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들풀에 깃든 사랑 (1)
녹취자: 백지영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주는 직장 다니는 분들과 그리고 남성 성도들을 위해서 화요일 날 구역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날은 우리가 두 주 만에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뜨거웠습니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또 워킹맘 하시는 분들도 편안하게 저녁때 공부할 수 있었다는 소견도 들어 왔고 또 오랜만에 부부가 함께 성경공부를 한다는 그런 호응도 들어왔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우리가 금요일 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한 두세 주하고 또 교역자들이 의견을 주시면 화요일 날 또 한번 모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끼리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들이 염려 책 제3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 번째가 나갈 차례이지요? 우리 한번 있는 곳에서 한번 화면에 나온 성경구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28-30)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 들풀이 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을 이렇게 하시고 계시고, 그 들풀은 앞에 나오는 백합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많이 돌보신다, 그러니까 염려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작은 것이다. 이게 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우리 한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백합화를 말씀하셨는데 백합화가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백합화는 상반된 두 의미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우선 고귀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전의 기둥들 그 맨 꼭대기에 있는 형상을 백합화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열왕기상 7장에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들의 성결의식을 위해서 사용되던 물그릇이 있었습니다. 아주 굉장히 큽니다. 그래서 과장이 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놋바다’라고도 불렀는데, 그렇게 큰 그릇인데 그 테두리 문양을 백합화로 했습니다. 열왕기상 역시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으로 저렇게 하나님의 집의 성전 기둥 꼭대기를 백합화의 형상으로 했을까? 그리고 성결의식에 사용되는 물그릇의 테두리 문양을 백합화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이러한 단서들을 아가서에서도 좀 보여줍니다. 그래서 거의 같은 시기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러니까 성전이 지어진 시기와 아가서가 쓰인 시기가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신부를 상징하는 말로 백합화가 등장합니다. 그게 사실은 아무도 백합화를 보면서 화려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꽃모양이 그보다 화려한 꽃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또 백합화가 성경에서 압도적으로 자주 나오는 꽃의 이름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꽃이 꼭 호박꽃 비슷하지 않습니까? 물론 호박보다야 약간 각지고 반듯하지만 색깔도 또 하얀색이지만 그러나 아주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백합화를 그래서 겉모양이 화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그래서 여기서 아가서에서 신부를 백합화로 비유할 때는 아마도 백합화의 두 가지 특징, 하나는 아주 굉장히 강한 향기가 진동하는데 그래서 그런 어떤 향기와 그 다음에 순결함 이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부에 비유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가서의 기록자가 볼 때에 이 신부는, 그러니까 백합화는 좀 과장을 하면 산에 갔을 때 꽃을 발견하기 전에 냄새부터 먼저 맡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럴 정도로 신부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영향력 그리고 신랑만을 생각하고 그에게만 속한 어떤 배타적인 순결함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 보는 것입니다.
왜 이 백합화를 성전 꼭대기 기둥에 사용했는지 그런 설명은 잘 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추해 보는 것이지요. 거의 같은 시기이니까. 그렇게 볼 때 이것은 조심스럽게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기둥이 굉장히 높게 서 있습니다. 그러면 꼭대기를 쳐다보면서 눈에 띄는 백합화의 형상을 볼 텐데 그것을 보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신부다, 너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순결한 사람이 되고 그리고 향기로운 사람이 되거라, 그런 것을 느꼈지 않을까요? 저의 독단적인 추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성전은 구별된 장소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불결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라고 하는 그것을 실현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더더욱 저런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 백합화에 대한 것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일종의 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찮은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0절에 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이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데, 그리고 또 성경에 보면 힘없고 연약한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백합화를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풀을 두고 한 이야기니까 그러면 이 두 개가 서로 상반된 것이냐, 그렇지 않고 구약에 대한 저런 백합화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합화의 고귀함과 하찮음을 동시에 말씀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그렇게 백합화를 성경에서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들풀이 하찮게 아궁이에 던져질 뿐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예수님의 이 어법은 언제 많이 사용하시느냐 하면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고 있는 대목들의 진실성을 가르쳐주실 때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더 강조해서 말하실 때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혹은 아멘 아멘 레고소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런 표현이 동반됩니다. 그러니까 저것은 우리들이 흔히 간과하기 쉬운 어떤 사실을 아주 중요하게 혹은 장엄하게 혹은 진실에 입각해서 우리에게 새롭게 알려주실 때 저런 표현을 쓰신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서 대비되는 것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과 ‘이 꽃’ 이 두 가지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왜 솔로몬의 영광을 저기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금은을 보유하고 있었던 왕은 사실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모든 것들을 마련해 놓았고, 솔로몬이 그것으로 성전을 지었고 그리고 솔로몬 시대 때에 다윗시대의 최고의 판도를 이루었던 이스라엘의 번영을 실제로 열매를 따면서 그것을 누렸던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웠는지 우리들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지 간에 신학교 다닐 때 어느 목사님이 자기가 집에서 홀로 계산을 했노라고 하면서 금 한 돈에 5만 원이던 시절에 솔로몬성전에 들어간 그 금의 양을 성경으로 환산을 해서 계산을 해 보니까 그때 돈으로 80조 원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은 한 네 배 정도 올랐으니까 사실은 한 320조 원 될 정도로 엄청난 액수의 금이 들어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에 동, 철, 백향목, 이런 것들은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성전을 짓고 그 다음에 솔로몬의 궁전을 짓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없는 물자가 있으니까 어마어마한 양의 투자를 해서 그렇게 해서 왕궁을 지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가장 영화를 누렸던 임금으로서 솔로몬을 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이 그 정도의 영광을 누렸으니까 그의 의복은, 입은 것 그랬으니까 의복을 두고 하는 것이잖습니까?, 이것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중국에 자유롭게 다니던 시절에 한번 가서 청나라 황제들이 황궁에서 입었던 옷을 보여주는데 튜닉, 재킷입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제왕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재킷인데, 하여튼 수천 마리의 새들이 날아가는 자수가 놓인 재킷이었는데 그 재킷 하나를 완성하는데 4년 몇 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왕은 한번 입고 먹다가 뭐가 떨어지면 그냥 벗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복을 위해서 봉사했겠습니까? 그래서 신라 시대 때에도 왕의 옷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었습니다. 왕의 옷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왕가의 옷을 담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솔로몬은 그런 점에서 얼마나 엄청난 아름다움을 의상에서 구현했을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결국 왕들의 영광이라는 것은 먹고 입고 그 다음에 거주하는 의식주를 화려하게 함으로써 자기의 위엄과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전례가 없을 정도 그리고 그 후에도 예가 없을 정도로 영광을 누린 솔로몬의 왕의 의복을 왜 당신 자신이 아궁이에 던져질 그런 사물에 불과한 백합화만 못하다고 말씀하셨을까?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솔로몬의 왕의 의복이 있었는데 그 의복은 당연히 아름다운 디자인과 좋은 옷감으로 되어 있었겠지요. 그것은 결국은 그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한 것입니다. 꽃은 그 자연의 일부이지요. 그래서 모든 디자인이 사실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괴한 디자인을 해도 결국 그것은 인간이 본 자연 사물에서 추출하여 낸 추상이나 구상의 디자인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아름답다 그리고 훌륭하다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시간이 없으니까 사실 할 것은 없는데 일평생 별로 취미가 없이 살았습니다. 물론 여행도 좋아하고 독서도 좋아하고 그러지만 그게 취미라고 할 수는 없지요. 맘대로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아직 취미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러나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하면 제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취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진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세 개의 사진이 준비되어 있는데 어제 대공원을 걸으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이것은 어제 찍은 사진인데, 제목을 제가 붙였는데 ‘만족한 고독’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것은 ‘평화’, 아주 저녁시간의 풍경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것도 아마 7시 넘어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보여드리면 이것은 더 늦은 시간인데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이고 대공원의 호수입니다. 이것은 제목을 ‘그리움’이라고 붙였습니다. 오늘 세 분을 추첨해서 하나씩 보내드리겠습니다. 요렇게 액자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끝에는 저의 사인이 들었고 뚜껑을 열면 그 속에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놓고 보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해 보는 것이지요. 재미이지요.
어쨌든 결국은, 의복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한 것이고 백합화는 자연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자연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솔로몬 왕의 의복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백합화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송이의 백합화가 솔로몬의 왕의 의복보다는 훨씬 낫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아름다움이 놀라운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왕의 의복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백합화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같지 않고 다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생명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신비한 돌보심과 생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복은 왕의 영광과 그것을 만든 장인의 솜씨를 드러내 보여주지만, 백합화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백합화의 아름다움이 솔로몬 왕의 의상과 비교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나면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게 되면 자연을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의 수준은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해서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는 데 관심이 있다가 지금은 민도가 조금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아니면 자연을 더 많이 누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고 있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더 한 단계 나아간 것은 그 자연 속에서 자신 역시 그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을 보고 또 자연을 보고, 그 다음에 또 자연을 보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그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자연과의 일체된 교감을 하나님 앞에서 누리면서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자연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백합화와 솔로몬 왕의 의복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이 초보적인 사람들에게는 훨씬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사연을 좀 보고 들어가겠습니다. 많이 들어오셨네요. ‘만족한 고독’, 그 사진에 감동을 받으셨나 보네요. 고독하면 만족할 수 없는데 만족한 고독, 있을 수 있습니다. 와 너무 예쁘네요, 이렇게 칭찬하셔도 어차피 추첨을 통해서 드립니다. 사진 이름도 시 같습니다. 예, 제가 저녁마다 거의 매일 대공원을 산책하는데 한 바퀴 반 정도 돕니다. 그러면 매일 매일 풍경이 다릅니다. 너무너무 예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에 대한 얘기는 없고 맨 사진에 대한 얘기뿐이네요. 김현진님,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꽃에 저를 대입하니 감동이 밀려옵니다. 백스테이지 리님, 이분은 저 멀리 캐나다에서 들어오시는 분인데, 그리움이 맘에 듭니다. 그러시지요? 이건 받아야 한다고 하신 분도 있네요.
또 수님, 혼란스러운 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 자연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을 사랑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요? 자연에 빠지게 되는데 마음을 자연에 빼앗겨도 되는 것인지요? 좋은 질문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어느 유명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선비라고 하면 자고로 풍류를 즐길 줄 알지요. 그러니까 당연히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글도 잘 썼지만 시도 잘 썼고 그리고 예술에도 관심이 있어서 선비들이 추는 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풍류를 즐기는 그것은 선비의 중요한 자격 중 하나였습니다. 어쨌든 그런 인문학적인 취향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사람들이 세월이 너무 어수선하고 힘드니까 자꾸 산속으로 유랑을 많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선비가 비판하면서 그것은 진정한 선비의 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현실도피적인 것이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나무라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을 통틀어서 말한다면 결국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때문에 있게 된 사물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사물들 안에는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어떤 것들은 아름다운 것도 있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있겠지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웠는데 결국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세계가 그런 조화와 질서를 많이 잃어버렸으니까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끊임없이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연결 지으면서 하나님과 단절된 아름다움에 탐닉하지 않는 것이 그게 진정한 기독교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고 그 다음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다, 그런 이야기를 삼위일체에서 하고, 또 고백록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누구에게서 아름다움을 보았다면 그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을 칭송하지 말고 그에게 그 아름다운 것을 주신 하나님을 칭송하라 그래야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고백록에서 노래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그 아름다운 것이 참된 아름다움인지를 분간하는 것도 신앙이고, 그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의 원천인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도 신앙입니다. 이 두 가지가 된다면 그러면 결국은 원천을 사랑하겠습니까 아니면 모상을 사랑하겠습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관광회사에서 관광 상품들을 내놓을 때 텔레비전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요즘은 해외관광을 못가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가고 싶다가도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아, 이제 충분하구나! 동영상으로 봤는데 뭐.” 이러지를 않고, 이상하게 실감나게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더 가고 싶어지고 동영상이 아니라 VR로 보여주고 우리가 거기 진짜 들어가 있는 것처럼 더 실감나게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미치도록 더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결국은 실체와 모형의 관계입니다.
제가 사실은 꼭 여행해 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울릉도입니다. 못 가보았습니다. 배를 그렇게 장시간 동안 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설교를 해야 되니까 갔다가 풍랑이 불어서 또 못 돌아오면 주일을 못 지키는 불상사가 일어나니까 못 갔습니다. 용기를 못 냈습니다. 그런데 2025년쯤에 비행장이 완공이 되고 비행기가 다닐 계획이라고 하니까 그때 되면 좀 가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울릉도를 그렇게 가보고 싶으냐? 갔다 온 사람들이 너무 울릉도를 아름답게 묘사한 것도 원인이었고, 한번은 울릉도 특집을 해 주는데 얼마나 아름답게 동영상을 찍어서 보여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만족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가보고 싶은 마음이 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똑같은 것입니다. 뭐냐 하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연을 보면 볼수록 그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더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결국은 우리는 아무리 자연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것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배신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아름답게 질서 지워진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 현실 생활에 적용해 보면, 사실 우리는 매일매일 덜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다운 것보다 더 끔찍이 여기지 않습니까? 거기서 인간의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임수영님, 모태신앙임에도 몇 달 전 목사님을 유튜브에서 말씀으로 만나고 뒤늦게 회심한 나이 40의 성도입니다. 매일 설교를 듣는 것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 받은 은혜가 끊어질까봐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저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매일매일 설교, 성경읽기, 그리고 눈을 감을 때까지 간절한 기도.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은데, 우선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라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항상 은혜 안에 살아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깊이 만나도 그 경험 자체가 우리의 신앙에 지속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니까 매일매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 송영화님 자연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니 청지기의 마음으로 잘 관리하고 또 함께하며 자녀들에게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연을 잘 보호해서 물려주고 싶습니다. 예, 자연에 대해서 제일 잘하는 것은 건드리지 않고 놔두는 것입니다. 건드리지 않고 놔두면 제일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연의 세계에 가장 피해를 입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끊임없이 개발하고자 하는 욕구, 더 많은 물질적인 것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쁜 공원을 만들고 이러는 것들도 필요할 수 있겠지만, 그냥 인간의 어떤 덧붙인 것이 최소화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인간이 살짝 신세를 지면서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자연에 대한, 그러니까 자연의 개발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개발은 인공이고 자연은 자연인데 자연개발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헐벗은 들판에 나무를 심는다든지 이런 것들은 좋은 일이겠지만, 어쨌든 그대로 두면서 그 속에서 인간이 자연과 함께 공존하면서 사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하십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여기서 ‘생각해 보다’는 이 단어는, 그냥 생각되는 게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어떤 사물을 시각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의 의미를 추적하고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사물을 보면서 거기에서 논리를 찾아내고, 그 논리에서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이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아도 아이들이 이것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내고 그 다음에 그것을 윤리적으로 대입해 보고 하는 그런 것들을 잘 못합니다. 어느 초등학교에 시험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도덕생활, 사회생활인데, “화장실에 갔습니다. 화장실 문을 열기 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정답이 뭐겠습니까?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러면 화장실 문을 열기 전에 뭐를 해야 합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노크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답을 썼는데, 노크라고 안 쓰고 “자크(지퍼)를 내린다.” 이렇게 썼습니다. 이게 오늘날의 교육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마찬가지고 그 다음에 그리스시대에도 마찬가지고 로마시대에도 마찬가지이고 사실은 계몽주의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결국은 교육이 이루어질 때 크게 세 개입니다. 그래서 physica, 이것은 자연입니다. 그 physica가 있고 physica에서 logica, 논리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서 그 다음에 넘어가는 것이 ethica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연, 논리, 그 다음에 윤리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동북아에서 보면 이렇게 물이 흘러갑니다. 이것은 물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물수(氵)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물이 가만있지 않고 계속 흘러갑니다. 그래서 물이 흘러갑니다. 이것은 지나간다(去)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법(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면 결국은 자연을 관찰하고 여기에서 physica를 관찰하고, 그 다음에 이것이 지나가는 것이 하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logica를 발견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결국은 이러한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하겠구나 하면서 여기서 ethica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 이렇게 우리에게 이런 것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에서 논리만 도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사물을 생각하면서 그래서 그 자연들을 통해서 논리를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데, 이게 들에 핀 백합화나 공중에 나는 새만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어리석은 부자를 보면서 그런 사회현상을 보면서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논리를 찾아내고, 결국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취하면 저것은 누구 것이 되겠느냐 거기서 에티카가 나오는 것입니다. 윤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학공부라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이 세상의 학문을 습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논리로 연결시키고, 궁극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신자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는 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하실 때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펼치신 것 이외에는 손에 들고 뭐를 말씀하신 게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고라도 가지고 설교하러 올라가고 안 되면 프레임이라도 작성해서 올라가는 데 예수님에게는 그게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뭐냐 하면,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감각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사용해서 결국 감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고, 그래서 다시 정신이 하강해서 정신 차리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이제 여기 사람이 있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꽃이 심겨지고 꽃봉오리가 되고 그 다음에 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여기서 이 사람이 느낌표를 하면서 여기에서 감탄하고 있는 장면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는 이렇게 변화되어가는 이것들이 그냥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눈길을 끌만 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것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 결국은 평범해 보이는 이 사실이 “아! 정말 놀라운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느낌표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제가 한번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생성과 소멸에 대해서 묵상을 하던 때였습니다. 오래됐습니다. 한 15년 넘었는데 어느 날 아마 수련회를 갔던 것 같습니다. 무슨 수련회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하도 여러 개 했으니까 많은 사람이 간 것은 아니고 교리반 수련회도 가고 했는데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모닥불을 피우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팔뚝만 한 장작을 집어넣었습니다. 불이 탑니다. 불이 타는데 장작이 자꾸 하얀 재만 남기고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런 일을 제가 그때 난생처음 경험했겠습니까? 아니지요. 살면서 수없이 봐 왔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의문을 안 품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것은 뭔가? 왜 팔뚝만 하게 커다랗게 존재하던 나무가 왜 없어지는 것일까?” 당연히 예전의 상식으로 대답하면 불에 탔기 때문에 없어지는 것이지 그랬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뻘건 불길이 타오르면서 팔뚝만 하던 장작이 점점 없어져서 마지막에 하얀 재 몇 스푼 남기고 마지막 남은 속살까지 다 타버립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그러면 이 나무의 실체는 재인가, 불길인가, 불붙지 않았던 팔뚝만 한 크기의 누런 것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이것이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철학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침 이슬, 아침에 이슬이 잔뜩 맺혀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온도의 차이로 인해서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엉키면서 풀잎에 이슬이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니까 또 감쪽같이 모두 사라져 뽀송뽀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세 가지 현상 중 어느 것이 원래의 그것인가? 어제 저녁의 찬 공기 더운 공기가 섞여 있던 그것인가? 아침에 맺힌 물방울인가? 아니면 그것이 모두 사라져버린 아침의 햇살이 퍼진 후의 그것인가? 그러면 이슬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여러분들에게는 저의 이야기가 초등학생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과 없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많은 우리의 편견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소멸은 정말 소멸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사유를 굉장히 많이 자극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은 감각에 매여서 바라보지 못하는 영혼과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뜨도록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이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면서 느낌표를 찍고 있는 것입니까? 그게 결국은 자연과 이것이 저절로, 자연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떻게 보면 무신론적인 단어입니다. “스스로 그러하다” 그 이야기입니다. 영어에서는 Nature이라고 얘기하는데, 라틴어 나투스(Natus)에서 나옵니다. 태어나다, 나츄라(Natura)라고 합니다. 라틴어에서. 그런데 결국은 자연이라고 보는 그것이 일종의 편견이지요. 저절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들에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여태까지 ‘저절로’ 이렇게 말했었는데 생각을 해 보니까 ‘저절로’ 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원인이 없는 결과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아주 예외가 없다고 고집스럽게 강조하는 게 이성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백합화가 저절로 자란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비이성적인 생각이라 이것이지요.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이, 영어의 reason이라고 하는 것이 이성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유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절로 자랄 수 없다는 생각이지요. 우리는 끊임없는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원인이 무엇인가? ‘아!’ 그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아! 결국 하나님이 그것을 그렇게 자라게끔 돌보시고 입히시는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당연히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오고 있는 모든 삶 내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아오고 있는 이 모든 것, 이것을 사유하게 만들어주는 나의 정신과 그리고 이것이 담고 있는 육체의 생명까지도 결국은 하나님께 기대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교육적인 의도를 우리들이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사연 들어온 것을 좀 보겠습니다. 그레이스 킴님, 제주도 올레길을 좋아하는데 걸을 때마다 절로 하나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이런 멋진 풍경에 주심에 감사하고 그런 마음으로 걸으면 마음에 평안이 오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예, 그렇지요.
그 다음에 보면 오렌지님, 하나님을 몰랐을 때 느꼈던 감정과 주님을 만난 후에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모를 때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보면 삼겹살 구워먹고 싶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 자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지요.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자연을 즐긴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 자연을 그렇게 아름답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우리를 아름답게도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원인을 캐고 들어가면 결국은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미학에서 결국은 출발점이 그런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숭고함과 초자연적인 어떤 힘의 아름다움입니다. 거기서부터 미학적인 사유들이 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림을 그리자면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크기와 종류와 모양이 다른 수많은 종류의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함께 어울림으로써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렇게 요렇게 어울림으로써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복잡하게 이렇게 여러 가지가 함께 어울리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美1, 美2, 美3라고 한다면 사실 이 美3가 훨씬 더 고등한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의 원인은 아닙니다. 단지 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움을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려해야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주관과 객관에 걸쳐있는 것입니다. 자, 이 사람이 눈으로 이 아름다움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이 사람 안에서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에 이 美2와 美2가 만나서 이게 아름답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이게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 완전히 불일치하지도 않습니다. 아까 찍은 사진 보셨지만 ‘아, 좋다.’ 그러는데 ‘에이, 저것도 사진이라고 찍었나.’ 그럴 수는 있지만 ‘아, 추하다’ 이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름다움이 크다 작다 내 취향이다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의 풍경이다 아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는 있지만, 각각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들이 어떤 그것이 진짜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여기서 잘 들으십시오. 여기에서 고려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것이 이렇게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여기 이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소위 미감(美感)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도 사실은 자기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은 파악 못 하지만 더 고등한 어떤 아름다운 원천에 대해서, 원미(源美)라고 하는데, 원미에 대해서 뭔가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들어와서 그래서 자신의 그때의 상태의 기분과 이런 것들과 함께 연관 지어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고 안 느끼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어느 때는 어떤 감정하에서 어떤 특정한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이다가 다음에 보면 별로인 건 왜 그럴까요? 그것도 이런 복잡한 일들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평가에도 여기에 궁극적인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신미(神美)라고 저는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고 여기에도 이렇게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전부 다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고, 그 다음에 이것들이 연결된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해서 이것은 하나님 안으로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정상적인 사람들은 여기에서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상승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사유를 통해서도 상승하고. 그래서 결국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숭고한 감정이 들게 되는 것이지요. 육욕에 빠지는 감정에 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공부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인데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래서 결국은 들풀은 그렇게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여 찬란한 아름다움이 되고, 솔로몬의 영광으로 입은 그 아름다운 옷은 결국은 그것 어떻게 흉내를 내 본 것이다. 이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름다움과 가장 닮은 당신의 영혼 당신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는데, 지으셨다는 이야기는 결국은 돌보신다는 의미와 똑같다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은 바 된 그것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지만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더 존귀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연적인 사물과 비교되지 않는 돌보심으로 하나님이 돌보실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돌본다는 말이 각각 다릅니다. 저에게 좋은 선물이 주어졌다고 칩시다. 이것은 펜이지만 너무 소중하면 자기가 이것을 잘 간수하는 것입니다.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돌보고 간직하는 것은 사물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이 돌보시고 지키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겠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숙하리만치 존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에게도 너무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라고 여겨질 때 그때 자신도 올바른 사람이 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염려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비결입니다.
자, 오늘 또 그 후에 들어오신 송진남님, 오래전에 까리따스 강의를 듣고 엄청난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 그러시고요. 기름바다님, 예전부터 들었던 생각인데 자연이라는 말 자체가 비기독교적인 단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결국 언어라고 하는 것이 제한성이 있으니까, 같은 자연이라는 말도 만들 때는 “스스로 있는 것이다”라고 만들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우리들이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이런 언어들을 전달하면서 사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그래서 생각한 단어가 창연(蒼然)이라고 하셨는데, 사실은 창연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당나라 진자황이라는 시인의 시에서 나오는 것인데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자연 그 자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뭔가 자연의 장엄함 그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연의 창연함을 보니 홀로 외로워 눈물이 흐르는구나." 그런 시를 씁니다. 어쨌든 언어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 다음에 김현진씨,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심적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에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말씀의 백신을 맞습니다. 글쎄요. 백신? 신요셉님,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름답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면 기쁨이 충만할 것 같아요. 자꾸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염려하는 모습이 있지만 말씀으로 돌아가 사랑을 깨닫습니다. 기도생활에 더욱 힘써야 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사진 세 점은 오늘 들어보신 분들 모두를 번호화해서 컴퓨터에다 돌려서 무작위로 추첨을 해서 그래서 이것 끝나고 이메일을 보내는 게 아니라 여기에 들어오신 분들에게, 그렇게 안 됩니까? 그러면 이메일을 보내면 추첨을 해서 주는 것입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나는 이 자체를 추첨을 하는 줄 알았는데 홍보실에서 안 된답니다. 사진 받고 싶은 분들은 교회로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컴퓨터에 넣고 돌려서 추첨을 해서 세 분에게 제 사인이 밑에 들어있는 사진을 직접 집으로 보내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보내드리지 못하지만 그러나 세 분이 추첨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일주일 동안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들풀과 꽃 한 송이 속에서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살다가 다음 주 금요일 11시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