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녹취자: 김혜진, 박지성
오늘 사도는 갈라디아서 2장을 통해서 모든 그리스도인 가슴에 잊힐 수 없는 아름다운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을 남겨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이 사도가 무엇을 하다가 나온 것인지 주목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그 고백의 아름다움 뿐 만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무엇이 사도로 하여금 이 아름다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까? 뼈 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대한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건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그들이 식사를 하는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게바는 흠칫 놀라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처럼 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을은 게바를 면책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 이방을 쫓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만들려고 하느냐, 다시 말씀드려서 율법에 나온 규례에 젖어서 게바가 그들과 식사를 하다가 이방인들이 왔을 때 그들과 식사를 안 한 것처럼 이방인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혼란을 주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방인들은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들도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갈라디아교회가 괴롭힘을 받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이단현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서 참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그렇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나 하다가 길이나 비켜주는 것 가지고 의롭게 되느냐 반문하면서,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라고 그런 고백을 하다가 오늘 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는 아름다운 불후의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서 나오느냐고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나는 게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줄 알고, 너도 예루살렘에서 설교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을 붙잡아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내가 나에게는 이제 나는 내가 이렇게 내가, 내가, 내가, 나는 이란 말을 쓰면서 나에게는 한 확실한 신앙의 고백이 있다고 그는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가 율법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율법이 그로 하여금 율법을 향하여 죽게 만들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율법을 페하지 위해서 온 것이 아니요 율법을 따라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위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 그것은 바로 율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주를 거스리고 주를 어그리고 주를 떠나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율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율법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어서 그의 십자가를 향하여 우리가 못 박혀 죽어야 할 그 모든 진노를 그가 담당하시므로 그가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자기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마침이 되었고, 내가 진노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어야할 그 진노를, 그가 대신 당하시므로 율법의 마침이 되었으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의하여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대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율법의 요구를 모두 감당하신 그것을 내가 받아들임으로 내가 하나의 목적과 이유를 내 안에 가지고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기꺼이 죽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죄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그가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하고 말하였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무엇입니까? 그는 율법의 사람이었던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고, 율법을 지키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었고, 사람들이 갈 길을 몰라서 어떻게 생명을 얻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그의 인생에 할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떠나서 예수를 믿는 도를 쫓는다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갈 길을 달려가던 확신에 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는 율법을 자랑하였고, 율법을 아는 것을 자랑하였으며, 율법 따라서 사는 것을 인하여 자긍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합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다른 이가 그릇 신뢰할 것이 있는 줄 알면 더욱 그러하니, 내가 팔일 만에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또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들 중에 흠이 없는 자로다. 라고 그는 고백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하는 사도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육체를 신뢰할 만하게 만들었습니까? 율법이 그리 하였습니다. 그가 무엇으로 자기가 베냐민의 지파요,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또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자백하게 만들었습니까? 율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모든 인생의 소망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고,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했던 사도가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 얼마나 광대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 율법을 능가하는 얼마나 커다란 생명의 법이 되어서, 자기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율법의 의를 따라서 사는 것이 초등학문과 같이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일한 목소리로 고백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내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며, 그를 위하여 내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라고 사도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이렇게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든 자기의 영혼에서 일어난 내면적인 변화에 대해서 그는 외치듯 감격에 찬 어조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나는 이 고백이 영혼 속에서 터져 나오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 마치 이러한 태도로 사도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 ‘내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신앙의 고백은 개인적인 것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 함께 라는 신앙의 고백이 우리의 영혼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그 때에, 우리는 또 다른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만드는, 위대한 성령의 법의 강력한 물줄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도 바울의 신앙의 고백은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 무한한 생명의 샘이 되시고, 믿음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날마다 아침마다 무릎을 꿇고 그 앞에 흐느껴 울고, 그 속에서 임마누엘의 샘을 길어냈던 그 십자가 앞에서 ‘내가’ 라는 고백을 늘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말합니다. 온갖 진노를 감당하고 그리고 자기의 육신을 찢기까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나도 또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렇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못 박히셨습니다. 모든 살이 찢기고 물과 피가 다 흘렀습니다. 피가 흘렀습니다. 피 흘리는 것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피를 흘린 후에야 동물은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피 흘림이 상징하는 것은 완전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고난의 십자가에서 피를 다 흘리심으로 생명을 마치셨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증거 하는 가장 커다란 개념은,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생명의 피를 다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이 표상하고 있는 바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 완전히 매달려 죽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가 피를 다 흘리고 죽으실 그 때에, 바울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셨고, 우리는 고난당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었으나, 그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을 그 때에 우리는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나, 그와 함께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었습니다. 이전에는 살아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때에, 그도 죽은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율법의 요구에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율법의 손짓 앞에, 그는 손을 흔들며 율법을 환영하고 율법을 따라갔습니다. 율법이 나의 요구를 따라 달려오라고 손가락질할 때에, 그의 발로 그는 율법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율법이 나를 따라 오라고 말 할 때에 그는 온 가슴을 열고, 율법의 요구를 향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율법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잠을 자고, 그리고 깨어 일어나고 또 잠을 자고 누울 때 까지 오직 이 작은 사울의 마음속에, 이 머리 속에 있는 것은 어찌하든지 이 율법을 이해하고 연구하고 이 율법을 따라 살고, 이방인들로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들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이 율법을 따라 살게 만들고, 내가 어떻게 하면 율법을 떠난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취급할 것인가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가시 면류관을 쓰고 죽으실 그 때에, 사도 바울의 그 머리에도 그 십자가와 맞먹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율법을 생각하던 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고,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살기 원해서 환영하면서 손짓하던 그 손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뼈를 부스러뜨리고 거룩한 십자가에 그 큰 대못이 그의 두 손을 못 박았습니다. 율법이 요구할 때에 그를 따라가며 달려가던 그 발은, 그보다 더 큰 대못에 뼈가 으스러지도록 못 박혀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율법이 그를 생각하도록 만들어도 머리를 찌르고 들어간 가시 면류관으로 인하여, 더 이상 율법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자기를 오라고 손짓하여도 이제 그의 손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대못으로 박혔으므로 그 율법을 향하여 이전과 같이 손짓할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율법의 요구에 빨리 달려가던 그 발도 이젠 십자가에 못 박혀 더 이상 달려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뜨거워졌던 그의 심장이,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온 창이 그 심장마저도 터져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물과 피를 모두 흘리시고, 이 바울을 위하여 그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때에, 사도 바울 그토록 율법을 사랑하고 자기의 인생을 움직이던 모든 동기이던 그 율법의 심장마저도 터져 버렸습니다. 율법을 쫓던 바울은 급기야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 못 박혔다는 말이 헬라어 성경에는 ‘에스타우로 다이’ 영어로 ‘have been crucified’ 현재 완료형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나 그 못 박힌 영향은 현재까지 계속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있어 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이전에 나의 육체와 육체를 통할하던 옛 율법이 십자가에 못 박힌 대신 이제는 새로운 율법이 자기를 주장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이 사도 바울 안에 이제 살아계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모든 율법과 나의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그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안에 사셨다는 것입니다. 고요히 눈을 감고 묵상해 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한 다음에 즉각 생각났던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요히 묵상해 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따라 살 때에는 깨닫지 못했던 주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영적인 교통이 이 다메섹 사건 후에 있지 아니하였습니까? 사도바울이 기도할 때에 주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전도를 위한 계획을 앞두고 주님께 기도할 때에 성령은 오셔서 그에게 갈 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율법이 이런 일들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이 어떻게 상처 난 가슴을 위로할 수 있겠으며 율법이 어떻게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끓어오르는 열망과 연민에 붙잡힐 수 있게 만들어 주었겠습니까? 오직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물밀듯 밀려들었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생을 움직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중간에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들이 한번 깨닫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가 강한 성령의 능력과 그 성령의 다스림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이런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 뒤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신앙의 고백이 불분명한데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골고다 언덕에 섰고 자기가 예수님을 믿은 것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는 과거의 십자가가 아니라 현재 완료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이전에 일어났으나 그 십자가의 사건의 능력은 이제껏 사도 바울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자기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이러한 삶의 변화를 말한 이후에 이러한 삶에 이러한 자기의 영혼 속에 일어난 변화가 자기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그는 다시 한 번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사도 바울은 자기의 영혼 속에 이러한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육체 가운데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하면서 만일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또 다른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고 말할 때 바울의 울먹이는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나의 마음과 영혼은 끊임없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사 나의 육체를 향한 모든 저주를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를 원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의 마음과 이 영혼이 육체의 그릇 속에 담겼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정과 욕심과 욕망과 나를 위하여 살고자하는 이 모든 탐심들이 끊임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성령의 지배를 따라 살지 아니할 때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우리의 죄 속에 우리의 위대함이 영혼의 변화가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 속에 담겨있는 이 놀라운 영혼의 변화를 인하여 그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도 우리의 육체를 인하여 마음 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주를 위하여 살기 원하는 아름다운 이 영혼의 고백을 거슬러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우리의 육체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고자 결심하다가도 불현듯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의 죄악을 쫒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다 불사르며 내어주려고 하다가도 한 순간에 육체를 위한 유혹에 못 이겨 우리의 몸을 죄를 향하여 내어주게 되는 실패를 날마다 하기에 오늘도 우리들은 구속하신 십자가의 사랑 앞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육체 속에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이 속에서 사도 바울의 울먹이는 눈물과 함께 가슴에 벅찬 감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초라한 육체 속에 주님께서는 보화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라한 육체 속에 담겨있는 것이 바로 이 위대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영혼의 변화이기에 오히려 우리의 질그릇과 같은 육체 속에 행하신 위대한 하나님의 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면서도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살므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육체의 욕심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때로는 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 속에서 주를 위해서 살고자하는 이 영혼의 뼈저린 고백을 따라서 사는 일들이 때로는 방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그래도 소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분은 바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를 향한 모든 율법의 진노를 담당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때뿐만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나를 살리신 그 이후로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신앙의 고백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바로 나를 향한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못 박혀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래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여러분들의 구세주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결국 이렇게 살다가 주 앞에 갈 것입니다.
(찬양)
그 흘린 보배 피로써 날 속량했으니 저 하늘 문을 여시고 날 인도하시리.
그 귀한 주의 사랑이 날 구원하시니 그 사랑 나도 본받아 주 위해 힘쓰리.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저는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 결국은 이렇게 살다가 천국에 갑니까? 결국은 이렇게 살다가 죄악투성이인 우리의 몸을 주께서 죄 많고 슬픔 많은 이 땅에서 들어 올리셔서 그의 거룩한 보혈의 피로 물든 십자가를 밟고 보좌에 이르게 하시는군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셨음으로 우리에게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악 될지라도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속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의 의로 말미암지 않고 값없이 흘리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상처밖에 없는 인생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흉악하고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늘의 거룩한 보혈과 흠이 없는 어린양의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문을 열고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와 함께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냐 말할 때에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사도는 우리에게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진리를 광대하게 펼쳐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인데 그 하나님의 아들의 무엇을 믿느냐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하기 전에 사도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게바야, 너는 율법을 믿느냐? 나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노라. 율법을 믿고 양심을 믿고 모든 것을 믿느냐? 그러나 나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신 그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믿노라. 그 사랑이 나를 주관하고 그 사랑이 나를 움직여 지금도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떠나고 방황하는 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향하여 이 글을 쓰게하고 있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 있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한 번 율법과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의 십자가 그리고 이 세상의 의와 하나님의 의, 인간의 양심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 그 사이에서 결단하며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바야. 그리고 모든 외식하는 유대인들아! 너희는 율법을 믿고 율법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느냐.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를 믿노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그는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일생을 인간이 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살아온 족적은 수고와 슬픔뿐이며 죄악과 범죄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산다는 신앙의 고백을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산다고 말하면서 그가 고백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가 이 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그가 이전에 율법을 향하여 품었던 그 모든 충성과 율법을 향하여 품었던 그 모든 헌신과 율법을 향하여 품었던 그 모든 종교적인 열심은 어디로 갔습니까? 어디로 옮겨졌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고 자기를 위하지도 않고 자기를 위하여 몸 버리지도 않았던 율법을 위하여 살았던 그의 삶에서 이제 그는 분명히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한 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사랑했고 그는 나를 위하였으며 그는 나를 사랑하여 자기의 몸을 버렸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도무지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과연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와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버리셨다고 고백하면서도 도무지 주를 위하여 살기를 바라는 뜨거운 마음이 물같이 내 마음에서 녹아내리지 않는다면 그가 과연 주를 만난 사람인지 다시 한 번 물어봐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성도들이여, 오늘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이라고 하는 이 신앙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는 주를 위해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있을 욕망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버린 자로 여김을 받기를 즐겨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환란과 핍박이 기다려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사나 죽으니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죽어도 주를 위해 살고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고난과 모든 환란과 역경을 참으며 오직 단 하나의 소망의 지배를 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망만큼은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동족들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찢기도록 내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타오르는 불길 속에 내가 들어갈 지라도 동족들이 천국에서 주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한다면 자기는 그 대가로 지옥의 불 구덩이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영원토록 지낼 수 있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누구를 위해서였습니까? 동족만을 위해서였습니까? 동족을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주님 때문이었습니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오늘 우리는 너무나 냉담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기를 원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 갈보리 산위에 우뚝 선 십자가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입니까? 본문이 도전하는 것이 바로 이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