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없이 신앙은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녹취자: 김경애
누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이 죄와 비참에 빠져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꾼을 보내어 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척이나 슬픕니다. 우리의 영혼은 심히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귀를 막고 목을 뻣뻣이 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보고할 것입니다. 아! 그때 우리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할 것입니다.’ 이 글은 실제 17세기의 영국 키더민스터에서 목회를 했던 여러분이 알고 있는 『참 목자상』의 저자인 리처드 백스터가 회심치 않은 사람들을 위해 외친 목회자로서의 탄식입니다.
오늘날은 회심이라는 주제 자체가 교회에서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회심은 신학적으로 좁은 의미의 회심과 넓은 의미의 회심으로 나눕니다. 좁은 의미의 회심은 구원에 이르는 단 한 번의 회심인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에 대한 통절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죄에 대한 통절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것이 회심입니다. 넓은 의미의 회심은 이러한 회심의 경험이 마음속에서 갱신되고 반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신학적으로 이 고유한 의미의 회심은 중생한 영혼이 의식의 세계 속에서 첫 번째 활동하는 것에 대한 감지입니다. 첫 번째 활동이 바로 이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회심은 반드시 중생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거듭남은 하나님의 은밀한 작용이지만 회심은 의식 속에 뚜렷하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거듭남은 하나님 홀로하시는 단독적인 사역이지만 이 회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회심에 참여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성령강림 후에 사도들이 큰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앉은뱅이 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역사를 본 후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선포한 메시지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하는 계획을 어떻게 미리 보이셨는지를 구약에서 설명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말이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메시지가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요구였습니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의 회심의 여부는 그의 구원에 직결됩니다. 물론 유아들의 구원이나 혹은 아주 예외적으로 하나님이 구원할 백성들을 직접 중생시키셔서 구원하시는 경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물을 온전한 지능으로 인식할 수 없는 지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택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본다면 아주 특별한 예외를 제외한다면 성인이 된 모든 사람들은 이 회심 없이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런 회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강력한 복음의 선포가 미루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그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은 자로 간주되고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여 참된 회심에 이르게 하고 그 회심의 은혜를 일평생 보존하며 신자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회심할 수 있겠으며 회심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거듭남을 의식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은혜를 보존하고자한다면 그 회심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깊이 경험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조건으로써의 이런 회심은 신약성경에서 거듭남, 회개, 의롭다 칭함 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종말의 때에 재앙을 당할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방법으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회심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신학의 기초를 놓은 사도 바울부터 그리스도를 향한 심오한 회심을 경험함으로 유대종교자로부터 기독교신학자, 목회자, 선교사로 방향전환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심오한 회심으로써 마니교신앙에서 돌이켜 기독교인이 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토대로 구원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역시 신자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과 회심한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었고 그 역시 가톨릭의 수사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회에 다니다가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는 개신교 종교개혁자의 대부가 되었습니다. 존 칼빈 역시 신자의 삶 전체가 구원을 완성해가는 신성의 과정이라고 보았고 거기서 그의 회개와 믿음은 그 신생의 생활의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칼빈에게 회심은 곧 회개였고 이는 단지 내면의 슬픔만이 아니라 옛 본성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는 것을 뜻했습니다. 심지어 우리와는 신학적인 견해가 사뭇 다른 칼 바르트조차도 신앙의 본질을 종교적 경험에 두었던 프리드리슈라이마흐의 견해를 배격하고 신앙의 본질은 한 인간의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그 변화의 조건은 하나님을 향한 전향이라는 사실을 강조했고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자신이 바로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못 박음으로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던 것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의 눈에 비친 교회의 모습은 회개와 눈물이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나는 뜨거운 찬양과 열렬한 기도의 분위기에 모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 당시의 뚜렷한 회심은 일반적인 교회의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습니다. 오늘날 조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목회와 선교적인 어려움의 근본적인 뿌리는 교회 안에 있는 비회심자들 입니다. 교회밖에 있는 불신자들이나 핍박 때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의 유일한 구주임을 믿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의 맛을 본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교회 안에는 반드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 비회심자들이 자기는 불신자이고 회심하지 못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거듭남과 회심에 대해 철저히 검증하려는 의지가 현저히 결핍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저는 신학교의 선생으로 있으면서 신학교에 온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들의 구원에 대해 선생으로서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섞여있는 경우도 종종 보았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위험한 일이고 심지어는 이단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교회의 추천을 받고 신학교에 들어와 목사가 되는 길을 정통교회에서 밟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아주 분명하게 자신의 회심을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돌아보아야하고 교회는 이 회심을 할 수 있는 한 철저하게 검증해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18세기에 미국의 교회사를 읽으면서 깊이 감동을 받았던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의 동네를 방문해서 그 이웃주민들에게 그 사람이 도덕적인 행실이나 인품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다운지를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본 후에 합격점을 받아야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18세기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고 고백과 삶의 일치를 교회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세례를 얼마나 엄숙한 언약의식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힘은 확고한 구원신앙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을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필요한 죄인으로 보고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분명한 복음의 제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에 대해 통절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길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비참한 죄에서 자기를 구원해낼 수 있다고 전심으로 믿는 것이 바로 그들의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은 개신교역사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정통교회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회심을 통해서 그는 복음교리와 성경을 접하고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그렇게 바뀐 사상에 의해서 그의 삶이 재편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분명해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모든 봉사의 활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조국교회에서 도덕의 위기를 심각하게 말합니다. 이런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런 염려와 근심들이 교회의 도덕적인 상태를 개선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18세기 뉴잉글랜드 부흥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조나단 에드워드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는 한 사례를 보게 됩니다. 그는 교회안의 비회심자들에 대해 통렬하게 회심을 촉구했기 때문에 많은 대적자들에게 에워 쌓였습니다. 그는 비회심자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첫째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가치 판단이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자기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기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비회심자들은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의 마음에는 거룩한 정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 감화,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 그 은혜 때문에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정한 마음의 봉사, 이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들의 의지는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독교의 옷을 입었을 뿐이지 자신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따라가고 자신의 인격과 삶속에서 그를 구현해낼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비록 교회에 다니는 교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성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거룩한 은혜의 모든 수단에 대해서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기의 사랑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거듭남과 회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그것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조국 교회의 도덕적인 위기를 회심이 사라지고 있는 목회의 현실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얼마나 진실한 회개의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초대교회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교부는 말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진실한 회개,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포기하고 버리는 것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도덕적이지만 그것은 세상윤리를 추구한 결과가 아닙니다. 거룩함을 추구한 결과이고 누구도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거룩한 삶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이 아니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모할 수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거룩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과 도덕적인 완전성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셔서 존재에 있어서 피조물과 비교될 수 없는 격차를 가지고 계신 전적인 타자로서의 하나님의 위대함과 엄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도덕적인 완전성은 하나님이야말로 최고의 도덕성을 갖춘 존재이며 그분의 완전하심에 비하면 자신들은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두려움을 느끼고 그분의 자비를 의존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존하게 되고 그분이 끊임없이 자기를 부르시는 것을 감지하며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느낌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삶이 바로 회심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회심 없이는 누구도 반복적인 회심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진실한 성화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충만한 생명과 넘치는 은혜입니다. 그 충만한 생명과 은혜로써 자기를 향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다시 사는 은혜의 감격 속에서 그는 진정한 신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고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방의 어느 교회의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하러 간적이 있습니다. 아주 꽤 큰 교회였습니다. 나를 초청한 교회의 부목사님이 자기네 교회가 얼마나 급속히 성장하고 있으며 도시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장년 한 교구를 담당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했습니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목사님은 총신에서 신학을 하셨으니까 회심이 무엇인지를 아시죠?’ ‘네.’ ‘성인이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회심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라고 옳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구의 교인이 얼마나 됩니까?’ 한 800명이 된다고 합니다. ‘목회자의 양심으로 판단하건대 그중에서 진실로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얼마쯤 됩니까?’ 그랬더니 20%에서 30%쯤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맡고 있는 양떼 중 70%내지 80%가 사실상 교회에 나오지만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 후배목사님에게 양떼들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목사가 되도록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에는 교회에는 나오지만 불신자인 비회심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 가슴 아픈 것은 교회가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애끊는 눈물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비전과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포장된 목회자와 공동체의 야망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영혼의 비참한 상태와 운명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전혀 전도가 아닌 방식의 전도로 교인수를 늘리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교회성장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는 이 진실한 참회와 구원이 없는 성장이라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을 위한 교회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단지 인간의 불편함으로, 죄인을 환경의 피해자로, 구원을 현실 부적응 자에 대한 치유로 보는 이러한 사상이 기독교의 복음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조국교회는 오히려 죄인의 회심을 위한 경건한 비명소리를 회복하여야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달에 리처드 백스터가 목회하던 키더민스터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목회자들이 저의 강의를 듣겠다고 여러 달 전에 저를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약 120명 정도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고 거기서 저는 부활의 세 번째 지평이라는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리처드 백스터가 목회하던 그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에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통해서 리처드 백스터를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서 깊은 청교도가 사역했던 고장인데도 오늘날의 영국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조상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그런 청교도의 정신과 사상을 구현하고 있는 교회는 거의 없고 그리고 에큐매니칼한 교회가 되어버렸거나 혹은 동성애 같은 것을 다 수납하면서 교회의 참된 모습들을 이미 잃어버리고 다원주의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강연과 그리고 백스터교회에서의 설교가 끝난 후에 보여주었던 몇몇 참석자들의 반응을 잊을 수 없습니다. 대개 저를 찾아와서 두 손을 꼭 잡고 말씀을 전해주어서 너무 감사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 사람들은 공교롭게 머리가 하얀 80에서 90살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들이었습니다. 그중의 한 할머니는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인 상태에서 제 손을 붙들고 정말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그분들이 바로 영국의 부흥의 마지막 물을 먹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2차 대전 때에 하웰 해리스의 부흥 같은 것을 보면 영국 사람들이 독일의 폭격을 런던에서 경험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왜 그런지 폭격은 그쳤고 항복하기 직전에 영국은 다시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가 있었던 그때에 아마도 이 사람들은 10대나 혹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을 것이고 그런 부흥의 끝물을 머금었고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러 사라졌지만 여전히 순수한 복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노인들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교회에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 회심하지 못한 교인을 향해 절절한 회심의 눈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교회에 가장 커다란 불행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백스터는 자신의 책속에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목회자이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고 또 평신도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누군가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 가슴 저미도록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회개하라는 강단의 메시지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자각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묻은 은총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린 회개의 시간이 언제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죄인이 회심하여 살수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사도 바울의 그 눈물어린 외침이 오늘날 조국교회에 필요하지 않습니까? 목회의 꽃은 회심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강하고 더 높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하늘의 가치였다면 하나님은 그 작은 이스라엘을 택하시지 않고 로마나 중국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더 크고 강하고 부자가 되고 더 많아지는 것은 바벨론의 가치입니다. 예루살렘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교회의 영광은 많은 사람들이 진실하게 회심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전 존재의 울림으로 들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였던 청교도 존 오웰의 다음 충고가 긴급동의처럼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목회의 본질은 죄인들을 회심에 이르게 하고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교회로 돌아가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자기가 돌보는 영혼들 중에서는 이런 사람이 없는지를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