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 오희열
오늘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은 가정에 대해 말하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과 아내는 가정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입니다. 이 편지가 쓰였던 로마시대에 그때의 로마는 가정이 이 제국을 영위해 나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은 철저하게 로마를 위해서 기꺼이 충성할 수 있는 그런 충성스런 시민들을 생산해내는 한 나라의 세포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사회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사회였고 여자들의 활동영역은 가정에 국한 되어 있었습니다. 경제권도 여자에게 없었고 남자에게 있었습니다. 그 가정 안에서 인내와 복종을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근검절약하며 살림살이를 해 나가는 것이 여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습니다. 여자가 바깥에서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고 가정 바깥에서 뭔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남편을 경멸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자,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는 오늘 이 편지를 받고 있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가 “아가페테”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명령형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리스시대부터 사람들은 사랑을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에로스의 사랑,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필리아의 사랑,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운명적인 핏줄의 사랑인 스톨게, 그리고 인간을 향한 신의 맹목적인 사랑인 아가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아가페”라는 사랑으로써, 다시 말해서 “신이 인간을 사랑하되 인간으로부터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것처럼 그런 사랑으로 너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표현처럼 보이지만 당시 로마 사회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명령을 들었을 때 약간은 혼란스럽거나 생소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사회의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식으로든지 아내는 이런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오늘 사도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남편에게 명령합니다. 남녀의 결혼은 에로스의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너무 불쌍하다는 이유 때문에 결혼이 성립할 수는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결합되도록 만드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사적인 사랑이 아니라 대등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사랑함으로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시작은 에로스의 사랑으로 시작을 합니다만 그 사랑은 끝까지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인체의 물리적인 현상과 인간의 감정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수반 물리학”이라는 학문에서는 사랑의 원인을 도파민으로 보고 그 도파민의 유효기간을 18개월 정도로 봅니다. 이상한 것은 도파민이 너무 많이 나오게 되면 정신 분열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되는 사랑”입니다. 저절로 됩니다. 특별히 사랑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결혼하고 난 후에는 될 때도 있지만 해야 할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의 사랑은 둘이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바닷가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결혼한 후의 사랑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가며 그 파도를 뒤집어쓰고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결혼 생활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결혼한 지 10년, 15년이 지났는데도 저 멀리서 오는 자기 남편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는 자매를 만난 적이 있지만, 그런 남편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이런 에로스적인 사랑의 기대를 가지고 꿈꾸며 살아가는 여성들, 그리고 남성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미성숙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은 그러한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서로 시작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에로스의 사랑이 신앙 안에서 한 인간성 안에서 성숙되어 가며 관계를 맺는, 보다 차원 높은 사랑으로 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도 아내를 자기가 지배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을 만나게 됩니다. 혹은 세월이 많이 흐르고 시간이 바뀌면 여성들이 남편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로부터,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은 무엇인가 위로부터 감지덕지하면서 하사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인격적이고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인격 전체를 건 상호적인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무엇입니까? 서술적으로 사랑은 무엇이다, 무엇이다 말할 수 있지만 사랑의 본질은 이런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대상에 마음이 정착해서 그와 계속 관계를 맺고 그에게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 자체가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그런 데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 번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사랑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은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은 심각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못 합니다. 그중의 많은 여성은 단 한 번도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남성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습니다. 여성들의 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한 인간으로서 사회적인 퀄리티가 남자가 여자보다 떨어집니다. 신앙이 좋으면 돈이 없고 돈도 있고 신앙도 있으면 인물이 빠진다거나 아니면 셋 다 있으면 학벌이 별로라든지 말입니다. 항상 그런 불균형을 이룹니다. 그래서 자매들이 항상 하소연을 합니다. 자신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나서 가장 큰 손해가 결혼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그림같이 예쁜 자매들은 다 갑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프로포즈를 받고 그 중의 하나에게 갑의 입장에서 선택을 해서 갑니다.
어떤 형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결혼하고 오래 살았습니다. 더구나 그 형제는 목회를 한다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제가 “얼굴을 보지 말고 신앙과 인간성을 보고 결혼을 해라. 그게 너의 인생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했더니, “목사님, 평범한 자매를 만나서 평안한 길을 가기 보다는 그림 같은 자매를 만나서 연단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인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외모에 대해서 저렇게 비관적이니까 사모님은 어떤 분이실까?’ 그림 같습니다. 과거에 말입니다.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사라집니다. 사람의 사랑의 원인은 사랑해야하는 사랑의 대상이 아주 탁월하게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입니다. 그게 육체적인 외모일 수도 있고 정신의 아름다움일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두 번째 원인은 사랑하는 주체 안에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받는 대상의 퀄리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사랑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성품이 운명이 되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전형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십니까? 그리고 마치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면 커다란 벌을 내리실 것처럼 그렇게 경고 하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랑이 필요 없는데도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당신을 사랑함으로써만 인간의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고 또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월이 흘러 갈수록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처음에 시작은 그렇게 예뻐서, 남자들은 여자들을 볼 때 예쁜 사람이면 선택을 합니다. 여자는 무엇으로 남자를 선택하는지 아십니까? 결혼 하셨습니까? 아직 안하셨습니까? 그러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여자들의 외모를 보면서 확 빠지지만 여자들은 능력을 보면서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로를 사랑하는 이유가 상대방에게 있는 것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옮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으로 성숙되어가는 인간이고 더구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져서 병원에 누웠습니다. 한참 있다가 깨어났습니다. 옆에서 근심하던 아내가 남편의 손을 잡으며 물었습니다. “여보, 좀 어때?”,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난 생전에 정말 나쁜 짓을 많이 했나봐.”, “왜?”, “죽었는데도 내 옆에 당신이 있잖아.” 부부로 살아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격적인 관계의 끈이 이미 끊어져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이 웃는다면 상당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들어보십시오. 세 부부가 골프를 치러 갔습니다. 한 부부가 아주 못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공을 쳤는데 저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편이 투덜대며 공을 주우러 들어갔는데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요정이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오래전부터 지켜봤는데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세 가지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무엇을 주든지 주는 것의 두 배를 당신의 아내가 받을 것입니다.”, 이 남자가 말했습니다. “첫째, 골프를 좀 잘 치게 해주십시오. 이 세 부부가 맨날 내기골프를 치는데 우리 부부는 할 때마다 꼴찌입니다. 저보다 아내가 두 배 더 잘 쳐도 점수를 합산하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럼 두 번째 소원은 무엇입니까?”, “나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십시오.”, “그럼 당신의 아내는 이백만 장자가 됩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부부니까 합해서 삼백만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남자가 요정의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약한 심근경색을 주십시오.”
역시 조금 뒤지시는 것 같습니다. 한 시대에 이런 유머들이 사람들에게 아주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배경에 깔려 있는 깊이 공감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세월이 아무리 많이 변해서 이 세상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성경이 우리에게 변함없이 요구하고 있는 바는 “네 아내를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아내가 이런 성경구절을 보면서 의기양양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에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이야기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란히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남편에게 희생하는 사랑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여자를 만나 그를 끝까지 진실로 사랑해서 완전한 결혼의 합의를 이루는 것이 한 남자가 자기의 인간성을 완성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조엘 비키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이런 조크를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무엇이든지 하나의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선교사의 집이 남미였습니다. 남미에서 아프리카까지 오려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가로질러서 남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까지 고속도로를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야단을 쳤습니다. “넌 개념이 있니 없니? 그 깊은 바다에 말뚝을 받고 거기에 도로를 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콘크리트가 있어야 할 지 생각을 해봐라. 다른 소원을 얘기해봐라.”,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몇 차선 도로를 놓아줄까?”했답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 그냥 사십시오. 이해를 어떻게 모두 하겠습니까? 아내도 아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남편은 제3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방금, 어제 한국인으로서 중국에 선교사로 왔다가 중국에 선교사로 온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셋 낳은 한국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둘이 어떤 말로 대화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둘이 중국말로 대화를 한답니다. 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고 한 사람은 영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나는 연애를 해보니까 너무 사랑할 때 그 감정을 내가 한국말을 꽤 잘하는 편에 속하는데도 다 표현을 못하겠던데, 당신은 자기 안에 느끼는 그런 다양한 사랑의 감정을 아내에게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느냐?”,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그것을 전달합니까?”, “못합니다.”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분의 하는 얘기가, “신뢰”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사랑하면 그가 나를 모두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난센스입니다.
한 인간으로, 하나님에게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아내나 남편에게 기대하는 것이 모든 가정생활의 불화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내 주위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도 지냅니다. 우리 부부가 마지막으로 가볍게 말다툼 한 것이 22년 전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한 인간으로서의 외로움은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아내로부터 소외되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아내가 나를 아무리 사랑하고 내 자식들이, 부모가, 나의 교인들이 아무리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내 친구들이 나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내 원하는 대로 가져도 한 인간으로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실존적인 고독,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어야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랑을 함으로써 이런 모든 것까지 다 사라지고 어떤 환희에 도달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중고등학교 사춘기 때 읽는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정도 인생을 살았으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접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나쁩니까? 그래서 청교도들은 거룩한 고독을 아주 높게 평가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경건한 의지, 그리고 그분 밖에 내 인생의 최종적인 보호자가 없다고 하는 신뢰와 높은 의존의 감정, 이런 것들은 거룩한 외로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환희 속에 빠지게 될 것같은 그런 종류의 사랑의 기대를 처음 연애 할 때는 가졌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이 성숙해지면서 그런 사랑에 관한 관점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날 때, 그때 결혼생활에서 오는 많은 시련과 풍파들을 극복하면서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완성의 길입니다.
한 남자가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결혼을 해서 살아보니까 많은 결점들이 발견됩니다. 그때, ‘야, 저렇게 형편없는 인간이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너무 불행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 과정이 자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완성된 인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도 불완전한 인간이고, 그를 사랑하는 나도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서 서로를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함이 발견될 때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 여자가 가지고 있는 저 결함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저 여자와 함께 살게 하셔서 저 망가진 것들을 보충하게 하시려고 나를 저 여자의 남편으로, 혹은 저 남자가 저렇게 망가진 부분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을 텐데, 나 같은 여자를 만나게 하셔서 그런 망가진 부분을 고쳐서 보완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부로 만드셨구나!’ 생각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서로에게 결함이 있고 잘못이 있는 자체가 나에게는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와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단점을 가진 아내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제법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텐데 그런 아내와 마주하면서 나의 인내의 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극단적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인지를 현실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자기의 불완전한 점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도움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는 관심사가 바깥으로 뻗어 있습니다. 이런 꿈도 있고 저런 것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깊이 빠집니다. 결혼을 하면 그 관심사는 더욱 그 한 남자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자는 반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한 여자에게 집중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면 안정감을 가지고 바깥으로 관심사가 쫙 뻗어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남녀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렇게 아내와 결합하고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안정감을 가지고 정복하고 개척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뻗어 나가지만 아내는 반대입니다. 서로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주어진 단점과 결점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개선하고 고치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야하는데, 그런 것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 신앙과 성찰입니다. 그래서 항상 결혼생활을 통해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저 인간이 저런 인간이었구나!’ 생각하면 안 되고, ‘그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신앙 안에서 그런 시련들을 녹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한 수준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살면서 서로에게 찌르는 듯한 고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런 고통을 받으면서 이 여자와의 결혼생활을 계속 지속할 때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어느 날 결혼생활의 날개를 접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는 삶의 난관들을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을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찾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믿음으로 산다는 이유입니다.
한 60년 전의 일이었는데,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항상 가정에 대한 시리즈를 설교합니다. 그때에도 설교를 하다가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라는 제목의 설교까지 갔습니다. 저희 교회에 자매 하나가 있는데 자기가 불신자로 하도 곤고하게 사니까 친구하나가 점심이나 먹자고 불러 주일에 데려와서 점심을 함께 먹고 예배나 드리고 가자고 해서 들어왔습니다. 이 여자는 이혼 서류를 써놓고 남편과 갈등을 가지고 있는 자매였습니다. 한 여자가 남편과 살면서 아이까지 낳고 긴 세월을 살다가 이혼하기를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남편의 도장만 받으면 되는데 도장을 안 찍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자매가 교회에 왔는데 그날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거기서 활짝 펼쳐서 보여주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혼을 결행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자매가 거기서 주님을 처음 만나고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집에 갔습니다. 남편을 불렀습니다. 이혼서류를 써 놓았으니 남편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습니까? 물론 남편도 잘못을 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왔습니다. 자매가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갑자기 울먹이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남편도 같이 앉았습니다. 아내가,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혔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하며 펑펑 울었습니다. 물론 그 남편은 불신자였습니다. 남편이, “네가 나를 괴롭힌 것을 이제 알았니?”했겠습니까?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하고 그렇게 부부가 화해를 했습니다. 위기를 넘겼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실제적인 불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많은 문제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땅의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것으로 못 할 경우에는 대책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신앙을 이야기하고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고 많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도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날 때 그때 신앙은 하나님을 찾으라고 요구를 하는데, 그때 비로소 자기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자원입니다.
어떤 결함을 아내에게서 발견할 때마다, ‘지금 내가 발견한 저 여자의 결점은 저 여자가 평생 지고 살아온 결점이다.’라고 생각을 바꿔보는 것입니다. 저런 결점을 안고 나를 만나기 전에 일생을 살았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것이 자기의 결점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그것의 무게를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만나기 오래전부터 저렇게 망가진 부분을 끌어안고 인생을 그렇게 힘들고 외롭게 살아왔는데, 그 때문에 얼마나 불행했을까? 그리고 하나님이 저렇게 영원히 아무도 돌보지 않을 저 여자의 망가진 부분을 내가 발견하고 끌어안고 그것을 깨닫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더 나은 어떤 선을 이루도록 나를 저 여자의 남편으로 보내셨구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결혼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이 가슴속으로 확 밀려듭니다. 그것은 내가 저 여자가 가지고 있는 결점 때문에 당한 상처에서 고민이 시작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저 여자가 여태껏 저런 단점을 가지고 살아온 인생의 무게, 앞으로도 계속 짊어지고 살아가게 될 인생의 고통이 전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좋은 외모, 똑똑한 지성, 그리고 그럴싸한 가문, 혹은 예쁜 용모, 재능, 이런 것들은 사랑해 줄 사람은 있지만 그런 결함을 끌어안고 사랑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그렇게 사랑해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런 것을 사랑하고 극복하도록 품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확 밀려옵니다.
두 주를 설교하라고 했으면 공평하게 남편, 아내에 대해서 한 번씩 할 텐데,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똑같이 아내도 남편에게 적용하라고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그것을 자기의 고통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한 몸”이라는 증거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회심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회심이라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 이외에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이 없다는 믿음을 가리켜서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회심을 경험 할 때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신앙의 문을 두드릴 때에는 어떤 면에서 에로스의 사랑으로 문을 두드립니다.
제 나이 14년 2개월 되던 때였습니다.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 않으셨지만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이었습니다. 열다섯 살 소년이었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러져서 한없이 통곡했습니다. 가난해서? 물론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에 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무엇인가?”, “신은 정말 있는가?”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는 나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사랑받았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펑펑 울고 열네 살 2개월 된 아이가 눈물을 씻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결심했습니다. “평생 무신론자로 살아가리라.” 정확하게 말하면 “반신론자로 살아가리라.” 신이 있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그렇게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들을 안고 예수 앞에 나아갔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만약에 불신자인 나에게, 결국은 내가 회심하고 주님께로 돌아갔는데, “무신론자로 사는 것보다 예수를 믿는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렸더라면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정말 처음에는 내가 살아온 불쌍한 인생 때문에 눈물이 났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그분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눈물이 나왔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2천 년 전에 끝난 사건인데 말입니다. 그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내 마음을 후벼 파고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니까 내가 가진 인생의 문제나 고난 같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아내나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게 하면 그가 나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성격적 결함이나 잘못, 그것을 운명처럼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의 삶의 무게와 고통이 내게 느껴지고 그것이 가엾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의 특성입니다. 말은 이렇게 쉽지만,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솔직히 결혼한 남자에게는 한 여자와 나머지는 사람이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여자가 많았습니다. 왜? 아무나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여자 한 사람과 사람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나를 외롭게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줍니다. 살고 싶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이론을 다 가르쳐 주어도 실제로 오늘 저녁에라도 아내가 여러분을 열 받게 하면 이런 이론이 필요가 없어집니다. ‘세상에 하필 그 많은 여자 중에서 저 여자가 왜 나한테 달라붙어서 이 긴 세월동안 이렇게 고통을 받게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계속 해 봐야 돌이킬 수 없습니다.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생활 37년째입니다. 그동안 제가 스스로 터득한 지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주 현실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와 아침에 싸웠습니다. 사소한 일로 시작이 되어서 티격 거리며 싸우고 “당신, 요새 변했어!”, 아니면 “당신 원래 나 무시했던 것 알아?” 하며 상당히 크게 싸우고 문을 쾅 닫고 남편은 출근했습니다. 아내가 조용히 생각을 해봅니다. 아침에 자기가 너무 바가지를 긁었습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서, “여보, 점심을 먹었어?” 문자를 써봅니다. 너무 낯간지럽고,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다시 지웠습니다. “오늘 일찍 들어와?” 물어보려고 적었다고 또 지웁니다. 남편도 직장에서 생각해보는데 자기가 좀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기분이 나빠서 화해를 해야 하는데 못합니다. “여보, 내가 미안해.” 하고 문자를 하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지워버립니다. 이때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아내가 자기에게 못 되게 굴었을 때 복수를 해야 합니다. 복수의 방식이 문제입니다. 일찍 퇴근하고 거리를 홀로 조용히 걷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그것을 삭힙니다. 그리고 선물가게를 찾습니다. 피천득 씨가 “인생”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물은 사치스러워도 용서된다.” 아내에게 선물을 하는데 고무장갑을 사줘 보십시오. 하이타이 사줘 보십시오. 아이들에게 제일 짜증나는 선물이 학용품인 것 아시지 않습니까? 주고도 점수가 깎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고르느냐, 아내가 절대 자기 돈으로는 사지 않을 것, 그러나 가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을 것을 사는 것입니다. 삽니다. 사면서도 마음이 부글거립니다. ‘가서 퍼부어도 시원치 않을 인간에게 내가 이것을 사야하나?’ 이런 마음을 신용카드를 긁으면서 계속 누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긁으면 한 달 동안 용돈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일 비싼 포장지에 포장을 하면서 스스로 자기 수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다발도 화려하게 하나 사서 들어갑니다. “딩동” 아내는 이미 다 풀어졌습니다. 그리고는 달려 나옵니다. 오면서 제일 먼저 무릎을 꿇고 “여보, 내가 아침에 미안했어.”하면 안아 줄 텐데, 딴 얘기를 합니다. “어? 일찍 들어왔네?”, “당연하지 일찍 들어왔지 보면 몰라?” 그리고 둘이 동시에 “여보!” 합니다. 아내는 아침에 자기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남편이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아침에 내가 너무 속이 좁았어. 미안해. 이게 내 사과의 표시야.”하며 선물을 탁 꺼내 줍니다. 아내는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지고 면목이 없어질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번 극한 상황에서 자기를 다스리고 자기의 인생을 이제까지 인도하신, 실수가 없이 이 여자가 나에게 꼭 필요해서 만나게 해 주시고 일생을 함께 하며 살게 하신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러면서 그렇게 극복할 때, 아내의 사랑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주님이 이렇게 못된 인간을,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나를 위해 주셨던 것처럼 내가 그 사랑을 입으면서 사는 것이구나! 이것을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매일매일 매 순간 매 주마다 날마다 그런 사랑으로 주님이 나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고 인생의 수많은 고통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인간을 건져내셔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잠자는 아내를 지켜봅니다. 정말 일생을 그렇게 자기와 함께 살면서 그 꽃다웠던 젊음이 다 지나가고 할머니가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어서는 목에 핏줄을 세우고 논리를 내세우면서 상대방을 꺾어보려고 합니다. 그게 힘들면 아예 완력으로 꺾든지 합니다. 그런 폭력은 정말 유치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이런 모든 결정들을 용납하고 그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나를 무제한으로 용납하고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몇 인간에게나 그것을 베풀면서 살았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로서의 한 남자의 성공은 역사가 평가해 줄 것입니다. 작가로서 한 남자의 역량은 독자가 평가해줄지 모릅니다. 한 목회자로서의 성공은 교인들이 평가해줄지 모릅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성공은 가족이 평가해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내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가끔 부부가 갈등하면서 요동치는 마음이 물결처럼 일어날 때, 조용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마음을 쓰다듬습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철없던 시절에 나를 만나서 사랑하고 가정을 이루고 가족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그렇게 일생을 살아온 아내,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남편의 과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그에게 남은 마지막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여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그 여자를 외롭게 했다면 내가 한 인간으로서 정말 성공한 사람일 수 있을까? 내가 한 여자로서 그 남자를 만나서 일생을 함께 살아가는데 그 남자가 당신과의 결혼을 후회하고 다시 태어나서 결혼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면 그의 인생은 과연 성공한 인생일까?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일로 아내를 집요하게 괴롭혔을까?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왜 그것으로서 남편의 마음에 쉽게 잊혀 질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사람 속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람 속에서 자신을 완성해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한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한 인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깊이 사랑해야합니다. 그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를 알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일이 어려울 때마다 모자라는 한 인간이 부족한 한 사람을 만나서 지금 내가 아내의 잘못을 용납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아내는 나 같은 사람의 결함을 견디고 참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힘겨운 인생을 살았을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십자가 사랑에서 공급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근거가 그녀의 육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라면 지금쯤 그런 사랑이 식었어야 합니다.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능력 때문이었다면 지금쯤 그 사랑이 흐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의 근거는 십자가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사랑하는 이 인생을 덤으로 주셨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앞에서 그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순간에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버리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떠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혹은, 유명하게 무명하게, 혹은 부요하게 가난하게, 혹은 장수하거나 일찍 죽을 수 있지만 어느 경우든지 “다른 많은 일에는 실패가 있었지만 이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주님의 도움 때문에 궁극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사는 예의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불완전한 인간으로 여기고 서로를 깊이 용납하고 사랑하는,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는 부부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