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따라가신 예수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쫒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23:26~27)
녹취자 :이경순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골고다로 올라가는 이 장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요 목사님이신 스펄전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마른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메마른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즐거움이 많아서 이 세상에서 울어야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사람은 천국은 보이지 않지만 눈물을 흘리는 천국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할 때 그때는 교회는 항상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고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면 성도의 눈은 메마르고 반짝반짝 세상을 향하여 빛나기 시작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이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지나간 날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온가족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고 박장대소하다가 슬픈 소식 하나 딱 들어오면 텔레비전 끄고 엄마는 엄마 방으로 아빠는 아빠 방으로 애들은 애들 방으로 다 우울해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신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신앙생활 하셨습니까? 오래 하신분도 있고 얼마 안 되신 분도 있을 겁니다. 공통된 점이 무엇입니까 지나간 날들을 회상해 보세요. 가장 하나님 앞에 많이 눈물을 흘렸던 때 제가 하나님 앞 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 주의해 들으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 흘린 눈물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에 나아가 눈물을 많이 흘렸던 그 때 이상하게 눈물을 닦고 나면 가슴에는 기쁨이 충만했던 때였습니다.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벌써 주를 위하여 흘릴 눈물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애통하고 주의 교회를 위해서 애통해야할 이런 눈물들을 잃어버릴 때가 다가오면 우리의 심령은 벌써 마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가장 기뻤던 때는 하나님 앞에 가장 슬펐던 때였습니다. 누구나 우리 처음 사랑의 때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한 18년전에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받고 나니까 마음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자기 기도는 거의 안하고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매일 한 이불속에 자는데 내 동생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 이겁니다. 여기도 지금 그런 분계십니다. 매일 같은 이부자리에서 같이 자는 남편이 불타는 지옥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겁니다. 언제 죽을지 압니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아무 장담 못합니다. 12월 달에 저 보고 수련회 집회를 와달라고 합니다. ‘아이구 여보쇼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다면 인도 합시다.’그랬는데 과연 살아있네요 그러나 뜻밖에 죽었습니다. 이 얘기가 농담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지옥으로 가고 있는 식구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여러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느껴질 그 때에는 그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 영혼으로 보였습니다,
(찬양)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길 잃었네.
이쯤 되고 나니까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안보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립니까? 우리의 기도의 골방이 눈물로 적셔지고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실입니다. 내 마음이 식어지고 나의 심령 속에서 주의 말씀이 사라질 때 내 마음은 메말랐고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지옥으로 가고 있는 영혼들과 매일 밥숟갈을 들고 있는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제사로 하나님 앞에 매일 예배를 드립니다만 그러나 그것들이 도무지 자기의 심령을 채워 주지 않습니다. 이 비밀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혀죽는 것은 죄인을 형벌하는 사형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시대건 사람을 죽이려면 이 사람이 죽을 짓을 했다라고 하는 재판을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절차가 그 앞에 나와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형벌을 내리기 위해서 재판을 했습니다. 사형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끌고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법을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우리들이 봐도 이 재판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선 재판은 누구한테 하는 것입니까? 죄 있는 사람한테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생명을 주겠다고 온 것이 사형 받을 만한 일입니까? 가난한 사람을 먹이였셨습니다.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죽어야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재판대위에 섰고 사형선고는 떨어졌습니다. 혹시 재판을 잘못해서 죄 없는 사람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재판을 해서 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려주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재판을 할 때 법을 따라 재판을 해야 하는데 오늘 성경에는 사람들이 막‘나사렛 예수님을 못 박아라’ 소리를 지르니까 오늘 성경에는 소리가 이긴지라 법이고 뭐고 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데모를 할 것처럼 법석을 떠니까 빌라도가 겁이 나서 예수그리스도를 죽게끔 판결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왜 그렇습니까? 아니 죄가 없는 예수그리스도를 사형이라고 판결을 해놓고 사형 받아야 야할 바라바는 또 왜 살려줍니까? 이러니 이 재판은 누가 보더라도 잘못된 재판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그 잘못되었다고 항의를 안 하시고 그냥 힘없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공의의 아들이신 그분이 잘못된 재판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리고 죄인의 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욕설과 침 뱉음과 매 맞음을 당하면서 돌로 침을 당하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재판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그분은 죽으셔야 됐기 때문입니다. 죽기 위해서 그분은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때가 잘은 모르지만 아침 일곱 시나 여덟시쯤 되었습니다. 금요일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자꾸 쓰러지셨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그 전날도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쫒으시고 밤늦게까지 그 일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때는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자들에게 다시는 볼 수 없는 제자들과 송별 파티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최후의 만찬의 떡을 떼셨습니다. 그 떡이 넘어가겠습니까? 잠시 후면 십자가를 지고 제자들의 곁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에 잡수시지도 못하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두고 가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셔야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입맞춤을 당함으로서 체포당하셨습니다. 새벽 두시나 세시쯤 되었을 겁니다. 그 담에 어디로 끌려갔냐면 가야바에서 끌려가셨습니다. 가야바에서 실컷 욕을 당하시고 빌라도에게 끌려갔다가 이 사람이 어디사람이냐 갈릴리 사람입니다. ‘아’골치 아프다‘ 그러면서 갈릴리 헤롯왕이 예루살렘에 휴가차 나와 있었습니다. 보내졌습니다. 거기서 온갖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빌라도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무대 인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습에는 십자가를 질 때는 두 가지의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서른아홉대의 채찍을 먼저 맞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의 쓰던 채찍들을 모았는데 그 채찍은 굵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가죽만이 아니라 가죽 끝에 낚싯바늘 모양의 뼈를 깍은 것 혹은 쇠를 쭉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리치면 살이 묻어서 후두둑 떨어지는 그런 채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채찍을 맞으셨을 겁니다. 서른아홉번의 매를 맞다보면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십자가를 지러가기도 전에 죽는 것은 다반사 였답니다. 또 하나의 규칙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대신 져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규칙에 의해서 이렇게 매를 맞으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사람들이 주먹으로 치면서 네가 선지자냐 우리 중에 누가 쳤는지 알아맞히라 면서 조롱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가면서 쓰러지셨습니다. 골고다에 가면 지금도 예수님이 쓰러지신 곳마다 하얀 푯말을 박아 놓았는데 여섯 번 쓰러지셨습니다. 어째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끌고 가다가 끌고 가다가 예수님께서 도저히 못가시고 자꾸 쓰러지니까 군병들이 한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어주었는데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도 아니고 구레네라는 지방에서 와서 그냥 구경 좀 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덤터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구레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이제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를 향해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뭐 느끼는 것 없습니까? 뭐 가슴에 와 닿는 것 없습니까? 구레네 시몬은 주님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엉겁결에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충성스럽게 골고다 언덕까지 백성들에게 그 모욕을 받으며 올려다 주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 후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인도 지방에서 순교했다고 역사는 기록했습니다. 여러분 이렇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억지로 주시는 은혜도 우리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맡기신 직분 억지로 맡긴 그 일들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여러분들은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째든 그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의사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메어준 군병의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를 만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다 주를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만나주시지를 않습니다. 누가 주를 만났나요. 누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간증할 수가 있습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한 능력이심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동행한사람이 아니고는 그를 증명할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와 동행해 주십니까? 주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길 원하는 그 사람 주를 위해서 충성하는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에게 주님은 동행하셨고 주님이 동행하실 때 그들은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관심은 그게 아니라 27절에 보니까 또 백성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그랬습니다. 새까맣게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남자여자 천한 자 부유한자 심지어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도 있었고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섞여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성경은 오늘 이 많은 사람들을 둘로 딱 잘랐습니다. 그것은 백성이라는 사람이었고 여자의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먼저 백성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줄을 따로 서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편을 가른 것도 아니고 그냥 뒤섞여서 웅성거리면서 골고다를 향해 어떻게 예수를 처형 하나를 알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인데 왜 성경은 이렇게 백성이 따로 있고 그리고 그 백성들 속에 있는 여자의 큰 무리는 따로 갈라내어서 다른 사람들인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까? 이 백성들이 뭐하는 사람이었는지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7절에서 35절에서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35절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48절을 보면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백성의 정체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예수가 어떻게 비참하게 죽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가를 보기위해서 온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들 중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뱃세다 광야에서 베풀어주신 떡을 먹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친구들도 이 속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 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토막의 신앙가지고 얘기하면 안됩니다. 누구는 왕년에 성령 충만 안한사 람이 있습니까? 맨날 교회가 필요로 하고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원하실 때 그 때 이 사람들처럼 그리스도께서 받는 고난을 구경하기 위하여 교회 다니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예수님을 이 다음에 어떻게 그분의 보좌 앞에서 만날 것입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또 말하기를 그 사람들 말고 여자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자의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쫒아오고 있었는데 이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울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백성들은 구경하며 따라갈 수 있는 그 길을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지 않고는 그를 위해 쫒아갈 수 없고 그리고 통곡하며 슬피 울지 않고는 예수님의 뒤를 쫒아 갈수 없습니까? 왜 그렇게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이 여자들은 그 예수를 위하는 여자들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쳤다고 그를 위해서 슬퍼하였다고 말하고 그를 위해서 울었고 그를 위해서 쫒아갔습니다. 백성들은 구경을 위해서 쫒아갔지만 이 여인들은 주를 위하여 쫒아가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들은 분명히 이 시간에 우리가 어느 곳에 속한 사람들인지를 밝히 고백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여자들이 쫒아갈 수 없었던 이유 백성들이 구경하면서 쫒아갈 수 있는 그 길을 슬피 울면 통곡하며 여인들이 걸어갑니다. 군병들이 창칼을 들고 예수님 곁으로 오지 말라고 막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협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웅성거렸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 여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를 위해서 울고 통곡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남들은 구경하면사 갈 수 있는 그 길을 통곡하지 않고는 갈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까? 사랑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이 여인들은 남들은 구경하며 걸어가는 그 길을 슬퍼할 수밖에 없었고 가슴을 치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는 그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되 뇌이었습니다. ‘저 십자가를 내가 질수 있었다면’ 왜 그랬을까요. 이전에 일곱귀신이 들려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주의 일꾼 삼아주신 주님, 굶주려 정처 없이 해맨 그때에 나에게 찾아오셔서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그리고 보리떡으로 나를 먹이신 주님, 소외받고 동족도 나를 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나를 무두 버린 창녀의 과거를 가진 나를 찾아오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사랑해 주셨던 분 내가 세리라는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친구도 없던 그 처참한 나날동안 아무도 내 곁에 와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주님은 나를 받아주셨고 내 집에서 함께 먹으셨으며 나를 하나님의 자녀 로 삼아주셨던 사실 이 모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예수그리스도께 나아갔습니다. 그분을 사랑 하셨습니다. 그분이 자기를 사랑했던 것처럼 그들도 주를사랑했습니니다. 그랬길래 그들은 남들은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저 걸어갔던 그 길을 히죽이면서 걸어 올라가는 골고다 언덕의 그 길을 통곡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실수 있는 저 고난의 길을 내가 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셨고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끄럽게도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가난 가운데 사셨습니다. 천상의 영광가운데 천사의 찬양을 들으며 경배를 받으실 그분이 이 추악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병든자와 함께 주무셨고 귀신들린자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세상이 더럽다고 버린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위해 살았지만 세상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버렸습니다. 영접치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 살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지만 그 분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옷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로마 군병들에게 제비뽑도록 내어주셨습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하나밖에 남지 않은 당신의 옥체를 깨뜨리시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보면서 이여인들은 주를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내가 이 시간에 주의 이름으로 묻습니다. 이들은 주를 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구경을 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까?
한 1년반 정도 전에 성경을 읽다보니까 어느 하나의 말씀이 내 가슴을 한없이 울렸습니다. 여러분은 웃으실 겁니다. 저는 그 말씀 때문에 한 6개월 동안 매일 침대에 드러 누어서 울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그 풀의 꽃과 같도다. 우리 육체가 풀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우리 육체가 추구하는 바가 풀의 꽃이라는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날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그 허무함 말할 수 없이 가슴에 밀려오는 것을 한 6개월 동안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우리의 인생을 이처럼 허무하게 만드셨습니까? 이미 시편의 기자가 그 말을 하였습니다. 들에 핀 풀을 보십시오 피어있는 들풀이 시퍼렇게 쭉쭉 뻣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난초나 화초같은 풀이 아니라 잡초입니다. 그 잡초하나가 싱싱하게 이슬을 머금고 끄트머리에 꽃까지 매달았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태양의 빛이 사라지고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 오면 우리는 그 잔디밭에 가봅니다. 싱싱한 잔디가 그 풀 한포기가 밟혀서 가루가 되어서 허공중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세상에 뭐 변한거 있습니까 누가 그 풀 한포기가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고 지푸라기가 되어서 허공중에 날라가버린것을 기억이나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 풀에 맺힌 꽃이야 어떻겠습니까 풀이 있는동안 그 꽃은 피었다가 져버리지 않습니까?
연세 드신 분 들에게 죄송합니다만 저는 요즘 연세 드신분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아 저렇게 우리는 주님앞에 가는 구나.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모두 지나간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는 것 은 주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고 말입니다. 주님 앞에 갈 때 여러분들은 무슨 세상에서 직책을 누리고 무슨 승용차를 타고 다녔느냐고 주님은 그런 것 물어보시지 않습니다. 60평 맨션에 사는 것 과 지하실 골방에서 사글세방에 살았던 것 주님의 목록에 그런 것 심문의 대상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이 가나안 교회 몇 년이나 다녔는지 그런 것 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교회에서 진정으로 너를 필요하고 내가 그 교회에서 진정으로 너의 눈물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충성했는지 주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 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현듯 주 앞에 설 것입니다.
이 월달에 사당동에 있는 교회에 여전도회집회에 나갔는데 거기에는 30대여전도회로부터 시작해서 70대 할머니 까지 오셨습니다. 그런데 피아노 치고 있는 학생이 유독 젊어서 몇 살이이지? 하니까 열여덟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50이 넘으신 어머니 되시는 여러분 저 때가 새까만 옛날같이 여겨지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그랬더니 모두가 하는 말이 눈 깜짝할 새 와 같답니다. 어제와 같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이 흔히 잊고 사는 평범한 진리를 지금 일깨워드리는 것입니다. 30년 전이 깜박할 어제와 같다면 한 번 더 깜박하면 우리는 주 앞에 서 있을 것 입니다. 그 때에 어려분 들이 손에 쥐고 있는 어떤 것들이 주님앞에 쓸 만한 것들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신 은혜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주를 위해 사시길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는 결국 거기서 죽으셨습니다. 거기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거기에서 당신의 옥체를 깨뜨리셨으며 물과 피를 모두 쏟으셨습니다. 그래서 휘장은 찢어졌고 하나님 께로 이르는 보좌의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공로로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돌아가셨고 구경하던 사람도 다 집으로 갔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던 여자들도 자기 갈 길로 돌아갔습니다. 시체는 치워졌습니다. 십자가도 거두어졌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인파들도 다 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 모를 집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골고다 언덕길은 이천년을 넘어서서 지금도 교회 속으로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지금도 골고다 언덕길은 있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속에는 이 수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이면 예배당 문을 밟고 드나들지만 거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밖에는 없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구경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쫒아간 사람들, 그의 흐르는 피와 눈물과 땀과 쓰러지는 고난을 보며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쫒아가는 사람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