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초치고 연기 뿌리고
“이빨에 식초, 그리고 두 눈에 연기(가 고통스러운 것)같이 게으름뱅이는 그를 보낸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잠 10:26)
녹취자 : 박나리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굉장히 더워졌습니다. 어제는 정말 엄청 덥고 습도가 높았습니다. 이제 월요일부터 방역 조치가 취해져서 대면 예배가 금지된 상황인데, 마음이 우울하지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극복할 새 힘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에 너무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열심히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배우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엊그제 '다시, 게으름' 북콘서트를 한 것 같은데, 벌써 5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5과 '초치고, 연기 뿌리고'를 같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10장 26절이 나옵니다. 제가 직역한 것이지만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빨에 식초, 그리고 두 눈에 연기가 고통스러운 것 같이 게으름뱅이는 그를 보낸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가슴에 와닿는 말입니다. 어떤 내용인지 한 번 봅시다. 주인이 정말 화날 만도 하겠습니다.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하인이 이렇게 낮잠을 자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치 이빨에다가 식초를 붓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잇몸입니다. 여기에다가 식초를 부으니 어떤 심경이 되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연기가 납니다. 연기가 올라가면 눈물이 날 것입니다. 일을 시키는 주인에게 게으름뱅이인 하인을 보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당시 사람들이 늘 경험하던 식초와 연기의 이야기로 실감 나게 풀어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보다 훨씬 더 가슴에 와닿는 비유였을 것입니다.
과연 게으름으로부터 나는 자유롭다고, 나는 절대 게으르지 않았다고, 그 방면에 있어서는 추호의 가책이 없다고,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도 게으르지 않게 살려고 애써온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기 전까지는 부지런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서 게으르게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몰라서 방황했으니까 게으를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까 게으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니까 힘든 것이 싫습니다. 그리고 사실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쉬어야지만 내가 쓰러지지 않고 잘 일할 수 있을텐데 하면서 쉬는 것과 그냥 이 핑계를 대고 내가 할 일을 하지 말자고 하고 쉬는 것 사이의 경계가 너무 애매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책을 받아야 할 때 위로를 받고, 위로를 받아야 할 때 자신을 채찍질하는 잔혹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렸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아십니다. 저희가 일단 마음과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만큼이라도 성실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 엄마, 아빠, 딸의 대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아까 읽은 부분입니다. 이빨에 식초, 그리고 두 눈에 연기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안 나오는데, 연기가 고통스러운 것 같이 게으름뱅이는 그를 보낸 사람들에게 그러하다고 나옵니다. 사역입니다. 요새 '파이어족'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파이어'는 해고당한다는 뜻입니다. 40세 정도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은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했던 돈을 모아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편안하게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파이어족'이라고 합니다. 내가 장사를 하는데 쉬고 싶습니다. 그러면 사업을 접을 수 있습니다. 회사를 다니는데 회사는 접고 내가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사표를 내면 됩니다. 내가 운동선수였는데, 돈도 많이 벌었으니 운동 그만하고 골프장이나 작은 것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골프 사업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그런 직분이 아니라, 사람 자체로 임명받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표를 낼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림에 만들었습니다. 임명장입니다. '김남준, 위 피조물을 사람으로 임명함, 하나님'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것은 사표 불가입니다. 내가 담임목사를 하다가도 목회를 그만두게 되면 더 이상 목사를 안 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도 그만두면 사장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표가 불가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숨쉬고 살아있는 한, 끝까지 고민을 할 문제입니다. 실감 나십니까? 그럼 한 번 봅시다.
축구 선수가 있고 도예공이 있고 배우가 있고 군인이 있습니다. 축구 선수는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면 최고입니다. 그다음에 도예공은 도자기를 잘 만들면 최고입니다. 배우는 연기를 잘하면 됩니다. 군인은 전투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이번에 유로 선수권 대회에서 안타깝게 영국이 졌습니다. 영국과 이탈리아가 붙었는데 승부차기에서 졌습니다. 그러니 영국 사람들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억울하고 분하겠습니까.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난동을 부리면 안 됩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축구 선수는 얼굴 잘생긴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광고를 찍을 때나 도움이 됩니다. 골을 잘 넣으면 훌륭하게 팀이 이길 수 있도록 이바지하면, 축구 선수로서 훌륭한 것입니다. 그래서 축구 선수는 축구 잘하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도예공은 도자기 잘 만드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배우는 연기 잘하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군인은 전투 잘하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문제는 이 사람입니다. 사람만 떼어놓고 사람은 어떨 때 최고가 되겠습니까. 만약 이렇게 묻는다면 어떤 사람을 최고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최고입니까. 예쁜 사람이 최고입니까. 그런데 늙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최고입니까. 그런데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을 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권력을 안 쥐고도 주위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권력을 쥐고도 주위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결국은 어떤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냐고 물을 때 성경으로 보면 크게 둘로 나눠집니다. '됨됨이'와 '삶'입니다. 행복을 좌우하는 사람의 '됨', 그 다음은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 되어서 어떠한 생활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이웃에게 행복을 주고 본인 자신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행복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도 제가 말씀드렸는데 행복을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복'입니다. 그런데 '행'은 우연이라는 뜻입니다. 필연적으로 자기가 노력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자기 밖에 있는 요인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행복은 자기가 만족하느냐 아니냐에만 달린 것이 아니고, 그 이외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이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행복이 되고, 자신과 이웃에게 행복한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 안에서 우리들이 행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2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B는 이상적인 인간의 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입니다. 현실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온전함은 현실이 아닙니다. 똑같이 열심히 노동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B는 이상적인 삶으로 온전한 삶입니다. 당연히 현실은 온전함과 같지 않습니다. 격차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성화 되어 갑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현실은 이상에 맞춰져 갑니다. 그래서 결국 더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더 온전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될 때, 자신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게으름은 이런 것과 정면적으로 배치가 되는 생활의 습관입니다. 게을러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인격에서 온전한 인격으로 갈 수도 없고, 불완전한 생활에서 온전한 생활로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조건 자체가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그때에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니까 이 게으름은 결국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부지런함은 노예를 후려치기 때문에 노예가 무서워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그런 종류의 부지런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라고 우리를 타이르십니다. 그래서 게으르게 사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것보다도 그렇게 게으르게 살 수 있는 정신의 상태, 가치 있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태만해져 있는 상태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그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삶을 살아야 하고, 진리를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기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니까 게으를 시간이 없습니다. 저도 직장에 다닐 때 보면 게으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일을 남에게 미룹니다. 그리고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은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 자꾸 우깁니다. 그럼 예수 믿는 사람으로 대판 싸울 수도 없으니 알았다고 내가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감사가 나오면 이것을 왜 당신이 하고 있느냐고, 담당자가 다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런 사람들이 행복하느냐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진짜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즐거운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일을 안 해서 행복한 것이 얼마나 가는 행복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대화에서 나누어 본 것처럼 우리 자신이 두 가지 잣대를 가지지 맙시다. 다른 사람은 뺑뺑이 돌리고 싶을 정도로 부지런하게 살게 하고 싶고, 나는 나를 부리는 사람에게 눈에 연기와 같고 이빨에 초와 같은 사람이 되어도 너그러운 그런 사람이 되지 맙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소중한 날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합시다.
인생 전체를 모눈종이에 그려봅시다.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1년 남았다면 365개 될 것이고, 10년 남았다면 3650개입니다. 100년이 남았어봐야 36500개 밖에 안 될 것입니다. 절반만 치면 18000개입니다. 얼마 안 됩니다. 그것을 매일 매일 한 칸씩 지우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부지런히 사십시다. 주님을 만났으니 핑계댈 수도 없습니다. 열렬히 살아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여러분 자신도 희망에 찬 하루를 맞이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음을 보겠습니다. 갓난아이로 태어나서 청소년기를 거쳐서 장년기를 거칩니다. 그 다음은 노년기가 되어 갑니다. 육체는 여기에서 정상에 도달하지만 거기서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여기를 성장이라고 부르고, 여기는 노화라고 부릅니다. 쇠퇴합니다. 마지막 결국 돌아가는 것은 이렇게 지팡이를 놓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허무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정신에도 성숙이 있고, 노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신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계속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겉사람은 후퇴해 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했습니다. 영혼과 육체를 대비하고 육신과 정신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늙음이란 무엇인가를 설교할 때, 우리의 육신은 늙어가도 거룩한 열정만큼은 우리 안에서 계속 증진되어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도표를 보십시오. 정신이 아무리 세월이 흘로도 계속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지식과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육체적으로 노쇠해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정신이 이렇게 되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A라는 상황을 육체가 겪습니다. 그것을 정신이 해석하고 의미를 찾아냅니다. 하나님과 연결시킵니다. B라는 상황을 만납니다. 그래서 정신이 겪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킵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과 보람을 발견하면서 삽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봉헌의 삶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렇게 쇠퇴해가지만 거기에서 정신은 더욱 새로워져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쁨과 보람을 느끼니까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나이 들면 아픕니다. 젊은 사람들도 요새 많이 아픕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서 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나마 그래도 고치면서 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 병원에 갈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 경제적 여유를 주심에 감사하면서, 죽지 않고 오늘 하루도 치료하면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공과는 너무 간단해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행복하고 보람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데, 그 의미를 발견하려면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매일 매일의 삶을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주님께 바쳐지는 아주 존귀한 선물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뻔뻔스러운 사람이 아닌 한, 선물을 받으면 때가 되어 선물을 하게 마련입니다. 오늘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선물로 드립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바치는 삶입니다. 살아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가는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눈에 연기와 같고 이빨에 초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견디기 너무 힘든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만 슬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을 피울 때 기뻐할 사람은 우리 중에서도 우리의 육신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슬퍼합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의미를 따라서 보람이 있는 삶을 살지 못하니까 우리의 영혼과 정신에는 그것이 고통이 됩니다.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한순간을 살아도 의미를 가지고 보람있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코로나로 우리 모두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를 가집시다. 하나님이 이제껏 지켜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살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통해 합력하여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읍시다. 마침 이 어려운 때에 저희들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 운동을 합니다. 조용한 시간에 원하는 때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은혜 많이 받으시고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면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