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 무엇인가
녹취자: 김경애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절대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행동에서도 나타나셨듯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창조한 다음에 인간을 놔두시고 하나님이 손을 거두신 다음에 너는 너대로 살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지속적으로 창조될 때에 그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을 의존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에도 당신을 의존하게 하심으로써 그래서 그 의존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가족처럼 친밀함으로 교통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좋은 것들이 인간에게 전해져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끔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이 아주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지난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죄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첫째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범한 범법자가 필요하고 세 번째는 이것을 범법했다고 하는 판단하는 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전해놓으신 기준, 인간이 저지른 범법, 그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이 세 기준이 있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성립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죄에도 뿌리가 있을 것입니다.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그런 죄가 들어와서 번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새 ‘사스’라고 해서 괴질들이 광범위하게 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하지만 ‘사스’가 어떻게 감염되는가?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떨어져있는 상태에서는 감염이 안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희박하다고 보고 악수를 하거나 침이 튀거나 하는 것이 자기 몸에 들어가는데 들어갈 때 그 균은 아마 아주 작은 일부였을 것입니다. 일부가 들어가서 그것이 속에서 자생작용을 일으켜서 많이 번성하게 될 때 그런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대부분의 질병이 그런 이치입니다. 똑같이 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 잠시 뒤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이런 죄의 근본적인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여기에 하나님이 있고 여기에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고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 ‘교통’이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인데 ‘Communion’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가 주어지면 이런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이 인간이 이런 존재가 되고, 이런 존재로 살아갔으면 하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힘이라든지 살아갈 자원이 필요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한 사람이 직업 활동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하면 그곳에 간다고 돈이 벌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도 있어야하고 그 직업을 감당해나갈 건강도 있어야하고 자본도 있어야하고 또 돕는 사람도 있어야하는 그 모든 것을 총칭해서 자원이라고 부른다면 그렇게 사업에 성공을 위한 그런 자원이 있어야지만 사업을 감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놓으시고 인간에게 ‘너는 이런 존재가 되라. 이렇게 살아가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희망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만의 자원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과 교통을 맺고 거기에서 절대 의존하고 절대 순종하는 관계 속에서 ‘Communion’ ‘교통’을 이루어갈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런 의도대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하늘자원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원을 힘입어서 인간이 이런 삶을 구현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완벽하게 이런 관계가 정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었다는 면에서 그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이 의미는 물론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와 비교할 때 그는 상대적으로 완전한 인간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죄도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전한 인간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런 위치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기만 하면 능히 하늘로부터 이런 하늘자원을 공급받아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맞도록 그런 존재가 되고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광활한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인간이 완전하고 무죄한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이 상태가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안전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안전과 완전히 결합되어야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상태가 되는데 완전하기는 했지만 안전하지는 않아서 언제든지 이것이 불완전해질 수 있고 무죄함이 사라지고 죄가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위치에 인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인간의 자유의지와 맞물리는데 나중에 하는 것으로 하고 어쨌든 인간이 이렇게 완전하고 죄도 없었지만 그러나 인간이 영원불변한 상태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자유스럽게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셔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는 이 개연성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도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유의지에 의해서 의존하고, 자유의지에 의해서 순종하게끔 만드셨지 억지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송 부르는 것을 이렇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찬송할 때 하나님이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십니까? 이것도 몇 시간씩 부르면 힘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마네킹을 놓고 그 속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사람들이 다 가버렸습니다. 녹음기에서 계속 가수의 찬송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치로 하나님이 인간을 태엽을 감아서 놔두면 톡톡 뛰면서 돌아다니는 길거리에서 파는 인형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면 그 수준이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쓰던 구루무병 놓고 칼을 옆에 차고 ‘너희들은 내 졸병이다. 내 말을 들어라. 너는 여기에 서고…….’ 그러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조금 돈이 있는 집은 인형을 세워놓고 ‘너는 여기를 공격해라. 총을 쏴라. 너는 죽었다.’ 조금 더 돈이 많은 집은 태엽을 감는 것이나 전기 스위치를 눌러서 앞으로 가라고 리모컨을 누르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고 그것을 보고 자기가 진짜로 이것들이 나에게 순종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유아기적인 사고방식이거나 아니면 치매증상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과대망상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당신을 좋아하도록 그렇게 만드시고 기뻐하며 섬기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서 의존과 순종의 관계를 가지고 살게끔 되었는데 이 인간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인간이 이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가 죽어서 사라지든지 아니면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야지 독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안 갔는데 자매들한테 그런 경우가 많은데 나이를 먹도록 시집을 못 갔습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시집가라고 하는 것도 듣기 싫으니까 어느 날 “엄마 아빠. 나 이제 독립하겠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보따리를 다 싸서 집의 허락을 받고 나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독립한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제는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서 엄마 아빠를 의지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살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독립입니다. 인간이 죄가 들어오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 앞에 이 의존의 관계를 저버리고 독립을 하려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독립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할 때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성품 중에서도 그러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성품을 가리켜서 조금 어려운 말로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속성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빼면 절대로 그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성품을 가리켜서 속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분이 하나님이 되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것, ‘전지하심’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 무엇이 있느냐하면 독립성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느냐?’ 하니까 원숭이에게서 나왔다고 하니까 “아니야. 그것은 교회에 가서 선생님께 물어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인간은 인간으로 창조하고 원숭이는 원숭이로 창조했대!” 교회에 안다는 애가 물어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그래!”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냐?” 그러면 얘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은 만든 사람이 없어. 원래 하나님이야.” 그러면 얘가 묻는 것입니다. “원래 있는 것이 어디 있냐? 누가 만들었으니까 있지! 원래가 어디 있느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자의 개념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존재의 끝입니다. 더 이상 누가 만들었다든지 누구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떤 존재가 누구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누가 나를 존재하게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끝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결정함에 있어도 누구에게 영향을 받거나 누구에게 압력을 받는 분이 아니라 혼자 스스로 결정하실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독립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이 독립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것이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창조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렇게 있습니다. 예를 들면 관계가 형성됩니다. 여기에 식물이 있습니다. 식물은 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식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H²O 즉 수소분자, 산소분자가 만나야지만 물이 됩니다. 그럼 이 물이 식물에 내리기 위해서는 비라는 자연현상이 필요합니다. 그것 가지고 됩니까? 햇빛이 있어야지만 이 햇빛을 받으면서 광합성작용을 해서 여기에서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 식물이 땅에서 자라는데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잎이 떨어집니다. 땅은 잎이 떨어져야합니다. 그래서 부엽토가 됩니다. 부엽토가 되면 흙이 기름져집니다. 기름져야지만 여기에서 식물이 올라와서 양분을 빨아먹고 자랍니다. 이것이 이렇게 자라야지만 나무가 커집니다. 나무가 커져야지 새들이 날아옵니다. 집도 짓습니다. 동물들이 밑에서 살면서 은신처를 삼아서 자연의 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외적의 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서 종족을 번식합니다. 이런 동물들 특히 곤충 같은 것들이 살아서 움직여야지만 꽃과 꽃 사이에 꽃가루를 날라서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 이것이 열매를 맺어야지만 인간들이 먹고 인간들이 먹어야지만 이것을 가꾸게 됩니다. 이것이 돌면서 모든 것들이 핏줄처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결되어있습니다. 단 하나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태양이 있고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이렇게 있습니다. 이렇게 세 번째 돌아가는 것이 지구입니다.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규칙적으로 기가 막히게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이 출장 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안돕니다. 태양이 이렇게 이런 정도의 질량을 가지고 여기에 존재하니까 여러 가지 인력의 법칙들이 작용하면서 이것이 정교하게 돌아가는 것이지 태양이 출장을 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구가 출장을 가면 달이 혼자서 지구를 돌던 지구를 그리워하면서 계속 돌겠습니까?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전부 피조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어려운 말로 ‘Communicatio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독립선언을 하고 빠져나온 것은 태양이 출장 간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출장 갔습니다. 태양에 의해서 이것이 무게와 질량에 의해서 역학관계가 형성되어서 돌아가던 모든 이 ‘Communication’이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드려진 것입니다. 배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깨뜨려지니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다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달과 별이 충돌하는 것은 아닌데 영적으로 이런 관계를 다 가지고 있었는데 이 관계 자체가 다 틀어진 것입니다. 이런 모든 부조화속에 인간의 독립선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왜? 수없이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가? 왜 인간에는 악과 고통이 끊임없는가? 이 문제를 가지고 무수히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극복해보기 위해서 인간들이 별의별 생각을 다 짜내고 지혜를 짜냈지만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관계들이 깨뜨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독립선언입니다. 이것들이 깨드려져서 여기에 모두 이런 관계 속에 배여서 관계들을 형성하는 자원인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의 충만함이 여기에 꽉 차서 이것들을 서로 ‘Communication’ 하게 하면서 온 인간을 중점으로 해서 온 우주가 함께 작동하면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 피조의 세계 속에 찬란한 하나님의 광채가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출장 가서 독립선언을 하고나니까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전기가 나간 것처럼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전히 완성될 때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이 안에 다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자연과 인간과 온 우주의 유기적인 관계의 ‘Communication’이 정상적으로 완벽하게 작동되고 그래서 이 창조세계 전체가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이해가 가니까 진전을 합니다.
이렇게 되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모든 것들이 깨지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이 인간의 독립선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살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라고 할 때 그 죄를 살인하고, 간통하고, 남의 돈을 빼앗고, 친구에게 발길로 차고 폭력을 해서 피를 흘리게 만들고 돈을 빼앗아 도망가는 이런 것들만 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물론 죄에서 흘러나온 아까 말씀드린 악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인간이 고통하면서 살아가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이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어디서 나타나느냐하면 지금도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이 그냥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인간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왜?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기대는 인간이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의지하고 의존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의뢰하고 의존하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하고 자다가도 하나님이 안계시면 “하나님!” 그러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하나님을 손을 붙들고 “하나님 어디 가지 마세요!” 하며 꼭 붙들고 그렇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런 독립선언을 하고나니까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죄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에 대한 모든 판단의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고의 중심 속에 자기가 있고 온 우주의 삼라만상의 주인이요 지배자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악한 죄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사고 자체가 자기를 이 세상에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의존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독립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그것보다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런 비유를 만들어봤습니다. 여러분 옛날에 임금이 있습니다. 임금의 지위라는 것은 오늘날 전 세계 대통령을 합해도 옛날의 임금 하나가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인데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갔습니다. 로마제국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로마제국의 황제가 있는 황궁입니다. 어디로 출장을 갔는지 아무도 없습니다. 보니까 제국의 황제의 의자가 있습니다. ‘같은 사람끼리 누구는 골방에서 살고 이 사람은 누군데 이런 높은데서 사나! 다 금이네! 내가 앉아볼까!’ 가서 앉았습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아무도 없지만 “이리 오너라.” 그랬더니 저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더니 “네가 누구냐? 네가 내려와라.” 기겁을 해서 내려왔는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형입니다. 왜? 아니 거기 좀 앉았다고 금이 닳았습니까? 은이 닳았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의미가 문제입니다. 거기는 아무도 앉을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거기를 네가 앉았다는 이야기는 황제인 나를 깔봤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삼족을 멸하기에 충분한 죄가 되는 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두 눈이 시퍼렇게 뜨고 나를 만드신 이가 너도 만드셨다고 삼라만상이 다 말하는데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냐? 내가 중앙에 있다.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이다.’ 이렇게 독립선언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왜 구원을 받아야하느냐고 할 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반적인 삶에서 특별한 삶으로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빗나간 삶을 다시 돌이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써 구원을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는 것 자체가 안 해도 좋은데 해서 더 행복한 어떤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철이 없어서 까불다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서 방탕한 길로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 철이 들고 보니까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아서 상처와 고통을 많이 겪은 다음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고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고 구원을 받아들이고자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러다가 보니까 무슨 문제가 일어나느냐하면 독립선언을 하게 되고 이것이 죄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느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속사람은 죽어버렸습니다. 영혼입니다. 속사람입니다. 벌써 죽었습니다. 이것은 겉 사람인데 이것은 육체입니다. 아직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속사람을 죽음이라는 질병에 시달리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영혼이 살아나야하고 살아난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계속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원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게 하는 하늘자원이 공급되어야합니다. 이것이 독립선언을 하고 죄를 지으니까 이것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안 옵니다. 영혼은 죽었습니다. 이것도 공급되지 않습니다. 이 죽음에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긴간의 겉 사람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식으로 존재해서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 인간이 살았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살았다는 그것을 다할 수 없도록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유하실 때 여러 가지로 비유하셨지만 가장 광범위하게 인간을 나타내는 동물로 비유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양입니다. 이 양의 특성은 뭐냐 하면 다른 짐승들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해서 자기 몸을 은폐하든지 아니면 빨리 달려갈 수 있는 다리를 가졌든지 또 아니면 뿔이 있다든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기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세계의 모습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나는 그것을 보면 재미없습니다. 막 잡아먹고 피 흘리는데 누구를 기준으로 재미있다고 하는지 모르지만 재미없습니다. 아무튼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 이런 것을 보면 나옵니다. 얼룩말과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얼룩말은 사자의 밥입니다. 사자가 제일 좋아하는 밥이 이 얼룩말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니까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사자가 배가 고파서 어슬렁어슬렁 사냥을 나왔는데 보니까 얼룩말이 떼를 지어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자가 항상 한 마리를 딱 찍어놓고 그것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자가 오는데 사자가 오는 것을 얼룩말들이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도망갈 상황이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새끼들을 잽싸게 다 가운데로 모읍니다. 얼룩말이 원을 그리면서 서는 것입니다. 여기는 머리이고 여기는 꽁지입니다. 사자가 막 오더니 사정거리에 와서 돋움 닫기를 시작합니다. 사자가 막 뛰는데 누가 명령을 내리는지 모르는데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니까 사자가 보니까 돌멩이하고 모래가 막 날아오는 것입니다. 얼룩말은 뒷발이 세니까 흙이고 돌멩이고 막 두발로 파대는 것입니다. 사자가 한 마리를 노리고 막 달려가는데 이만한 돌멩이가 총알같이 날아오는데 사자의 왼쪽 눈퉁이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사자가 얻어맞더니 털썩 주저앉는 것입니다. 피가 주르륵 흐릅니다. 아마 애꾸가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입맛만 다시고 먹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번은 더 생생하게 보았는데 그것은 무슨 짐승인지 모르겠는데 산양처럼 생겼는데 뿔이 날카롭게 달린 아주 순한 짐승입니다. 사자가 암사자가 공격합니다. 죽어라하고 도망을 갑니다. 애처로울 정도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됩니다. 사자가 더 빠릅니다. 도망가다가 도저히 도망을 더 못가니까 사자가 덮치는 순간에 얘가 돌아서더니 그 사자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스텝이 엉기면서 사자의 옆구리 속으로 뿔이 뚫고 들어가면서 옆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력을 다했는데 어떻게 운 좋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자를 매단 채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가다가는 금방 쓰러져서 결국에 뿔을 빼고 도망을 가는데 그 광경을 카메라맨이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 카메라맨이 사자를 추적했는데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에게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무엇이냐 하면 물어뜯을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도 아니고 초식동물이라 사람 이빨과 비슷합니다. 빠른 다리가 있느냐하면 다리도 그렇게 빠르지 않습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도 못합니다. 물에 빠지면 잠수하는 형이고 그리고 뿔은 있지만 호떡처럼 되어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동물이 양입니다. 왜 하필이면 인간을 이렇게 자존심 상하게 인간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양에 비유를 했을까? 그 메시지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너는 나 없이는 못산다. 내가 원래 만들 때부터 제품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정신 나간 짓입니다. 인간은 처음 만들어질 때에 그렇게 혼자 독립선언을 해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의존의 관계를 깨뜨려버린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이런 하늘자원이 공급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 속에서 끊임없는 고갈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는 고갈을 느끼고 도저히 행복하게 살 수 없으니까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다시 이 관계가 회복된 가운데 하늘자원을 힘입어 살면 되는데 하나님을 믿기 싫은 것입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내가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땅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미친 듯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 지위가 낮아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높이 올라가지고 막 올라갑니다. 모든 것을 다 하면 행복하냐하면 땡!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중국황제 어떻게 살았나』 하는 책입니다. 제가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왕궁을 다녀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나라의 왕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제국의 황제와 프랑스의 왕과 중국의 황제입니다. 그런데 특히 이 중국의 황제는 그 책을 읽어보면 야사도 섞여있습니다. 기자를 했던 사람이 썼는데 단숨에 읽으면서 흥미 있었습니다. 왜 그 사람을 예를 드는가 하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원을 마음껏 가진 인류역사상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황제니까 말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니까 건물부터 틀리고 모든 것들이 어마어마합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황제가 얼마나 대단했느냐하면 황제가 되면 왕궁을 짓습니다. 왕궁을 짓고 사는데 중국역사에 수백 명의 왕들이 있다가 사라졌는데 최고로 오래도록 왕위를 60여년 누린 사람도 있고, 24시간 만에 황제의 위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살았던 영광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 한 예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이 있습니까? 식욕이 있고, 성욕도 있고, 권력욕도 있고 권력욕은 이미 차지했습니다. 식욕이 인간에게 있는데 이 왕궁에서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밥을 하는 사람만 1,000명인가 1,500명이 있는데 한 끼 식사가 무엇, 무엇이라고 그러는데 머릿속에 그려보면 그 양이 트럭 1대 반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두 끼만 먹고 살게 만들어놓고 자기는 네 끼를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들은 대부분 일찍 죽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퍼먹으니까 죽지 살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을 졸병들이 해주는데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보통으로 그래도 과욕을 부리지 않는 임금이 약 5,000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삽니다. 조금 그래도 여자를 밝히는 임금은 10,000명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이스탄불에 갔는데 이스탄불의 오스만터키 제국이 있는데 그 영광도 대단합니다. 엄청난 제국이었는데 그 톱카프 왕궁에 갔습니다. 거기에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500명이 밥을 했답니다. 주방에 있는 사람이 500명이 밥을 했고,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 한쪽에 지어졌는데 방이 500개가 있는데 한방에 후궁 2명씩 들어가서 1000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오스만터키 황제가 살았습니다. 사실 웃기는 것입니다. 기숙사도 아니고 한방에 2명씩 살았습니다. 중국은 이런 것과는 스케일이 다릅니다.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국에 있는 미녀들을 다 징발해야합니다. 그러니까 딸을 가지고 있는데 아주 못생긴 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복입니다. 왜? 절대로 차출될 일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얼굴이 예쁜 딸이 있으면 그 부모는 이 아이가 태어날 때 여자로 태어났는데 남자처럼 만들어서 키우는가 하면 아니면 일정기간 동안 시집을 보낼 수 없게 방을 붙여놓고 차출하러 다니는데 그때 아예 신분이 형편없이 낮은 종에게 시집을 가게 만든다든지 일부러 눈 하나를 빼든지 칼집을 내서 왕궁에서 쓸모없는 사람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10,000명씩 데려다가 가두어놓고 어떻게 이 여자들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중의 대부분은 솔직히 이야기해서 갖다 놓기만 했지 한번 손도 못 만져본 상태에서 이 여자들은 여기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속에서 수많은 슬픈 일화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중국에 있는 어느 왕은 죽었는데 자기 무덤을 높이 200미터 높이의 무덤 만들었습니다. 진시황 같은 사람이 그랬는데 자기가 죽었을 때 산 사람을 몇 백 명을 같이 묻는 것입니다. 왜? ‘왕이 다시 살아날 때 너희들도 다시 살아나야 왕의 수종을 들지! 왕이 다시 살아났을 때 왕이 황제 체면에 밥도 차려 먹을 수 없지 않느냐? 너희들도 같이 죽었다가 같이 살아나라.’ 다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원을 한없이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행복했어야하는데 이 황제들이라는 이 인간들이 행복했어야하는데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인된 모든 세상 사람의 인정을 받는 가운데 구중궁궐 속에 갇혀서 충분히 동물처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국황제들의 역사입니다. 물론 이중에 부패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수많은 피를 흘리고 황제에 등극하고 중국역사에서 이 황제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위가 물려진 사례가 거의 없었습니다. 반드시 피비린내 나는 정변이 있고 거기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황제가 등극하고 그 황제가 다시 피 흘리면서 죽고 다른 황제가 등극하고 하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황제였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파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청소년시절에 읽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보면 그 사람은 황제였는데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황제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부와 영광을 누렸을 텐데 인간의 허무함을 파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허무함과 비참함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자기자원이 아니라 남의 자원을 이렇게 빼앗아가지고 산다고 해서 인간이 결코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을 수 없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참으로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삶을 살게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이 자원이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그 치열한 경쟁관계 그리고 자신의 영혼조차 돌보고 자신이 이렇게 살면 마지막에 인생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아무 이해도 없이 미친 듯이 이 세상의 경쟁 속에 빠져들어서 자기 영혼도 돌볼 틈이 없이 일하고, 서로 범죄하고, 서로 헐뜯고, 서로 악을 행하고,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고, 야비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탈취하고, 도망가는 그런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데서 경험하는 인간다운 위치와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원의 고갈현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친 듯이 빼앗는데 이것들이 결국 고갈의 문제를 해결해 주느냐하면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예 덮어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인데 이런 인간의 불행의 근원을 찾아서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고뇌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이 다 헛길로 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속에서 인간이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길들을 막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에게 해결의 길을 가져다주었느냐 하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인간의 이런 불행은 이런 식의 경쟁관계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결코 자원을 확보한다고 해서 성취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질병이 없고 가난이 사라지고 무지가 사라진 곳에는 꼭 행복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돈이 많이 생기면 굶는 고통은 없어지는데 가난할 때 없던 또 다른 고통이 생겨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제가 외국의 어느 나라에 가보니까 굉장히 잘삽니다. 자연환경도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전 세계에서 그 도시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2위입니다. 골치를 썩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청소년들이 자살하지 않을까?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왜 이 도시의 청소년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서 이렇게 편안한 환경에 살면서 자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 말이 재미있습니다.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도시가 너무 환상적으로 아름다워서 차마 볼 수 없어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원의 화장실에 가니까 ‘마약한 주사기를 통에 집어넣으시오.’ 라고 되어있습니다. 길거리에 가면 다 마약합니다. 결국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는 인간이 도저히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고갈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이 바로 진정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이 인간이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는 도저히 다시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그 존재,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없고 그렇게 인간이 행복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헛된 것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면 우리들이 도저히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을 궁극적으로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이라는 이 질병증상을 가져다주는,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져오게 한 죄라는 이 실체로부터 우리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시작이 있을 텐데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를 가져오게 되었던 죽음, 그런 죽음을 몰고 왔던 그 죄의 첫 번째 시발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오게 되었을까?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