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016년, 2017년 구역장공과교육)
설교기간|2016년 12월 4일-2017년 1월 2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2017년 12월 08일
목 차
1.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2016.12.04 구역장공과교육
2. 주는 나의 하나님 2016.12.04 구역장공과교육
3.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심은 2016.12.18 구역장공과교육
4.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2016.12.18 구역장공과교육
5.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심 2017.01.01 구역장공과교육
6. 그리스도의 지체로 자라감 2017.01.15 구역장공과교육
7.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2017.01.22 구역장공과교육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016.12.04 구역장 교육)
1.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녹취자 : 오희열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보겠습니다. 제목을 교정을 봤습니다. “목적이 되신”이 아니라 “목적이신 하나님”입니다. “목적”과 “목표”는 다릅니다. “목표”는 “goal”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하고 그것을 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려면 하나의 목적, 목적은 더 높은 뜻입니다. 그래서 “end”라고 합니다. “내 인생에 목표가 있다. 정말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다.” 하고, “내 인생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표”입니다. 목표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취업준비를 잘 해야 할 것입니다. 회사에 들어간 다음에는 남보다 승진해야 할 것입니다. 말단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할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또 생깁니다. 이것이 똑바로 되려면 모든 목표들이 마지막 목표를 이루는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적을 가지고 이 목적의 빛으로 목표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펼쳐야 올바른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이것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해야 하지만 내 신앙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 또 기도를 열심히 해서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지도 볼 수 있어야 하니까 끊임없이 목적의 빛으로 목표를 바라보고 목표가 목적을 이루는 데 일직선상에 있도록 올바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을 전쟁에서 “전투”와 “전쟁”이라고 합니다. 한 번 전투에서 승리해도 전쟁에서 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투에서 계속 지면 전쟁에서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전투에서 다 졌는데 전쟁에서 이기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투를 할 때는 무조건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이기기 위해 꼭 필요한 전투만 하는 것입니다. A나라와 B나라가 싸우는데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지 파악해서 필요할 때 전투를 하는 것이지 C나라에 가서 전투를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필요하다면 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먼저 설정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은 없이 목표만 계속 세우니까 인생을 계속 혹사하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공허하게 되고 혹은 의미없게 되는 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간이 바쁘시겠지만 신앙서적은 아니어도 카프카의 “변신”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은 신앙적으로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아주 착실하게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가 벌레로 변하고 나니까 그 목표가 참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족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정하는 인생의 목표가 얼마나 부질없을 수 있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모르니까 목표를 많이 세워둡니다. 그 목표가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기반들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부터는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항상 공과가 먼저 나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어떤 구역에는 오늘 공부하고 오늘 따라오게 되겠지만 못 따라오는 구역에는 한 주 먼저 공과가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배우지 않고 앞서갔기 때문에, 혹은 우리 공과가 늦었기 때문에 배우지도 않고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 와서 배우게 되는 일을 없애기 위해서 여기서 나가는 진도가 약간 앞서가게 만든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가는데 많은 사람이 뒤쳐진다고 해서 우리 공과가 뒤로 가지는 않게 말입니다. 그러면 행사가 있는 날에는 그것을 회복해야 하니까 오늘은 두 과를 한꺼번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일에 우리가 광과를 못 해도 두 과를 소화해서 하고 성탄절 전에도 우리가 두 과를 공부해서 따라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내용이 “신나”에 비해서 그렇게 광범위하거나 어렵지 않고 “신나”에서 배운 것들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1과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물론 읽어 오셨을 것입니다. 책을 못 받으셨습니까? 오늘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오늘 읽었어야 합니다. 얼마 안 됩니다. 오늘 저는 침대에 잠깐 누워서 30분 만에 1, 2과를 다 읽었습니다. 읽으시면 됩니다.
1번, 1분단 읽겠습니다.
문제 1) 본문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을 제기합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저자는 하나님을 어떤 존재라고 말합니까?
먼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크게 두 개라고 했습니다.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누구이신가?” 영어로 하자면 첫 번째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는 “whatness”, “하나님은 무엇이냐?”입니다. 이것은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 다음은 “whoness”, “하나님은 누구신가?” 이것은 성품, 특히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성품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보를 준다고 해도 우리 지성으로 거의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 본질에 대해서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영이시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그런데 그 영은 우리 인간들의 영이나 천사들의 영과는 다른 영이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6장)” 이 두 가지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귀중한 두 가지 교훈입니다. 그 이외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가져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정리해야 할 생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 자연, 모든 만물과는 다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유(類)”가 있는데, “유” 아래 “종(種)”이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뭔가를 보고 “이것은 무생물이 아니고 생물이다. 그런데 이것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다. 식물인데 이것은 풀에 속한 것이 아니라 꽃에 속한다. 꽃 중에서도 이 꽃은 무슨 꽃이다.”하며 범위를 좁혀가면서 우리가 보기에 그와 비슷한 것, 혹은 다른 것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게 무엇인지를 배워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과 비슷하게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종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을 묘사할 때는 부정어법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시다.”이런 식으로 덜어내면서 오해할 수 있는 것을 다 떠내고 그럴수록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좁아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으로부터 우리가 보호받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과 하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계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의 세계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향해 전적인 타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한 동아리가 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려운 말로 “초월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신다.”
그 다음에, 2분단이 문제 1의 두 번째를 읽겠습니다.
문제 1) (2)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지닌 분인지를 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과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모든 세계와 관계없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자연세계의 조화, 질서, 그 모든 규칙, 그 속에서 오는 조화로운 어울림, 이 모든 것들은 그 세계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한 모든 세계를 초월하는 다르신 분인 동시에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이 모든 세계를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하나님 당신 안에 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어떤 규칙과 이치들을 배워가는 것인데, 그것을 더 많이 터득한 사람들을 학자, 혹은 전문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런 법칙과 원리들이 이미 있는데 그 있는 것들을 인간이 지성이 떠지면서 발견해내고 점점 더 놀라운 문명의 발전과 학문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원리, 원칙,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법칙을 부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세우신 법칙을 따라서 만물을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원리들이 그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원리들을 인간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되고 하나님과 관계를 필연적으로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내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면 안 되고 “하나님 안에 만물이 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고 묘사해야 정확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물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묘사하는 게 아니라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날 수 없다.” 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자를 잘못 설명하면, 우리가 옛날에 학교 다닐 때 했던 “물활론”같은 것이 됩니다. 물활론(物活論), 애니미즘(animism) 입니다.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의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왜?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을 보면서 그 자연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다루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무지개빛처럼 다양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비참에 빠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불의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가난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무력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찬란한 도덕적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어떻게 드러내겠습니까? 그렇게 눈먼 사람을 고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시력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연약하고 부족한 것들이 낙심의 이유가 된 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신앙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더 바라고 기대할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3분단, 2번 읽겠습니다.
문제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각각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또한 인간이 거루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갖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은 이미 “신나”에서 다룬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적 격차”라고 합니다. 이런 존재적 격차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발견하게 되고 그 위엄 앞에 인간은 엎드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은 내재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통해서 “도덕적 격차”를 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심입니다. 나도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까 내 사랑은 얼마나 불완전한 사랑이었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마치 한 대에 몇 억씩 하는 기타를 가지고 세계 최고의 연주가가 기타를 치는 것과 아이들 장난감으로 사주는 낚싯줄로 엮은 기타를 치는 것과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엮어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우리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1분단, 3번을 읽겠습니다.
문제 3) 본문이 무한한 크기와 에너지를 갖고 있는 우주와 영원한 시간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범위 내에서는 우리가 노력하면 그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아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해서 그 키가 수천 미터가 되는 하나님을 우리가 상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그랜드 케년 같은 곳을 보면 엄청난 계곡인데 물이 지나간 흔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어마아마한 물이 지나갔을 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해변이 침식되어서 깎아지른 절벽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게 됩니다. 심지어 끊임없이 바람이 부딪치면서 모래 사이에 구멍을 내고 굴을 만듭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자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배우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혹은 신학공부에 있어서 소위 “난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누구도 쉽게 풀지 못하고 설명하는 데에 난해한 주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예정이라든, 이런 문제들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의지의 자유 문제라든지, 선과 악의 기원의 문제라든지, 시간과 영원의 문제라든 이런 것들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려운 주제가 되는 이유는 모두 시간과 공간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간과 공간에 매여서 살기 때문에 공간을 넘어서는 사유, 시간을 초월하는 사유를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과학에 의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엄청난 과학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학에 의해 세뇌되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이유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완벽한 인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재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려움이 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간과 공간을 사유하게 되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나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되느냐, 150억 광년 이하로 보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940억 광년까지 봅니다. 그것을 우주의 크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측정 가능한 거리에 대한 논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지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은 얼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아, 그것이 우주의 크기구나 하는데 그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150억 광년을 측정할 수 있고 보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940억 광년까지로 보는 것입니다. 모두 측정 가능한 범위의 우주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양쪽 다 그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바깥까지 우주는 연장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런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한 일을 행하셨으니까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에 가서 “뜨악!”했던 것이, 자금성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경복궁 같은 곳은 들락날락했는데 자금성에 들어갔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것들을 보며) ‘이건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같이 나열된 것들이 이제 끝인 줄 알았더니 그 옆에 또 이어지고 옆에 또 이어지고 해서 아홉 개 정도가 쭉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할일 없이 자금성 옆에 계단에 앉아서 계산기를 꺼내어 이 건축비가 얼마가 들었을지 계산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런 것을 짓는다면 말입니다.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아는 건축 상식으로 계산해 보니까 300조 원 정도 나왔습니다. 그게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습니다. 재미로 한 번 해 본 것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건물을 보면서 우리가 “이걸 지은 사람들은 얼마나 키가 큰 사람들이었을까? 얼마나 꺽다리였을까? 엄청나게 큰 사람들이 여기서 잤나보다.”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능력의 크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을 수 없어서 못 지은 것이 아니라 돈도 없지만 중국이 크게 짓지 못하도록 하니까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조그맣게 지은 것입니다.
결국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리고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40의 불혹의 나이를 지나서 50의 지천명을 지나고 60의 이순을 지납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돌아봅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40대 때 그것 가지고 왜 그렇게 싸웠지?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무슨 상관인데 목숨을 걸고 왜 그랬을까?’ 합니다. 인생을 보는 시야가 너무 좁으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닌데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인생을 좀 더 멀리 보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친구 목사들이 매월 만난 지가 한 23년 되었습니다. 열린교회 개척했을 때 바로 만나기 시작했으니까 말입니다. 매주 만나다가 요새는 너무 바쁘니까 한 달에 한 번 만납니다. 처음에는 만나면 만날 때마다 싸웁니다. 어떤 때는 밤새도록 싸웁니다. 그때 녹음해 놓았으면 좋았겠다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제자 훈련이 좋으냐 나쁘냐, 한국교회가 어떠냐, 설교가 중요하냐 덜 중요하냐 하면서 맨날 싸웠습니다. 요즘은 아무도 안 싸웁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그렇게 목숨 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 대한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큰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은총적으로 높은 산에 오르거나 광활한 천지를 바라보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북극이나 남극, 아프리카나 대륙, 혹은 태평양을 횡단하지는 못 할지라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안 되면 설악산이라도 올라가서 내려다보며 ‘아, 인간이 정말 하찮구나!’ 하는 생각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정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끊어버리고 오늘 하루에 골몰하면서 살 때는 인간이 더럽게 찌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4번, 2분단이 읽겠습니다.
문제 4)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며,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모든 사물이나 사실들, 진리들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이 지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있고 천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우긴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것도 존재하는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나의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주관주의적인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차를 몰고 막 달렸는데 자기가 못 봤다고 해도 거기에 기둥이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부딪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생각할 때 너무 주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몰라도 거기에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청각으로 보면 극초단파부터 시작해서 장파까지 많은 음역대가 있습니다. 초음파 발생기를 놓으면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못 듣습니다. 그런데 벌레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찻길 옆에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것처럼 벌레가 도망을 간다고 합니다. 소리의 영역이 180도가 되어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영역은 아주 좁은 영역밖에 듣지 못합니다. 너무 파장이 길어도 안 들리고 너무 짧아도 안 들립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감촉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감촉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에 한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뜨겁고 차갑고 무르고 딱딱한 몇 가지만 감촉할 수 있지 그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맛볼 수 있는 맛은 실제로 존재하는 맛 가운데 그거 대여섯 가지 밖에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없다고 느껴지지만 사실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는 광선 가운데 가시광선의 폭은 빛의 파장이 일정한 부분만 우리가 겨우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외선 카메라 같은 것을 보십시오. 고속도로에서 밤중에 너무 졸려서 차를 잠간 세웠는데 “아저씨, 이거 사세요!”하면서 보여주는데 깜깜한 곳을 보는데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러시아제 망원경이라고 합니다. 그걸 사서 뭘하고 뭘 보겠습니까? 80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이기는 진짜 잘 보였습니다. 저기 깜깜한 곳의 트럭 바퀴에 숨어있는 고양이까지 또렷하게 대낮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사용해서 보니까 보입니다.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영역, 논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을 가지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은 성경을 믿는 마음을 통해서 이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생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날 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믿음과 거듭나고 회심하는 일은 떼어낼 수 없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런 중생한 사람의 영역이 이런 천상적인 영역을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지성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 진리의 빛 아래에서 사물들을 평가하면서 올바르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을 통해서 이성으로 증명되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에게 목적이 설정되고 이 목적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목적이시다, 그리고 이 목적 아래에서 모든 목표가 배열이 될 때 어긋나는 것들을 배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열네 살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 세 개의 질문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내가 누군지가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가 설명이 되면 나는 인생사용설명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예배드릴 때 종 치는 것이라고 규정이 되고 나면 ‘아, 이것을 예배당에 갖다 놓아야지, 화장실에 갖다 놓을 것이 아니구나.’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좋은 신자가 되어야겠다는 고민과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고민이 따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이것에 답을 못 찾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찾아가는 사람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실은 하나로 되어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이야 말로 참된 진리인 것입니다. true theology, true philosophy, 참된 철학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명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전자제품 하나만 사도 설명서를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귀찮아서 읽지를 않습니다. 설명서도 아주 두껍습니다. 그리고 자꾸 망가뜨립니다.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A/S 기사가 오면 “이 버튼을 누르셔야지요.” 하고 갑니다. 그때 되게 미안합니다. “작동을 잘못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설명서를 읽으세요.”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설명서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온 몸으로 10대, 20대, 30대, 피투성이가 되면서 아주 조잡한 사실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한 사실들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손해입니다. 가전제품이야 망가지면 바꾸면 되지만 내 인생은 망가지면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전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놀라시지도 않으십니다.
다음, 3분단이 5번을 또박또박 읽어보십시오.
무제 5)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우리와 상관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우리와 상관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체스터턴이라는 사람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전집을 저도 가지고 있는데 엄청나게 많이 썼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C. S 루이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정신적인 스승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시작해서 모르는 것이 없이 넘나들면서 기독교를 변증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엄청난 거구였는데 여기에는 날씬하게 사진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촌철살인”의 명언들을 남깁니다. 모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마치 난파선에서 쏟아진 보물과 같다.” 지금 보물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십니까? 모르실 것입니다. 저 남해로 가면 중죽도라는 섬이 나옵니다. 거기 여러 사람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변호사님 아십니까? 그런 일에 변호사님이 개입을 하셔야 돈을 버시는데… 일본군이 아시아에서 약탈한 보물을 중죽도에 숨겨두고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보물의 가치가 2경 원쯤 된다고 합니다. 2만 조. 사람이름이 아니라 2만 조 입니다. 우리나라가 50년 동안 세금을 한 푼도 안 걷고 나라를 꾸려갈 수 있는 보물이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목사 여럿이 거기에 올인을 했습니다. 나도 좀 끼워달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검색해 보십시오. 엄청납니다. 여러 사람이 그것을 찾다가 패가망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은 잘못 뚫었다, 다른 곳을 뚫었다, 우리는 올바른 곳을 뚫을 것이다,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거기 가서 거들면 조금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탐사비용을 댄다거나 말이라도 격려를 하면 1%만 주어도 굉장한 것입니다. 그게 보물입니다. 저는 그것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유럽 어디에서 사실로 발견되었습니다. 왕당하다고 했는데 파보니까 진짜 기관차 속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되면 법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그게 완전히 본인 소유는 아니고 국가와 6:4 정도로 나눈다고 합니다. 국민을 위해서라도 발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자 될 사람은 부자 되고 40%면 8000조쯤 되니까 굉장할 것입니다.
난파선에 보물을 잔뜩 싣고 가다가 배가 난파가 되어 박살이 나고 보물들이 확 흩어져버렸습니다. 난파선도 저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잠수부들이 가다보니까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그러니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도굴을 한다고 하면 물건을 하나씩 팔면 안 되고 그것이 어디서 도굴이 되었다고 세트가 딱 되어서 그 자리를 보여주면서 유물과 유물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확인해서 팝니다. 마치 산삼을 땅에 심어두고 팔듯이 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떨어져 나가서 설명을 할 수 없을 때는 그 가치가 뚝 떨어집니다. 어떤 스토리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을,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만물들이 그냥 난파선에 확 쏟아진 것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새와 돌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와 네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실존주의자들이 잘하는 질문입니다. 나와 우리 부모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러면서 서로의 상관관계를 묻습니다. 찾아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억지로 부여합니다. 어떤 사람은 동의하고 어떤 사람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물들이 막 흩어져 있어서 여기에서는 이것이 발견되고 저기에서는 저것이 발견되는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과학이 발달하고 그것들을 보니까 흩어진 보물들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 밑에서 오랜 세월동안 모래가 쌓이면서 땅 깊이 묻혀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발견하게 됩니다. 흙을 걷어내고 그 배를 탐사해보니까 18세기의 배라는 것을 알게 되고 어떤 나라에서 어디로 가던 선박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거기 물건들이 왕궁으로 납품되었다는 것도 발견됩니다. 그러면서 그 나라가 어떤 나라고 어떤 무역관계를 가졌는지 알게 되면서 어디서 무엇이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고 서로 연결이 되면서 왜 그 한 배에 실렸고 거기 흩어진 해안의 보물과 바다 속에서 나온 보물들이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검토하고 잘못 생각한 부분들을 고치고 증거자료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사실과 사물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난파선처럼 확 쏟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모든 보물들을 쏟아내 놓은 그 원천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때 설명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난파선을 통해서 모든 그 난파선에서 쏟아진 물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규명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과 모든 사물들, 무엇이 우선순위가 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까 돈의 의미도 달라지고 가족의 의미도 달라지고 자식의 의미도 달라지고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배우면서 이 모든 세계 안에 있는 의미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으며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그 의미를 하나님께로 귀환하는, 그 모든 의미를 하나님께 다시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의 빛 안에서 해석하고 해석된 것들을 이용하고 이것을 활용하면서 하나님께로 환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진리는 믿음으로 학문은 우리 이성으로 해 나가면서 이것들이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끊임없이 이런 비밀들을 터득해가면서 자신이 성숙해 가는 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016.12.04 구역장교육)
2. 주는 나의 하나님
녹취자 : 오희열
문제 1번 읽겠습니다.
문제 1)하나님께서는 우주의 가장 거대한 별에게도, 어마어마한 시간을 견디어 온 그 무엇에게도 맡기지 않은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사람과 사람이 갖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는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숙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고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 너무 유명한 얘기지만 하버드 대학에서 실시했던 “행복 리서치”가 있었습니다. 설교 시간에도 한 번 이야기했는데 하버드 졸업생들 860여명을 대상으로 불행한 사람과 행복해진 사람들이 어떤 요인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도달할 결론이 돈이 아니고 지위가 아니고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피투성이가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그렇게 피 흘리게 만드는 것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돈? 관계가 잘되면 돈도 왔다 갔다 합니다. 자기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도 빌려 줍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그것도 안 옵니다. 물론 돈이 없는 사람들 모두 관계가 망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인생에 남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삶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목표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더구나 치열한 경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는 영혼을 주셨습니다.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관계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와 가장 유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시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면 모든 가족 구성원이 이 사랑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인류가 번성하였을 때 그 모든 인류가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가 보면 제일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남편과 아내, 그리고 가족관계들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의 성패는 가족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한 모든 사람들은 불행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읽은 자료를 보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리학과 실존철학의 관계를 규명한 것입니다. 실존주의는 대충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십시오. 그렇게 극단적인 모든 신과 인간의 관계를 끊고 인간을 철저하게 외톨박이요 우연성의 존재라고 규정을 했던 실존주의 철학자들 가운데 3/4 정도는 결손가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무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는 상태를 경험하면서 도대체 나와 네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근본적으로 회의를 품은 시기를 거치면서 그런 사유들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구체적인 통계까지 나와 있는 책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아서 며칠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굉장한 충격이었고 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한 사람이 자라는 환경이 그 사람의 사상에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하게 큰 것입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도 열여섯 살 때 쯤 첫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 여자를 유대인이 강탈했고 돈과 힘으로 짓누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어렸을 때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는지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여기가 바로 미래의 우리 자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서 자라야 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더 할 얘기가 많지만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2번 읽겠습니다.
문제 2)성경이 모든 피조물 중 최고의 작품인 인간을 양에 비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특히 이스라엘을 양에 비유하십니다. 그런데 말씀드렸지만 양은 사실 우리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는 매우 긍정적이기만 한 짐승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양띠입니다. 여기 양띠 많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양은 긍정성과 부정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양에 비유하시는 이유는 양은 인간의 돌봄을 받으며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양에 비유하시면서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인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는 것은 개가 사는 것보다 힘들 때가 많은 것입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합니다. 잘 먹고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서 담벼락 아래에서 배를 쫙 깔고 누우면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우리 인간에게서는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짐을 다 짊어지고 그렇게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고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혼자 살아가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천재들 중에는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정신을 꺼야 행복합니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너무 아는 게 많으면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뭔가 좀 몰라야 합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것도 좀 주워 먹이고 위생관념도 조금 부족하고 뭐 사달라고 하면 사주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가끔 속아주기도 하고 그래야 아이들이 불행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너무 탁월한 교육자여서 아이 심리를 꿰뚫어보고 있으면 아이는 불행한 것입니다. 가끔 거짓말도 좀 해서 한 만원 더 받아가고 그럴 수 있어야 아이들이 행복하고 사회성도 자라는데 학교에 뭐 가져오라고 하면 “그걸 학교에서 왜 가져오라고 해? 영수증 가져와봐!” 하며 거울같이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척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재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고등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고민들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이유는 우리들이 느끼는 행복의 이유와 좀 다를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수학의 난제를 풀었을 때 희열에 복받치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내려다보면 정말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람들로 보이면서 대화가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약간 괴팍하고 기이한 성격을 보이는 것도 우리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재는 아니지만 그런 천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회가 발전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돼지보다 불만족할 때가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다스리면서도 인간은 하나님을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정신세계의 복잡성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면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 해석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작은 체액하나가 분비되지 않을 때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이상상태에 접어들게 되고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고등하다는 사실과 별개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해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3번 읽겠습니다.
문제 3)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을야기한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설명해 봅시다.
우선 우리가 앞에서 배운 대로 보자면 두 가지입니다. 존재적 격차, 그는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고,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고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고, 그리고 도덕적 격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사랑은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이고 우리는 낮은 사랑이고 불완전한 사랑이고 사랑하지만 이 사랑의 방향이 수시로 빗나갈 때가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발견해야 합니다. 더욱이 시간과 공간의 유한성 안에 인간은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빛이 있는 빛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들리는 것이 있는 모든 소리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감지하는 빛이 있는 모든 빛의 전부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넘나드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이 보고 나와서 썰렁하게 “이게 뭐지?”했답니다. 너무나 우리에게 익숙해진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만날 수가 있는지에 의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열고 보면 이해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기에 묶여 있는 우리가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번 읽겠습니다.
문제 4)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본문에서 이 복음이 말 그래도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기쁜 소식이 어떤 것입니까?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이 와서 하는 말이, “우리 회사가 금년에 대박을 쳐서 내일 회사에서 1200% 보너스를 쏴 준대!” 하면 아내인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1200%. “좋아요.”는 그저 100% 줄때 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대만에 갔더니 한참 경기가 좋을 때 어떤 회사에서 2300%를 지급했다고 합니다. 계산을 해보니까 답이 안 나옵니다. 한 300만원 받는 사람에게 12월에 7000만원을 쏴 주는 것입니다. 그런 회사 다니시는 분 손 들어 보십시오. 없습니까? 그런게 기쁜 소식 아니겠습니까? 남편이 맨날 말단에 있었는데 승진했다거나 하면 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대학을 갈까 말까 했는데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하면 좋은 것 아닙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웃으시면 기적을 보기 힘듭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에 이렇게 매여 있습니다. 매여 사는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죄에 매여 살지 않을 수 있도록, 죄에 매여 산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를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사랑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너무 과장해서 그림을 그려서 해골까지 놓았는데 사실 이 정도는 아닙니다.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기력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TV에서 드라마를 보시면 막장드라마가 전개됩니다. 아귀다툼을 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도 잠깐 뉴스를 보니까 아시아나 항공기 조종실에서 기장과 부기장이 멱살을 잡고 대판걸이 싸우는 바람에 씩씩 거리면서 비행기를 운전했고 그래서 비행기 이륙도 늦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조종사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웠는지 궁금하지만 그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생명과 사랑의 부족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힘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범죄 한 다음에 인간이 겪어야 했던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이렇게 인간에게 부어지던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단절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타락하면서 미친 듯이 물질주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물론 물질의 자원, 지상의 자원과 천상의 자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도 과일을 먹었습니다. 천상의 자원과 지상의 자원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것을 공정하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영적인 자원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미친 듯이 육적인 자원에 탐닉하게 되고 그 탐닉을 하면서 이 지상적인 자원의 크기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종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지상적인 자원을 끌어 모으는 것이 사람을 지배하고 짓밟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권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박대통령의 소신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국민이 모든 나라를 질서 있게 다스리라고 맡겼는데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그렇게 사용하라고 백성들이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람을 지배하던 사람들의 결과가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줍니다.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자원은 그런 식으로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물질을 모으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이 사람을 사람답게 사는 데 기여하게 해야지, 그 자원들이 누군가를 종으로 만들고 그들을 짓밟고 지배하는 수단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은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이런 생명과 사랑이 단절된 가운데,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만드는 그런 자원들이 모두 끊어진 상태에서 이 지상의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자원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보니까 서울에서 부산까지 16분에 가는 기차를 개발하는 연구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부산에서 1부 예배 설교를 하고 올라와서 2부 예배를 해도 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를 부산에 하나 개척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뭔가 삶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외롭고 고통 받고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아파하는 이런 것들을 빠른 교통수단이 해결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렇게 물질문명에 매몰되면서 사람들의 관계가 더 끊어지고 서로 외로운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족과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꾸 말을 해도 대답을 안 하더랍니다. 하도 답답해서 핸드폰을 꺼내서 “너 왜 대답 안 하냐?” 하고 문자를 했더니 아들이 그 답을 문자로 보내더랍니다. “아빠, 내가 기분이 좀 나빠. 말할 기분이 아니야.” 아니, 그걸 대놓고 이야기하면 되지 문자를 해야만 답을 합니까? 이런 것들이 오늘날 인간관계에 단절 현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문명은 너무 찰싹 붙어서 모든 것을 빨아먹고 거기에 붙어서 모든 것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을 어느 정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메노나이트(Mennonites)처럼 모든 것을 단절하고 원시시대처럼 살아가는 것도 안 되겠지만 일정한 거리를 가지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할 정도까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렇게 생명과 사랑이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생명과 사랑을 교회에 부어주시고 교회 속에서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이 교회에 접붙여지면서 이 생명과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현실과 마주설 수 있는 용기와 힘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제입니다. 읽겠습니다.
문제5)인격적인 신앙은 지성의 설복과 의지의 감화로 구성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지성의 설복과 의지의 감화를 경험하게 하고, 나아가 이 둘을 통합시켜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성으로 설복하고 의지에 감화를 주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성은 설복되고 의지는 감화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입니다.
조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거룩함.
순원들이 은혜를 받도록, 구역원들의 은혜.
구역원들이 하나되도록, 하나됨.
세 가지를 위해서 같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016.12.18 구역장교육)
3.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심은
녹취자 : 오희열
1과 2과에서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3과에서는 그 포커스가 인간으로 넘어옵니다.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문제 1번, 읽겠습니다.
문제1)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신 것은 인간에게 기대하신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삶은 어떤 것입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은 목적 없이 만든 것은 없습니다. A를 만들려다가 잘못해서 B가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인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국수집에서 국수를 치대는 아저씨가 정신줄을 놓다가 거기에 어떤 원료를 잘못 배합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수를 뽑아서 말리고 났더니 고무줄처럼 질긴 국수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못 쓸 것 같아서 삶아서 먹어보니까 못 먹을 것 같아서 이웃에게 나눠주었더니 사람들이 고추장도 넣고 후춧가루도 넣고 이것저것 무쳤더니 쫄면이 된 것입니다. 모르셨습니까? 떡볶이가 우리나라에 나온 것이 한 6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신당동에 있던 할머니가 흰떡을 꺼내서 볶아서 파는데 잘못해서 고추장 독에 빠졌습니다. 그것을 물로 씻어내자니 고추장이 너무 아까워서 그대로 볶아보았는데 그게 떡볶이가 된 것입니다. 어떤 회사에서는 심장병에 도움을 주는 약을 만들었는데 임상실험을 하기 위해서 온 동네에 나누어 주었더니 효과가 없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약을 모두 회수하라고 했는데 약이 파란 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회수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발기부전 치료제로 최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비아그라인데 비아그라 파란 알약 하나로 1년에 2조원을 벌고 있다고 하니까 그 로열티가 50년인지 10년인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그 한 알의 원가는 제가 보기에 2원, 3원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1만 원씩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이 실수를 해서 A라는 목적을 향해서 만들었는데 B가 툭 튀어나올 수 있지만, 인간이 만든 모든 물건 가운데 목적이 없이 괜히 만들어진 물건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예술작품은 목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작품은 보고 뭔가를 생각하고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제가 충고하고 싶은 얘기가, 남편이 꽃을 사다주면 그것은 사실 큰마음을 먹고 사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핀잔을 줍니다. “꽃을 뭐 하러 사오느냐 돈 아깝게, 먹지도 못하는 것을…” 꼭 뒤에 “먹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붙입니다. 아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한 15년 전에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가는데 그냥 마음이 애틋해서 꽃 파는 트럭이 와 있기에 장미꽃 한 서너 다발만 달라고 했더니 이 친구가 실실 웃으면서 “아저씨, 뭘 잘못했어요?” 합니다. 그렇게 살지 맙시다. 꽃은 무슨 생산품이 아니라 보고 즐거워하는 자체가 목적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언젠가 한 번 깊은 산 속을 차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거기는 진짜 사람이 가지도 않는 곳이었습니다. 거기 피어있는 들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들은 왜 태어났을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꽃이 피고 잎이 피어도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런데 내가 가니까 꽃들이 막 손을 흔들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큰 깨달음이 팍! 하고 왔습니다. ‘하나님이 보신다!’ 이 생각을 하니까 참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가!’, ‘그 깊은 산속에 피고 지는 꽃들이 있는 것, 인간에 의해 촬영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가! 아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한낱 오늘 피었다가 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목적이 있으셔서 만드셨고 머리가 그렇게 탁월하지 못한 인간도 물건을 만들 때 어떤 목적이 있어서 만들었다면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하면서 구원해 주실 인간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뜻과 목적이 없이 사람을 만드셨을 리가 있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십니다. 창조입니다. 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있을 것이고,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면 좋겠다.’하는 의도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이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있어서 생겨나게 하셨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장애인이나 그런 사람을 보면서도 항상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다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는 A였지만 B로 바꿔놓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고 인류사회의 조화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해서 어떤 뜻이 계셔서 인간을 만드셨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를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듯이 인간들이 자연세계를 파괴합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환경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원을 낭비하는 일들에 대해서 생태학적인 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뜻하시길,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고 이것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함께 생각하며 살도록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크게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것에 대한 답을 모르는 것이 인간이 방황하고 고통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것에 대한 가장 최종적인 답을 인간에게 주는 종교라는 점에서 깊은 자부심을 느껴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세상 속에는 인류와 자연세계가 포함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지구를 창조하셔서 인간을 여기에 살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막 짓밟으면서 자기 행복을 위해서 소모품처럼 쓰라고만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산속에 있는 들풀, 그게 거기 피어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자연 사물들은 인간이 이득을 얻기 위해서 막 짓밟고 파괴해도 좋은 존재로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겸손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과 함께 공생하면서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동지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들을 행복하게 여기고 잘 가꾸면서 자기 자신도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그러한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우리들은 자녀들을 그런 식으로 자연에 대해서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MB정권에서 추진했던 4대강 개발이라든지 소수의 재벌들을 위해서 자연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법률을 완화하면서 엄청난 개발이 이루어지고 이익이 국민전체로 돌아가지 않고 소수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나쁜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린 화이트(Lynn White Jr.)라는 사람이 1960년대에 아주 중요한 논문을 하나 발표합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면 그 사람이 발표한 논문(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이 나옵니다. 이렇게 심각하게 지구가 오염되고 황폐하게 된 것은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가부장적인 자세로 이 자연에 접근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2차 산업의 발달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유물이기 때문에 얼마든 파괴하고 정복하면서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을 유포시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 논문을 저도 읽어보았는데 100% 동의할 수는 없지만 상당부분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점에서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도덕적인 뜻들을 구현하고 여기에는 자연적인 뜻들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에 어마어마한 식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것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제 한 번 신문에서 읽었는데 햄버거 가게에서 사용하는 닭고기들, 이런 것들이 거의 닭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털을 뽑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주고 좁은 장소에 모아 놓고 살찌는 사료, 사람들이 좋아하는 앞 가슴살을 키우기 위해서 조작된 사료를 먹여서, 60일이 되어야 정상발육이 되는 병아리가 45일 만에 가슴만 너무 커져서 계속 앞으로 고꾸라지는 닭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에게 식품으로 제공되는 짐승이나 식물들도 행복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좀 자유롭고 닭답게 살다가 죽은 닭을 먹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도축되기 직전까지는 닭이 나름대로 자유를 누리고 품위를 가지고 지내야지, 24시간 불을 켜 놓고 알 잘 낳는 약을 먹여서 계란을 빼내는, 그렇게 생산되는 제품들이 좋을까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100% 피해서 살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물보호 단체나 환경단체들의 이야기를 100% 신뢰할 수는 없고, 거기에도 정치적인 것이 많이 들어갑니다. 가끔 도발적인 책이 나옵니다. 우유를 먹으면 안 된다, 우유가 좋다고 선전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재벌들의 기획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소수의 의견들도 참고하면서 문제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우리가 여기에 있음으로 함께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자연세계도 뭔가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2번을 읽겠습니다.
문제 2)인간의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삶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여기 그림을 보시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이 사람을 정말 사람답게 살게 하는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깨집니다. 여기 시커멓게 나옵니다. 깨지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과의 관계도 가지런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제각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 세계와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매우 무질서한 상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보는 끔찍한 이야기들입니다.
언제 한 번 인터넷에서 중국의 사형수들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중국의 여자들 중에 예쁜 사람들만 모아 두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개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거기서는 공개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 예쁘장한 여성입니다. 여염집 아낙네들 같고 대학생들 같습니다. 그런데 용서받을 수 없는 사회적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정말 그런 끔찍한 죄를 지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런 무질서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 우리가 태어납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무질서를 보면서 도대체 이 안에 무슨 질서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고 또 잘못된 질서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이 답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이미 회복되었고 앞으로도 성화를 통해서 회복되어 갈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아까는 구현되지를 못했는데 이번에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일지 생각을 하고 자기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이런 혼란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하나님의 그 뜻을 구현하면서 살아갈 착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질서 정연해지고 글씨도 질서 정연해지고 이렇게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해지게 됩니다. 그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이렇게 회복된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 세상에 전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문제 3)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신 것은 “선한 일을 위하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 한 번 설명한 것인데 히브리말로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그냥 “좋다”, “good”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해서 메오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선하다”, 그리고 “좋았더라”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선했더라.”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유괴범이 아이를 꼬입니다. “아저씨를 따라와라. 사탕 사줄게.”, 아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꾸 꼬이니까 아이가 말을 듣습니다. “착하지, 착하지, 넌 참 착하구나.”하며 데리고 갑니다. 이 아이를 유괴하고자하는 자신의 세운 목적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면 그게 마음에 들기 때문에 착하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의도, 이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입니다. 선함은 그렇게 선한 목적을 올바르게 향하고 있는 조건이나 상태, 이것이 선함입니다. 그래서 “선”은 하나님이 고유한 선의 근거이시고 선 자체이시지만 그것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선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에베소서 2장 10절,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선한 일들” 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 혹은 그것을 위한 인간의 섬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단수로 되어있는데, 우리말은 단복수를 그렇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원래 희랍어 성경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문제 4)저자는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효용은 죄로 인해 망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아키텍쳐”(architecture)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건축”을 말합니다. 희랍어의 두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아르케(arche)”라는 단어와 “텍쳐”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아르케”는 “원리, 근원, 원천”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테크네(techne)”는 “기술, 기예”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교육관 수리를 앞두고 있습니다. 장로님들이 신경을 많이 쓰고 고생을 하시는데 어쨌든 하나님이 잘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집 하나에 사람이 살려면 콘크리트 공사도 누군가는 해야 할 것이고 문짝도 달아야 하고 전기 공사도 해야 하고 불도 들어와야 하고 물도 들어와야 하고 창문도 매달아야 하고 벽은 조직적으로 하나 하나 벽돌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벽돌공은 벽돌을 쌓을 뿐이고 창문하는 사람은 창문을 가져와서 매달 줄은 알지만 수도는 모릅니다. 전기 기술자가 콘크리트는 못합니다. 이렇게 자기 것 밖에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이 기술을 결합해서 사람이 살만한 집을 지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건축가입니다. 그래서 건축가가 수도나 각종 일들을 다 할 줄은 몰라도 이것을 어떻게 결합해야만 최고로 아름답고 좋은 집이 될 수 있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테크네 통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기술입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있습니다. 사람은 돈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여러분 남편에게서 지금 문자로 “올 12월 19일부로 연말 보너스 600%가 입금됩니다.” 하면 싫어할 자매가 누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리고 지식도 있습니다. 총도 있을 것이고, 훈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왜 좋은가?” 라고 할 때, “그냥 맘대로 쓸 수 있으니까” 라고 말하면 안 되고, “훈장이 왜 좋은데?”,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주니까.”, “총이 왜 좋은데?”, “내가 원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까.” 이렇게 답을 하면 빵점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슨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사람에게 자기가 걸어가도록 지정된 인생의 길과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 하나를 사도 사용설명서가 붙어 있습니다. 사용설명서를 잘 읽지 않고 사용을 하면 망가뜨리기 쉽습니다. 그래도 1년 안에 망가뜨리면 교환을 잘 해주는데 쓰지도 않고 있다가 뭔가 한 번 한다고 하다가 안 되서 주먹으로 때리다가 망가지면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중한 물건일수록 우리가 막 다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술자 이외에 온 교인이 와서 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피아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싼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막 두드리길 원하지는 않습니다. 피아노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피아노를 만져야 합니다. 저도 아직 한 번도 두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피아노나 값비싼 가전제품은 잘못 사용하면 그게 망가질 뿐이지만 인생을 잘못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사용설명서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설명서대로 인생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망가지기도 하고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남의 인생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나라의 돌아가는 일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넘어가겠습니다.
문제 5)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은혜를 주십니다. 선한 일과 은혜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여기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상이 망가져 있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분들은 똑바로 되어 있고 어떤 부분들은 망가져 있고 그럴 것입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의 그것으로부터는 상당히 멀어진 상태일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것이 올바른 상태인지도 잘 모릅니다. 혹시 이것을 “아, 그렇구나!” 하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목적으로 알면서 살다가 복음으로 깨달음을 얻어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정하신 인생의 올바른 목적을, 온 인류를 향해 주시는 세계의 목적, 그 안에서 깨달은 사람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감화를 시키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덕을 입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뜻과 질서들을 여기에 구현해서 이 사람들을 똑바로 세우고 자연의 이 모든 세계들을 올바른 질서 속에 다시 돌아가 단정한 세상이 되어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이 행복해지고 또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무질서한 인생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가지고 계시는 뜻입니다. 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부분을 우리 모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사랑의 감화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인간을 감화하시면 인간의 마음속에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생겨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삽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바꿔 놓을 수는 없지만 자기가 하는 이 선한 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세계를 향해 품고 계신 선한 뜻을 이룰 수 있게 되는 일들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악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이 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행한 것이고 이런 선한 일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이 외적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엘리야가 떡과 물을 먹었습니다. 얼마나 깊은 감동이었겠습니까?
저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혼하고 아이가 없다가 7년 만에 아이를 낳고 정말 가난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수술비가 안 들어가게 하려고 24시간을 진통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서 제왕절개를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가족들 중에서도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병원비 걱정을 하며 그 허름한 병원에 앉아 있는데 그 당시에 집사님 한 분이 찾아오셔서 “전도사님, 이렇게 늦게나마 아들이 태어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하시며 진심으로 축하를 했습니다. 그 집은 남편이 외국에 가서 일도 하고 여유가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봉투 하나를 놓고 갔습니다. 그분이 가시고 나서 너무 궁금해서 그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4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나에게는 그냥 돈이 아니라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구나! 이 곤궁한 중에도 저 분을 통해서 나를 위로해주시는구나!’ 했습니다. 한 20여년이 지난 후에 서울여대에서 저를 초청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때있던 교회가 지나던 길에 있어서 두 시간쯤 일찍 출발해서 교회에 들어보니까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알고 지내던 집사님이 사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전도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목사가 되었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OO집사님을 꼭 좀 만나고 가게 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 돈을 돌려주면 받겠습니까? 안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4만 원짜리 오렌지를 한 박스 사서 갔습니다. 더 보태주지 그랬냐고 하시겠지만 물론 더 보탤 수는 있었는데 더 이상 그 동네에서 살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가져가서 20년 만에 만나니까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였던 사람이 유명해져서 자기 집을 직접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차를 한 잔 주는데 부엌에서 튀김을 하고 난리였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했더니, “중등부에서 수련회를 하는데 봉사하는 것입니다.” 합니다. 오지랖 넓고 봉사하기 좋아하는 성품은 여전하셨습니다. 거기서 그분을 뵙고 20년 전의 이야기를 했더니 이 분은 새카맣게 잊어버리셨습니다. “전도사님, 저는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20년 동안 거짓말 안 하고 한 달에 한 번쯤은 집사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기도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고 오렌지 한 박스를 드리고 왔습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렇게 이 세상에 살 도움이 모두 끊어진 것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고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을 올바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적인 능력도 주십니다. 선한 일을 해 낼 수 있는 힘과 능력, 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016.12.18 구역장교육)
4.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녹취자 : 오희열
1번 읽겠습니다.
문제 1)로마서 3장 23절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도 그랬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저기에 있고 달리기를 해서 가라는데 못 가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여기서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는 뜻은 영어로 말하자면 “be short of”, “모자라다”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한 참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 영광의 흔적입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인간에게 갖게 하신 당신의 영광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 영광이 있어서 인간이 참 아름답게 빛났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 가지 상태가 있는데 첫째는 타락 전의 인간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교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교통을 통해서 생명과 사랑이 흘러나와서 인간이 참 하나님의 영광을 간직한 인간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로 타락합니다. 인간이 이러한 참 생명과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인간을 기본적으로 살게 하는 것은 사랑과 생명인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은 그래도 그 흔적을 남겨 놓으십니다. 그래서 정말 죽고 싶은데 아이들을 보면서 살아가는 엄마, 정말 살고 싶지 않은데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자식, 등등 하나님이 그런 생명과 사랑의 흔적들을 남겨두셨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향한 사랑이나 공동체를 위한 헌신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진부하지 않고 마르지 않는 주제가 “사랑과 생명”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이 누구든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사랑과 생명입니다. 이것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구원하신 인간은 그 마음에 사랑을 주셨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가운데 생명과 사랑을 다시 받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합니다. 신자의 경우, 이것이 성화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현실적인 상황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진 뜻은 타락 전의 온전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상태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진짜 하나님의 영광인데 피조물은 이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탁월한 지위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것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거룩한 사랑과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그렇게 불행하게 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돈이 있다고 사람들을 그렇게 깔보고 무시하고 권력이 있다고 사람들을 막 짓밟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외적인 것들이 있어도 이런 거룩한 사랑과 영적인 생명력이 상실될 때 우리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문제 2)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인간이 겪게 된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인간을 불쌍히 여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자,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충만한 사랑과 생명을 받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결국 사람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고 뿐만 아니라 지식을 가지고도 이것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또 돈을 가지고도 이것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이 생명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을 목회하다 보면, 여러분도 순장이니까 경험할 것입니다. 아무리 쏟아 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참아주고 이해해 주어도 그것을 고마운 줄도 모르거니와 자기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섬겨본 적이 없으면서도 무한한 섬김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어디에서 가능할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회에 나가서 그렇게 오래 참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준에 맞지 않고 공동체에 불편을 준다고 생각되면 사람들이 돌려세우는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이것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의 입니다. 이 “하나님의 새로운 의가 나타났으니”(롬 3장)에서 말씀하시는 의는 믿음을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래 주셨던 그 영광의 원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선행이나 가문이나 혈통이나 문벌 등을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정말 참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복음이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3번 읽겠습니다.
문제 3)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량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영혼이 가진 탁월한 특성을 에베소서 4장 24절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장 24절을 우리 모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는 올바른 의로움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충만한 지식, 거룩함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별됨 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을 본받아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사람, 새 사람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옛 사람은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죄로 물들었던 인간입니다. 이것이 옛 사람입니다. 새 사람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음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얻은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인생을 어떤 길로 걸어가야 할 지 모릅니다. 새 사람은 그것을 안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새 사람입니다.
4번 읽겠습니다.
문제4) 구속(속량)과 속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십자가에 의한 구원에 대입하여 설명해 봅시다.
구원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모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속량과 속전의 모델입니다. 이것은 로마시대에 신약성경이 써졌기 때문에 배경이 같습니다. 노예가 있습니다. 사람이 노예를 사면 자기 것이 됩니다. 그 노예가 해방이 되더라도 노예가 낳은 자식은 노예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 됩니다. 이런 노예들이 결박되어 있습니다. 노예들은 다섯 명인데 아빠, 엄마, 그리고 세 명의 자식들이 모두 노예 시장에 팔려온 것입니다. 이 노예들은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한 집으로 팔려가기를 원하는데 노예들의 주인은 따로따로라도 빨리 팔아버리려고 합니다. 그때 인자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 노예 가족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면서 대신 돈을 지불하고 모두 사갑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옷을 입히고 저녁을 잘 먹여서 재워주고 다음날 아침에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노예가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자유인의 증서를 써 줄 테니 가서 자유롭게 살아라.” 그때 이 노예를 풀어주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주인의 행동을 “속량”이라고 하고 속량을 위해서 지불된 돈을 “속전”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그것을 지불해서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의 기독론적인 의미는 이렇게 사탄에 의해서 세상과 우상, 정욕, 자랑에 노예가 되어 매여 살던 인간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 대신 속전을 지불해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의 값이고 이렇게 하신 행동을 우리는 속량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속죄의 개념이 설명되는 것입니다. 속죄를 통해서 우리가 구속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5) 십자가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인지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봅시다.
구속이라는 것을 한자로 쓰면 “救贖”, 속죄의 결과가 구속입니다. 죄를 지어서 받는 구속과 헛갈리시면 안 됩니다.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면 그 구속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이겠습니까? 율법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 정당했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속죄를 이루심으로 믿는 우리들이 거기로부터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구속입니다. 대신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해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세 번째는 죄의 결과로부터 구속입니다. 죄의 결과 무엇입니까? 비참입니다. 이 비참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저주로서의 율법이 있는데 죄가 무엇인가, 죄의 형벌이 무엇인지를 율법은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모두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데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특히 십계명을 어깁니다. 그래서 그런 율법을 우리가 어겼기 때문에 그 율법을 가지고 우리가 정죄를 당하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그런 처지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은 죄, 그것에 대해서 정죄 받을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제물이 된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속은 두 개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신분의 자유와 상태의 자유입니다. 상태의 자유는 마음과 영혼에 관련된 것입니다. 신분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예전에는 신분이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이었다가 이 사람이 변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두 번째는 예전에는 마음과 상태가 얽매임 가운데 있었는데 이제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로부터의 구속을 통해서 누리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죄가 가져온 비참함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질병과 결핍, 죽음, 현실적인 어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이것들로부터 건져주시는가? 물론 건져주십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도 질병과 결핍들을 여전히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찾아내게 되면 잠시 이 세상을 살면서 부당하게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악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거나 혹은 최악의 경우에 내가 잘못해서 죽임을 당해도 그것들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이 인생의 과정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훨씬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관계와 악한 성향으로부터 하나님이 자유를 주십니다.
문제 6) 본문에서 십자가의 구원이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으로 세계를 창조하셔서 없었던 것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구원의 역사를 베푸심으로 인간이 재창조된 것이 구원입니다. 끊어졌던 영원한 생명과 사랑이 다시 공급되고 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제2의 창조”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 세 가지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랑의 감화를 받도록, 은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자유케하기 위해 주신 은혜를 귀중한 것을 받는 성도들이 되도록, 이것은 자유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영혼을 섬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조금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안 할 수 있지만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영혼을 섬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우리가 자유를 소중히 여기도록, 또 새해에 영혼을 가르칠 교사를 보내주시도록, 이 세 가지를 위해서 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017.01.01 구역장교육)
5.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심
녹취자: 김세나
드디어 구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앞서 배운 내용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창조하셨을까’, ‘우리는 왜 인간으로 지음 받았을까’라는 고민을 하다가 4과부터는 죄로 인해 타락하고 비참해진 인간은 스스로 참다운 자신이 되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인생의 참된 목적을 회복할 수 있을까를 다루는 구원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신 것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문제 1번 읽어보겠습니다.
문제1)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참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끝나는데 신약성경은 족보로 시작됩니다. 사실 선교적으로 신약성경의 구성이 매우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계속 족보가 나오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덮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사실 이 족보는 매우 중요한 복음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의 이 족보는 남자가 남자를 낳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맨 마지막에 예수의 탄생 대목에 가서는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로 끝이 납니다. 족보를 뒤져보십시오. 여자에게서 태어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 누가 나옵니까? 남자가 남자를 낳는 것으로 나오지 여자가 낳는 것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족보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있었지만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는데 생리적으로 이바지한 것이 없습니다. 마리아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시는 것으로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이 실현되면서 전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합니까? 그림을 보면 (아담의) 갈비뼈를 그렸는데 나비처럼 그려졌습니다.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듦으로써 둘은) 한 몸으로써 창조가 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흙으로 사람을 빚어 여자를 짓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여자이고, 남자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성의 우열을 가립니다.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남자는 흙에서 만들어 졌고 여자는 흙보다 훨씬 고급 재료인, 이미 정교하게 창조된 사람의 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더군다나 흙이 저절로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갈비뼈가 저절로 여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소재일 뿐이고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것 없이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재료들을 사용하신 이유는 여러 가지 많은 뜻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뭔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성경에서 나오는 흙은 히브리말로 ‘아파르’()인데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무가치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티끌로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네가 참으로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라. 네가 정말 존귀하고 가치 있게 된 것은 티끌 때문에, 혹은 흙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중요한 메시지로서 재료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여자를 만드실 때 남자의 갈비뼈를 사용하셨던 이유는 남자의 몸의 일부, 남자와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여자는 남자에게 소속되어있다는 식의 지배관계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남성 우위론자들의 해석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를 해석하기를,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도록 그의 머리의 뼈에서도 아니고, 남자에게 짓밟히도록 그의 발의 뼈에서도 아니고,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바로 그 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왜 심장을 빼서 여자를 만들지 갈비뼈를 떼어 내셨겠습니까? 심장 빼면 죽지 않습니까. 갈비뼈는 하나 쯤 빼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치료 받을 때에도 급하면 의사들이 일부러 망치를 때려서 갈비뼈를 부셔버리고 그곳에 관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이나 폐와 같은 장기를 찌르면 치명적인 문제가 됩니다. 어쨌든 갈비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처음부터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을 특별한 하나님의 배려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을 잘 돌보고 보호해주는 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
여기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나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에서 등장하는 ‘떠난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아자브’()입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부모님들은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인 연대감에서 남자가 부모를 ‘아자브’, 곧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버린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의 연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합이란 무엇입니까? 육체적, 정신적, 영적 연합입니다. 이런 온전한 연합 속에서 부부가 탄생하게 됩니다. ‘한 몸이 된다’고 하는 히브리어는 ‘바사르 에하드’()인데 이것은 ‘한 살’(one flesh)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육체의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정신적 결합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둘이 서로를 한 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를 묶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남자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말은 없어서는 안 될 치명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굳은 살을 아무리 대패로 깎아 내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을 손톱깎이로 조금만 뜯어내어도 죽습니다. 그런 종류의 자기 생명과 관련된 치명적인 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죄가 안 들어왔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였는데 아내도 남편을 향하여 똑같은 고백을 갖습니다. 한 몸으로서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된 상태에서 한 몸으로서의 고백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고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그 고백을 셋이서 같이 나누었겠습니까 아니면 둘이서만 고백하며 아이는 제외했겠습니까? 전자일 것입니다. 이후 동생이 태어납니다. 그러면서 계속 자손을 낳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온 인류가 서로를 향해서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갔을 사회였을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꿈꾸셨을 최초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 때문에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사람들을 접붙이셔서 다시금 생명과 사랑을 흐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뜨거운 까리따스의 사랑에 붙잡히면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서라도 저 사람이 행복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 육체, 모든 문제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선취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 관계 안에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서로를 향해 고백을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합 가운데 자손들을 생산해 냈다면 모든 자손들이 그렇게 서로를 향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갔을 것이고,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것을 다 깨뜨리고 파괴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국가, 정부라고 하는 것이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존재했을까?”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정부라는 것이 필요하였겠습니까?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균형을 잃은 사고방식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정부는 세워졌을 것이라 봅니다. 왜 입니까?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핸드폰은 발명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무 데서나 무분별하게 울리면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이를 규제하는 어떤 법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고 행복하게 오래 살았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 이런 저런 의논이 없었겠습니까? “여보, 밥은 누가 해?” “내가 하지.” “그 대신 당신은 설거지를 해야 해.” “밖의 들일은 당신이 하고 아이들 키우는 일은 내가 주로 할게.” 서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인류가 번성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에 맞는 어떤 질서들을 이 세상에 구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질서를 구현하면서 사는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교회에 모여서 봉사를 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섬기는 것은 너무 좋습니다. 문제는 교회를 떠나서 집이나 직장, 사업처로 돌아간 생활이 교회의 생활과 나뉘어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흩어져서 여러분들이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시 말해 여러분들의 현존 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란 책에서 여러분들에게 이미 가르쳐 드렸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사는 것, 사업장에 가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있는 것으로 인해서 말도 되지 않는 질서를 올바르게 바꾸는데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나라가 많이 어지럽습니다. 이 틈에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데모를 하는데 일부 기독교 세력들이 이에 앞장섭니다. 그것을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올바른 질서가 무엇인지 알아서 올바르다고 생각되지 않는 질서에 항거하고 옳은 질서에 몸과 마음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서 그 올바른 질서가 확산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물론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확고하게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삶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 인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가족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바로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형제, 자매라 부르는 것은 아주 놀라운 가족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보십시오. 여자의 후손에게 주시는 구원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서 떠나 인간은 결국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자기 스스로 자가발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의 끊임없는 공급을 통해서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갑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자가발전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시작입니다.)
(찬양)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났도다.
사랑은 하나님께로 나와서 한 인간 한 인간으로 향하고, 그렇게 온 인류와 세계를 휘돌면서 마지막 그 모든 사랑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회귀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이런 자기 환원적, 자기 회귀적 범주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에게는 그런 생명과 사랑의 공급이 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할 능력과 사랑 그 자체, 지적인 능력과 지식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능력은 하나도 훼손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 그 자체를 타락으로 인하여 대부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연결되어서 나오는 그 사랑이 끊어지고 나니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랑으로 돌아가 사람들은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이기적인 것이 뼈 속 깊이 사무쳐 본능이 됩니다.
자동차 사고 통계를 내 보면 운전사가 죽는 확률보다 운전사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죽는 확률이 더 높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운전을 하다가 위기 상황이 되면 자기를 딱 가운데 중심으로 보고 피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더 쉽게 죽습니다. 그래서 조수석에 앉아있는 것보다 운전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운전자 다음으로 생존 확률이 높은 것이 운전사 바로 뒤에 있는 사람입니다. 운전자와 똑같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기본적으로 자기 사랑은 가르쳐 줄 필요가 없습니다. 생리적으로 다 타고 났습니다. 딸아이가 지금 25살입니다. 어렸을 때 처음 아이스크림을 사줬을 때의 일입니다. 아이스크림을 생전 처음 맛본 후 너무 맛있어서 그것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커튼 뒤로 들어가 거기에서 혼자 먹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학습되었겠습니까? 손녀가 사탕을 들고 있길래 사탕을 좀 달라 했더니 자기 자신은 알갱이를 먹고 껍질을 할아버지에게 준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가르쳐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뼈 속 깊이 사무친 자기 사랑으로 삽니다. 그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욕망과 욕망이 충동할 때 그것은 인간의 비극이 됩니다. 오늘날 구호처럼 퍼지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들을 보셨습니까? 그것은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과 대척점에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34편의 설교로 이뤄진 고린도전서 13장 시리즈를 꼭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랑에 대한 이론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원래 창조 목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이것을 복구해야 했는데, 복구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가리키고,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에서 ‘머리를 깨뜨린다.’고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이든 짐승이든지 머리가 파괴되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머리를 파괴해서 더 이상 죽음의 권세가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 2)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를 통해서 잠시 멈춘 것 같았던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보편교회란 무엇이며, 우리가 지역교회에 속해 신앙 생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개인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인류를 내포하고 있는 대표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을 하였고, 그 사람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도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을 했던 흔적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 간에 말도 안 되게 볼 상 사납게 지내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뜨거운 형제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사라지고 나니까 살인이 들어옵니다. 첫 번째 살인이 주었을 충격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죽음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하였던 사람들이 그 한 생명이 죽는다는 그것을 경험하였을 때 그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죽음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실행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 지역에 있는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보편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고 그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은 신부인 교회에게,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그 신부인 지체가 된 모든 개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와 성도,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연결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전 세계에 있는 교회는 하나의 교회 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교회 밖에 없는데 그 하나의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밑에는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연약함 때문에 보이는 집단을 통해서 모이고 통치를 받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돌봄을 받는 것이며, 우리가 ‘열린교회’라는 지역 교회를 이곳에 세운 것도 하나님의 이런 계획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보편교회에 대한 관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인 나 하나가 아니라 나와 함께 예수를 믿는 모든 지체들, 이 지역 교회,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모든 보편 교회 말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를 통해 입증되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그 사랑이 참으로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신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하여 그 몸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문제 3)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봅시다.
첫째는 유기체적 생명의 머리되심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와 생명적인 연합을 가지십니다. 성자는 곧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고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투영될 때 마치 두 개인 것처럼 나뉘어져 분광되듯이 비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가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는 죄를 지어 타락하였습니다. 그릇된 성적 욕망들이 팥죽 끓듯 합니다. 와르르르 솟아나 성적인 것을 해소하고는 사라져버리고 또 솟아나고 사라지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려도 없이 성이 쾌락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비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를 이룹니다. 미국 어느 포르노 업체는 1년 수입이 약 10조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사회 구제 사업을 많이 한다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소비는 가정을 마구 파괴시킵니다. 만약 이러한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진정으로 성적인 희락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히브리말에 나오는 ‘에덴’의 어원이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추측은 ‘에드나’()에서 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에드나’는 ‘희락’ ‘쾌락’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특히 성적인 즐거움을 에드나라고 하는데 에덴이 그 말에서 온 것이라 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고 성적인 결합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놀랍게 생명이 나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동물의 경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고차원적인 사랑은 아니지만 어쨌든 동물도 사랑을 합니다. 원앙 같은 새는 한 짝을 잃어버리면 한 짝이 그냥 죽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서로 좋아하고 큰 기쁨을 느끼면서 자식을 생산합니다. 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생명이 피조 세계 속에서 이런 식으로 투영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사랑이시며,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사랑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에게 부어집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머리되신 성자의 사랑과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생명입니다. 자, 그 원리가 어떠한 것인지 한번 보십시오.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삶의 의욕이 그의 마음속에 마구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받거나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사랑을 누리며 행복해 하고 그 사랑 안에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늘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받았으므로’가 아니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랑이 참된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의 교통인 생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이고, 생명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적인 연합으로 인해 예수께 접붙여짐으로 예전에 없던 하늘의 생명과 사랑이 내 마음속에 흘러 들어옵니다. 주님을 모를 때에는 시련을 만났을 때 좌절 하였을 텐데, 이제는 ‘아멘’ 하며 힘이 생겨납니다. ‘나는 할 수 있어.’라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나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의 은혜가 내게 새 힘을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적인 생명입니다.
둘째는 유기체적 섬김의 머리되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분의 몸에 접붙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생명과 사랑을 많이 주십니다. 게다가 물질도 주시고, 지위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재능도 주십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아직도 행하셨을 그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라서 그분의 분신처럼 섬기는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서로 싸우면 안 됩니다. 엊그제도 신문을 보니까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인데 3만 명이 모이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내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담임 목사를 지지하던 파와 반대하는 파가 싸우기 시작하면서 10년 동안 소송을 하였고, 열흘 전에 양측이 화해를 하고 서로가 평화하기로 타결을 봤습니다. 그 사이 교인이 2천 명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유기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집에도 보면 그런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 집의 가장인데 가족을 나 몰라라 하고 자신 밖에 모릅니다. 돈 벌어서 자기만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곳에 다니고, 죽었는데도 그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가족이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 돈 빌려간 사람도 수지맞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가족의 결속력 자체가 아예 손상된 사람들입니다. 비인간적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가족이라면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고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운명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면 그 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예수님의 분신으로서 살아가길 원하는 제자도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그렇게 분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유기체적 통치의 머리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통치의 머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교회를 이렇게 이렇게 다스리거라.”하는 지침을 주십니다.
탈북한 사람이 현재 우리나라의 정세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게 있다고 합니다. 200만 명 넘는 사람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촛불을 밝히면서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힘입니다. 그런데 만약 북한 평양에서 230만 명이 횃불을 들고 시위를 하였다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1인 독재체제와 민주정치의 차이입니다. 이 나라의 법이 있고 규율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아무리 부패하고 나쁜 사람들이 죄를 짓고 개판을 쳐도 이 나라에 법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굴러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떻게 다스리라고 지침을 주셨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뭐라고 지침을 주셨든지 나는 필요 없어!’ 그런 사람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의 치리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유기체적인 통치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이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질서와 권위에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문제 4)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의 몸에 접붙여져 원리적인 연합을 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연합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리적인 연합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칭의의 연합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연합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한 신자가 진심으로 사랑할 때 이루어지는 뜨거운 연합입니다.
부부관계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혼인 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남자의 아내입니다’ 혹은 ‘이 여자의 남편입니다’가 법적으로 명시된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권리를 가집니다. 죽으면 일정부분 상속을 받을 수 있고 남편을 대신 해서 어떠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의 아내인데 다른 집 남자의 카드를 가지고 가서 옷을 사 입으면 경찰서에서 바로 잡아갑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 카드로 구입하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그것만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실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딱 맞는 비유는 아니나 부부 사이의 혼인신고가 원리적 연합이라고 한다면, 서로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실제적 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6세를 사신 철학 교수 한분이 책을 쓰셨습니다. 강의도 하십니다. 아직도 시내버스 타고 다니시면서 강연회를 다니신다고 하니 참 대단하십니다.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50대에 아내가 병에 걸렸고, 20년 동안 병수발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 아내는 돌아가셨습니다. 10년 째 혼자 살고 계십니다. 친구들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4-5년이면 모르겠는데 20년을 어떻게 병수발을 할 수 있었냐?” 그분의 답은 이랬습니다. 젊었을 때는 뜨거운 사랑으로 아내와 결합을 했고, 30대 후반이 지나 40, 50대가 지나가면서는 우정으로 연합하였으며, 70대가 넘어가니까 인간애로 연합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인간이 너무 가엾어. 아내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불쌍해졌지.” 그런데 왜 우리 주위에는 못된 70대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놀랍게도 가능합니다. 비록 톨스토이가 이야기한대로 인생의 시기마다 사랑의 형태는 다릅니다. 여자들은 50대가 되도 20대의 사랑을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정말 유치합니다. 사랑이 그렇게 변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름에 꽃이 활짝 피었을 때만 예쁜 것이 아니라 봄에 새싹이 날 때도 그 모습 그대로 예쁘고 가을에 단풍이 들 때도 그대로가 예쁩니다. 겨울에 모진 눈보라를 견디며 서 있는 그 모습 또한 그 나름대로 예쁩니다. 나무를 있는 그대로 봐야 정말 예쁜 것이지 여름 날 청청할 때만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이와 똑같이 형태는 바뀌어도 부부가 그렇게 사랑하면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하신다. 가까이 계시다. 정말 주님의 사랑이 너무도 뜨겁다.” 이런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사랑을 실제적으로 누리는 길은 바로 이 원리적인 연합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연합이 사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실재적인 연합을 가져옵니다. 죄를 죽이고 순종하고 자기가 깨어지고 믿음에 도전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문제 5) 본문은 구원의 세 가지 측면을 말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지 설명해 봅시다.
첫째로, 구원의 과거적인 측면입니다. 죽어있던 사람이 중생, 회심, 칭의 등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게 된 것입니다. 생명을 일정 부분 넣어주셔서 하나님이 퇴장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파이프를 확 심으셔서 생명이 계속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기계를 충전 해놓고 배터리를 빼 버린 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이것을 충전기로 연결해 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과거적인 측면입니다.
둘째로,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구원받는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죄에 결박되어 그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다 다시 회개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내가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을 뿐 아니라 지금, 이런 방식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성경은 ‘이루어진 구원’과 ‘이루어가는 구원’으로 이 둘을 이야기 합니다.
셋째로, 구원의 미래적인 측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다가 죄에 사로 잡혀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또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사랑하는 많은 시간들을 거치다가 마지막에는 영화(榮華)를 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glorification)에 이르게 됨으로 구원을 완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화가 죽음과 함께 완성되지만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육체가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영화로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적인 측면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미 왔고, 지금 이루어가고 있고, 앞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에 관한 관점인데, 어느 때에든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것들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넘어졌을 때에도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있는 사람이고, 다시 회개하여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을 상태이며, 이제 이러한 모든 성화가 끝나고 영화되었을 때에도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상태입니다.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와의 연관은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여름 수련회 때 배운 가운데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육신적 연합”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인간의 인성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된 상태에 있고 인류 중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연합이지만,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인류로 태어난 사람은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연합 속에서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
1. 새해에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풍성하게 누림으로 영혼들을 잘 섬길 수 있는 구역장들이 되게 하소서.
2.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몸의 일부로서 성장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3. 새해 말씀 사경회를 통하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세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017.01.15 구역장교육)
6. 그리스도의 지체로 자라감
녹취자: 김세나
천지창조의 목적을 거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았고, (구원론으로 접어들어 연합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선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종교학적인 용어입니다. 물론 넓게 보면 종교선택이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종교선택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비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누구와의 연합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 한다면,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영적인 연합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배울 내용은 지체가 되는 것에서 넘어서 자라가야 함인데 이것이 개신교에서 굉장히 약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온 우주의 교회와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는 개념이 약하며 그것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에 비해서 가톨릭은 이것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의 몸이라는 생각을 강조해야 하는데 영적인 측면에서 강조하는 대신 하나의 기구와 눈에 보이는 구조로서의 일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힘이 굉장합니다.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명동성당이 거의 성지와 같았습니다. 공권력이 못 쳐들어갔습니다. 왜 입니까? 그 당시 전두환 정권이나 권력자들이 양심이 있는 자들이었습니까? 어제 김상중씨가 진행하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본 것처럼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던 정권이었는데, 왜 못 쳐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왜 들어갈 수 없었을까요? 왜냐하면 상황을 파악한 교황청의 지위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미에 있는 국가들은 대부분 가톨릭 국가입니다. 만약 공권력이 성당에 진입하면 단교합니다. 국제사회에서 단교는 치명적입니다. 남미 국가들이 단교하겠다고 하면 먹고사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나라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온 세계에 있는 가톨릭의 공분을 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힘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불교에서도 세계 불교를 전체로 묶어서 법황청을 만들려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만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무튼 양쪽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올바른 것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강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현상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그 사랑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혼인을 함으로써 교회에 부어집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그 몸에 붙어 있음으로써 그것을 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교황이나 사도 베드로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모든 사랑이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 있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유기체적 연합 -유기체적 생명의 연합, 유기체적 통치의 연합, 유기체적 섬김의 연합- 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서 가야 합니다. 후에 구역장 되신 분들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꼭 읽으십시오. 이 책은 필독서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이것에 대해 공과를 해야 되겠다 생각합니다. 그러한 교리를 따라 이것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접붙여졌습니다. 접붙여진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 연합을 통해서 실제로 우리에게 부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의 자원입니다. 그 자원을 가지고 우리들이 이길 수 없는 시련을 이기고 극복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문제 1) 교회는 우주적인 완성을 바라보며 점점 더 확장되며 성숙을 이룹니다. 교회의 확장과 성숙이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교회의 확장은 그야말로 외향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확장은 ‘사랑의 확장’(extentio caritas)입니다. 사람이 늘어나고 건물이 늘어나고 기구가 팽창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것들을 사랑하다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것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의 확장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단순한 수적인 부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참된 신자가 증대하는 것이 참된 부흥이며,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의해 이 접붙임이 실질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이 접붙임이 떨어지는 법은 없지만 이 접붙임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체험해야 하며 그 속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늘어나서 확장되는 것을 가리켜서 진정한 교회의 확장이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입니다. 왜 입니까? 세상에서 방황하던 죽은 영혼이 예수께 접붙여져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게 되었으니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예수께 접붙여졌다고 하는 것은 양면성을 가집니다. 한편으로 보면, 다시 말해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던 삶으로 보면 아주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렇지만 반대편으로 보면, 곧 모든 구원이 완성된 영화의 상태에서 보면 아직까지도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회심하고 예수께 접붙여져 예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변질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남편도 좋았다 나빴다가 하는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림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어진 자의 마음을 회색으로 칠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묶여 있습니다. 괴롭고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한 이 사람에게 다시 사랑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마지막에 어떤 사람들은 많이, 또 어떤 사람들은 매우 못 미치게, 또 어떤 사람들은 불신자와 비슷한 상태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 모든 성화를 완성시키십니다. 그 다음에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결국 교회가 성숙해진다고 하는 개념은 개인의 성숙의 총합입니다. 언제나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문제는 오늘은 이 사람이 나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까 이 사람이 다시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과거의 시점에서 볼 때에는 나쁜 자였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금 나빠졌습니다. 그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나쁜 자입니다. 이런 일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영적 상태가 좋은 신자들의) 숫자가 비교적 적은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그 숫자가 아주 많은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 교회의 성숙을 좌우합니다. 신자가 실족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 내 미끄러지는 사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나는데 교회가 사람들이 조금씩 미끄러져도 다시 붙들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혹은 일으켜 세워주는 일을 거절하고 미끄러진 채 엎드려져 있겠다고 하는 못된 인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숫자가 매우 적으면 그 교회는 아직까지는 건강한 편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이 아주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 완전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완전한 교회를 찾고 싶다고 하니까, “그런 교회는 없겠지만 찾으면 가지 마십시오. 당신이 가면 바로 불완전해 집니다.” 우리 모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몸의 상태가 아주 건강하고 좋으면 등산을 하다가 무릎을 확 긁혀서 피가 나더라도 쓱 닦아서 소독만 해주면 그 다음 날 되면 아뭅니다. 그런데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진물이 나고 문제가 생겨 파상풍으로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몸 자체가 건강하면 미끄러지는 신자의 수가 적고, 교회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미리 가르쳐주고 예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갱년기를 지났고, 어떤 분들은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갱년기에 대해서 집중적인 공부를 해야 합니다. 다 알면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데 모르면 어마어마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의 뿌리까지 흔들리기도 합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선교사 부인이 죽어도 나와 상담하겠다고 해서 왜 그런가 만나 봤더니 사연인 즉 20살에 선교에 헌신을 하였고 지금까지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불타게 달려왔는데 최근에는 하나님이 왜 지옥을 만들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셨는지, 저 사람을 구원하시려면 하고 말려면 말지 왜 우리를 이렇게 고달프게 뛰어다니게 만드시는지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굉장히 타락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모님은 타락하지 않으셨고요.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내 주위 목회자 한분이 저의 깊이에 감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깊이에 감탄한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영적으로 분석하면서 ‘죄의 은혜의 지배’와 연결시켜 설명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고 말하니까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제 2-1) 교회의 성숙은 신자의 영적 성장을 말합니다. 지식과 판단에서의 성숙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나옵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의 영적인 성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반숙이 있습니다. 반만 성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숙되면 곤란합니다. 군산으로 집회를 갔습니다. 그때는 열린서점에서 책을 가져가 열심히 보급하던 때입니다. 거기에 유명한 횟집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구운) 꽁치가 나오길래 젓가락으로 찔렀더니 피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반만 익었습니다. (먹지 못하는) 반숙이잖습니까?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하는 것은 많은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해 있다는 뜻입니다. 성장 속도가 빠르거나 더딜 수는 있지만 성장의 동력을 교회가 계속 유지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어차피 미끄러지는 사람은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장 동력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영적 성숙을 이야기할 때에 그 판단 기준은 첫째, 지식의 판단입니다. 지식이 어떻게 영적 성숙을 가져 오는가 살펴봅시다. 그것은 먼저 아는 것이고, 그리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는 것일까요?) 구체적인 성경의 내용과 교리를 습득해야 하고, 인생관과 세계의 변화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구역장들도 이렇게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읽혀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최소한 한 달에 한권 정도는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책을 추천하였는데 굉장히 좋은 책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대해서 그렇게 정확하고도 쉽게 쓴 책이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책을 통해서 보십시오. 저를 이해하려면 아브라함 카이퍼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책들을 추천도서로 하고, 구역장들에게는 과제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구역장을 3년만 하면 눈이 확 열리게 책을 읽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는 일입니다.
엊그제 어느 집사님을 심방하였습니다.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ESV 성경을 사지 않은 분 손들어 보십시오. 산 사람들 손들어 보십시오. 높이 들어 보십시오. 그 다음에 한번 읽은 분만 가만히 있고 나머지는 손 내리십시오. 없지 않습니까? 그 집사님은 한번 읽는데 2년 4개월 걸렸답니다. 너무너무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경을 10장 읽었으면 ESV성경으로 5장을 읽으십시오. 그 대신 다섯 장을 읽되 밑에 있는 모든 것을 읽으십시오. 그래서 성경을 쭉 읽는 것을 기본적으로 ESV를 사용하여 읽는 것입니다. 한 장을 읽고 밑의 (주해) 내용을 읽으면서 무슨 뜻인가를 이해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성경을 세 번 정도 읽으면 시시한 신학교 나와서 (공부 안하는) 전도사들보다 훨씬 더 정확히 성경을 알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굉장히 인정받습니다.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ESV 성경 김남준 목사 추천’을 찍어 보십시오. 1만 명이 넘게 검색하였습니다. 거기에 보면 ESV 성경이 어떠한 것인지 소개를 하였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스터디 바이블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이것만 유일하게 인정을 합니다. 사서 왜 안 읽습니까? 출판사 도와주려고 산 것 아니지 않습니까? 앉아서 성경 읽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다섯 장, 밑의 각주 다섯 장, 이런 식으로 쭉 읽으며 한번 완독을 하고나면 커다란 주석의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둘째 기준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확신의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말하자면 일치를 이루며 전 교회적인 성숙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온전한 성도가 되어 가면 교회를 온전케 세운 봉사로서 그리스도께 봉헌되는 것입니다. 나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와 자기 자신에게 동시에 잘못하는 것입니다.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문제 2-2) 인격적인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 인격적인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의 인격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도덕(道德)을 중국어 발음으로 ‘따우더’라고 합니다. ‘따우’(道)는 객관적으로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입니다. ‘더’(德)는 사람이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하고, 자신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는 힘입니다. ‘덕’이라는 것 자체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 봅니다. 우리가 흔히 그 사람에게 덕이 있다고 이야기 할 때 그것은 영혼의 힘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강합니다. 진리를 딱 깨달으면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려고 엄청난 힘으로 합치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덕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진리를 알면 알수록 튕겨 나가려 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덕입니다.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힘입니다. 튕겨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합치 시키면서 이 사람의 성품과 모든 생각과 품성이 이 진리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성숙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렇게 완전히 합치된 본을 누가 보여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에 합치되면 합치될수록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 3) 신자의 영적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것은 여러분이 구역장 쯤 되었으면 다 말해주지 않아도, 다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머릿속에 개념을 넣고 있어야 합니다. 설교든지 성경공부든지 하나를 가르쳐준다고 하면 아홉은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빙산처럼 말입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전에 다시『신나』로 가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배웠기 때문에 잘 읽혀질 것입니다. 이것을 넣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또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갈 능력이 많고, 어떤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갈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반듯하게 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빗나가고 방탕하게 되면 결국 일평생 그것에 운명처럼 매여서 자신이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방탕함에 매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폭력, 성적 타락이나 거짓말, 이러한 것들이 몸에 배여서 하나의 성향이 되어 버리면 누구도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셔야 하고, 매순간 은혜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면 그 과거의 것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미성년자 입장불가, 미성년자 관람불가, 이런 것들을 구분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또 책임질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너무나 많은 것들을 열어놓고 경험하게 되면 인생에 있어서 그릇된 성향을 심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그렇게 제재를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책『이상 국가』에서도 그 필요성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아이들에게 미리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의도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것만큼 그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지만 그 주어진 그 형상을 죄와 타락으로 상실합니다. 그러나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음으로 다시 회복해 나갑니다. 회복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남아있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그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만큼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살아갈 능력이 갖추어집니다.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성령의 충만의 정도에 따라서 그 능력들이 좌우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힘으로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따라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거의 근접하지 않은 것처럼 아주 많이 못 살고, 어떤 신자는 어느 정도 근접하며 사는 등 그런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있는 생명과 힘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도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고 구원 받지도 않았는데도 심정이 바르고 곧으며 도덕적으로 크게 비난 받을 것이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의 생각 속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교육을 받았습니다. 예전의 우리들의 선비들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무릎을 꿇고 정자세를 하여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동문선습(童蒙先習), 천자문(千字文), 예기(禮記),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면 그것은 성령의 일반적인 은총의 역사로 봐야 합니다. 올바른 양심의 빛대로 따라가 살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인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지,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면서 살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을 뵈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깊어지고 지식이 깊어지면서 이제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항상 염두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설교 속에서 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고 아름답다. 이 내용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창조되었으나 타락해 버렸다로 끝나는 세계관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였으나 타락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절망적으로 망가졌고 이제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 외에는 선한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것을 끊고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은 이렇습니다. ‘타락하였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해되십니까? ‘타락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으며, 자연의 세계도 파괴되어 비참하다. 그러나 그 모든 비참한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이 안에서 구속의 희망들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자원으로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4) 본문에서 신자의 영적 성장을 위해 제시하는 두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무엇입니까? “오직 참된 것을 하여”, 그 다음에 “사랑 안에서 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나옵니다. ‘참된’이라는 헬라어는 ‘알레도스’(ἀληθινός)인데 ‘진리’라는 뜻을 가진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에서 왔습니다. ‘참되다’라고 하는 것은 좀 전에 이야기 하였듯이 ‘진리에 부합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삶은 신문에 떠들썩하게 선행을 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확실하게 알고 있고 거기에 삶이 부합된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나는 진리에 완전히 부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 부합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쩔래?”라고 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나는 부합되지 못했다. 너는 부합되었니? 잘났다.” 이렇게 해도 안 됩니다. “아, 맞아. 거기에 부합해야 해. 오늘 네 이야기를 듣고 진리를 깨닫고 보니까 나는 정말 멀리 있어. 나도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진리에 부합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깨닫고 후회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그러한 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가페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가 이야기 하는 까리따스입니다. 희랍어 성경에서는 구분하지 않고 다 아가페라고 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람을 보니 지식이 굉장히 많고 책도 많이 읽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도 많은데 왜 그런지 존경스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따뜻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서 영적 성장에 대한 또 다른 두 가지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참된 것을 하여.” 그것은 행하는 것,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리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끊임없이 실험해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못하는 사람은 “귀찮은데 가서 사 먹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요리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자매들은 자기가 안한 요리가 제일 맛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터득하게 되는 것이 요리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것을 행하는데,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행한 그것이 사랑이 됩니다. 사랑의 원인은 바로 은혜입니다.
문제 5)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를 교회의 품으로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 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갓난아이처럼 신자가 잉태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를 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태신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그런 표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전도에 대한 애절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이를 품은 자매들이 얼마나 아이를 절실히 사랑하겠습니까? 임신을 하게 되면 처녀 때는 절대로 안 먹던 것을 태중의 아이를 생각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게 어머니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렇게 합니다. 때가 차서 그 자식이 태어납니다. 태어난 아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먹는 것, 자는 것, 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시기 동안 아이는 그렇게 지냅니다. 전적으로 부모를 다 의지합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기어다니며 돌아다닙니다. 귀여운 짓도 많이 하지만 말썽도 부립니다. 그러면서 유치원에 다닐 때쯤 됩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엿한 숙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성장인 것처럼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있는 교인, 저 시기에 있는 교인, 또 다른 시기에 있는 교인들이 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보면서 “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니?” 혹은 “너는 그렇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기저귀를 차고 똥도 남이 치워줘야 하냐?”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한때 아기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보면서 ‘저 모습이 옛날 나의 모습이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구역장을 잘하면 남편에게는 좋은 아내가 되고, 시댁에는 좋은 며느리가 되고, 친정에는 좋은 자식이 되고, 부모에게는 좋은 아들이 됩니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보면서 그래도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좀 낫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 많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번주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더 성숙해져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2. 참된 생활을 하며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구역장들이 됨으로 성숙의 본을 보이게 하소서
3. 성도들이 새해 말씀 사경회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며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7.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녹취자 : 오희열
제 7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모든 교회와 선교의 많은 문제들은 그 문제점들을 추적해서 들어가다 보면 한 가지 질문으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입니다. 이 질문으로 모아지게 되면서 결국은 올바른 성경적인 신앙을 찾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우리 교회에 영국교인이 출석을 했습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다음에 가족에게 돌아가서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얘기를 했던 가족들이 굉장히 불쾌해 하더랍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제 1)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를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한 2년 전에 여름 수련회에서 다룬 것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두 번째 “왕 같은 제사장”, 그리고 “거룩한 나라”, “소유가 된 백성” 이렇게 나옵니다. 이 “택하신 족속”이라는 표현은 선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모두를 규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성경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정체성이 누구인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인데 왕은 통치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를 서서 죄가 많은 불결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세 번째 “거룩한 나라”, 이것은 구별된 나라입니다. 두 가지 의미라고 가르쳐 드렸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배타적으로 봉헌되었다”는 것입니다. 식당의 한 자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서 다른 사람은 앉지 못하는 것이라고 예를 들었습니다. 오직 그분에게만 봉헌된 나라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도덕적 완전성이 거룩함인데 그 거룩함을 본받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서 자기가 미천함을 깨닫고 도덕적 완전성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네 가지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교회의 본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했고, 그러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연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접붙여 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그 본질이 사회 속에 나타나게 될 때 선택, 사명, 구별, 사랑,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문제 1-1) 택하신 족속(선택):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아셨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모두 같이 읽겠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전 1:2) 성경을 읽을 때 국어 공부를 하듯이 잘 뜯어서 보십시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합니까?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라고 합니까?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는데 그 택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미리 아심을 따라서 택함을 받은 것이니 우연히 일어난 사건, 혹은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선택받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이나 구약성경에서 “안다”라는 것은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그 말이 사용될 때 대부분 “사랑한다”는 말과 통합니다. “내가 너를 안다.” 나쁜 놈을 향해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의 응징을 상징하는 것이 되겠지만 택한 백성에 대해서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알았노니”, “내가 너를 아노니” 하신다면 그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악한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그래서 “안다”는 것은 그런 표현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순종함과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 카이퍼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했습니다. “창조되었으나 타락했다”만 생각하지 말고 “타락했으나 창조되었다”라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비록 타락한 것이 엄청난 사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창조된 사람이고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가지셨던 인류를 향한 선한 계획을 지속하고자 하시고 그것이 바로 구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았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원래 창조하셨던 목적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목표들은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이바지 하도록 정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이나 생각이 그렇게 가지런하게 정리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런 창조의 목적에 근접하게 될 때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양심의 가책이나 불안정한 삶들이 상당히 많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청계사 쪽으로 산책을 하는데 여러 개의 현수막에서 눈길을 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울부짖는 사자 앞에서도 떨지 않는” 이런 비슷한 구절이었는데 그리스도인도 그렇지 않습니까? “믿는 자라도 삼키기 위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가 역사한다고 하는데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담대하게 사는 사람은 무서워서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교 안에도 모든 진리가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면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에서 가르쳐주는 것에는 허위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구원의 길도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길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중요한 사상 하나가 있는데 “알라가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한다.” 그리고 “알라는 자연의 일부나 인간 영혼의 일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초월해 계신 타자이시다.” 이런 사상은 사실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입니다. 세계 어느 종교를 찾아봐도 기독교의 이런 사상에 동의를 하는 종교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그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관과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에 대해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이 이야기 한 것처럼 진리라는 것은 원래 모두 하나님의 진리인데 그 중의 일부를 떼어다가 자기들의 세계관으로 가지고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끼워 맞춘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변호, 변증을 통해서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들이 말하는 그 진리의 자리가 거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빛처럼 살아간다는 의미의 한 부분입니다. (세상의 진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다 배운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1장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 하나님이 계시고 미리 아시고 선택을 하십니다. 그리고 창조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중생, 회심이 이루어지고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한 번에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아시지 않고 이렇게 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식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미리 아셨다”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것은 목표입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택하실 때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현재가 불안정하고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불확실하고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경험합니다. 연약한 지체들, 혹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면서 매일매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그때에도 우리가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아시기 때문이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기뻐하셨고 내가 세상에 창조되기 전에 나를 선택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구속하셔서 때가 되매 나로 예수를 믿게 하시고 주님과 살아오게 하셨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는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나머지 일들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선하신 주님의 손에 그것을 맡기면서 우리의 인생의 미래를 잘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불안하게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아멘. 그래서 늘 연약하면서도, 매일매일 죽음을 직면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 얼마나 감사한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공로 없이 선택을 얻은 우리” 라고 했는데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1: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오늘 오후 시간에 김성구 목사님이 설교하신 것처럼 선택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 우리의 행위,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고 할 때는 그 의미가 ‘쓸데없다,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그 은혜에 대한 기억이 너무 크니 주님을 위해서 살아온 자신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도덕폐기론이나 도덕무시론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면 할수록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실까?’ ‘나를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내 인생을 향한 계획은 무엇일까?’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길일까?’ 이렇게 생각해야만 삶에 안정성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요동치며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뭔가를 잡았다거나 누렸다거나 명예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잃어버리는 때가 오는데 그것 때문에 불행하고 결핍을 느낀다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문제 1-2) 왕 같은 제사장(사명): 이 성경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설명을 듣기 전에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왕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통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사장은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고 나서 이 제사는 (너무나 중차대한 일이었습니다). 심심하다고 해서 뒤뜰에 불을 피우고 짐승을 올려놓으면 그것은 바베큐 파티이지 제사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런 구약의 불편함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신약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배시간이 의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 정확하게 말하면 중재자 입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중보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 개인에 대한 중보자는 제사장이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한 사람밖에 없지만 제사장은 아주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만 1만8천 명 정도 있었다고 어떤 주석가는 이야기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많은 제사장들의 역할은, 누가복음에 보면 번차, 순번이 있어서 돌아가면서 봉사를 하는데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가 있으면 제사장의 중재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제사장이요”라고 할 때 이것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가 계시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세상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유일한 중보자는 그리스도 밖에 없지만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어서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면에서는 우리가 제사장의 역할을 뒤잇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인에게 남아있는 중보자적인 역할이 “기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을 대속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사도운동을 펼치는 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목회자는 사도들이 했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죄도 사하고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 용납되게 해주는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성경적인 견해는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의무가 아니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굉장히 신성한 중재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섬김 기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드리는 기도에 한해서 지칭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 총회에서 중보기도라는 말을 빼기로 결의한 적이 있습니다. 대신 ‘섬김 기도’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중재의 기도, 혹은 섬김기도, 이것은 신학적으로 우리가 제사장의 역할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분은 국가 단위로 제시가 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십니다. 신약과 구약을 압축해서 딱 하나로 데려가면 그 “약속”이라는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 단위로 제시된 것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이방나라들에게 이스라엘이 중재자가 됨으로써 이방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지식과 사랑과 모든 것의 덕을 입음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치되고 이것은 선교대상지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껍질이 깨어지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우리가 모두 연합되어서 거대한 온 세계의 국가를 거룩한 하나의 교회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제사장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신약시대의 교회의 역할은 아까 설명드렸듯이 이 자리에 불신자들이 오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데 “나”라는 이 한 사람이 교회 구성원이니까 “나”는 제사장 나라 속의 한 백성이 되어서 제사장 나라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인생의 커다란 목적의 줄기와 연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잘라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니까 답이 나오질 않는 것입니다. 조금 기도해서 뭔가를 응답받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고 자만하고 그래서 또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나면 괴로워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살려주면 다시 살려주신 의미, 복을 주신 의미, 나에게 평안과 행복과 심지어 성령의 은혜를 주신 목적을 잘 모르니까 또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의미없는 삶이 계속 되풀이되고, 그것을 확대한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시대에 살아가던 삶인 것입니다. 특히 사사 시대에 그러했습니다.
문제 1-3) 거룩한 나라(구별):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거룩’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ἅγιός)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거룩의 객관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과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웠듯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미천한 느낌을 받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와 관련한 거룩의 주관적인 의미는 죄된 행위로부터의 구별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성별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구별입니다. 나의 행동 때문에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정체성은 세상 백성의 정체성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받은 정체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 속에 섞여 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나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전 인류의 한 구성원입니다. 대륙으로 보면 아시아의 한 구성원입니다. 더 작게 보면 대한민국의 한 백성입니다. 더 좁게 보면 경기도 도민, 안양시민, 의왕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서울 시장 후보가 나왔는데 다들 좋은 사람 같지 않아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양시민인 저에게는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괜히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는데 두 정체성이 충돌할 때는 당연히 이 세상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따라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 2:15)”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해주신 목표입니다.
문제 1-4) 소유된 백성(사랑): ‘소유되다’의 의미를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소유되다’는 말의 헬라어는 “페리코이에신”(περιποίησιν)이라는 단어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성경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아서 보시면 참 편리합니다. 한글 개정개역부터 시작해서 NIV, RSV, NIV 2011년, KJV, 그리고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나옵니다. 옛날에 제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책을 한 가방 가지고 다니며 봐야하는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한 20개씩 펴 놓고 보았습니다. 지금은 어플리케이션에서 보면 한 화면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 단어는 처음 나오는 단어가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많이 쓰인 단어입니다. 당시 히브리어를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했는데, 이 헬라어 단어를 원래의 히브리어로 바꾸면 “세굴라”()라는 단어가 됩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보석”입니다. 세 단어로 되어 있는데 “사갈”이라는 단어는 “감추다”라는 뜻입니다. 피동여성분사입니다. “감추어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수치를 감추거나 값진 것을 감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신혼 때인데 도둑이 들었습니다. 섬뜩했습니다. 외출했다가 둘이 집에 들어갔는데 구두 발자국을 보니 온 집안을 돌아다니고 장롱과 서랍을 다 뒤져놓았습니다. 가져갈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양말 한 짝을 집어 들더니, “이건 못 찾았겠지?”하는데 그 양말 속에 금반지 같은 것들을 넣어 두고 묶어서 서랍에 넣어둔 것입니다. 그것을 도둑도 찾지 못했습니다.
감추려고 했던 것은 소중한 것이니까 감추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감추고 싶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너무 소중해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보석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감추고 싶은 것은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지난번에 우리 남성 여러분은 집에 가서 아내에게 무릎을 꿇었습니까? 안 했습니까? 오늘도 하나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반지라도 하나 선물해 주십시오. 그러면 아내들이 매일 그것만 볼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것을 적용해서 아내들에게 이야기하십시오. 남편들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면 늘 남편을 바라볼 것입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별로 웃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유”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값진 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랑입니다.
문제 2) 하나님께서는 어둠에 있던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불러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빛은 무엇이며, 빛 가운데에 거하게 됨으로써 인간이 누리게 되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빛은 물리적인 빛, 윤리적인 빛, 신학적인 빛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사는 것”에서 찾아보시면 나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신학적인 빛입니다.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불러주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선언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빛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신학적인 빛입니다. 신학적인 빛은 반드시 윤리적인 빛을 열매로 맺게 됩니다.
그 다음 문제입니다. 문제 3)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불러주신 것은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덕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그 덕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조금 복잡해 보입니다. 원래의 덕의 개념은 올바를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된 의미입니다. 또 종속적으로 보면 자연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것은 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이 덕입니다. 이것을 “아레떼”(ἀρετή)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속성이 영원 안에 있는데 이것이 시공간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자연, 인간, 교회, 이런 것들과 하나님이 맺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유추하거나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끊임없이 도와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국정농단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참 한심합니다.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가 “정권만 바뀌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하는데 대화 내용이 다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씩 둘씩 껍질이 벗겨지면서 진실이 바깥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그것도 결국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성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시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의 시행방식에 대해서 유추하고 믿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단한 덕의 힘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타락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데도 하나님이 붙잡으신 손을 놓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본받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는 영혼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런 관계를 갖지 못했는데 그 힘으로 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힘이 너무 없으면 하나님과도 관계를 올바르게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주시는데도 하나님을 미워하고 부정합니다. 교회와의 관계도 파괴하고 깨어진 삶을 삽니다. 마지막에 그런 파괴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덕을 선포하는 방법은 언어로 선포하는 방법과 존재로 선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써 ‘진리는 이것이다,’ 또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들, 선교사들, 진리를 변증하는 기독교 학자들과 같은 자들은 굉장히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존재자체로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재의 울림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덕을 입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반드시 그 덕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선포를 언어의 선포와 존재의 선포로 합니다. 존재의 선포는 인격과 삶입니다. 언어의 선포는 사상과 지식입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벧전 1:8)” 이것은 목 메이듯이 감격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릴 뿐만 아니라 각처에 퍼졌는데” 울먹이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그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고 하면서 “정말 훌륭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덕을 선포하는데, 그 유업의 상속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 소망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에 시달리고 죽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우리 육체를 파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기도제목]
1. 민족 명절에 불신 가족을 전도하게 하소서.
2. 명절 예배에 온 가족들에게 큰 은혜를 주소서
3. 구역장(순장)들이 여리고성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받는 본을 보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