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7)
녹취자 : 박혜아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첫째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첫째”와 “모두”의 차이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우위를 겨루는 것과 전부가 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삶의 모든 이유가 됨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첫째, 둘째, 셋째, 넷째라고 할 때 과연 사랑에 그러한 것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뒷부분에서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삶에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곧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화면을 보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 유명한 염려에 관한 말씀을 하시다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마 6:26)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연 세계와 인간으로 나누어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연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그것을 돌보고 계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이 그것들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돌보고 귀하게 여기신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다시 한번 화면을 보겠습니다.
사람은 자연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와 전혀 다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층차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는 하나님이 그냥 자연을 생겨나게 하셨고, 거기 있는 것이 하나님이 좋으셔서 돌보시지만, 사람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좁은 의미로 본다면 사랑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 사람,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들에게 혹은 자연 세계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돌봄하고는 비교될 수 없는 관계를 인간 세계와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알고 또 서로에게 정을 느끼고 서로의 뜻을 헤아리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연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비교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셨는데, 이것은 당신이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인간의 행복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나누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안다고 해서 모두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인데, 자기 자신을 좋아하면 당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항상 선하고 가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통제받지 않고 내버려 둘 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육체에 속한 것들이 대부분을 이루게 됩니다.
그림을 보면 음악을 즐기는 취미 생활이 있고 당연히 그런 것들을 누리려면 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고 그다음에는 당신의 인생의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하나님을 거역해야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이(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다’라고 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저런 식으로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인간이 절하는데, 사실은 자기가 육체의 원하는 것을 얻음으로써 잠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모습으로 인간이 자신 속에 있는 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결국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육체에 있고 세상에 있는 것만을 가지고는 만족하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일에 매몰되다 보면 영혼에 반드시 나쁜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현재에 살았던 이런 모든 삶은 현재에서뿐만 아니라 미래에서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모순이 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 있다는 것이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고통받을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하는 것들과 결별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독점적 사랑을 원하심
우리가 어렸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좋은 일이고 원하는 일인데 엄마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대부분은 이상하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고, 내가 즐거워서 하고 싶은 일들은 대부분 하지 말라고 하거나 많이 하지 말라는 일들입니다. 요즘은 그런 말들이 거의 사라졌지만 어렸을 때는 노는 것이 최고입니다. “자, 우리 놀자. 무얼 하고 놀까.”하면서 놀거리를 찾습니다. 그것이 어렸을 때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장하고 나면 관심사는 다시 바뀌게 됩니다. 더 고등한 것으로 계속 바뀌는데, 고등하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고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크기가 더 커지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간은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사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 인생은 누구든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가 큰 고통을 겪을 것을 아시면서도 왜 우리에게 그런 고통을 주시면서 까지 결국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때 인간이 비교적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랑받기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다른) 인간을 의존하고 또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사랑을 받아야 행복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셔야만 온전한 존재가 되신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때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면서까지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 우리를 끊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으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자체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보겠습니다. (그림의) 맨 왼쪽의 ‘마음이 분산됨’의 그림을 보면, 마음이 분산된다는 것 자체가 사랑과 관련이 됩니다. 당연히 사랑이 있으니 염려가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 즉 욕망할 것이 없는 사람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염려는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삶에 애착이 남아 있어서 삶이 두려운 것이지 애착을 버리고 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분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어거스틴이 잘 사용한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당연히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볼 것입니다. 보고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 온갖 것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전부 다 자기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어떤 것은 시간을 갖고 흘러와 지금 상태에 있지만 거기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디론가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는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일관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합니다. 변하는 마음으로 변하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 찢어지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있는 것인데 영원한 것인 줄 알고 영원히 있는 것인데 잠시 있는 것인 줄 알고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진짜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해서는 안 될 것에 혼돈을 느끼면서 마음이 분산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염려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이런 마음의 질서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질서를 잡게 되면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일시적인 것인가 하는 판단이 생기게 됩니다.
자, 이렇게 마음이 분산되고 고통이 시작되는데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결국은 당신께 향하지 않는 마음을 당신을 향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애착하던 것들을 잃어버리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아, 이것이 덧없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덧없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무상’입니다. ‘무상’이라는 말은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은 ‘항상성’을 말합니다. 항상 그러한 것, 즉 항상성이 없으니까 이것을 ‘덧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하던 사람도 떠나고,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하고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던 돈도 떠날 때, 인간은 비로소 경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경악하게 됩니까. 영원한 것,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메스미디어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펼쳐져서 우리 앞에 제시되는 모든 세상들이 사실은 우리를 속이고 숨기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젊은 사람이 아주 행복하게 연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가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어쨌든 남녀가 예뻐야 합니다. 아주 곱게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도 그렇게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쁘고 젊습니다. 돈도 많습니다. 그리고 능력도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부모들도 대단한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상태 속에서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을 잃어버려서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한눈에 그 아름다움과 함께 저 사람들도 늙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공정하게 제시하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행복하게 사랑하던 사람들이 내일은 헤어지고, 오늘 젊음을 과시하던 사람들이 내일은 큰 질병에 걸려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하는 것이 인간의 공정한 모습인데, 그중에서 어느 한 토막만을 영원한 것인양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것에 계속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문화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우리는 인생이 영원으로부터 와서 시간을 지나서 영원으로 간다는 평범한 교훈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을 공정하게 보는 눈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을 비롯해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 문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몰입하는 것에 대한 위험을 이야기했던 것이 ‘세상은 문화 자체가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인생을 공정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다음 도표를 보면 결국 애착하던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깨닫는 것이 자신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허무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통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점검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상실의 고통을 통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의 허무함을 깨닫고 진짜 자신이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신앙의 성숙의 과정이고 인간이 온전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떤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분산되어 있습니까. 염려합니까. 그리고 몰두하고 있는 대부분의 일이 가치가 적은 일이거나 혹은 그것 때문에 진짜 인간이 추구하면서 살아야 될 것들이 도외시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이미 그 단계가 지나서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세상 사랑을 몰아내는 가장 중요한 방편은 무엇입니까?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사랑을 몰아내고 참된 사랑을 불러오게 됩니다.
한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은 금애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표현이지 않습니까. 금연학교가 있습니다. 담배가 우리 몸에 주는 폐해가 너무 커서 금연을 해야 하는데 평범한 사람은 (담배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담배는) 너무나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 담배를 많이 폈고, 회심한 이후에도 담배를 몇 년 피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끊게 되었는데, 정확하게 얼마쯤 시간이 걸리면서 중독의 상태에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단순히 어느 정도인지의 기간이 아니라 자기 몸이 얼마나 그것을 깊이 빨아들이면서 즐거움을 느끼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담배 피는 장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그 사람이 평소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압니다. 가장 뚜렷한 특징이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는 파란색이고 연기가 몸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는 회색이 됩니다. 그런데 그냥 담배를 입에 머금었다가 뿜어내면 담배 연기 색깔 자체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담배 연기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담배를 진짜 좋아하는 애연가들은 담배를 입으로 쭉 연기를 빨아들인 다음에 폐로 깊이 들이 마시면 담배 연기가 폐의 기포 하나하나에 닿으면서 니코틴을 뭍이게 됩니다. 니코틴이 꽈리에 붙으면서 핏줄로 타고 들어가 피를 타고 흐르면서 신경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허기진 상태에서 담배를 피우게 되면 마치 약을 복용한 것처럼 마취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갑자기 기운이 싹 빠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독특한 느낌 때문에 담배에 인이 박히게 됩니다. 그런 느낌이 너무 좋은데 다른 것은 (그 좋은 느낌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서 그런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즐거움에 중독이 되다 보면 담배 없이 살 수 없는 의존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담배의 질은 얼마나 양질의 니코틴을 우리 몸속에 넣어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필터가 아주 좋고 몸에 나쁜 것을 제거해 주는 파이프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하는데 신뢰할 수도 없지만 설령 파이프를 통과한다고 해서 담배를 피우면 담배의 고유한 맛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기가 쉬운 것에 ‘금’자를 쓰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금애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금(禁)’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랑이 바람직한 사랑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그 사람이 권장할만하다면 ‘장애(獎愛)학교’, 즉 사랑을 권장하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사랑은 결국은 자기사랑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자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데 또 한편으로 중독된 세상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저도 경험해 보면 한 번도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담배를 물고 교회 마당을 돌아다닐 용기는 없었으니 그것이 옳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락가락하며 살았는데, 그럼 거의 은혜를 받지 못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고 하나님을 사랑했는데도 (담배가) 잘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네 번 만에 작심하고 끊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네 번째 (작정)에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끊을 수 있었습니다. 굉장히 엄청난 금단 현상을 겪었습니다. 아주 굉장했습니다. 마지막에 흡연 경력이 스물 네다섯 살 쯤 이었으니 한 10년 이상 담배를 피웠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한 갑 반 씩 소비해야 하는 흡연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단 현상은 아주 엄청났습니다. 불안증이 (생겼습니다.) 양쪽 주머니에 사탕과 과자를 잔뜩 넣고 (다녔습니다.) 당시 제가 입에 안 대는 것이 사탕, 과자, 껌이었습니다.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그것이라도 먹으면서 달래야지 말입니다. 불안증과 비슷한 헤아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것도 참지 못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끊고자) 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폐도 안 좋고 다른 여러 부분도 안 좋다고 느끼면서 건강의 문제를 느꼈는데 이것도 없어졌습니다. (저는) 먹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당시 56kg밖에 안 나갔으니 삐쩍 말랐고 뭐든지 먹고 싶은 것이 없었습니다. 진짜 1년 내내 세월이 지나도 먹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는데, 밥맛도 좋아지고 혈색도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끊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흡연의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기회만 있으면 세상 사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금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그릇된 사랑이 가져다주는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잘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자신의 용기와 결단으로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이 분산됨, 애착하던 것을 잃음, 세상 사랑을 깨달음’이라는 3단계의 고통을 겪으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우리들이 회개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는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제정신을 차리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버리고 진짜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들로 돌아오는 끊임없는 반복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만큼 하나님을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와 믿음의 두 날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금애학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움으로써 중독된 세상 사랑을 끊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자기 사랑(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금애학교는 장애(獎愛)학교입니다. 즉, 잘못된 사랑은 금하도록 훈련을 받고 좋은 사랑은 계속 장려 받도록 권장을 받는 학교가 결국은 기독교 신앙의 학교입니다. 결국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질문
몰입과 중독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몰입은 중독의 원인이 되고, 또 중독되면 몰입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몰입은 중독의 원인인 동시에 중독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게임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볼까요? (그런 사람들은) 게임 중독이 심각하지 않습니까. 게임을 할 때 항상 딴 생각을 하고 억지로 하는 사람들은 중독될 염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몰입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게임에 중독이 되면 그다음에는 몰입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독이라는 것 자체가 거기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어서 중독이 되는 것이지, 괴롭기만 한 것은 중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독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중독이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에 중독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에 비판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하나님의 사랑에 중독이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중독은 ‘독 가운데 있다’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상은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독은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중독은 자유로운 주체로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듭니다. 그것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자유로운 주체로 살기를 포기한다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삶이 우리 앞에 전개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나라가 마약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벌을 내립니다. 최근에 한국에 있는 아시아에서 최고라고 하는 마약왕이 태국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마약을 200kg 정도를 유통했다고 하는데, 약 2000억-3000억 원 어치의 가격이라고 합니다. 200kg 정도라고 해 봐야 세 부대 정도 될 텐데 그렇게 비싼 것이니 소량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마약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마약을 먹은 사람들이 모두 길거리에 칼을 들고 나가서 사람들을 찌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법으로 어마어마한 형벌을 내리고 금지시키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인간이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약만 우리에게 이런 문제를 일으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판단력을 잃어버릴 정도로 몰입하게 되는 게임, 어마어마한 산업을 이루고 있는 포르노 등에 대한 엄청난 몰입이 결국은 중독을 가져오는 것이고, 중독된 만큼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법이 그것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살아서는 인간이 온전한 삶에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르노나 게임 혹은 어떤 취미 생활에 자신의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가 저해 받을 정도로 몰입하고 의존하면서 사는 것은 질병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고 직장에서도 열심히 일하며 삶의 활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세상 문화에 몰입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늘 사람들의 관심사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애쓰게 됩니다. 이럴 때 믿지 않는 사람 자체를 멀리하게 되거나 현실 자체에 무관심 또는 회의적인 태도가 생기기 쉬운데 이럴 때 분별력을 갖기 위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질문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활력을 가지고 세상에서도 열심히 살아갈 것 같은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문화에 몰입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기 하기 위해 거리를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거리를 두는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세상 문화에 더 몰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드릴 수 있는 조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문화라는 형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30년 전이라면 우리가 이런 식의 (온라인) 구역 예배를 꿈이라도 꿨겠습니까. 불가능했습니다. 30년 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장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간단하게 소통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기술 자체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면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면 결국 우리에게 엄청난 유익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악한 사상을 전파하고 쾌락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아니 실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산업들이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문명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이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다.
저는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저러한 갈등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신앙을 감추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경쟁하면서 살든가 아니면 그 자체를 세상이라고 보고 직장에서 와서 일하고 돈을 벌지만 직장은 내가 살기 위한 하나의 직업 활동일 뿐이고 모든 관심사는 교회에 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직장에 와서 주보를 만들고 하는 사람들도 봤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가까이 하면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다, 불경건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할까요? 오히려 반대일 수 있지 않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직장 다니면서 퇴근할 때 같이 술 마시러 갔습니다. 그런데 모든 (회식에) 참석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회가 되면 항상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술은 먹지 않았습니다. 술 먹는 것이 죄 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나는 싫다, 당신들에게 술을 먹을 자유가 있다면 나에게는 안 먹을 자유가 있다.’고 한두 번 단호하게 좋게 말하면 사람들은 권하지 않습니다. 아주 심술궂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갈등을 일으킨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 직장 다닐 때 술 마시러 따라갔기 때문에 술을 먹고 싶다고 유혹을 느낀 적도 없고 이상한 분위기라서 이상한 욕망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내 자신이 단단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비결은 자신감과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나도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회식에) 참석하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술집에 앉아서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강해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인생 살면서 이런 일 겪고 저런 일 겪고 (했던 일을 이야기했고, 때로는) 자기 의견도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경건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만나는 경건이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하루의 시름을 달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가엾어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게 되고 전도할 기회도 갖게 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열심히 기도하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그럼 제가 오늘 배운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첫 번째로 사랑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우리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이지 두 개, 세 개, 네 개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랑이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게 되면 사랑에 의해서 마음의 모든 질서가 지워지게 됩니다. 사랑 자체가 질서를 짓는 행동입니다. 진리는 그 질서를 정해주고 그것을 우리가 알도록 해 주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알게 된 진리를 진짜 내가 사랑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럴 때 결국은 여러 개의 사랑인 것 같아도 사실은 여러 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고 그 하나의 사랑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 의해서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 질서를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신 하나님을 어떤 경우에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여전히 세상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습니다. 살아있는 한 그것을 결코 결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 안에 다른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 자기 깨어짐과 회개의 필요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매일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서 모든 것들의 질서가 잡혀서 살아야 될 삶이 아래에 있는 것이 박차고 올라오면서 내 마음에서 중요한 것처럼 떠오르게 됩니다. 이때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깨달으면서 회개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공과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사태로 많이 어려운데 경건 생활하기에는 훨씬 좋은 환경인 것 같습니다. 홀로 있어야 하고 혼자 기도할 시간도 많고 말씀 볼 시간도 많으므로 오히려 경건 생활에 힘써서 믿음으로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