그 수많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진멸되지 않고 여기 이렇게 살아서, 남아서 하나님 섬기고 하나님 바라보고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런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도제목이 있었지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도 응답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신앙이 어리고 약하기 짝이 없는 지체들조차도 주님의 살아계심을 기도의 아주 작은 응답 속에서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애로우신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세밀한 은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빚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은혜를 특별히 우리가 입었으니, 우리들도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돌봄처럼 아직까지도 신앙이 어리고 연약한 지체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돌보고 그렇게 그들을 위하고, 그러면서 매 순간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고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셔서 사명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파송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선교사로 보내실 수도 있고, 혹은 평신도 선교사로서 보내실 수도 있고, 더 연약한 교회에 가서 불꽃처럼 섬기라고 여러분들을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7주년이 아니라 17주년 예배도 같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주님의 조국의 교회의 동산에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