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의지할 주님 (1)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52편은 다윗의 시라고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사울의 치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러자 다윗을 지지하던 많은 제사장들은 더 이상 다윗을 돕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도엑이라는 인간이 이 다윗을 고자질해 이 커다란 시련을 가져오게 하였을 때에 그는 잠시 승리한 것처럼 의기양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그 모진 시련 속에서 솟구치는 믿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앞뒤에서 그렇게 악인으로 대표되는 도엑과 같은 인간들과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을 대조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이 이 삶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진솔하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II. 감람나무와 같은 성도
그러면서 그는 그 악인들의 정체에 대해 말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를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와 같으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자녀는 감람나무와 같은 성도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나안 땅이 얼마나 복 받은 땅인지를 설명할 때 이 감람나무와 관련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감람나무는 수성이 매우 강인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환경 속에서는 결코 죽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남는 나무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약 7개월간의 햇빛을 필요로 하는데 햇빛이 풍부한 그리스 같은 지역에서 이 올리브가 잘 자라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서리가 내리면 오히려 이 올리브 나무 결실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수성이 강해서 몇 백 년 동안이나 죽지 않고 생명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격년마다 열매를 맺어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던 상록수였습니다. 그 나무에서 따는 열매는 부패하지 않도록 어떤 물건들을 보존하는 일이나 혹은 식용, 치료용, 미용, 그리고 성전에 등불을 밝히는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등불을 밝히는 그러한 용도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하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실제로 그 성전 구역에서 감람나무들이 자랐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A. 생명력과 열매 맺음
결국 시인이 도엑과 같은 악인과 대조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에 비유한 것은 바로 성도 안에 있는 강한 하나님의 생명력과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푸른”이라고 되어 있는 이 묘사는 바로 감람나무 중에서도 절정기에 있는 청장년기의 감람나무임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아기와 소년기 때에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아직 충분히 발휘되지 않습니다. 장년과 노년이 되면 점차 그 생명력이 쇠퇴하다가 결국은 죽음과 함께 소멸하여 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나이가 정점에 도달했을 때에 인간으로서의 생명이 가장 풍부하게 드러납니다. 20세에서 한 25세 정도 사이에 최대한도로 그 생명력이 발휘가 됩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묘목이었던 시절이 있는가 하면 고목이 되어서 생명이 쇠퇴하다가 소멸하는 것이 나무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자신이 바로 잎사귀가 푸르름으로 우거진 감람나무와 같다고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력과 열매 풍부한 상태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정체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거기로부터 솟아나는 그 풍부한 생명과 그 사랑의 힘을 입어 푸른 감람나무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정상적인 삶인 것입니다.
잠언 3장 18절에서는 이 감람나무의 생명력을 지혜와 관련하여 묘사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아는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슬기롭게 인생을 살아가는 개인의 탁월함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레미야 11장 16절에서는 성경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로 이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주어서 어떠한 역경과 위기 속에서도 충만한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나무가 되게 복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함으로 그 생명에서 멀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뜻대로 될 때도 있지만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삶에 질서가 없는 것 같은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을 조종해서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마음대로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종교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삶이라고 할지라도 끊임없는 사태들을 만나게 하시고 때로는 그 끊임없는 삶의 사태들 속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자기의 뜻이 꺾이는 경험을, 아픈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자기를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신앙의 절대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한번 다윗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다윗이 푸른 감람나무와 같습니까?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일평생을 그 사울의 치하에서 고통하며 그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그는 끊임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그는 불쌍한 자처럼 인생을 살 때도 많았습니다. 지금 오늘 여기서도 그는 이렇게 노래를 부를 그때에 사울에게 이르러 도엑이 고자질을 하고 그리고 그가 바로 이로 인하여서 사울의 박해를 받던 때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실패자였고 패배자였고 버림받은 자였고 도울 사람도 끊어진 외로운 처지에 있는 그런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담대하게 아무도 돕는 자 없는 외로운 인생의 벌판에서 나는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푸른 감람나무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환경입니까? 이것이 삶의 사태입니까?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삶속에서 의기양양한 승리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이 시인만이 아는 그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력에 관한 고백인 것입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연관을 맺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뿌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진 삼위일체 하나님과 생명에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넘치는 생명을 공급받는데 그 충만한 능력을 가리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이라고 불렀고, 에드워즈는 생명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은 이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이런 충만한 생명과 사랑으로 원하지 않은 삶의 사태들을 겪으면서도 요동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특권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 생명력이 충만해서 그래서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교회의 문에 발을 디뎠을 때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는 이 비밀스런 충만한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아 그런 생명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살아갔을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가장 쓰라린 고난 속에서 돕는 자도 없이 버려진 광야와 같은 인생살이 속에서 그는 자신이 감람나무와 같다고 고백을 합니다. 비록 악인들은 자신을 박해하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버려두었으나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여호와의 사랑이 그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교회가 이런 생명력으로 가득 차도록 그래서 여러분이 이런 생명의 은혜를 누리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하나님의 집에 있음
두 번째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성경은 에노스 때에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처럼 기록이 나오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제사의 제도가 계시되었을 것이고 어떤 형식으로든지 아담 때서부터 이미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벨과 가인의 제사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제단이 구속사적으로 성막으로 발전하고, 그 성막이 이동식 성전이었다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고정된 성막이 되고 다윗에게 와서 준비가 되어 솔로몬 때에 성전이 지어지고, 이 성전은 결국 파괴되고 마는데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있다고 말합니다. 감람나무로 심기어졌는데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부유한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은 이 세상에서 교육을 잘 받고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도 살아갈 수 있는 삶입니다. 이 삶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존재의 울림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울림은 어떤 직업과 어떤 지위, 어떤 소유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좋은 자연적인 장점 때문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존재의 울림이 아닙니다.
어떤 학부모가 고3되는 딸을 불러놓고 “너는 1년 동안 교회 다니지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해라.” 그래서 왜 얘를 교회에 안 내보내냐고 그러니까 “얘가 교회에 가면 예배만 드리는 게 아니라 온갖 기도회니 찬양 연습이니 하고 주일을 거기서 다 소비하고 오는데 그러다가 대학에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많이 가리겠습니까? 그렇게 잠시 절제하고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자신의 욕망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투사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인생관을 신앙화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그냥 인생관은 자기가 그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삽니다. 그것이 신앙관 화하는 순간에 그게 폭력으로 변질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것이 하나님의 진리인 것처럼 둔갑을 해 자기와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아주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나 힘으로 그 인생관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폭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탁월한 표는 예수를 통한 영적인 생명과 사랑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보면 교회는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생명의 덩어리입니다. 그 생명이 교회 안에 가득하지 않다면 그 교회는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당신의 자기의 품에 들어온 교인들에게 수많은 삶의 사태를 만나도 그 교회에서 공급받은 진리의 힘, 성령의 은혜 때문에 그 모든 사태들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의 파도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죽일 듯이 위협하여도 그 앞에서 담대하게 웃을 수 있는 능력, 천하의 마귀들이 소리쳐 울부짖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강 같은 평정은 바로 이 하나님의 생명, 그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교회에 심겨있는 유익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해도 그런 게 아닌 것이라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반듯한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축복받은 것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계곡을 타고 물이 흐르고 그 아래 커다란 웅덩이에서 물들이 만납니다. 시퍼런 물이 됩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으로 노래를 하자면 그 물이 그렇게 시퍼렇게 된 것은 계곡을 타고 흘러오는 동안에 수많은 돌멩이하고 부딪쳐서 멍이 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 그 물을 끊임없이 부딪치게 만드는 돌멩이는 물에게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골짜기를 흐르는 물들은 재잘거리는 소리를 내고 그 노랫소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계곡 사이에 있는 나무 가지들의 흔들림과 조화를 이룹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유익을 누리고 계십니까? 삶의 많은 사태들을 만나고 괴로울 때마다 눈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 시련의 파도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삼킬 듯해도 나는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푸른 감람나무다 이 시련이 나의 육체를 괴롭힐 수 있고 어찌 인간이 살면서 정동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탁월한 신앙과 경건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일 뿐입니다. 괴로운 일을 만나면 슬프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보고 싶고,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하면 쓰라리고, 그리고 원하지 않는 삶의 질서 속에 들어가면 아픕니다. 그런 정동을 느끼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풍부한 정동을 보여주셨습니다. 슬퍼하시고,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많은 정동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신자의 삶을 결정적으로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이 주는 평상심의 회복입니다. 아프고 괴롭고 쓰라리지만 그것은 잠시이고 마치 바람이 계속 부는 동안에 파도는 쳐도 저 밑에 깊고 푸른 바다의 물은 요동하지 않는 것처럼 잠시 일어나는 마음의 정동으로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을 의지하면 평정을 되찾아서 그래서 삶이 뿌리 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있다 라고 했을 때 집 안에 있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곧 오늘날 신약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충만한 생명과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사람들입니다. 그 충만한 생명과 능력을 풍부히 누리며 주님 앞에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인자하심을 의지함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앞으로의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할지를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인자는 여러분이 잘 아는 ‘헤세드’라고 하는 단어이고, 이것은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베 헤세드’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속으로, 하나님 안으로 의지하리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은 악인들로 말미암는 시련과 많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함 속으로 파고들기를 마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어린 아이가 엄마의 품을 파고드는 것 같은 그러한 사랑의 연합을 추구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존하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는 모든 것들 중에서 영원히 거기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인데 어느 한 순간 나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나에게 그 힘과 권력을 사용해서 고통과 시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이고, 언제나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이런 헤세드가 부분적으로 있지만 불완전한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헤세드의 사랑에 늘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는 실패하지 않는 속성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바로 이러한 헤세드에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의 근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손을 수없이 뿌리쳐도 주님은 우리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분노가 세찰 때조차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희망도 그 분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교회일이 너무 늦게 끝나서 걷지를 못했습니다마는 그저께 걸으려고 집에서 걸어 나왔는데 날씨가 문제가 없는 줄 알고 모자도 안 쓰고 그냥 걸어 내려왔는데 눈이 옵니다. 모자를 쓰러 들어갈까 하다가 눈을 맞으면 걷는 것도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러고 걷기 시작했는데 중간쯤 왔을 때 비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들어갈 수도 없고 계속 걸을 수도 없고 그런데 그래도 몸을 생각하면 걸어야지 그러고 눈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면서 계속 걸었는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습니다. 그래서 쫄딱 맞고 한 7km를 걸었는데 다시 올 때쯤 되니까 눈하고 비하고 섞여서 오기 시작하면서 땅들이 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날씨가 우리의 기분에 주는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그 지혜가 정말 오묘하십니다. 그래서 이 변화무쌍한 날씨가 사실은 대기의 작용 때문입니다. 대기는 그저 좁게 보면 10km 정도 안에 90%이상이 모여 있습니다. 아주 희미한 대기까지 합치면 한 상공 100km까지를 넓은 의미에서 대기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산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원소들이 합쳐져서 대기권을 형성하는데 이게 기가 막히게 대기의 무게와 그 다음에 중력, 이것이 밖으로 이탈하는 원심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놀랍게 그 균형이 아주 탁월하게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그 오랜 세월 동안 지구를 감싸고 있는 대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라지고 나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테두리를 형성하면서 우주로부터 오는 많은 빛의 해로운 파장들을 막아주고 무엇보다도 이 대기가 형성이 되면서 변화무쌍한 일기가 나타나 심고 거두고 하는 이 모든 일들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아울러서 변화무쌍한 계절의 추이를 바라보면서 수많은 정동들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데 이게 이제 이산화탄소 배출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마어마한 양의 이산화탄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전 대기의 0.04%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게 엄청난 영향을 주어서 지구를 뜨겁게 덥히고 그 다음에는 이것들이 때로는 이제 바닷물의 온도를 상승시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뜨거운 기류들이 해양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올라간 이 열기는 기압골을 형성하고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기압골도 역시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이 벼랑처럼 가파르게 되면 폭풍이 일어나고 태풍이 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10km 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이 대기권을 뚫고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에는 비도 눈도 구름도 없고 언제나 찬란한 태양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이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종종 남의 인생인 것처럼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당해 이게 전부 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종종 태양은 사라졌는가, 이제 태양은 없어졌는가라고 말하지만 대기권을 뚫고 나가면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헤세드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무쌍한 이 세상 속에서 분투하며 살지만 이 세상의 변화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사태들 속에서 희로애락을 모두 쏟아놓는 천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예언하는 대로 멸망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침몰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적들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던 이 예레미야는 그렇게 변화무쌍한 이스라엘의 역사의 굴곡에도 불구하고 택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레미야 애가 3장 23절에서 노래하였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IV. 적용과 결론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한해를 돌아보면 살아온 모든 날들이 수많은 삶의 사태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날만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인생의 날들이 어떤 날들이었든지 간에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 때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아프고 쓰라린 때에는 그 쓰라리고 아픈 것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고, 형통하던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인간을 사랑해 주셔서 주님의 자녀 삼으신 은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픈 날은 아픈 날대로 형통한 날은 형통한 날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모두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생명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비천한 인간들인데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실패할 수 없는 헤세드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사랑으로 그 모든 시련과 삶의 사태들을 극복하며 선을 이루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과 자신의 지혜, 강포를 의지하며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사태를 영적인 생명으로 극복하라고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에 접붙여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영적인 생명을 충만히 누리면서 한 해 동안 살아온 모든 삶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인생의 날들이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푸른 감람나무와 같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