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2002년 CBS강의 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4월 6일
목 차
1. 왜 구원을 받아야 되는가(1) 2002. 날짜미상 CBS 강의 1
2. 왜 구원을 받아야 되는가(2) 2002. 날짜미상 CBS 강의 11
3. 죄란 무엇인가 2002. 날짜미상 CBS 강의 19
4. 죄의 기원: 한 사람의 죄 2002. 날짜미상 CBS 강의 30
5.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은총 2002. 날짜미상 CBS 강의 40
6.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 2002. 날짜미상 CBS 강의 50
7. 예수는 신화가 아니다2002. 날짜미상 CBS 강의 60
8. 예수님의 자기 인식 2002. 날짜미상 CBS 강의 69
2002 CBS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강의1
왜 구원을 받아야 되는가(1)
녹취자 : 오희열
안녕하십니까? 평촌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입니다. 여러 시간에 걸쳐서 여러분과 함께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왜 구원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몇 시간에 걸쳐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강의가 필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강의를 통해서 내가 누구이고 내가 왜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하는지,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또 구원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되니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고, 사실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전체적인 것을 알고 믿은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단하게 제시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 된 것입니다. 또 그런 간단한 복음을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열일곱 시간쯤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다 들어야만 겨우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 초대교회 시대 때에 간단하게 복음을 선포할 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주 간단한 복음의 진수를 믿고 ‘아멘’함으로써 성령으로 역사해서 믿음이 생기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내가 왜 구원받아야 했는가?’, ‘내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예수님을 내가 믿기는 믿었지만 구체적으로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은 사람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또 ‘구원받은 나를 향해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을 때 기대하시던 바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우선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해 질 수 있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고, 또 그렇게 자기를 많은 희생 가운데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오히려 왜 내가 예수를 믿어야 했는지를 더 탄탄하게 공부할 때에 흔들리지 않은 신앙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이런 것들이 아주 경시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복음의 진술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해서 구원 받은 자녀가 되었는데, 아주 간단한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영접해야하는 것, 그러면 천당 간다는 것, 이런 정도만 내가 알게 됐지, 구체적으로 구원 받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리고 왜 예수님이 이 구원을 위해서 오셔야 했고, 왜 하필이면 평화를 위해서 수많은 죽어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죽음은 나와 상관이 없고, 오로지 그 예수님의 죽음만이 나와 관계가 있으며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또 나와 어떻게 관계가 있고 종말을 기다리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주일에 성경을 들고 교회를 가냐, 안 가냐, 밥 먹을 때 잠깐 눈을 감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기도하느냐 안 하느냐, 이런 정도만이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일 뿐이지 나머지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범죄하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삶을 살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존재이고 이런 삶을 산다고 하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독특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창조해 놓으셨는데 창조된 그 인간들이, 이제 강의가 시작되면 아시게 되겠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구원이 필요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당신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알려주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심으로서 그 사람들이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아주 분명하게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누구이며 왜 구원받아야 하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과 글이라는 의사소통의 수단을 통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이것의 중요성은 감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많은 정보가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님을 잘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지만 무엇인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생을 지탱해 나갈 수 없고 외부적으로 그런 절대자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하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절대자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리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호소력 있게 전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들리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집중이 되고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는 동영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시각적으로 어필을 하고 생각을 많이 이끌어냅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실물을 찍어놓고 실물은 없는 가짜 영상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실제 사람이 자기 앞에서 연기를 하듯이 보여주는 실제적인 모습이 가장 자신에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인생관과 그 사람이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생각나게 해 주는 훌륭한 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또 ‘편지’라고도 했습니다. 의사소통을 하는, 편지 쓴 사람의 마음을 전해주는 것이 편지 아닙니까? 사람들이 그 편지를 받고 편지에 적힌 글을 통해서 편지를 보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을 편지라고 부른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더라도 하나님이 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우리가 그런 ‘편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편지는 말로만의 편지가 아니라 삶 전체가 편지가 되어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생각나게 해 주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자신의 삶이 분명한 원리 속에서 일관성 있게 걸어가는 인생이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그런 삶을 살게 해 주는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살아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간단해보이지만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시종일관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견고함이라는 것은 우선 생각의 견고함입니다. 생각에 논리가 없고 선이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은 그 사람의 감정도 그러하고 의지도 그러하고 삶 전체의 통일성과 정체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성,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라는 것은 자기가 어떤 사상을 세워놓고 나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 세상에서 보면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거나 자기는 하루에 몇 번씩 양치질을 한다든지, 혹은 다른 일은 몰라도 약속은 틀림없이 지킨다든지, 이런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정해놓고 그것을 어기지 않으려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견고해 보입니다. 확신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를 정확하게 생각으로 이해를 하고, 그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그런 생각을 삶으로 구현해 나갈 수 있는 자원과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서 ‘편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되면 아주 분명하게 다른 삶을 사는 우리를 보여줄 수 있고 그때에 왜 같은 시대에 똑같이 태어나서 저 사람은 다른 삶을 살까? 어떤 때에는 손해가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어떤 때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톨이가 되면서도 그런 삶을 택할 수밖에 없는 강제력이 저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저렇게 산다고 믿어지는데 ‘도대체 저 사람의 사상은 무엇일까?’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일 때 그들에게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의 길에서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현존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구원이 왜 필요한지를 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 그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가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가 비로소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기대하셨던 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참 사람이 될 때 비로소 그가 이 세상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하나만 더 예를 들고 본 강의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굉장히 오래전 일입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 반쯤 가는 섬 마을에 가서 겨울에 몇 달을 묵으면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배를 타고 거기서 인천으로 나오는데 파도가 굉장히 심하게 쳤습니다. 그래도 배는 떠났고 중간쯤 왔는데 무전이 와서 하는 말이 폭풍이 온다는 것입니다. 빨리 배를 돌려서 출발했던 항구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온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인천으로 바로 가버렸으면 좋겠는데 다시 돌아오면서 겪은 파도는 제가 태어나서 본 파도 중에서 최대의 파도였습니다. 그때는 예수님도 믿지 않을 때였는데 ‘장가도 못 가고 여기서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파도가 치는지 굉장했습니다. 파도가 배 이쪽을 때리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저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유리창 바깥에 보이는데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렇게 파도가 치니까 배도 빨리 가지 못했습니다. 항구로 거의 다 돌아올 쯤에는 캄캄한 어두움이 가득했습니다. 몇 시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동네 전체에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는 마을도 아니어서 시간제로 전기가 들어오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집도 별로 없는 마을이어서 캄캄했습니다. 배가 들어가는데 너무 캄캄해서 사면을 돌아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선창가에서 그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희미한 등대 하나가 깜박깜박 하고 있었습니다. 전기를 충전해서 무인으로 돌아가는 등대였습니다. 그 캄캄한 바다에 그 하나가 반짝거리니까 그 불빛을 보면서 우리 배는 안전하게 포구로 들어왔고 폭풍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배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배들도 그 딱 하나밖에 없는 반짝이는 등대 불빛을 보고 안전한 포구로 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적다고 하는데 사실 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몇 사람이 되든지 얼마나 성경이 바라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 원하셨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 영향력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단지 정치권력을 가졌다든지 혹은 그 사람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졌다든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위치에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그런 면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에 지금처럼 인공위성 위치추적 시스템도 없고 발달한 항해도구가 없었을 때에는 별자리를 보고 배를 운행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난 후에는 나침반을 이용하고 제도하면서 배를 운행했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중에 전쟁 때 사용하는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바다 전체를 대낮처럼 밝게 해야만 뱃길을 찾아서 배가 가는 것은 아닙니다. 캄캄해도 별 몇 개만 반짝반짝 빛나면 그것을 보고 능숙한 항해사들이 배를 조종해서 이 대륙 저 대륙으로 항해를 했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다니면서 무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진실하고 참된 신자가 대다수를 이루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심지어 교회사 속에서 유럽이 거의 기독교 국가가 되어버린 시대 조차에도 진실한 신자는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다른 사람이 진실하든지 말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우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 받은 후에 어떻게 해야만 좋은 신자가 될 수 있는지를 우리가 배워나가고 그렇게 변화 받아 나간다면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제왕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수많은 민중들이 들고 일어서는 혁명과 봉기로 이룰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해 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오히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 많이, 더 분명하게 왜 구원받아야 했는가? 그리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왜 예수님이 오셨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왜 죽으셔야 했고 그 죽으심을 나를 위한 구원에 적용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믿은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삶의 끝은 어떻게 되는가? 에 대한 분명한 생각과 얼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인생관이 되고 삶의 좌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감으로써 죄가 들어오기 전에 정말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참다운 인간, 그런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사요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론을 이정도로 하고 몇 시간에 걸쳐 살펴보려고 하는 “우리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거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인생이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그들은 인생을 ‘고(苦)’, ‘고통스럽다’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가리켜서 ‘고해(苦海)’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고통이 많이 있는 바다와 같은 것이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고통에 이제는 우리가 어느 정도로 익숙해졌습니까? 인생을 말하려면 고통을 떼어놓고는 생각해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난 너무 행복해! 난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행복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시간이 흘러봐야 알 것입니다.
아이들을 낳아서 기르다보면 알게 되는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과 확실히 다른 점이 있는데 아이들에게는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젖 먹는 갓난아이들이 자는 것을 보면 ‘내가 이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어도 되는가?’ 할 정도로 죄송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너무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평화롭습니다. 그것이 두 살, 세 살 되어도 점점 더 평화가 느껴집니다. 세 살 된 아이가 자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쳐다봐도 질리지를 않습니다. 못 생긴 어른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아이도 잘 생긴 아이, 못 생긴 아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눕혀놓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떻게 생긴 아이든지 상관없이 쳐다보는 우리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계속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드러누워서 잠을 잔다고 합시다. 다른 사람이 와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평화가 느껴지겠습니까? 안 느껴지겠습니까? 무슨 평화가 느껴집니까? 피곤에 쩔은 얼굴로 누워있는데 말입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아빠를 그려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더니 이렇게 그려서 가져갔답니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이 야단을 쳤습니다. “야, 인마! 아빠를 그려오라고 했더니 이게 뭐냐?”, “선생님, 그거 우리 아빠 맞아요.”, “아니, 너네 아빠가 이렇게 네모나냐?”, “그게 아니고 우리 아빠가 일요일에 이불 뒤집어쓰고 자는 모습이에요.” 이 속에 이렇게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는 어른들이 잠자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얼굴은 근심과 걱정에 절어 있고 침도 좀 흘리고, 잠꼬대도 하고, 그러다가 기분 내키면 이빨도 갑니다. 그렇게 자는 모습 속에서 전혀 평화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른이 자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영화 이외에는 없습니다. 영화에는 예쁜 배우로 가끔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예쁘고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그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 평화가 느껴지는데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왜?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숙제해야지, 시간 맞춰서 가방 싸 들고 가야지,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학교에 가서 처세를 잘 해야 왕따를 당하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보면 피곤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 더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화는 다 사라집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생 그 자체가 고통과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통스러운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고통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수도 없이 많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의 원인, 그리고 고통은 악(惡)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악과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할 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선 물질적인 가난, 궁핍이 이 세상을 엄청나게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 세계의 부를 공평하게 사람들에게 나누어 갖고 생활한다면 이 세상이 참 평화로울 텐데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잡지에서 보니까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부의 80%를 전 인류의 10% 정도가 나누어 가지고 누리면서 산다고 합니다. 나머지 20%를 90%의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구 한 곳에 가면 어떤 곳에서는 한없이 먹고 입고 쓸 것이 남아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가 하면 어느 한 쪽에 가면 너무 가난해서 도저히 끼니를 잇지 못해서 흙을 파먹고 풀뿌리를 캐먹고 죽을 먹으면서 고통 받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고통은, 충분한 물질이 공급된다면 그 고통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이 그런 가난에 있다는 것도 잘못된 견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한 세월을 보내봤는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굉장히 거칩니다. 인간적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조금 여유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니까 그렇게 느껴지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보면 가난하기 때문에 거친 면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게 거친 생활을 해 나가는데 만약에 경제적으로 충분하다고 한다면 사람에 대해서 훨씬 호의적인 태도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함이 이런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무지한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인생 자체가 불안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이가 열이 펄펄 나는 것을 보니 열병이 틀림없으니 주사를 맞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열병이 난 아이를 데리고 바닷가로 뛰어나간다고 합니다. 아이 입을 벌리고 젖은 모래를 아이 입에 쳐 넣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병들게 하는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모래가 잘못 들어가서 죽기도 한답니다. 이런 것들이 무지입니다. 호수 하나가 동네에 있는데 거기에 온갖 오물을 다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그 물에서 헤엄을 치고 그 물을 떠다먹고 그 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질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호수의 신이 진노를 해서 자기들을 아프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 지내고 나온 쓰레기를 다시 그 호수에 버립니다. 이런 것들이 질병도 불러오고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데 결국 깊이 캐 들어가 보면 그 원인이 무지(無知)에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지한 것들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람이 왜 병에 걸리는지 잘 몰랐습니다. 병이 있다는 것만 알고 병을 무엇으로 치료하면 낫는다는 경험치만 있었지 실제로 병원체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발견되고 나서 얼마나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질병으로 많은 구출을 받게 되었습니까?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가 전 세계적으로 거의 완성되었다고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70%정도 좇아왔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완성되고 나면 사람들을 현저히 그 질병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훨씬 더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질병도 계속 극복을 해 나가면 우리가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살아가니까 사람들의 고통이 점점 증가됩니다. 질병도 한 사람에게만 그치는 작용이 아닙니다. 집안 식구 중에서 한 사람만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사람 때문에 직장도 그만두고 간호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도 하고 집도 팔고 가족도 흩어지기도 합니다. 보통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도 역시 인간의 고통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우리가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전쟁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 사람들이 그 전쟁에 대해서 책임질만하고 죽어야할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아무 책임질 이유가 없는 불쌍한 양민들이 폭탄에 맞아 죽고 사격을 받아 죽고 굶주려 죽고 부모를 잃고 자녀를 잃으며 한을 품고 그 고통 속에서 눈물을 삼키며 한 평생을 삽니다. 6.25전쟁이 끝난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50년 정도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그 상처들이 민족의 가슴 속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런 전쟁의 고통 같은 것도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밤을 새워도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원인들이 이 사회,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주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사회를 이렇게 바꾸자, 저렇게 바꾸자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을 가져다주는 원인들은 이렇게 다양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하나는, 이런 고통과 악이라는 것은 어떤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면 재채기가 나기도 하고 콧물이 나오기도 하고 뼈마디가 욱신욱신 쑤시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기도 합니다. 감기에 걸려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 그런 증상을 보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핏줄이 터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통이 난다고 해서 뇌수술 전문병원으로 찾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감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뼈마디가 막 쑤신다고 해서 정형외과를 찾아가서 쑤시고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과 병원에 가서 감기 걸렸다고 하고 주사 맞고 약을 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통도 낫고 쑤시는 것도 낫게 됩니다. 그 병이 바로, 이 악과 고통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병의 증상이라고 한다면, 이 증상을 가져온 궁극적인 병은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기가 걸려서 콧물이 쏟아지면 더러우니까 콧물은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콧물을 닦는 깨끗한 휴지가 감기 몸살에서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감기에 걸렸으면 감기 자체를 고쳐야 그 감기의 증상들을 처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고통의 근원인데, 여기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서 고통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고통이라는 열매, 악의 열매들이 함께 맺히는데 이것들을 계속 따 내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따 내도 또 다시 열매가 맺힙니다. 따 내도 또 다시 열매가 맺힙니다. 언제까지? 이 나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열매가 맺힙니다. 이 나무를 인생에 비유하면 죽음이라는 고질적인 질병을 고치지 않으면 이것을 아무리 따 내어도 다시 열매가 맺히고 다시 열매가 맺히는데 이 열매가 싫으면 죽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사람이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에 나온 말씀과 같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했으니 이 세상에서 맛보는 이 고통도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게 되면 이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큰 고통을 받게 되니까 고통은 영원하다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죽음이라는 이 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제가 좀처럼 아파서 눕는 사람이 아닌데 작년에 독감을 엄청나게 걸렸습니다. 얼마나 뼈마디가 쑤시는지 견딜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가서 세미나를 하려고 여기에 왔는데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시는데 뼈마디가 쑤시고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고 하니까 싸악 웃으시면서 금방 나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영양제를 한 대 맞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영양제나 보약 이런 것을 싫어했지만 저는 평소에 생각하기를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교회에 가면 목사님의 말씀을 잘 듣고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더니 무엇을 하는 분이기에 시키는 대로 잘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대학에서 선생을 했었고 지금은 한 교회의 목사라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목사님, 주사를 맞으십시오.” 해서 주사를 맞았는데 신기한 것이, 뼈마디를 바늘로 쑤시는 것 같았는데 주사를 맞고 5분이 지나니까 통증이 멎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 같다고 생각하고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까, 이 감기 바이러스가 공격을 할 때 아무 곳이나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제일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데 그 약한 부분, 공격해서 뜯어먹기 좋은 곳이 바로 이 뼈마디라고 합니다. 거기에 집중적으로 몰려서 뼈마디가 쑤시는데 한참을 뜯어먹다가 별로 먹을 게 없던 찰나에 피를 타고 맛있는 아미노산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게 맛있는 거라고 거기에 다 달라붙어서 먹기를 시작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영양주사 한 대를 맞고 독감이 낫느냐? 낫지 않습니다. 그 다음날도 가서 맞고 그 다음날도 가서 맞습니다. 닷새 동안 매일 갔지만 결국 다 낫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즉 이런 고통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접근을 하면 어느 정도는 고통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만 A의 고통이 해결되면 B가 떠오르고, B가 해결되면 C가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보면, 가난할 때는 구루마를 끌고 야채를 팝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남편은 소리치고 아내는 돈 받으면서 둘이 같이 먹고 살았습니다. 싸우고 갈등을 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습니다. 꼭두새벽에 나와서 죽어라 하고 물건 팔고 쌀 한 되라도 사들고 집에 가서 발 씻고 나면 그냥 쓰러져 잡니다. 시간이 있어야 싸우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돈을 좀 벌게 되었더니 집에 가만히 앉아서 TV보고 가끔 가게에 나가도 돈이 몇 천만 원씩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이런 생각이 들어옵니다. “내가 이 정도 경제생활을 하는데 저런 여자보다 훨씬 더 괜찮은 여자와 살 수도 있을 텐데……. 왜 저렇게 촌스럽지?” 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집니다. 돈이 생기니까 헬스클럽도 다니고 성형수술도 하고 나니까 자기는 뭔가 상류층으로 올라온 것 같은데 왠지 자기 남편은 돈만 있지 좀 촌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남으니까 항상 그런 것만 생각하며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굶주림이라는 A라는 고통은 돈이 많아지면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B라는 문제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애정과 갈등, 신뢰, 이런 것들이 깨어지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떠오르니까 결국 하나를 죽이면 다른 하나가 떠오르고 또 떠오르면서 이 고통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악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런 엄청난 질병을 우리에게 가져왔고 그 질병 때문에 인간이 커다란 고통 속에 시달리게 만드는가? ‘죽음’이 무엇인가? 입니다. 어떤 글을 읽어보니까 ‘죽음’을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것을 무엇을 보고 죽었다고 하는가? 뇌의 활동이 멈춘 것인가? 뇌사 상태에서 깨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숨을 안 쉬는 것인가? 숨을 안 쉬어도 배를 몇 번 누르면 다시 숨을 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장이 멎은 것인가? 전기쇼크를 주면 심장이 다시 뛰기도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죽음을 배경에 깔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세사에서는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생명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모든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 생명이다.”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생명이 떠나가 버리는 것, 생명이 없어져 버리는 것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고통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여기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어야 나쁜 짓도 하고 고통도 생기고 악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죽음이 단순히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혼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갑자기 영혼은 왜 뛰어 들어 옵니까?
이 문제를 풀어가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을 안 믿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육체는 무엇이고 영혼은 무엇인가?”, “한 번 죽는 것은 죽는 것이지 영혼이 또 죽는 것인가?” 육체는 눈에 보이니까 존재한다는 것이 인정이 되고 숨이 끊어지는 것도 눈에 보이고 생명이 떠나가는 것도 시체가 썩는 것이 보이니까 육체의 죽음이 입증되지만 영혼의 죽음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그 이전에, 영혼이 정말 존재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의 궁극적인 고통인 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인간에게 정말 영혼이 있는지를 다뤄야만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에게 육체와 영혼이 있는가 말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성경은 인간에게 육체가 있고 영혼이 있다,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육체라는 용기 속에 영혼이 담겼는데 단, 육체라는 용기 속에 영혼이 담겨있지만 육체는 영혼과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어서 이 영혼의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육체가 영향을 받고, 반대로 육체가 어떤가에 따라서 영혼도 다소 영향을 받는 그런 상호간의 작용 속에 만들어진 유기적인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다음 시간에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2 CBS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강의2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2)
녹취자 : 김세나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이 세상의 악과 많은 고통들이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인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질병이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의 많은 악과 고통의 현상들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증상들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볼 것은, 그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그러한 죽음이라는 증상을 몰고 왔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마지막으로 살펴본 것이 이러한 나무입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나무가 있는데 여기에서 악과 고통이라는 열매가 많이 맺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따 내어도 또 다른 고통의 열매가 맺히고, 또 다른 고통의 열매가 맺히고, 끝이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 해결 하였는가 싶으면 이게 해결되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던 또 다른 B라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계속 고통이 그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은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확실히 이 죽음이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지난 시간에 살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살아있기에 지금 고통을 경험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답이 육체의 죽음 때문에 이러한 질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영혼의 죽음 때문입니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제품을 볼 때 이 제품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을 놓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뭐다, 뭐다 말하는 것 보다는 공장에 가서 만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속에 스펀지가 들었는지 솜이 들었는지, 헝겊이 들어있는지는 저도 여러분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 보다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져 보니까 스펀지는 아닙니다. 그러면 확실한 것 하나는 이것을 뜯어보든지, 아니면 공장에 가서 여기 이 지우개를 만드는데 필요한 자제들을 쌓아놓고 작업되는 과정을 보면 이 지우개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고, 그렇게 파악된 결론은 누구에 의해서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만들어 질 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아파르’라고 되어 있는데 ‘티끌’입니다. ‘먼지’, 혹은 ‘티끌’입니다. 여기에서 먼지, 흙에서 빚어서 사람의 형상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육체가 되고, 육체 속에 후하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는데, 후 불어 넣으시는 과정은 하나님이 이 속에 이 사람의 영혼을 담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동물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는 어떻게 다릅니까? ‘동물들도 영혼이 있는가?’ 이러한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기를, 하나님께서 흙으로 육체를 빚으시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영혼을 주입시키심으로 이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산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동물도 이러한 육체가 있고 영혼이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동물들은 하나님이 육체를 주셨지만, 육체 속에 영혼이 아니라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혼’이라고 이름 짖는 어떠한 기능을 주셨습니다. 생명적인 기능, 육체의 삶이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살아갈 때 환경과 상황에 반응할 수 있는 어떤 기능, 그래서 일정한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무엇인가 결정하기도 하는 그러한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자체를 인격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하등한 혼적인 기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죽음과 함께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실제가 있어서 육체가 사라져 버리면 혼적인 기능만 따로 존재해서 어디로 가고 안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이것이 작용을 하다가 육체가 죽으면 이것도 함께 소멸되어 없어지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조될 때부터 인간의 창조와 동물의 창조는 다릅니다.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바다에는 고기가 다니고 하늘에는 새가 날고 땅에는 육식들이 있으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까 바로 생겨나 그렇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창조 때부터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특별하겠습니까. 우선 만드는 방법부터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실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있어라’ ‘빛이 있어라.’ 식물들, 동물들 모든 것들이 다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행동이 없이 말씀으로만 창조하셨습니다. 이것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에 인간들이 창조된 세계를 보면서 이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된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은 확증해 줍니다. 창조된 세계를 보면서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은 입증이 됩니다. 첫째는 주인이 있다, 창조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만들어 놓고 가셨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다른 것도 아니고 말씀 한 마디로 명령하시니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하나님은 강력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세계를 이야기 할 때마다 성경에서 특히 시편에서 많은 시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능력에 대한 찬송이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입증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은 확실히 이루어지는구나, 보증이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이 이런 노래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눈을 들리라” 어디를 향하여?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왜 입니까? 그 산을 향해 눈을 드는 순간에 이것을 지으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이 능력이 한없이 많으시다는 사실, 그분이 말씀 한마디로 이 산이 생길 수도 있고 사라질 수 있구나, 이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바로 내가 의지하는 아버지가 그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환란과 어려움이 와도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고 염려할 것이 없는 사람인가, 이것을 회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다른 것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날 여러분들이 성경을 펴면 읽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서 풀어서 전달해주는 것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는 우주에 울려 퍼졌고, 하나는 성경에 기록되어 내 마음에 울려 퍼진다고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것의 저자, 그 저자의 능력과 신실함은 동일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이고 그러한 신앙을 갖고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다른 수단이 아닌 오직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창조를 하셨는데,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도 있어라.’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찬양)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주 하나님
찬양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끝도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의 세계는 영어로 이야기 하면, ‘Be there! 거기 있어라!’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인간은 하나님이 직접 흙을 떠서 그것을 빚으시고 형체를 만드셔서 거기에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이렇게 창조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와 구별된 행동을 하심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물론 우리가 그 깊은 뜻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싶으셔서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이 똑같이 창조하시지, 인간만 그렇게 유별나게 그러한 특이한 방법으로 창조하셨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는 피조물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동창생이지만, 그러나 존재의 의미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더 힘이 센 커다란 공룡이나 맹수보다도 인간은 존재의 의미가 다르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먼 우주에 있는 별 하나로도 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지만 그러나 그 모든 우주, 끝도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 속에, 침묵 속에 흩어진 파랗고 빨갛고 하얀 수많은 별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미가 바로 누구를 향한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때에는 인간이 존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빚으셨을 때, 그때에는 인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는 뭐냐 하면 당신 자신을 향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끝도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와 인간을 빼놓고 존재하는 아름다운 창조된 이 세계에 모든 것들, 그것이 당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의미가 당신이 빚으시는 그 한 사람 속에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미 성경을 잘 몰랐던 어느 철학자들도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피조물과 구별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자연의 일부라고 보았지만, 자연은 인간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습니까. 자연이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철학도 가능한 것이고,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으니까 우주에 대한 탐구도 가능하고, 자연이라는 존재의 의미도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해서 특별하고 탁월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대한 면류관’이라고 표현합니다. 왕이 근엄한 비단옷을 입고 황금으로 빛나는 의자에 앉았다고 하더라도 맨머리라고 한다면 왕의 영광이 없습니다. 왕의 머리에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이 그 머리위에 씌워져 있을 때, 차려입은 비단옷과 황금 의자와 많은 신하들이 빛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가 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 실감이 안 날지 모르겠습니다.
더 실감나는 비유를 드리겠습니다. 건물을 하나 지었습니다. 여기에 건물 안에 전기를 설치하고 전구를 달았습니다. 네온사인 간판을 달고 축하하는 전기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건물건축을 축하한다는 행사를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스위치를 딱 올리니까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와’ 하는 것처럼 인간의 창조는 불을 켜는 사건과 같겠습니다. 그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그 인간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의 세계가 불이 들어오는 것 같은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빛이 뭐냐 하면 말하는 빛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 말하는 빛인가 하면, ‘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단다.’ 말하는 찬란한 빛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창조됨으로써 가능하였습니까? 인간이 창조됨으로써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면류관이라 불러질 정도로 아주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셨는가에 대해 궁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육체 속에 하나님이 영혼을 넣어주신 것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만약 영혼을 주시지 않았다면 짐승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육체라는 껍질이 있고, 육체가 창조될 때 동물들이 창조된 것처럼 육체라는 껍질이 있고 이 육체라는 껍질 속에 하나님이 육적생명기능을 주어서 동물들이 움직이고 생활하는 것처럼 만들어 주셨을 것 같으면 똑같이 피조세계 중 일부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을 인간에게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순결하신 영이십니다. 하나님을 봤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눈에 보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혹시 당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서 매개체로 어떤 것을 사용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본 것이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비유로 하자면, 바람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비행기타고 만 미터 상공에 올라가면 초속 53미터의 강풍이 붑니다. 그런데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땅에서는 5미터만 불어도 보입니다. 왜 입니까? 빨래가 펄럭거리고, 잎사귀가 흔들리면서 “아, 바람이 지나가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바람을 보았니?”라고 이야기 하면 바람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람을 본 것이 아니라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매개물들을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람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닮은 그러한 특성을 영혼이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인간 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인간 속에 있는 이 영혼과 하나님 안에 있는 영이 질적인 면에서는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소통되고 하나님이 자기의 생각도 이 교통을 통해서 보내시고, 당신의 마음도 보내시고, 당신의 결단하고자 하는 의지도 보내시고, 인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하나님께 보내기도 하고 서로 교신할 수 있는, 교통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혼을 주어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독특성, 인간이 모든 피조세계에 있는 존재들과 구별되는 단 하나의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이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하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동창생입니다. 그래서 동창생끼리는 잘 지내야 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을 잘못 해석해서 인간이 폭군처럼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모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고 하면서 파괴하는데, 이러한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한 예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려라 할 때, 그 때 다스시라고 하실 때 하신 그 동사가 히브리말로 ‘라다’라는 동사입니다. ‘라다’는 뭐냐 하면,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의 의미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가서 심심하다고 백성을 칼로 찔러 죽이고, 왜 죽이냐고 하면 “심심하니까.” 하고, “저자가 살던 집을 부수어 버려라.” “왜 그렇습니까?” “우울하니까.” 그렇게 하면 그게 왕입니까? 왕이 아니라 침략자입니다. 진정한 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왕은 잘 다스려서 백성들이 그 땅에서 자기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행복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진짜 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할 때 하나님이 왕이시지만, 하나님께 위임받은 지배자로서 이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량한 관리자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자연을 파괴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창조섭리에 어긋나고 어리석은 행동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되었는데, 육체가 왜 죽게 되었는가는 다음 시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만, 육체는 죽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가 흩어집니다. 자연스럽게 흩어져 죽을 때 영혼은 남습니다. 영혼은 죽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썩어서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다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왔으니까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이 이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생명의 기능이 다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영혼의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은 영혼이라는 존재의 성격이 육체라는 존재의 성격과 다릅니다. 양식이 다르니까, 죽음의 의미도 육체는 멸절을 의미한다면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멸절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육체가 있는데 이 육체가 생명기능과 연관되어 있을 때 이 육체를 가리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숨도 안 쉬고 어떠한 생명의 기능도 없고 죽어 있은 지 며칠 된 시체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을 가리켜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 기능이 떠나갈 때 그것을 가리켜 죽었다고 말하고 생명 기능과 연결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육체에게 있어서 육체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을 생명 기능이라고 말한다면, 영혼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아직까지 연결을 맺고 있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이 인간 영혼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그 어떤 영혼의 생명적 기능이 흘러들어오고 있는 동안에는, 공급되고 있는 동안에는 그래서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것이 끊어져 버리고 그래서 이것이 단절되어 버리게 되면 이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육체는 죽으면 아무 행동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하지만, 영혼은 죽었는데도 아직까지 육체가 감싸고 있고 이 안에 생명 기능은 살아있습니다. 생명 기능은 살아 남아있으니까 육체가 생각도 하고 냄새도 맡고 밥도 먹고 돌아다니고 이 것 저 것을 행합니다. 이것은 아직 살아있음입니다. 영혼은 죽었어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공식이 나오는가 하면, 동물은 죽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산 것은 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살아 있는데도 죽어 있을 수 있고 죽었는데도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영혼이 죽어있으면서 육체는 살아있을 수 있고, 또한 육체는 죽었는데도 영혼이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 기능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어서 육체가 소멸되어서 생명 기능도 함께 사라집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육체가 죽었는데 팔을 움직이는 기능이 남아있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은 죽으면 죽은 것이고, 살면 산 것인데 인간은 살아도 죽어있을 수 있고 죽었어도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을 그러한 끊임없는 악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그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는 상태가 바로 악과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더욱 궁금한 것은 뭐냐 하면 ‘무엇이 이러한 죽음을 몰고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간단한 것인데 무엇이 죽음을 몰고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인 설명과 유비의 관계에서 이야기 하면 쉽습니다. 병의 징후는 질병의 원인이 있는 것이고, 질병은 근본적으로 병원체에 원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폐병 환자는 결핵균을 가지고 있고 암 환자는 암 세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질병을 가져다주었고 그 질병이 징후와 증상들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악과 많은 고통이 있는데 이것은 현상일 뿐이고 궁극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죽음입니다. 오늘 들은 설명에 의하면 이렇게 죽음이라고 말을 하지 않고 영혼의 혹은 영적 죽음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죽음 때문에 악과 고통이 오게 되었구나, 그러면 이 죽음이 가져다 준 것이 또 무엇 때문에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는가, 할 때에 이것에 대한 답이 바로 죄입니다. 죄. 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흔히 죄라는 말을 이야기 할 때, 악이라는 말과 함께 왔다 갔다 하면서 사용합니다. 비근한 예가,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죄’와 ‘벌’을 영어로 적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벌’은 ‘Punishment’가 됩니다. 이 ‘죄’는 지금 무엇이 되겠습니까? ‘죄’라고 할 때,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Sin’입니다. 그런데 『죄와 벌』의 영어 번역본을 보면 모든 책에 ‘Crime’이라고 나옵니다. 『The Crime and Punishment』. 그러면 이제 우리가 흔히 죄라고 사용하기도 하고, 악이라고 사용하기도 하는 말은 영어에서 보면 sin과 crime으로 나누는데, 이 crime은 뭐냐 하면, 법적으로 잘못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행동을 하거나 안 한 것입니다. 그렇게 법적으로 범법자가 되게 하는 행동을 했거나, 혹은 해야 하는 것을 안 했기 때문에 범법자가 되게 하는 그러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악행입니다. 악행. 그런데 sin은 훨씬 더 깊습니다. 뿌리입니다. 정확히 묘사하면 sin의 뿌리에서 crime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죄와 악을 흔히 이렇게 사용하는데,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죄는 뿌리이고 거기에서 악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죄악이라고 할 때, 악한 행동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인 실체를 지칭하는 말로서 죄악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악은 죄의 결과라고 결론을 질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성선설의 입장에서 인간의 존재를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악설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까? 인간의 근본 성품이 기독교 입장에서는 선하다고 보는 것입니까?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이 나옵니다. 성선설로도 볼 수 있고, 성악설을 따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도덕적인 악이 열매를 맺는다는 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관점이 성악설과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상당 기간 동안에는 죄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때 그 상태에서 인간은 완전히 깨끗하고 완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때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가 없는 깨끗한 상태에서 죄가 있는 인간이 되었고, 거기에서 죄 때문에 악이 나오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 사이에는 타락이 있었다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은 성선설과 성악설의 관점과는 조금 특이한 차이점이 있는 그러한 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죄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 이것이 죄다 혹은 아니라고 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라마다 남의 나라에서 아무리 가져와도 문제가 안 되게끔 개방된 물건이 있고, 이만큼만 가지고 들어와도 문제가 되는 물품이 있겠습니다. 그러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을 때에는 아무리 가지고 들어와도 그것을 밀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금지가 되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 밀수가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립이 되겠습니까. 죄가 성립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기억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외국산 담배를 양담배라고 하였습니다. 이 양담배를 피우면 간첩행위 한 것 다음으로 무서운 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전매청에서 양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가 듣기로는 얼마나 전문가인지 100m 밖에서 올라오는 연기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국산 담배인지, 양담배인지 파악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걸리면 굉장히 큰 벌을 받았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왜 그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양담배를 피워서 무슨 문제가 생기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피우는 담배를 한국 사람들이 피우면 갑자기 죽는다든지, 에이즈 같은 전염병을 옮긴다든지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큰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법이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법이 왜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까? 나라고 가난하니까 그 담배는 싸게 만들어서 비싸게 파는 것이니까, 세금을 많이 매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흡연자들의 돈으로 나라 살림을 할 텐데, 다른 나라 담배를 피우면 국산 담배가 팔리지 않고, 그렇게 되면 전매수입이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이게 사실은 도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양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애들한테 양담배 못 피우는 포스터도 그리게 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누구 아버지는 양담배만 피운다더라, 나쁜 놈! 매국노! 이렇게 인식되는 때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미국 가서 물론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어서 안 그러시겠지만, 양담배를 양쪽에 두둑하게 넣어 왔다고 해서 누가 밀수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큰일 날 일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기준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라고 하는 것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죄라고 하는 기준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이것을 위반한 자들, 즉 범법자들이 필요하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범법자는 인간이 됩니다. 판단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라집니다. 또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이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다른 기준입니다. 늘 변하는 사회의 법도 될 것이고, 또한 자기의 인생관이 될 수 있습니다. 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가끔 자기에게 욕하는 것도 용서하고 나한테 밥만 얻어먹는 것도 용서하고 가끔 돈을 꿔달라고 하는 것도 용서하고 오밤중에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하는 것도, 개기면서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것도 용서하는데 약속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를 못합니다. 그러한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다른 것을 다 잘한다 하고, 약속을 어기면 완전히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됩니다. 기준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세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할 때 그 기준이 분명히 있다. 판단자도 계시고 기준이 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기준을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기준이 있었는데 이 기준을 어겨 버리는 것입니다. 어기는 이것이 죄이고, 두 번째는 이렇게 하라고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도달을 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도달하다가 떨어져 버립니다. 모자라는 것이 결국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기대하셨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관계입니다. 관계. 당신 닮은 성품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바가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존재가 인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잘나서 이러한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교통할 수 있는 자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혼입니다. 그래서 이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관계는 가족관계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가깝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여망이 나중에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하면, 당신이 구원한 백성을 가리켜 ‘자녀’라고 부르신 것에서 나타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이라고 할 때 이것은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닌 영적인 세계, 천사들이 거하는 영적인 하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영적 세계를 창조하시고 지상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늘은 천사들에 의해서 다스리게 하시고, 땅은 하나님이 인간을 주셔서 인간이 이 땅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이 하늘과 땅의 유일한 왕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들이 하늘나라를 다스리고, 이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순종하는 인간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릴 것처럼 그렇게 다스려서 완벽한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이 인간보다 우수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나, 미래를 아는 것에 있어서, 도덕적인 면에서도 인간보다 우수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죄가 들어온 다음에 나타난 현상이고 여기 천사는 이렇게 다스리는데, 인간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인간이 천사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아름답게 다스리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것을 해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가족관계가 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가족관계인데, 대등한 가족관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기대어져 있는, 예를 들자면 갓 철이 들려고 하는 세 살짜리라고 보고,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라고 볼 때, 그 아이가 부모 밖에 모르고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절대의존의 관계가 되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친밀성으로 보자면 가족관계라고 비유할 수 있다고 이야기입니다. 절대의존입니다. 그래서 이 절대의존이라는 말이 앞으로도 많이 나오는데, 이 절대의존의 마음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신앙에 대한 정의입니다. 신앙이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절대 의존의 마음입니다. 신앙적인 삶이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절대 의존적인 삶입니다. 신앙적인 사고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절대 의존적인 사고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절대순종이 나타납니다. 의존하는 경우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비유를 들고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혼자 산길을 잘못 들어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아무래도 집을 못 찾습니다. 시간이 지나 캄캄한 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가 이제는 내려갈 수도 없고 올라갈 수도 없이 지쳐서 울고 있는데 거기에 마침 산을 오르고 있는 한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왜 우니?” “길을 잃어버렸어요.” “걱정하지 마라. 아저씨가 산 두 개를 넘어서 동네로 가는 길인데 나를 따라가자.” 그러면 이 아이가 얼른 따라 나설 것입니다. 이리로 와라 했을 때 “싫어요.” “왜 자꾸 이리 와라 저리 와라 해요?”라고 하겠습니까? 아저씨가 “손을 꽉 잡아라.” 하면 아이는 땀이 흐르도록 그 아저씨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거기에서 혼자 떨어지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게 절대 의존의 마음이고 ‘잡아라.’ 할 때 꼭 잡고 놓지 않는 이것이 절대 순종의 (51:55) 여기서 끊김.
2002 CBS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강의3
죄란 무엇인가
녹취자: 김경애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절대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행동에서도 나타나셨듯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창조한 다음에 인간을 놔두시고 하나님이 손을 거두신 다음에 너는 너대로 살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지속적으로 창조될 때에 그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을 의존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에도 당신을 의존하게 하심으로써 그래서 그 의존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가족처럼 친밀함으로 교통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좋은 것들이 인간에게 전해져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끔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이 아주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지난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죄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첫째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범한 범법자가 필요하고 세 번째는 이것을 범법했다고 하는 판단하는 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전해놓으신 기준, 인간이 저지른 범법, 그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이 세 기준이 있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성립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죄에도 뿌리가 있을 것입니다.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그런 죄가 들어와서 번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새 ‘사스’라고 해서 괴질들이 광범위하게 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하지만 ‘사스’가 어떻게 감염되는가?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떨어져있는 상태에서는 감염이 안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희박하다고 보고 악수를 하거나 침이 튀거나 하는 것이 자기 몸에 들어가는데 들어갈 때 그 균은 아마 아주 작은 일부였을 것입니다. 일부가 들어가서 그것이 속에서 자생작용을 일으켜서 많이 번성하게 될 때 그런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대부분의 질병이 그런 이치입니다. 똑같이 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 잠시 뒤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이런 죄의 근본적인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여기에 하나님이 있고 여기에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고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 ‘교통’이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인데 ‘Communion’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가 주어지면 이런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이 인간이 이런 존재가 되고, 이런 존재로 살아갔으면 하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힘이라든지 살아갈 자원이 필요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한 사람이 직업 활동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하면 그곳에 간다고 돈이 벌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도 있어야하고 그 직업을 감당해나갈 건강도 있어야하고 자본도 있어야하고 또 돕는 사람도 있어야하는 그 모든 것을 총칭해서 자원이라고 부른다면 그렇게 사업에 성공을 위한 그런 자원이 있어야지만 사업을 감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놓으시고 인간에게 ‘너는 이런 존재가 되라. 이렇게 살아가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희망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만의 자원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과 교통을 맺고 거기에서 절대 의존하고 절대 순종하는 관계 속에서 ‘Communion’ ‘교통’을 이루어갈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런 의도대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하늘자원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원을 힘입어서 인간이 이런 삶을 구현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완벽하게 이런 관계가 정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었다는 면에서 그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이 의미는 물론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와 비교할 때 그는 상대적으로 완전한 인간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죄도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전한 인간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런 위치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기만 하면 능히 하늘로부터 이런 하늘자원을 공급받아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맞도록 그런 존재가 되고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광활한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인간이 완전하고 무죄한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이 상태가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안전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안전과 완전히 결합되어야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상태가 되는데 완전하기는 했지만 안전하지는 않아서 언제든지 이것이 불완전해질 수 있고 무죄함이 사라지고 죄가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위치에 인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인간의 자유의지와 맞물리는데 나중에 하는 것으로 하고 어쨌든 인간이 이렇게 완전하고 죄도 없었지만 그러나 인간이 영원불변한 상태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자유스럽게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셔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는 이 개연성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도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유의지에 의해서 의존하고, 자유의지에 의해서 순종하게끔 만드셨지 억지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송 부르는 것을 이렇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찬송할 때 하나님이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십니까? 이것도 몇 시간씩 부르면 힘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마네킹을 놓고 그 속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사람들이 다 가버렸습니다. 녹음기에서 계속 가수의 찬송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치로 하나님이 인간을 태엽을 감아서 놔두면 톡톡 뛰면서 돌아다니는 길거리에서 파는 인형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면 그 수준이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쓰던 구루무병 놓고 칼을 옆에 차고 ‘너희들은 내 졸병이다. 내 말을 들어라. 너는 여기에 서고…….’ 그러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조금 돈이 있는 집은 인형을 세워놓고 ‘너는 여기를 공격해라. 총을 쏴라. 너는 죽었다.’ 조금 더 돈이 많은 집은 태엽을 감는 것이나 전기 스위치를 눌러서 앞으로 가라고 리모컨을 누르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고 그것을 보고 자기가 진짜로 이것들이 나에게 순종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유아기적인 사고방식이거나 아니면 치매증상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과대망상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당신을 좋아하도록 그렇게 만드시고 기뻐하며 섬기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서 의존과 순종의 관계를 가지고 살게끔 되었는데 이 인간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인간이 이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가 죽어서 사라지든지 아니면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야지 독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안 갔는데 자매들한테 그런 경우가 많은데 나이를 먹도록 시집을 못 갔습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시집가라고 하는 것도 듣기 싫으니까 어느 날 “엄마 아빠. 나 이제 독립하겠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보따리를 다 싸서 집의 허락을 받고 나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독립한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제는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서 엄마 아빠를 의지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살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독립입니다. 인간이 죄가 들어오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 앞에 이 의존의 관계를 저버리고 독립을 하려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독립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할 때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성품 중에서도 그러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성품을 가리켜서 조금 어려운 말로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속성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빼면 절대로 그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성품을 가리켜서 속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분이 하나님이 되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것, ‘전지하심’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 무엇이 있느냐하면 독립성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느냐?’ 하니까 원숭이에게서 나왔다고 하니까 “아니야. 그것은 교회에 가서 선생님께 물어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인간은 인간으로 창조하고 원숭이는 원숭이로 창조했대!” 교회에 안다는 애가 물어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그래!”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냐?” 그러면 얘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은 만든 사람이 없어. 원래 하나님이야.” 그러면 얘가 묻는 것입니다. “원래 있는 것이 어디 있냐? 누가 만들었으니까 있지! 원래가 어디 있느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자의 개념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존재의 끝입니다. 더 이상 누가 만들었다든지 누구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떤 존재가 누구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누가 나를 존재하게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끝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결정함에 있어도 누구에게 영향을 받거나 누구에게 압력을 받는 분이 아니라 혼자 스스로 결정하실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독립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이 독립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것이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창조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렇게 있습니다. 예를 들면 관계가 형성됩니다. 여기에 식물이 있습니다. 식물은 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식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H²O 즉 수소분자, 산소분자가 만나야지만 물이 됩니다. 그럼 이 물이 식물에 내리기 위해서는 비라는 자연현상이 필요합니다. 그것 가지고 됩니까? 햇빛이 있어야지만 이 햇빛을 받으면서 광합성작용을 해서 여기에서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 식물이 땅에서 자라는데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잎이 떨어집니다. 땅은 잎이 떨어져야합니다. 그래서 부엽토가 됩니다. 부엽토가 되면 흙이 기름져집니다. 기름져야지만 여기에서 식물이 올라와서 양분을 빨아먹고 자랍니다. 이것이 이렇게 자라야지만 나무가 커집니다. 나무가 커져야지 새들이 날아옵니다. 집도 짓습니다. 동물들이 밑에서 살면서 은신처를 삼아서 자연의 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외적의 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서 종족을 번식합니다. 이런 동물들 특히 곤충 같은 것들이 살아서 움직여야지만 꽃과 꽃 사이에 꽃가루를 날라서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 이것이 열매를 맺어야지만 인간들이 먹고 인간들이 먹어야지만 이것을 가꾸게 됩니다. 이것이 돌면서 모든 것들이 핏줄처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결되어있습니다. 단 하나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태양이 있고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이렇게 있습니다. 이렇게 세 번째 돌아가는 것이 지구입니다.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규칙적으로 기가 막히게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이 출장 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안돕니다. 태양이 이렇게 이런 정도의 질량을 가지고 여기에 존재하니까 여러 가지 인력의 법칙들이 작용하면서 이것이 정교하게 돌아가는 것이지 태양이 출장을 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구가 출장을 가면 달이 혼자서 지구를 돌던 지구를 그리워하면서 계속 돌겠습니까?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전부 피조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어려운 말로 ‘Communicatio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독립선언을 하고 빠져나온 것은 태양이 출장 간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출장 갔습니다. 태양에 의해서 이것이 무게와 질량에 의해서 역학관계가 형성되어서 돌아가던 모든 이 ‘Communication’이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드려진 것입니다. 배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깨뜨려지니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다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달과 별이 충돌하는 것은 아닌데 영적으로 이런 관계를 다 가지고 있었는데 이 관계 자체가 다 틀어진 것입니다. 이런 모든 부조화속에 인간의 독립선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왜? 수없이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가? 왜 인간에는 악과 고통이 끊임없는가? 이 문제를 가지고 무수히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극복해보기 위해서 인간들이 별의별 생각을 다 짜내고 지혜를 짜냈지만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관계들이 깨뜨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독립선언입니다. 이것들이 깨드려져서 여기에 모두 이런 관계 속에 배여서 관계들을 형성하는 자원인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의 충만함이 여기에 꽉 차서 이것들을 서로 ‘Communication’ 하게 하면서 온 인간을 중점으로 해서 온 우주가 함께 작동하면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 피조의 세계 속에 찬란한 하나님의 광채가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출장 가서 독립선언을 하고나니까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전기가 나간 것처럼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전히 완성될 때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이 안에 다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자연과 인간과 온 우주의 유기적인 관계의 ‘Communication’이 정상적으로 완벽하게 작동되고 그래서 이 창조세계 전체가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이해가 가니까 진전을 합니다.
이렇게 되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모든 것들이 깨지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이 인간의 독립선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살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라고 할 때 그 죄를 살인하고, 간통하고, 남의 돈을 빼앗고, 친구에게 발길로 차고 폭력을 해서 피를 흘리게 만들고 돈을 빼앗아 도망가는 이런 것들만 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물론 죄에서 흘러나온 아까 말씀드린 악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인간이 고통하면서 살아가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이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어디서 나타나느냐하면 지금도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이 그냥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인간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왜?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기대는 인간이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의지하고 의존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의뢰하고 의존하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하고 자다가도 하나님이 안계시면 “하나님!” 그러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하나님을 손을 붙들고 “하나님 어디 가지 마세요!” 하며 꼭 붙들고 그렇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런 독립선언을 하고나니까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죄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에 대한 모든 판단의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고의 중심 속에 자기가 있고 온 우주의 삼라만상의 주인이요 지배자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악한 죄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사고 자체가 자기를 이 세상에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의존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독립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그것보다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런 비유를 만들어봤습니다. 여러분 옛날에 임금이 있습니다. 임금의 지위라는 것은 오늘날 전 세계 대통령을 합해도 옛날의 임금 하나가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인데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갔습니다. 로마제국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로마제국의 황제가 있는 황궁입니다. 어디로 출장을 갔는지 아무도 없습니다. 보니까 제국의 황제의 의자가 있습니다. ‘같은 사람끼리 누구는 골방에서 살고 이 사람은 누군데 이런 높은데서 사나! 다 금이네! 내가 앉아볼까!’ 가서 앉았습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아무도 없지만 “이리 오너라.” 그랬더니 저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더니 “네가 누구냐? 네가 내려와라.” 기겁을 해서 내려왔는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형입니다. 왜? 아니 거기 좀 앉았다고 금이 닳았습니까? 은이 닳았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의미가 문제입니다. 거기는 아무도 앉을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거기를 네가 앉았다는 이야기는 황제인 나를 깔봤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삼족을 멸하기에 충분한 죄가 되는 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두 눈이 시퍼렇게 뜨고 나를 만드신 이가 너도 만드셨다고 삼라만상이 다 말하는데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냐? 내가 중앙에 있다.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이다.’ 이렇게 독립선언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왜 구원을 받아야하느냐고 할 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반적인 삶에서 특별한 삶으로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빗나간 삶을 다시 돌이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써 구원을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는 것 자체가 안 해도 좋은데 해서 더 행복한 어떤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철이 없어서 까불다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서 방탕한 길로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 철이 들고 보니까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아서 상처와 고통을 많이 겪은 다음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고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고 구원을 받아들이고자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러다가 보니까 무슨 문제가 일어나느냐하면 독립선언을 하게 되고 이것이 죄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느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속사람은 죽어버렸습니다. 영혼입니다. 속사람입니다. 벌써 죽었습니다. 이것은 겉 사람인데 이것은 육체입니다. 아직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속사람을 죽음이라는 질병에 시달리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영혼이 살아나야하고 살아난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계속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원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게 하는 하늘자원이 공급되어야합니다. 이것이 독립선언을 하고 죄를 지으니까 이것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안 옵니다. 영혼은 죽었습니다. 이것도 공급되지 않습니다. 이 죽음에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긴간의 겉 사람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식으로 존재해서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 인간이 살았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살았다는 그것을 다할 수 없도록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유하실 때 여러 가지로 비유하셨지만 가장 광범위하게 인간을 나타내는 동물로 비유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양입니다. 이 양의 특성은 뭐냐 하면 다른 짐승들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해서 자기 몸을 은폐하든지 아니면 빨리 달려갈 수 있는 다리를 가졌든지 또 아니면 뿔이 있다든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기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세계의 모습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나는 그것을 보면 재미없습니다. 막 잡아먹고 피 흘리는데 누구를 기준으로 재미있다고 하는지 모르지만 재미없습니다. 아무튼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 이런 것을 보면 나옵니다. 얼룩말과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얼룩말은 사자의 밥입니다. 사자가 제일 좋아하는 밥이 이 얼룩말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니까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사자가 배가 고파서 어슬렁어슬렁 사냥을 나왔는데 보니까 얼룩말이 떼를 지어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자가 항상 한 마리를 딱 찍어놓고 그것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자가 오는데 사자가 오는 것을 얼룩말들이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도망갈 상황이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새끼들을 잽싸게 다 가운데로 모읍니다. 얼룩말이 원을 그리면서 서는 것입니다. 여기는 머리이고 여기는 꽁지입니다. 사자가 막 오더니 사정거리에 와서 돋움 닫기를 시작합니다. 사자가 막 뛰는데 누가 명령을 내리는지 모르는데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니까 사자가 보니까 돌멩이하고 모래가 막 날아오는 것입니다. 얼룩말은 뒷발이 세니까 흙이고 돌멩이고 막 두발로 파대는 것입니다. 사자가 한 마리를 노리고 막 달려가는데 이만한 돌멩이가 총알같이 날아오는데 사자의 왼쪽 눈퉁이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사자가 얻어맞더니 털썩 주저앉는 것입니다. 피가 주르륵 흐릅니다. 아마 애꾸가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입맛만 다시고 먹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번은 더 생생하게 보았는데 그것은 무슨 짐승인지 모르겠는데 산양처럼 생겼는데 뿔이 날카롭게 달린 아주 순한 짐승입니다. 사자가 암사자가 공격합니다. 죽어라하고 도망을 갑니다. 애처로울 정도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됩니다. 사자가 더 빠릅니다. 도망가다가 도저히 도망을 더 못가니까 사자가 덮치는 순간에 얘가 돌아서더니 그 사자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스텝이 엉기면서 사자의 옆구리 속으로 뿔이 뚫고 들어가면서 옆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력을 다했는데 어떻게 운 좋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자를 매단 채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가다가는 금방 쓰러져서 결국에 뿔을 빼고 도망을 가는데 그 광경을 카메라맨이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 카메라맨이 사자를 추적했는데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에게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무엇이냐 하면 물어뜯을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도 아니고 초식동물이라 사람 이빨과 비슷합니다. 빠른 다리가 있느냐하면 다리도 그렇게 빠르지 않습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도 못합니다. 물에 빠지면 잠수하는 형이고 그리고 뿔은 있지만 호떡처럼 되어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동물이 양입니다. 왜 하필이면 인간을 이렇게 자존심 상하게 인간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양에 비유를 했을까? 그 메시지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너는 나 없이는 못산다. 내가 원래 만들 때부터 제품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정신 나간 짓입니다. 인간은 처음 만들어질 때에 그렇게 혼자 독립선언을 해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의존의 관계를 깨뜨려버린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이런 하늘자원이 공급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 속에서 끊임없는 고갈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는 고갈을 느끼고 도저히 행복하게 살 수 없으니까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다시 이 관계가 회복된 가운데 하늘자원을 힘입어 살면 되는데 하나님을 믿기 싫은 것입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내가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땅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미친 듯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 지위가 낮아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높이 올라가지고 막 올라갑니다. 모든 것을 다 하면 행복하냐하면 땡!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중국황제 어떻게 살았나』 하는 책입니다. 제가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왕궁을 다녀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나라의 왕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제국의 황제와 프랑스의 왕과 중국의 황제입니다. 그런데 특히 이 중국의 황제는 그 책을 읽어보면 야사도 섞여있습니다. 기자를 했던 사람이 썼는데 단숨에 읽으면서 흥미 있었습니다. 왜 그 사람을 예를 드는가 하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원을 마음껏 가진 인류역사상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황제니까 말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니까 건물부터 틀리고 모든 것들이 어마어마합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황제가 얼마나 대단했느냐하면 황제가 되면 왕궁을 짓습니다. 왕궁을 짓고 사는데 중국역사에 수백 명의 왕들이 있다가 사라졌는데 최고로 오래도록 왕위를 60여년 누린 사람도 있고, 24시간 만에 황제의 위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살았던 영광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 한 예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이 있습니까? 식욕이 있고, 성욕도 있고, 권력욕도 있고 권력욕은 이미 차지했습니다. 식욕이 인간에게 있는데 이 왕궁에서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밥을 하는 사람만 1,000명인가 1,500명이 있는데 한 끼 식사가 무엇, 무엇이라고 그러는데 머릿속에 그려보면 그 양이 트럭 1대 반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두 끼만 먹고 살게 만들어놓고 자기는 네 끼를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들은 대부분 일찍 죽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퍼먹으니까 죽지 살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을 졸병들이 해주는데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보통으로 그래도 과욕을 부리지 않는 임금이 약 5,000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삽니다. 조금 그래도 여자를 밝히는 임금은 10,000명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이스탄불에 갔는데 이스탄불의 오스만터키 제국이 있는데 그 영광도 대단합니다. 엄청난 제국이었는데 그 톱카프 왕궁에 갔습니다. 거기에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500명이 밥을 했답니다. 주방에 있는 사람이 500명이 밥을 했고,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 한쪽에 지어졌는데 방이 500개가 있는데 한방에 후궁 2명씩 들어가서 1000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오스만터키 황제가 살았습니다. 사실 웃기는 것입니다. 기숙사도 아니고 한방에 2명씩 살았습니다. 중국은 이런 것과는 스케일이 다릅니다.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국에 있는 미녀들을 다 징발해야합니다. 그러니까 딸을 가지고 있는데 아주 못생긴 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복입니다. 왜? 절대로 차출될 일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얼굴이 예쁜 딸이 있으면 그 부모는 이 아이가 태어날 때 여자로 태어났는데 남자처럼 만들어서 키우는가 하면 아니면 일정기간 동안 시집을 보낼 수 없게 방을 붙여놓고 차출하러 다니는데 그때 아예 신분이 형편없이 낮은 종에게 시집을 가게 만든다든지 일부러 눈 하나를 빼든지 칼집을 내서 왕궁에서 쓸모없는 사람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10,000명씩 데려다가 가두어놓고 어떻게 이 여자들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중의 대부분은 솔직히 이야기해서 갖다 놓기만 했지 한번 손도 못 만져본 상태에서 이 여자들은 여기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속에서 수많은 슬픈 일화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중국에 있는 어느 왕은 죽었는데 자기 무덤을 높이 200미터 높이의 무덤 만들었습니다. 진시황 같은 사람이 그랬는데 자기가 죽었을 때 산 사람을 몇 백 명을 같이 묻는 것입니다. 왜? ‘왕이 다시 살아날 때 너희들도 다시 살아나야 왕의 수종을 들지! 왕이 다시 살아났을 때 왕이 황제 체면에 밥도 차려 먹을 수 없지 않느냐? 너희들도 같이 죽었다가 같이 살아나라.’ 다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원을 한없이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행복했어야하는데 이 황제들이라는 이 인간들이 행복했어야하는데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인된 모든 세상 사람의 인정을 받는 가운데 구중궁궐 속에 갇혀서 충분히 동물처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국황제들의 역사입니다. 물론 이중에 부패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수많은 피를 흘리고 황제에 등극하고 중국역사에서 이 황제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위가 물려진 사례가 거의 없었습니다. 반드시 피비린내 나는 정변이 있고 거기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황제가 등극하고 그 황제가 다시 피 흘리면서 죽고 다른 황제가 등극하고 하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황제였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파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청소년시절에 읽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보면 그 사람은 황제였는데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황제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부와 영광을 누렸을 텐데 인간의 허무함을 파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허무함과 비참함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자기자원이 아니라 남의 자원을 이렇게 빼앗아가지고 산다고 해서 인간이 결코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을 수 없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참으로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삶을 살게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이 자원이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그 치열한 경쟁관계 그리고 자신의 영혼조차 돌보고 자신이 이렇게 살면 마지막에 인생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아무 이해도 없이 미친 듯이 이 세상의 경쟁 속에 빠져들어서 자기 영혼도 돌볼 틈이 없이 일하고, 서로 범죄하고, 서로 헐뜯고, 서로 악을 행하고,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고, 야비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탈취하고, 도망가는 그런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데서 경험하는 인간다운 위치와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원의 고갈현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친 듯이 빼앗는데 이것들이 결국 고갈의 문제를 해결해 주느냐하면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예 덮어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인데 이런 인간의 불행의 근원을 찾아서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고뇌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이 다 헛길로 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속에서 인간이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길들을 막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에게 해결의 길을 가져다주었느냐 하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인간의 이런 불행은 이런 식의 경쟁관계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결코 자원을 확보한다고 해서 성취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질병이 없고 가난이 사라지고 무지가 사라진 곳에는 꼭 행복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돈이 많이 생기면 굶는 고통은 없어지는데 가난할 때 없던 또 다른 고통이 생겨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제가 외국의 어느 나라에 가보니까 굉장히 잘삽니다. 자연환경도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전 세계에서 그 도시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2위입니다. 골치를 썩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청소년들이 자살하지 않을까?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왜 이 도시의 청소년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서 이렇게 편안한 환경에 살면서 자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 말이 재미있습니다.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도시가 너무 환상적으로 아름다워서 차마 볼 수 없어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원의 화장실에 가니까 ‘마약한 주사기를 통에 집어넣으시오.’ 라고 되어있습니다. 길거리에 가면 다 마약합니다. 결국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는 인간이 도저히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고갈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이 바로 진정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이 인간이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는 도저히 다시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그 존재,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없고 그렇게 인간이 행복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헛된 것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면 우리들이 도저히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을 궁극적으로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이라는 이 질병증상을 가져다주는,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져오게 한 죄라는 이 실체로부터 우리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시작이 있을 텐데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를 가져오게 되었던 죽음, 그런 죽음을 몰고 왔던 그 죄의 첫 번째 시발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오게 되었을까?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2 CBS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강의4
죄의 기원: 한 인간의 죄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진행을 하겠습니다.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지난 시간을 포함해서 이제까지 이야기되었던 것을 간략하게 간추리고 이번시간을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지난 시간 살펴본 것은, 인간의 많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죄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며 그리고 인간세상에서 경험하는 악과 고통은 바로 그런 질병에 걸린 것이 증상으로 몸과 온 영혼과 삶에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 궁극적인 이유는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 때문인데 그 죽음이라는 질병은 죄라고 하는 병균이 옮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무엇이냐 그랬을 때 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워놓으신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을 벗어나거나 그래서 불순종하거나 혹은 그 기준을 이행함에 있어서 모자랄 때 그것을 우리들이 죄라고 부르고, 그 죄의 불순종은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생각하셨던 절대의존의 관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바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사는 것 그렇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되니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가족관계 속에서 하늘은 천사들이 그리고 땅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존재하여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땅에는 인간들을 두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인간들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해 나아가도록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 죄의 문제인데 성경은 분명하게 처음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인간 안에도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세계 안에도 죄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무죄한 상태라고 우리들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무죄한 상태에서 어떻게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죄에 감염이 되어서 그래서 온 인류가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고, 그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결국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악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행복해 지려고 애를 쓰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악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한 사람의 죄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죄로부터 시작이 돼서 그 죄가 온 인류에게 예외 없이 밀려들어와서 그 죄라는 병균에 모두 감염이 되어서 엄청난 죽음의 세력 앞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그때 무슨 바른생활 교과서쯤인가 그런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는 국토가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이 하나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보니까 댐이 조그만 구멍이 생겨서 물이 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데 너무 인가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알릴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막았더니 주먹이 들어가고 주먹이 들어가더니 팔이 들어가고 팔이 들어가더니 온 몸으로 막았는데 그때 마침 지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막아서 마을을 구했다고 하는 대충 제 기억에 그런 스토리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댐에 나는 작은 구멍을 그렇게 두려워했을까요? 작은 구멍이지만 그것이 점점 순식간에 커져서 커다란 구멍이 되면 이미 벌써 물이 댐을 잔뜩 밀고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둑이 터지게 되고 터지게 되면 그 엄청나게 고였던 물이 한 번에 동네를 향해서 밀려들어와서 모든 것을 물에 잠기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댐을 애써서 지키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똑같이 성경은 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그때에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서 마치 댐이 터지고 한 번에 물이 밀려들어와서 온 세상을 덮어버린 홍수처럼 그렇게 죄가 온 인류를 덮게 되었다고 그렇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좀 더 우리들이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는 단순히 다른 짐승들과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을 창조하는 방법과는 좀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모두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친히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창조하심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다른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창조해 놓으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두 가지의 명령을 주시는데 첫 번째 주신 명령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이야기는 생식을 통해서 자손들이 많이 번져나가라는 것이 틀림이 없고, 정복하라는 말의 의미인데, 이것은 적군과 싸우면서 정복하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적군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이고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의 지시에 잘 순종하는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과의 어떤 갈등관계나 이런 것들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한 예로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대로 아담 앞에 나오니까 그 아담이 이름을 붙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관계 자체가 갈등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싸움 싸우듯이 정복해 나가는 것 그런 성질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냐? 사람들이 퍼져서 땅에 많게 될 때 그것이 단지 생식해서 수만 많아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창조되어서 하나님이 날 여기에 왜 만들어놓으시고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다는 것을 아담이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또 순종하면서 한동안 살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태어나는 모든 자손들에게 그것이 그대로 전수가 되고 그리고 아담 한 사람이 창조 세계의 관리자가 되어서 창조세계 전체가 이 아담을 비롯해서 창조세계 전체가 함께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지상의 세계를 형성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처럼 그렇게 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돌보는 것 그것이 정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좀 어려운 말로 문화명령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혹은 노동명령이라고도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정복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고 그렇다는 면에서 문화명령이고, 그런 것들이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그것을 노동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노동의 문제가 나오는데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것 같습니까? 노동이 죄의 결과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주신 선물인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노동 자체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인생을 고달프게 만드는 한 이유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노동을 하는가 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가 교회에 다닐 때 어느 분이 그렇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희들이 왜 이렇게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고 또 어른들은 직장 다니고 이렇게 고달프게 사는 줄 아느냐? 모두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다. 만약에 선악과를 안 따먹었다면 너희들이 지금 에덴동산에서 그냥 계속 놀고 있을 텐데 참 불쌍하다. 조상 잘못만나서 고생이 많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노동 그 자체는 하나님의 형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노동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까 말씀드린 그 이름을 붙이는 작업 같은 것, 그것도 얼마나 많이 인간의 노동이 필요한 것이었습니까? 다만 노동했을 때에 인간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단함, 피곤함, 괴로움 이런 것들이 죄의 결과이지 노동 그 자체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가도 노동해야 합니다. 땅을 갈고 비료를 주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어떻게 우리들이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노동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문화명령 혹은 노동명령을 주시는데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의 명령을 주시는데 이것을 종교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다 창조해 놓으시고 그 다음에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시는 나무를 하나 두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리켜서 선악과라고 합니다. 이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실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나무 자체는 특별한 나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두고두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시빗거리가 됩니다. “그것을 왜 거기 만드셨나? 안 만들었으면 우리가 안 따먹을 것이고 안 따먹었으면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고 범죄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아직까지 행복하게 살 텐데 아니 먹고 싶게끔 심어놓으시고 그리고 인간이 결국은 따먹고 범죄해서 하나님 멀리 떠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거가지고 시비를 걸고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말씀드리면 이해가 확 풀릴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결론부터 내리고 풀어가겠습니다.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선악과가 인간을 타락시킨 게 아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선악과는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올바로 이 선악과를 사용했으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놓으신 본래의 목적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하는 이 생활을 오히려 더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은혜의 수단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비록 죄가 없이 완전한 인간이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들어진 이 인간 안에는 하나님이 법을 집어넣으셨는데 그 법이 무엇이냐 하면 실효적으로 이 속에서 움직이는 법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술을 많이 먹는 사람들은 속에서 술이 땅깁니다. 이게 속에 법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생활 많이 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안 하면 괴롭습니다. 기도가 땅깁니다. 기도가 땅긴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기도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이 속에서 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을 하나님이 넣어주셨는데 무슨 법을 넣어주셨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렇게 살고 싶은 법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었기 때문에 완전했습니다. 그런데 완전했지만 안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완전했지만 그 완전의 상태가 절대적이어서 절대로 범죄할 수 없다든지 절대로 유혹에 넘어갈 수 없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는 하나님에게나 있는 상태이지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과 똑같이 지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아니었고, 그래서 완전하기는 했지만 안전한 인간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법이 강력하게 이 사람 속에 있었고 죄는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고만 마음먹으면 지금 우리들이 순종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쉽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법을 어기니까 하나님이 그 다음에는 마음 바깥에다 법을 하나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본성 속에 넣으셨는데 이것은 마음 바깥에다 만드셔서 이것을 돌에다가 새기셨습니다. 이것을 율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이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이 밖에 나왔는데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 속에 이번에는 죄의 법이 존재 존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강한지 겁날 정도로 강한 것입니다. 제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예수 믿고 4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골초였습니다. 한 갑반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끊어야 할 이유를 제가 못 느꼈습니다. 철이 없어서.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별짓 다 했는데 안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금단현상이 오는데 한 열흘 동안은 정신을 못 차리겠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끊고 은혜 받은 신자가 돼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직장에 가려고 좌석버스를 탔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담배를 아침에 푹 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내가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앞으로 가서 '흠 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언제였냐 하면 담배 끊은 지 3년 반이 됐는데 내가 그러고 살았다 이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속에 이 흡연이라는 법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 죄를 좋아하는 법이 이렇게 흐릅니다. 이 속에 죄의 법이 있는데 바깥에 세워진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받아서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될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이것 치워버리시고 이 안에다 다시 법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하는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여기는 하나님의 법이 있고 죄는 없었는데 여기는 하나님의 법이 강력하게 있는데 죄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순종하는 것보다 아담이 순종하기가 훨씬 더 쉬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바보같이 얼마든지 안 따먹을 수 있었는데 따먹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넘어지게 만든 도구가 아니라 얼마든지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었겠느냐?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기는 했지만 안전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런 게 없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회사를 다니는데 한 사람은 사장이고 한 사람은 전무이자 상무이자 직원이라고 합시다. 둘이 하니까. 그런데 그래가지고 일을 하는데 사장님이 잠깐 외출했을 때는 여러분들이 이 회사가 내가 최고 책임자라는 생각이 안 들지만 사장님이 출장을 가서 한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년, 삼년쯤 안 온다고 하면 여러분이 그 회사의 사장이라는 생각이 들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한 오년쯤 있다가 오면 사장이 와서 너 앉은 자리 비키라고 하고 앉아서 “야, 임마, 이것 해. 저것 해.” 막 시키면 짜증이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인간이 그만큼 쉽게 자기 위치를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땅이 굉장히 넓고 하나님이 많은 우주만물들을 창조해 놓으셨는데 다 자기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는 일이 쉬웠겠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선악과가 아니었으면 다른 방법으로 더 빨리 타락했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이 많은 세계에 어디를 가도 짐승이든지 새든지 사람은 없지만 뭐든지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왕같이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때 잠시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산 중앙에만 오면 나무가 하나 딱 서있는데 이 나무를 볼 때마다 누가 생각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 그거 따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그것을 보면서 이것을 맘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이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들과 함께 한 창조세계의 동창생이고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이 많은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있지만 그러나 신분상으로 말하자면 자기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 선악과를 보면서 확인하게 될 때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싶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싶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비 거리는 성경을 몰라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다 쓸데없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예수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 이야기라 이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했더라면 은혜의 수단이 됐는데 이것을 따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명령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이 명령을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언약인데 사실 이 말이 참 애매한 말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말로 약속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히브리말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베리트’라는 히브리말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베리트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근동에 있는 다른 아카드제국이나 이런데서 온 말들을 연구를 해 보면 대개 ‘바리투’라는 단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하면 족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두 사람이 있는데 각각 따로 있는 사람을 이렇게 묶어버리는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언약을 통해서 관계가 없었던 두 사람이 하나로 묶여버리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약이 아니라 사실은 그래서 신학에서는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계약 그러면 우리들은 자꾸 전세계약 사글세계약 그런 게 생각이 나니까, 그런데 사실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전세 놓고 사글세 들고 그럴 일을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계약이라는 말이 너무 대등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언약은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와서 내가 너 뭐 해줄게 이런 식이 되니까, 이것도 사실은 정확한 개념이 아니고 이것도 정확한 개념이 아닌데, 하여튼 양쪽이 무엇인가 의무와 복종의 관계가 있고 권리가 있는 그렇게 맺어지는 관계 수립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종교명령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신 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어떤 행위를 금지한 것인데 그래서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면 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냐? 첫째는 언약을 맺으신 그 당사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그 다음에 언약의 조건은 무엇이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이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보시고 하나님은 은혜를 내리시고, 이렇게 해서 하늘자원을 힘입어서 살아갈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위반 시에는 어떻게 되느냐? 위반 시에는, 선악과를 만약에 따먹을 경우에는 깨뜨려지고 그 다음에 죽음이 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약속, 종교명령을 가져온 행위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악과가 그렇다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아니 그 할아버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왜 내가 책임져야 하느냐, 나는 선악과 맛도 못보고 껍데기도 못 먹었는데 왜 먹기는 그 할아버지가 먹고 우리가 이렇게 뼈 빠지게 이 세상에서 노동을 하고 고단하고 죄라는 병원체로 인해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고 그래서 이렇게 악과 고통 속에서 시달리면서 살아야 되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이해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세상 끝날까지를 놓고 볼 때에 이 세상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 둘이 나타납니다. 처음 나타난 사람이 아담이라는 사람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 나타나신 사람이 예수님이시라는 분입니다. 물론 아담은 순수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사람이신 분이었다는 점에서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 아담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이 아담이 또 예수님이 각각 혼자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끌어안고 그 끌어안은 상태에서 연관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대표자였다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이냐 하면 두 번째 아담입니다. 그래서 이 아담이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을 때,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안 먹으면 네가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을 때, 계약의 성격을 가진 언약을 맺었을 때, 이 아담은 개인의 자격으로 이 언약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 끌어안은 사람의 대표자로서 여기에 참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범죄하게 되자 이렇게 아담 안에서 다 연결되어 있던 사람이, 이 아담과 다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삽시간에 온 몸 전체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류의 머리였다는 말입니다. 모두를 끌어안고 있는, 한자말로 요약을 하자면 내포적인, 내포하고 있는, 유기적인 대표자로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의 결과가 한꺼번에 미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더러운 음식을 먹으면 우리들이 질병이 걸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발이 그것을 먹은 것은 아닙니다. 입이 먹었는데 그게 온 몸에 다 악영향을 주는 것처럼 이 아담이 질병에 그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래도 섭섭할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왜 먹었을까?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먹었지만 나는 안 먹었는데.” 계속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두 가지를 생각하면 그런 불편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우선 첫째 무엇이냐 하면 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이 명령은 많은 신학자들이 영원히 계속되는 명령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일정기간동안 하나님이 시험한 것인데 이 시험을 만약에 아담이 통과했더라면 그러면 우리도 계속해서 낙원에 있었을 것입니다. 죄가 없는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선악과 먹고 싶은 것 침 삼켜보고 참은 적 있느냐 말입니다. 그런 것 안 참았어도 우리가 아담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다 아직까지도 영생을 누리며 살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아담이 잘못했을 때에 우리에게 형벌이 이르게 된 것,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된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불공정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의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구원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이 있는데 이 일이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많이 고난을 받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곁에서 우리도 피한방울 흘려본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죗값을 다 치룬 사람으로서 이해하시고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격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 십자가 지는데 보태준 것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덕분에 구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 모두를 끌어안고 그들과 이런 유기적인 연관을 이룬 상태에서 그들의 대표로 우리들의 대표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형벌을 받을 때 그 형벌이 내가 받은 형벌이 되는 것이고 그분이 다시 살아나실 때 그게 내가 살아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표원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이 사건이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그 품에 끌어안고 대신 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 죄로 말미암아서 물밀듯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라는 병원체가 그 아담 속으로 들어와서 그 태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전부 다 뱃속에서부터 그 죄에 감염된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태어난 다음에 죄를 품고 태어났으니까 그러니까 그 죄가 이 속에서 자라서 꽃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실질적인 악입니다. 그 악이 다시 죄를 낳고 이렇게 해서 인간이 안팎으로 죄에 말하자면 휘감긴 상태가 된 채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살아야할 본분에서 떠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가는 막돼먹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인류의 불행이 궁극적 질병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무엇이냐 하면 물어봐야 대답도 안 해주시겠지만, 할아버지 왜 따먹었습니까? 왜 그것을 좀 참으시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모자라는 게 뭐가 있었습니까? 다 있었습니다. 그 창조 세계를 다 줘버렸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제왕의 영광을 다 합쳐도 아담의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왜 그러셨을까? 왜 그러셨습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냐 하면 물론 뱀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뱀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몇 년 전에 여름 수련회를 교인들을 다 데리고 갔습니다. 기도원에 장로님이 내려오셔서 교인들에게 광고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철조망 있는 쪽으로 가지마라는 것입니다. 거기 뱀이 굉장히 많다고. 그랬더니 그 광고를 듣더니 여자성도님들은 ‘으악’ 이러는데 남자 성도님 몇 분은 ‘뱀이 정말 있다는 말입니까?’ 굉장히 아주 반가운 소식처럼. 뱀에 대해서 크리스천들이 상당히 저항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그럴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뱀은 사단 자체라기보다는 사단의 도구였습니다.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가 되어서 뱀이 유혹을 한 것입니다. 이게 재미있는 것입니다. 이 유혹이. 여기 아담이 있었단 말입니다. 멍한 아담이. 하와도 있고. 하와가 당사자가 된 것이지요. 아담을 공격을 하지 않고 하와를 먼저 공격을 했습니다. 이쪽이 훨씬 쉬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하여튼 하와를 먼저 공격을 했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냐?" 하나님이 안타깝게 물으니까 "뱀이 나를 꼬였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 쓸데없는 변명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이 안에다가 집어넣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죄 같은 것을 확 집어넣는 그런 게 아닙니다. 유혹은 뭐냐 하면 자기도 모르지만 있었는데 혹은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유혹을 통해서 그것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혹이 가지고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유혹을 했을 때에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따먹고 싶은 마음이 이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담도 아무리 변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데, 그러면 ‘왜 이것을 따먹으려고 하는 마음이 여기에 있었을까?’ 이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날 첫 시간에 잠깐 다루었는데 인간에게는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독립해서 혼자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충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존재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설명 잠깐 드렸지만 온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비가 오면 식물이 자라고 식물이 잎이 떨어지면 땅이 기름져지고 기름져지면 벌레들이 살고 벌레들이 살면 새들이 먹고 이렇게 다 연결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 연결된 속에서 인간도 역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의지하면서 모든 유기적 관계 속에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사는 게 싫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독립하고자 하는 욕망인데 이 독립성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속에 있었는데 그것을 이 유혹이 끌어낸 것입니다. 속에 조금 있는 것을 유혹을 계속 하면 이게 커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계속 유혹을 하면 그것이 바깥으로 콱 튀어나오면서 실질적인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 어려서부터 성교육을 시키는데 물론 너무 무지하니까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될 게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에,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을 자꾸 자극을 하면 없었던 것처럼 보였는데 자극을 계속 가하면 유혹을 계속 하면 그게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게 점점 커져서 그 사람 안에 그것으로만 꽉 차버립니다. 어느 순간에 펑 하고 터집니다. 그러면 범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욕이든지 권력욕이든지 뭐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이 속에 있는 것을 끌어낸 것입니다. 뱀이 유혹을 통해서. 그러고 나니까 인간은 철저하게 죄를 범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고 죄가 물밀듯이 밀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짓게 되고 그렇게 되니까 그 죄가 들어오게 되자 엄청난 결과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만지작거리면서 따먹었을 때는 설마 이런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죄의 결과란 말입니다. 죄의 결과가 엄청나게 일어났는데 그것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단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인간이 있어서 여기에 잇대어서 하나님이 위로부터 계속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자원들을 공급해 주심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창조해 놓으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끊어져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더 이상 하늘로부터 이것들이 공급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고 창조주인줄을 알아보고 그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엄청난 두려움과 죄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로막은 게 이게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입니다. 하나님과 자기를 원수처럼 여기는 게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본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인간이 가지게 되어서 인간과 죄가 서로 분리가 안 되고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이 인간도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친구가 두렵습니까? 적이 두렵습니까? 적이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친구와 같았었는데 죄가 들어온 다음서부터는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는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더니 “제가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걸리면 죽어.”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죄가 들어오니까 스스로 하나님과 적대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러니까 하나님께 두려운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숨어버린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인간이 가장 소중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늘자원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 믿고 새 사람이 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미움과 증오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놓고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안 좋아서 그를 잠들게 한 다음에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데려오시는데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무엇 중의 무엇이라는 표현은 영어에서도 그렇듯이 히브리문학에서는 베스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최고. 무엇 중의 무엇. ‘왕 중의 왕’ 그러면 최고의 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자 중의 여자’ 그러면 가장 못생긴 여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남자 중의 남자’ 그러면 아주 쩨쩨하고 야비한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늠름하고 배포가 크고, 말하자면 권위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의 사랑의 고백이 없습니다. “난 네가 좋아, 난 네가 필요해, 나는 너 없이는 조금밖에 못살 것 같아.”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삼류입니다. 일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단순히 “너 없이 못살겠다.” 그게 아닙니다. “너는 나의 일부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이런 사랑의 고백이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싸움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싸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이외의 어떤 문헌에 보면 왜 아담이, 하와는 철이 없어서 그랬다고 해도 아담은 왜 먹었을까 그랬더니 어떤 분은 성경 이외의 문헌의 예를 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담이 먹으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여보 당신이 지금 먹으면 죽는 그 선악과를 먹은 거야? 그러면 당신 죽을 거 아냐? 당신 없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혼자 살겠어? 나도 죽을 거야.” 그리고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헌이 맞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사랑이 그렇게 지극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었습니다. 진짜 성경에 보면 그런 이야기까지는 안 나오지만 갈등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난 다음에 3장에 가니까 하나님이 “너 왜 따먹었느냐?” 하와한테 물어보니까 “뱀이 꼬였습니다.” “아담 너는 왜 따먹었느냐?” 그랬더니 이 사람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그 여자가”, 거기까지 전부 다 하나님 탓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줌으로’, 그것도 자기 탓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여자 탓이고, “내가 먹었나이다.”, “나도 사실 잘못을 안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여자가 나한테 입에 넣어주었는데 그 여자를 만드신 분은 당신 아닙니까? 그러니까 왜 나만 가지고 자꾸 그래요? 왜 나만 갖고 그렇게 문책하듯이 물어보지 마세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면서 미움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똑같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면 절대로 사람과의 관계에 평안이 없습니다. 반드시 깨뜨려집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가 보면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미끄러지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부부관계의 불화입니다. 집안이 다 콩가루 집안이 되가지고 다 각기 살고, 맨날 와서 못살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은혜 받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게 뭐냐 하면 부부가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 맺었던 형제들이 화해하고, 엄마아빠를 미워하던 자식들이 엄마 아빠를 용서하고, 자식들과 등 돌리고 살았던 엄마아빠들이 회개하고 자녀들과 화해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자연과 함께 잘 어울려 살았는데 이제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자기와의 관계까지도 모두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참한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은총
2002 CBS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강의5
녹취자 : 조원정
오늘 이 시간에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가 왜 구원 받아야 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년 여름 수해가 나서 엄청난 피해를 봤습니다. 최근에 제가 강원도를 갔더니 그때 입었던 피해가 아직도 복구가 안 되었습니다. 큰 다리들이 무너지고 도로들이 유실되었던 것들이 간신히 복구는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수마가 할퀴고 간 파괴의 자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파괴는 우리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듭니다. 도로가 파괴되면 사람들이 차를 두고 걸어가야 되고 엄청난 거리를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리가 끊어져서 가고 싶은 다리를 못가거나 하는 것이 파괴된 상황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서 모든 것들이 파괴되었습니다. 파괴가 된 것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고립된 존재로 갇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잠깐 말씀 드렸는데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적어도 네 가지 관계가 파괴되었는데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가지고 와서 인간이 하늘로부터 공급돼는 자원은 없고 하나님 혼자 살아야 되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미워하게 되었고 이 미움은 자식 대에 와서 더 극력하게 나타나게 되었는데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서 죽이는 사건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연과의 관계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갈등하는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을 보호하자고 인간들이 애를 써는데도 한쪽에서는 엄청난 파괴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죄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결과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서 한 하나님 안에서 함께 연합된 가운데 서로 소통(communication)하며 살 수 있었던 관계가 엄청난 갈등이 밀려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은 말을 못하지만 인간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인간만 들어오면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또 사람 입장에서는 자연이 굉장히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결과입니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함께 의사소통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주변은 자연이라는 것이 환경을 제공해줍니다. 다 깨어진 것입니다. 남은 거라고는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에서도 자기 자신이 통일된 하나가 아니라 엄청난 혼란입니다. 인간이 일관성이 있습니까? 인간 하면 여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자체가 변덕스러움의 대명사입니다. 모순율이라고 합니다. 모순율이 인간 속에 존재합니다. 이건 이랬다가 이건 이랬다가 이건 또 이랬다가 살아갑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들어오기 전 이렇게 안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봅시다. 인간의 구성 요소가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되었는가하면 이건 생각이고 이건 느낌이고 이건 행동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느끼는 것보다 앞서고 느끼고 나면 행동을 하고 이렇게 서로 사이의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이성은 A라고 생각하는데 행동은 B라고 생각합니다. 하지 말라고 지시하는데 감정은 하고 싶어서 해버립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자중지란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내부에서 모순이라는 것들이 생겨나서 인간 자신이 모두 고립되고 홀로 있게 되었는데 홀로 있게 되니까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이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이 꿈꾸던 알량한 독립선언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혼자 독립해 살고 싶다고 그렇게 난리를 쳐서 독립을 한 결과 이런 존재가 되어서 자기 자신도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날 번져가는 엄청난 정신병들은 점점 시대가 흘러갈수록 이런 것들이 계산이 안 됩니다. 점점 심각합니다. 심화됩니다. 정신질환이나 이런 병들이 선진국이 된다고 좋은 자연환경 속에 살고 물질이 많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없습니까? 더 심해집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증상에 더 심각하게 빠져서 그렇게 됩니다.
저는 21세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그때 혹독하게 사춘기를 거치고 사상적으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이 누가 나보고 몇 번씩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너 왜 그렇게 힘드냐고 물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딱 하나였습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나 자신을 추스르고 행복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결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런 혼란 한 번도 못 느껴 봤습니다. 그건 무뎌서 그렇습니다. 정상적으로 느끼면 때리면 아프고 꼬집으면 아파야지 못 느낀다고 하는 것은 무뎌서 그런 것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독립선언입니다. 하나님 절대 의존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나도 한번 살아 보겠습니다. 그랬더니 뱀이 유혹할 때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긴 뭐가 하나님처럼 되었습니까? 똥처럼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를 관계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본 것입니다.
이 죄의 결과를 자신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이것이 이후에 이어지는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그 질문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자신이 아니라 그 후손들이니까 그럼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의 결과, 아까는 관계에서 그랬는데 여기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되느냐 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죄가 아담이 인간을 대표함으로 범죄 함으로 두 가지 결과를 가지고 왔는데 하나는 죄책과 오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죄책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책임입니다. 오염은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 죄를 지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도망 다니는 이유는 무엇을 감당하기 싫어서 그럽니까?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싫어서 도망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붙잡히는 것입니다. 이런 죄책이 있고 이것은 이거랑 분리 될 수 없는 것인데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깨끗했는데 범죄 하게 되니까 여기에 대한 책임도 지게 되는 동시에 실제로 인간이 죄의 더러움에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죄를 나눌 때 죄의 종류를 나눌 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타고난 죄라고 해서 원죄와 자기가 살아가면서 직접 짓는다고 해서 ‘본죄’라고도 하고 ‘실행죄’라고도 하고 ‘자범죄’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말을 씁니다.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해서 이것은 자기 스스로가 한 것이 아니라 조상이 한 것이라고 해서 원죄라고 합니다. 모든 죄 안에는 원죄 안에 죄책과 오염이 있습니다. 원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죄입니다. 그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그 처음 범죄에 대한 죄에 대한 책임과 이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자식을 낳으면서 죄에 뒤따르는 부패성들이 전가가 된 것입니다. 더러워진 상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오염’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납니다. 증거를 한번 대보겠습니다. 아이들이 뭐든지 가르쳐줘야지만 배워서 하게 됩니다. 젓가락질부터 시작해서 응가하고 엄마를 엄마라고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 거울 앞에서 머리 빗는 것, 모든 것 배우지 않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은 안 가르쳐줘도 합니다. 신기합니다.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인간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될 때인데 전도사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귀여워서 온 교인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그런데 얘가 몇 살 쯤 되었을까? 네 살? 천진난만하고 우리가 알던 세상 죄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껌을 여러 개 들고 있습니다. 한번 어떻게 하는가 하면, 어떻게 하는가 보려고 “진석아 목사님 하나 줘야지?” 이렇게 쳐다보더니 “응.” 합니다. 껍데기를 막 깝니다. 껌은 자기가 먹고 껍질을 주는 것입니다. 또 한 애가 있었는데 고만했는데 사탕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랬습니다. “목사님 사탕 하나 줄래?” “응.” 두 개를 들고 있었는데 하나를 땅에 떨어트렸습니다. 얘가 또 깝니다. 아 이게 땅에 떨어져서 더러우니까 새것을 까서 주려나보다 했는데 깐 것은 지가 먹고 “응.” 땅에 있는 것 주워 먹으랍니다. 이게 어디서 배웠습니까? 누가 가르쳐 줬습니까? 인간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아주 이기적인 거짓말 잘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을 본성을 선하다고 보느냐 악하다고 보느냐? 타락한 이후를 보면 악하다고 보고 타락하기 이전까지 올라가면 선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독특한 인간관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면 이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죄의 뿌리에서 ‘죄책’과 ‘오염’이 있습니다. 이것을 계속 올려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액 삼아서 여기서 열매가 맺히는데 이것이 두 번째 본죄라고 합니다. 자기가 직접 짓는 죄입니다. 이 밑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원죄의 영향력과 계속해서 짓는 자기 자신의 죄의 결과가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인간을 점점 더 절망적인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 들어가도록 풍성한 병원체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한없이 끝없이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공급해 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처참한 질병 상태에 들어가게 만들고 순환적으로 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 또 죄의 본성을 자극해서 더 많이 더 많이 해서 여기서 나온 죄가 자기를 얽어매고 얽어 맨 죄가 다시 자기 속으로 들어가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진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고통스러운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구원받지 않고는 어떤 것이 바뀐다고 해도 그 이상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시대 철학자 가운데 ‘세네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세네카의 문헌에 보면 어떤 이방인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방인이 철학적으로 스스로를 수양하면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그런 사람입니다. 세네카의 문헌에 보면 그 이방인이 하루에 저녁마다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오늘도 잘못된 어떤 것을 안 하려고 했는가?’ ‘내가 명백한 악과 더불어 오늘 하루 얼마나 싸웠는가?’ ‘내가 얼마나 더 선하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변화되었는가?’ 매일매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짓는 끔찍한 죄를 덜 짓습니다. 덜 지어도 무슨 차이인가 하면 뿌리는 살아 있고 열매가 못 매달리도록 이것을 괴롭혀서 안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무가 죄의 나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과가 매달려야만 사과가 아니라 뿌리가 사과나무면 사과나무입니다. 큰 사과가 매달려도 사과나무고 이만한 사과가 매달려도 사과나무입니다. 사과가 매달려서 떨어져도 사과나무입니다. 본질 자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본성 자체가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구원 받지 않고는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책은 죄에 대한 책임인데 오염은 죄책의 영향으로 더러워져서 죄를 좋아하는 죄를 짓도록 이후에 사람을 이끌어가는 그런 영향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염이라고 하는 것이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선천성입니다. 거짓말 가지고 이기심 가지고 잠깐 예를 들었는데 선천성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처음부터 타고납니다. 그런 점에서 선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도덕적 부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입니다. 도덕적으로 인간이 부패해 버렸는데 부패한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조금 부패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부패한 것입니다. 조금 부패한 것은 그 부분만 도려내고 쓸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여러분 생각나실지 모르지만 옛날에 냉장고도 없던 시대에 이런 생선 궤짝이 있습니다. 여기에다 꽁치나 이런 생선을 담으면 냉장고에 제대로 보관을 못해서 여름 되면 막 썩는 것입니다. 몇 번 들치고 하면 생선이 막 짓이겨집니다. 나중에는 생선가게 주인이 팔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썩기 전에 소금이라도 절여놨으면 말려서 건어물이라도 해서 먹는 건데 시간이 없어서 못했습니다.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 들어서 다 빨아먹었습니다. 고기가 다 이렇게 짓이겨졌습니다. 이렇게 보고 이것은 고기라는 형체도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습니다. 이런 것의 상태가 부패하고 다 짓이겨진 상태가 인간의 상태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처음 만들어 놓은 인간관은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부패성 때문에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이제는 독립선언을 하고 이렇게 죄를 지은 존재가 되었는데 아는 일에 있어서는 창조주 하나님조차도 못 알아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 알아 봐도 자기 부모는 알아봐야 됩니다. 생각에 있어서 아는 것에 있어서는 얼마나 무능해 졌는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못 알아봅니다. 다른 영적인 사물의 이치를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두 번째로는 느끼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본래에 부여하셨던 인간으로서 마땅히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느껴야 하는 것들, 하나님이 살아 계심,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피조물로 지은바 된 빚진 인간이라는 사실, 자기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일개의 피조물이라는 사실, 이런 것들을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행함에 있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행하려는 마음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들지 않는 완전히 빗나간 무능한 인간으로 타락하고 전략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독립선언을 하고 뛰쳐나갔는데 자기 자신으로서는 독립선언을 하고 뛰쳐나간 결과 찾아오게 된 어마어마한 불행과 고통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죄 할 능력은 있는데 그 죄를 처리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아담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래에 태어날 인간을 포함해서 모두가 죄는 지었지만 그 죄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가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그런 존재가 되었고 따라서 인간은 그런 상태에서 구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외부로부터 팔을 내밀어서 그 어려움 속에서 끌어 올려주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비참한 존재로 전략하게 되었는데 그 비참한 상태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의 영광스러운 두 상태를 비교해 보십시오. 죄가 얼마나 파괴를 가지고 온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 믿으시는 분들은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으로도 그렇게 죄라는 병원체에 의해서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린 인간의 절망적인 고통의 상태에서 사람을 다시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원래 행복하던 상태로 인간을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인간 안에는 절대로 그런 자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구원과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게 되었습니다. 약속에 따르면 범죄 하면 하나님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반드시 죽는다. 말하는 화자의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드시 내가 죽게 하겠다. 그런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범죄 하는 날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는데 이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 자체가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과 속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 사람은 육체고 속사람은 영혼입니다. 둘 다 죽으리라 할 때 양자 다 의미하는 것입니다. 겉 사람의 죽음은 육체의 사망이고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사람은 떡이나 밥이나 물, 포도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늘자원이 있는데 그것을 힘입어서 인간이 살 때 비로소 이 속사람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을 죄가 뚝 잘라 버린 것입니다. 죽음은 즉시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약의 성격을 가진 약속대로 하신다면 인간을 즉결 심판해서 즉사시켜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도 죽고 이것도 죽어서 인간이 완전히 생명이 끝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겨냥한 죽으리라고 할 때의 심판입니다. 문제는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죽였습니다. 인간이 존재를 안 합니다. 창조세계는 존재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느낌이었겠습니까?
(예화) 제가 아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아들을 스물한 살까지 키웠습니다. 고등학교 다 졸업하고 대학 다니는데 학교도 좋은 학교 다니고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 생겼습니다. 키도 크고 신앙도 좋습니다. 그렇게 잘 사는데 가정도 넉넉하니 방도 잘 꾸며주고 없는 것 없이 다 해주고 부족한 것 없이 큰방을 쓰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 방의 존재는 아버지에게 방을 없애지는 못했고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하구한날 그 방 가서 우는 것입니다. 아들은 없지만 아들이 쓰던 물건, 아들의 방 이것을 다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 죽었을 때 무엇을 자꾸 남겨 놓으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기가 힘이 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그대로 존재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다 죽여 버리셨다. 그럼 창조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설명을 안 해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이유뿐만 아니라 구원에 관한 이유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즉시 인간을 죽여 버려도 마땅하신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한시적인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죽으리라고 한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9장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대신 이 사람을 죽기 전에 자손을 남기게 하셨습니다. 죽기 전에 또 다시 자손을 남기게 하는데 이때는 자손이 더 많아집니다. 자손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인간을 이 세상에 대대적으로 대를 물려주어서 이 세상에서 살아남게 합니다.
그 의미는 두 가지인데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관련해서는 당신의 창조의 세계를 무의미하게 버려두고 싶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함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죄책과 오염을 물려받은 가운데 숙명적으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생명을 연장시켜주심으로써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을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과 끊어져서 참 인간답게 살지 못했던 모든 비참한 관계에서 복원시켜주실 수 있는 기회를 인간에게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생명의 시간 동안에 인간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문명을 일궈 나갑니다. 비록 옛날에는 몇 백 년 지금에는 백년도 못 살다 가지만 길거리를 방황하다 죽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집을 짓고 싶다. 그 다음에는 창문을 내고 싶다. 창문 만드는 기술이 발달합니다. 밤이면 피아노를 치고 싶은데 악기 만드는 기술도 발달합니다. 밥도 편하게 해 먹고 싶다고 해서 밥하는 기술도 발달합니다. 밥만 먹지 말고 반찬도 먹고 싶어 반찬 만드는 기술도 발달합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먹고 나니 예쁜 옷 입고 살고 싶습니다. 옷 입으니까 물을 들이고 싶으니까 염료 기술이 발달합니다.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니까 학문이 발달합니다. 이러면서 세워져 가는 나라가 이 세상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입니다. 문명, 이건 정신적인 문제이고 이건 물질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자기가 피조물인 줄 알고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이런 문화와 문명의 활동에 그 정신을 가지고 참여해서 문명과 문화를 보고 아 우리는 피조물일 따름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구나. 이런 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해서 겉 사람과 속사람이 모두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속사람은 즉시 죽었지만 겉 사람은 살아서 하나님을 믿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이고 얻게 된 인생의 시기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 못 돌아오는데 그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해결하신 것입니다.
범죄 한 인간에게 베푸신 은총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육체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 것이고 두 번째는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메시아’라는 뜻은 ‘마사’라고 하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마사’는 ‘기름 붓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피동명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고 이건 희랍어로 하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라는 뜻도 되고 ‘하나님이 특별히 능력을 부으셨다.’라는 뜻도 되고 ‘하나님이 특별한 자리에 세우셨다.’ ‘세움’, 이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갖는 존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죄라는 병원체가 들어와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을 때 사람이 몇 사람 안 되었지만 아담도 하와도 맞아 죽은 아벨도 가인도 그 후에 태어난 셋도 가족입니다. 죄가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아담과 하와 범죄 한 본인 자신들의 때부터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죄가 엄청나게 무섭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자기 자신이 거기에서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서 오는 견딜 수 없는 고통,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담과 하와의 속에서 낳은 아이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메시아 이런 죄에서 건져내게 해주는 어떤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타락하자마자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하에 나오는데 타락을 하니까 죄를 지으니까 뱀은 저주하시고 하와, 아담, 차례대로 형벌을 약속하시는 가운데 형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주어지는데 뱀과 뱀에 대해서 “너는 이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평생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는다. 너는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서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발뒤꿈치를 물리라.” 여기에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처음 하나님께로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면 여자의 후손이다. 여러분 아이를 엄마가 낳습니까? 아빠가 낳습니까? 우리말에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우리 성경에도 보면 사람을 낳을 때는 낳은 것이 아버지가 나옵니다. 허리에 있다고 하는 것은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허리 속에 기운으로 생식을 해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할 때 그게 아버지가 낳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기르는 것입니다. 족보도 아버지 이름이 나오고 아들 이름이 나오고 아들을 아버지 삼아서 아들 이름이 나오고 또 후손이 나오고 계속 내려갑니다. 똑같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계속 태어나는데 여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면 풀리는데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나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는데 “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약속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중요합니까? 뭔지는 잘 몰랐지만 우리가 예전에 있었던 그 복된 상태에서 이탈해서 죄라는 병균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나,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모두 깨어진 상태에서 고통 가운데 사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약속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건져 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대한 약속이 아들이 태어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아들 가인을 낳았는데 가인의 이름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던 조상들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혹시 그 아이인가 하면서 아이에 대해서 자신의 구원을 기대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기대는 가인뿐만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났던 모세도 마찬가지이고 노아도 마찬가지이고 아들이 태어나면 우리를 비참한 절망적 상태에서 구원해 줄지 모른다는 강력한 기대를 갖게 되었는데 그게 결국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였고 그런 기대를 믿음으로 소유했던 사람들이 구약에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약속하는 것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하나님이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영원히 내버려 두지 않고 무엇인가 이것을 다시 이어가려고 한다는 계획이 하나님께 있었음을 처음부터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었던 것이고 이런 사랑이 인간에게 입혀진 것을 가리켜서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범죄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에게 다시 당신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여러 가지 제사가 구약에 나오는데 제사의 근본적인 의미는 한 가지 인간의 고민에 대한 해결입니다. 인간의 고민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께서 자원을 공급받고 살아야 하는데 끊어진 것입니다. 끊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이 끊어진 것을 다시 잇고 하늘 자원을 부분적으로나마 공급을 받으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간이 범죄 한 인간이기 때문에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결국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이 근본적인 문제가 죄라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고 인간으로서 본래적인 영광을 잃어버렸는데 이 죄 때문에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끊어졌다고 다시 이것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일단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이렇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끊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어졌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결책도 인간이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놓은 것입니다.
(예화) 마치 아이가 제가 어렸을 때인데 그때는 시골에서 김칫독 같은 것을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거기에다 김치도 담그고 짚으로 사서 했습니다. 우리 막내가 있었는데 네 살쯤 되었습니다. 애들하고 성냥 가지고 놀다가 김치 광에 불이 났습니다. 어른이 그랬으면 불 끄자고 했을 텐데 아이가 그러니 도망갔습니다. 방에 온 식구가 추운 겨울인데 누워 있는데 뭔가 타다닥 하며 타는 소리가 납니다. 이거 아무래도 장작이 타는 소리인가 보다. 너희들 한번 나가 보라. 나가 보니 불이 벌써 다 타가지고 울타리를 향해 지붕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얘는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갔습니다. 이미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번 슬쩍 불장난 해본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진다고 하니 치직 하고 한 번 해봤는데 펑해서 다 태운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끊어진 관계를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다시 이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영원히는 안 되고 잠깐이라도 이어줘서 가끔씩이라도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처음 창조되었던 인간처럼 못 살아도 그것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것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셨는데 이것이 제사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죄가 있는데 이 죄를 일시적으로나마 없애기 위해서 죄를 짊어진 제물이 있어서 그 제물이 이 죄를 지고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고 죽음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진노를 잠시 푸시고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다시 사귀실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것입니다.
제사를 우리들이 은총이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해서 하나님이 만나주셔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 하나님이 인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인간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일시적으로나마 만나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최소한 하나님이 너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 반드시 나 여호와가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서 너를 구원하리라는 믿음 속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사라는 제도를 만드셔서 타락한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이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제도입니다.
제사제도는 타락한 인간,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제사 제도 속에 인간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의 섬세한 구원의 계획의 씨들이 이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 씨들이 역사가 자라면서 줄기가지가 뻗어 올라오며 잎과 가지가 무성해지면서 열매를 맺어서 온 세상을 뒤덮는 구원의 효과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2002 CBS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강의6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
녹취자 : 김세나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이라크전쟁을 두고 한쪽에서는 세계 평화를 위한다, 한쪽에서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하면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집중을 시킨 것이 뭐냐 하면, 자원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인류에게 마지막 남아있는 이 석유라는 자원이 고갈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인간이 과학이 발달하여 대단한 존재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원의 부족과 자연 현상 앞에서는 아직까지도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몇 해 전, 일본이 아주 가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과학 기술이 미국이나 몇몇 나라와 더불어서 세계에 선두에 놓인 나라인데 신문에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물을 수입해 가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업용수를 사용하기 위해서 물을 수입해 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느낀 것은 ‘인간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약한 존재이구나.’ 일본은 사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가무니까, 물이 그렇게 나라를 에워싸여 있어도 그 물을 가지고 해결을 하지 못하고, 수입을 해야 할 정도로 인간이 연약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자원의 문제와 자원의 부족에서 비롯된 인간의 불행,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를 하셔야 했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는 지하자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제는 그러한 자원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그러한 종류의 자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관심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간에 인간의 모든 관심사는 고통에 있습니다. 관심이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관심을 가지다가 보니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고통이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이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 볼 것인가, 애를 써 온 역사가 인간의 발자취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에 의하면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 그리고 고통을 가져다주는 악, 이러한 것들이 궁극적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면, 인간에게 공급되지 않는 자원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하자원이 아닌 영적자원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좋은 학교를 오겠다고 해서 서울로 시험 쳐서 와 있는데, 한 반에 60여 명 가운데 20명 정도가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이었습니다. 20명 정도가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이 집에 어디에 있는지, 집이 얼마나 잘 사는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같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그래도 그들이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집이 잘 사는 아이구나, 가난 하구나,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서울에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자원이 아버지께로부터 계속 공급이 잘 되는 아이들은 서울에 집을 가진 아이들보다 더 잘 살았습니다. 빵을 사먹어도 자신이 돈을 내고, 물건을 잘 사고, 책도 사고, 교복도 멀쩡한데 벗어버리고 새 것을 사고, 찢었다 붙였다 하면서 모양도 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똑같이 시골에 아버지가 있어도 자원이 넉넉하지 못하게 공급되는 아이들은 가난한 티가 납니다. 교복도 형이 입었던 것 물려받아 입고, 모자도 다 떨어진 것을 쓰고 다니고, 책도 물려서 사용하고, 뭐든지 알뜰하게 사용하고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데, 인간이 참으로 행복한 것은 뭐냐 하면 참으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때 행복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인간이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의도된 바대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이게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이 기준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기준이 없습니다. 각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게 자신들의 기준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의도된 것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도달하는 결론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의도된 것은, 인간 자신을 정점으로 이 세상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있고 우주가 있으면 이렇게 자아라고 하는 꼭대기에 올라가 사면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이 이 모든 우주 세계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목표를 세우고, 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의 많은 불행은 바로 이렇게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이 이러한 식으로 인생을 생각하면 인간이 만족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밑도 끝도 없는 지옥과 같아서 아무리 인간에게 만족시켜 줘도 인간의 욕망은 만족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세상에 창조해 놓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셔서 누리게 하셨습니다. 없는 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의 욕구를 하나님도 다 채워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보같이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독립선언을 하고 뛰쳐나와 범죄를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전부다 오히려 얽매인 상태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나온 영화 가운데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 1984)”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캄보디아 사태를 다룬 영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치하에서 죽고 죽어간 그것들을 영상으로 그대로 담으면서 공산화의 실상을 다룬 영화였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잡혀 갔습니다. 군인 포로라기보다 민간인들이 모두 잡혀 갔습니다. 자유사회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다 잡혀 갔습니다. 그래서 큰 운동장에 전부다 줄을 맞춰 서서 있었습니다. 그때 공산당의 간부가 나와서 말을 합니다. “우리는 새 나라를 건설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 함께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고 하면서 소위 이야기 하는 부르주아들, 여기에 속하였던 의사나 교사, 이러한 사람들도 우리는 다 끌어안고 새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을 다 받아주고 새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데 오늘 한번 참여해야 하는 기회를 주겠다,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를 줄 테니 옛날에 부르주아였던 사람들은 조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자수를 하면 기회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지식계층들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났는데 그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마귀가 죄로 인간들을 유혹할 때 이와 같습니다.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독립선언 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독립선언을 한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제 네가 하나님이란 존재를 의존하고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서 의존의 관계가 끊어지면 복종하면서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는데, 이것이야 말로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닌가, 모든 좋은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을 유혹한 것입니다. 인간이 거기에 넘어갔는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때문에 인류를 죄 짓도록 유혹한 마귀는 지금도 그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가 하면 속이는 것입니다. 속임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파멸로 데려가려고 하는 그 일을 위해서 어떠한 감언이설도 서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마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인간은 이미 이전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모두 파멸되었습니다. 파멸되고 그 독립선언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께로 부터도 인간에게도 자연에게로부터 다 외톨이가 되었고, 혼자 있는데 혼자도 이 혼란과 모순 속에서 뒤엉켜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을 파악하기 힘든 아주 이상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걸림돌이 되는 이 악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죄라고 하는 질병적 죽음 상태에서 고통들이 열매를 맺히는데 이것들을 해결해 보기 위해서, 이 고통의 열매들을 없애 봅니다. 다 따고 나면 없어진 것 같은데 잠시 후면 다시 돋아납니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을 벌면 될 것 같은데, 돈을 벌면 인간관계가 깨어져 고통스럽습니다. 화해를 하면 살 수 있을까 싶어서 화해를 해서 인간관계가 좋아지고 나니까 병에 걸립니다. 병에 걸려서 병을 잘 치료하면 건강을 잘 회복할 수 있겠지, 하면 이제는 무지가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 지우고 나면 하나가 떠오르고 하나 지우고 나면 하나가 떠오르는데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이 계속 솟아납니다. 이것들이 숙명적으로 인간 속에 계속되는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해결이 안 됩니다. 해결되는 방법은 이 밑을 찾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육체의 질병과 거의 흡사하며 똑같습니다. 인간의 신체 속에 뿌리가 내려 병이 있으면 병의 증상들이 발전되는데 증상과 싸워서 소용없고, 밑으로 들어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피부병에 걸립니다. 피부병에 걸리면 약을 발라도, 발라도 낫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에 가면 주사를 놓고 약을 먹입니다. 사실은 등이 가려워 피부병이 생겼는데 왜 엉덩이에 주사를 놓는가 하는 것입니다. 엉덩이와 등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약을 먹으라고 줍니다. 약은 입으로 먹습니다. 아픈 것은 종아리에 두드러기가 났는데, 입으로 약을 먹어야 합니다. 결국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근본적인 질병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두 가능합니다. 약만 발라도 낫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일 경우 되지 않습니다. 이 밑을 고쳐야 합니다. 심지어 의사들이 체질 자체를 고치지 않으면 주사를 맞아도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체질은 어떻게 고칩니까? 음식을 여태껏 안 먹던 음식을 먹고 먹던 음식을 버려서, 마치 하수구에 계속 버려서 정화시키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서 완전히 다른 체질이 되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가 황제에게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까 히포크라테스가 하는 이야기가 폐하, 음식이 못 고치는 병은 저도 고칠 수 없습니다. 결국 건강도 뿌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악과 고통이 결코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두 제2의 원인일 뿐이고 궁극적인 뿌리는 결국 한정된 자원, 더 정확히 말하면 고갈된 자원 문제에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존재하는데 이 인간이 어떠한 존재가 되라, 어떠한 존재로 살아라, 됨과 삶,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있는데 이것을 실현해 갈 때 인간이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계속해서 하늘자원이 계속 공급되어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하늘자원을 우리들이 은혜라고도 부릅니다. 부분적으로 그것도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하였을 때에는 미운 사람은 밉고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한을 품은 것은 한을 품은 것이고, 싫은 것은 싫은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은혜가 부어지면 싫은 것이 사랑스러워지고, 미운 사람이 너무 불쌍해 보이고 사랑스럽던 것들이 혐오스러워 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됨’, 됨됨이의 삶을 살 수 있고, ‘삶’,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그 사람의 본분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니까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원들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이러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하늘로부터 계속 공급 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끊어진 것입니다.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가능성이라고는 둘 밖에 없습니다.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인데 하나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 속에 있는 자원을 하늘자원이 공급 되지 않아서 오는 악과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든지, 아니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관계를 회복하고,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늘자원의 공급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관계로 다시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둘 중 하나인데, 문제가 뭐냐 하면 혼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 하늘자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고갈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면 모순입니다. 인간의 불행과 고통 자체가 고갈된 자원에서 왔는데, 고갈된 상태에서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해결의 길이 아니고 그러면 하나 길이 뭐냐 하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어떻게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됨됨이를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됨됨이, 존재를 따라서 그러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이 지시하셨던 생활을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고 하신 문화명령을 완수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못하면 이렇게 끊어진 것들을 어떻게 하나님께 빌어서라도 회복을 하는 관계로 돌아가서 하늘자원을 힘입어 이 됨됨이와 삶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창조목적에 어울리는 목적에 이바지하면서 살든지 둘 중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영리한 인간이 제3의 방법을 찾아냅니다. 제3의 방법이 뭐냐 하면 우선 자기 자신의 고갈된 자원으로서 만으로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을 합니다. 이것은 잘한 것인데, 그러니까 그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은 싫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은 싫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자신이 살아가려고 하니까 자원이 고갈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의 것을 빼앗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여태껏 강의를 들었으니까 즉시 그러한 생각을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것은 아닌데 강의가 이렇게 흘러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뚝 잘라져서 여기로 오는 자원이 못 오는데 다른 것을 빼앗는다는 것이 결국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상의 자원, 육체에 속한 자원을 빼앗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어차피 아무리 모으고 공급받아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에게 기대하셨던 ‘됨’-존재와 그에게 기대하셨던 ‘삶’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은 아닌데 어떻게 저들은 제3의 방법, 남의 것을 빼앗는 방법을 인간이 발견했다고 하는가? 이것이 엉터리입니다. 가짜자원인 것입니다. 진짜로 그러한 삶을 살게 해주는 자원이 아니라 가짜자원입니다. 자원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원이 아닌 가짜인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오니까 눈이 열려서 소용이 없구나, 깨닫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소용없다, 쓸데없다,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될 수 있다, 그것이면 행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남의 자원을 빼앗습니다. 약간 정상적인 방법이 있고, 비정상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은 경쟁입니다. 경쟁.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다른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을 미리 차지해서 주워 모읍니다. 비교적 헛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정상적인 방법입니다. 저 사람은 8시간을 자는데 나는 5시간 자고, 저 사람은 8시간 일하는데 나는 11시간 일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저 사람보다 돈을 더 벌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3시간씩 더 일을 해서 30% 임금을 더 벌어서 모으면 몇 년 모으면 넉넉히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러한 자원이 없는 사람보다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타나는가 하면 과로사가 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 40대 과로사가 엄청 많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은 유수한 기업체에 말단으로 들어가서 무지하게 승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샐러리맨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40대 초반 밖에 되지 않았는데 고속 승진하여 최고 경영자까지는 안 되었지만, 아주 시험보고 들어온 사람으로서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까지 올라가고 모든 샐러리맨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가 과로로 죽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자원을 모으는 것 또한 살기 위해서는 모으는 것이지, 죽으려고 자원을 모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데 뭐하겠습니까.
제가 신학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입니다. 정말 몸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였더니 몸에 별 이상은 없는데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수영 같은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가 하면 개척교회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에 20시간씩 강의합니다. 학교일 처리해야 합니다. 글을 써야 합니다. 때때로 세미나 다녀야 합니다. 설교하러 다녀야 합니다. 정말 정신없이 살 때였습니다. 한 주간 스케줄을 짜보면 3시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던 때였는데 그래서 결심을 하고 수영을 끊었습니다. 수영만 하면 7-8만원이고, 거기에 헬스를 하면 3만원에서 5만원 더 내면 다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하는 것이 좋은 줄 알고 그 당시 십 몇 만원을 주고, 그때 꽤 큰돈이었습니다. 새로 생긴 헬스센터였는데, 그래서 학교에서 강의를 밤늦게 끝나고 집으로 와서 자고는 교회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잠깐 기도하고 나서 7시 반까지 그 체육관으로 막 뛰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수용하고 운동하고 9시까지는 학교로 돌아가 학교 강의준비를 하고 9시20분까지는 첫 강의에 들어갑니다. 보통 고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주일을 다녔는데 어느 날 운동을 하고 학교에 돌아와서 강의준비를 하는데 코피가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때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게 살려고 운동을 하는데 이것을 잘못하면 운동하다가 거기에서 만약 쓰러지면, 강의를 하다가 신학교에서 교단에서 쓰러졌다고 하면, 마지막이 조금 멋있지 않습니까. 에어로빅 하다가 쓰러져서 죽었다고 나오기도 합니다. 자원이라는 것도 모두 자신이 살아가려고 모으는 것이지 생명 버리고 모을 자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도 틀린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이 모든 미움과 고통, 이러한 것들이 자원 빼앗기에서 시작됩니다.
이제 가정의 날이 다가옵니다. 형제간의 갈등이 있는 집은 90%는 돈 문제입니다. 항상 타이릅니다. 형이 어쩌고, 동생이 어쩌고. “네 형제가 몇이냐?”라고 물어봅니다. 셋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형과 나는 믿고 셋째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형과 너 둘 중에서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누구냐?” 인지 묻습니다. 자기가 그래도 비교적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 주라고 합니다. 뭘 둘씩 가지려고 해? 양보해야지. 먼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 잘 모르는 동생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인데 돈 다 주고 다시 벌면 되지, 그까짓 것으로 형제들 간에 반목을 하며 사냐고 이야기 합니다. 혼자 이야기 하면 소용없습니다. 부인이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인과 둘 딱 놓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중에 가서 둘이서 다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쓸데없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젊은 사람들에게도 이야기 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공부 많이 해서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 사회의 지도 인사가 되고 자원이 많아지면 다른 사람을 나눠줘서 그 자원을 덕 입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답게 사는 데에는 그것이 기여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고갈된 사람들에게 지식의 빛을 주면 그 지식의 빛을 받아서 인간의 사는 도리를 배우고 인간의 사는 도리를 배우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우리나라에서도 가난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마호메트를 믿든지, 불교를 믿든지, 기독교를 믿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더욱 많이 도와줘야 하겠지만 그러한 종교나 인종 상관없이 일단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살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생명이 연장되어야만 하나님께 돌아올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더 펄펄 살아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합니까,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책임지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들의 구제로 잘 사는데 죄를 지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왜 먹여 살렸니, 굶겨 죽이지.” 여러분들에게 책임을 묻겠냐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업을 하려면 잘 하고 돈을 많이 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다 줘! 그러면 묻습니다. ‘저는 어떻게 합니까?’ 먹고 살면 되지, 뭘 더 가지려고 합니까? 그러다가 천국가면 됩니다. 조금만 살다가 가면 되지, 그것을 그냥 모으기만 합니다. 결국 이것은 그러한 자원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과 고통 자체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하늘자원이 공급되지 않는 상태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이러한 고갈된 자원에서 오는 고통과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환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외칩니다. 대표적인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먼저 종교로 외칩니다. 인간사회가 이렇게 고통스럽고 더럽고 죄와 악이 가득 물든 이유는 오직 인간 자신이 너무 악하고 자신만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수양을 해서 욕망을 줄이고 뭔가 절제하면서 서로 사랑해가는 관계가 되면 무엇인가 아름다운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이것에 대해서 인간은 죄가 들어온 이후 얼마 안 되는 때부터 많은 사람들은 짐승처럼 막 살았지만 이렇게 철학적인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러한 주장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어떠한 사상을 따르는 동안에 이러한 종교적인 접근을 통해서 정말 인간이 다스려 졌는가. 그래서 그 인간들이 욕망을 절제하고 잘 수양되어서 고갈된 자원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구원하고 살아갈 수 있게끔 되었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안 그렇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종교의 영역 속에서 어떠한 탐욕도 없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라고 하는 너울 속에서 인간의 탐욕과 같은 것들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만 종교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인간이 완전히 종교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종교라는 이름하에 피가 터지게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혐오감을 갖습니다.
이런 일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주일에 성경찬송을 가지고 교회는 갑니다. 그리고 종교가 뭐냐고 하면 기독교라고 표시합니다. 그런데 삶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말하자면, 그 교회에 다니는 하나님 자녀의 정신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악과 고통의 문제가 하늘자원에 힘입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처음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 전적인 의뢰의 마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순종하는 인간의 일편단심의 하나님 의존적인 순종의 마음, 이러한 것들은 없습니다. 하나의 종교 자체가 문화현상으로 존재합니다. 회갑을 당했을 때 예배를 드리는가, 기생을 불러다가 춤판을 벌이겠는가. 이것에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가 나누어집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아닙니다. 기독교에만 이러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 이와 같은 문제는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어떤 종교의 틀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고갈된 자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진짜로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틀 속에서, 이것은 하나의 껍질일 뿐이고, 이 안에서 정말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이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변화되어서 하늘자원이 공급될 수 있는 이러한 변화된 영적인 관계를 소유한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인간의 자원의 고갈로 말미암는 악과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 결코 이러한 껍데기에 쌓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세례 받고, 시간되면 교회에서 장가가고, 교회에서 시집가고, 죽을 때 찬송 부르며 관에 눕혀 간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만 한다고 해서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 고갈된 자원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아계셔서, 그리스도가 최대의 하늘자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신 그리스도야말로 최대의 하늘자원입니다.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자원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을 이기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찬송하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필요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를 가지고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종교를 통해서 이러한 자원의 고갈의 문제를 해결을 못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의문이 들 것입니다. 이때까지 목사님을 말씀을 듣고 나니까 나는 참 길을 찾은 것 같습니다. 왜? 구원받아야 한다고 해서 구원 받았습니다. 하늘 자원을 공급받아야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화해가 되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곤고합니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은 나중으로 하고 정답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예수를 엉터리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을 하고 있든지, 사실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든지, 두 번째는 구원은 받았는데 예수님을 믿는 것을 엉터리로 믿기 때문에 망가진 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는데도 하늘의 자원이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는 그러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똑같이 세상적인 욕망을 가지고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첫 번째 종교를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유사종교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사종교는 사상이나 이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런 사상, 저런 사상 있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다 어디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공산주의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같이 벌어서 같이 쓰자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 땅에서. 누구위해서? 나 위해서. 우리 같이 벌어서 같이 쓰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뼈 빠지게 돈 벌어서 다른 사람들만 먹여 살린다고 한다면 공산주의도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이 벌어서 같이 먹고 살게 되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도저히 안 되니까 소련이 손발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하도 농작물 수확이 안 오르니까 집을 이렇게 지어놓고 집에서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는 호박은 너희 것이라고 그랬더니 공동농장 호박은 요만하고 울타리로 넘어간 호박은 이만합니다. 시간만 나면 여기에 거름을 주고 비료를 줍니다. 좋은 흙을 떠다가 붓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드러난 문제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있다고 하는데 똑같이 생겨납니다. 인간사회에서는 이것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어떻습니까? 여기에서는 인간을 물질로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가니까 사람들을 돈으로 주고 팝니다. 인신매매가 일어납니다. 유물론이 싫다고 하였던 자본주의가 왜 그렇습니까. 이게 결국 전부다 타락하고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모두 자리를 내려와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밑에 엎드러져서 순종과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독립선언을 해서 결국 죄가 들어와서 그 대가로 하늘자원의 공급이 끊어졌습니다. 결국 인간은 결핍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몸부림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것도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에도 거지가 있고 자본주의에도 거지가 있는데 잘 사는 나라 거지는 더욱 비참합니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지난주 뉴스위크지에 나왔나 그랬습니다. 뭐가 나왔는가 하면 자기를 노숙자라고 밝힌 사람이 미국인인데 그 사람이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접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 홈페이지에서 무엇을 이야기 했는가 하면 이라크전쟁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노숙자들이 미국에서 350만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노숙자의 일기를 공개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전부다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을 할 어마어마한 돈을 이 자기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하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이라크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을 보면 미국 노숙자가 한국 노숙자보다는 훨씬 세 배는 행복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이것은 해결이 안 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위치 그 자체를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고 고갈된 자원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낙관적인 문명론입니다. 이것은 점점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육을 잘 시키고, 사회체제를 잘 만들고, 보장 제도를 잘 만들고, 이렇게, 이렇게 잘 하면 세상이 점점 살기 좋은 보다 나은 세상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오게 되면 인간들의 악과 고통의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잘 사는 나라의 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더 악랄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 막연한 낙관적인 것들로 해결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개발하면 식량을 많이 만들어내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사람만 벌고 가난한 사람은 더 굶는데 이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 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라들이 다 모여서 연합체를 만들고 전쟁을 하면 한 나라를 혼내주자, 이렇게 하였는데도 전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 속에 인간 자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가 존재하고 그러한 것들이 악과 고통을 계속해서 양산해 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하늘자원으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들을 제압하고 태워버리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19세기 때에는 자유주의 물결들이 밀려오면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간섭과 통제, 억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풀어놓고 보니까 그 다음에는 틈바구니 속에서 아주 강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남고 부를 축적하고 남의 자원을 빼앗는 무법천지와 같은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그 모순을 극복한다고 하면서 나온 것이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그것이 결국 한계를 드러내고 하면서 역사가 자꾸 흘러갑니다. 아무리 낙관을 가지고 있어도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정리를 하자면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가 이러한 환경과 시대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은 모두 2차적인 결과일 뿐이고 진짜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면서 의지하며 살아야 할 그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데서 자원이 고갈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어떤 자원을 모은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누구도 그 죄가 가져다주는 죽음의 고통스러운 증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나라 임금이 행복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어느 나라 제국의 황제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역사를 읽어보면 로마 역사나 중국 역사, 우리나라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치광이처럼 살다간 왕들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남의 자원을 모두 빼앗고 혼자서 수백, 수천만 명이 누릴 수 있는 자원을 혼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하면 자신은 죄를 짓고 고통스러워하고 부당하게 자원을 모음으로 인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치지만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늪에 빠진 인간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불빛만 보면 날아가 타 죽는 부나비처럼 그렇게 비참한 절망적인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들에게 이러한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누군가가 손을 내밀고 일방적으로 그를 붙들어서 그 절망적인 수렁에서 건져내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 시간 동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받아야 할 인간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 문제를 우리들이 다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면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학수고대하는 그러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을 여러분들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2 CBS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7
예수는 신화가 아니다
녹취자: 허혜숙
오늘도 오다가 보니까 파스텔 톤으로 파란 빛이 나면서 싹이 나던 나무들이 점점 녹색 빛으로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식물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짙푸르러져서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도 바로 우리가 성장해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면 나무가 성장하기에 햇빛과 물과 양분 같은 것들이 필요하듯이 우리 신앙도 필요한 지식,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이 공급될 때 성장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들이 이 강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좋은 열매를 맺는 신앙으로 자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가? 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 되는가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몇 시간에 걸쳐서 이미 우리는 인간이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는 죽음이라고 하는 이 질병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래서 그 죽음이라고 질병상태에서 오는 각종 증상, 인생의 악과 고통의 문제, 이런 것들을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이제 예수님을 믿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있겠는데 어떻게 해서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 그 한 분이 오늘 우리를 그런 죽음이라는 질병에서 건져주실 수 있는 분이신가 하는 이 문제를 우리들이 몇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이라는 것 자체도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 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 졌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성경은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어떤 편견에 차 있는 글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초에는 예수님을 두고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신 것에 대한 의미와 그 실제들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계신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분이셨는가? 그리고 그 분이 정확하게 어떤 분이셨으며 또 그 분의 이 지상에서의 생애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이 예수님의 실제 존재이고 행동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들이 자꾸 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장이 될 때마다 이것을 포장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해석적인 의도를 여기에 첨가를 시켜가지고 된 결과 예수님의 실제 존재와는 아주 거리가 멀고 아주 부풀려진 그런 사실들이 오늘날 성경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의 존재와 행동을 찾아내려면 하나하나 벗겨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그래서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사실 잘 알 수가 없는데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지상에 계실 때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주가 되셨느냐?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게 되었느냐? 라고 하는 많은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이런 주장들을 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다 알 수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부활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시대에 있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보면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니까 아, 이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이 분명 하구나’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믿게 되었고 그래서 제자들이 열심히 선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니까 그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를 이루었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좀 더 꼼꼼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문맥이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 본다면 이것은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나느냐면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그러면 이 부활하신 사건 하나만 보고 제자들이 ‘아, 예수님은 메시아다.’라는 결론을 냈다는 가설인데 그러면 정말 이 부활하신 사건 하나만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려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가 먼저 필요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이 그 생각 속에서 이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사상이 있었다면 메시아도 부활을 하는데 예수님도 부활했으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신을 제자들이 갖게 된 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예수님이 계시던 시대에 유대인들의 문헌들을 다 분석해보면 이 사람들 사상 속에 메시아라는 사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메시아가 죽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그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이야기는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갖고 있는 사상 속에 메시아는 죽기만 하고 부활한다는 사상은 없는데 부활하셨으니까 예수님은 메시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입증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메시아가 되셨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메시아가 되신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 유대라는 껍질을 깨고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 맨 처음에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죄가 들어와 사망에 이르게 된 것처럼 또 예수님이 모든 구원 받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고 부활하셔서 그 사람들에게 여기에는 죄가 들어왔는데 여기에는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신 것은 유대민족이나 이스라엘 하나의 메시아가 아니라 전 세계 구원을 얻는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 메시아로 예수님께서 살아가셨고 구속을 이루셨는데 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유대 민족주의적인 메시아입니다. 유대 민족주의 적인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유대 민족의 부흥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면 그 메시아는 굉장히 초인적인 존재인데 그 메시아가 와서 죽고 부활한다는 사상은 없지만 죽기까지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아서 충성하는데 그렇게 섬기는 결과 유대민족이 다시 부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강성한 나라가 되어서 주위 나라의 조공을 받으면서 강대국이 되었던 것처럼 메시아가 와서 지금은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짓밟히면서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을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지도하고 이스라엘을 억누르는 무리들과 싸워서 국권을 쟁취하고 그 나라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강대국으로 만든다고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적인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것이 이렇게 예수님이 이런 사상하고는 전혀 다른 삶을 지상에서도 사셨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그러셨습니다. 그랬는데 그 예수님을 보고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약에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단순히 부활한 사건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틀렸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셨던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맞았다라고 하는 가르침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유대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와서 지도자가 되어서 유대민족을 부흥시키고 강대국을 만들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 있으니까 로마를 꺾지 않고는 그런 일을 이룰 수가 없으니까 로마를 꺾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건져내서 정말 부강한 나라 강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메시아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다분히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 즉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고 그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도 핏줄을 따라 타고 태어난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예수님에 의해서 내포 된 많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 여기에는 사람의 혈통이나 가문이나 피부색이나 나라의 경계나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영적 나라에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단순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게 되고 그 사상을 전파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결론을 우리들이 여기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부활하신 것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게 되었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상은 결국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군사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와 군사로 강한 나라를 만든다고 하는 개념은 신앙의 이름을 빌었지만 전적인 육적인 나라이고 또 세상나라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정치적, 폭력, 항거, 이런 개념을 모두 쓸어 묶은 그런 지도자를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신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보통사람과는 다른 아주 초인적인 존재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항상 박해를 받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때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벳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떡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실 때 사람들이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면서 그 분을 찬송했습니다. 이것들이 결국은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을 베푸시는 모습,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어떻게 몇 천 명이 먹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축복기도를 하고 나니까 이런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 이것은 정말 놀랐다. 누구도 이런 것을 한 적이 없었는데 엄청난 기적을 베푸시는구나. 그렇다면 떡과 물고기로 이런 기적을 베풀 수 있다면 이런 기적의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겠구나.’ ‘옛날의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적을 일으켜서 천사들을 통해 외적의 침입을 무찌르기도 하고 나라를 구하기도 했듯이 그런 놀라운 이적을 마음대로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 여기 계시구나.’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사람이 기적을 행하고 역사를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누굴까? 아,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 메시아구나.’ 그러면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 사람이 메시아로 오신 것 같으니까 이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이 분을 지도자로 삼아서 유대민족이 총 궐기를 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이 로마의 압제를 끊어버리고 이 나라를 다시 부강하고 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우리들이 앞장 서야 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도 예수님에 대한 그 사람들의 기대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까 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하는 내용들이 너무 많은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자를 살리고, 천주의 병이라고 불리는 문둥병을 걸린 사람들이 나음을 입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예수라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곧 눈을 뜨게 한 사람은 눈을 멀게 할 수도 있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분이시니까 서서 걸어가는 사람을 주저앉힐 수도 있고, 문둥병을 낫게 하실 수도 있으니까 성한 사람을 문둥병이 걸리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 출현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사상에 예수님을 놓고 보니까 기가 막히게 일치하는 부분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이 분이 진짜 메시아구나.’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신앙보다는 이렇게 예수님이 자기의 메시아사상에 맞는다고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이렇게 얼마 전까지 열렬하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 주간에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데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뭘 잘못 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열렬하게 환영하던 사람들이 완전히 돌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소리 지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일이 잘못 되었거나 자기들의 종교에 커다란 해를 입혔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실망했다’ 이것입니다. 왜 그런 메시아로 오셔서 이 로마와 더불어 싸우고 이 민족을 도탄에서 구원해 낼 줄 알았는데 이런 기적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베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끌려옵니다. 빌라도가 누굽니까? 로마에서 파송한 지방의 총독입니다. 거기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으로 선 것입니다.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실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는데 믿는다는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는 대상이 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정확한 앎이 없으면 사실 그것은 믿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해야 됩니다. 그래서 믿은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의 대상이 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을 믿을 때에 그 분이 우리에게 무엇이 되시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예수님을 제자들이 부활 후에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은 분명한 것인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지를 못했는데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된 계기가 부활이었다고 하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제자들은 이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는가? 단순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언급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이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제까지 가르쳐주신 것이 참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뭔가를 말씀하셔도 제자들이 죽어라고 못 알아듣는 광경을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뭔가를 가르쳐주셔도 제자들이 그것을 자꾸 못 알아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지했고 머리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은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못 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렇게 A라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B라는 방향으로 자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미리 생각하고 있는 방향이 A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B라고 말씀하시니까 B를 끌어다가 자기 생각으로 맞추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완전히 다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메시아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 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잘못 된 신앙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나? 역사적으로 이렇게 됩니다. 신약시대에 사도들이 활동하던 때 까지만 해도 구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구약시대가 기록이 되고 신약시대가 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가르침이 펼쳐져 나갑니다.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 신학적 가르침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말라기 선지자로 끝나고 세례요한으로 도입이 되어서 예수님의 새로운 신약시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구약에서 전해 내려오는 종교를 우리들이 ‘야훼종교’라고 부릅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종교라는 말입니다. 그것과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쳐 준 기독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라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질적으로는 다르지만 이것이 연속성, 계속성이 있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구약의 야훼 종교가 신약의 예수님에 의해서 도입된 기독교에 정상적인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날 신약만 신앙생활에 참고하지 않고 구약과 신약을 함께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구약에 대한 생각과 해석은 신약에서 가르쳐 주는 바를 따라서 구약으로 가면서 구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는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 율법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구약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셔서 이 신약시대를 도입하고 기독교라고 하는 신앙을 사람들이 갖게 되었지만 이것이 구약과 단절 된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연속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불연속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은 제사의 종교였습니다. 제사는 더 이상 드리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연속성이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연속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취 된 것들에 대해서는 연속성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의미도 구약에서 지키는 의미와 신약에서 지키는 의미가 다릅니다. 율법은 연속적으로 계속 있는데 율법에 대한 의미는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이 같이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믿는 것, 인간의 도리, 이런 많은 가르침들,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바로 복음서 속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과 교훈을 주었을 때에 당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해를 잘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만약에 구약에서 전해 내려왔던 야훼 종교에 대한 정확한, 그리고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새 것이기는 했지만 명료하게 잘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기록이 끝나고 예수님에 의해서 신약시대가 시작되는 400여년의 어간 동안에 변화가 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로니아에 의해 이스라엘 나라가 망합니다. 남 왕국유다와 북 왕국으로 나뉩니다. 북 왕국은 벌써 오래 전 722년에 앗수르, 역사적으로 앗시리아에 의해 망합니다. 남 왕국은 586년 주전까지 계속 됩니다. 160~170년까지 더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바벨론은 다시 메다와 바사, 여러분들이 페르시아로 배운 그 나라로 역사적으로 헬라나라와 로마 나라로 정권이 넘어가면서 계속해서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가 주인만 바뀐 것이지 피지배국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시기를 계시의 침묵기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선지자들을 보내시지 않은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모두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면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하면서 바벨론이 삼인 정책이라는 것을 씁니다. 이사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민족들을 자꾸 흩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는 강제로 흩어진 사람도 있고 자신들이 원해서 흩어진 사람들도 있는데 어쨌든 사람들이 흩어집니다. 이 흩어진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는데 이 흩어진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고 흩어지다 보니까 제사가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종교에서 핵심이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무리들이 생겨나고 제사장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제사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여전히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후손들에게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유지해야 되겠다고 하는 갈망을 아울러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제사가 불가능해 지니까 그 다음에는 제사보다도 더 중요한 방법이 들어오게 되는데 교육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책이 아주 중시되는 종교적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회당을 지었습니다. 회당이 있어서 거기에 랍비가 있고 가르치는 선생이 있어서 자녀들 교육도 시키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당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제사 대신에 책들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으면 구약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 대한 해석도 가르치고 해석에 대한 해석도 가르치고 이렇게 하면서 만들어 진 책이 우리들이 탈무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때에 시간이 지나면서 구약에 면면히 내려오던 야훼신앙의 전통적인 흐름이 이탈을 하게 됩니다. 이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역사적인 이탈이 아니라 신학적인 이탈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맨 처음에 기독교가 등장했을 때 로마 사람들은 유대교 안에 한 분파가 생기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의 기독교를 도입하셨을 때에 이미 이런 긴 세월을 두고 제사가 사라지고 교육이 중시되고 책이 중심으로 하고 곳곳에 회당들이 만들어지고 이 회당에는 누구든지 선생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가서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말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하는 체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들이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여기에 가서 성경을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훌륭한 도구로 쓰여 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다 하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때에는 언어까지도 모두 희랍어로, 헬라어로 통일이 됩니다. 어디 가서든지 희랍어로 설교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어쨌든 신학적으로 이탈을 한 것입니다. 이탈 된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이 이런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와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연장선상에서 가르쳐 주셨을 때 이런 차이 때문에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복음신앙이 자기에게 받아들여지는데 자기가 이렇게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어도 이것을 듣는 사람이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돈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무데나 다니면서 배우고 책임이 없이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믿는 것이 없는 상태가 때로는 잘못 믿는 상태보다 훨씬 더 참된 신앙을 갖기에 좋은 조건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아주 명백하게 가르치시는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다 감추어져 있게끔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약속을 따라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결례 받으러 가시는 날에 두 선지자를 만납니다. 시므온과 안나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도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결례를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면서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그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도 상당히 상세하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9) 라고 했습니다. 즉 일생을 살면서 자기가 이 예수님 오심이라고 하는 이 하나의 사건에 목매어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시대에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시대적인 이 신학적으로 잘못 된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유대주의라고 합니다. 이 유대교는 구약종교의 빗나간 형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 유대교 속에서 기독교가 나왔지만 신학적으로는 이 유대교 속에서 기독교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표현하기를 ‘유대주의라고 하는 오류 속에 하나님이 기독교라는 백조의 알을 숨겨놓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알을 품고 자기 새끼인 줄 알고 깠는데 걸어 다니고 모이를 먹고 자라는 것을 보니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역사적으로는 이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나왔지만 신학적으로는 이 유대주의에서 기독교가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잘못 된 유대주의의 가르침 속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구약의 성경을 해석해 주셨을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맨 날 가르쳐 주셨는데 예수님을 볼 때에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같고, 예수님을 뵈올 때는 참 좋으신 분인 것 같고, 그 가르침이 거짓이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왜 그런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당시 유대주의적인 사고방식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안 맞고 자꾸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흔쾌히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주의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이 A가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인 B가 있었습니다. A는 유대교에서 믿는 유대교 신앙이었고 B는 결국 기독교에서 믿는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맞는 것도 같고 안 맞는 것도 같고 혼돈 된 상태였는데 예수님이 죽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좋으신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음 그 자체로서 이미 예수님이 가르쳐준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실망하고 상당한 혼돈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뵈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을 한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살아 나셨구나.’ 그랬을 때 이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어떻게 살아나셨을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 이외에 누가 다시 살리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주셨다면 결국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것들이 옳다는 증거가 아니냐?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죽었는데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나셨다면 설마 그 아들이 가르쳐준 것이 전부 다 거짓말이었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전부 부인할 수 없이 살아난 거룩한 모습으로 제자들인 자기를 찾아오시게 해 드렸겠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자체가 아니라 이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이렇게 비슷하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 결국은 이 틀린 것이 분명해져서 이 유대교 신앙의 가르침은 A였고 예수님이 가르친 신앙인 B는 복음이었는데 결국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사건을 보면서 ‘아,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구나.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제껏 가르쳐주신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도장 찍어 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구나.’ 하는 것을 여기에서 제자들이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충격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예수님이 그렇게 살아나셨으니까 그 예수님이 이제껏 가르치시던 모든 것들이 참 뜻이 무엇이었느냐에 관심이 집중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모든 가르침과 자신들에게 보여주신 것이 예전에는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이런 모든 것이 혼돈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이렇게 전체적으로 정리가 된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돌아다니는 지식이었는데 그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서 이것이 조각조각 사건이었지만 이것이 전부 다 ‘맞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어도 아직 제자들이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조각조각 흩어진 이 사건이 모두 가르침이 다 맞는 것이다, 맞는데 어떻게 맞는 것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에 그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이런 조각조각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참된 지식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되는지를 그 때에야 비로소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이해는 안 갔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준 모든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정확한 것이다. 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이제껏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교훈이 틀림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이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하나하나는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떻게 연결 된 것이라는 것은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그 지점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 이니이까?’ 또 다윗의 왕국을 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메시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실 때 제자들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 때에 이것이 하나하나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파악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장엄한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사도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선포한 골격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인식
녹취자: 조경훈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친척들과 함께 산소에 갔습니다. 꼭 나빠서 라기 보다도 서울에서 바쁘게 도회지생활을 하고 직장 다니고 하니까 오랫동안 아버님 묘소를 잘 못 찾아 갔습니다. 그 사람이 같이 부지런히 묘소에 올라가더니 어느 산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앞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가던 사람들이 가서 뭐라고 그랬나 하면 “아. 아 사람아. 왜 여기서 이렇게 우나. 자기 아버지 산소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열렬히 믿는 것도 좋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도 좋은데 정확히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감정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예수님, 그 분이 어떤 분 이신지를 내가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우리의 사랑은 좀 더 인격적이 되고 하나님 받으실만한 순수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무지는 거의 악입니다. 무지한 사람이 정말 훌륭한 신앙을 갖고 거룩한 성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사건은 하나의 계기였고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면서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참말이었구나.’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유대교에서 가르쳐준 신앙관이 잘못된 것이었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가르침이 맞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맞구나.’라고 깨닫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있었는데 이 가르침 하나하나가 참되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아주 강력하게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이렇게 연결이 되어서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의 얼개가 그 사람들 속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건이 필요했었는데 그것은 성령 강림사건 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저희들이 배운 내용 이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가르침들이 있었는데 이 가르침 하나하나가 참되다고 하는 것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인정해 주신 분이구나.’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친 것도 참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런 여러 가르침들이 한 두 개가 아니라 많이 있었지만 그 가르침 중에서 참 되구나 라고 하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가르침이 무엇이었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해주신 가르침이었습니다. 다른 것도 물론 있었지만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것이 참이었구나 하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됨으로써 여기서 예수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운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이것을 믿고 구원을 얻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가르쳤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심이 틀림이 없었구나.’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이것이 예수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을까? 이것이 우리들이 궁금해 하는 요점입니다.
그러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 자신을 구원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명시적으로 잘 안하셨는데 구원자로 오셨다는 이야기는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신약의 많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신 가르침이고 이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첫 번째로 “인자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먼저 자기 자신을 인자라고 칭했습니다. 두 번째는 부정이 나오는데 “인자의 온 목적은 섬김 받음이 아니요” 인자의 온 목적은 섬김 받음이 아니라고 나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긍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섬기려 하고” 섬김 받음이 아니라 섬김 줌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섬김 받음의 마지막 결국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나옵니다. 이 죽음의 의미는 대속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몇 시간 있으면 공부를 하겠습니다만 대속이라는 것은 대신 죄를 속한다는 뜻입니다.
옛날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귀족이 있고 평범한 사람이 있고 천민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노예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도 사형당하는 것입니다. 귀족은 사람을 잘못하다가 죽여도 벌을 안 받습니다. 귀족은 나라에 노예를 대신 바치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 것들이 대속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다른 사람이 대신 값을 물어주고 정작 본인은 용서를 받는 것이 대속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바쳐지는 제사의 제물이 대속제물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으로 오셨다고 자기 자신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많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명확하고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를 것이 없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 제물로 주기 위함이라 이거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을 때 우리는 이해 못 할 것이 없는데 제자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대속제물입니다. 왜냐하면 제물은 그 당시에 짐승을 죽여서 제물을 드리는 것인데 ‘사람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를 제물로 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드리는 제사는 가증하게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다 이방 종교의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대속 제물로 주신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메시아로 오셨고 구원자로 오셨는데 섬기려한다고 하셨는데 그런 게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는 그 분은 왕 같은 존재인데 어디서 다윗이 자기의 백성들을 섬겼다고 돼 있냐는 것입니다. 왕이 백성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외국에 가서 왕궁들을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게 왕궁에 땅이 있으면 그냥 다니면 되는데 왕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끝도 없이 넓은 왕궁바닥을 자잘한 돌멩이로 다 박아서 우리로 말하자면 포장공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는 널따란 돌멩이를 깨끗하게 깎아서 깔아 놓은 데가 있는가 하면 어느 나라 궁에 가면 나무젓가락 같이 얄따란 요렇게 생긴 돌멩이를 요렇게 땅에 심어서 땅에 다 덥힙니다. 이거는 땅에 진짜 튼튼하겠지요? 천년씩 흘러도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짝 깔려있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왕이 밟고 다니게 해 주려고 수천 수 만 명의 사람이 엎드려서 그거 박다가 죽은 것입니다. 왕이 쓰는 주전자나 술잔 쟁반 이런 것들을 보면 장인들이 정성스럽게 세공을 하고 수를 놓고 혹은 문양을 넣습니다. 무슨 인상을 받느냐 하면 온 나라가 오직 한 사람 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게 옛날 고대에 왕이 다스리는 전제국가였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라고 하는 것도 제자들의 사상에 의하면 왕과 방불한 존재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섬김을 받음이 아니고 섬기려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의 핵심은 ‘인자’입니다. ‘인자’가 도대체 무엇이냐? ‘Son of the Man’ ‘사람의 아들’입니다. 정관사 ‘the’가 붙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자기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었는데 제자들이 뭘 이해를 했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도 이해가 안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라는 건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하나도 안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되겠다고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은 엉뚱하게 ‘내가 더 크다.’ ‘내가 더 위다.’ 아니면 주님의 나라 오실 때 얘는 예수님의 왼쪽에 장관 삼아주시고 얘는 오른쪽에 장관 삼아주시고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활사건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당신 자신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자기들의 생각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해졌고 예수님이 자기의 생각 속에 올바르게 오시게 되자 자신의 인생관과 우주관 모든 이 세상에 대한 견해와 인간에 대한 사상들이 다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강력한 파워를 오늘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가장 극적인 회심을 통해서 예수님께 돌아온 인물이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바울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우리에게 알려진 바울사도가 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도 알고 유대민족도 사랑하고 성실하게 율법에 도리를 따라서 생활한 열심히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능력도 인정받고 뭐 이런 등등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유대교 사상에 젖어서 이런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사상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니까 완전히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었으면 죽은 것이지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 예수가 나무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면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저주를 받아 죽은 인간인데 그 인간의 편을 들면서 어쩌고저쩌고 하느냐?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우리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좋은 신앙을 무너뜨린다. 죽여 버려야지.’ 그러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딱 만나게 되었는데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이 헛소문인줄 알았는데 자기가 직접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효과가 똑같이 온 것입니다. ‘다시 살아났다.’ 그러면 ‘메시아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이 없습니다. 다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렸다는 이야기인데 궁금한 것이 그러면 그 ‘예수님은 도대체 누군가?’ 사울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에는 잘못된 이단의 괴수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혼미케 하는 장본인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니까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래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여쭤 보았던 게 “주여. 누구 뉘십니까?” 이게 벌써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주여 불러놓고 뭘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입니까? “주여. 뉘십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친절하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게 두 번째 충격을 받은 장면입니다.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의미는 ‘자기는 예수님을 핍박한 게 아니라 스데반을 비롯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에게 한 핍박과 똑같은 것이었구나.’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과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무슨 관계일까?’ 이게 사도바울 마음속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구약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데 이게 캄캄한 상태에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이 가르쳐 준 대로만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성경 전체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찬란한 불이 들어오고 나니까 아까 잠깐 그렸던 구약의 참된 신앙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신약신앙하고 연결이 되면서 ‘아! 바로 이런 것 이었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드리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100볼트 전기가 들어오는데 220볼트 전구를 끼워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희미하게 들어옵니다. 100촉짜리를 끼웠는데 10촉쯤 될 정도로 희미하게 들어옵니다. 제가 반대를 경험해 봤습니다. 시골에 갔을 때 전기가 220볼트인데 모르고 100볼트에 60와트짜리 전구를 꼽고 모르고 스위치를 탁 올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60와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눈부신 빛이 전구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오래 안 나오고 퍽하고 터져버립니다.
이런 비유를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100볼트 전기시설을 해 놓고 방에 수 천 개의 220볼트 전구를 끼웠습니다. 전기를 탁 올려도 불빛이 희미하게 밖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한 천 개쯤 꼈는데도 한 10촉밖에 안됩니다. 10,000촉광 정도 되면 커다란 방에 가로등 30개 정도 켜놓은 것이 됩니다. 그것도 물론 환할 것입니다. 그런데 100볼트 전기를 220으로 승압을 해서 공급해주면 졸지에 100,000만 촉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30개가 아니라 300개 이상 들어오는 것처럼, 3,000킬로와트 전기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10개니까 33,000촉광 정도가 찬란하게 들어옵니다. 100볼트 전구가 330개 정도 켜진 것처럼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두 밝기를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되자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변해서 핍박하던 사울에서 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기까지 따라가는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든 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성경 찬송가 들고 주일날 그것도 딱 한번 교회에 가는 것 이외에 나머지는 다 똑같습니다. 달라진 것은 개업식 할 때 목사님 모셔다가 예배드리고 결혼식 할 때 교회에서 하고 죽을 때 기독교식으로 장례식 지내는 것 밖에는 다른 게 없다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어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뀐 사람입니다.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예수님이 왜 나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어야 했는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뭔지 그것도 모르고 교회에 성경 찬송가만 들고 그냥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역사와 전통에 빛나서 다니면서 좋은 일이 뭐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서 이런 가치관에 변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었는데 사울이 이해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도저히 그 죄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불쌍하셔서 제사라는 제도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 제사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은혜를 주셔서 순간적으로나마 하늘자원을 공급받아서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드리고 죽으신 것이 결국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 진 것입니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딱 바뀌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옛날에 왕과 같은 메시아의 사상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님이 비록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예수님이 만들고 싶으셨던 나라는 장관과 군인들이 다스리고 노예와 종들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육신적인 세상 나라가 아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는데도 실제로 사시기는 우리의 종처럼 사셨구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난한 집의 아들로 오셨구나. 우리를 위해서 정말 어디로 보더라도 육신의 눈으로 보면 그분이 왕이라고 여겨질 수 없는 삶을 사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시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아! 그렇구나. 이 세상 나라는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사람들의 나라인데 예수님이 세우시려고 한 나라는 무릎을 꿇고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다고 인정을 받는 나라구나. 아! 그렇구나. 맞아. 예수님이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로 오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자라는 의미가 사람의 아들이라고는 깨달았는데 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준 예수님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 옳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 인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한 견해를 갖게 됩니다. 이 인자가 무엇인지 이 인자에 얽힌 비밀들을 이해하게 될 때 이 단어가 예수님이 자기에게 가르쳐주신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 문제를 집고 나가기 전에 성경의 기록을 생각하면서 회상을 해 보면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뭐라고 호칭하셨는지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구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시면 사실 딱 맞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독생자는 어머니가 낳은 아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은 사람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으신 외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정체는 사실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에 가깝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에 가깝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이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말 한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 예수님을 그렇게 칭해주었지만 예수님 자신은 그렇게 칭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호칭 가운데 또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라고 우리들이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메시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 누구냐고? 나 메시아야.” 이렇게 말씀하시면 오해할 여지가 없이 간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메시아라고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희랍어로 옮기며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시아다.’ ‘그리스도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면 ‘쉿! 말하지 마라.’ 예수님이 오히려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다 사용을 안 하십니다. 예수님이 즐겨 사용하신 자기 자신에 관한 호칭은 딱 하나입니다. 인자입니다. 오직 인자라는 말씀만을 사용하십니다.
인자라는 것이 뜻은 그냥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인자의 온 것은, 인자가, 인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예수님의 표현 자체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인성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은 참 신이신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두 본성으로 이루어지는데 한 본성은 신성이고 또 한 본성은 인성입니다. 신성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인성은 사람의 성품입니다. 이 두 성품이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이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됐고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죽는다면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 율법에 기록된 죄를 용서받는 법칙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되 죄가 있으면 우리의 영원한 속죄를 위한 제물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고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이셔야 됐다라고 하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이성, 두 개의 성을 가지고 한 인격이 되셨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 중에서 인자라고 하는 표현은 인성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해석은 인자라고 하는 이 표현 자체가 메시아를 가리키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자가 온 것은’ 이라고 말했을 때 모든 사람이 ‘나 메시아가 온 것은’ 이라고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인자라는 표현을 쓰실 리가 무엇이 있었느냐?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입니다.’ 라고 옳게 고백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왜 말하지 말 것을 주의를 시키셨을까? 이런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비밀은 이런 것이 아니었고 다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좀 복잡 해 지는데 예수님은 도대체 왜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을까요?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최초로 인자가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에 ‘예수님은 그 인자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계셨을까?’ 거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이 확신했다는 그 의미가 판결이 나는 것입니다.
이 인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구약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인자사상입니다. 인자사상의 배경은 다니엘서 7장 13절이나 이사야서 53장이나 시편 8편에 나옵니다. 다니엘서 7장 13절에 보면 ‘인자 같은 이’ 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메시아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구름을 탄다는 점에서 보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인자 같은 이’ 라고 했는데 여기서 인자라고 하는 말은 특별한 뜻이 아니라 그냥 ‘a son of man’, ‘사람의 아들’입니다. 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무슨 이야기냐 하면 메시아이긴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이지만 그러나 겉보기에는 사람같이 생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렇게 얘기하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이런 사상이 나옵니다. 이게 여기 뿐 만 아니라 에스겔서에서도 나오고 성경 전체에 인자에 대한 사상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냐하면 당신 자신을 표현할 때 인자라고 했는데 희랍어 성경에서는 그냥 사람의 아들이라고 안하고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서 ‘the son of man’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은 셈족들의 문맥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사람의 자식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the’라는 것을 붙임으로써 평범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뭔가 배경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핵심은 ‘너희들이 다니엘서 7장에 보면 인자 같은 이가 구름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지? 그것을 너희들은 메시아라고 해석을 하지? 그는 구름을 타고 온다는 점에서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이지?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람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지? 거기서 이야기하는 이야기에서 그 인자가 나오는데 그 인자가 바로 나다.’ 이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이 났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르침에 대한 핵심은 당신에 대한 가르침이었고 당신에 대한 가르침 중에 핵심은 당신이 바로 구약에서 말한 그 인자라고 말씀하신 이 은밀한 암시가 진리라는 것을 제자들이 확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직설적으로 ‘나는 메시아다.’ 그렇게 얘기하시지 않고, ‘너희들이 메시아라고 알고 있는 인자 같은 이,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이렇게 빙빙 돌려가면서 말씀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은 이렇게 말씀하셔도 문제가 없고 두렵거나 무서워서 말씀 안하신 게 아니라 이것을 그대로 이야기 하시면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슨 혼란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이 ‘나. 메시아야.’ 이렇게 하실 때에는 A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데 이 사람들은 이미 유대교의 그릇된 유대교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 그래요? 예수님. 메시아예요? 아! 이제 우리가 알겠어요.’ 그러고 B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어느 날 주님을 영접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예전에는 왜 이렇게 행복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악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좌절하며 인생을 사는지를 자기도 몰랐는데 복음을 듣고 나니까 자기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악과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지 이게 단순한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죄라는 병원체가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지고 왔는데 자기의 힘으로 이 질병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는 순간에 복음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인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데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이 죽음이라는 질병에서 나를 건져내 주실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 이니라
‘아! 그렇구나. 내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인데도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구나. 나를 죄의 어두움에서 이끌어 건져내시고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셨구나.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구나.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내가 산 것이 아니구나.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거구나. 이제는 나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 위해서 살고 이 땅에 하나님이 세우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야지.’ 그 신앙의 고백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메시아야.’ 이렇게 말하면 이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메시아. 야! 예수가 메시아래. 다 칼 가지고 나와. 우리 그분을 쫓아가서 로마 놈들을 때려죽이자.’ 그리고 예수님을 군사처럼 따라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바는 죄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시고 죽은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영적인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이 아니라 유대 나라를 위한 독립투사로 살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이면서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 없어서 암시적으로 말 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인자야.’ 라고 말씀 하실 때 귀 있는 사람들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뭔가 암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곧 당신 자신은 메시아다. 그러나 또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니다. 이런 의미라고 하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 의문이 안 풀립니다. 메시아라고 당신 자신이 소개를 안했으면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 뻔 했습니까? ‘나.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랬으면 명쾌하게 이야기가 풀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사상을 구약을 더듬어서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도 말씀하실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고 이것을 고백했지만 예수님 자신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사정은 사무엘하 7장 12절과 13절에 보면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 사상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이거하고 아주 유사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인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계속해서 위를 이어가는데 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육적왕국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워져서 이 왕국을 번성하게 하신다는 물리적인 왕국, 세상적인 왕국으로만 이해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전쟁의 용사이고 능력 있는 임금입니다. 여러 나라를 쳐서 복종시키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구원자로서의 임금입니다. 이런 사상을 예수님 시대에 모든 유대인들이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만약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러면 이 사상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시라는 말이지?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일으키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모든 사건을 보니까 틀림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맞구나. 됐다. 때는 왔다. 중요한 건 이제 드디어 우리의 대장이 오셨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로마를 쳐부수자.’ 이렇게 백성들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온다면 예수님이 보냄 받을 때 목적이 그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도망가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겁하게 보이는 행동이지만 그런 사람들하고는 관계를 끊으시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예수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이 내릴 수 있는 신앙에 관한 결론이 무엇인지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