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자라나는 세대의 회심을 위하여
2008년 9월 14일 주일오전 설교
어머니의 눈물
(눅 7:11-16上)
I. 본문의 배경
II. 참척을 당한 어미
A. 비참함
B. 절망
III. 죽은 자를 살리심
A. 자비로써
B. 능력으로써
C. 이제는 복음으로써
IV. 결론
김남준
어머니의 눈물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눅 7:11~16上)
I. 본문 해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죽음은 산에 묻고 세월이 지나가면 시신도 흙과 함께 썩지만, 가슴에 묻은 자식에 대한 기억은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는다는 부모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바로 이런 불행한 일을 당했던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나인이라고 하는 곳은 나사렛에서 멀지 않고 갈릴리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작은 동네였습니다. 그 동네에 사는 어느 과부에게 독자가 있었는데, 오늘 성경은 그 독자가 죽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부는 어떤 이유로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남은 피붙이인 하나의 자식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근데 무슨 연고인지 젊은 아들이 자기를 앞서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과부의 독자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청년으로 다 자란 아들이었습니다. 아마 이 과부의 마음에 밀려오는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고 이것을 보는 많은 동리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였을 것입니다.
저의 친구 중에도 3대 독자가 있었는데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수련회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실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열린 교회는 대대로 물가로 가는 것에 대해서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학생들은 배를 타고 양수리를 건너고 제 친구는 수영을 아주 잘하니까 천천히 헤엄치면서 따라갔는데 배가 건너가서 보니 그 친가 안 보였습니다. 오다가 심장마비로 물속에 가라앉은 것입니다. 3일 동안 잠수부를 동원하여 시신을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었는데도 3대 독자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독자의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성경 속 여인은 과부가 된 처지였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죽은 자식을 장지로 보내는 어미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과부의 독자가 죽은 장례식에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가 얼마나 실력이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동정심 때문에 많은 동네 사람들이 그의 슬픔을 위로하며 따라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Ⅱ. 어머니의 눈물
이 기사 속에는 아무런 대사도 기록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의 눈물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 짧은 기록을 볼 때에 어머니의 마음은 둘로 요약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비참함’과 ‘소망 없음’입니다.
A. 비참함
그녀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에 빠져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장례를 뒤따르고 있었고 아무런 소망도 없이 장지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식이 살아날 소망이 없고 자신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죽었고 남편을 여의고 의지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던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렸으니 이제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겠습니까? 가슴에 있는 수많은 원한과 슬픔을 오직 눈물로 털어 놓을 뿐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위로도 이 여자에게는 진정한 위안이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독자를 여읜 이 여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남편을 여의고 외롭게 살아가면서도 이 자식은 여자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위로였습니다. 이 여자는 홀로 사는 외로움 속에서도 아이가 점점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어른스런 청년으로 자라가고 있는 것이 그녀의 사는 소망이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금은 아무 희망도 없이 장례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기적이나 놀라운 변화의 가망성 같은 것들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던 아들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에게 있는 모든 희망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아들을 편안하게 장례를 지내야겠다는 생각이외에는 이 장례가 끝난 다음에 자신은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의지하고 지낼 것이며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외로움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인생을 지탱할 수 있을지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통곡하는 일이었고, 통곡과 눈물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지만 자식을 여읜 어머니의 비참한 마음이 자식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함께 눈물이 되어서 이 어머니의 뺨에 하염없이 흘러 내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여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주신 것은 단지 번성하고 생육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다보니까 계획 없이 자식을 낳았을지 모르지만 자식을 주신 하나님의 계획은 실로 원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의 아이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게 됨으로써 아이들마다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행복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온전히 실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한편 그 아이들 하나하나를 참된 신자로 만들어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몸에 한 지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본문 속에서 어머니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는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는지 문맥만을 봐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자식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도 살았으나 함께 죽었고, 어머니의 통곡하는 눈물은 자기의 자식이 죽은 것에 대한 큰 슬픔이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 건너편으로 가버린 자기의 아들과 이제 그 아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깊은 통곡이었습니다.
요즘은 부모가 자식을 옛날처럼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가족들과 앉아서 TV를 보는데 부부가 이혼하면 서로 자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서 고아원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마지막 시대가 되어갈수록 인간이 자기밖에는 모릅니다. 예전에는 국가도 알고 가족도 알고 교회도 알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훨씬 넓었습니다. 넓게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니까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자기 새끼밖에 모릅니다. 더 세월이 흘러가니까 이제는 새끼, 남편, 아내도 다 필요 없고 자신의 몸만 아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 앞에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어머니보다 앞서 갔다고 하더라도, 더 살아 봐야 4-50년이나 5-60년 있을 육신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이렇게 장사 지낸 바 된 죽어 있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혹은 아직 슬하의 어린 아이들로 남아서 아직 회심하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해 죽어있는 영혼들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다 장성해서 시집, 장가보냈기 때문에 더 이상 돌볼 여지도 없이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장소적으로 자식을 멀리 떠나보냈다고 해서 그들의 죽어있는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자유로움을 느낀다면 정말 무정한 부모라고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늘 자식을 향한 사랑에 깊이 잠겨있습니다. 이 어머니가 먼저 떠나보낸 자식을 두고 통곡하며 울 때에 아마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자식을 위해 눈물 흘린 어머니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 크리소스톰의 어머니 안투사는 1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되었습니다. 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절세의 미인이었지만 자식을 위해 헌신했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회심하지 못한 자식을 위해서 일생동안 눈물로 기도하던 믿음의 어머니 모니카로 인해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찌 이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기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을 때에 자기를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켰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통곡하며 너를 대신하여 내가 죽었더라면 하고 울었던 마음도 역시 부모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아들의 죽음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자식을 위해 애달프게 눈물 흘리게 만들었듯이 만약에 우리의 자식들이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못하고 죽어 있는 영혼의 상태라면, 여러분이 자식을 위해 단 한번이라도 눈물의 기도를 들어 보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을 자식들에게 보이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자식을 이 세상에 있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회자를 통해서 배우고 집에 가서 부모를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어머니가 죽은 아들의 육신을 위해 통곡하며 울었던 것처럼 우리는 육신으로 살아있어도 영으로 죽어있는 우리의 자식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충분히 눈물을 흘리는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의 회심은 어떻게 보면 쉽게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부모를 고통과 괴로움 속으로 몰아넣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영국에 가서 설교했던 교회는 조지 뮐러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예배당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목사님이 자기 친구를 위해서 53년 동안이나 기도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생전에 회심을 보았지만 그 중의 어떤 친구는 목사님이 돌아가신 여러 해 후에야 회심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했던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죽어도 이 세상에 남아서 역사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진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기도는 이 세상에 남아서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멀어 보이는 자녀의 회심의 길, 특별히 자녀가 믿음 안에서 장성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리들이 올바르지 못하고 본이 안 되는 생활 속에서 가슴에 많은 상처와 불신앙의 부패한 기운들이 배이게 되었을 때 어쩌면 우리들이 오래도록 기도해도 자녀의 회심이 가혹하리만치 더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의 강퍅한 마음, 돌아서지 않은 상처받은 마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인 여러분들에게, 아버지인 여러분들에게 자신의 자녀를 향한 이러한 살 깊은 통곡과 눈물이 있는지를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B. 절망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고 자신에게 그 사랑을 몸소 가르쳐주는 어머니,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신에게 보여준 어머니,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란 사람입니다. 믿음의 1세대인 우리들은 이런 큰 은혜와 축복을 못 누렸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부모로부터는 기도를 받지 못했어도 우리 영혼을 위해 기도하게 하고, 우리는 그렇게 못했어도 우리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목회자들과 우리를 위해 눈물로 빌어주던 지체들의 도움으로 어둔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 이처럼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힘과 공로로 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자비, 우리를 위해 빌어주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눈물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은 복되게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우리를 믿음의 부모가 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아무 희망도 없는 구원의 경험을 우리에게 주셨는데도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죽어있는 상태가 되었는데도 그 자식을 위해서 눈물 흘리지 않을 만큼 우리의 마음이 굳어 있다는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만큼 자신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만 자신의 영혼을 위해 염려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녀를 향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혹자는 자식을 회심에 이르게 했으니 나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끝에서 보면, 우리 자녀들의 회심이 끝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의 여정이라는 안목에서 바라보면 우리 자녀들의 회심은 겨우 요단강을 건넌 출발일 뿐입니다. 홍해를 건넌 광야의 길에서 출발일 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 누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회심에 이르도록 애쓰지만 회심한 후에는 이제는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라하고 팽개친다면 그를 진정한 목자로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회심한 자녀들을 둔 부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라고 생각하고 아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는지 마음을 기울이며 태어난 새끼를 옷섶을 풀어헤쳐 젖을 물리는 것처럼 진리의 신령한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먹지 않고는 젖이 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이 진리의 말씀을 잘 섭취하고 소화하고 마음 안에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교리들이 쌓여야 할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녀들을 끌어안고 젖을 먹이는 유모처럼 자기의 자식의 마음에 자신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을 떠 넣어주는 애정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는 20년 후에는 지금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참된 복음의 신앙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참되고 진실한 복음 신앙에서 멀어질 때, 인간은 세속주의 아니면 차가운 이성에 호소하는 형식적인 신앙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자식들을 붙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을 붙들어 주는 것은 오로지 살아있는 하나님의 복음이고 성령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회심을 이루기 위한 많은 집회들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이 프로그램들이 우리의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만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큰 사랑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만이 우리 자식들의 어둔 영혼에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잠들어 있는 우리 자식들의 영혼을 깨우고 식어져 있는 우리 자식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 사랑의 뜨거운 불길들을 지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평생 여러분들에게서 태어나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그 아이들이 여러분 죽은 후에 회심도 없이 방황하다가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한 채로 허무한 인생을 마친다고 할 것 같으면 천국에서 그 아들을 바라본 우리의 마음이 어찌 낙원일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은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식과 하나 된 신앙입니다. 부모의 마음에 꼭 필요한 것은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집안에서 자녀와 아이들을 잘 다스리고 사랑으로 가장의 역할을 잘 하는 사람들은 절대 교회 와서 목회자에게 대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존경 받지 못하고 자식들 통제 못하고 자식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남편들이 교회 와서 대들고 형편없이 행동합니다. 자기가 집안에서 목회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어서 지체들을 판단하고 막된 행동들을 해서 교회의 몸을 현저히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명예를 누리고 많은 재화를 얻는 것을 인생의 본질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 좋은 신자가 되고, 자기 자식들을 사랑하고 진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면 인간으로서 할 모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죽고 나거든 오늘 설교를 기억하십시오. 넉넉잡고 50년 후쯤 되면 제가 충분히 이 세상에 없겠죠? 아마 그때 되면 우리들이 드리던 이런 예배와 우리의 참회와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자식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던 회심 집회 이야기들은 전설처럼 우리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바라볼 때 먹고 살만해진 후에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그랬습니다. 결국 종말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떠나고, 진실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큰 능력으로 인간의 불신앙도 사용하여 당신의 영광스런 나라의 회복을 향하여 진행하게 할 것이고 당신의 나라의 종말의 영광을 이 땅에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아직 기력이 남아 있고 복음에 대한 체험과 확신이 살아있는 때에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아직까지도 복음의 능력과 은혜의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의 많은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그 하나님을 그들도 만나고 이 세상의 풍조가 아무리 바뀌고 변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풍조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에 붙들려서 십자가에 붙잡혀서 살아가는 자식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자기의 자식들을 위해서 많이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면서 하셨던 말씀,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및 너희의 자식들을 위하여 울라” 라고 하셨던 말씀처럼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마다 자기의 자식들의 회심하지 않은 처지를 아파하며 부모들이 진실하게 눈물을 흘린다면 교회는 놀랍도록 정결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의 신앙이 정결해지지 아니하고는 자식을 위해 흐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자식들이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될 것이고 신앙의 정수는 우리 자녀들의 가슴에 물려질 것입니다.
Ⅲ. 죽은 자를 살리심
이 여자가 심히 통곡하고 슬피 울면서 장례 행렬을 힘없이 뒤따라오고 있을 때 그를 살려주셨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A. 자비로써
이렇게 살려주시는 주님의 큰 역사는 자비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자기 자식을 살려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는 일도 나오지 않고, 자기 죽은 자식을 살릴 만한 큰 믿음을 어미가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직 눈물로 찢어지는 마음으로 통곡하며 절망의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장례 행렬을 가로막으시고 자기의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고 명령하실 때 여인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의존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도 못하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 이 불쌍한 과부의 비참한 처지를 보시며, 마음으로만 통곡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자비로써 이 여자의 아들을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친히 구하지도 않으며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자식의 육체의 죽음을 인해 비통해 하는 여자가 주님의 자비심을 움직였다고 한다면 주님이 누구신지를 명백히 알고 자신에게 임한 구원이 자기 자식에게도 미치기를 소원하며 구원의 유일한 주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눈물 흘리는 부모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거절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자식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기 때문에 아이가 회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자식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습니까?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 부모의 처절한 몸부림을 바라보면서, 저는 종종 열심과 뜨거운 사랑의 절반만이라도 아이의 영혼을 위해서 쏟아 부어진다면 저 아이는 훨씬 빨리 주님을 만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예수님의 한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어찌하든지 영혼들이 참된 회개에 이르러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가장 비참한 여자의 독자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자비로써 이 청년을 살려주심으로 당신의 큰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B. 능력으로써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재능이나 흔히 있을 수 있는 과학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된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죽은 자를 장례 지내기 위하여 관을 앞세우고 많은 무리들이 따르고 있었으니 죽음의 행렬이요, 한편에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지나가고 있었으니 이는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두 행렬 앞부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장례의 행렬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멈추시고 관을 가로막으시며 죽은 자에게 명령하여 다시 살아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미의 통곡하는 눈물을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청년은 죽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죽어 있는 자기의 자식들이 스스로 구원과 회심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믿지 마십시오.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자기의 자식을 위해 부름 받은 기도의 의무를 생각하십시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죽은 영혼이라서 믿음의 참된 본질로부터 소외된 자녀들이 온전한 신앙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도록 우리가 과부처럼 눈물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일지라도 영혼을 살리는 큰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C. 이제는 복음으로써
이때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심으로써 아들을 살렸지만 이제 주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고, 당신의 복음으로써 이 일들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찌하든지 우리 자식을 참된 진리가 있는 자리에 있게 하고 우리는 전심으로 낙심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미 자식들이 다 커서 시집 장가를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아이의 회심 여부에 대해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은 영원히 여러분들의 자식이고, 여러분들이 그 아이를 회심하지 못한 채로 시집 장가보낸 것도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잘못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의 자녀는 믿음이 없는 가운데 자녀의 자녀를 낳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고 여러분의 그 자녀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들이 그 아이들이 여러분 품에 있을 때 그 아이들에게 참으로 주님을 만나게 해 주지 못했던 것을 깊이 뉘우치며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자녀들의 가정과 교회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보면서 근심하며 그 자식의 영혼들을 위해서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고 부모로 살아가는 이 일은 일평생의 십자가입니다.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들을 당신 대신해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Ⅳ.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그 자녀들을 위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없다면 새끼를 위해조차도 흘릴 눈물이 없는 자신의 영혼의 병든 상태를 보며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이 일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더 이상 때를 지체하지 마시고 우리의 자녀들이 참된 회심에 이르러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비는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부모의 기도는 죽었던 자식들을 살아나게 할 것이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