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회심특별설교 (2012.11.11 주일오전설교) 그대는 상명에 우십니까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 37:33-35) |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가슴 아픈 사연 한 토막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낳은 많은 자녀들 중 특별히 요셉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열두 형제들 중 특별한 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요셉은 야곱이 진실로 사랑했던 라헬의 소생이었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하루는 꿈을 꾸고 형들에게 말했는데 이 일로 인해서 형들의 미움을 더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은 요셉이 형제들과 함께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자기의 단은 일어섰고 형제들의 단은 그 자신의 단에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누가 듣든지 간에 요셉은 주인이 되고 형제들은 종이 된다는 꿈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매우 분노하였고, 이로 인해서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경솔하게 요셉은 또 다른 꿈을 꾸고 형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해와 다로가 열한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 꿈 이야기를 아버지와 형들에게 했을 때 아버지는 ‘그러면 도대체 이 꿈의 내용이 무엇이겠느냐? 정말로 네 어머니와 네 아버지인 내가 네 앞에 종처럼 절하겠느냐?’라고 꾸짖으셨고 이 말을 듣고 형들은 더욱 시기하여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II.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
A. 사랑하는 요셉의 죽음
형들은 세겜이라는 곳에 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었고, 야곱은 아들들의 근황이 궁금하여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내려 보냈습니다. 요셉이 세겜에 도착했을 때에는 형들이 이미 짐승의 떼를 몰고 도단이라고 하는 더 먼 곳으로 이동한 후였습니다. 거기까지 따라 갔을 때 형제들은 멀리서 오는 요셉을 보면서 “꿈을 꾸는 자가 온다. 아버지의 총애를 많이 받고 우리가 자기의 종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꾸는 자가 오니 저를 죽여 버리자.”라고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르우벤의 만류로 구덩이에 집어 넣어버리고 유다의 제한으로 그를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버려서 애굽으로 끌려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염소 한 마리를 죽여 그 피를 요셉에게서 벗긴 옷에다 발라 아버지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못 봤고 길에서 이 옷만 보았는데 이것이 요셉의 옷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했을 때 아버지 야곱은 그것을 알아보고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탄식하면서 애통해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요셉의 죽음은 살아있는 야곱에게 또 다른 죽음이었습니다.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술해 하기를 “내 나이가 일백 삼십년이요 이 나그네 길이 우리 조상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험한 나그네 인생길에 유일한 위로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이 요셉이라고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증거인 피 묻은 옷으로 자신에게 돌아왔으니 아버지인 야곱의 마음이 어떠하였을 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B. 위로받기를 거절한 아버지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은 후 야곱의 태도는 위로받기를 거절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옷을 찢었는데 이것은 원통함과 비천함의 표지였고, 베로 허리를 동인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이렇게 그가 깊이 애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증스럽게도 동생을 이렇게 팔아버리고 거짓말로 짐승의 피를 발라 아버지 앞에 갖다 놓은 자녀들이 아버지를 가증스럽게도 위로하였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거짓인 줄을 몰랐고, 진심의 위로라고 할지라도 야곱의 마음은 위로 받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비통 속에 잠겼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차라리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천국과 지옥의 교리가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래서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이후에 인간이 내려가는 아주 음습하고 불쾌한 곳으로서 어떤 희망이나 생명의 기쁨이 없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생명이 박탈당한 가운데에 음습하게 지내는 어두운 속에서의 기쁨이 없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스올이 어디인지를 잘 알면서도 아들이 없는 지상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은 아들이 있는 스올로 내려가 그곳에서 살겠다고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오래도록 아이를 위하여 애통하였다고 나오는데 ‘오래도록’이라고 하는 이 히브리어 본문이 ‘야민 라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은 ‘많은 날 동안에’라고 하는 뜻입니다. 많은 날 동안 사랑하는 아들들의 위로가 있었지만 아버지인 이 야곱은 그 모든 위로를 받기를 거절하고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 요셉을 생각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일주일이 지났을지, 한 달이 지났을지, 많은 날들이라고 했으니 몇 해 동안 애통하였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눈에 눈물은 그쳤어도 마음의 눈물은 일평생을 두고 흘렀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의 죽음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III. 상명에도 울지 않는가
A. 상명, 참척의 슬픔
이 장면은 상명에도 울지 않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명’이라는 말을 압니까? 참척이라는 말은 여러분이 배우셨습니다. 부모가 생존해 계시는데 자식이 부모 앞서서 죽는 것을 참척이라고 합니다. 비참할 ‘참’자에다가 슬플 ‘척’ 자니까 비참한 슬픔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부모는 죽어서 산에다 묻고, 자식은 죽어서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죽은 것은 참척이 아니지만 자식이 자신 앞에 죽는 것은 참척인데 이 참척과 같은 말이 상명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상명이라고 하는 말은 상실할 ‘상’ 자에다가 빛 밝을 ‘명’ 자입니다. 여기에서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희망을 은유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상명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먼저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고 나면 이 세상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없이 모두를 잃어버린 절망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상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에게는 죽은 자식의 삶은 살아있는 자신의 죽음이 됩니다. 그리하여 먼저 삶 이편에서 죽음으로 건너간 자식들이 살아있던 기억을 붙들고 살아 있는 어미와 아비는 죽은 자처럼 매일 죽음을 느끼며 이 세상에서 어떤 희망도 없이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상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소설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박완서 씨가 자신의 책에서 그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주 훌륭하고 잘 기른 아들이 있었는데 의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자식이 절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소설가는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상명의 비극을 맛보았고,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난 후 살기 위해서 밥을 떠 넣으면서 그때 기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식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죽었는데 에미라는 년이 살겠다고 밥을 퍼서 목구멍에 꾸역거리고 넣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토할 것처럼 지겨웠다고 말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실질적으로 일으켜 세웠던 이론가였습니다. 유물론을 주장하던 그도 역시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 앞에서는 일평생 슬픈 부모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인생 중 단 한 순간도 자기 자식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고백하기를 자신이 죽었어야 할 텐데 어찌하여 네가 죽었냐고 말했는데 이는 마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반역 군들을 토벌하는 가운데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의 반응이었으니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통곡했던 다윗의 마음이 그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자녀의 생명과 결탁된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식과 여러분 자신 둘 중의 한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 때에 자식을 위해 기꺼이 죽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으며 남겨놓고 자식이 자신 앞에서 죽어갔을 때에 산자처럼 살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희망을 간직하고 씩씩하게 살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우리의 조상들은 상명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B. 육체보다 비참한 영혼의 죽음
우리는 육체의 죽음보다 비참한 영혼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육체는 결국 언젠가는 모두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이 그저 60 혹은 70을 살게 되는 것이고, 강건하면 80이나 90 아주 예외적으로 100세를 넘게 산다고 한들 그것이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몇 십 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니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찍이 우리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기껏해야 몇 십 년 앞당겨 죽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앙 안에서 죽은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간직하고 육체를 신앙을 간직한 사람들에게는 육체가 죽었어도 죽은 육체는 살아있는 영혼과 함께 다시 살 약속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영원히 죽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은 영혼으로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죽을 때에 그 영혼이 다시 살아 하나님 앞에 부활의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이 없으니 어떻게 보면 영혼이 살고 육체가 죽은 것이, 영혼이 죽고 육체가 산 것보다 훨씬 더 복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육체보다 더 비참한 것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예화) 언젠가 지방에 집회에 내려갔을 때에 어느 집에 점심 초대를 받게 되었는데 젊은 부부는 그 교회에서 아주 충성스러운 일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섭리가 계신지 그렇게 믿음으로 살려는 이 젊은 부부에게 다섯 살 난 아이가 있었는데 갑작스런 질병으로 순식간에 아이를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교회까지 꽤 먼 거리인데도 걸어서 매일 새벽기도를 나오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이 슬픔을 이기고자 애쓰는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슬픔은 이렇게 신앙으로 극복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정말 괴롭고 불안했던 것은 “과연 다섯 살에 죽은 이 아이가 정말 구원을 받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리적인 지식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많이 고민하였고 하나님께 자신의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마치 두 부부를 위로하시려는 듯이 부인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다섯 살 난 어린 아이가 꿈에 나타났더랍니다. 이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본적도 없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이 있는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이 아이가 해맑게 웃으면서 “엄마 나 먼저 여기 와 있어” 그러더랍니다. 이 꿈을 꾸고 엄마는 큰 위로를 받았고, 자기 아이가 지금도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아이의 영혼은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아이의 영혼은 죽음의 상태에 있습니까? 아니면 정말 살아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는 멸절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가르치지만 영혼의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져 있는 상태가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빼앗긴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는 그것을 영혼의 죽음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종종 자기 아이의 영혼의 회심 여부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아이가 회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현실을 직면하기가 싫어서 짐짓 변명을 하고 있는 부정직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회심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른다면 여러분은 어느 정도 집요하게 진정 회심한 영혼의 상태인지를 확인해 보려고 애썼는지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는 것과 영혼이 회심하여 살아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런 표징이 따라 온다면 여러분의 자녀는 거듭나고 회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는 가치 판단이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아이들이 대부분 자기 뜻을 따라 자기 좋은 대로 살지만 순간순간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가치 판단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면 그 아이는 회심할 아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위에서 자신의 인생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서 그 분을 표준으로 삼고 가치를 판단하고 그 가치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에 이것은 이미 회심한 아이의 표지입니다.
두 번째는 신령한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즉,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기도 속에서 부어지는 은혜,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복과 신앙의 행복에 대하여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죽은 영혼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혼으로 지금 있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의 영혼이 회심한 상태인지 아닌지 가정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하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은혜롭게 잘 가르쳐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회심한 자녀라면 그 신령한 진리와 은혜 속에 깃들여져 있는 아름다움과 참스러운 맛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것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의지가 하나님 앞에 수시로 굴복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자녀는 회심한 자녀입니다. 엄마에게 대들거나 불순종하고도 홀로 있는 방에서 울면서 엄마, 아빠 마음 아프게 한 것을 회개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자녀는 거듭난 영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때는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해도 어느 한 순간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예배드리고 와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의 나쁜 의지를 좋은 의지로 굴복시키려고 한다면 여러분의 자녀는 정말 신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실제의 삶이 무신론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는데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좋으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나 여러분의 자녀가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실제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보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옆에서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식하며 유신론적인 삶을 산다면 여러분의 자녀는 정말 거듭난 영혼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이 네 가지만 가지고 여러분의 자녀를 측정해 본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정직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회심 여부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지 않습니까?
IV.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A. 구원에 이르는 길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렇게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을 대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언젠가는 회심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요? 작년에도 그렇게 생각하셨는데 금년까지 회심 안하지 않았습니까? 재작년에도 그렇게 생각하셨는데 작년에도 회심하지 않았죠? 여러분이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며 언젠가는 좋아질 것이라고 그렇게 내버려둔 여러분의 자녀들이 유치부를 지나서 이제 중등부, 고등부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의 죄악과 이 세상의 악한 풍조, 하나님 없는 무신론적인 사상들이 밀물처럼 들어와서 여러분의 자녀의 마음을 돌덩이처럼 굳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쯤 와서는 이제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지 내 마음대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철면피한 변명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약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유아 세례 줄 그때에 ‘나는 이 아이의 구원을 나의 구원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우리가 믿는 종교의 거룩한 도리를 이 아이에게 가르치기를 힘쓰겠나이다.’ 라고 서약을 했을 때, 그 서약은 교회 앞에 한 서약이었고, 자신의 양심 앞에 한 서약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생사를 건 서약이었던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되어서 자녀들을 유아 세례로 서약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을 녹였을 때 여러분의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올랐던 얼굴은 사랑하는 자녀들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 날 동안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지자 눈물도 말라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부모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가지만 잘하면 거의 다 한 것입니다. 하나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면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한 것입니다. 이 자식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 그거는 부모의 몫이 아니라 자식의 몫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따라서 소명을 따라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 사랑하면 그들이 눈물로 기도하며 자신의 인생을 헤쳐 나가며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오늘 이 시간이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것처럼 쓰라린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드러났고, 이제는 여러분의 자녀를 회심에 이르도록 헌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고 양심이 심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매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상처에 좀 더 소금을 발라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는 것은 오직 두 가지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스스로 의지로서 악하여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부모인 여러분이 자식의 회심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이들은 회심할 확률이 낮아집니다. 유아부, 유치부 때에는 아직 이 세상의 더러운 물들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았고, 씨앗처럼 그들 속에 원죄가 있지만 충분히 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그들의 마음에 떨어져 믿음을 주기만 하면 이 아이들은 마치 배고픈 아이가 엄마 젖가슴을 파고드는 것처럼 말씀을 꽉 붙들고 이성으로 따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지나고 중등부를 가면 진화론이라고 하는 거짓말이 그들의 마음을 훔쳐가고, 자신속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이제는 이 세상의 즐거움에 심취해 버리고 나면 더더욱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신앙은 그들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마음으로 차라리 하나님 없는 무신론이 진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처럼 굳어진 아이의 마음을 여러분이 어떻게 녹일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아이들은 회심하지 않고 이 세상 악에 점점 물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면서 당신의 사랑하는 여인들이 눈물과 통곡으로 당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시며 “너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야곱이 요셉을 여의었다라고 하는 소식에 접했을 때에 애통하며 통곡하며 아마도 식음을 끊고 모든 가족들의 위로 받기를 거절했던 것처럼 상명의 시간들을 보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상명의 시간들을 보내신 적이 있습니까? 자식의 영혼은 죽었는데 애미, 애비가 되어서 마음속에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어찌 사람의 부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인이면 그 누구도 회심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어렸을 때 중생했다 할지라도 회심을 통해 그것을 의식생활 속에 나타내지 아니한다면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열매를 맺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회심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자발적인 회개이며 모든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여러분의 자녀가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고 전적으로 그 분을 의지하는 신앙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도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인간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애통하는 회개가 없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단언하였던 것입니다. 리처드 벡스터는 말하기를 “자기 스스로 영혼의 비참한 상태 때문에 울 수 없는 사람들은 남이 대신 울어주어야 할 사람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자녀를 위해서 울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자녀의 육체의 건강을 위해 애쓰는 그 관심 중의 1/10만 영혼에 할애하였더라도 여러분은 눈물로 자녀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의 학업에 대해서 애쓰는 것만큼 여러분의 자녀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리고 그들의 영혼의 불행한 처지에 대하여 깊이 사랑을 느꼈더라면 아마 여러분은 더 많은 날 동안 자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B. 왜 자녀를 위해 울지 않는가?
그러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데 부모인 내가 왜 내 아이의 영혼을 위해 울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울 수 없을까요? 남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있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들만이 남의 영혼을 위해서 애통할 수가 있는 것이니 영혼은 각각 달라도 영혼에 대한 사랑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도 여러분이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리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귀가 여러분의 자녀의 마음을 가려서 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대신 자신을 임금 삼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이의 삶이 매일매일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구원의 기쁨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기쁨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자녀가 구원받지 못했어도 여러분에게 이런 저런 축복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복을 인하여 기뻐하고 또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곱을 보십시오. 자녀들이 온갖 말로 위로를 하였지만 그는 사랑하는 아들 그것도 11명은 남아있는데 한 명을 잃어버렸다는 이유 때문에 애통하고 옷을 찢으며 베로 허리를 동이고, 죽고 싶다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요셉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를 남기고 죽은 그 사람의 처지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남아있는 자신의 처지보다 부러워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삶에 대한 기억은 산자의 마음속에 죽음이 되어 그들을 죽음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 진정으로 울지 않는 것은 교회론 적으로 보면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보이지 않는 교회에 접붙여져 예수의 몸이 되었고, 여러분의 자녀는 아직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보이는 교회의 죽어있는 회원입니다. 그것을 보고 여러분의 마음이 안타깝다면 여러분은 자녀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피와 살이 섞이지도 않은 나와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애통하며 울었던 은혜의 때를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은 나와 살과 피를 나눈 육신의 형제도 아니고, 우리 부모도 아니고, 내 새끼도 아니었는데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내 마음을 감동하자 그들을 위해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의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고, 그들의 영혼의 아픔과 헐벗음을 내 자신의 아픔과 헐벗음처럼 느끼며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C. 태만 속에 버려지는 자녀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살기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기연민에 빠져서 자식들의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을 주인 삼으며 살려고 하는 부모는 삯군 부모입니다. 그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너무 불행한 아이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경건하고 부모의 도리를 아는 참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집안에 태어났더라면 이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인간사는 도리를 어려서부터 배웠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예수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은혜에서 소외되었고, 매일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는 나오지만 마음속으로는 완고하게 하나님을 거부하며 회심치 않은 채 살아가고 있고, 여러분은 자녀의 영혼을 앞세워 죽였는데도 눈에 어떠한 빛도 잃어버리지 않고 희망에 가득 찬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그 희망이 어디로부터 온 희망인지 묻고 싶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믿다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우리의 자녀들은 지옥에 던져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천국에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거룩한 무리들 중 하나가 되어 황금 길을 거닐게 될 그때에 저 아래서 불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의 자녀들의 울부짖음이 들릴 것입니다. “엄마, 왜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아서. 아빠, 왜 내가 믿음의 집안에 태어났는데 믿음 없이 이 지옥의 불길에 떨어지도록 아빠는 내버려 두었어? 나를 이렇게 지옥에 던져지도록 내버려 둘 것이면서 엄마, 아빠는 왜 나를 낳으셨나요?” 울부짖는 아이의 함성소리가 들릴 때에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겠는지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너무너무 사랑하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내가 이 사람들의 유모입니까?” 하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마는 진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을 때, 자기 뱃속으로 낳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나님이 위협하셨을 때에 자기의 생명책에 이름도 지워달라고 주님께 매달리며 이스라엘 구원을 위해 눈물로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살아온 우리의 긴 세월 중 우리의 눈에 자녀 때문에 흘린 눈물의 시간들이 몇 분이나 될까요? 자녀를 위해서 우리가 삶의 모본을 보이고, 우리의 믿음의 삶을 통해 자녀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음 없이 사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도 우리 엄마, 아빠의 삶을 통해 저렇게 분명한데도 나는 왜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것일까? 방황할 때마다 우리 엄마 안에 있는 행복, 우리 아빠 안에 있는 기쁨, 내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찬양)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언젠가 여러분의 자녀들이 추도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 이 찬송을 부르며 눈물 흘릴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고 계시나요? 자녀들은 태만 속에서 버려지고 있습니다. 외로운 영혼으로 죄악에 물든 영혼으로 이 세상의 정신과 타락에 빠지는 재미로 하나님 없는 삶을 위로 받으며 그들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신자일 때에는 무지 때문에 자녀들을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 인생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고, 돌이킬 수 없는 구도의 길에 우리는 이미 들어선 구도자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그렇게 버려두고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핑계 대든지 우리의 악한 의지가 자녀를 향한 사랑 없는 무정함이 우리의 자녀를 그렇게 찢기고 고통 받게 버려두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짐승에게 찢어 먹힌 줄 알고 피 묻은 요셉의 옷을 품에 안고 위로 받을 일없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마는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이 눈물 흘리지 않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의 무신론에 이빨에 찢겨 피를 흘리고 있고, 이 세상의 음란 문화에 찢겨 피를 흘리고 있고, 이 세상의 인터넷 게임에 이빨에 찢겨 여러분의 자녀의 영혼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악독스럽게 그 습관에 매여서 자녀들이 이렇게 찢어지면서도 그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는 여러분은 정말 부모 맞습니까?
(예화) 주일 학교 유년부 아이가 교회에서 숙제를 내주었답니다. 일주일동안 아빠가 매일 끌어안고 기도해주기라는 숙제를 받았습니다. 아빠가 비 회심자였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데 애를 위해 기도해 주겠어요? 자꾸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피하니까 어느 날 아이가 화를 내면서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아? 왜 나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부탁했는데 안 해 주는 거야?” 그러니까 타의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이 아이를 끌어안고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된 부모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새끼를 낳았다고 모두 부모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참 부모도 있지만 삯군 부모도 많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새끼를 낳았을 뿐 부모의 도리에 대해서는 추호의 관심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삯군 부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언제 때를 정해서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웃긴 것입니까? 이런 운동이, 이런 기간이 필요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자녀의 영혼에 불행한 상태가 우리에게 눈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하나님, 내가 예수에게서 끊어져 지옥의 형벌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우리 아이의 영혼만큼은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회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자녀, 기도하지 않고 여러분은 계속 희망을 품다가 복음을 전할 소중한 기회를 모두 놓쳐 버렸고 이제는 머리가 너무 크고 완고해져서 제법 여러분은 어디에서 배웠는지 하나님 주권 교리를 들먹이며 하나님 주권이 하실 거라고요? 그게 운명을 믿는 거지,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주권을 의지하는 태도입니까? 그러면 주님의 주권이 여러분의 새끼를 지옥에 던져 버려도 여러분은 주님 주권 찬송하다가 하늘나라 가시겠습니까?
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자녀를 앞세우고는 불신자들도 깊은 고통을 느끼며 살자고 밥숟가락을 떠 넣으면서 구역질 날 정도로 자신이 더러웠다고 했는데 우리는 상명을 느끼기는커녕 영적인 참척 가운에 있는 우리 새끼들을 두고도 잠 안 잔적 없었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거절한 적도 없었고, 자식의 영혼의 죽음 때문에 우리가 즐기던 모든 것들을 멀리하고 베옷을 입은 적도 없었습니다. 부모를 앞서 보낸 자식은 3년 동안 베옷을 입으며 부모가 죽은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불효의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살았다면 자식을 앞서 보낸 부모의 마음은 일평생 베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죽은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일평생 뉘우치는 마음으로 살아있는 삶을 죽음처럼 여기며 죽어간 사랑하는 자녀의 이생에서의 기억을 추억처럼 붙들고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상명한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지금도 마음속에 눈물을 묻혀 피를 발라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언제까지 계속되든지 결론은 오직 하나 여러분은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울었더라면 우리의 자녀들은 더 어릴 적에 회심했을 것이고, 지금쯤은 나보다 믿음이 좋은 든든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의 가정에 신앙의 기둥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보고 당신을 위해 울기보다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빌라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보면 부모인 우리들의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방탕한 길을 헤매고 있었을 때에 모니카는 심히 오랜 세월을 예배당에 나아가 눈물로 기도했고, 그리고 목회자는 그렇게 통곡하며 우는 모니카를 보면서 어미가 저렇게 눈물로 기도하니 저렇게 울며 기도한 자식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합시다.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근심과 염려에 빠져있는 동안 우리 자녀들의 영혼은 죽었고, 우리가 중요하지 않은 일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며 사는 동안 우리의 자녀들의 영혼은 세속의 이빨에, 죄악의 이빨에 찢겨 피 묻은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깊이 회개하고 상명의 슬픔 속에서 자녀를 위해 기도한다면 혹 금년이 가기 전 여러분의 자녀를 회심시켜 주실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주님의 은혜를 바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애통해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