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50:14)”
녹취자;조은령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 백성들이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 그 백성들은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그 그릇된 방법으로 섬기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마음에 많은 고통을 느끼시고 급기야 우리가 주님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섬김 받으신 적이 없는 그러한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제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제사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는데, 하나는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와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헌신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크게 속죄와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 구약의 다양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불결하게 하거나 성전의 물건에 대해서 범죄 하였을 때에는 속건제를 드렸고, 죄를 용서받고 싶었을 때는 속죄의 제사를, 자신의 드리는 헌신을 다짐하고 싶었을 때에는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다양한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사실 이 제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심적으로 주신 종교의 기능이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이 제사 제도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이 실제적인 삶에서 제사와 일치할 때에 그 제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제사 드리는 제물도 문제가 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편에서 시인은 아주 가슴아픈 기억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반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열심히 제사를 드린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퍼부어지는 하나님의 항의와 비난과 탄핵이었습니다 여기에 가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말하기를 ‘제물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책망할 것이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그냥 단순히 기계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한다면 너희들은 책망 받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부지런히 그 제사의 형식을 준수했기 때문이고 자주 그 일들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을 믿는 이 여호와의 종교가 단지 기계적으로 행하는 형식으로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비영적인 종교라고 하는 것을 한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유치할 정도로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되풀이하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다시 되새기게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많은 제물을 가지고 너희들이 내게 와서 제사를 드린다마는 그러나 너희들이 희생 제물로 드리는 짐승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봐라. 너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너희 것 중에 내가 주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너희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얻은 것이기 때문에 또한 주님의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너희들이 아무리 애썼어도 하나님이 그 짐승들을 새끼 낳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너희들이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고 너희들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잠시 위탁하여서 맡긴 것이니까 그것의 원주인은 나다’ ‘그리고 나 여호와는 그렇게 제물에 굶주리는 신이 아니다. 가령 백 번 양보해서 내가 그렇게 짐승을 먹고 싶고 짐승의 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너희 것 말고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인데 뭐가 아쉬워서 너희들에게 제사를 구하겠느냐’하시면서 반문하시기를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그러니까 그것은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배부르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소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피를 마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차용되어 온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중근동 지방의 많은 이방 족속들 속에서는 자신의 신들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고기를 먹여주고 피를 먹여주면 자신들을 축복해주고 그 제물이 뇌물이 되어서 신의 눈을 어둡게 해서 자신들에게 복을 주고 자신들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던 신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적용을 하니까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모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신앙의 참된 본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탄핵함으로서 그들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공격하고 그것들을 오히려 파괴해버리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똑같이 이러한 경고가 우리에게 들려져야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통해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드리는 헌금이나 여러분들의 봉사, 여러분들이 드리는 찬양과 다양한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영광을 돌려야지 만 비로소 영광스러워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을 지키고 그렇게 신앙생활의 형식을 유지해 나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이 받을 영광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늘 똑같이 이 시인이 그러한 하나님의 지적을 뼈아프게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필요하다면, 손오공도 머리털을 뽑아 바람을 불어서 수백만 마리의 손오공을 만들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당신을 예배하는 것이 정말 기쁘시다면 세상 가득히 사람을 채우는 일을 하나님이 못하시겠습니까? 만약에 단순히 노래부르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음을 원래 창조하신 원음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당신을 향한 노래 소리로 가득 차게 하실 수가 없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높은 교회의 건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산들이 변하여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린 거대한 교회로 뒤덮인 세상을 만드실 수가 없겠습니까? 산을 만드신 그분이 건물은 왜 못 지으시겠으며 사람 하나 하나를 창조하신 그분이 왜 한꺼번에는 창조를 못 하시겠으며 원음의 창조자이신 그분이 어찌 이 온 세상을 당신을 향한 음악 소리로 가득 채우실 수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그런 일을 하신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떤 영화를 보니까 미래 시대를 그리는 가운데 가상의 체험을 하는 장면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컴퓨터 전문가 이야기는 앞으로는 그것이 정말 실현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현대화되면서 욕구불만 속에서 살아가고 자기가 원하는 삶과는 다른 삶을 살도록 이 사회의 압박과 경쟁체제에서 강요받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을 그런 것들로 해소하는 것들이 유행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화:중국에 3박 4일 동안 황제의 대접을 받으며 먹는 식당이 있다고 한다-황궁과 똑 같이 실내 장식한 곳에서 황제의 옷을 입고 당시의 옷차림을 한 시녀들의 시중 을 받으며 수백 가지의 음식을 먹게 되는데 엄청난 가격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아주 짓눌리며 살다가 가상 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그 방에 누우면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화면과 음향이 펼쳐지면서 갑자기 이 세상에서 머리 좋고 지위 높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상 현실 속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훌륭합니다’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머리가 너무 좋습니다’하는 현실에서 듣는 것과 정 반대의 이야기들이 계속 기계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족을 얻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 가는 곳마다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그 가상현실 속에서 자신을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서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만드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것 상관없이 입바른 소리로 아첨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당신은 최고입니다. 주님은 만주의 주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마음이 없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혼납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도의 도덕성을 가지고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 그렇게 배고프고 허기져서 제물을 찾아서 파리처럼 떠돌아다니는 잡신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제 인생 가운데에서 회복하게 된 감사한 것 중 하나가 자존감입니다. 저는 예수님 믿고 변화되기 전에 자존감이 너무 없었습니다. 키 큰 사람을 보면 제가 너무 작아서 고민하고 잘생긴 사람을 보면 못생긴 것 때문에 고민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 보면 ‘나는 왜 머리가 나쁠까’ 고민하고 부모님이 돈 많고 훌륭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보면 ‘우리 아버지는 뭔가’하며 괴로워하고 키 작은 사람 보면 ‘왜 나는 이렇게 멀대 같이 클까’했습니다. 또 공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이까짓 공부 조금 잘하면 무슨 소용인가’했습니다. 그렇게 자존감이 너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변화되고 나서부터 회복된 것은 자존감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누구를 만나도 자존감이 깊이 상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치료해 주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 효과가 있게 되었나 생각해보니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존감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그것을 배우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두 당신 앞에 모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당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당신이 원하시는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필요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제주도에서 혼자 식당에 가서 고등어구이를 시켰는데 옥돔을 가지고 와서 같 은 가격에 먹으라고 하기에 싫다고 했다-자존감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저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존감을 봅니다. ‘네가 제사지내는 제물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너 자신에 관해서는 내가 얘기한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 제물이 먹고 싶다면 이 모든 것이 다 내 것인데 내가 왜 너한테 제물을 받겠느냐. 그러니 너는 잘못됐다’를 얘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설교할 때 ‘주일만 잘 지키면 다냐? 그렇게 주일을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고 설교했더니 교회를 안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것은 교회 나오는 것을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라는 것인데 정말 그만 둡니다. 또 ‘십일조만 하면 다냐’고 했더니 안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종교적 심리가 도대체 무엇일까 연구해봤습니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문학적 표현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결론을 내렸는데 그 사람들은 그런 얘기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을 마음에도 없이 간신히 나왔는데 ‘나오면 다냐?’하니까 ‘나와 봐야 소용이 없다니 잘됐다’하며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서 간신히 교회에 나왔는데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면서 안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랄하게 짐승에 대해서 공격하고 제물에 대해서 공격하며 ‘이제는 제사 드리지 마라. 필요 없다’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자존감을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끔 제사해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지내는 너희들이 그 제물에 합당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심한 얘기가 이사야서에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열심히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는데 껌 씹으면서 히히덕거리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실 때는 ‘무슨 죄가 있다고 아까운 짐승을 왜 그렇게 죽이냐.’하시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여기십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옵니다. 아침 10시에 나와서 밤 6시에 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무라실 것이 없습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는 어떠냐? 너는 어떤 존재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 자신이 변화되어서 제사라고 하는 형식과 내용이 꼭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될 때 제사에 놀라운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아벨의 제사 같은 것입니다. 짐승을 하나님 앞에 잡아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열납 하시고 아벨도 열납 하셨습니다. 또 아름다운 제사 가운데 하나가 노아가 홍수 후에 드린 제사입니다. 모두 물에 잠겼으니 변변히 제사 드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양하시면서 노아와 노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름 겨울이 차례대로 오고 뿌리고 거두는 천지의 모든 것들이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운행을 해서 다시는 백성들이 이렇게 물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축복의 말씀까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또 제사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일 천 번의 제사를 드렸으니 짐승이 얼마나 들어갔을 지 생각해보십시오. 짐승뿐 아니라 그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면서 임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제사를 드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접해주신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주셔도 감당할 수 없는데 ‘뭘 원하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 제일 기쁜 경우가 친척집에 갔을 때 세배하고 난 후 ‘너 필요한 게 뭐냐?’고 어른이 물어보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뭐든지 주시겠다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최고의 기쁘신 상태를 제사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죽은 송아지의 숫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자존감에 대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어차피 수만 마리의 송아지도 많다고 하실 수 없는 정도의 양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까? 제사의 형식도 훌륭했지만 그 제사의 장본인인 솔로몬의 그 마음과 하나님을 향해 집중되고 변화되어있는 마음의 경향, 존재의 상태, 이 모든 것이 더할 수 없이 소중하고 말할 수 없이 귀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솔로몬에게 ‘필요한 게 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귀영화를 달라고 해도 다 주시려고 했을 텐데 구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님의 마음을 녹아 내릴 정도로 기분 좋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법대로 잘 다스리고 싶습니다’하니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비유를 하자면 교인 중 하나가 직장 생활도 바쁠 텐데 시간을 내서 교회에서 열심히 청소를 하니까 너무 사랑스러워서 ‘김 집사, 직장도 있을 텐데 이렇게 나와서 열심히 교회를 청소하니 얼마나 고생이 많소. 소원이 무엇이요? 무엇을 좀 해줄까?’할 때 ‘삼겹살 2인분만 사주십시오’하거나 ‘목사님 테이프나 한 세트 주십시오’할 줄 알았는데 ‘목사님, 튼튼한 빗자루 하나 사주십시오’한다면 마음이 얼마나 녹아 내리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솔로몬에게 ‘진짜 내 마음에 합한 것을 네가 구하는구나. 나머지는 원래 주려고 했던 것인데 보너스로 다 주마’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의 현장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교회 열심히 나오고 십일조하고 있는 자리에서 섬기고 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계속 하십시오. 더 열심히 하십시오. 더 잘하십시오. 더 충실하게 하십시오. 그런데 그것으로서 내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야할 필요성을 대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고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정말 변화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변화되라고 하시는 말씀이 오늘 읽은 그 절과 다음절에 이어서 나옵니다.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을 대충 말씀드리면 두 가지인데, 우선 이렇게 형식만 남고 존재와 마음 자체에 변화가 없이 형식을 붙들고 살아가게 된 삶 자체가 이미 환난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형식만 유지하고 내용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환난이 왔을 때 절대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원망하고 자기 방법대로 인간적인 술수를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더 큰 시험과 덫에 빠지게 되지-신앙에서 미끄러지게 되지- 절대로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관심사는 14절입니다. 첫째는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서원을 하나님 앞에 갚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변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의미는 앞에 나온 제사는 사실 감사의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짐승을 잡아서 드린 제사였습니다. 영적인 것이 포함되어야 할 육적인 형식의 제사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제사 드리는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가 껍질이라면 그런 껍질 속에 진정으로 깃들여야할 제사가 바로 감사의 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 하나님을 향한 인정,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 모든 계명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이렇게 예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것 내 꺼야’하는데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고, 그 후에 우리들이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선물로 받은 것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기회나 지위, 심지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주님을 만난 신앙의 경험까지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인데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그 하나님께 빚진 자된 존재인데 그렇게 하나님께 빚진 자된 것이 자기의 상태라면 그 중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의 형식을 드릴 때 반드시 그 안에 있어야 될 것은 감사입니다. 그 감사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사실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존재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것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깊은 감사, 하나님이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것, 자기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기의 자기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우리 안에 진정으로 넘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하고 소중하고 자존감이 유지되는 이 모든 상태가 전부 다 하나님의 다 은혜일 뿐이라는 고백이 있는 사람들만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아침 10시쯤 와서 여태껏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이 설마 교회에서 점심을 주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밖에 가면 맛있는 것이 더 많고 집에 가면 맛있는 것이 더 많습니다. 주일 낮 예배 달랑 드리고 설교시간에는 졸다가 간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긴다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위해 죽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스스로 이겨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문제는 정말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있습니까?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지난 이틀동안 목포지역에 집회를 갔는데 집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마지막 저녁 기도하다 글을 쓰다 하면서 시간이 지났습니다. 생각할수록 감사했습니다. 잠들 때까지 헤아려봐도 그 감사의 조건을 다 채울 수 없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아직 쓰레기 처분하시지 않고 남겨두신 것도 감사하고 하나님 믿게 해주신 것도 감사하고 교회주신 것도 감사하고 특별히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보게 해주신 것도 감사하고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며 살게 된 것도 감사하고 감사한 것을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졌습니다.
그렇게 감사로 가득 차게 되면 자만심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라는 자체가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이런 호의를 입어도 되나’할 때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사람들은 마음속에 감사가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10여 년 전에 하나님 앞에 스트레스를 극도로 느끼면서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원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너에게 안 해준 것이 무엇이냐?’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회개했나 모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해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한 모든 상태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그 감사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 받으면 마음이 바뀝니다. 마음이 바뀌면서 ‘그래 맞아. 내가 안 가지고 있는 것이 뭔가? 가족이 없나, 사랑하는 교회가 없나, 나를 목양 해 줄 목자가 없나, 건강이 없나, 물질이 없나’ 분에 넘치는 내 욕구는 만족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에 모자랄 정도로 부족한 것이 많지는 않지 않습니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돈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은혜 가지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렇게 감사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차갑게 형식적으로 지키던 주일, 형식적인 봉사 속에 놀라운 은혜가 깃들이게 됩니다. 대화하다가 가끔 하나님 섬기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는 사람이 있는데 말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짜증나고 하기 싫다는 얘깁니다. 스트레스라고 하지 말고 신선한 자극을 많이 받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감사로 가득 찰 때 그때 우리가 드리는 우리의 섬김의 형식이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것이 ‘서원을 갚으며’입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것입니다. 대개 큰 환난이나 어려움이 왔을 때 그 서원을 담보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서원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나입니다. 한나가 아이를 못 낳아서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할 때 하나님 앞에 서원합니다. '아이를 주시면 평생에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고 그 아이를 하나님 앞에서 섬기게 하겠습니다' 또 너무 기쁠 때에 그런 서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든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우리의 삶의 형식이 열납되는 것이 되기 위해서 그러한 서원을 하나님 앞에 갚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의 신앙의 형식 속에 정말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자의 정신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의 형식에 찬란한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문제를 개별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 개별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살면서 하나님 앞에 서원 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원 한 것,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결단했던 것들, 모두 넓은 의미에서의 서원입니다. 그것들을 여러분들이 깊이 준수하면서 그 서원에 대해서 무한한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그 서원을 갚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모든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헌금을 작정하고 서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살아가는 삶이 끊임없이 그 서원을 갚는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책임하게 자기 자식을 놓고 ‘전부 신학대학 보내겠습니다’고 서원 하거나 하면 안됩니다. 좀더 신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1학년 때 선교사로 가겠다고 헌신했다고 2학년 때 선교를 나갈 수는 없습니다.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합니다. 대학도 졸업하고 유학도 가고 언어도 공부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 것은 서원을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것은 사안에 따라 다릅니다. 자기 형편에 따라 다릅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서원을 갚는 방향으로 그가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원을 갚는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별적인 서원들은 그렇게 갚아 나가야 합니다.
일반적인 서원은 개별적인 서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라고 결심할 때 그것은 곧 ‘이제는 내가 나를 이 온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가치 체계를 버리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베푸신 희생과 그 크신 고난을 잊지 않고 구속을 통해서 다시 이루어 놓으신 창조의 목적으로서의 회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 인생의 방향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서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통해서 우리들이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피를 자신 속에 받아들임으로서 그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고 그 언약 안에서 우리는 묶여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언약관계라고 말합니다. 그 약속들을 끊임없이 하나님이 성취하시고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약속에 참여함으로 받아들이게 된 그 모든 믿음의 서약들을 갚아나가는 일평생의 혼인과 같은 삶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에는 이러한 진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삽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멋대로 살아서 형식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이어져 있지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삶은 이기심으로 똘똘 뭉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내놓은 서원도 갚지 않고 다른 방향의 삶으로 줄달음 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구원을 얻을 때 약속하고 참여했던 모든 언약들을 소홀히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부당한 삶을 일삼습니다. 그러면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신 안에 죄는 융성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는 소멸되어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분을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했을 때에 자기가 참여하였던 그 새 언약의 서원을 지고 그것을 이루어 드리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그런 삶이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들이 지키는 주일은 찬란한 광채가 나기 시작하고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우리들이 드리는 이 예물은 하나님 앞에 정말 향기로운 제사가 될 것이며, 적은 제물로도 하나님 앞에 커다란 응답을 받고 주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런 일들이 가능해집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계속 받고 그 은혜 안에 계속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확 피울 때 그 타오르는 불길이 은혜라면 그 위에 올려지는 장작은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지식이 그 타오르는 불길 위에 계속 얹어질 때 불이 치열하게 타오르면서 예전에는 끓일 수 없었던 그 어마어마한 가마솥의 물을 끓이고 쇠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만들 수 있는 에너지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통해서 지식의 그 장작이 올려져가고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불이 활활 지펴질 때 옛날에는 그 불을 피워서 기선도 바다를 항해하게 하고 기차도 연기를 뿜으면서 대륙을 가로질러 달리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하나님이 우리를 새사람 만드시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비결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형식에 합당하게 변화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생명의 은혜의 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계속 은혜와 불에 가득 차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도 이렇게 은혜의 불과 지식의 연료를 동시에 받아서 여러분들의 형식만 남은 신앙생활에 내용이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생활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