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염려는 어디에서 오는가(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 6:19-24).
녹취자: 이새봄
I. 들어가며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참 뜻깊게 오늘 우리가 <염려에 관하여>라는 공과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금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할 준비 하고 있고 아마도 6월 중순 경, 아니면 6월 20일 경 쯤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코로나 사태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는데, 이 책을 탈고해가면서 코로나 팬데믹(pandemic)이 온 지구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사면초가의 많은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평온한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고, 인간이 육안으로도 볼 수 없는 그 바이러스라고 하는 작은 존재에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제 ‘국가가 무엇인가’, ‘선진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상식을 뒤엎는 이치들을 우리들이 깨닫고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메세지는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제가 연속으로 설교했는데, 늘 설교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특별히 이 설교는 심혈을 기울이면서 준비를 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을 통해서 제가 놀라울 정도로 나 자신이 익숙해져 왔던 염려와 이 순간도 결별하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더는 정체 모를 염려에 의해서 내 마음의 평안을 쉽게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깨달음과 신앙적인 성숙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의 집필을 아주 간단하게 끝낼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설교를 전적으로 다시 문학적인 집필로써 서술해 나가면서 저는 좀 더 철저하게 이것을 논증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결국 굉장히 많은 저자들을 다시 찾아내면서 꼬박 4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원고에 매달렸습니다. 여러 번 병원에 가서 드러누워서 링거를 맞아야 할 정도로 체력을 소진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이제 곧 여러분들에게 나오게 되겠고 공과 책으로 여러분들에게 나와서 오늘서부터 공부해나가겠습니다.
이제까지는 공과를 하면서 문제집을 중심으로 풀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번부터는 소위 자기 주도적 공과학습의 방식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푸시고 저는 여기서 한 시간에 아무래도 모두다 소화를 다 못할 것 같으니 아마도 두 번 정도에 나누어서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고, 분량이 좀 적은 것들은 한 주에 해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한 번 해보겠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저는 공과 공부 전체를 강의하고 문제는 여러분들이 이해하신 후에 여러분 자신이 풀어가도록, 그 결과를 가지고 온라인 구역모임에서 활발하게 나누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공과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부터 <염려에 관하여>라는 공과 공부를 시작합니다. 은혜를 내려주시고 저희들 모두 이 말씀을 통해서 부당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 의지하고 사랑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자, 이제 많은 분들이 채팅 창에 들어오셨습니다. 많이들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면 일단 우리 내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고, 1부는 ‘염려하지 말라’, 2부는 ‘의미 있게 살라’, 이게 아주 암시가 있습니다. 부당한 염려를 많이 하게 되면 그만큼 우리 인생을 까먹는 것이고 결국은 우리가 의미 없는 인생을 보내게 된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제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서론적으로 <염려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입니다.
A. 실존주의에서의 인간 존재의 의미
염려라고 하는 것의 정체는 불안입니다. 불안은 결국 안정되지 못한 것을 가리키잖습니까? 안정되지 못할 경우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인간의 행복’이라고 얘기할 때, 이것은 마음의 기쁨, 만족, 그리고 쉼입니다. 기쁨과 만족과 쉼이 있을 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평화입니다. 기쁨과 평화와 쉼이 있을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여기서 불안하다고 하는 것은 쉼이 없다는 것입니다. 쉼이 없으면 당연히 평화도 없고 당연히 그때 기쁜 것은 기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것은 하나의 삼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삼위일체.
그러면 그 끊임없는 불안 때문에 인간이 염려하게 되는데 그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봅시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은 실존주의 문학가인 동시에 철학가인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입니다. 그가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중에서 허무에 대한 책을 씁니다. 그 『존재와 허무』라는 책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이게 아주 유명한 어록입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로 번역을 했는데 불어에서 한번 직접적으로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되도록 저주를 받아서”, 혹은 “저주를 받아서 자유롭게 되어”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세계 전체의 무게를 자기의 두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으니 그는 존재의 방식으로 세계와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어려운 말은 없습니다. 하나 ‘존재의 방식’이라는 말이 좀 어려운데 그것은 정확하게 얘기하면 ‘실존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사람으로서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 살아가고 있는 그 방식으로서 세계와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 뜻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실존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즉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 세계에 우연히 내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 전까지는 사실은 ‘존재’와 ‘존재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좀 어려울까 봐 걱정되는데 친절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이것(‘존재’)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이게(‘존재자’) 더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뭐냐 하면 여기 ‘김남준’이라는 사람이 지금 2020년도 5월에 여기 살고 있는 것이 ‘존재자’라면,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김남준’을 ‘김남준’ 되게 하는, 그것 없이는 결코 ‘김남준’일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존재자’)은 계속 변하고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존재자’)은 우연적인 것이고 이게 더 중요하고 이것(‘존재’)을 찾으면 이것(‘존재자’)에 대한 답이 나온다고 보았고 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존재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니까 이해가 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존재의 기원이 무어냐?’라고 할 때 인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신의 뜻 혹은 자연의 뜻,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다 쓸데없는 소리다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고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런 것은 물을 이유도 없고 ‘어디로 가는가?’는 더더욱 물을 이유가 없다, 최고의 숙제는 지금 현재 여기 현존하는, 그것을 ‘실존’이라고 합니다. existence라고 하는데 이 ‘실존’.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혁명적인 실존주의의 명제가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던져진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이것을 초월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던져진 존재이고 거기에는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던져진 것이 아니라 던져졌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있는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모든 것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의미를 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 이렇게 실존하고 있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되었다”라는 그 말이 뭐냐 하면, ‘누구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하고 보니까 그다음에 확실히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내가 여기 있다’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이 세계가 무엇이고 어떻게 흘러가야 할 것이냐’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으니” 세계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이 사람들이 보기에 인간이 어떤 유익을 얻게 되었느냐 하면 모든 이 사람을 속박하고 있는, 자기 밖에 있는 책임과 자기 밖에 있는 그 무엇에 강요된 것에 대해서 자유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대신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근원을 알 수 없으니까 무섭잖습니까? 그래서 결국 인간은 자신을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다, 무엇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고, 그래서 결국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불안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B. 염려의 의미
1. 합당한 염려
그러면 이제 ‘염려’라고 하는 것,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일반적으로는 현재 일어난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마음을 기울여서 걱정하는 것, 이것이 염려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현재 일을 염려한다는 것과 미래 일을 염려한다는 것은 사실은 나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일을 염려하는 것은 결국 현재 일이 지금과 다른 어떤 상태가 될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이고,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지금 만족하고 있는 상태를 잃어버리거나, 지금은 오지 않았지만 나쁜 어떤 상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결말을 알 수 없는 불안감, 그게 결국은 염려의 정체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이 염려를 크게 둘로 나눕니다. 염려가 없는 삶을 성경이 결코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는 인간이 경건하든 불경건하든, 하나님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지 간에 인간은 염려와 결별할 수 없는 존재라고 봅니다. 만약에 모든 염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면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은 염려를 크게 둘로 나눕니다. 첫째는 ‘합당한 염려’입니다. 이 합당한 염려도 크게 둘로 나누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것이고 하나는 특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나뉘나 보겠습니다.
우리들은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에 깨끗하고 몸에 유익한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기름기가 많은 고기를 먹고 싶은 욕구는 있는데 그것이 가져올 미래의 나의 몸의 상태를 염려하기 때문에 그 욕구를 물리치고 고기를 사양합니다. 그리고 야채를 택합니다. 또 반대도 있습니다. 채식을 워낙 좋아하고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몸을 생각해서라도 그것을 먹게 됩니다. 그것도 싫어하는 사람은 단백질 가루로 먹는데 세상에 먹기 싫은 음식이 단백질 가루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염려 때문입니다. 교통사고 날까 위험을 느끼기 때문에 교통법규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 또 코로나에 감염될까 라는 두려움 때문에 위생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온 국민이 이번 기회에 위생 생활을 잘해서 수두가 거의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감염병들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저는 본래 손을 자주 씻는 형인데 저녁 먹은 후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제가 세어보니까 보통 평소에 5번 내지 6번을 비누로 씻었습니다. 결벽증 환자는 아닙니다. 어쨌든 저는 깨끗한 게 좋습니다. 음식점도 맛이 없어도 일단 깨끗하기만 하면 용서해줍니다. 그리고 다시 안 오면 되니까. 그런 게 ‘일반적인 염려’입니다. 당연히 그런 염려를 할 때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어느 정도 잘 보존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특별한 염려’입니다. ‘경건한 염려’입니다. 그것은 경건한 소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쓴 『피아데지데리아』라는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이 ‘경건한 소원’입니다.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 많이 담지 못하고 왜 이렇게 세속적인 인간일까 하는 염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기도 생활 안 하다가는 언젠가는 큰 어려움을 만나지 하는 염려, 그리고 영혼들에 대한 근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염려, 이런 것들은 특별한 염려이고 영적인 염려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사람에게 없을 때 그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다른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사람들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2. 합당치 않은 염려
그다음 성경이 문제로 삼는 것, 우리가 이 공과에서 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염려’입니다. 해서는 안 될 그리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삶에 결코 안녕을 가져다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합당치 않은 염려입니다. 뭐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 합당치 않은 염려는 부당한 욕구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좋은 한자 공부를 시켜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심지어 신문에서도 헷갈리는 것입니다. 이것(欲)도 욕이고 이것(慾)도 욕구한다는 뜻입니다. 이 밑에 마음심 변이 없는 것(欲)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욕입니다. 그래서 식욕할 때에는 이렇게(食欲) 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식욕의 방식이 이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도리에 어긋나는 잔인한 방법을 사용한다든지 할 때는 이것(欲)을 쓰면 안 되고 이것(慾)을 써야 합니다. 이것(慾)을 쓴다는 것은 암시가 부당한 식욕이라고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欲)은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식욕, 음욕, 무엇을 마셔야 하는 욕구, 그다음에 그런 욕구, 그런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게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문에서도 자주 이것을 헷갈려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것은 부당한 이 욕(慾)이 아니라 이 욕구(欲)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안전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것들은 정상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자 그러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경험합니다. 고통을 경험하면 당연히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왜입니까? 거기에는 행복이 없으니까 거기에는 만족도 없고 기쁨도 없고 당연히 평화도 없고 당연히 거기에는 안식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고통은 우리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으로 부당한 고통을 많이 당하게 되면 육체에도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제약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박사와 함께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한국의 어느 회사라고 말씀 안 드리겠지만 유수한 그룹에서 제약에 관한 연구를 해서 거의 무슨 20년 가까운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당뇨치료제를 개발했습니다. 당뇨치료제가 이제까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만든 독특한 의약물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상 시험까지 해서 19년인가 걸려서 만들었는데 한국에서 성공한 신약발견사례 가운데 몇 안에 드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벌써 15년 전에 매년 천억 가까운 수익을 안겨준다고 했는데 그걸 개발한 책임자가 그것을 개발하고 뇌암에 걸렸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과도한 염려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육체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은 함께 연결되어 있잖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다면 심적으로 두렵지 않겠습니까? 두려움이 옵니다. 그래서 그런 두려움 때문에 염려를 하게 됩니다. 염려하게 되면 결국은 예전에 편안하게 생각하던 모든 상황들을 경계심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냥 살아가면 되는 데 매우 중요한 첩보 기밀을 갖고 있다든지, 예를 들어 핵무기 개발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갖고 있다든지 할 경우에 내가 실제적으로 사람들에게 제거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보호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럴 때는 아마 스치면서 지나가서 눈빛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눈빛이 범상치 않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경계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니까 결국 다시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두려움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것이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삶을 계속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모든 우리의 인생사를 주관하시고 결국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에게로 돌아가는 그 하나님을 향해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은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타락 이후에 생겨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있잖습니까? 이 죄성이 결국은 심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욕구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지정해주시는 질서에 대한 거부입니다. 사람들이 선하고 좋은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두드려 엎을 때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 질서를 파괴하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자기가 세우고 싶은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부수고 자기가 원하는 질서를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욕구를 인간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를 자주 양으로 비유합니다. 양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발이나 다리 혹은 이빨이나 변신하는 능력이나 날카로운 뿔이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사람의 돌봄을 받으면서 의존하면서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를 비유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도록 창조되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한없이 나약한 존재구나,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어마어마한 영광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 덜 의지하며 살아도 되는 모든 사물로부터 인간을 구분 짓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겠습니까? 예를 들어 무생물을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거기 있게 하시면 있는 것입니다. 식물은 그것보다 조금 기능이 복잡합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 거기 있습니다. 다만 살아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동물은 살아있을 뿐 아니라 감각하는 사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보다 복잡합니다.
우리가 개 키우는 것 아십니까? 코코입니다. 다음 시간에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준비를 안 했는데 정말 예쁩니다. 이제 3년 됐는데 참 얘가 그렇습니다. 머리에 털이 많이 자라니까 미장원에 가서 털을 깎아줘야 하더랍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 무조건 싼 것으로 깎아주세요, 하는데 그럼 인정사정 보지 않고 바리캉으로 스포츠머리 밀듯이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애가 그렇게 깎고 오면 우선 용모도 희한하고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습니다. 그리고 오줌을 줄줄 쌉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값이 쌀수록 미용사가 불친절합니다. “가만 안 있어? 이 X새끼” 이제 이런단 말입니다. 강압을 느끼면서 하는 것입니다. 인견적으로 다루어주지 않습니다. 아니 견격적으로 다루어주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밥을 못 먹고 혼자 신음소리를 냅니다. 덜덜덜 떨고. 그래서 우리 딸이 해오면 좀 좋은 데에 가서 해옵니다. 아주 명랑 쾌활하게 돌아옵니다. 모양도 아주 예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개는 저의 생각으로, 후에 성격이나 형질 자체가 변하면서 인간과 친숙해진 예이고, 원래 개가 늑대 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양은 처음부터 인간을 의존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되어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물 위에 인간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면 쇼펜하우어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천재들의 삶은 과연 행복할까’ 그렇게 묻습니다. 스스로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천재들은 좋은 부모 만나서 용돈 넉넉히 주고 좋은 학교 다니고 편안한 환경에서 놀고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만족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천재들은 아주 더 놀라운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구와 욕구 사이에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천재는 극히 드뭅니다. 아주 희귀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상적인 위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그 연결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천재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천재가 한번 되어볼 것인가, 행복한 평범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 그것은 개인적으로 각각 원하는 바가 다를 것입니다. 저는 그 모든 욕구의 연결을 이루는 천재가 되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소원입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은 고통과 불안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당신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잖습니까? 예수 안 믿어도 될 사람은 아직도 안 믿고 있습니다. 일단 예수 믿은 사람은 한때는 예수 아니면 도저히 어떻게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좀 더 진도를 나가보도록 합시다.
3. 불신과 염려
그러면 합당하지 않은 염려는 어떤 것인가? 합당하지 않은 염려는 두 가지 요소인데 ‘욕망’과 ‘불신’입니다. 온전하지 않은 욕망이 생기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데 하나님을 불신합니다. 그래서 욕망과 정도를 어긋난 욕심, 욕망과 불신, 이것이 합쳐지면서 염려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게 합당하지 않은 염려입니다. 그래서 이제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비교적 앞선 세대의 청교도였습니다. 굉장한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거목이었습니다. 윌리엄 퍼킨스가 이제 1558년이니까 칼빈(John Calvin)이 죽던 때쯤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오래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1602년까지 살았는데 이제 영국에서 비국교도로서 목회를 했고 이분의 저작들이 이제서야 미국에서 출간되기 시작하는데 굉장한 분입니다. ‘청교도의 아버지’라고 불리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존 오웬(John Owen)이 1616년에 태어나니까 존 오웬보다 한 세대 앞선 분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책 속에서 ‘염려’, 우리가 이야기하는 ‘합당치 않은 염려’를 ‘distrustfull care’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불신하는 염려’가 되는데 결국 불신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염려의 세 가지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염려의 정체를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세 가지를 가져오게 되는데 첫째는 마음을 압박해서 결핍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핍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세상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다’, 그게 신앙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성경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소유에 대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세상이 결코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물 그것이 무엇이냐, 그게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흔히 이렇게 말하잖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사물’이 될 수 있느냐 그러는데, 라틴어로 레스(res)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설명하면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물체라고 번역을 하는데 물체가 아니라 ‘사물’입니다. ‘사물’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사물’, 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그분에 의해 창조된 사물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아무도 가져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데서 염려가 비롯되면 항상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도록 유혹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많이 하셨죠? 합법적이지 않은 죄가 되는 방법을 사용하도록 유혹을 받을 때는 결코 신령한 염려 때문에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영혼이 너무 핍절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너무 가엽게 생각될 때 그때 불법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이루고자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염려를 할 때 우리들이 그런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결국 그 염려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심신을 지치게 만듭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입니다. 경건한 염려가 생깁니다. “아, 내가 목회를 이렇게 해서 될까?” “내가 정말 교사로서 영혼들을 제대로 돌보고 있을까?” “나는 왜 집사나 되고 권사나 됐는데 신앙의 인격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내가 하나님 믿은 지가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 나는 왜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는 것인가?” 이런 것을 가지고 슬픈 마음이 되었을 때는 가장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 있는 합당한 염려를 할 때는 그 염려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 군대 보낸 엄마들이 기도 엄청 열심히 합니다. 왜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습니까? 염려가 이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염려가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목사가 제일 열심히 기도할 때가 교회 개척하고 초창기입니다. 열렬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목숨을 걸게 됩니다. 신령한 염려입니다.
보십시오. 결국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 염려의 본질이고 이것은 이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통찰이지 않습니까? 잘 보십시오. 1번에 마음을 압박해서 두려움을 갖게 되면 그 두려움이 또 두려움을 낳습니다.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도록 유혹을 받는데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해서 또 불안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염려는 더 깊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 순환하면서 염려가 염려를 낳으면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한 예를 저는 아브라함에게서 한번 찾아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진짜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실제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아브라함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정말 어떤 놀라운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의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마음에서 자리를 잡는 것인데 이 마음은 호수의 수면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지 않는 그 고요한 날에는 주위에 서 있는 나무와 하늘의 그림까지 데칼코마니를 해 놓은 것처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물결이 흔들리게 되면 아무 형상도 우리에게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 두 마음이 결국은 인간에게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로 말하자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는 집성촌 아십니까? 같은 성씨들이 쭉 모여서 삽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타성받이가 그 마을에 들어옵니다. 온갖 설움을 겪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집성 마을은 다 일가친척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딱 들어가게 되면 그는 외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저렇게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그 직업을 버리고 핏줄의 터전을 버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갔다고 그러는데 거긴 어딘지 모릅니다. 그 나간 것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입니다. 그것을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는데 아비멜렉을 속인 사건이라든지 등등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를 들자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라의 종을 받으면서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서자를 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사라에게서 네 자손을 낳을 것이며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 결과는 끊임없는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염려’라는 말이 ‘메림나(μεριμνα)’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동사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입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메(μὴ)’, 메는 not 혹은 don’t 이런 의미입니다. ‘메림나테(μεριμνατε)’, 명령형입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인데, ‘메림나’의 그리스어에 ‘마음이 나누어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염려는 우리의 단일한 마음을 산산이 찢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개의 자아인 것처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아가 저자와 충돌을 하고 마음 안에서 싸움질을 하면서 분쟁이 일어나서 결국은 자기가 바라면서도 무엇을 바라는지를 모르고 자기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가 우리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안하게 사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염려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 그림을 보면서 우리들이 하나 교훈을 받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오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염려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그 은혜로 붙들어주시기 때문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내가 이런 하나님과의 신뢰의 관계에서 이탈하면 다시 요동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이 염려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졸업을 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그런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결국은 염려함으로 저렇게 커다란 패착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는 교훈입니다.
그러면 오래간만에 여러분들이 보여주신 사연 들어온 것 보겠습니다. “코로나의 어려움 속에도 우리를 말씀의 초장으로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그다음에 이소영님 “공과도 자기주도 학습이네요.” 네, 인생이 어차피 자기 주도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네, 그래야 되겠지요. 자기주도 학습 괜찮습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은 것입니다. 네, 또 썬바님 “혹시 교회로 편지를 보내면 목사님이 받아서 읽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답장을 보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제 자유입니다.
그다음에 김연진님, “현실을 자기의 일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네요.” 네, 여기에 대해서 코멘트를 좀 드리자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우리가 달리기 경주를 하잖습니까? 제일 먼저 주최 측에서 무슨 일부터 하겠습니까? 스타트 선을 그리잖습니까? 선을 하얗고 길게 그리고 달리고 싶은 사람 나와서 모두 그 선 앞에서 서라, 앞에 가서 뛰어도 안 되고 뒤에 가서 뛰어도 안 된다, 그 선에 나란히 서라, 그리고 출발신호를 기다려라, 이게 달리기의 시작이잖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현실에 굴복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인정하고 현실을 바꾸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단 인정을 하고 내가 지금 이 현실에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문제 해결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이 현실이 나에게 주어졌을까?’, 그리고 미움과 원망 속에서 살면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결코 어떤 해결도 거기엔 없는 것입니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 생각보다도 태어난 그 현실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긍정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아무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계획하고 계신 것은 운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와 함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또 푸른하늘님,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면 고통의 직간접적인 경험이 필요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 마음이 더욱 강퍅해지기도 하고 마음이 물같이 녹아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길을 결정하는 것이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선한 일을 결정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결핍될 때 우리는 악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 이제 한 분만 더 보고 싶습니다. 오늘 굉장히 많이 들어오셨습니다. 이한나님, “하나님이 지정하신 질서 안에서 안전함을 깨닫기까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고 그럼요, 그것을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 되어도 그것을 못 깨닫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쉽지 않습니다.
푸른하늘님이 의미 있는 질문을 하셨는데, “이제 자기 능력이 조금 생긴 중고생들은 자기 좋아하는 질서를 따르고 싶어 하는데 이 아이들이 고통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참 설명이 힘든데 중고딩에게 두려움, 염려, 하나님을 의지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진짜 할 수 없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어떻게 설명할까, 두 가지 조언을 주고 싶습니다. 의미 있는 조언을 주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 아이들에게 인문학 책들을 많이 읽히세요.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는 성경을 딱 중심에 놓고 그리스 고전들, 동양고전들, 이런 책을 읽으면서 어디서부터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우주와 이런 것들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하게끔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의 사유가 감각에만 묶이는 것이 아니라 자꾸 이 감각 밖으로 벗어나는 사유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나름대로의 괴로움이 있지만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인생에 대한 의미를 알아갑니다. 그게 일반론적으로 드리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거나 고통 속에서 의미를 하나님과 연결 지어서 생각하거나 염려를 세속적인 염려인지 신령한 염려인지 하나님을 위한 염려인지 불신하는 염려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거듭난 신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진정한 중생과 회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중생하고 회심을 한다고 해서 그 은혜를 끊임없이 계속 간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 중심적으로 인생을 해석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중고등부에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가정이 다 깨졌습니다. 아빠가 엄청나게 주벽과 음주, 알코올중독과 폭력으로 식구들을 괴롭혔는데 그러니까 이 아이가 항상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은혜를 받고 깊이 회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면서 아버지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그를 하나님께 감사하게 만들고 어려운 일은 어려운 일대로 하나님을 찾게끔 만들어서 결국은 인생에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염려라고 하는 것은 합당한 염려, 그다음에 하나님을 불신하는 염려 이 모든 것들을 다 합쳐서 보면 결국 ‘간수’와 같은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두부를 만들 때 ‘간수’가 들어가지 않습니까? ‘간수’는 자살할 때 먹는 물질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도 ‘간수’를 먹고 많이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간수’를 적당량을 안 집어넣으면 두부가 굳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명품두부가 나오는 곳은 모두 다 바닷가입니다. 바닷가가 아니더라도 좋은 콩이 생산되는 곳에서 좋은 바닷물에서 만들어진 ‘간수’를 사용하는 그런 곳에서 최고의 두부라는 음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염려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저녁때 기도하러 갈 때는 많은 근심과 걱정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 권의 책을 선물로 준비했는데 『가족구원』, 『영적전투』, 『교사 리바이벌』입니다. 여태까지 받지 않으신 분들 중에서 받고 싶으신 분들은 선착순 3분, yullin.org로 등록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이 과를 공부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이렇게 염려와 결별할 수 없이 살아가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탁월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많은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오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심인 줄을 우리가 믿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염려와 근심이 승화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신앙으로 바뀌게 해주시고 그 염려와 근심 때문에 하나님과 더욱 연합된 사랑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 주간 동안 신앙으로 은혜로운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