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목회의 꽃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1)
제가 열린 교회를 개척한 것이 1993년도 12월이었습니다. 정확하게 21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만약에 누가 저에게 개척하던 그 시절과 지금이 어떻게 변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오늘 교회가 겪는 어려움이 사실 20년 어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회적인 변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는 고전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심방하고, 진실하게 목회하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 20년 동안에 교회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해도 잘 안 되는 시대라는 것에 우리 모두가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1985년도를 기점으로 개신교 인구가 줄기 시작했고, 2000년도에 접어들면서는 현저하게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심하게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450만 명 정도로밖에 안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오게 되었습니다. 일부의 교회가 부흥한다고 하지만 아주 일부분이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방에 있는 꽤 큰 도시인데 최근 십여 년 사이에 3000명 이상 되는 교회가 여러 개 생겨났습니다. 정말 놀랍다고 했더니 200명 미만 되는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교회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싸운다든지 비리가 있다든지 해서 문제가 되고, 그러면 교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흘흘 털고 다른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었던 것과 같이 작은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를 찾아가서 거기서 사람들 속에 묻혀서 티 안 나게 신앙생활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몇 천 명 모이게 되면 재정적인 여유도 있고 목사님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능력도 있고 아이디어도 있고 좋은 프로그램도 만드니까 내용 자체에서도 작은 교회와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옮겨가고 블랙홀처럼 빨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100명, 200명되는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고, 이런 형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목회하고 계시는 여러 동역자분들도 이런 면에서 심각한 위기를 느끼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던 1993년도만 해도 교회를 세워놓으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까지의 이야기였고, 중반까지도 어느 정도는 그랬습니다. 그 후에 무엇인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1993년도만 되어도 교회를 개척하면 저절로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지금과 같이 교회에 대해서 반항적인 감정이 사회적으로 폭넓게 퍼지지는 않았던 때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아주 파괴적인 정서들로 가득 차있는 이런 상황입니다. 이것들을 보면서 ‘이제 개신교회는 반성을 하고 좀 더 세상의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행을 해야 한다.’ 등등 반성을 많이 하지만 사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다보면 교회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세상에서 존경받을 정도로 성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던 시대가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물론 교회가 많은 것들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를 하고 문제도 많다는 것에 대해서도 깊이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점은 지금 이 시대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교리에 대해 수용할 수 없는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더라도 교회를 열 곳에 개척을 하면 3년 안에 7개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특히 신도시 근처에 개척교회들은 3년 안에 일곱 개 이상의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월세와 모든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떠나서 다른 곳에 다시 교회를 개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계속되면서 교회는 어떻게 하면 교회답게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의 생존이라는 것이 모이는 교인이 있고 교회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있으면 문 닫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목회는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목회자 자신도 어떻게 이 난관을 헤치고 나가야 할지에 대해 혼란스럽습니다.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교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재적인 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불신자들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훨씬 나아지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고 생겨난 것이 마케팅 교회입니다. 마케팅 교회의 조직과 개척의 많은 원리들이 미국의 편의점을 만드는 것과 유사한 방식의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케팅 교회를 많이 따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한 물 갔습니다. 마케팅 교회를 자처하던 교회 교인들이 심각하게 줄고 있고,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서비스를 받고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는 것에 만족을 한다든지 호감을 느낀다든지 하는 분위기가 지난 것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케팅 교회로 한창 날리던 미국의 교회들, 그것을 영향을 받고 한국에도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마케팅의 기법들을 가지고 교회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한물 건너왔습니다. 중대한 변화가 1990년도와 2000년도 사이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선교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국민소득 5000달러가 꼭짓점이라고 합니다. 5000달러가 될 때까지는 기독교의 수용성들이 아주 높은데 5000달러가 넘으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들이 안정되기 시작하면 종교적인 열의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도시마다 차이가 있습니다만 24000불을 넘었다고 하는데 벌써 지나도 한참 지난 것입니다. 똑같은 공식들을 대입해보면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한창 복음을 열심히 받아들였습니다.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국민소득이 엄청나게 올라가고 생활수준의 빈부격차가 심해집니다. 벌써 현저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나 심정 자체가 현저하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아직 소득이 낮은 서부 쪽으로 복음이 들어갈수록 훨씬 더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면 우리가 복음을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 가난한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안 맞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나라는 계속 발전하고 경제적으로는 생활수준이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든지 그들에게 복음이 계속 들어가서 영향을 끼치고 교회 성도들이 모일 수 있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천지를 비롯한 많은 이단들이 기성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교회들을 많이 허물어트렸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단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교인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만족을 느끼면서 오히려 그곳에서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하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교회의 영적인 형편이라는 것은 진공상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상황과 깊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함께 공부하면서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년 동안에 우리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사람이 늘 함께 숨 쉬고 생활하는 공간에 익숙해지고 나면 거기에서 나는 냄새라든지 거기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우리의 몸과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 대해서 익숙해지고 둔감해 지게 되는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숨 쉬고 늘 먹고 마시고 같이 변하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잘 모릅니다. 만약에 한 20년이나 30년 전의 교회와 비교해 본다면 현저하게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회개에 대한 설교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마케팅 교회가 지고 있고, 미국에서 한참 파죽지세로 교인들을 모으고 있던 조엘오스틴 목사의 사역 같은 경우에는 제가 재작년에 미국에 갔을 때 4만 2천명이 출석한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아마 5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교회를 짓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얼굴도 예쁘게 생겼습니다. 탤런트 같습니다. 요새는 조금 나이가 먹어서 덜한데 한창 시절에는 그렇게 예쁜 탤런트가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원고 놓고 쩔쩔매는데 이 사람은 원고 한 장 안보고 청중들을 향해 손을 들고 이야기하는데 한 시간 내내 설교를 해도 문장 한번 꼬이는 적이 없습니다. 호텔에 들어가서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는데 그 사람이 나옵니다. ‘순 가짜, 엉터리.’ 그러면서도 리모컨을 들고 끄지를 못합니다. 빨려 들어갑니다. 말을 너무너무 잘합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옥구슬 굴러가듯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웃고 울면서 자기 자신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헌금을 합니다.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행복과 평안’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회개하라는 메시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을 받아주면서 성공을 이야기하고 번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60년, 70년대 때에 성공주의, 번영주의를 이야기할 때는 생계형 번영주의였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비참하니까 ‘우리도 주님의 능력 의지해서 한번 예수 잘 믿고 복 받아서 한번 잘 살아보자.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고 잘 살아보자.’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꿈과 소원을 자신의 삶을 통해 펼쳐서 성취하는 데서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 된 것 같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현대인의 변화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것을 교회에서 해주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습니까? 식견이 있고 발 빠른 목회자들은 그런 것들을 미국에서든지 부지런히 배우고 자기도 연구를 해서 현대인의 정신에 맞게끔 기독교의 메시지를 변화시키고 현대인의 정신에 맞게끔 만듭니다. 엊그제도 얼마 전에도 어느 교인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회를 갔더니 아예 흡연실이 있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는 설교단 대신에 테이블이 있고 목사님이 편안한 차림으로 올라와 앉으시면 옆에 사회자들이 같이 와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침마당처럼 서로 대담을 나누는 것처럼 예배를 대신하는 교회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신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모든 교회들이 다 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보면 어느 교회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매력을 느끼면서 많이 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니까 부족하면 또 부족한대로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니까 그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판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적인 방식,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잘 성공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대안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바람직한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어린 시절에 신앙 생활하던 것을 회상해 보면 교회 와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는 “회개하라, 예수를 믿어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죄인 된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교회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울려 퍼졌고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가 있을 것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회개와 함께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살수 있다는 투박한 복음들이 교회에서 선포가 되었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나의 자신의 성공과 미래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심각한 오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돌아가서 명백하게 이해를 한다면 이 문제는 하나의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고 정의를 하면 목회 사역의 의무는 디모데후서에서처럼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정확하게 계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가 첫째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고, 그 다음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입니다. 목회 사역은 정확하게 그것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 두 번째는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해서 그들을 보다 더 온전한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하니까 성경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클래스도 만들고 사역도 하고 선교도 하고 교회 카페도 운영하고 서점도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확고한 목표 의식을 목회자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요즘에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불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자기 예배당에 나온 모든 사람들은 전부 구원 받은 신자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주 훌륭한 신자라고 생각하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상당 수, 어떤 때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길 수가 없습니다. 그 목회자는 그리스도인을 교회 출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와서 그리스도인을 과연 교회 출석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이 그물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천국에서 고기를 낚아서 쓸 것들은 챙기고 몹쓸 것들은 밖에 버리는 비유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때 먼저 믿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텐데 그 때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것, 참 신자와 거짓신자를 가려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는 접어둘 수 없는 문제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교회에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모였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중 대부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성공한 목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냉정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목회의 사역의 목표가 아주 불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생해야 구원을 받는 것인가? 최근에 여러분 가운데 중생에 대한 심각한 설교를 구원파 외에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회심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은 회심에 대해서 설교를 하십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영혼이 거듭나서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님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고백하고 영적으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예수를 통해서 분여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교회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성도들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목회의 진정한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복음을 듣고 거듭나고 회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이 목회의 진정한 성장입니다. 중생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은혜에서 자라갑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은혜의 성장, 사랑의 성장, 지식의 성장, 그렇게 해서 처음 믿을 때는 믿기는 했어도 여전히 흠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매일매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지식 안에서 성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은 사람이 되어서 마지막에는 흠 없고 티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도의 비전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 그러면서 내가 이전에 자랑하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데 그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그에게 목표가 생겼는데 그것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4)는 것입니다. 무엇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려하여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두 가지가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는데 첫째는 중생과 회심에 대한 강조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복음을 정확하게 들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 죽으셨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는 멸망한다. 그런데 회개하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신다. 그리고 너는 교회의 한 일원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가야 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정직한 선포를 들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상가상으로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계속 직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상 불신자인 사람이 교회의 집사도 되고 장로가 되기도 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실은 우리의 목회의 현실들을 점점 꼬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할 때에 그 때에 그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지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존귀함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에 대한 이해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다 깨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섬김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제 불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기도 많이 합시다. 착하게 삽시다. 세상 사람들에게 욕먹지 맙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양심을 제대로 가집시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지었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메시지가 틀린 것은 아닌데 일방적으로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계속 부으니까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런 의식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교회 안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지방의 한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거기 갔는데 담임 목사님은 어디 가시고 부목사님이 계십니다. 청년들을 위한 집회를 했는데 자기 교회 자랑을 엄청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서 자기네 교회가 한창 뜨고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명 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저는 기분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가보다. 무엇인가 배울게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마침 부목사님이 우리 학교 후배였습니다. 당신은 총신에서 공부를 했고 개혁신학을 알 텐데 몇 가지 물어보자고 하였습니다. “신학적으로 성인인 사람이 중생과 회심 없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 못 받는다고 합니다. 올바로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맡고 있는 부서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장년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몇 명이냐고 했더니 제가 돌보고 있는 사람이 800명쯤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신학을 한 목회자로서 진짜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들이 몇 명쯤 되느냐?” 오늘 죽으면 천당 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하였더니 35%약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나에게 자랑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데리고 있는 양떼 800명 중에서 240명 정도가 구원 받은 사람이고 나머지 600명은 불신자라는 말인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자랑스러워하는지 이야기해보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소리도 못 합니다. 옆에 목사님이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맡았느냐고 물었했더니 청년부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는 어떠냐고 했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많으면 50%정도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500명을 목회하는데 250명이 불신자입니다. 그 대책은 무엇입니까?” 고민해 본적 있냐고 하였더니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정통적인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인가 굉장히 모순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즘은 구원이라는 말 자체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20년 전에 이런 모임에 제가 많이 불려 다녔습니다. 교회 개척하기 전부터 한번 집회하면 목회자들이 2000명씩 모였습니다.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덕분에 돈을 많이 번 단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고했습니다. 앞으로 20년 안에 중생과 회심에 대한 설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하나 예언이라고 하면 웃기지만 예고할 수 있는데 20년 안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이 추세로 가면 그렇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이라는 말이 20년 전에 비해서 현저하게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구원이라는 말을 해도 그 의미가 원래의 성경이 이야기하던 의미와 다른 의미로 통용 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라는 것은 교회 안에 무엇이 들어와서 부정부패가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주의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할 자리에 하나님 빼고 사람을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각한 상황이 온 것입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영혼에 대한 고민이 현저히 사라졌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 어떻게 교회를 경영할 것인가? 어떤 전략을 짤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할 뿐입니다.
7~8년 전에 어느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터뷰를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잡지사가 아니고 불신자들이 하는 잡지사입니다. 저는 제가 매스컴에 나타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왜 저를 인터뷰하려고 합니까?” 했더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이렇게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하고 지금 종교 차례인데 불교, 천주고 하고 개신교 차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라고 했습니다. 기자는 불신자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왜 믿어야 합니까?” 제가 쭉 설명을 했습니다. “성경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왜 기독교는 성경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칩니까?” 설명을 했습니다. 인터뷰를 한 시간 넘게 하고 나서 갈 때 이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제가 개신교 목사님들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목사님은 제가 여태까지 인터뷰한 목사님들과 다릅니다.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고 스님 같으십니다.” 그 때에 제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불신자의 눈에 스님들은 철학자나 신학자처럼 비치고, 개신교 목사는 비즈니스맨처럼 비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는 안 들어오는데 불신자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받은 인상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광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고 불신자들이 우리를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회개해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회개가 일어나고 사람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그렇게 피터지게 복음을 외치는 시대입니까? 예수 안 믿으면 구원이 없다고 청교도들이 외쳤던 것처럼 “Repent or perish?”, “회개하겠습니까? 멸망하겠습니까?” 그런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외치는 시대도 아닙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목회를 해도 “사람이 정말 변했다. 예전에는 핍박자였는데 이제는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사람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절에 가서 몇 달 동안 생활하면서 눈칫밥을 먹다보면 불교의 예절이 몸에 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문화입니다. 그 사람들도 와서 새 사람이 되지 않아도 예배 시간에 손들고 질문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그것보다 훨씬 본질적인 무엇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주기 위해 시도되어야 하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어느 교회에 가든지 분명하게 피할 수 없는 선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설교입니다. “예수 믿어라. 안 믿으면 멸망한다.” 그 당시에 신학교육의 수준이라는 것이 지금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낙후되어 있습니다. 책도 없어서 프린트해서 쓰던 시절입니다. 제대로 신학교육 받은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불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 자체가 자기가 이 세상에 죄인이었다가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는 영혼의 깊은 울림이 있었기 때문에 목회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진실로 회개해서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다급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납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 전도 부인들, 이런 사람들이 시장 어구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기가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자기 예수 믿겠다고 거기에서 결심카드를 쓰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1960년도 중반의 일입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같은 동역자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최근에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시원할 정도로 설교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복음이 주는 의미에 목메어서 설교를 잇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회중들의 관심사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슨 일에 관심이 많은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 관심이 많은가? 부부가 계속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고 더 많은 향락을 즐기고 싶어 하고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어디가든지 자기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싶은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자기사랑의 시대입니다. 그런 것들을 채워주기 위해서 설교자가 고민을 하면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직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고 교인들이 모여야 생활을 한다는 현실적인 것을 떠나서 신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목회에서 진정한 비전과 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신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5년 동안 순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로 들어설 때에 누가 이 길로 가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이 길로 들어서면 좋은 차주고, 좋은 집주고 넉넉한 생활비 줄 테니까 다른 직업을 갖는 것보다는 이것 하는 것이 훨씬 더 먹고 살만하다 그래서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 우리 중에 누가 있습니까? 실제로 그런 생활을 누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 때 우리들이 생각하던 성공이라는 개념이 무엇이었습니까? 나 같은 사람을 깊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서 건져주신 십자가의 사랑, 그 은혜가 너무 놀랍기 때문에 내가 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강제력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은혜를 조금 받으면 장사하고 직장 다니면서도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크면 내가 빨리 이 모든 일을 다 집어 치우고 이 일에만 헌신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강한 이끌림, 이것이 소명입니다.
목회자의 소명은 하나의 체험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체험입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깊은 감격이 있어서 저들이 정말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엄청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완전히 실패하신 분입니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그 진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핍박하면 핍박을 당하고 거절하면 거절을 당하고 그래도 그렇게 진실하게 외치면 무엇인가 어둠 속에서 그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목회를 했고 그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게 살다가 죽으면 ‘50명이 모이든 100명이 모이든 1000명이 모이든 10000명이 모이든 그저 충분하다. 거기가 도시가 되었든 어디가 되었든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시골 목회자들을 위한 집회를 하러 내려갔습니다. 목사님 한분이 저와 막역한 사이입니다. “김 목사, 시골은 비전이 없어.” 다 노인네들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도 목회를 잘 했습니다. 70명도 안 되는 교회에 가서 20년 열심히 해서 200여명 되는 교회로 만들었고 교회당도 짓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 노인네들뿐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전도사들을 불러다 쓰려고 했더니 안 온다는 것입니다. 제주도인데 오겠습니까? 사례비를 주어도 항공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항공료는 따로 주고 사례를 해야 합니다.” 했습니다. 교회에서 그럴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장로님들이 허락을 안 한다고 합니다. 항공료가 80만원 드는데 50만원을 주면서 오라고 하면 30만원씩 보태라는 것인데 누가 오겠습니까? 어쨌든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비전은 무슨 비전이냐?” “아니, 그러면 김 목사는 비전도 없이 목회합니까? 비전도 없는데 교회도 이사하고 교회도 짓고 그럽니까? 여기는 젊은이도 없고.” “젊은이가 그렇게 좋으면 왜 여기에 교회를 합니까? 신촌에 개척교회를 해야지. 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합니까? 시골이라 다 서울 가고 없는데. 만약에 정말 젊은이 목회하고 싶으면 신촌에 가야지.” 나는 지금 안양 평촌에서 목회하지만 강남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떠밀려서 그리로 가버렸습니다. “나는 거기에 주셨으니까 거기 있고, 당신은 여기에 두셨으니까 여기 있지 않습니까? 없는 젊은이를 어디서 만들어 냅니까? 여기서 열심히 복음 전해서 회개하지 않은 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해고 회개해서 예수 믿게 만들고, 예수 믿는 노인들을 살갑게 대해주면서 예수 믿게 하다가 죽으면 닦고 염해서 무덤에 묻는 것이 당신의 소명입니다.” 목사님은 은혜를 못 받았는데 사모님이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아멘.” 교회가 커지면 목회자가 행복할 것 같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이번에 중국에 알리바바라는 기업으로 한 번에 돈더미에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도 안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나도 안 행복하다고 합니다. 교회가 크면 무엇이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목회 시작할 때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우리의 관심은 본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운동을 하면 모두 순복음교회가 되겠습니까? 찬양집회를 하면 다 온누리교회가 되겠습니까? 제자훈련을 하면 옥 목사님 하시던 사랑의 교회처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수없이 제자 훈련 따라했어도 그 교회는 사랑의 교회 하나였고 성령 운동을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따라했어도 순복음교회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각자 그분들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내가 왜 그분들 중 한분의 뒤를 따라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분깃을 따라 저는 목회의 길에 들어설 때 내 나이가 60세가 되었을 이런 모습이 되리라고는 생각 안했습니다. 저는 그냥 소명 받았을 때 다 포기하고 어촌이나 농촌에 내려가서 같이 모내기하고 풀 뽑으면서 살다가 초가삼간에서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15명이라도 모이면 열심히 목회하다가 장가를 안가도 좋고 그래도 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가고 오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독신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주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똑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과를 보고 상급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포사이스라는 설교학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열매 때문에 하나님께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상급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저도 지하실에서 7명 데리고 시작했습니다. 물이 콸콸 쏟아지는 지하실 교회가 두 번 들어와서 망한 자리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제가 2년 동안 사례비를 안 받았습니다. 7명이 모여서 교회를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때 더 행복한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더 보람차고 신나는가? 아닙니다. 긍지가 느껴지고 감사하지 않는가? 아닙니다. 그 때도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생각하고 문제는 본질적인 일에 얼마나 헌신하면서 사느냐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목회자에게 구령의 열정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흐려졌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방지일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103세인가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분이 101세에 선교사들을 위한 집회에 오셨는데 “요즘은 피가 사라졌습니다. 피가! 설교든 사역이든 예전에는 그 속에 예수의 피가 있었는데 피 냄새가 사라졌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목회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교회가 작아도 외롭지 않습니다. 만약에 제가 어느 큰 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청빙을 받아서 간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치일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7명 데리고 교회 개척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욕도 먹어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안 그랬습니다. 교회가 작기 때문에 자괴감이 느껴지고 동창회 나가면 짓밟히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셔서 개척교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럽습니다. 제일 부러워 보이는 것이 2층 교회에 있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저 돈이 어디서 났을까? 정말 대단하다. 우리는 언제나 저기 올라갈까?’ 마치 장가가서 애기를 낳았는데 도와주시는 부모님들도 없고 너무 힘든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아파서 누워있고 빨래하고 밥하고 그러면서 밖에 나가면 눈물 나게 부러운 것이 엄마 아빠가 애기 손잡고 뒤뚱 뒤뚱 걸어가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느끼는 것과 내가 무언가 짓밟히고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기 세워 주셔서 나는 여기 있는 것입니다. 저는 21년 동안 교회를 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어떤 목회자도 경쟁상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 갈 길이 따로 있고 저는 제가 갈 길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피가 사라진 것입니다. 무엇인가 중대한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많이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할 때 제일 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설교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늘 있고 그들이 교회에 나와도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생긴다면 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그것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다가 설교가 싫다고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쫓아내면 어디 간들 다시 목회를 하지 않겠습니까? 이발사는 가위하고 빗만 들면 먹고 살고 목사는 성경 찬송만 들고 다니면 먹고 산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 내가 살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제가 교회를 개척을 해서 21년 동안 왔습니다. 심지어 교회 장로님들이 제 설교를 듣고 예수 믿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한 7~8년 전에 ‘내가 이 설교를 하다가 어쩌면 내가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쫓겨나면 나는 미련 없이 간다.’ 교회에서 쫓겨나면 교인들이 고생이고 목회자야 할렐루야입니다. 어디 간들 고생 안하겠습니까? 어디 간들 그것보다 더 고생하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교회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세속적이면 세속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영혼에 대한 고민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번영을 설교하면 세상 번영을 따라가는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서면 복음적인 교회가 됩니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고 올곧게 하나님 앞에서 가야할 길을 가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교회가 세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신자로 넘어가 봅시다. 교회가 전도에 힘을 쓰는데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목회자가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오면 그 사람들에게 짧은 시간에 선명하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지만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서 주어 동사도 맞지 않고, 버벅거리고, 말도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면 사람들이 잠시 집중했다가 마음을 풀어버리고 집중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보다 훨씬 더 설교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설교에 시간을 투자해서 완벽한 설교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들이 노력을 훨씬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미국에 가서 집회를 했는데, 목사님이 새벽 두시 반에 일어나신다고 합니다. 교회에 오셔서 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매일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두 시간 반 기도하면 교인들이 새벽기도를 하러 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엎드려서 두 시간 정도 기도를 하고 4시간 정도를 기도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 중직자들과 말을 하는데 “목사님, 우리 교회는 특이합니다. 1년 동안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2년째는 침체에 빠지고, 3년째는 참다 참다 머리를 쥐어뜯고 교회를 떠납니다.”라고 합니다. 문제가 무엇일까 생각했는데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문제는 교회의 행정입니다. 교회에 사무직원이 두명 있는데 그 교회 장로님 부인들입니다. 뭔가 그림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에 교인이 2500명, 3000명 가까이 모이는데 교회 직원이 4명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숫자입니다. 뭔가 행정적으로 질서가 잡히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는 설교입니다. 일단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설교가 그 사람들의 성화를 촉진하는 설교여야 합니다. 사실은 전도 설교도 쉽지는 않지만 전도 설교는 부지런히 연습하고 자기를 훈련시킨 다음에 구령의 열정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성경을 통해 보여주고, 확장된 지식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그래서 지식과 은혜 안에서 자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대상이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사님들이 너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신학을 뗐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뗀 것이 아니라 신학이 무엇인지를 대충 훑은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운전면허를 따는 수준의 지식입니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70점을 맞았다고 평생 동안 운전을 쌩쌩하고 다닌 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점을 맞았어도 수없이 사고를 냅니다. 흔히 하는 말이 운전은 세 번의 여름과 세 번의 겨울을 겪어야 겨우 운전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50만km 정도 운전을 했는데 지금도 운전을 하는 것이 싫고, 특히 피곤할 때는 자신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목회 사역이라는 것을 해서 사람들이 그 목사의 설교를 1년, 2년 듣고 떠나가고 새사람이 온다고 하면 좀 낫습니다. 그런데 1년, 2년, 3년, 5년, 7년, 제가 열린 교회에서 20년을 목회했는데 다 헤아려 보니까 5215번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거의 다 들었다고 하면 무슨 새로운 것이 또 나오겠습니까? 20년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무엇을 또 배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 목회자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아멘, 아멘 하고 옛날에 은혜 받은 것을 가지고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이 나이에 뭘.”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올해 80살쯤 먹은 할머니가 수능 시험을 봤는데 꿈이 무엇이냐고 하니까 의상 디자인학과에 가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매일매일 배우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다.” 목회자들의 무지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어느 독자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제가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을 썼을 때였습니다. 살면서 너무 혼란을 느끼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자꾸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데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자기는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괴로워서 담임목사님을 찾아가서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상담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성경에 보면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는데 제가 살다가 보니까 자꾸 죄를 짓게 되는데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했더니 목사님의 대답이 황당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죄를 짓게 되어있으니 그것을 너무 괴로워하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비유를 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해수욕장에 가면 바다가 있고, 멀리에 풍선을 여러 개 줄로 매달아 놓고 위험하니 여기는 넘어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인생을 사는 것을 해수욕장에 온 것이라 생각하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을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이라고 생각해라. 그런데 넘어가지 말라는 줄만 넘어가지 않으면 되는 것처럼 너도 살면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다 이해를 하신다. 그 줄만 넘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 줄이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상담을 하기 전까지는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는데 목사님과 상담을 하고 나서 더 혼란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나서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읽고 나서 정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그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양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진리를 끊임없이 탐구해야지, 탐구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무한정 가르칠 수 있는 무엇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의지가 너무 박약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고 다음 주에 써먹을 수 있는 설교집을 읽고, 거기에서 뭔가를 찾아서 베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올라가서 열심히 원고를 펴고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퇴장을 하는데 원고 중 하나가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책을 찢은 페이지가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 설교집을 찢어서 갖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성과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자기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꼴을 먹이는 선한 목자의 양심입니다. 그런 탐구를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그런 식의 독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눈을 열어주는 신학적인 독서, 경건 서적, 이런 것들을 함양하고, 그것들을 자신 안에서 소화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진전된 지식을 가지고 성경의 진리로 이끌어 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꼭 스펄전 설교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말까 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진실함입니다. 사람의 지적인 능력도 다릅니다. 비록 영어를 못하고, 라틴어를 못 하고, 원어를 못해도 힘닿는 한도 안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한 후에 하나씩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부지런히 공부를 해서 ‘어떻게 하면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야 되는가?’ 이런 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자신의 힘닿는 대로 하고 힘이 부족할 때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고, 필요하면 자신보다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혹은 자신이 책을 통해서 연구를 해서 목회를 20년, 30년 하고 나면 연구의 흔적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이 현저히 적은 것입니다.
제가 20년 전과 다른 시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시대가 바뀌어서 어떤 시대가 되었는가?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슨 사고를 하고 사는가? 등등의 많은 고민들을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야 합니다. 절대 하나님은 우리에게 외부적으로 원고를 주듯이 “이런 것을 설교해라.” 그러면서 우리의 설교의 세계가 확장시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설교자 속에 말씀의 씨를 떨어뜨려서 그의 살을 찢으시는 것 같은 고통을 통해 예전에 보지 못했던 진리들을 보게 하시고 설교의 세계를 확장시키십니다. 한편의 설교는 설교자가 토해놓은 한사발의 피 입니다. 그러한 처절한 구도의 몸부림이 묻어 있을 때 그 설교가 살아있는 것이지 말끔하게 정리된 것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낭독한다고 해서 살아있는 설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누구이고, 구원이 무엇이고, 세상이 어떻게 변했고, 교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깊이 공부하면서 성경의 진리를 찾아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10년 쯤 교회를 다녀서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가장 나쁜 사람들이 됩니다. 부흥회를 가면 설교도 안 듣고 딴청을 하는 사람들은 교역자이거나 장로이거나 사모들이거나 셋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교회에 갔더니 하얀 양복을 입은 신사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계속 졸고 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 이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의 세계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는데 대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풍선 같은 설교자가 있고, 빙산 같은 설교자가 있습니다. 풍선은 있는 것은 물위로 다 떠올랐습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말하는 것이 아는 것의 다입니다. 그것은 깊이가 없습니다. 빙산과 같은 설교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의 십분의 일을 말했을 뿐입니다. 잠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축적이 필요합니다. 요즘에는 옛날 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정말 자료가 없었지만 지금은 자료가 정말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내가 설교할 때만 성경과 주석을 열지 말고 ‘내가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한 장씩 성경을 읽고 한 장씩 칼빈의 주석을 읽으리라.’ 마태복음 1장을 성경을 읽고, 마태복음 1장에 대한 칼빈 주석을 읽었습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꾸준히 읽어서 칼빈의 성경 주석 전체를 읽었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그까짓 거 무슨 효과가 있겠어?’ 하고 집어 치웠고, 한 사람은 그렇게 꾸준히 했습니다. 그렇게 3〜4년이 지난 후 한 사람은 칼빈의 주석을 다 읽었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설교 수준 자체가 다릅니다. 전설적인 설교가 조지 윗필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좋아하는 매튜 헨리의 주석이었습니다. 매튜 헨리의 주석이 잘 된 주석입니다. 저도 사랑하는 주석입니다. 이 사람이 부흥사였는데 교육도 철저하게 신학자처럼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반듯했습니다. 순수하게 복음을 전한 소수의 설교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부흥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생동안 매튜 헨리의 주석 전 권을 일곱 번 읽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일곱 번째 읽을 때는 무릎을 꿇고 읽었다고 합니다. 그 양을 보면, 그것을 한 번 읽는 것이 보통 양이 아닙니다. 그렇게 꾸준히 무엇을 하든지 성경과 신학을 가까이 하면서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손에서 책을 놓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꾸준히 책을 사서 계속 읽으면서, 읽어도 성경과 신학에 관한 이야기만 읽지 말고, 오늘날 돌아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이런 것들에 대한 것도 읽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대부분 보수 쪽에 속해 있는데 이쪽만 읽지 말고, 저쪽 편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신문과 TV를 통해서만 정보를 접하지 말고, 더 깊이 있는 잡지나 인터넷을 통해 접하면서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지식들을 모아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도들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고 설교를 해야 하는데 신자도 똑같습니다. 넓은 의미의 회심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님을 새롭게 믿는 것인데, 넓은 의미의 회심은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의 삶에 회개가 참되면 그 회개 속에 주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이 같이 옵니다. 회개만 하면 믿음이 같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매일매일 새로워지지 않으면 어떤 신자도 거룩한 성도로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회개하고 결단하도록 하기위해서 보통 노력으로 되겠습니까? 학문을 부지런히 탐구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 말씀을 붙들고 일주일 동안 살 때 그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고 설교를 할 때 사람들이 영적인 피조물인데 그것이 사람들의 가슴에 와닿을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의 삶이 진리에 묶여서, 진리에 붙들려서 진리를 전할뿐만 아니라 진리대로 살 때 그 외침이 진정한 외침이 됩니다.
터툴리안 같은 사람들이 평생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오늘날의 신앙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으니까 사랑이 없습니다. 회개가 있어야 사랑이 다시 샘솟는 것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를 더해서 그들로 하여금 진실하게 회개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과, 영혼에 대한 열정과, 자기 자신의 순종하는 삶과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 생활과,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결과물로 설교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성도들의 기도의 후원과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우러져서 나오는 것입니다. 앵무새처럼 글줄을 몇 개 더 안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절실하게 문제를 보아야 하는 것은 목회자가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즐거움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나이가 되어서 목회를 하는데도 새로 발견한 하나님의 진리,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마음의 문을 열러주셔서 보게 하시는 진리의 세계, 감격, 그런 것들이 목회자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목회자는 그런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가 교회 땅 산 이야기, 말을 듣지 않는 장로를 혼내준 이야기, 성지순례 가고 여행 갔다 온 이야기, 그런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외에 딴 곳에서 것에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면 망가진 것입니다. 그의 영원한 기쁨은 하나님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 진리 안에서 기쁨을 얻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담대히 하고 설교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회개에 대한 설교와 성도들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위로의 설교들이 하나의 설교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요리사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원하는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의사입니다.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교인들의 신앙과 영혼의 상태를 진단하고, 거기에 합당한 처방을 성경 속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독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격적인 사랑을 가지고, 그것을 알아듣기 쉽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그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도록 설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떤 성과가 있느냐 없느냐를 자꾸 묻는데 이것은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의무입니다. 설령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도 강단에 올라가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객소리를 떠들었는데 성도들이 아무도 졸지 않고 박수를 치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피땀을 흘려 기도해서 준비하고 올라갔는데 한 두 명만 듣고 나머지는 모두 잡니다. 그래도 우리는 전자처럼 하지 말고 후자처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목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설교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 시골에서 150명 정도의 목회자가 모였습니다. 제가 설교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을 내 놓으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내 놓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있는 것을 왜 땅에 묻어 두었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지식이 ‘1’밖에 되지 않는다면 ‘1’을 온전히 다 써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주석도 보고, 공부도 하면서 성경을 읽고, 그것을 잘 설교로 쓰고, 수정도 하고, 고쳐서 자기가 깊이 은혜를 받고 준비된 가운데 사람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는 것처럼 온 마음을 다해 설교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큰 성과가 나고 나지 않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다니엘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의무이니까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제가 잘 하는 강의가 하나 있는데 “평생 설교준비 하지 않는 법”입니다. 다음에 원하시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았느냐?”라고 묻는 다면 제가 할 말이 없지만 21년 동안 교회를 개척해서 하는 동안 ‘다음 주일에 무슨 설교를 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설교할 것이 설교할 기회보다 많았습니다. 5215번의 설교를 했는데 만약 7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게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설교할 재료가 부족해서 쩔쩔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오늘 읽는 책, 오늘 하는 성경 공부가 이번 주 설교에 도움을 줄 지 안 줄지를 묻지 말고, 큰 저수지에 계속 물을 저장하는 것처럼 하루도 쉬지 말고 계속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묵직한 신학 책을 놓고 공부하는 것도 좋습니다. “목사님, 제 나이에 그것은 분량이 아닙니다. 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매튜 헨리나 칼빈 주석이라도 부지런히 두세 번 계속 읽기를 바랍니다. 저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을 2003년에 썼습니다. 제가 저자이니까 제 머리에서 나온 것이지만 28번을 읽었습니다. 한 번 머릿속에 지나치게 하지 말고 그것을 기억 속에 잡아 두기 위해서 좋은 책들을 반복해서 독서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지금이라도 매튜 헨리나 칼빈의 주석을 펼쳐 놓기를 권합니다. “세상이 반쪽이 나더라도 매일 한 장씩 읽어 내리라.” 칼빈 주석으로 마태복음 1장하면 적은 분량이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분량입니다. 책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최소한 10페이지에서 100페이지까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매일 읽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두 번, 세 번 읽으면 설교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읽고 주일에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가 있는 설교집은 팔리지 않습니다. 예화로 가득 차있는 가벼운 책들이 팔립니다. 이 책을 읽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려고 읽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뭔가 찢어서 써먹고 싶은 것을 찾는 것입니다. 목회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밥해주기 싫어서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골병듭니다. 아무리 못 해도 엄마의 양심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시금치를 다듬고 콩나물을 다듬어서 국을 끓여서 먹여야지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예화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용에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내용이 없는데 예화를 하니까 교인들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예화를 들으면서 웃은 기억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꾸준히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기독교 강요』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칼빈신학교 대학원에 갔는데 기독교 강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이 두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 하루 한 것 가지고는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3년 정도 하고 나면 그것을 한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은 지식의 격차 때문에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신학교 선생으로 있지만 그것이 본업이 아닙니다. 저는 서울 변두리에 있는 교회의 목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목회 사역에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칠만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부지런하게 공부한 것을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마치고 교수 생활을 8년 정도 했는데 그때는 가르치느라고 정신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다 정리하고 학교에 사표를 내고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나서는 제가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하기 어려웠던 짧은 기간들을 제외하고는 온 마음을 다해 공부하느라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저의 목회 사역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된 것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가슴 아픈 일을 만나고 시련을 당해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오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너무 몸이 아파서 설교를 8시에 하고 났는데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견딜 수가 없어서 영상으로 틀어라 하고 집에 가서 정신없이 앓았습니다. 의사가 와서 링거를 놔 주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7시가 되었을 때 너무 힘들었는데 벌떡 일어나서 책가방을 들고 나갔습니다. 집사람이 새벽기도에 갔다가 들어와서 나를 붙들고 미쳤냐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 어제 설교를 못 했는데 쉬어야지 어디를 가냐고 했습니다. “여보, 월요일은 공부하는 날이니 공부해야한다.”, “여보, 평생 공부했잖아.” 집사람이 공부하라는 애들은 하지 않고 아빠만 공부한다고 했습니다. “여보, 지금까지 배웠던 것으로 죽을 때까지 해도 어디에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 듣지 않으니까 그냥 살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보, 당신이 보기에는 내가 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커다란 산에 비하면 나는 정말 부스러기를 깔짝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탄광을 캐는 광부에 불과하다. 매일 들통을 지고 1km 아래 탄광 속에 들어가서 석탄을 메고 나와야 주일에 겨우 불을 붙여서 성도들이 그 불을 쬐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할 수 있다. 나는 매일 석탄을 캐러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겸손이나 나 자신을 낮추기 위해 하는 말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 사역 앞에서 나는 매일 매일 그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신학교 다닐 때는 시간이 많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책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씩 점심을 굶어서 책 한권을 사오면 아껴서 읽다시피 하고, 그것을 읽고 나면 책 살 돈이 없이 살았습니다. 지금은 책을 살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가끔 서가에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책이 5만권이 있습니다. 도서관 보다 크고 좋은 책들이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사지 못했는데 지금은 책이 있는데도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데 얼마나 하는 일이 많겠습니까? 어떤 때는 서가에서 눈물이 납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러다가 끝나는구나.’ 시간이 있고 열의가 있을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고, 책이 있는데 시간이 없고, 은퇴하고 나면 시간은 있는데 읽어봐야 쓸 데가 없을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그것을 풀어 놓을 것입니까?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이제는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 눈이 좋지 않아서 책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러면서 안타깝게 우리의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르페디엠’, ‘오늘을 붙들어라.’ 오늘이 우리의 날이지 어제도 우리의 날이 아니고 내일도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저는 신학대학원 다닐 때부터 놀았던 적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제가 후배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신학대학원 3학년을 다시 돌려도 그 이상으로 살 수는 없다.”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열심히는 살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는데 열심히 했고, 또 열심히 해야 했는데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했습니다.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문제는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오늘 매 순간 까르페디엠, 오늘을 붙드는 것입니다. 매 순간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젊은 목회자들 계시지 않습니까? 50세도 되지 않는 분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세 시간을 책을 읽지 않으면 내가 밥도 먹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심방하고, 목회 사역에 있어서 아주 본질적인 일에 집중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5년 정도만 살고 나면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과 앉았을 때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영어를 읽지 못해도 얼마나 많은 번역된 좋은 책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을 체계적으로 꾸준히 읽어가면서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역량을 길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50세가 넘어서 독학으로 라틴어를 공부했는데 여러분은 왜 하지 못하겠습니까? 희랍어, 히브리어도 공부하고, 최소한 줄줄이 읽지는 못해도 우리말 성경이 무엇이 틀렸는지는 찾아낼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제가 설교를 할 때마다 “오늘 본문은”이라고 하는데 어느 교인이 이 말을 얼마 만에 들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설교를 하고 나면 성경이 해석되었다는 인상을 받아야 하는데 많은 분량을 읽고, 이미 성경을 보기 전부터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설교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비슷한 것을 찾습니다. 처음부터 성경은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오늘은 이 본문에서 이야기를 끌어내었는데 다음은 본문은 바뀌었는데 이야기는 비슷한 것입니다. 5년, 10년을 한 교회에서 설교를 들었는데도 성경은 계속 낯선 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사이기 전에 신자이어야 합니다. 대개 평신도 중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을 교사시키면 잘합니다. 교사 잘하던 사람을 신학교에 보내면 잘 합니다. 그 사람을 교육 전도사로 시키면 아주 잘 합니다. 교육전도사 시절에 눈물로 심방하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부목사로 쓰면 틀림없고, 그런 부목사 시절에 열심히 충성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던 사람이 담임목사가 되어도 잘 합니다. 제가 신뢰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설교자, 열렬한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기도회 인도자, 당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 적이 없는 당회자, 이런 것은 자기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일입니다.
모든 설교의 아름다운 것과 목회의 아름다운 것은 여기에서 주워다가 여기로 전달해주는 우편배달부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자기에게 들어가서 자기를 녹이고 변화시켜서 새로운 말씀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생명,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할 때 설교를 위해 성경을 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성경을 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서 회개하고, 믿고, 은혜를 받고, 깨뜨려지는 모든 일을 경험하고 나서 경험한 은혜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성경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의 말로 설교하지만 그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쏟아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말씀 사역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 애쓰는 것, 그것이 일평생 목회자가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간 인생의 발자취는 그 사람의 인간성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목회는 인간성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의해서 변화되어서, 변화되지 않았더라면 잘못 살았을 사람을 변화시켜 올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회 사역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목회를 해봐서 알지만, 한때 은혜를 받고 교회에서 순종을 잘 하고, 진실하고 열심히 살던 사람이 변심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이 소수라고 말하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만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도 회개가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말씀으로 돌아오고 십자가로 돌아와야 합니다. 불신자들의 죄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의 죄와 불순종은 아주 교활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래 된 신자들 속에 있는 죄에 대해 말씀하면서 그 죄는 예배도 견뎠고, 말씀선포도 견뎠고, 기도회도 견뎠고, 그 많은 것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교묘하겠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사람보다는 설교자가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인간에 대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으로 인간성을 보여주고, 회개하게 해야 하고, 참다운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런 사역이 반복되면서 오래 믿은 성도들도 끊임없이 회개하고 변화 되면서 새롭게 확장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자기가 절대로 볼 수 없었던 영안을 열어주시는 일이 일어 날 때 새로운 진리를 그들에게 말할 수 있고 그것에 도전이 되어서 사람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처음 온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설교를 오래 들었던 사람들이 여전히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은 방대한 학문의 축적, 영혼에 대한 뜨거운 헌신, 간절한 기도,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서 어떤 결과로 그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정직합니다. 절대로 심지 않는 것과 뿌리지 않는 것에서 열매를 얻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키우려고 하거나 교인의 수에 욕심을 갖지 말고, 진실하게 성도들의 심령에 와 닿는 말씀사역, 목회사역을 하겠다고 결심하면서 자기 자신을 훈련시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