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할 근심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하므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고후7:9)
I. 본문의 배경
고린도후서는 분투하는 전도자의 삶을 산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의 고생, 그리고 그 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기록한 책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우기는 했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을 많이 할퀸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세워질 때는 모두 주님의 은혜로 세워지지만 그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악함 때문에, 사랑하여야 할 교회가 서로를 아프게 할 때가 있고, 심지어는 가장 서로 사랑하여야할, 끝까지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여야 할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서도 서로 할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교회를 세웠지만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교만해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사도 바울을 업신여기고 그가 전해준 복음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뜨려지던 좋은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자 온갖 더러운 세상의 죄악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듣고 사도 바울은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파당을 나누고 분리하는 죄,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탐욕의 죄,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하는 죄, 이런 모든 그 도시에 있는 죄들이 고린도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전서는 그런 가슴 아픈 소식 위에, 심지어는 사도 바울이 정말 사도냐 하는 사도직에 대한 도전의 이야기까지 들려오는 가운데 써내려간 책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는 아프게 책망하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그 후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때, 사도 바울은 그렇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심하게 책망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후일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자 사도 바울의 책망을 인해서 많이 아파하고 회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식 가운데서 고린도 후서를 써 내려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맨 처음에는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 이것은 곧 그들의 죄를 강력하게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후회하였지만… 왜? 너희들이 그렇게 아파하고 아파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내가 그렇게 책망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근심을 통해서 너희들이 참된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기뻐할 근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II. 기뻐할 근심
근심에는 슬퍼할 근심이 있고, 기뻐할 근심이 있습니다. 슬퍼할 근심은 문자 그대로 슬픔 이상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근심입니다. 근심할수록 슬퍼지고, 근심할수록 마음이 상하고, 근심할수록 영혼의 어두움이 찾아오고, 근심할수록 육신의 힘까지 쇠하여지는 그런 종류의 뼈를 썩히게 하는 근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더 많이 소유할까 하는 등의 모든 근심은 이렇게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며, 우리의 육체의 뼈를 썩히는 근심입니다. 그러나 기뻐할 근심이 있으니 이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가 했던 근심이었습니다.
A. 자신의 죄를 위하여
그들의 근심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자기들의 죄를 인한 근심이었습니다. 예전에 탐욕에 치우치고 은혜가 떨어지고 마음이 어두웠을 때에는 자신들이 그 죄를 지은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인간이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관점이 철저하게 자아 중심이 됩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철저하게 자기 본위가 됩니다. 보는 것도 자기 입장에서만 봅니다. 생각하는 것도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판단하는 것도 자기 이익에 관련해서만 판단합니다. 뭐든지 자기 본위가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스며들어가게 되면 자기 본위의 삶이 하나님 본위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생각은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어떤 생각을 하실까, 주님의 마음이 어떨까하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질 때에는 죄 같은 것은 생각나지 않고, 자기 힘든 것, 자기 상처, 자기 고통, 자기 설움... 이런 것들만 한없이 복받치면서 그 맥락 속에서만 모든 문제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 속에 우겨넣으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죄에 빠졌을 때, 은혜가 사라지고 죄가 그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그 상처에 감염이 되어서 그 상처를 타고 죄가 스며들어 오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이 죽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손톱 밑에 난 작은 상처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당뇨병이 있다든지 심각한 면역 결핍증에 걸리면 아주 작은 상처로도 결국은 피가 멎지 않거나 썩어 들어가고 저항력을 잃어버려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처를 타고 죄라는 균이 막 타고 들어옵니다. 그런 상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그 다음에 자기 본위의 생각에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각성시키시게 되면, 어리석은 자기 본위의 삶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떤 마음일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몇 일 전부터 성도의 공동생활을 다시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스치고 지나가면 그것으로서 끝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삶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좌우하고, 그 안에서 작용할 때 나오는 것이지, 스치고 지나간 것은 이미 내 말씀이 아닙니다. 옛날에 무슨 말씀에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았더라도,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의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워 있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지금 있는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공동생활을 다시 한번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찰 때 그 은혜는 곧 사랑의 감화입니다. 사랑의 감화가 가득 찼을 때,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본위가 됩니다. 하나님 본위이기 때문에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식으면 예전에 용서했던 사람이 다시 미워지고, 은혜 받았을 때 화해했던 사람이 다시 원수가 됩니다. 그런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은혜가 떨어지고, 사도 바울에게 불순종할 때에는 아버지 같은 목회자인 사도의 마음을 수없이 할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다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각성하게 하시는 성령의 영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의 마음에 자기의 죄들을 인해서 근심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전에 우리가 행했던 이런 것들이 끔찍한 죄였구나. 교회를 나누고, 파당을 한, 이 모든 것들이 정말 큰 잘못이었구나. 우리가 부도덕한 것들을 용납한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힌 것이었구나! 그리고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 대들고, 그의 권위를 의심했던 것이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이었구나!’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근심한다고 해서 한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천천히 이야기해 드릴 테니까, 자기도 그런 때가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분명히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아주 똑 부러지게 회개를 했는데 이상하게 회개의 눈물이 걷히고 나서 30분도 되기 전에 회개할 때 간절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다시 은혜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경험한 적 없습니까? 우리들이 죄에 아주 얕게 빠졌을 때에는, 다시 말해 우리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우리가 한 번 영적인 순발력을 발휘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고 기도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쇄락해지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감각과 신령한 특질들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씩씩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붙들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의 지배 아래에 있다가 잠시 고갈되었을 때에 그런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가끔 통절하도록 참회하는데도 그 참회의 경험이 단번에 우리를 은혜의 지배로 데려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열렬한 참회의 기도가 식게 되면 신기하리만치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우리의 마음이 건조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이미 우세해진 죄의 세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경향성이 우리 안에서 강화된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죄에 대해 근심을 한다고 해서 근본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각성된 마음입니다. 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큰 회복의 은혜가 이들에게 임하기 전에 먼저 마음에 큰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근심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전례 없이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저녁마다 통절하게 흐느껴 우는 부모들의 기도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립니다. 정말 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는 자식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전에 여러분들이 부모로서 본을 잘 못 보였다고 해도, 또 예수는 믿었지만 변화를 받지 못하고 너절한 삶을 살아서 자식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다고 하여도 지나간 것, 안 그랬으면 참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눈물로 기도한 자녀들을 망하지 않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자녀들 자신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 때문에 근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어린이 회심 집회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밖에 안 되었는데 그렇게 사모해요. 그렇게 보입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밖에 안 되었는데, 은혜 받기 위해 금식을 하고, 친구를 헤집고 무릎으로 기어 나와서 목사님께 기도 받으려고 그러는 것들은 부모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 너 오늘 저녁에 가서 무릎으로 기어나가 친구들을 헤치고 나가 목사님께 안수기도 받고 오너라.”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어린아이들 마음속에 은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근심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보의 기도를 한다고 해도, (중보의 기도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아무리 그를 위해 대신 많이 기도해도 그 기도가 정말 그 아이에게 응답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아이가 자기를 위해 비는 그 섬김의 기도에 동참하는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그때에 그 섬기는 기도의 놀라운 위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근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몇 일 전에 어느 자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섯 살 정도가 된 아이들을 모아놓고 선생님이 집회 끝나고 복음을 전하는데 한 아이가 막 울더래요. 그 다음 아이가 또 막 우는데 선생님이 혼란에 빠졌어요. 복음을 가르치는 중에 아이가 우니까 이 아이가 복음의 가르침을 듣고 가슴이 아파서 우는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우는지 판단이 안 서더랍니다. 결국 나중에 판단하기를 이 아이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의해 우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도 복음을 들고 회심을 하니까 아주 뚜렷한 변화들이 가정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는 행동을 슬퍼하시는가, 기뻐하시는가, 다시 말해 그것이 죄인가, 아닌가에 대한 아주 예민한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거짓말 같죠? 정말입니다. 그래서 자녀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영혼에 대해 근심하도록 만드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B. 은혜에 대한 갈망을 인함
두 번째는 이들이 하는 근심은 은혜에 대한 갈망 때문에 생겨난 근심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진지한 근심은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방해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무엇을 인해서도 근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뒤에서 이것이 너희로 하여금 얼마나 분하게 하는지, 무엇에 대해서?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얼마나 열정적이게 하는지, 얼마나 사모하게 하는지. 무엇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죄에 대한 책망이 그들로 하여금 ‘아, 우리는 한때 죄에 빠져서 편당을 짓고, 목회자를 대적하고, 사도 바울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지체들끼리 나뉘고, 교만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주님이 우리 영혼에 은혜를 베푸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두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간절한 사모함,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영혼들이 잠들어 있으니까 그렇지, 영혼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더 많은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청소년들은 어른보다 생각이 단순합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 명, 고등학교 1학년 때 1명, 저희 반에 있는 친구 둘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아주 성격이 호탕한 친구였는데 자기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날 동안 앓다가 결국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절망도 그 나이에는 엄청난 힘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희망도 아주 크지만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이 접히면 절망도 순식간에 밀려옵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희망이 생겨도 그렇게 절대 희망이 아니고, 절망이 생겨도 그냥 근근덕신 그저 살아갑니다. 이제까지 40년, 50년 살아온 관성의 법칙이 있어서 떠밀리면서 꾸역꾸역 삽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꽂히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를 생각하게 되고, 생각 없이 살았던 자기의 삶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진짜 은혜를 받으면 불빛이 들어옵니다. 놀랍습니다.
제가 고등부를 지도할 때, 자매 하나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남자 아이 하나가 사귀자고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아이도 전혀 은혜를 못 받은 아이는 아닌데 은혜가 떨어졌는지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답장이 왔는데 분량이 많아요. 남자 아이가 좋아하면서 펼쳐보니,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우리는 그동안에 어떤 실패를 하면서 여기까지 신앙생활을 해왔고, 지금 우리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며,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 잘 해라. 하나님이 슬퍼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에 확 꽂히면 분명하고도 단순한 열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살아갑니다. 그런 변화가 청소년기에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회심해야 됩니다. 여러분, 생명을 걸고 기도하십시오.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안 다루어집니다.
이번주간에 시험을 한번 해보세요. 이제 12만장인가, 20만장인가 정도의 전도지를 찍습니다. 여러분들이 원 없이 전도하러 다닐 텐데, 여러분 나이 또래가 된 결혼한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간절히 권하면서 발이 부르트도록 전도하러 다녀보십시오. 여러분의 두 손을 잡고 펑펑 울면서 자신이 신자 되기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 번 경험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니까 은혜에 대한 갈망으로 근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회심했다고 해서 교만하지 마십시오. 은혜 가운데 있습니까?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 모르면서 불신자로 살아갈 때 괴로울 때와 하나님 믿고 회심한 다음에 은혜가 한없이 떨어졌을 때의 마음,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견딜만 합니까? 사실은 불신자 때가 더 견딜만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생명의 맛을 못 본 사람이니까. 그러나 신자는 이미 생명의 맛을 본 사람이니까 영혼이 생명의 은혜에서 떨어지면 견디기 힘든 영혼의 곤고함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에 대한 갈망을 스스로 갖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은혜가 떨어지더니 별 짓 다 하네.” 이런 식으로 욕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도 은혜에서 떨어진 적이 있잖아요! 그런 때일수록 인격적으로 사랑하면서 따뜻한 격려로 그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될 때에 근심하게 됩니다. ‘내가 너무나 먼 길을 떠나 왔구나!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내가 주님을 아프게 해드린 것이 너무나 많구나!’ 자신의 게으름, 악함, 그 모든 허물, 나태함, 바르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에 대한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녀들 자신이 이런 근심을 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찾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어린이 회심 집회를 해보니까, 그중에는 부모가 얼마나 가르치고 기도했는지 이미 그 아이들 중에는 일주일 내내 엄마랑 기도하다 온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갈망합니다. 어떤 아이는 그냥 등이 떠밀려서 온 아이들도 있습니다. 거의 회심을 안 합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익은 곡식부터 하나씩 하나씩 추수하십니다. 그것을 영글게 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로 인하여 근심하고, 은혜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근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 마음은 상한 마음이 되고, 그 상한 마음은 결국 통회하는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그런 간절함이 하나님의 놀라운 영혼의 어루만지심에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나이에 구별이 없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지극히 작은 어린 영혼들에게 찾아가십니다.
10여 년 전 교회를 개척하기 전, 성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 교회가 동네 사람들에게 핍박을 많이 받는 교회여서 그 날도 목사님이 집회를 열어놓고도 도망을 가신 상태였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동네 사람들이 와서 유리를 깨고, 예배드릴 때마다 와서 욕을 하면서 목사를 찾는 등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도 어지간한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또 교회의 위치도 어쩌면 그렇게 동네 한 복판인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크지도 않은 집의 한 복판에 있는데다, 나 같으면 가까이 있는 거야 어쩔 수 없으니까 헌금이 나오면 다른 것은 나중에 하더라도 유리창이라도 튼튼한 것을 두 겹으로 해서 꽉 닫아버리면 그 정도로 소리는 안 날텐데... 유리까지 헐렁헐렁하고 북까지 치면서 요란스럽게 예수를 믿으니까 그렇게 마찰이 일어나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서 80명 정도 되는 교인들이 마룻바닥에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거기 중학교 아이들 몇이 머리를 빡빡 깎고 가난의 때를 졸졸 흘리면서 집회에 참석을 했었습니다. 그 애들을 보면서 설렁설렁 돌아다니고 장난이나 쳐서 분위기를 흐리지 않을까하고 근심을 하면서 집회를 시작했는데, 너무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아이들이 그렇게 가슴을 치면서 어른들과 함께 들은 그 말씀으로 회개를 하고 기도를 시작하는데, 안쓰러워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바짝 마른 몸에 핏줄이 서면서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통회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회심하지 않은 많은 아이들을 보면 그 아이들하고 비교가 안 돼요. 런닝셔츠, 반바지 같은 것을 입고, 그렇게 나왔어요. 여러분의 아이들은 얼마나 부요합니까? 좋은 집에, 좋은 차에, 부족한 것 없이 발바닥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다니고. 저는 정말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요즘처럼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그 아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겁니다. 어쩌면 중학교 1학년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똑 부러지는 회개를 하면서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어찌나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몰라요. 그것이 바로 은혜를 갈망하는 근심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는 그의 지위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덕에 달려 있습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당신의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가의 여부에 대한 평가가 바로 덕입니다. 그런 덕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아름답고 탁월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입니다. 시골에서 짐승이나 치던 쓸모없는 다윗을 하나님이 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까? 그가 덕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훌륭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을 버리시고 목동에 지나지 않는 어린아이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를 그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계시를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III.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너무 늦었다고 낙심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 바로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회심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그 아이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자녀는 주님의 것입니다.” “얘야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는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으로 근심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근심하게 해서 회심에 이르도록,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하도록, 갈망을 갖게끔 간절히 영혼들을 권하고, 그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어루만져지도록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타이르고, 기도하고, 또 타이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