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녹취자: 남궁지선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죠? 우리가 팔복에 관하여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과를 나갈 차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지난주에 공부 했는데 이번 주에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우리 본문을 같이 한번 5장 4절을 읽어 볼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다’라는 단어는 ‘팬쑨테스’라는 단어인데요. ‘슬퍼하다’, ‘괴로워하다’라는 동사가 ‘팬데오’입니다. ‘펜데오’의 현재분사, 능동태, 남성 복수입니다. 내적으로 본다면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슬픔이고 바깥쪽으로 본다면 의로운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악한 자들의 세력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죠. 이런 애통을 하는 사람이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말이 별로 없죠? 그런데 이렇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심령이 가난한 것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거지 신세가 된 사람, 파산 선고를 받은 사람, 이런 뜻이죠? 그렇게 심령이 가난하게 된 사람, 그 심령이 비천하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심령이 가난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만을 앙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령한 복을 받을 사람의 상태입니다. 낙심하고 아무데도 의지할 수 없는데 그런 처지에서 좌절해 버리고 절망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요.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소외된 채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자기의 죄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는 그 죄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 때 마땅히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상태와 그렇게 도달하지 못하는 현재 자신의 처지 사이에서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물은 진심의 표시입니다. 배우가 연극을 해도 그 시나리오 속으로 몰입되어 들어가서 이심전심이 되지 않으면 울 수 없습니다. 그게 또 연기의 깊이죠. 그러니까 연기에서 흐르는 눈물이라고 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극중에, 그 현실에 몰입해서 흐르는 눈물이라는 점에서 모든 눈물은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나면,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런 통치를 못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의 불행이 마음에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대로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그래서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합치됩니다. 예전에는 내 눈에서 다른 사람들을 봤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되요?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 안에 이루어질 때 이렇게 행복한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을 보면서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자는 자기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만큼만 다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정의가 이루어진 것만큼 세상에서도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자기 안에는 그런 게 이루어지지도 않으면서 정의와 사랑을 이야기하니까 폭력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의 유명한 히브리서 강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덟 권으로 되어 있는 600페이지짜리 책이니까 히브리서 그 짧은 거를 그렇게 썼으니까 아마 주님 오신 날까지 그렇게 상세하게 히브리서를 쓸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여튼 거기에서 히브리서 5장 7절 “육체에 계실 때에 그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하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주님의 통곡은 비록 복음서 안에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자신도 짊어져야 했던 우리 인간 본성의 연약함들 중 하나를 반영한 것이었다. 주께서 우심이라. 주님은 당신의 슬픔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 때 크나큰 고통, 갈등과 슬픔 속에 계셨으니 이는 그것들이 죽음에 이르는 슬픔이 되기까지 그의 영혼에 이르기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께 매달리실 때 기도와 함께 눈물을 쏟으셨다고 언급된 바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의 넓이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땅을 차지하는 하나님의 나라였는데 신약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하나님의 통치가 한두 사람의 마음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땅과 세상에 가득히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과 영국, 한국과 일본으로 나누어지는 게 무슨 상관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나라는 서로 달라도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의 한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는 그것이 바로 애통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죠?
그 다음에 그렇게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제 신약 성경을 전체를 놓고 볼 때 성부 성자 성령의 다른 세 위격이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엇을 전달해 주는 지를 존 오웬 목사님은 이렇게 도표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부를 통해 사랑을 받게 하시고 성자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위로를 주신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은혜와 위로가 완전히 다른 것이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지 않겠어요? 왜냐면 은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데 위로가 넘친다고요?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은혜를 못 받는 데 위로가 있다고요? 위로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은혜인걸요?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지만 한 하나님이신 것처럼 사랑과 은혜는 다르지만 성부의 사랑이 성자의 은혜를 통해 주어지고, 성령의 위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느낄 때, 그때 우리는 성부와 교제하면서 성자와 성령의 은혜와 위로를 함께 경험하고 은혜를 많이 받을 때, 성자와 교제하면서 성부와 성령과도 교제하는 것이고. 위로를 충만하게 받을 때, 성령 충만합니다. 그 성령의 위로 안에서 성자와 함께 교재하고 성부와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된 이유는 그렇게 애통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위로를 해주신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위로받는 방식이 뭐냐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한다는 단어 ‘타라칼레오’라는 단어가 ‘옆에서 부른다’ 이런 뜻이입니다. 어떻게요? ‘아주 가까이에서 불러주신다’. 이런 뜻이죠.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그 자체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는 사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함께 있으므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래하는 사람은 무엇을 줄 때 기쁜 것입니다. 진짜 사랑하면 존재 자체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위로해주십니다. 누구를? 비참한 처지에서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슬프게 우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계심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깊이 읽는 팔복에서 나온 한 구절이 우리의 이런 사상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하루에 두 번씩 펑펑 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울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통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기에 세상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 때문에 울고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애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 과거를 돌아보면요. 하나님을 잘 믿을 때가 행복했죠. 당연히. 그런데 어느 때요? 눈물을 많이 흘렸을 그때가 가장 행복할 때였어요. 그 어떤 눈물이냐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눈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신령한 이유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울었던 때 눈물을 많이 흘렸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할 수 없는데, 은혜의 세계에서는 슬픈 만큼 기쁘고 기쁜 만큼 슬퍼요.
여러해 전에 어느 새가족 환영회에서 간증한 걸 들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자기 가족들이 생각이 납니다. 핏기를 잃은 얼굴을 가진 자신이 알던 사람들이 생각이 납니다. 나는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데 저들은 이 사랑을 모르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픈 것입니다. 그런 슬픔이 있는 마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마음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않으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지 않습니까.
자 문제로 들어갑니다.
1. ‘애통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이나 환경의 결과로 슬픔을 겪는 것을 ‘애통한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모두 포함해서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슬픔을 또한 가리키는 것입니다.
2. 팔복의 사람이 애통하는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애통하는 사람의 첫 번째 이유는 죄 때문이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이웃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3.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그렇게 애통할 때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죠. 어떻게? 회개하는 자를 받아 주심으로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4. 애통하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자기 안에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해서 열심히 섬겨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그렇게 애쓰지 않을 수 없어요. 왜? 사랑 그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5.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
위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하나님이 애통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주심으로 하나님이 무한한 위로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애통은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생명이 되어서 그렇게 애통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감격이 우리에게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은혜로운 생활 하시기를 바라고요. 시시때때로 마음을 쏟아놓으십시오. 하나님께 간절히 쏟아놓으므로 은혜를 받아서 올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