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먼저 사랑하셨기에(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녹취자 : 오지윤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금요 구역공부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온 세계가 난리입니다. 전염병을 퍼뜨리는 극단의 후진국으로 알려졌던 우리나라가 갑자기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됐습니다.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만, 그 안에서 좋은 것을 찾으면 더 좋은 것도 발견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절대적으로 좋은 것만 생기지도 않고, 나쁜 것만 생기지도 아니하니, 그 모든 것들을 해쳐나가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요새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다음 공과공부에 몰두를 했더니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텄습니다. 그러면서도 감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이렇게 말씀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신 것도 저에게는 기회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공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성경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께서 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기서 마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령부와 같은 것이고, 목숨은 그렇게 다하기를 마치, 우리가 갖고 있는 최후의 것,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하면서 살다가 죽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는 것이 어떻게 사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뜻을 다하여" 이것은 ‘디아노이아'라는 단어인데, 지성과 관련되어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이 떨어질 수 없이 함께 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우선 한 문제를 풀고, 들어온 사연들을 보겠습니다. 4번입니다. 저를 따라서 같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문제 4)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받은 다른 많은 사랑들과 어떻게 구별됩니까?'
살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 심지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한 사랑도 불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치인지 상세히 보겠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사랑이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동기와 목적에 따라서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크게 넷으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신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 이것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아가페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가리켜서 ‘스톨게' 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부모 밑에 태어나거나, 조상 밑에서 태어난 형제들간의 사랑은, ‘필리아' 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필라델피아' 라고 한다면 ‘필리아' 와 ‘아델포스'(형제) 두 단어가 합쳐져서 ‘필라델피아' 라는 도시의 이름이 됩니다. 형제들간의 사랑입니다. 그다음에,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강력하게 자석처럼 끄는 힘입니다. 이것을 ‘에로스' 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는 공통적 특징이 있습니다. 신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던지, 부모가 자녀를 향한 사랑이던지, 형제가 형제를 향한 사랑이든지, 남녀간의 사랑이든지간에, 겉으로 볼 때 아주 유사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남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매우 유사하게 보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을 예로 들어보면, 사랑하게 되면 어마어마하게 헌신적입니다. 변심했을 때의 사랑의 크기만큼, 미움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 결국은 사랑의 동기가,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사랑의 수혜자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공을 벽에다 튕기지 않습니까? 벽에다 던지는 이유는 공이 벽에 튀겨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리라는 기대 때문에 던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입니다. 스톨게의 사랑이나 필리아의 사랑이나 이러한 것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것을 피할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완전한 사랑이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의 기원을 성경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이것은 사랑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오직" 은 여기서 반어법(반대 접속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다.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냐하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화목제" 는 구약의 제사 중에 하나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드리는 방식과 목적에 따라서 제사를 여러 가지로 분류를 했습니다. 이것은 목적에 따른 분류입니다. "화목제" 에 따른 목표는 화목을 위한 것입니다.
“화목" 은 히브리어인 “샬롬" 이라는 단어입니다. 평화, 평강을 뜻합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이 제사를 드림으로 평화가 이루어지고, 이 평화를 사람들 사이에서도 누리게 되는 것, 이것이 “화목제" 입니다. 화목제의 모든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화목제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라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화목제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다' 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불화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불화하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불화할 경우에는, 그냥 불편한 문제이고, 이익의 문제이고, 물론 상대방이 어마어마하게 권력이 크고 불화가 극심하면 생명의 위협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 대등한 인간관계라면 불편할 뿐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평화가 깨졌다는 것은 훨씬 더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속에서 그분께로부터 사랑과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써 사람다운 존재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면, 인간의 세계와 짐승의 세계는 동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까지는 안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에 새긴 율법, 도리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는 갖게 하셔서, 인류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질서 안에서 사람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진짜 행복하고, 진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 의도하셨던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충분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복음이 필요 없고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지지 않아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 거기에 하나님이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도 사랑이 필요해 근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도대체 어떻게 사랑해 준다는 거야?" 라고 말할 때 다른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네가 살아있는 것, 지금도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 해와 달이 정확하게 움직여서 추위와 더위가 일정한 것,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해주시는 것 등등 수없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써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확하고 훌륭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핵심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성경 구절로 이야기됩니다. 결국 우리들이 여러 가지 많은 사랑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은, 원래 있는 근원적인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절망을 겪고 자살합니다. 인간이 자살을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가 정말 사랑하는 게 있으면 그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그 사람을 살게 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인간에게 사랑은 실질적으로 생명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번을 조금 더 풀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인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이 사랑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가 약을 먹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약과 독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서로 통합니다. 사람이 혼절했을 때 쓰는 약 중에 ‘안궁환' 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그 약을 아이가 6개월씩 잘못 복용하여 장애가 온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복용하는 약이 아닙니다. 한의사의 말에 의하면, 그저 몇 번 정도 위급할 때 복용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깨어나게 한다는 신비한 약입니다. 그 약 속에는 그 약만 먹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성분 ‘주토'라는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그 성분이 다른 약과 적당히 배합되서 들어갈 때 우리를 살리는 기능을 가지는 대신에, 그 성분은 당연히 부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조리사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어에게 우리 몸에 좋은 성분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복어의 알을 안전하게 제거했어도, 미량의 독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삼시 세끼 복어를 먹는 것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먹는 것은 괜찮겠지만, 주식처럼 먹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렸냐면, 모든 사랑에 부작용이 있습니다. 어떤 자매가, 자신이 어떻게 불교 신자가 되었는지 글을 썼습니다. 어떤 형제를 만나서 불같은 사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자세히 안 써져있지만 사랑이 깨졌습니다. 사랑이 천천히 식다가 깨지던지, 헤어질 준비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 사랑이 깨지면 - 물론 충분히 됐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오래 전에 마음속에서 사랑이 깨진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충격이 덜한데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는데 타의에 의해서 사랑이 박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 자매(여대생)가 결국은 자살까지 결심합니다. 교회를 찾도록 누군가가 전도해 주지를 않았는지 결국은 절에 가서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스님이 가르쳐준 이야기가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욕심이고, 그 욕심과 집착이 끊임없는 업이 되어 자기 인생을 옭아매는데, 그게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아주 단순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욕심이 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니, 욕심을 버리고 살아라 라는 간단한 가르침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 가르침이 평범하게 들렸겠지만, 그러나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고 있었던 이 사람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에, 사랑하는 것조차도 모두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인생에 비극적인 순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런 고백을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해석이 조금 다릅니다. ‘잘못된 사랑을 비우고 욕망을 내려놓음으로써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다.' 라고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옹달샘을 보면 샘이 계속 솟습니다. 물을 확 퍼내도, 모래에 의해서 신기하게 퐁퐁퐁 하고 샘이 계속 솟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인간에 있는 그러한 욕망을 덜어낸다 해도, 그것이 항구적으로 덜어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욕망의 퐁퐁 거리는 솟아오름 속에서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자매가 그 이후로 모든 불행해질 수 있는 욕망을 영원히 버렸겠습니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한다면,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모든 사랑은 다 그림자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 문제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사연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모두 사랑하신다는 말씀 가운데 택하지 않은 백성까지도 사랑한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택함 받지 않은 백성도 사랑하신다고해도 결국 지옥으로 가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택함 받은 백성에 대한 사랑이 아닌지요? ”
이것은 신정론에 관한 유장한 논의의 벌판으로 데려갑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바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형벌을 받을 존재다” 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이 건지셔서 살리시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꼭 구원하고만 관련지어 생각하지 말고, 더 넓게 본다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것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인간이 원래 모두 멸망하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는데,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다' 이 사랑을 성경이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게 하신다면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들, 동식물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사연) 사랑은 우리들이 흔히 쓰는, 관습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사랑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내가 우리 코코도 좋아할 수 있고, 벚꽃엔딩이라는 노래를 좋아할 수도 있고, 지금은 조금 다른데, 제가 젊었을 때에 진짜 좋아하던 날씨가 있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청대 같은 비가 쏟아지면서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어서, 그 비가 발처럼 좌우로 휘날리는 그러한 날씨에, 천둥번개까지 치는 날씨를 제가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것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의 사랑은 영혼을 가진 존재끼리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동식물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표현을 했다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지, 신학적이고 성격적인 정확한 묘사는 아닙니다. 5번 문제를 보겠습니다.
문제 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도 높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발현을 해서 누군가 타자에게 - 하나님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동물일 수도 있고 - 사랑을 이렇게 준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랑관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하는 참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인간은 하나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짐으로써, 이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제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모든 인간을 그 품에 끌어안고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모든 피조물을 감싸고, 그래도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자기회귀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에게 인간이 아무리 사랑해도, 이기적이면 그 사랑이 순전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이것은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기적이면 이기적일수록, 이타적인 사랑이 됩니다. 조금 더 풀어보겠습니다. 참사랑이 있는데, 당연히 하나님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인간이 사랑을 합니다. 이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이기심을 내포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행복해지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이기적이면 이기적일수록, 이타적인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완전히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사유는 우리의 생각을 매우 깊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삶을 비옥하게 만들어줍니다. 사랑에 대한 사유가 깊으면 깊을수록, 안 보였던 성경의 많은 부분이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습니다. 선을 떠난 인간에게 고통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고통 받는 과정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떠났던 사람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인이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아주 위대한 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 악을 저지른 사람을 증오하면서 고소해하면서 그가 고통 받는 것을 바라보지만, 인간적인 묘사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엄마가 자식이 올바르게 되게 하기 위해서 때리면서, 맞는 자식보다 더 아픈 고통을 느끼면서 때리듯이, 그러한 마음으로 악인들도 고통을 받게 하십니다. 목표 자체는 악인이 악을 행했음으로 그것만큼 고통을 주게 하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동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새 n번방 사건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고, 벌써 몇 사람이 자살을 시도했고, 그중 어떤 사람은 안 죽었고, 죽었습니다.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주범이, 이번 기회에 그 모든 것의 허무함을 알고, 짐승 같은 생활을 끝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했습니다. 자신이 그 일을 하면서 편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허무함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편으로는, 관련자들을 엄벌해서 다시는 그러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이 정말로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죄악 되고 허무한 일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해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도 높은 사랑을 원하신다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완전하지만, 그 사랑은 마치 오염될 수 있는 그릇에 담긴 음식과 같아서 늘 우리의 마음이 부패함으로, 변질된 사랑을 우리가 갖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되,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당장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건입니다. n번방 사건에 나온 사람들도 보면, 행복을 그런 곳에서 찾았기 때문에 결국은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겠습니까?
사랑의 문제는 남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복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에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은 참되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데서 불행이 옵니다. 조금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도 없지만, 혹시 올바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남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올바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사용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떠나서 자기가 세운 질서를 따라서 살아가는 욕망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이 여전히 살아계시고, 그것을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당신의 위대한 존재와 당신의 인자하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인간을 선택하시고, 가족을 선택하시고, 나라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모든 전개되는 과정이, 하나님이 구약에서 이적과 표적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특별히 기적을 행하시고, 아브라함의 가족을 위해서 특별히 기적을 베푸시고, 아브라함을 위해서 초자연적인 일들을 행하셔서, 당신이 그들과 매우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을 설득하시는 과정입니다.
신약에서는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보이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레나이오스'라고 하는 초대교회의 교부가 있었는데, 그가 ‘모든 이단들에 대한 논박'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하나님처럼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렇게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구약 속에서 이러한 기적과 표적으로 나타났던,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완전히 사람들에게 더이상 분명하게 보일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그 사랑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 보여져서, 모든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모든 육체의 감각으로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했는지를 볼 수 있었고, 믿음으로써 인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숙제는, 사람이 이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데, 이 사랑이 인간이라는 마음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담고 있는 마음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주신다고 해서 물질처럼 띄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고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었는데, 이 마음이 부패해지면서 사랑이 변질됩니다. 이렇게 변질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야 할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향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온갖 염려와 근심들이 생겨나게 되고, 순수하지 않은 사랑으로 순수하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정화하는 길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회개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죄와 자기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순수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게 가능할까요?" 라고 묻는데, 그러면 제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백지 위에다가 연필을 잡고 원을 그린다면,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이 가능합니까?" 제 생각에는 기계로도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그것을 손으로 그릴 때, 못 그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완벽한 원을 생각하면서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없이 그린다면, 결코 원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몹시 불안전해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완전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 땅에 있는 신자들에 비해서 죄가 섞이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는 완전한 사랑이지만, 무한한 사랑은 아닙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으로 돌아가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우리가 참된 자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6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문제를 읽고 사연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문제 6)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삽니다. 그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와 동기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감화 때문에, 그렇게 살게 되는 것 입니다. “사랑과 정의에 관해 늘 한쪽만 강조하는 글에 지쳤는데, 뭔가 속이 시원합니다. 감사합니다.”(사연) 사랑과 정의는 하나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배제하지 않고, 사랑은 오히려 정의를 완성합니다. 정의의 목표는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번 공과 책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림같이 다뤘다 생각하고, 다 쓰고 제 스스로 "내가 보니 참 좋았더라" 고 생각했는데, 독자들이 읽을 때에는 어땠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으로, 당신의 정의를 완성하시는지를 그림같이 묘사해보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등록된 교인들에게 한정된 이야기지만, 이번에 당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오늘 탈고가 끝나서 4월 안에 책이 나오는데, 그때까지 만약 우리가 모두 모이지 못하면, 모두 구역원 수만큼 집으로 보내드리기로 한 것을 아십니까? 역시 똑같이 이러한 방식으로 공과공부가 진행이 될 것입니다.
“욕심과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데, 여전히 작은 이익의 가치에 집착하는 내가 부끄럽습니다.”(사연) 거리를 두시면 안 되고 버리셔야 합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만, 차이는 그릇된 기를 가면서도 “뭐 어때" “그래서" “너는 얼마나 잘났어" 그렇게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늘은 욕심을 내던 것을, 오늘 밤에는 내려놓고, 내일은 욕심을 다시 낼지 모르지만, 또 모래 아침에는 그것을 내려놓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제 설교를 오래 들으셨던 분들은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제가 개척교회에 다닐 때, 교인이 30명 정도 됐습니다. 목사님이 새벽기도 설교를 하시는데, 4시 30분에 합니다. 잔인한 시간입니다. 장작 난로를 때우며 준비를 하는데, 교인 한 사람이 방석 위에 앉았는데, 찬송을 부르더니 자꾸 방석을 옆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때가 1975년도의 일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찬송을 계속 하며 이동을 하더니, 갑자기 쓰러져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우리 마음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라는 찬송이었습니다. 그 방석 밑에 오천 원짜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오천 원이 나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새벽기도를 나왔는데, 오천 원짜리가 교회 바닥에 떨어진 것입니다. 계속 방석을 이동해서 덮어버린 것입니다. 하필이면 깔고 앉았을 때의 찬송이 “우리 마음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여기서 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은혜를 받으시고, 회개하면서 사시면 됩니다.
“우와, 그 공과책 우편포장하고 싶네요.” 공과책을 나누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쓴 댓글 같습니다. 역시 공짜만큼 우리의 감격을 불러내는 것이 없습니다. 네, 우편포장해서 보내드릴 겁니다. “목사님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시적이고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 그레이스 켈리 님 이신데, 이름처럼 아름다우신 말씀을 하십니다. 인생 살아가는 게 시 아니겠습니까? “저도 받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우리 교인이면 드립니다.
마지막 6번을 힘내서 하겠습니다. 그림을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듣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어떤 심리인지 아십니까? 비록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 사랑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너무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 나에게도 행복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에게 줄 선물을 하나 샀습니다. 용돈도 줄여 쓰고, 눈물 나게 애를 많이 써서 선물했습니다. 그래서 그 선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너무 아내가 행복해합니다. 그러면 며칠 동안 점심 굶고, 용돈을 아껴 쓰면서 겪었던 고통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이 예화를 그렇게 생경스러운 눈빛으로 보십니까?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것도 안 아까운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에 제일 좋은 시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찼을 때, 두 번째는 자신에게 무지무지하게 실망했을 때, 소극적으로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는 마음이 열리는 때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그 말씀을 쭈욱 빨아들일 때입니다.
사랑과 지식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 입니다. 그림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받습니다. 이것을 은혜를 받았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사랑을 받으면 누구를 기쁘시게 하고 싶겠습니까? 당연히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너무 가슴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며 뉘우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온 것이 너무 후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킬 때, 너무 힘겹고, 지겹고, 엄청나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하고 있는 증거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세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결코 그의 말은 들을 수 없다, 이것은 이용해먹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그 사람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하나님의 계명을 가장 빨아들이듯이 배울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 갈수록, 하나님을 아주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연 들어온 것 한두 개만 읽겠습니다. “사랑과 지식은 하나다.” 네, 당연합니다. “사랑하면 더 알고 싶고,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알고 싶고, 더이상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주님의 뜻을 지키며 살고 싶어요.”, “목사님, 친정아버지 같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코로나랑 싸우시고, 이번 주일이 종교주일이고,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이고, 그 사이에는 십자가 사경회 있는 것을 아십니까? 변함없이 새벽에 사경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