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Ⅲ 2 (1994. 미상 단편설교)
십자가에서 확증된 사랑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6~8)
녹취자: 김경애
오늘 이 시간에는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사도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함으로써 그 유명한 로마서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구절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는 신앙의 고백과 선언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위대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말하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을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사도는 먼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가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지 아니하면 우리들이 십자가에서 확증된 사랑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성경의 위대한 구절이 나오면 그 문맥을 주의해서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는 네비게이토 카드 같은 것으로 5장 8절을 수없이 외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5장 8절이 무슨 말을 하다가 나오는지를 오늘 주목하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주님이 왜 죽으셨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오늘 성경은 경건치 않은 자들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확증된 5장 8절의 대 선언을 앞에 두고 사도가 왜 굳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는 먼저 기약대로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기약대로라는 말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고난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구약에 펼쳐진 모든 역사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하나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심지어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광대한 역사, 그리고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와 고충, 그리고 수많은 나라와 전쟁들, 수많은 왕들과 그 패역함과 그 심장 그 속에 나타났던 수많은 그림자와 빛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장소와 하나의 사건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과 이야기와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스토리들이 하나의 초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골고다 언덕에 서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기약하셨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매여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들 주님이 창조하셨으나 그러나 죄 가운데 매여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 주님이 창조하셨으나 그러나 죄 가운데 매여서 창조의 본래의 목적대로 살다가 가지 못하고 있는 어그러진 세대의 일그러진 백성들, 이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는 기약을 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때가 차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때가 차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구원을 향한 대 드라마의 주인이 하나님 한분이심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이르는 이 위대한 구원과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놀라운 구속의 자유함이 이 모든 드라마의 전적인 주인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 각본 되었고 연출되었고 그분이 진행하셨으며 그분이 투자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이것을 보다가 그리워하며 죽었습니다. 이삭도 이것을 바라보며 몽매하다가 죽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심을 증거하다가 죽어갔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그날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은 그날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을 보았고 그날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 축복에 관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누리는 이 구원과 영적인 축복 이것들을 의미하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입을 열 수 있고 그 앞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이론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십자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분이 홀로 기약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홀로 그분께서 일하셨다고 그분이 홀로 이루셔서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위대한 믿음의 신앙의 선배들이 오직 그리스도로만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그리고 우리는 그 구원을 위해서 아무 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위대한 구원들 등한히 여기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탄식하던 히브리서 기자의 염려를 그대로 이루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이 위대한 구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쳤던 구원의 광대한 숲속으로 들어가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된 이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한번 깊은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시간에도 주님의 이름으로 연약한 여러분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께서 여러분들의 부요한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고 높아진 마음들을 어떠한 일들을 통해서든지 한없이 무너지듯 겸손하게 만드시기를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랑하던 모든 인생이 단지 껍질일 뿐이며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고 우리의 인생이 주님 앞에 설 때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십자가 보혈밖에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음을 불현 듯 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저는 이제 두 번만 더 설교하고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 다시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중에서는 예루살렘성에서 만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하루 종일 말할 수 없는 고민가운데 지났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십자가를 묵상하기에 너무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광대함을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의 광대함을 알 수 있으며 구속의 위대함을 아는 것만큼만 꼭 그만큼만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분량만큼만 주를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도다.’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 구원의 주인이시며 오늘날 어떠한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이 광대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다가오지 않는 것을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티끌과 같이 낮추었던 사람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티끌과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던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동일하게 구원의 광대함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공로가 얼마나 위대하며 그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치는 이 구원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들은 입에 발린 소리로 우리는 주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십자가 앞에 서게 되고 그 십자가를 자기의 영혼으로 목격하게 되었을 때 십자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위대한 구속의 대 드라마의 광채에 압도되었던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간풍조는 나날이 갈립니다. 세상의 역사는 흘러갑니다. 기독교를 향한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어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기독교를 말씀하셨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구절을 주목해야하는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잘들을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신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진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이 대목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는 8절에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 십자가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기 전에 우리는 십자가를 향하여 우리를 향한 죄악을 향한 진노를 쏟아 부으셔야만했던 주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서 우리의 오금을 떠는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들이 없이 십자가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감상적이고 종교적인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에서 시달린 모든 아픔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상처와 동일시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 이상인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반드시 어떠한 식으로든지 불의와 죄악은 심판하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토록 십자가의 위대한 교리를 말하면서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위대한 완전한 구속과 자유의 선언을 하기 전에 그는 1장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쫓아난다고 사도는 분명히 이 자유에 선행이 되는 교인들을 향하여 로마교회 모든 교인들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끊임없는 증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있는 성경의 증언 중에 하나는 주님은 반드시 뿌리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죄악을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함없는 성경의 증언인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주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사랑이라고 성경은 여러 구절에서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참 사랑이라는 것은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고 말하지 영원히 참기만 하신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유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의 용서에 대한 교리는 정말 두렵기 짝이 없는 생각들이 우리의 견해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즐겨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며 악한 길로 갈지라도 주님은 사랑의 교리라는 창살에 갇혀서 죄악을 짓고 주님을 배반하며 패역할지라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어서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창살만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이런 하나님으로 우리들이 묘사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주님의 진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가 19장에서 위대한 각성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두려움의 은사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친구처럼 놀고 친구처럼 부르고 이웃처럼 함께 팔짱을 끼고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주기도문 첫머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유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며 농담을 하거나 노래 속에서 친구이름을 부르듯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했던 믿음의 선조들과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위대한 시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 여호와의 그림자, 여호와의 발끝을 보았을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전율과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한 진노를 품어도 두려운데 그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물상시간에 어느 학생이 선생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무슨 질문이냐?’ ‘우주가 얼마나 커요?’ 선생님은 대답했습니다. ‘얘들아 우주가 얼마나 큰가하면 하늘에 가면 은하수가 있는데 그 은하수가 일천억 개의 별이란다. 그 은하수가 일천억 개의 별인데 그 하나하나가 지구보다 작거나 크거나 한 것으로 이루어져있지 그런 은하계가 천억 개가 모인 것이 지구란다. 그중의 하나의 태양도 그중의 한 태양을 돌고 있는 몇 개의 별 중에 세 번째 거기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은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증거하는 바는 주님은 자기의 인내를 끝내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내를 끝내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최초의 인내를 끝내신 지점은 창세기 6장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의 신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주께서 온 지면을 멸하셨습니다. 저는 골고다 언덕에 서있는 그 십자가에서 바로 인내가 끝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그 죄악에 빠져있는 인생들을 살려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인내를 끝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출발점도 되지만 또 하나는 주님의 인내를 끝내시는 지점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간의 불의를 차마 보시지 못하는 그 하나님이 온 인류의 모든 죄악들 지금도 우리들이 끊임없이 범죄하며 살아가고 그리고 그 범죄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모든 죄악들을 향한 주님의 인내하심을 끝냈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그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크고 굉장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쏟아 부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쏟아 부어지는 진노를 그리스도 예수 그분께서 홀로 막아서셔서 온전히 다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향한 모든 진노를 감당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죄가 한 점도 없으신 그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인하여 인내가 끝나고 불같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는 우리 앞에 나아가 홀로 쏟아 부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은 주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고야만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의 경건치 않음을 심판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또한 심판하시는 주님임을 여러분은 믿어야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마지막에 주와 함께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기 이전에 정말로 심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한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는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죄인이면서 하나님을 부를 그때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고 그러므로 주님을 찾지도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도 못할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은 확증되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그토록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구제할 것을 강조했던 사랑의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토록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대 사도인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곳이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굶주린 자를 먹일 때 주님의 사랑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때에 주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곤고한 자들이 나와서 심령의 위로를 받을 그때에 주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은 배가 부른 그때에 주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곳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라고 사도는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마지막으로 물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다 이루었도다.’ 벳새다 광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병이어로 배가 부른 그때에 나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내어쫒고 수많은 사람들이 산기슭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든 일들, 우리를 향한 모든 사랑, 모든 섬김이 계속되어도 주님은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어 넘기신 그때에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어디에서 발견하고 계십니까? 보리떡이나 물고기의 뼈다귀를 만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이 정도의 것으로 주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믿으시는 것입니까? 그 기쁨보다 더 큰 고민과 아픔이 밀려올 때 주님의 사랑이 희미해지는 것은 여러분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근거가 그런 것들에 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확증된 주님의 사랑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쏟아 부어지는 진노의 심판에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되기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얼마나 광대하고 위대하며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치우치기를 결정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이 무엇이며 사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있던 이 복음을 이 낮고 천한 복음으로 전부 바꿔버렸습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모든 관심은 골고다언덕에 선 십자가가 아니라 보리떡을 떼고 즐거워하던 벳새다로 낮아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주께서 십자가의 죽음 너머서 부활하신 위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복음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이 땅에서 병자를 고쳐주고 상한 자를 위로해주시던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사역이 기독교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잠시 후 잠깐후면 여러분들의 겉 사람은 후패해지고 속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게 될 것입니다. 지나온 우리의 인생 중에 주를 위해서 살았던 날이 어쩌면 그렇게 없을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주를 알았던 날과 몰랐던 날들이 어쩌면 그렇게 차이가 없을까에 대해서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를 주 앞에 의롭다고 변호해 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십자가 이외에는 여러분들이 주 앞에 의롭다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의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는 분명히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로마교회의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로마교회교인들을 향해서 ‘우리는 알거니와’ 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로마 교인들이지만 그들의 소문을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하는 그것을 아는 것과 동일하게 로마교회 교인들이 그런 영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바울이 와서 여러분들에게 말할 때에 과연 여러분들의 공동체는 ‘우리가’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들을 향하여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도다.’ 라고 말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피를 흘린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피를 흘린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물과 피를 다 쏟으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들어왔습니다. 창끝이 심장을 터뜨렸습니다. 모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이 거기서 죽으셨습니다. 사도는 오늘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이렇게 죽은 것을 우리는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몇 년 전에 우리 주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그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한없는 도전에 전율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에스타하르타이’ 헬라어 성경에 보니까 과거형태가 아니라 현재완료였습니다. Have been crucified.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사도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해진 노사도가 순교를 몇 년 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가운데 그는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내가 예수 죽인 것은 내 몸에 짐을 지려한다고 사도는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정말로 알고 싶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려하여 그는 끊임없이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평생을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정말 주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온전히 다 깨뜨려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내가 내 몸을 번제와 같이 피 뿌려 드리기를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를 죽인 것을 자기 몸에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하나 사도는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가 여전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자기를 향하여 그 결과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늘 십자가를 바라보고 ‘저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도다. 랄랄라. 이제는 끝났다.’ 이것이 아니라 왜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서 죽으셔야했는지를 끊임없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이 바로 자기 때문임을 그는 늘 몸에 짊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위대한 거룩한 사도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이 부분도 현재완료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 영향이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 나에게 이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현재완료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찬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어찌 내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옛사람이 옛날에는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끊임없이 못 박혀 있지 아니한 우리의 옛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우리의 고백은 같은 것이었는데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사도 바울의 고백은 현재 완료의 고백이고 우리의 고백은 단순 과거의 고백이 아닙니까?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 이 말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그림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기 이전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 본인에게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하였던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옛사람이 살아있었습니다. 결코 못 박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십자가를 자랑한 것이 아니라 베냐민의 혈통이요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그리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음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사도는 옛사람이 살아있던 때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어떻게 내가 이 세상에서 율법을 전공하는 학자가 종교인으로 출세할 것인가를 생각하던 머리에는 쓰라린 가시관이 씌어졌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고 율법이 오라면 달려가고 세상의 유혹이 오라면 달음질치던 사도 바울의 재빠르게 달려가던 그 발에 커다란 대못이 발목의 뼈를 깨뜨리고 그 십자가에 박아버렸습니다. 세상과 악수하고 세상과 짝하던 사도 바울의 이 손이 율법으로 끊임없이 넘기면서 사람들을 정죄할 죄목을 찾던 이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뼈를 부러뜨리고 십자가에서 빼어지지 않게끔 못 박혔습니다. 급기야는 그토록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미워하던 그 심장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들어와서 심장마저 터뜨리고 물과 피를 쏟아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옛사람은 이렇게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이 불러도 반응할 수 없는 죽은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신앙의 경험이 없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구주로 영접하실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를 여러분들의 구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못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건은 사라졌으나 영향은 현재완료로 계속 미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사랑하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산 그 사람이 주를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으로 그는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살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에 강권함으로 내가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화해케 하는 사신이 되었다고 성경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렇게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음으로 사도 바울은 결단코 믿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늘 말했습니다.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을 사모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를 원했고 그리스도를 향한 영원한 섬김을 위해서 죄 많은 이 세상을 떠나기를 늘 사모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지 않고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인간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향한 사랑과 소망과 비전이 그의 인생을 이토록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실지라도 그 영혼은 파리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벳새다 광야에서 보리떡을 먹은 사람들의 영혼이 파리해진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많은 문둥병자들과 그 많은 병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기적적인 치유함으로 말미암아 그 육신은 강건함을 얻었을지라도 영혼이 파리해진 사람들이 있었음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위해서 주어지는 수많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 만져지는 것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셔야한다면 언젠가 여러분들은 ‘주께서 원하는 모든 것들을 나에게 주시나 내 영혼은 파리했도다.’ 라고 시인과 같이 고백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떠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부요함은 그리스도 예수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진정한 부요함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얼마나 우리의 옛사람들을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의 모든 삶과 섬김과 기쁨과 희락을 그에게 두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이렇게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흥청거리는 이 도시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오늘날 흥청거리고 죄악을 물먹듯 마시는 이 더럽고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을 보십시오. 이것들이 바로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에는 그 발이 굽고 그 손이 굽어있습니다. 그러면 죄악과 부패와 음란함과 패역함을 향하여는 그들의 발이 빠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시기바랍니다. 자기들과 함께 손잡고 은밀히 세상을 사랑하고 그 부패한 죄악을 즐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소외시키고 있는지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 앞에 경건하게 살기를 원했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과 시인은 날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같았다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였습니다. 경건한 백성들이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일들이 날마다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일들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 죄악된 세상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며 이 죄악된 세상이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단 하나 밖에 없는 그 구원의 길로 나오지 않는 이 일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는 일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세상과 작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들이 일어나야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 속에서 수많은 그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소외되지 않기를 원하고 그리스도께로 부터도 소외당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백성이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 시민권은 성경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땅에 있다면 하늘을 향하여는 우리는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눈을 들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리고 눈을 들어서 그 십자가 앞에 냉랭해져있는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향하여 냉랭해질 수 있습니까?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해도 우리의 마음은 냉랭하고 아무런 사랑과 그 향취와 그리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던 신앙의 고백들이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살아있고 살아있는 그 옛사람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십자가와 세상을 향한 사랑 둘 중의 하나를 택일하라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끊임없이 우리들은 육체가운데 살면서 이 세상의 유혹을 향하여 반응하는 우리의 옛사람을 봅니다. 한번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러나 지금은 이 땅에 내려와서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여러분들의 옛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토록 짝하기를 원하고 그토록 사랑하기를 원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셨을 때에 세상이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고 자기의 몸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세상을 위하여’ 라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가 위하여 오셨던 그 세상은 그를 향한 반응은 십자가에서 그분을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그분 생명 자신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그리스도를 향한 세상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고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흠 없고 티 없으시며 하늘의 높은 영광의 보좌위에서 찬양만 받으셔야할 그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상의 손과 어떻게 우리가 악수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을 모욕하고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언덕으로 올라가던 그분을 향해 침을 뱉던 그 세상의 입술과 우리가 어떻게 입 맞출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그분을 그렇게 미워했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저주하였던 세상을 향하여 어떻게 우리가 안아달라고 그 세상의 품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우리가 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는 다시는 죄를 위하여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자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내 마음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는 또한 그의 십자가를 대하며 우리도 끊임없이 그 십자가를 향하여 우리 자신을 놓아버리며 그것을 위해 살자는 것이 십자가를 증언하고 있는 사도의 증언이며 눈물의 호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위대한 진노는 십자가를 통해서 확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