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아내, 그리고 신앙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벧전 3:1-7)
I. 본문해설
사도 베드로는 한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임박한 핍박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자신이 행한 것 같은 실패를 다시는 행하지 않도록 격려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를 시작하자마자 소망에 관한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핍박을 이기고 고난을 견딜 장엄한 미래의 소망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갈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정의 문제로 눈을 돌리며 남편과 아내에 대한 도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삶
먼저 남편과 아내의 문제를 교훈하기에 앞서 앞부분에서 사도는 꽤 길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죄도 없으시고 거짓도 없으신 그분이 욕을 당하실 때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실 때에 그들을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며 우리를 위해 나무에 매달려 죽으시고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부의 문제를 부부의 문제로 국한해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을 보면 부부의 문제는 부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관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각자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를 토대로 하여 세워지는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삶에 대해서 앞부분에서 상세하게 기록을 하면서 바로 남편과 아내에 대한 교훈을 받는 성도들이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던 무리들이었는데,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이에게 돌아왔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III. 아내들을 향한 명령
A. 남편에게 순종함
그러면서 그는 아내들을 향해 먼저 명령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거짓도 없으셨지만,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모습을 본받아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제일 먼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기에 결혼한 자매들 가운데 “제 남편은 나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격적으로도 매우 훌륭하고, 신앙적으로도 나의 스승이고 모든 면에 있어서 내가 본받을만한 분이며, 밤에 자다가 깨어도 나 같은 무지랭이가 어떻게 이런 훌륭한 남성을 만나 아내가 되었을까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황홀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편들 생각에는 꽤 될 것 같지만 거의 없습니다. 세월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압박을 받으면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무슨 커다란 죄나 된 것처럼 무시를 당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통용되던 말이 남존여비입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이것입니다. 세월은 참 공평한지 이제는 시대가 돌아서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어디가서 하면 사람들에게 면박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남존여비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남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자의 비위를 맞춰야 된다. 이게 남존여비입니다. 이런 농담을 할 때 아무 남자도 웃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런 시대에 아내에게 남편을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순종은 남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장점이나 사회적 지위, 그가 가지고 있는 완력이나 금전적인 능력 때문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깨닫는 데서 오는 순종입니다.
인간이 마음속으로 쏟아내는 이성 없는 정념은 질서가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운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돌아간 후에는 즉각적으로 질서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고, 그 질서에 대한 감각은 우리에게 의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인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정에서 남편으로서 내가 아내에게, 아내로서 남편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부모로서 자녀에게 어찌 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주 정확한 인식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여자들이 많이 있었고, 교회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남편이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하고 무엇으로 보든지 자기는 너무 하찮은 존재여서 복종하고 사는 것만 해도 언감생심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이라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오늘 3장 1절에서 상정하는 남편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 혹은 불신자까지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내리는 판단이나 생각, 그의 언행이나 행실, 가정에 대한 태도나 많은 것들은 아내가 깊이 존경하고 경외하기보다는 오히려 설득되지 않고 복종되지 않는 요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입니다. ‘말’, 희랍어 성경에 보면 ‘말없이’라고 나옵니다. “말없이 아내의 행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내의 행실의 공로가 남편에게 전달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말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그 무엇을 남편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자신의 행실로 말미암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순결과 경외의 모본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반항적이고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던 야생마 같은 아내가 어떻게 나에게 복종하게 되었을까? 아내가 나를 존경할 만큼 나는 변화되지 않았는데 아내가 나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만들어 주는 요인입니다.
Β. 감화시키는 단장
그러면서 사도는 남편을 그렇게 감화시키는 단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걱정을 좀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안 꾸미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이 설교를 듣고 용기를 얻어서 더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균형을 잡아서 가르칠까?’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적절하게 자기 몸을 가꾸는 것은 의무입니다. 자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남들도 같이 사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에게 나일뿐이지만 남에게는 풍경이 됩니다. 내 주위에 풍경이 안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심방을 가보면 집이 어지러워서 가르쳐준 질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본인은 검소하다고 자부하는데 검소한 게 아니라 게으르기 때문에 머리를 산발하고 옷도 엉망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여기에 중점을 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점을 두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자기를 기본적으로 가꿔서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특히 화요일에 여리고 전도를 나가고 심방을 갈 때는 깔끔하게 입고 오십시오. 전도하러 갔는데 얼굴에는 다크 서클이 지고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해서 가면 전도도 안 됩니다.
한 10여 년 전에 교회의 행정 직원들이 수련회를 갔습니다. 밤 늦게 도착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새벽 예배로 모였습니다. 새벽에 세수까지는 할 수 있었는데 화장할 시간은 안 되지 않습니까? 교회에 출근할 때는 예쁘게 화장하고 옷도 챙겨 입고 오는데 추리닝 바람에 화장을 다 지운 민얼굴로 나왔는데 옆에 앉아있던 형제가 예배드리기 전에 제 귀에 대고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왜?” “저 앞에 앉아있는 아줌마들 누구입니다? 전혀 얼굴을 못 알아보겠습니다.” 나도 눈을 들어보니까 정말 못 알아보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괜찮지만 나이가 들면 조금씩 가꾸어야 합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품위를 잃지 않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를 붙이고 비싼 돈을 들여서 꾸미고, 금은보석을 차고, 예쁜 옷을 입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움으로서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통해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너희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단장이 있단다. 그것은 온유한 마음과 고요한 정신이란다.”
그러면 ‘온유’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팔복에서 온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인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부동산을 해서 돈을 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감화를 끼쳐서 그들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평의 땅도 칼과 창으로 차지하신 일이 없지만 온유한 인격과 삶의 모본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 보좌에 앉은 왕들조차도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 그의 종이라고 고백을 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모세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구스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그 여자는 흑인이었습니다. 민족주의에 빠졌던 히브리 사람들은 모세를 비난하고 욕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의 동기간인 미리암과 아론조차도 한패가 되어서 그를 욕보였습니다. 그때 그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모세는 비난 받을 때 그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보다 더 뛰어났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온유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두를 품는 부드러움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온유한 마음이 구원받지 못한 남편을 위하여, 혹은 가정을 올바른 질서로 돌리기 위하여 아내가 함양하여야 할 정신과 마음의 단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있는데 고요한 정신입니다. 이것은 우리말 성경에 ‘안정한 심령’이라고 했는데 고요한 정신입니다. 이 고요한 정신은 자신이 양심에 구김이 없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데서 오는 평정입니다. 호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고요하고 맑으면 주변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호수면 위에 어립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물결이 치기 시작하면 아무 그림도 어리지 않습니다. 남성은 본래 개척과 정복에 유리하도록 역동하는 정신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종종 마음의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출렁거리기도 합니다. 이때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가정에서 아내입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평정을 누리게 됩니다. “여보, 오늘 우리도 기분도 그런데 한번 호텔에 가서 비싼 음식을 우아하게 먹어볼까?” 남자의 마음이 출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보, 집에 된장찌개하고 밥통에 밥이 많아.” 이게 고요한 정신입니다. 그러면서 물질생활에서도 기본을 잡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딱딱 맞고 재미있던 사람들이 잘 헤어집니다. “우리 호텔에 가서 밥 먹을까?” “좋지. 와 신난다. 가자.” “어디어디로 가자.” “에이 남자가 쪼잔 하게 그 보다 더 좋은 호텔로 가야지.” 그러고 그 다음에 헌금 서비스를 받으면서 나머지 20일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래 못갑니다. 연애할 때는 굉장히 좋을 것입니다. 연애할 때 잘 안 맞는 사람들이 오래가요. 물질생활에 대해서 예를 들었지만, 물질생활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활에 있어서 여자들이 고요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들뜨기 쉬운 남자들을 통제하여 가정을 안정되게 이끌어가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도 알겠지만 부부싸움을 할 때 고요한 정신을 한쪽만 가지고 있으면 싸움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팔딱 거리고 뛰다가 제풀에 그냥 꺼져버립니다. 그런 고요한 정신을 신앙이 없는 남편을 가진 아내들에게 요구합니다. 그게 바로 단장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를 예쁘게 꾸민 여자는 술집에 더 많고 보석을 휘감은 여자는 강남에 가면 더 많고 예쁜 옷 입은 여자는 잡지에 보면 더 많이 나옵니다. 아내는 그런 것들 가지고 경쟁해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벌써 결혼하고 20년 지났는데 말입니다. 잡지에 나온 사람들은 결혼도 안한 예쁜 여자들인데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남편을 감동시키는 것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온유함입니다. 자신이 이기는 것 같아도 결국은 아내가 그를 품고 너그럽게 대하고 이해하고 받아줌으로써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고요한 정신입니다. 때때로 아내가 결혼 초기부터 기선을 제압해서 이긴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남편이 다 치다꺼리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것들이 몸에 배면 아내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그랬는데 번역이 어렵습니다. 어느 영어 번역에서는 “everlasting ornament”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영원한, 항상 지속해서 존재하는 장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세상 여자들은 머리를 꾸미고, 보석을 치장하고, 예쁜 옷을 입어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려고 하는데 남편을 감화시켜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아름다움은 온유한 마음과 고요한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에게 결핍되기 쉽고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라지지 않는, 쇠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구원을 얻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성인군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남편은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때에 아내는 온유하고 고요한 정신으로 남편의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끌어안고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내에게 이것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대해서 길게 언급한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께서 죄도 없으시고, 거짓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고 그리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아버지께 자기를 부탁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잠잠히 어린 양처럼 참아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던 것처럼, 아내들은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들은 물을 수 있겠죠. 아니, 저 막대 먹은 남편을 위해서, 개념도 없는 남편을 위해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아내가 된 게 죄입니까? 아니요. 아내가 된 게 죄는 아닙니다. 그럼 뭐가 죄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먼저, 더 많이 알았다는 것이 죄입니까? 예, 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했다는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라 빚으로서의 잘못, 빚입니다. 빛. 부채, 누구에게 진 부채, 만약에 남편이 나에게 복종하라 하면 순종 안 해도 돼. 그런데 아내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기뻐하시며 네 남편에게 순종하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의 장점과 존경스러운 어떤 점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주님이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그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을 때에 남편에 대한 정을 느끼지만,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사랑할 뿐 아니라 사랑할 때보다도 자신을 신뢰하고 순종해 줄 때에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우니까 오늘 그렇게 할 때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것을 기억하며 그렇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남편의 모든 요구사항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종과 복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범위 안에서 남편에 대한 순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가슴에 새기십시오. 남편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가 적은 돈 벌이, 높지 않은 지위, 그리고 탁월하지 않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사랑할 뿐 아니라 충분히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그 남편이 여러분의 인격 안에서 순결과 경외의 모본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마음에 있는 그 온유함과 정신에 있는 고요함을 발견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남편 자신의 장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가 지극히 사랑하고 의지하는 주님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 그래서 여러분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 주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아내의 행실을 통하여 남편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Ⅳ. 남편들을 향한 명령
Α. 아내와 동거함
이어서 사도는 남편을 향하여 명령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여겨 귀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아내와 동거하라고 가르칩니다. 동거는 같은 장소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맥락에서 신약까지 모두 살펴 볼 때에 이 동거는 단지 장소적인 공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이 동거는 다름이 아닌 정신적인 연합이 있는 동거를 가리키는 것이고, 사랑의 합치가 있는 동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식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그노시스는 구약으로 가면 선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내와 동거하되 지식을 따르는 동거입니다. 이 지식은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성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 알게 되듯이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그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어떤 지식들을 공유하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지식을 좇아서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며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아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오시고, 그 성령의 임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연합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 되어 그래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아시고, 또 교회는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아시고, 나는 주님을 압니다. 내가 아는 것 중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내가 주님을 향해 모르는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께 모두 드러난바 되었고, 알고 계십니다. 감정 없이 단지 감시자처럼 아시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괴롭고, 눈물 나고, 기쁘고 희열에 가득한 우리의 삶의 희로애락에 주님이 동참하시면서 우리를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또한 주님은 아파하는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시면서 그렇게 아시는 것, 이게 바로 주님과 함께 동거하면서 지식을 따라 주님을 알아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계명을 받고 보면 오늘날 가정을 하숙집처럼 생각하는 남편들, 그리고 모든 정력과 힘은 바깥에다가 다 쏟아놓고 집에 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쉬려고만 하는 이 남편들의 모습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지식을 따라 함께 살아가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아시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함께 알아가며 동거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반드시 바쁘다는 핑계만 대지 말고 시간을 내어 가정에서 함께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가족 간의 일치, 아내와의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힘쓰는 남편들이 되어야 합니다.
Β. 아내에 대한 생각을 바꿈
두 번째는 아내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서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남편의 눈에 아내는 강한 그릇입니다. 애인이었을 적에는 연약했으나 지금은 강해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내가 연약하고 예쁜 애인적 모습을 유지하기 보다는 무쇠 팔, 무쇠 다리, 로봇 주먹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언제나 자기 없어도 씩씩하다고 여기죠. 그런 생각을 바꾸라고 오늘 성도인 남편들에 사도는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인이었을 적에는 목소리도 아주 갸냘퍼요. 아내가 된 다음에는 제발 볼륨 좀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평범하게 얘기하는데도 고막이 터지는 것처럼 우렁차요. 그거 전부 아내가 혼자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환경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요. 나이가 많이 드셨어도 아이가 없는 집안의 아내는 목소리가 여전히 고와요. 그렇게 소리 지를 일이 없습니다. 목소리가 좀 나습니다. 그런데 이 시커먼 사내놈들 둘, 셋쯤 기르고 보면 힘이 장사가 되고, 목소리는 우렁찬 장수의 함성을 변합니다. 왜? 속삭이는 이야기로는 이 아이들이 복종을 안 하기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보니까 목청이 트여서 그렇게 거칠고 큰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리야리하고 약해 보이던 자매들도 아이 둘만 낳으면 그렇게 팔에 근력이 붙고 튼튼해 질 수가 없습니다. 영아부 전도사 하던 여성 교역자 처녀였는데 언제 그래요. “목사님.” “그래 요즘 사역 잘해?” 그러니까 “목사님 제가 얼마나 영아부 사역 잘하고 있는지 아시죠?” “내가 어떻게 나야?” “이걸 보세요. 1년만 하고 나면 알통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건 일주일에 한번인데 엄마는 그 녀석들을 하루에도 몇 십번씩 들었다 놨다 목욕 씻기고 돌보면서 그들과 씨름하면서 무쇠 팔, 무쇠 다리가 됐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비난 받을만한 일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내가 강해졌으면 아이들을 생존시키고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환경에 의해서 강해진 거지 원래 마음은 연약한 그릇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거를 그 입장에서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이들을 다스리면서 고함치는 장수와 같은 아내의 목소리, 아이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살림살이를 하면서 그렇게 튼튼해지는 어떤 때는 자기보다 훨씬 더 그 품에 기대고 싶을 정도로 우람한 아내의 팔과 다리를 보면서도 그 속에서도 연약한 그릇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이란 말입니다.
이 편지가 기록될 당시 로마에서 흔히 쓰이던 그릇은 크게 네 종류의 재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제일 좋은 거는 돈 많은 사람들이 쓰던 거는 뭐냐 하면 철로 만든 그릇입니다. 철기 그릇, 두 번째는 뭐죠? 사실 무른 돌이 많았기 때문에 무른 돌을 사용을 해서 우리나라에는 사실 무른 돌이 별로 없습니다. 무른 돌을 사용해서 깎아가지고 석기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뭐죠? 이제 찰흙 같은 것을 빚어서 만든 도기. 그리고 네 번째가 나무로 만든 목기 그릇들입니다. 그런데 철기나 목기 같은 것들은 잘 깨지지 않죠. 특히 철기 같은 것들은 웬만큼 집어 던져도 깨지지 않죠.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재료로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난 잘 모르는데. 뭐죠? 이렇게 떨어뜨려도 잘 안 깨지는 거 있죠. 그릇. 코닝? 코렐. 그런데 한 1m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유리그릇하고 똑같은데 안 깨져요. 좀 비싸죠. 그런데 안 깨져요. 그런 그릇부터 시작을 해서 뭐 많죠. 특히 뭐 바가지 같은 거, 그런 것들은 뭐, 깔고 앉고, 발로 차고, 집어 던지고 해도 안 깨지죠. 사람들이 애인이었을 때에는 유리그릇처럼 다루죠. 추우면 어떻게 하나? 괜찮습니다. 추우면 어떡하긴 뭘 괜찮습니다. 뭘 먹었을까? 알아서 챙겨 먹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염려를 해요. 그런데 아내가 된 다음에는 아내를 플라스틱 바가지처럼 생각합니다. 그러지 말아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한 20년 전에 누가 선물을 했습니다. 여섯 개로 된 잔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은지도 몰랐는데 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포도주를 이렇게 따를 수 있는 잔이었습니다. 큰 잔은 아니고 조그만데 그래서 이제 가끔 생일 때 포도주스도 따라 먹고, 어떤 때에는 또 몸이 피곤하고 그러면 포도주도 한잔 따라 먹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딪쳐 보니까 건배할 때 탁하고 하니까 아주 예쁜 소리가 나는데 나는 여태까지 유리그릇 중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그릇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좋은 그릇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여섯 개 세트 중 4개를 깨먹은 다음이었습니다. 두 개 남았을 때 인제 이게 정말 좋은 거라는 거를 알았는데 설거지 하다가 둘 다 다 깼습니다. 그런데 알고 그 가치를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아주 조심해서 다루는 것입니다. 아내를 그렇게 다루라고 오늘 사도는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베드로는 바울과 달리 결혼 생활을 실제로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 훨씬 더 체험적으로 이것을 남편들에게 충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C . 기도가 막힐 때 생각함
사랑의 가장 중요한 징표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자로 여기라고 했는데 이것은 물론 미래에 예수 믿고 천당 간 다음에 거기에서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리며 영생을 하게 되잖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이지만 현세의 삶에서 보면 이게 기도가 막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말 하냐면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남편과 아내에 대한 올바른 관계, 사랑하고 순종하고 하는 이 올바른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을 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고, 이런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응답을 받는 이런 영적인 교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내를 학대하거나 혹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혹은 아내를 약한 그릇으로 여기지 않고 아내를 함부로 다루고 가치 없게 생각하게 될 때에 이것은 결국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이와 같이”가 뭐예요? 그게 바로 앞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원받은 자녀들을 위하여, 구원할 자녀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 고난처럼 그렇게 아내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Ⅴ. 결론
많은 남편들은 경험합니다. 그리고 아내들도 경험합니다. 남편과 대판 싸우고 습관을 따라 나오는 그 다음날 새벽기도에 하늘이 열릴 리가 없습니다. 아내와 언쟁을 하고 다투고 나아온 그 날 예배에 남편이 은혜 받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부가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의 삶에서도 생명의 은혜를 함께 누리며 살아갈 자들로 하나님께 지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여러분에게 가르칩니다. 결혼의 원리는 사랑의 원리이고, 이 사랑의 토대위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며, 그와 함께 생명의 은혜를 함께 나누며 살아갈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일체의 순결과 경외의 모본을 보임으로 온유한 마음과 고요한 정신을 통해 예수를 보여주십시오. 변하는 태도로 아내를 대하십시오. 그래서 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아시는 것처럼 아내를 알고 사랑하고 약한 그릇으로 여기며 이 현세의 삶에서, 내세의 삶에서 그 아내와 함께 유업을 누리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 과 아내,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 앞에 세우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