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2팀실장수련회
2016
제6장 침묵 속에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 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녹취자:이경순
오늘은 제 6장 침묵 속에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벌써 이사야 53장 7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마음으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 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1. 그리스도의 양성교리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의 크기를 묵상할 때 얻는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원래 고난은 하나님이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것 같은 괴로움과 고통 슬픔 그런 것을 당신자신이 본질 속에서 겪는 분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겪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겪음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교훈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당신 자신은 겪지 않으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당신이 겪는 것처럼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기의 고백록 첫 장에서 당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움직이시나이다. 당신 자신은 바뀌지 아니하시며 모든 것을 바꾸시나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세 가지 답변이 주어지는데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고 사람의 육체를 취하셨다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다. 하나님으로서는 고통 받을 실수 없지만 참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교리라고 하는 것은 신 절반 인간 절반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한 신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시는 그것이 양성교리입니다.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죄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당신이 정해놓은 법을 위반한 것이나 혹은 당신에게 악을 행하는 것인데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에게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음주가 계속되면 알코올 중독이 됩니다. 모든 음주하는 사람이 알코올 중독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째든 술을 먹지 않았다면 알코올 중독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 되면 계속 술을 먹습니다. 자기는 너무 좋아서 그 일을 계속합니다. 그것은 결국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될 사람을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은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악을 행하실수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 모순적 존재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악을 행하실수 없고 또 똑같이 당신 자신에게뿐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악을 행하실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조물들이 잠시 악으로 느낄 뿐이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실 때 신성을 감추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아래에다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없애버리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감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서는 모르실수가 없는데 인간으로서는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서 동시에 모르는 것을 고난을 통해서 배워 가시는 것입니다. 순종을 배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하기 전에는 예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이셨나요? 그렇게 말장난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셨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은 아니셨습니다. 아담이 죄짓기 전에 모든 것을 알았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를 가르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학습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에도 물론 탁월한 지성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계속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언뜻 언뜻 그분이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그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셔서 모든 인간과 똑같이 죄는 없으셨지만 고통을 당하시면서 자기가 구속해야 될 백성들 처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심으로서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참사람이어야 했고 그리고 당신의 희생이 사람의 희생과 다르기 위해서는 그분은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신 분으로서 우리의 구속의 제사를 드려주신 것입니다.
2. 메시야의 침묵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 같이 이렇게 예언되었습니다. 실제로 대제사장이 가운에 일어서서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마가복음 27장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왜 놀라워 했을까요? 그렇게 대답을 한마디도 안하면 그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당하게 될 텐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체의 대답을 안 하셨답니다. 이게 바로 이사야서의 예언이 실현된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침묵하신 이유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침묵하신 이유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지혜를 아셨기 때문에 무슨 지혜입니까? 그들은 자기를 죽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못 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죽이고 그들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죽게 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할 수 없는 고난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만족이 있으셨기 때문에 즉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그냥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시고 당신이 하는 일을 인정해주신다는 만족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고 세 번째는 이렇게 당신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침으로 어떤 결과가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목표가 있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3-1. 하나님의 지혜를 아심: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이 지혜를 아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인간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된 모습이 십자가에 죽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것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담에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으로서는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병을 고쳐주셨지만 이것으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었고 공생애 동안에 그들을 사랑하고 섬겼지만 이것으로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단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우리의 대속을 위해 죽으심으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오히려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벳세다 광야를 자랑했을지도 모릅니다.
3-2.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의 세계는 어떠했습니까? 이 사실이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곤욕을 당하여 많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고 만족하셨기 때문에 그 고난 속에서도 평안함을 누리셨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에도 당신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있는데 회개 하지 않음으로서 이러한 형벌을 당할 죄인들을 위해서 오히려 중보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본받아서 우리가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은 우리에게 언제나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의 힘이 사실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3. 목표에 대한 인식: 성취해야할 목표를 아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이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만 십자가 질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취해야할 목표는 인류의 구속이었습니다.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보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의 완성이라는 목표가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하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 그러한 감화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 ‘이제 허락하라 이같이 하여 모든 일을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 말씀은 세례를 받으실 때 요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너무 잘 아셨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어떻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 있습니까 사실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세례라고 하는 자체가 죄 씻음의 표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레온 모리스라고 하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우리가 귀담아들을만한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받는 세례의 의미와 달았다. 죄 씻음의 표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죄를 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 연합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 씻음은 없었지만 이 세례를 통해서 자기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십니다. 그것을 당신자신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는 세례 시에 있었던 극적인 사건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딱 한번 특정한 장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만납니다. 만난다기보다 실제로 임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요단강에서의 일입니다. 그럼 이때에 성부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그 음성을 듣고 성령이 임하게 되는 사람은 성자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딱 한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서 모든 백성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이 예수 그리스도가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의 지정하신 메시야로 공식적인 취임을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두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 할 때의 이 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뜻일까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당신의 백성과 하나 되게 하시고 모든 백성들에게 메시아로서 공적인 취임을 하시고 그리고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백성들을 섬기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인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바로 인간을 본래 창조하고 세계를 지으신 그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계획은 인간의 죄에 의해서 잠시 이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서 다시 이 계획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셔서 창조의 목적으로 이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완벽하게 같습니다. 그래서 구속의 목적은 오히려 완전한 창조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세계의 완성은 바로 그 창조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전체의 요절을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이 관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여기에 서있다면 사실은 이 3장 16절이 서 있을 수 있는 토대는 창세기 1장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구속은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필요가 없습니다. 타락해서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속을 통해서 인간을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를 통해서 계획된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십니다. 사람은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인생을 삽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렇게 살 때에는 자신의 삶의 방향이 결코 창조의 목적일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철학을 통해서 인생의 참된 목적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그 마지막 결국은 철학은 마지막에 스스로 자신을 주인삼고 그리고 인간이 이 온 우주의 궁극적인 절대자가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게 동북아 사상에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주돈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유교가 성리학으로 가지치기를 합니다. 성리학을 가지치기하는데 그러면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화두가 성입니다. 이 성을 그 전에까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성입니다. 우리가 치성을 다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참된 성품입니다. 그 성이 사실 그 주돈이 전까지는 대체로 유교에서 인간의 내면세계에 있는 덕이었습니다. 그것을 성리학이 시작하면서 그것을 우주적으로 확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 성은 인간의 마음 안에 갇혀있는 것만 아니라 이것이 뻗어서 우주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절대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우주에 있는 우주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그 성 공교롭게도 이 성이라는 글자가 말씀언변에 이룰 성 자입니다. 그러한 성이 바로 인간의 내면에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것은 우주 전체에 있는 것의 반영일 뿐이고 우주에 있는 세계 전체를 움직이고 있는 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인간성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국은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그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자신 안을 움직이고 있는 이것이 결국은 우주 전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우주전체가 작동하는 원리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곧 하늘이다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상들이 결국은 다 그런 식으로 귀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설명을 자꾸 이런 식으로 했다가 저런 식으로 했다가 자꾸 뒤집을 뿐이지 궁극적으로 이런 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일평생 개혁신학자 종교개혁자로 살았는데 물론 처음에는 가톨릭의 사람이었지만 그 후에 방황하고 변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종교개혁자가 됩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자료에 의하면 놀라운 것은 칼빈이 일평생을 키케로 저서를 자기 가까이 두고 늘 읽었답니다. 키케로 누군지 아세요? 웅변으로 유명한 우정에 관하여 라고 하는 유명한 작품, 의무론, 도덕론 이런 것 쓴 로마시대 두 번째가 라면 서러울 웅변가입니다. 그리고 정치가였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선과 악의 목적에 관하여 라는 책입니다. 제목을 보고 너무 가슴이 설래서 도대체 이 사람은 뭐라 했을까 하고 미국에 주문을 해서 한 사흘 만에 책이 왔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이틀 동안 다 읽었습니다. 마지막 다 읽고 나서 헐 그랬습니다. 왜냐면 모든 세계를 움직이는 그것이 무엇이고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런데 인간은 자기 욕심대로 살면 안 되고 어느 한 근원으로 돌아가야 된다. 시종일관 부르짖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인간 본성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인간본성이냐 이런 문제를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책을 읽으며 한숨을 푹 쉬면서 아, 결국은 철학으로서는 물론 그 책에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역시 인간의 철학으로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할 수 없는 계속 도돌이표가 되는 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너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젊은 날에 벌써 이미 인생사는 이치와 도리를 깨닫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4. 이사야 53장 7절의 하반절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디에 비유하고 있습니까?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가 있나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었느냐면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시는 고난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으로서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없었는데 인간으로서 그것을 배워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배워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방식으로 이것을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멜기세덱의 관찰을 받은 대제사장 칭함을 받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