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예정과 견인(2)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녹취자: 이정호
지난 시간에 예정과 견인을 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 더 설명하는 것으로 지난주에 분량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견인의 교리를 하겠습니다. 약간 배웠지만 견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튼튼하게 붙들어 주고 인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인 교리에 있어서 견인이란 어떤 것인지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견인 교리에 있어서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 신적인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계속하시며 결국 그 은혜의 목적을 완성하시는 성령님 자신의 지속적인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 신적인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이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도록 자기의 목적을 완성하시는 성령님 자신의 지속적인 역사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교리가 왜 중요하냐면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이 기독교에는 이렇게 즉각적인 구원과 그 다음에 점진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즉각적인 구원은 칭의 같은 것이고 중생도 여기 포함되지만 점진적인 것은 성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마지막에 목적이 있는데 이것이 영화입니다. 우리가 구원이라고 할 때는 이 세 가지를 전부 다 포함해서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것을 이렇게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냐면 이렇게 즉각적으로 구원 얻는 것, 믿고 의롭다함을 받고 중생하고 이것만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그다음에는 성화의 삶을 살고 마지막에 우리가 영화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들이 경시되면서 쉽게 얘기하면 이것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사람의 삶이 이미 구원 얻었다고 하는 그런 안일한 마음 때문에 인간의 어떤 도덕 생활이 잘못되게 되었다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보냐면 이렇게 이 견인 교리를 부정합니다. 부정하고 그다음에 구원을 받았다가 잃어버릴 수도 있고 이렇게 해석하거나 아니면 구원은 마지막까지 살아봐야지만 그제서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이렇게 놓고 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구원받기 위해서는 굉장히 우리가 열심히 선한 행위를 많이 해서 그래서 이 공로를 좀 쌓아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미묘한 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인 교리를 부인하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론을 배울 때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배웠습니다. 우주적으로 보면 이 몸은 사실 한 개밖에 없습니다. 딱 몸은 한 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몸이 한 개밖에 없는데 그렇게 놓고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들입니다. 모두 이렇게 접붙여진 지체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는 그리스도고 우리는 그 몸에 이렇게 접붙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만약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잘 살 때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가 잘 못 살면 떨어져 나오고 잘 살면 다시 붙고 하면서 이것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런데 그만 잠깐 잘못 살아서 떨어져 있던 때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가 잠깐 이렇게 (예수님 몸에 접붙임) 됐는데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구원입니다. 뭔가 말이 안 맞는 것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한 번 택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구원하시고 구원하신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구원의 계속성, 그래서 견인 교리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끝까지 구원받은 자들을 붙들고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성경에도 증거가 나옵니다. 그래서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 영혼은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육체는 이 땅에서 끊임 없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 구절 같은 데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성도의 견인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속에 시작하신 신적인 은혜의 역사를 한 번 시작하시면 계속하시고 마지막에는 그 은혜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계속 하시는 것이 견인이고 견인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는 하나님이 견인하시기로 한 사람들은 성도들은 이렇게 중생과 칭의를 얻은 것에 만족해서 방탕한 삶을 살지 않고 끊임없이 성화되며 마지막에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이미 이룬 구원이고 이것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이고 이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삶을 사는 것만큼만 성도가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구원의 교리 견인에서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교도 시대 때부터 굉장히 의문이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러면 신자가 다시 타락할 수 있는가? 타락한다는 것은 그냥 도덕 생활이 무너졌다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교입니다. 그러면 참된 신자가 배교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졌는데 결론은 무엇이냐면 만약에 그가 배교를 했다면 배교를 하고 또 심지어 이교도가 되었다면 그러면 그가 어떤 체험을 했든지 간에 그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술을 먹고 어떤 죄를 지었다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가지고는 그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렸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복음의 총체적인 것에 대한 거부입니다. 복음과 복음 교리 전체에 대한 거부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라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붙드시는 믿음을 가진 성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4절과 6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재의 욕보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들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한번 비침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이것은 중생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진리의 빛을 받고 경험한 사람이라고 정리를 합니다. 그 정도로 빛을 받고 경험했으면서도 중생하지 못했을 수가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렇게 될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놀랍게 깨닫고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중생은 못했지만 그러나 이 계시를 받은 것에 대한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여기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그렇게 정통교리에 서 있는 신학자들은 성도의 견인 문제를 이 정도로 해결을 하게 됩니다.
문제 4번입니다. 견인의 교리란 무엇이며 견인 교리가 암시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계속하시고 은혜의 목적을 완성하시는 지속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일어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 칭의처럼 한 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역사이고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을 마지막까지 붙드심으로 그 구원을 완성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중생 했으면 성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야지만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지만 성화가 제대로 잘 안되고 죽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여기서 성화를 죽음과 함께 완성 시키시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이를 부활하여 영화에 이르게까지 하니까 구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인간의 영광을 드러낼 것은 별로 없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끝까지 우리를 붙드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문제 5번) 견인 교리와 신자 배교의 위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타락한 자는 복음의 총체에 대해 거부한 자로 참된 신자가 아니며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성도이다.” 타락을 했다면 신자들이 느낀 혼란이 상당히 (클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경험도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타락했다? 단순히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복음 자체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거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타락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된 사람은 겉으로 신자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진정으로 중생한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뜻입니다. 이렇게 되고 결국 견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붙들어 주시고 또 이렇게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붙들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성도임을 보여줍니다.
여기까지 오늘 공부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아마 김성구 목사님과 공부를 하게 되실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