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홀로 사랑받으실 주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녹취자: 이새봄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벌써 한 주간이 지나고 우리 라이브 구역공과 공부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지난주에 정말 많은 분들이 참여하시고 엄청나게 많은 댓글들을 보내주셨고 소통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좀 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기 전부터 댓글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시겠습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리기로는 다음 주에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했던 ‘고뇌’, 우리가 말하자면 염려와 근심, 이런 것들이겠습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이것을 승화시키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시겠죠? 그래서 세 문제를 오늘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한 문제를 풀고 지난주에 약속해주신 ‘고뇌에 대한 기독교적인 승화’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보호해주시고 오늘 이처럼 라이브 구역공과로 모이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내려주시고 속히 온 성도들이 한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저희들에게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지금 9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함께 본문 37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자, 3번 문제 먼저 풀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같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질문3)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포함하고 있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잠깐 나왔던 이야기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씀이 희랍어로는 ‘큐리오스(Κύριος)’이고 구약성경에서 ‘아도나이(Adonay)’, ‘주인’ 혹은 ‘주님’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풀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경을 보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굉장히 많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특히 11장에서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는데,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또 폐하기도 하고 또 불 가운데를 지나면서 승리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 자처하면서 살기도 하고 토백형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순교하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그러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그런 믿음이 왜 그렇게 신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들이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공경하는 것’, 이것이 강조되었는데 신약성경에서는 ‘믿음’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신약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길을 알게 되기 때문에 ‘믿음’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뭐냐, 어떤 분이 ‘믿음’에 관해서 설교를 하시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우리가 믿음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비행기를 타더라도 안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늘을 나는 여행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지라고 강조하는 ‘믿음’하고는 성격이 좀 다른 것입니다. 통계가 나왔는데 일반적인 비행기, 여객기를 타고 여행을 할 때 사고가 날 위험이 인도를 걸어갈 때에 차가 튀어 올라와서 그 사람을 치어죽일 확률 정도가 된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비행기를 탈 때 필요한 그 믿음은 사실 확률에 대한 인정이지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그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확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에 대한 신뢰입니다. 즉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신뢰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이 많이 차이가 난다고 그렇게 생각을 분명하게 하셔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이 비행기는 기가 막히게 만들었습니다. 진짜 좋은 비행기 많이 나오잖습니까? MAX7007처럼 사용 중단되고 수백 명을 추락하게 만든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비행기는 안전하잖습니까? 더군다나 커다란 대형 비행기들은 안전합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안 떨어질 것이라는 내 믿음이 비행기에 대한 사랑을 갖게 만들거나 조종사를 한없이 내 마음 속에 애틋하게 생각하게 만들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믿음’하고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자, 그 정도 놓고 보면 결국 그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고 또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넓은 의미에서 우리들이 ‘믿음’이라고 본다면 그 ‘믿음’의 중심부로 들어갈 때 그 모든 것을 믿음을 ‘믿음’이게끔 하도록 만드는 그 핵심적인 사상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에게 속한 존재이다, 그분에게 속했다’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속한 것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은 결국은 나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 ‘속했다’라는 것은 주체적이지도 않고 고유하게 자기이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을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것이 행복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인이 되신다’고 할 때는 그 개념 자체를 세상에서 끌어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소위 ‘주종관계’라고 하는 것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생각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의 소유가 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 아니면 누가 나를 소유하고 내가 그의 소유가 됨으로써 이것이 자랑스럽다? 이런 것을 상상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종관계에 있는 사람은 항상 주인의 집 아래서 항상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자유를 억압받는 그림이 그 안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림밖에 우리들이 못 보기 때문에 그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마치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그것을 기독교가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예를 들어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결국은 이 아들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집을 멀리 떠나 허랑방탕하게 다 쓰고 거지가 됐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조차 없어서 굶어 죽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에도 그 사람은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개념이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일꾼, 풍족하게 먹고 마시며 인간다운 삶을 사는 종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 내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그 품꾼 중에 하나로 여기소서.”라고 하겠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탕자가 정말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은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그를 다시 사랑해주시는 그것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진짜 아버지는 나를 아들로 여기셔도 나는 아버지의 집의 품꾼 중 하나로 여겨달라는 마음으로 살겠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할 수 있으시겠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가 그의 소유인 것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그렇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유비가 없다 이것입니다. ‘유비’ 아시죠? ‘analogy’라고 합니다. 뭔가를 서로 상대가 되고 비유가 되는 것들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이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느냐 하면 이런 이치입니다. 인간은 모두 누군가가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할 때는 그를 소유함으로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갖기 위해서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를 들어서 내가 회사를 운영하는데 직원 하나를 뽑겠다, 자기가 할 수 있으면 돈 주고 사람을 뽑을 리가 없잖습니까? 자기에게 없는 것,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자기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잖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뭐가 모자라시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더 갖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면, 또 더 가질 수 있는 것이 있으시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안 갖고 계신 좋은 것을 우리가 갖고 있다면 우리가 사람일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고자 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의 어떤 모자람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당신이 주가 되시고 우리는 모두 그의 소유로 살게 하시고 싶으실까? 우리는 그런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께 자기를 다 드려 그의 소유가 되는 것을 행복해하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그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그 분량에 맞는 삶을 행복해하면서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으로 여기는 것,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믿고 회개하고 다시 사랑하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돌아가는 지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고 난 그 모든 것 안에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 내가 가장 그 안에서 행복하고 안식을 누린다’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 이제 막 댓글들이 엄청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지난주 기독교에서 고뇌를 어떻게 환희로 승화시키는지 말씀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잊지 않으셨죠?” 네, 참 급하시네요. 알고 있습니다. 오렌지 님께 지난주에 약속해 드린 바와 같이 『자기깨어짐』을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예쁜 사연을 또 한 분이 보내주셨습니다. 김현지 님, “오늘도 잠근 동산으로 봄나물 김밥 싸들고 소풍갑니다.” 아마 이 뜻은 구역공부에 온다는 뜻이겠죠? 설마 잠근 동산에 담 넘어서 가실 리는 없을 것이고 소풍 오는 기분으로 구역모임 오신 분께 우리 권사님이 수제품으로 만드신 마스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꼭 yullin.org로 신청해주셔야 합니다. 박수로 환영해주겠습니다.
번외질문)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했던 ‘고뇌’, 우리가 말하자면 염려와 근심, 이런 것들을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이것을 승화시키는가
그러면 이제 한 문제를 풀었으니까 우리 지난번에 약속한 바와 같이 한 번 ‘고뇌’의 문제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염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고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쇼펜 하우어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그리고 제가 한때 이 사람의 열독자였다는 것까지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때가 20대 초반이었습니다. 21세에 회심하기 전까지 제가 아주 열렬한 독자였는데,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쇼펜 하우어가 이야기하는 고뇌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게 이런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자, 이게 지금 ‘현재에 있는 상태’입니다. ‘현상태’ 상태에 자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현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것을 품습니다. 높은 것을 희망합니다. 이것은 ‘현상태’이고 이것은 ‘희망하는 상태’입니다. 당연히 이 두 개 사이에는 갭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이게 어떤 경우에는 이 갭이 메워지는 게 실현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현이 안 됩니다. 이 속에서 이제 인간이 소위 이야기하는 ‘고뇌’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것이 중독성이 있어서 만약에 이 사람이 ‘이 상태(희망하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이게 ‘현상태’가 되잖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위에서 또 다른 ‘희망하는 상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또 이것(희망하는 상태)을 꿈꿉니다. 이것도 역시 성취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누가 인간인데 끝없이 성취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신이지. 그러니까 결국은 ‘고뇌1’에서 ‘고뇌2’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방향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둘러싸고 전 방향적으로, 입체적으로 이러한 ‘희망하는 바’와 ‘현상태’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살아있다고 하는 것 자체도 고뇌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결국은 괴로움이고 이것을 무슨 ‘고뇌’라고까지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게 우리가 흔히 하고 있는 ‘염려’입니다. 그런데 이제 쇼펜하우어는 이 염려가 모두 똑같은 게 아니라 어떤 뛰어난 정신세계, 천재성을 가진 사람은 사실 우리처럼 좀 예쁜 옷 입고 주식해서 돈을 빨리 벌고 또 어디 신나는 데로 놀러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국회의원이니 당선이 되서 영광을 받고 또 사업을 성공해서 자기한테 굽실거리고 그런 것을 좋아하는 정신세계하고는 좀 다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삼위일체』를 계속 읽고 있는데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듣고 참 무릎을 쳤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사실 『삼위일체』를 어거스틴은 30년 동안 썼습니다. 햇수로 30년을 씁니다. 물론 30년 동안 계속 쓴 것은 아니지만, 『고백록』이 거의 끝날 무렵에 시작을 해서, 그때가 46-47세였습니다. 그러다가 히포의 감독직을 하고 목회에 너무 바쁘고 논쟁에 시달리고 그러면서 결국은 멈춥니다. 그래서 30년이란 세월이 걸립니다. ‘왜 빨리 책을 내지 않냐’고 지인들이 막 재촉을 하는데 그 답변 하나가 저를 참 쓸쓸하게 했습니다. “책을 빨리 내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여러분 중에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써놨습니다. “출간을 못하는 이유가 이게 말이라고 썼는데 이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 것 같고 그것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책을 못 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발생합니다. 뭐냐 하면 그분은 이제 워낙 중요한 저술가니까 저술실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못 들어가는 곳에 저술실이 있고 필사자들의 도움도 받았겠습니다. 아무도 못 건드리는 곳에 들어가서 다시 계속 쓰던 것을 쓰는 것인데 누군가가 그 다 완성되지 않은 원고를 빼돌려서 그것을 복사를 해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읽고 있는 것입니다. ‘아 이거 큰일났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잡아서 다시 『삼위일체』를 쓰게 됐다는 이야기인데 천재들의 세계가 다 그런 것입니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럴 정도의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면 당연히 염려하고 고뇌하는 것도 평범한 우리들과는 더 높은 정신세계 속에서 고민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고민 중에서는 해야 될 고민도 있고 안 해도 괜찮을 고민인데 하나님 없는 천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괴로운 고민도 많으니, 천재라는 이름은 참 좋지만 천재이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그 사람의 괴로움은 천재로 태어난 형벌과 같은 것입니다. 재미없습니까?
계속 설명합니다. 그림으로 돌아가 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승화하냐’,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반대편으로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이쪽에 이렇게 ‘현상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올라가고 싶은 상태’가 있고, 이게 이루어지면 또 그 다음에 ‘올라가고 싶은 상태’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도 당연히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단순하게 그냥 먹고사는 의식주의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믿음이 있어도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해서 염려 안할 수 없잖습니까? 그리고 또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는 게 문제이지 고려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생각이 없는 것이잖습니까?
예를 들어서 주부가 됐다고 칩시다. 그래서 오늘 밥을 합니다. 이 밥을 해서 식구들에게 밥을 먹인다고 할 때에 이것을 해서 먹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정도를 생각을 해야잖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위에 지금 탈이 나서 심각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아주 매운 고추장으로 비빈 밥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잖습니까? 당연히 염려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고려 속에서 살아가고 그것은 어느 정도 염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의식주 문제일수도 있고 아주 높은 염려, 자신의 성화, 선교, 하나님의 나라,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에서 나오는 사랑 등등도 똑같이 ‘현재 상태’가 있고 ‘도달하고 싶은 상태’가 있고 도달하고 나면 또 또다른 기대가 생겨나서 또 ‘도달하고 싶은 상태’가 생겨날 거 아닙니까? 이것을 신앙이 없는 속에서 고뇌를 하는데,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생각하게 됐냐면 말입니다. 이제 이렇게 자신에게 부딪히는 문제를 여기서는 자기가 자신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 이것을 신앙이 없는 속에서 고뇌를 하는데,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기에 결국은 자기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뇌하는 자신이 여기 있고 고뇌의 주체가 자기인 것은 분명한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이렇게 그냥 ‘현상태’, ‘희망하는 상태’, 또 발전된 ‘희망하는 상태’ 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고 성취되지 않은 모든 것들, 그리고 바라는 것들의 모든 것들이 이렇게 바둑판과 같은 질서 속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서 이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태에 있는 의미, 이것은 단지 내가 행복하냐, 혹은 불행하냐 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이 바둑판과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지정하신 질서 안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도움을 받고 믿음의 도움을 받으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이 ‘현상태’에 있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 내 ‘현상태’가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희망하는 상태’를 가집니다. 이것도 좌절되면 좌절되는 대로 거기에서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성취되고 좌절되는 이 모든 순간을 통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강의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서도 아마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신 분들이 되게 많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물 흘러가듯 흘러가고 잘 먹고 잘 살던 시간들은 우리에게 별로 가르쳐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고통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찾아내려고 했던 진리가 가르쳐준 것입니다.
남편도 돈 잘 벌고 주식도 오르고 사업도 잘되고 애들도 공부 잘하고 모든 게 평화롭습니다. 그러면 그는 깨달은 바가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진리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그가 온전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들추어내서 그의 질병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헌데를 발견하게 되고 거기서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뇌하면서도 우리는 그 고뇌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환희로의 상승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건은 믿음으로 살아야지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충만할 때에는 어려움이 생기면 기대감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어려움을 통해서 어떤 일을 행해서 우리에게 멋지게 보여주실까?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게 되고 거기서 우리는 그만큼 감사하게 되는 것이잖습니까?
자, 우리 잠시 숨을 좀 가다듬으면서 들어온 사연 좀 보겠습니다. 네, 여기 또 나오네요. “김남준 목사님 강해설교 듣고 말씀도 알아가고 싶습니다. 재생목록에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타지역성도입니다.” 이러는데 홈페이지에 들어오시면 ‘7년 동안 들어야 될 설교’, ‘14년 들어야 될 설교’, ‘21년 동안 들어야 될 설교’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열린교회 어플을 받으시면 됩니다. 어플리케이션 스토어에 들어가셔서 ‘열린교회’ 이렇게 치고 열린교회가 많으니까 ‘평촌 열린교회’ 치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 “구역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싶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외부에서 지금 참여하신 이 분, 방금 읽어드린 이분께 선물하나 드려야겠습니다. 자, 열린교회에서 지난 2019년에 설교된 매주일 설교를 이렇게 두 페이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열린.org 에 등록해주시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 아이고 참 아쉽네요. 랄랄라 님, “아이들 온라인 개학때문에 접속 못하신 분들도 계시겠네요 아쉽습니다.” 진짜 그런 생각을 안했습니다. 애들이 다 커서 그런 생각을 안했는데 우리 랄랄라 님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책 보내드리겠습니다. yullin.org에 등록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네, 그러면 이제 다시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다음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4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문제4)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주인이 되려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주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아니라고 해도 사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자기 뜻대로 하고 싶기 때문에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소유 삼고자 하시는데 그 역시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당신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인간들의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높이 세우셔서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소유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신다, 그런 뜻입니다.
자, 도표로 보겠습니다. 먼저 세상의 방법을 보면 섬기기보다는 다스리고 싶어 합니다. 지배받기보다는 지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배하고 나면 전적으로 자기의 뜻대로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파문을 그려나가고 이것의 확장이 결국은 지배하기 위한 확장이고 소유하기 위한 확장인데, 다른 사람은 바보입니까? 다른 사람도 똑같이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나라 간에 일어날 때에는 전쟁이 되는 것이고 개인에게는 아주 심한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우해주시는 게 참 좋습니다.
몇 달 전에 들었던 아주 불행한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난폭운전을 했습니다. 그 난폭운전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화나잖습니까? 저도 참 잘 그랬는데, 차를 세워놓고 항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여 버렸습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사람이라는 게 어떤 사람이 잘못하면 당연히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말하고 그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이익인 경우에 이렇게 혈기를 가지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대항하다가 이렇게 엄청난 폭력이 빚어지고 살인사태까지 일어나게 되는 이런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잠언에서 그런 다툼을 피하도록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슬기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눅이 들어서 바보처럼 짓밟히며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그렇잖습니까? 제가 그 사건을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 욱하는 심정으로 항의하는 것에 대해 지금이야 안 그렇지만 젊었을 때에는 제가 잘 못 참았습니다. 차 몰고 가다가 버스가 너무 못살게 꽝꽝 거리고 나를 겁주면 차로에다가 내 차를 탁 세우고 내려서 운전수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그냥 한번 참고 가면 되지 그렇게까지 해야 될 게 있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다시 도표로 돌아와 보면 그렇게 지배하고 소유하려 합니다. 그게 세상의 방법입니다. 권력을 확장하고 재물을 많이 쌓는 것도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불편 없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주재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인데 ‘주재’라고 하는 것은 재상 할 때 ‘재(宰)’ 자 인데, 아주 높으신 주인 됨입니다. 주인 되시는 것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이 없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사실,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세상에서 그분을 진정으로 높일 때 하나님은 당신이 영광 받으실 뿐만 아니라 또 우리도 영광을 받게 하시고 우리를 그렇게 아주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들로 만들어서 별을 달아주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시커먼 존재에서 별 같은 존재가 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자, 그러면 이제 5번 문제를 마지막으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문제5)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셔서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입니다. 자, 그럼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리고 빛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시면 이해가 굉장히 쉽습니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모든 사람에게 다 보이잖습니까? 밤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무것도 안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산위에 있는 이 동네에 불빛이 가득할 것 아닙니까? 불빛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 맨 밑에서 사람들은 비록 여기는 깜깜한 어둠이지만 이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해외여행을 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설교하러 갔었는지 가족과 여행을 갔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어쨌든 오밤중에 그 동네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이해가 안 가는데 말도 되지 않는 높은 하늘에 불빛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별인가 가만히 보니까 별은 아니었습니다. 전깃불이었습니다. ‘참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바로 코앞에 산이 진짜 거의 직각으로 선 어마어마하게 높은 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빛을 이야기하시면서 산 위에 있는 동네를 말씀하신 것은 밤이 되면 그 희미한 불빛이 동네에 켜져서 그 동네가 있다는 것을 숨길수가 없듯이 ‘너희가 그러한 존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냐면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했을 때 욕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결코 무시 받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잘했을 때에는 칭찬에 인색해도 못했을 때에는 욕을 먹잖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무시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가 잘 살아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잘 살아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도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궁금해 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리에 대한 탐구심으로 바뀌게 될 때, 신앙이 될 때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 공부가 일단 끝났지만 또 우리 사연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계속 댓글이 올라오는데, 자 이한나 님, “고통스러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기대하게 되지만 고통이 견디기 힘들 때도 많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게 모두 쉬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인생이 힘들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거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꼭 기도하면서 매 순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이한나 님께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적합한 책,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새로 나온 책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사연이 들어왔습니다. 푸른하늘 님, “어디까지 참고 언제 참지 말아야 하는 기준이 뭘까요? 인내함과 주눅 들어 무시당하는 것이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학교에서 당하고 올 때.”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인 것 같습니다. 사랑으로. 젊었을 때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과해서 너무 극단적으로 가던 때가 있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욱하는 성격에. 그래서 제가 젊었을 때 잘 썼던 말, 여러분들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냐?”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으로, 사랑과 진리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서 나가는 데서 주체성도 잃지 않고 찌그러지지도 않는 그런 삶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푸른하늘 님께 수제 마스크 하나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몇 분 더 보겠습니다. 이주영 님, “죄송하지만 이후 다음 공과책은 어떤 책인가요?” 급하십니다. 이것 끝나고 나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염려에 관하여』라는 책입니다. 그래서 오늘 새로 나올 책의 저자 서문을 맛보기로 여러분들에게 낭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또 선숙리 님, 이선숙 님 “깊이 고뇌하지 않고 저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안일하게 살아가고 그래서 그냥 염려하지 말자, 이런 부작용이 있는데 이런 것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이 없이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생각이 있으면서 고뇌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여러분들의 답은 생각을 많이 하면서 고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게 결국 믿음이 하는 역할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이 가엾은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진리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 질문해주신 분께 격려하는 의미에서 『자기깨어짐』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선숙 님입니다.
마지막 한 분 더 보겠습니다. JLove, 아마 JesusLove일 것 같습니다. “고난이라는 동전의 뒷면의 정체는 축복인가요? 동전을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죠?” 고난이라는 동전의 뒷면의 정체는 축복일까, 그러면 지금 행복한 사람의 행복의 뒷면은 고난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난 자체는 우리에게 행복도 아니고 고통도 아닙니다. 다만 그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동물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를 발견하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 많이 희생하셨잖습니까? 누구한테 그렇게 헌신하신 적이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거기서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많이 사랑하셨죠? 여러분들이 많이 사랑한 모임이 있습니까? 그리고 후회 안하죠? 왜 그렇습니까?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JLove 님 이게 좀 어려운 책일지 모르겠는데 『존 오웬의 신학』 보내드리겠습니다. 천천히 인터넷 찾아서 읽으시면 아마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모든 공과공부가 끝났고 3분 44초가 남았습니다. 오늘 제가 『염려에 관하여』 책을 완성했습니다. 정말 온 마음을 다하여 완성했고 아마 4월 24일에 공과책이 나온답니다. 270페이지 정도 되는 도톰한 책인데 드라이브스루로 하든 뭐로 하든지 간에 여러분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또 도저히 받아보실 수 없는 분들은 집에서 받아보실 수 있도록 우리가 방법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글을 모두 끝내고, 오늘 출판사로 마지막 교정이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저자서문을 씁니다. 저자 서문을 한 편의 시처럼 여러분에게 낭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십시오. 이렇게 나옵니다. 『염려에 관하여』. 저 라틴어가 틀렸는데 ‘De Anxietate’입니다. 여기에는 똑바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음악에 맞춰서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자서문)
‘살아있다는 것은 희망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실현이 가능하지 않거나 지연되기에 염려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인간은 고뇌하는 존재입니다.
염려라는 주제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염려는 내가 끌어안은 것도 아니고 내가 뿌리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싫어서 내친 것도 아닌데, 나도 아닌 것이 마치 나의 일부인 듯 함께 있었습니다. 내가 예배드릴 때는 움직이지 않았고, 간절히 기도드릴 때는 얼른 마음의 동굴에 숨어 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늘 보던 염려라는 놈의 정체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한 작정이 섰습니다. “내가 네 놈을 영구히 내 마음에서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네 진짜 민낯은 확인을 해야겠다.”
사실 그렇게 말한 것은 나의 굳센 신앙이었고 그 말을 들은 것은 나의 연약한 이성이었으니, 둘 다 내 안에 있어 익숙하지만 낯설고, 또한 낯설지만 익숙한 자아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믿음이 부족한 나 자신에게서 출발해서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 품에 다달아 안식을 얻고 다시 평화롭게 내 자신으로 돌아온 자아의 여행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많은 눈물과 기도 속에서 이 책을 썼습니다. 이는 염려하는 나의 약한 신앙에 대한 꾸짖음 때문이었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몰랐던 나의 무지에 대한 원통함 때문이었습니다.
한 가지 사실에, 숨이 멎는 듯하였습니다. “그대는 엄숙하도록 존귀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좋으셨기에, 나를 태어나게 하셔서 지금 여기 살아있게 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만세 전부터 시작해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을 하나님 사랑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에게도 이렇게, 때로는 나도 싫은 나를 엄숙하리만치 존귀하게 여기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고(이게 나를 더 아프게 했는데), 내가 그렇게 사랑해 준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드넓은 우주를 휘감고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무한한 사랑 안에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 나를 울렸습니다.
하얀 눈이 꽃잎처럼 내리던 겨울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벚꽃 잎이 흰 눈처럼 날리는 봄날에 끝났습니다. 마침 뜻하지 않은 전염병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때에, 이 책도 우리 모두처럼 존재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 책을 읽고 염려를 능히 이기소서.
2020년 4월 15일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맛있는 빵 한 조각을 여러분 입에 넣어드렸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엄숙하리만큼 존귀한지를 깨달으셔야 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현실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