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희 자신을 알라 -(1)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19-24).
녹취자: 조경훈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즐거운 금요구역 공부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지난주에는 코로나가 잠잠하나 했더니 다시 확진자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마음이 매우 불편한 한 주간이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아무리 기승을 부린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를 누리고 염려를 극복하며 힘찬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모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2과 공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벌써 여러분들이 들어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목사님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네. 지난주에는 좀 불편했는데 월요일부터 많이 나아져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프세요? 하고 물어보셨는데 안 아픕니다. 제1부 염려하지 말라 에 제2장 너희 자신을 알라.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19-24).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라고 하는 책에서 남긴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너 자신을 알라고 명하시는 것은 우리가 영혼을 가진 자임을 생각하라고 깨우치시는 것이라네.” 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말은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로 “주제 파악을 해라”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원래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남긴 문맥은 영혼을 가진 자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생각하고 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은 영혼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다른 사물들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은 식물은 식물대로 영혼을 가지고 있고 무생물은 무생물대로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영혼이 자신의 형태를 고집하기 때문에 책상 같은 사물들도 자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잡한 영혼관이긴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은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무생물이 가지고 있는 영혼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물이나 동물은 자기반성이라고 하는 능력이 없거나 동물에게는 매우 한정되어 있고 그것은 자연적인 개체의 보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고 있는 자기반성과는 전혀 다르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물려받으면서 어거스틴 같은 경우는 사물들을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있는 것, 무생물입니다. 있으며 살아있는 것, 식물입니다. 있으며 살아있으며 감각하는 것, 동물입니다. 있으며 살아있으며 감각하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같은 영혼이라도 비교될 수 없는 영혼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생각하라.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의 정치가이기도 하고 사상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3) 같은 사람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네스케 아니맘 뚜 움” 곧 “너의 영혼 혹은 너의 정신을 알아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결국 여기서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강조한 말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염려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 위에 우등한 영혼의 기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만 우등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기원이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저 구절에서 “공중의 새”라고 표현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앉아있는 새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를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닭을 길러보지 않으셨겠지만 저는 중학교 때 직접 닭을 길러보았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올 때 시장에 들러서 야채가게에서 버린 배추 껍질들을 가지고 와서 곱게 썰어서 병아리한테 주곤 했었습니다. 학교 앞에 꼭 병아리 장수들이 있었는데 병아리 중에 신통치 않고 죽을 것 같은 것들을 감별사들이 팔았습니다. 다섯 마리 정도 사 오면 한두 마리는 죽고 두세 마리는 살았습니다. 10원씩에 사다가 길렀는데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어린 노랑 병아리 때는 집에서 같이 살다가 좀 크면 바깥에다 내어놓고 제가 모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닭이 꽤 크면 팔았는데 우리 할머니가 구매자였습니다. 돈을 제일 은행 통장에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재미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병아리가 중병아리가 됐는데도 아파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닭이 죽을 낌새가 보이는데 그림을 그려보자면 날개가 원래 이렇게 붙어있어야 하는데 죽을 때가 되면 날개가 이렇게 힘없이 펼쳐집니다. 결국은 죽습니다. 병아리를 길러 본 사람으로서 공중에 나는 새를 굉장히 유심히 저 구절을 봤습니다. 그것은 충만한 생명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새가 아니라 훨훨 날아다니면서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보여주는 새를 한번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새가 심지도 거두지도 모아들이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새의 존재뿐 아니라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창공을 날아다니는 그 모든 기운까지도 하나님 아버지가 기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새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닙니다. 저것을 말을 할 때는 새들에 대해 말하지만 청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기른다고 하면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새를 충만한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데 아버지도 아닌 하나님이 새를 저렇게 기르신다면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얼마나 잘 기르시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그것들 보다 매우 귀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입니다.
텍스트를 보면 엠블렙사테(ἐμβλέψατε)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see 보인다. 라기 보다는 look 어떤 의도를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사물을 보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그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색하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앗사리온이라는 화폐의 단위가 1/16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이고 장정 남자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할 때의 하루 품삯입니다. 하루 품삯으로 32마리의 참새를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팔레스타인의 참새의 크기와 우리나라의 참새의 크기를 실제적으로 비교해 보지는 않았지만 문헌에 의하면 당시 노동자들이 가장 손쉽고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양질의 단백질이 참새였다고 합니다. 32마리나 살 수 있었으니까 오늘 우리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여전히 주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웬만하면 고기에 주리지 않고 얼마나 좋은 질의 고기를 먹느냐는 소득수준에 의해서 차이가 나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원할 때 저가의 고기라도 먹을 수 있는 소득수준의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문맥으로 돌아가 보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노동자라도 손쉽게 시장에 가서 손에 넣고 섭취할 수 있는 고단백 식품이 참새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품목을 하루 벌어서 32마리나 살 수 있을 정도라고 표현했으니까 이것은 참새가 매우 값이 싸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새들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면 너희는 얼마나 잘 돌보시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이 말이 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면 인간이 죽었을 때 그 시체는 얼마쯤에 팔릴까요? 아마 제가 교수가 되던 해에 어느 자리에서 책을 읽었는데 당시 미국 화폐를 기준으로 환율이 600원 됐을 때인데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모두 소각하고 남은 뼛가루도 나오고 하는 것들을 비료로 쓰고 할 경우에 그 남은 것의 가치가 일 달러 몇십 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도 우리가 답답하니까 아주 쉽게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비유의 기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장에서 싸게 팔리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도록 먹고 입히고 기르신다면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는 얼마나 더 우리를 잘 돌보시겠느냐?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촉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림에서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아버지가 되시느냐? 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중적으로 아버지가 되십니다.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인간이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다는 면에서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십니다. 또 하나는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 인간을 구원해 주심으로써 또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파란색을 ‘창조적 아버지 되심’이라고 부르고, 빨간색은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 밖에 있었던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적(養子的) 아버지 되심’ 혹은 ‘수양적(收養的) 아버지 되심’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이 이것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셨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양자적 아버지 되심’이 얼마나 가슴 벅찬 것인지 잘 몰랐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까 우리는 더 실감 나게 ‘양자적 아버지 되심’에 감격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임스 파커(James Innel Packer, 1926-)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이라는 책은 수십 개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서 500만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저도 한창 청교도에 빠졌을 때 저분의 책을 많이 읽었는데 강의를 들어본 학생들은 강의보다 책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얘기합니다. 강의는 좀 지루한데 책은 아주 박진감이 있게 쓰셨다고 합니다. 저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겉장을 넘기면서 참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책을 읽었을 때 저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난 후여서 그랬는지 어쩜 내가 경험했지만, 아직 찾아내지 못한 표현을 그렇게 훌륭하게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감동을 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인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 거기에 인간의 창조목적이 있고 인간의 행복이 달렸다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만 살 수 있지 그 이상은 살 수 없고 그 이하를 사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작품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읽었는데 여러분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감동이 될 것입니다.
이분이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기독교 신앙의 깊이는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깊이다.”라고 아주 간단하게 정리를 합니다. 기가 막힌 구절을 찾았는데 제가 읽어드릴 테니 보십시오.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려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면 된다. 이 신앙이 그의 예배와 기도 및 총체적인 인생관을 유발하거나 지배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기독교를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가 없다.”
왜 파커가 하나님에 아버지 되심, 영어로 Fatherhood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에 대한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더라도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으로 예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높고 위대하시면서도 그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모든 인생관의 중심에도 항상 높고 위대하신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친아버지라는 사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해도 기독교를 잘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와 친밀함은 하나님을 얼마나 아버지로 잘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저는 못 느꼈지만 제가 아는 지체 한 사람은 너무 갓난아기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또 다른 지체 한 사람은 자기가 엄마 뱃속에서 잉태됐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두 사람 다 똑같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표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 우리 엄마’ 하면 가슴에 확 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경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런 것들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이해가 안 되지만 아버지가 있는 집안의 애들을 너무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아버지의 사랑을 실제로 못 받아봤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조건들을 극복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깊이가 신앙의 깊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생각이 내 예배와 기도 내 인생관과 모든 것을 좌우해야지만 그것이 참 기독교 신앙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분이 저보다 먼저 얘기를 하셨지만 제가 이 책에서 얘기한 바에 쐐기를 박아주시는 역할을 하셔서 이 텍스트를 찾았을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연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일고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사연1] 김현진님!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고 자기다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자기답게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은 게 현실이기도 하고요.
[목사님] 자기답지 않게 살아갈 때 혼란과 고통이 오니까 궁극적으로 계산을 하고 보면 결국은 그게 이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연2] 변해현님! 어릴 때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사서 어미 닭까지 키우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잡아먹으셨어요? 묻어 주셨어요? 아주 궁금합니다. 다 죽었군요. 어릴 때 키우다 죽었을 때의 충격이 있습니다. 병아리 한 마리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요 녀석이 너무 식구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정말 충만해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가 고모인가 할머니가 그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서 휙 닫았는데 많이 사용해서 반들반들하게 달아서 톡 쳐도 싹 미끄러져 들어가는 미닫이문 사이에 끼여서 죽었습니다. 그 죽는 광경을 제가 봤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앞마당에다가 정성껏 묻어 주면서 나무로 비목까지 세워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생각이 좀 다른 게 어린 마음에 굉장히 힘들고 아팠지만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 인생에는 나름대로 나를 깊이 생각하게 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 이상한 게 병아리가 죽었을 때는 하루쯤 갔는데 개가 죽었을 때는 한 일주일 동안 우느라고 밥도 못 먹었습니다. 특히 정들었던 굉장히 깔끔한 스피치 종이었던 테리가 죽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는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 앞에 원하지 않는 현실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너 죽을 놈 그러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슬픔과 상실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구들도 많이 나오고 전자화가 됐으니까 많이 달라졌을 것인데 옛날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조종학과 학생들은 신체적으로 지능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선발되는데 비행기를 태우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연습이 굴렁쇠에 손과 다리, 네 개를 다 고정시키고 굴렁쇠처럼 굴러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머리는 위에 있고 다리는 아래에 있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 전후좌우로 구르면서 언제든지 상·하의 위치와 내 머리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속에서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가를 정확하게 항상 생각할 수 있는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가르친 제자 한 사람이 거의 5,000시간 이상 무사고 운행을 한 베테랑 조종사였는데 그 친구가 이야기하는 게 특히 캄캄한 밤중에 야간비행을 하면 진짜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의식 속에 구별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큰 소리가 나기 때문에 헤드셋을 끼고 운행을 하는데 진짜 구분이 안 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회전 비행을 할 때는 순간적인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부지런히 굴렁쇠에 매달려서 굴러가는 연습해야 합나다. 일어나지 않은 불행들을 우리 스스로 자초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내가 원하지 않은 상황, 내 맘대로 안 되는 처지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잃지 않는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슬픔과 아쉬움의 정동들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겠지만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인생이 휘둘리는 일은 없도록 평소에 우리 자신을 단련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들은 태어나서 흘러가고 죽고 소멸하며 그런 속에서 우리 자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사유를 해야 합니다.
[사연3] 시드니에서도 들어오셨네요. 강성경님. 목사님 안녕하세요. 시드니입니다. 은혜로운 공부방에 들어와 말씀을 들으니 행복합니다.
[목사님] 우리도 행복합니다.
[사연4] 벡스테이지님. 존오웬의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을 누가 풀어서 이야기 해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재미있었습니다.
[목사님] 세상 모든 사람이 재미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죄와 은혜의 지배 책을 썼는데 그 책이 나오고 나서 어떤 네티즌이 인터넷에 글을 썼는데 아주 촌철살인이었습니다. ‘저자는 내 다음의 행동을 이미 알고 있다.’ 존오웬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강점이 그런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가 아마 다음 공과 공부 책이 될 것 같은데 기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연5] 윤진아님.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있습니다.
[목사님] 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연6] 카피님. 누구나 자기를 사랑한다지만 자기애성 장애가 있는 분은 너무 힘들어요.
[목사님] 우리가 표현할 때 인격 장애라는 말을 조심해서 써야 됩니다. 저는 그런 절망적인 표현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과에서는 설명이 잘 안 되고 교정이 안 되면 그냥 장애라고 부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 장애가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장애라고 불리는 게 굉장히 좌절스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희망이 있으니까 술에 인 박혀서 중독 수준으로 간 사람들도 얼마든지 고쳐지고 폭력을 일삼던 사람들이 단정해지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희망을 줘야 된다는 면에서는 인격 장애라는 말은 다음부터 쉽게 사용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카피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지만, 유난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집착적인 사람들은 당연히 힘듭니다. 그런 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 20명한테 소비할 어마어마한 진액을 빼앗아 갑니다. 신기한 게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서 진액을 쓸 때 하나님이 계속 채워주십니다. 그것이 은혜 생활의 비결이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까지 버리면 그 사람은 또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연7]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pegth님. 공중의 새도 보살핀다고 하셨고 기성세대의 분들은 아직도 동물들이 집밖에서 알아서 잘 살고 있다고 믿는데 객관적인 현실은 도심지 가운데 보이는 동물들은 대부분의 인간의 도움 없이는 자생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하고 무분별하게 개발했기 때문이겠죠.
[목사님] 네. 맞습니다. 결국, 인간이 자연의 세계를 자신의 신체적인 몸 일부로 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또한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동물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개나 고양이 정도만 우리 인간들을 알아본다고 하지만 지난번에 어떤 영상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매일 숲속에 가서 다람쥐하고 친해졌습니다. 다람쥐한테 도토리를 하나씩 주고 먹을 것을 주니까 나중에는 가까이 와서 땅콩 하나를 주워 먹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고 이 사람이 나타나면 잽싸게 달려와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가 하면 맹수들 심지어 악어까지도 자기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친밀감을 표현한다고 하니까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물지 않는 세상이 되리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있었던 세상의 반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개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을 가엾게 여기고 돌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개들이 도살되고 하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동물의 복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정도로 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분은 정채봉 시인인데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이분의 시를 많이 읽은 것은 아니고 시집 한두 권 정도를 봤는데 이 시를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이분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살던 절절한 감정을 시에서 표현했는데 제가 한 번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엄마가 휴가를 온다면’이라는 시입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단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어렸을 때 얼마나 가슴에 맺힌 게 절절한지 가슴에 다가옵니다. 엄마 젖을 만지면서 엄마라고 한 번 소리 내어 불러보고 자기가 억울했던 한 가지 일만 고자질하고 엄마가 자기편을 들어주고 안아주시는 그 품에서 엉엉 울겠다는 짧은 언어 속에 저자의 엄청난 생각들이 녹아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재회했기를 바랄 뿐입니다. 얼마 못 사셨지요? 한 55세까지 사시고 하늘나라를 가셨는데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여기에서 말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그림은 우리가 익숙해 온 유교 문화에서 그려낸 아주 엄격하고 율법적인 아버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세상 속에서 아무 힘이 없이 무기력하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아버지도 아닙니다. 돈이 좀 있다고 가족들을 마치 신하처럼 대하는 그런 아버지도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참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에서 살면서 잘 본 적이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를 우리의 경험 속에서 읽어내지 말고 성경이 그리고 있는 참된 아버지 되심에서 다시 복원해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주 자주 왕 같은 아버지도 그려내지만 어머니 같은 아버지도 그려낸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탕자의 비유에 나옵니다. 자식이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주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치고 나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선불로 주십시오. 라는 것은 살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중대한 인격모독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너무 그러고 싶어 하면 아내는 옆에서 여보! 지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저러다가 애가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하면 어떡해? 그냥 줘서 일단 자기 마음대로 해보라고 그럽시다. 이렇게 옆구리를 찌르는 사람은 엄마입니다. 아들이 나갔을 때 매일 동구 밖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아들을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엄마의 모습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실을 읽어낼 때 성경에서 굉장히 오래된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만나로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는 것, 심지어 예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역사를 말하면서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자기 품 안에 모으듯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속에 담겨있는 어머니 같은 아주 충만한 사랑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아버지 상에만 묶이지 말고 성경이 그려내는 정의와 사랑이 함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버지.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정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사랑이 무한하신 그런 하나님을 그리면서 우리가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야 되는 것입니다.
파테르(πατήρ) 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가족들 속에서 불리던 이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을 아빠라고 번역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주 공식적인 부친이시여! 아버님이시여! 그런 게 아니라 가족들 간에 불리는 명칭입니다. 친근한 가족적인 유대가 있는 명칭입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두 가지 점에서 기억해야 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하나님의 선에서 나온 것이고 그 세상을 돌보시는 것도 하나님의 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문제는 여기 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의 한계, 즉 믿음의 한계이고 이성의 한계인 이것의 차이 때문에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들인 A, B, C, D 모두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항상 명료하게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보이는 세계대로 그냥 알면 되지 굳이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수학적인 질서를 따라서 모든 것이 해명이 된다면 공식대로 다 되니까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에게는 해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남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이 겪는 고통은 원인과 결과를 또렷하게 알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이 결과가 감추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후일에 알게 되는 경우가 있고 영영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문제가 안 됩니다. 후일에 알게 된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오늘 내가 산다는 것이고 영영 모른다고 할지라도 굳이 나는 하나님에게 그 대답을 요구하지 않아도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런 생각을 우리들이 하면서 살기아가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여기가 선한 상태인데 이 상태를 이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어야 되고 다시 선한 상태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되다가 결국 언젠가는 이렇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선에서 이탈한 것을 되돌려서 다시 돌아가는 과정 자체를 고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선에서 이탈된 상태를 내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그것을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려놓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나라는 사람이 살아갈 때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이 모두 이성적으로 해결이 안 될 때 여기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기 현실을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할 수 없으며 그 선으로 나를 되돌리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끊임없이 찾으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과정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살아갈 내 인생의 목적과 현실이 모순되는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단한 말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고백이 됩니다.
[사연8] 다시 사연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들에 대해 수업 시간에 배우고 나서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엮이지 말고 피해야 한다는데 그나마 교회를 다녀서 그 정도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 일가요?
[목사님] 쉽게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점점 그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대답은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만 아니라 뱀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이나 심리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관계를 갖고 치료를 하는데 예를 들어 상담자가 내담자와 사랑에 빠지는 관계가 되어버리면 치료행위가 안 된다고 합니다. 정신과적 문제가 있는 엄마를 가족인 아들이 돌보아서 정신과적인 치료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정신과적으로 뛰어나도 이미 정신적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가족인 아내가 남편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연히 조심해야 합니다. 어떻게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그런 사람들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관계 속에서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일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쉽게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변화의 가능성을 허락하셨는데 우리 인간이 쉽게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사랑 없음의 합리화일 수도 있습니다.
[사연9] J Love님. 살면서 어느 순간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게 되는 때가 오는 것 같습니다. 고통이 클 때 오히려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만 크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그때가 아마 하나님을 만나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잊게 되는 때가 오는 게 아니라 늘 잊고 살지 않습니까? 그리고 생각나는 때가 아주 가끔 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선하다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인격적인 경험입니다. 선하다는 사실을 나열함으로써만 되는 게 아니라 지식이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소환되어 경험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설명해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이렇게 얇은 막으로 되어있는 게 있다고 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가라앉아 있는 사실들을 소환해서 다시 떠오르게 해서 이것이 우리 의식의 막을 막 건드릴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경건한 정동입니다. 이런 정동이 있을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 기억이 소환되어서 우리의 의식의 표면에서 2,000년 전에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들을 부지런히 소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기 안에 이미 경험되고 있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선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분이 좋아요. 새들이 노래하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분이 매우 나쁩니다. 새들이 우는 것입니다. 왜 저 새들은 아침부터 저렇게 울어댈까? 라고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정동이 모든 해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바깥에서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와서 우리 의식의 막을 두드리면서 하나님이 선하시다. 라는 마음으로 모든 세계를 설명하면서 진전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사연10] 김정호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를 향한 사랑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궁금합니다.
[목사님]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시는 경우가 있고 소극적으로 이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악인을 통해서라도 사용하셔서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 데 쓰시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가룟 유다의 배신이 없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하시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성경에서 이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행동해서 그것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을 때는 그것이 본인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그가 칭찬받을 일은 없습니다. 자신이 행한 데로 하나님 앞에 판결을 받을 뿐입니다.
이에 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기쁘신 뜻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과 기쁨에 동참하는 특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히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것이 어렵겠습니까? 내가 진짜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표를 안 내고 숨기는 게 어려울까요? 아니면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랑하는 것을 표를 안 내는 것이 어려울까요? 미워하는 사람에게 티 안 내는 일도 어렵지만, 사랑하는데 그것을 전혀 티를 안 내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못 해보신 분입니다. 미운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는 고통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고통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사연11] 한 사연만 더 받아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남편과 이혼의 위기까지 갔다가 회복단계입니다. 몇 달 동안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남편을 용서하게 됐고 다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제까지 제 욕심에 의해 시험에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겨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불신자이고 상처가 너무 커서 회복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요?
[목사님] 이런 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에게로부터 받는 사랑으로 보상을 받으면서 사십시오. 세상에서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차이가 있습니다. 엄마로부터 못 받은 사랑은 아버지가 잘해주거나 자식이 잘 해줘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은 시부모님이 잘해주시거나 자식이 잘해주더라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좋은 시누이를 만나서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고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채워주어서 결국 우리의 마음이 불구가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전혀 흔적이 남지 않느냐? 남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아까 정채봉 시인처럼 어려서 엄마를 여의고 그게 한이 되고 그리움이 된 사람들은 여전히 남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그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제 손을 보면 여기에 수술한 자국이 있습니다. 제 손가락이 다 펴져야 되는데 셋째 손가락은 위로 안 펴지고 안 올라옵니다. 저는 기억에 없는데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세네 살 때 제가 개울에서 놀다가 유리에서 베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시골에서 의술이라는 게 없으니까 실로 꿰맨 것처럼 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기억도 없고 그때의 통증도 사라졌지만, 흔적은 이렇게 남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렇게 안 펴집니다. 그러나 더 이상 상처가 나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잘해주시는 것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당장의 보상을 원하시면 이런 종류의 결혼생활을 해 나가는 게 너무너무 힘겨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냐 하면 망가진 내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붓고 베풀어주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것처럼 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과정이 불완전한 나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며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내가 받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사셔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을 전혀 가르치지 않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요구도 하고 대화도 해서 자기의 역할들을 해 내도록 도와야 합니다. 남편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런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게 되실 것입니다.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절벽에 사람이 서 있습니다.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이 팽팽하게 줄을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이 사람 때문에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여기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불완전한 사람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사람은 내가 사랑받을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입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 충분하고 그 사랑이 나에게 너무 감사하고 그 사랑이 너무나 감격적이기 때문에 내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은혜 속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남성 구역에서 남성 성도들이 우리는 라이브도 못 듣는데 우리를 위한 라이브도 해 달라고 하는데 두 번 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 화요일은 11시 30분에 영상으로 여러분들을 뵙도록 하고 화요일 8시 30분에는 장년 남성들이 충분히 퇴근하고 집에 와서 성경 공부를 들을 수 있는 시간에 하겠습니다. 한 번만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실시간으로 듣고 싶으신 분들은 다음 주에는 화요일 저녁 8시 30분에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금요일 11시에는 녹화로 나가겠습니다. 화요일 저녁때 부부가 나란히 앉아서 듣는다면 참 좋지 않겠습니까? 서로 나눌 수도 있고 좋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화요일에 만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