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시험과 욕심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1:14)
녹취자: 김경애
오늘 아침에는 첫눈이 왔다고 합니다. 진눈깨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처음 맞아보는 눈이었습니다. 오늘도 바깥 날씨는 쌀쌀한데 한 두 주 동안 햇볕이 나고 날씨가 좋았더니 단풍이 너무 아름답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이 완전히 끝나고 겨울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떨어지는 낙엽을 한번 밟으시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욕심입니까? 그래서 오늘 시험과 욕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서 1장 14절인데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그랬습니다. 그러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시험’이라는 단어 ‘욕심’이라는 단어 ‘미혹’이라는 단어 이 세 단어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욕심에 끌리면 미혹이 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시험을 받는 것이 결국은 욕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이 전혀 없으면 삶의 활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욕이라고 할 때 그것도 욕심인데 조금 다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이 이렇게 씁니다. 정욕(情慾)이라는 뜻입니다. 心변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食欲일 때는 심이 안 들어갑니다. 의욕이라고 할 때에도 意慾이 아니라 意欲입니다. 그래서 한자에서는 이것 心이 들어가면 죄와 관련이 있는 욕심이고 이것이 안 들어가면 죄와 관련이 없는 욕심입니다. 먹고 싶은 것, 잘살아 보려는 의욕, 일을 잘하려는 의욕, 이런 것들은 욕심이 아닙니다. 없으면 오히려 삶이 무기력해지고 이상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욕망이라는 줄을 타고 걸어가는 곡예사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욕망이라는 밧줄에 두발을 디디면 욕심을 피할 수 없고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줄타기를 하려면 욕심이라는 줄을 밟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아무 의욕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그 욕심이라는 것을 밟는 것이 죄가 되고 싫어서 발을 떼어버리면 떨어집니다. 어디서 읽은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생각인데 인생은 욕망이라는 줄을 탄 곡예사의 곡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욕망에 묻혀도 안 되고 그것이 전혀 없이 인생이라는 길을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문명의 발전 그리고 사회의 발전 이런 모든 것들이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욕망에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신앙은 그 욕망의 옥석을 가리는 것입니다. 욕망이라는 돌멩이에 어느 것이 옥이고 어느 것이 돌인지를 가려내는 것입니다. 돌은 거의 쓸모가 없지만 옥은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라는 것도 결국은 바람직한 의욕은 북돋우고 바람직하지 못한 욕망은 죽이거나 버리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이 올바르게 욕망을 내면 낼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험을 받는 것은’ 할 때에 화면을 보시면 ‘시험을 받는 것은’ 이라고 할 때 이것은 그런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에 보면 두 가지로 따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시련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것은 죄에 빠지는 시험이라고 나누어서 구분하게 됩니다.
그럼 오늘 공과를 보겠습니다. 욕심과 죄가 어떻게 관계가 있느냐 인데 본문에서는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그랬습니다. 이유를 댑니다. 시험을 받는 원인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미혹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혹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迷惑 이것은 길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유혹을 받아서 욕망이 이리저리 이끌림으로써 올바른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것을 미혹이라고 부릅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미혹되기 때문인데 그 미혹하게 하는 수단이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욕심을 당연히 아까 말씀드린 이런 慾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어로 에피쒸미아라고 합니다. 원래의 뜻은 정욕, 탐욕, 욕망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정욕으로도 번역됩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자기가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욕망입니다. 내가 이 모든 우주의 중심에 있고 나의 판단이 가장 최고의 판단이고 다른 판단은 내 아래 굴복해야 하지만 나는 굴복할 리가 없는 그런 최종적인 판단 그래서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조차도 자신의 판단 아래에 두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 욕심 이것을 넓은 의미에서 에피쒸미아 혹은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좁은 의미에서 이야기할 때에는 성적인 욕망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성적인 욕망입니다.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성적인 욕망입니다. 그 욕망이 강해지면 절제를 무너뜨립니다. 절제 안에 갇혀있으면 그 욕망이 있어도 우리를 죄를 짓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젊은 청년들도 보면 이 정욕의 문제를 가지고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편지도 아주 여러 통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아주 단순한 사람과 심지어는 성 중독에 까지 빠진 다양한 사람들의 편지가 오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자신이 성적인 욕심을 느낀다는 자체를 굉장한 가책을 느끼는데 또 이것을 마귀가 사용합니다. 심한 사람은 정신질환까지 옵니다. 그래서 한 청년을 상담하는 가운데 그런 고민을 털어놓는데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대가 그런 욕망을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니라 신체가 건강하다는 증거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뜨거운 물이 그릇에서 부글부글 끊는데 넘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넘치게 되면 누군가 뜨거운 물에 데거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생리적으로 우리에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젊어서는 그런 것도 신앙적으로 보면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젊음도 많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키케로나 세나카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나이가 들면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자유로워지는 대신 늙어서 힘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십자가이고 저것도 십자가입니다. 아무튼 그런 욕망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에피뛰미아 정욕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그런 정욕에 매여서 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인한 자신의 판단을 가장 신뢰하고 자신의 판단이 누구의 판단보다도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판단하면서도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면 거기에 기꺼이 승복하고 양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좀 더 설명을 들어봅시다.
이렇게 될 때에 여기 그림에 보면 한 사람이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버티고 앉아서 스스로 별까지 붙이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성적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진리의 자리에 갖다놓는 것입니다. 진리 그 자체는 그리스어로 보면 진리라는 것은 알레데이아 인데 스스로 밝히 드러나서 의심할 여지없이 자명한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성은 진리를 생각하지 이성이 그 진리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성적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진리와 거의 같은 수준에 놓고 생각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 진리 이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 그 자체도 비틀어서 진리가 아닌 것으로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자신의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욕심이 우리의 지성과 의지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욕심이 크면 클수록 아주 강력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생각을 최종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것으로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보면 한 예를 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과가 있는데 애플 것을 쓰면 애플이 조금 섭섭해 할 것 같으니 이것은 아닌 것 같고 애플은 뭔지 모르지만 죄악 된 기업이라고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 그런데 아담에게 하나님이 범죄 후에 찾아오셔서 네가 정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먹었느냐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아담이 변명을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화법을 잘 들어보면 ①하나님이 주셔서 ②나와 있게 하신 여자 ③그 여자가 내게 줌으로 ④내가 먹었나이다. 순서적으로 볼 때 피해자 코스프레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체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선악과를 먹은 자가 되었습니다. 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먹었나이다.’ 그랬는데 3개의 원인이 앞에 있습니다. ‘줌으로, 있게 하신, 주셔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실인데 그 여자가 내게 주지 않았으면 안 먹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까? 여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 여자는 내가 선택한 여자라기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뒤집어 놓고 보면 하나님이 안주셨으면 그녀는 나와 함께 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가 나와 함께 있지 않았으면 그 나무의 실과의 열매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깔고 이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생각에는 범죄의 제1원인자는 하와이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조성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다음 자신이 책임이 있다면 바로 이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모든 죄를 지은 사람 증거가 드러난 사람들이 회피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물귀신 작전처럼 죄에 대한 책임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서 피해를 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당하고 범죄를 모의한 사람들 사이에는 의리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부도덕한 사람들이 저지른 부도덕한 일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사람들이 도덕적이지 않은 이유에서 결탁한 경우에는 지켜야할 의리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리(義理)라는 말을 보십시오. 올바른 이치입니다. 그것을 지켜야할 것이 악인의 결탁 속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 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이것은 아담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지 보겠습니다. ‘아담 안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책임이 없었더라면 아담도 죽지 않았을 것이고 아담과 행위언약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아담이 죄의 원흉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명쾌하게 범죄의 제1 원인자가 아담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사실 아담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 뜻을 받들어서 그 계명을 준수했어야 맞습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핑계와 피해자 코스프레 속에서 자기 죄를 모면해보려고 하는데 그 자체가 죄인의 심리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할 때가 되면 뒷걸음질 치다가 담벼락까지 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면 씩씩함이 생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긍정적인 뜻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독립심입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들고 은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집니다. 나쁜 의미의 씩씩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씩씩함의 증거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살면서도 거기서 자기가 단절된 고립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은혜의 힘이 소진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소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멀어지자마자 은혜의 힘이 갑자기 소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비유를 들자면 존 오웬 목사님이 그런 비유를 드는데 예를 들어서 옛날에 호롱불이나 촛불을 쓰는데 그러면 불을 켰다가 불을 끕니다. 무엇을 찾을 일이 있어서 다시 불을 붙이면 금방 붙습니다. 그런데 겨울에 어제 저녁에 끄고 차가운 날씨에 등불을 쓰지 않다가 다시 켜려고 하면 성냥을 켜서 한참을 심지에 대고 문질러야 겨우 불이 붙습니다. 자연적으로 나오는 기름에서도 가스가 나오는데 가스가 차있고 유증기가 있고 심지도 닿아있으니 금방 붙는 것입니다. 발화점이 그만큼 가까이 와있으니까 에너지가 덜 들어가도 불이 붙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의식에서 멀어졌어도 그 은혜의 힘이 즉시 소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결국 멀어진 것이 오래되면서 은혜의 힘 자체가 소진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표를 보면 부주의와 죄가 겹쳐있는 것입니다. 부주의는 자꾸 길을 잃게 만듭니다. 길을 잃습니다. 죄는 그 길을 걸어가는 인생의 무게를 더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 임재의식에서 멀어지니까 판단력이 떨어지고 지성과 관련됩니다. 은혜의 힘이 소진되니까 이것은 의지와 관련이 됩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혹시 조금 안다고 하더라고 그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알겠는데 도저히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점점 더 욕심에 이끌리게 됩니다.
여기에 보면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4마리의 고기가 왔다 갔다 합니다. 책에 썼는데 캐나다에 말씀을 전하러 갔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낚시를 좋아하느냐고 해서 낚시는 고기를 낚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낚싯대를 들고 개울에 나가본 적은 있는데 한 번도 잡은 적이 없다고 하니까 오늘 기록을 깨주겠다고 하면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름도 잊어버리지 않는데 에드먼턴에 이든 우리말로 하면 에덴이라는 호수가 있는데 거기에 봉고를 세우고 뒤 트렁크에서 튜브를 꺼냈습니다. 잠깐 동안 바람을 넣으니 훌륭한 보트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배터리를 달고 가니까 모터보트가 되었습니다. 모터보트까지는 아니지만 사르르 가는 배가 되었습니다.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미리 준비해온 미끼를 친절하게 매달아 주시면서 한번 던져보라고 했습니다. 던지자마자 3분도 되지 않고 꽉 무는 것입니다. 고기가 그렇게 힘이 센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 1미터짜리가 잡힌 줄 알았습니다. 열심히 잡아당겨서 나왔는데 그저 30센티 정도 되는 송어가 잡혔습니다. 30분 안에 세 마리를 잡았습니다. 모두 다 놔주었습니다. 아주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물고기가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미끼를 던져도 그냥 쳐다보지도 않고 획 지나가는 물고기가 있고, 놀리듯이 그것을 툭 치고 지나가는 물고기가 있고, 덥석 물어버리는 물고기가 있고, 가는 것 같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빙빙 도는 물고기가 있답니다. 앞의 두 마리 물고기는 절대 못 잡는 물고기이고 뒤의 두 마리는 절대로 못 잡을 리가 없는 물고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사는 이야기를 한참 했습니다.
여기 그리스성경에 보면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끌려’라고 했습니다. ‘엑셀코’ 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미혹된다는 단어는 ‘델레아조’입니다. 이것은 기쁘다는 것과 관련이 되는데 ‘델로’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 다 전문적인 낚시꾼은 아니지만 어느 주석을 보니까 전부 낚시꾼들이 사용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낚시와 관련되어서 사용하는 단어라고 해설을 했습니다. 결국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사람이 죄라는 미끼를 물고 거기에 사로잡히기 전에 먼저 미끼에 이끌리는 것이 있습니다. 고기가 미끼를 향해 다가옵니다. 먹고 싶은 마음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냄새 때문에 이끌려서 다가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서 욕망이 커지게 되니까 판단력이 흐려지게 됩니다. 덥석 물게 되었을 때 물기 직전까지만 해도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고 또 약은 물고기들은 미끼만 떼어먹고 갑니다. 이 부분을 확대하자면 이렇게 낚싯바늘이 있고 미끼가 매달려 있습니다. 고기가 와서 요것만 뜯어먹고 갑니다. 그러면 안 걸립니다. 욕망이 커지면 이것을 다 먹고 싶어서 덥석 물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자기가 입을 벌려 미끼를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게 코가 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묘사 자체가 너무 생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하와에게로 갑니다. 유혹이 먼저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먹지 말라 하시더냐?’ 유혹을 했는데 미혹된 것입니다. 유혹을 받으면서 나무를 보니까 예전의 그 나무 열매가 아닙니다. 뭐냐 하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도 한 이것이 다 심리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욕망이 지배하니까 욕망이 커지니까 예전에는 안 먹어도 되었는데 진짜 먹을 만하고 진짜 보기 좋고 진짜 탐스러운 나무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의 증대입니다. 그 다음에 변경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먹지 말라 하시더냐?’ 오히려 사단은 덧붙입니다. 모든 나무? 아닙니다. 동산에서 나오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그것을 변경하는 것입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추가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한 것까지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강화하고 과장을 해서 더 높은 정도로 했습니다.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으니 그러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과장된 해석이기는 하지만 안전장치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죽을까 하노라’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모트테무트’ 라고 되어 있습니다. 화자의 의지가 담겨있는 화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You shall die. 그러면 뒤에 있는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 내가 너를 죽게 만들 것이라는 화자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듯이 히브리어에서 똑같은 화법입니다. 그러니까 화자가 말하는 주체가 반드시 그 사람을 죽게 하겠다는 결의 내지는 의지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을 강조하는 화법입니다. 인간은 의욕을 해도 안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필연의 부정이라고 하는데 부정이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To 부정사 할 때의 부정을 이야기합니다. 필연의 부정사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죽을까 하노라’ 라고 말하면서 이런 것을 과장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도 똑같이 나와 있습니다. 전혀 번역의 문제가 없습니다.
결국 한 사람이 한 번에 죄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유혹이 있고 미혹이 되고 마음속에서 논리적으로 변경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의지가 지성의 판단에 오류를 갖게 함으로써 승낙을 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로 무엇을 잘못할 때 항상 합리화의 과정이 있습니다. 공무원이 뇌물을 받을 때도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데 반드시 합리와의 과정을 거칩니다. ‘선배들도 다 그랬는데 뭐’ LH공사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선배들도 다 그렇게 했는데…….’ ‘관행인데…….’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이 해먹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렇듯 합리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지성의 승인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예방하는 길이 무엇입니다. 그것이 경건생활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시험에 빠져서 비참한 원인이 되게 하는 것이 소원이고 하나님은 시험을 이겨서 더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결국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믿음으로 이기고 나면 다음에는 시험이 안 됩니다. 그것을 이기고 나면 다음에는 그 시험을 이기기가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죄의 교묘한 방법이 드러났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경건생활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생활의 형식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제일 중요하고 기도와 말씀, 말씀에 대한 깨달음, 실천 이런 것들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의 정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데 까지 만이라도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5분밖에 기도할 수 없으면 내가 매일 5분은 기도하겠습니다. 최소한 성경 1장을 읽겠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거기에 마음을 쏟으면 경건한 욕심이 더 많이 생겨나면서 더 많이 기도하고 싶어지고 더 많이 말씀을 깨닫고 싶어집니다.
문제1) 욕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쒸미아의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좁은 의미는 쾌락을 추구하는 감각적인 욕구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주 좁은 의미는 성적인 욕망입니다. 그릇된 성적욕망입니다. 넓은 의에서는 자기를 주인 삼은 것입니다.
문제2) 사람이 욕심에 이끌리는 이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임재 의식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은혜의 힘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문제3) 죄에 빠질 때 정서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를 통해 말해봅시다.
답)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마음 안에서 아주 수많은 싸움이 일어나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되면서 유혹이 있고 미혹이 있고 변경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4)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경건생활은 무엇이며 시험의 때일수록 경건생활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좁은 의미의 경건생활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그 영적인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입니다.
경건생활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경건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삶이기 때문에 이것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 공부는 어떠셨습니까? 오늘 여러분 40분 동안 성경공부를 하셨는데 오늘 공부를 잘 복습하시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도록 김치를 잘 버무려서 숙성시키듯이 이 진리가 여러분 속에 깊이 숙성되어서 죄를 이기고 시험을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