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자녀를 위한 눈물(눅23:28) 2007.8.12 주일오후 1
2. 거듭나게 하는 복음(벧전1:23) 2007.8.17 금요기도회 7
3. 너희 자녀를 회심에 이르게 하라(잠20:11) 2007.8.19 주일오전 14
4. 아이와 슬피 울며(창37:29-36) 2007.8.19 주일오후 25
5. 회심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겔33:11) 2007.8.26 주일오후 31
6. 회심의 화로, 가정(말4:6) 2007.9.2 주일오전 40
7. 축복의 파문(시128:3) 2007.9.2 주일오후 51
1.자녀를 위한 눈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그 이전에는 헤롯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헤롯이 “진리가 뭐냐? 네가 그렇게 진리, 진리하는데 진리가 뭐냐?” 예수님이 입을 닫고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빌라도의 긴 심문 중에도 예수님은 별로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에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에 끌려 가셔서 거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모욕을 당하시고 매를 맞으셨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로 들어섰는데 예수님이라도 그 짐을 차마 지실수가 없어서 그만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어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할 기운이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까지 남기신 유일한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거라”
그리고 이후에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울고 있는 자매들에게 더 울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여자들이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피 어리게 통곡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애들아 울지 마라. 나는 괜찮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걱정하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울어서 내 마음을 사도 바울이 남긴 것처럼 너희가 어찌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약하게 하느냐?” 그렇게 말씀 하실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울어 가지고는 안 된다. 더 울어라. 그런데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거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이때가 주후 30년쯤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0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보통 BC 4년쯤 태어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BC 7년까지 보는 사람이 있는데 BC 4년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 이때로부터 정확하게 40년 후 주후 70년에 로마가 쳐들어옵니다. 그 당시에도 로마의 제국아래 있는데 자꾸 독립운동이 일어나니까 로마가 쓸어버립니다. 그때 유명한 장군이 디도 장군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쓸어버립니다. 그래서 피 바다가 됩니다. 그때 그런 환란을 당할 사람들이 40년 후이니까 이 자녀들이 지금 10살이면 50세쯤 되었을 것이고, 5살이면 45살쯤 되었을 것이고, 20살이면 60세쯤 되어서 일어나니까 그 자녀들이 바로 그 세대에 걸리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인간의 수명이 짧았으니까 어쩌면 이 여자들은 40년쯤 지난 다음에 그 광경을 못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 광경이 생생하게 비쳐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었습니다. 아주 무참하게 죽어 갑니다. 어마어마한 살육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이 여자들이 흘린 이 눈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서 흘리는 이 눈물,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좋으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까? 예수님! 예수님이 왜 우리 때문에 그렇게 모진 고난을 당하셔야 합니까? 예수님의 저 피 흐르는 상처와 저 가시 면류관을 어떻게 하여야 하나?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울지 말거라” 이것이 바로 놀라운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의미는 예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대상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포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만 문제는 회개하지 않고 남아 있는 예수를 사랑하는 어미의 자식들 말입니다. 너희 자식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만 죽음을 무릅쓰고 골고다 언덕까지 쫒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애들아! 너희들 신앙이 참 좋구나! 제자라는 녀석들도 다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갔는데 너희들 잘못하면 나 때문에 혼날 텐데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를 따라오니 나를 사랑하는 너희 마음에는 가식이 없구나! 네 자식들은 걱정마라. 내가 그것이라도 책임을 져 줄께” 그러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똑바로 살려고 애쓰고 가끔은 주님께 아첨을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잘해 보려고 하는데 설마 내 새끼가 어떻게 되겠어!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지!” 가슴이 아프더라도 용서하고 가슴에 새기십시오. “흐르는 눈물이 없이 내 자식의 일생은 주님이 책임져 주실 거야!, 흐르는 눈물의 기도 없이 내 자식은 주님이 책임져 주실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은 “될 대로 될 거야!” 라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회심을 포기한 엄마, 거의 기대하지 않는 아빠 속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아프죠? 사실입니다. 부모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얼마나 회심하기 위해서 애를 썼겠습니까? 기도를 안 해 보았겠습니까? 달래 보지 않았겠습니까? 아니면 협박을 안 해 보았겠습니까? 그렇게 안 되는 것을, 그것이 비록 자기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이 속에서 끈덕지게 구원이 곧 이루어 질 것처럼 치열하게 몸부림치고, 인간의 영혼이 그렇게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은혜에 있지 않는 한 안 되는 것입니다. 흐르는 눈물의 기도 없이 “내 자식은 하나님이 주관하실 거야!” 이 고백은 “그냥 내버려 둘 거야!”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 그렇게 맡길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식을 보고 언젠가 때가 되면 주님이... 믿음이 아닙니다. 제가 다시 말하는데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엄마, 살아있는 아빠라면 오늘 일어나야 되는 일인 것처럼 진통을 하는 그것이 진짜 은혜 안에 있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니 무슨 회심 못한 것이 불치의 병 입니까? 오늘이라도 회개하면 회심하는데 그것이 무슨 사형선고 받은 것입니까? 그것을 왜 운명에 맡겨야 합니까?. 그것은 자녀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가 문제인 것입니다.
(예화) 또 아픈 시절이 돌아 왔습니다. 그렇죠? 제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엄청 많이 운 대목이 있습니다. 하여튼 눈물이 흘러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렸던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니카가, 그 어머니가 타락한 자기 아들을 위해서 매달리는 광경을 보면서, 지금도 말을 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내가 그렇게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엄마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기도해 주었더라면 지금 이런 삶을 살지는 않을 텐데? 더 많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재였습니다. 정말 제가 여러 사람의 책을 읽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천재다 라고 느낀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칼빈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도 이분이 천재 같다는 생각은 못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은 두 권을 읽는 그 순간 이분은 범상치 않은 천재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공부를 잘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공부를 잘 했냐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학문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제가 다른 사람을 가르친 경험을 통해서였습니다.” 글자도 거의 안 틀립니다. “남들이 그렇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어려운 학문의 책들을 내가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때 그중에 아주 뛰어난 사람이어야 겨우 내 말귀를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창조를 설명하면서 “이것 말고도 제가 깨달은 것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여기에 쓰면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어마어마합니다. 어떻게 보면 천오백년 전에, 아니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사상의 역사가 어거스틴의 품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천재입니다. 그러니 평범한 삶을 살리가 있겠습니까? 법률 공부를 시켰는데, 논리학 선생이 되었는데 집어 치우고 그리고 이제 예지의 길로 떠났습니다.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18살에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31세가 될 때까지 치열하게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니카는 살아 있는 이유가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모니카 자신이 스스로 고백을 합니다. 하다가 안 되겠으니까 함부르스쇼 주교 말고 또 한분 유명한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 분을 찾아가서, 굉장히 높은 성직자 아닙니까? 찾아가서 붙들고 통사정을 하면서 내 아들 한번쯤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그 아이의 길에서 돌이키게 해 달라고 처절할 정도로 울면서 그 주교에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주교의 대답이 너무 야박합니다. “냅둬라!” “아니 되옵니다. 내 자식을 살려 주옵소서” “나도 그 시절을 겪었는데 머리에 든 것이 많아 자기 잘난 마음에 꽉 차서 지금 내가 만나서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진리인줄 알아먹지 못할 것이다. 더 마음고생하게 내버려 두어라.” 그렇게 주교가 떠나고 갔는데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통곡하면서 매달리면서 한번만 우리 아들을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의, 모니카의 생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마어마하게 존경하는 것입니다.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자식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돌아옵니다. 한 번에 돌아오지 않고 서서히 서서히 돌아옵니다. 돌아왔다가 또 타락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치열하게 기도해서 결국은 정말 회심하게 됩니다. 회심의 광경을 이야기하면 좋은데 시간이 너무 갈 것 같습니다. 회심을 하고 그러면서 그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눈물이 내 눈에서 폭포수와 같이 쏟아졌나이다.”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쾅 하고 일어 난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고민이 일어나고 성경이 믿어지기 시작하고 이러다가 어느 한 지점에 둑이 터지듯이 확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이 사람이 굉장히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정도로 나빴냐면 이 사람이 동성애에까지 빠졌던 사람입니다. 자기 고백 속에 다 나옵니다. 그래서 그 고백록을 쓴 동기가 무엇이냐면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람들이 자기를 너무 성자처럼 추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과거에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라고 다 까발리면서 고백을 했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존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성애에까지 빠집니다. 학자들 간에 아직까지 그 대목은 논란이 있지만 그런 의견이 있습니다. 저는 그랬을 거라는 흔적을 고백록에서 많이 봅니다. 확신 합니다. 동성애에 빠지고 그리고 나서 여자를 만납니다. 18세에 아이를 낳는데 그 여자도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데리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내 버리는 것입니다. 아들은 두고 가라고 하고... 그것은 무슨 이야기 입니까? 또 다른 색정을 느낀 것입니다. 옛날의 조강지처한테 싫증이 난 것입니다. 보내 버리고 자기 말로는 가슴 아팠다고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가슴이 아픈 것이고 보내 버립니다. 갈 때 이 여자가 그럽니다. 다시는 남성을 알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고 아프리카로 돌아옵니다. 그러고 나서 그 후진 여자보다 훨씬 좋은 대가집의 규수와 혼인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자 아이가 법정 결혼 연령에 2년 미달입니다. 2년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2년 동안을 못 참아서 다른 여자를 끌어 들여서 또 동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기 시작 합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그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니카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고백록에서 무엇이라고 고백을 하냐면 “행여나 내가 잘못 될 세라, 색정에 빠질새라, 어머님은 전전긍긍하며 노심초사하였습니다.” 한 열 서너 살 될 때부터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전혀 안 믿는 사람이었고, 나중에 간신히 회심하게 되지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눈물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교가 마지막에 안 된다고 야멸치게 뿌리치면서 휙하게 던진 한마디가 이 모니카의 가슴에 칼처럼 박힌 것입니다. “아무렴 그렇게 애미가 통곡하며 매달리는데 눈물의 자식이 망할려구!” 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탁하고 꽂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눈물로 키운 내 자식이 결코 망하지 않고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드디어 깊이 회심을 하게 됩니다. 31세 때였습니다. 깊이 회심하고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했으니까, 그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의 빛이 비치니까 쓰레기 같은 사랑은 전부 불태워져 버리고 이 어마어마한 우주적인 지식들이 막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초기의 작품 중에 행복론, 질서론, 독백론 이러한 불멸의 가치를 지니는 작품들이 새신자반에 있을 때 쓴 것입니다. 그때는 세례 교인이 되려면 예비 학습 교인이 거의 삼년을 공부한 다음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학습 교인이던 시절에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엄마하고 같이 오래간만에 마음이 하나가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까시야끼움이라고 하는 시골 별장에 가서 6개월을 묵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진리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기록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죽을 때에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엄마 나이 56세, 아우구스티누스의 나이 32세. 아들인 아우데다투스의 나이 14세 때였습니다. 그때 엄마가 죽으면서 그럽니다. “이제껏 나는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무한한 행복을 맛보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살았는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있었다면 네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는데 네가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나는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것이 그 패역하고 타락한 자식이 돌아가게 했던 그 엄마의 삶이었습니다.
언젠가 주님 만날 것이라고 하는데 한번 잘 보십시오. 어린 시절에 주님을 만나 깊이 회심하고 하나님의 도를 떠나지 않았던 아이들은 은혜가 떨어져도 삶이 방탕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나이가 먹어서도... 그런데 이것이 회심이 늦어져서 할 짓 못할 짓 다하면서 세상의 맛을 다보고 그러다 주님을 만나 회심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면 은혜가 떨어지면 십상으로 그 악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악을 알지 아니하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지만 돌아갑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인간이 타락했을 때 세상을 많이 아는 것이 독이 되는 것입니다. 모르면 은혜가 떨어져도 그 이상 발전을 못합니다. 그런데 맛 볼 것을 다 보고 안 사람은 은혜가 떨어졌을 때 그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이 빨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지만 내 욕심 같아서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4학년이 되기 전에 회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 전에... 깊이 회심하고 일 년에 한번정도 그것이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일 년에 한번 정도 가지고 안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아쉬운 대로 일 년에 한번이라도 회심 집회 때만이라도... 그래서 내년부터 몇 주 전에도 내가 이야기 했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사람 저사람 와서 아이들에게 집회를 하고 대충하고 가면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사람들을 불러 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의 명운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년 2월에 인도네시아에 계신 어린이 선교협회, 그분 최고의 강사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모셔 오기로 했습니다. 비행기표 다 해 드리고...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서... 믿어지십니까? 회심 집회에... 1박2일 때문에 오시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그러는 내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화) 보십시오. 지금 중학교 3학년 된 아이들이 절반 이상이 성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이런 것은 기본입니다. 이제는 대학생 아이들에게서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이 고등학교를 거쳐서 중학교 까지 내려옵니다. 어떤 청소년의 증언인데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한 아이들이 동거를 한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내가 들었습니다. 이런 세상입니다. 그러니 이 회심이 늦어지면 되겠냐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청소년 시절에 담배에 인이 배겼는데 은혜를 받으면 한주일은 끊겠지만 다시 안 돌아 가겠습니까? 어른인 분별력이 있는 여러분도 노름하다가 은혜 받고 떨어지면 다시 화투장 손에 쥐는데...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이 회심이 내려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도 너무 늦습니다. 지금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생리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막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 이슬이도 이야기 합니다.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갔는데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이 문을 잠궈놓고 선생님 몰래 맥주 가지고 와서 따라 먹는데 건배 하자고 설치는 아이가 부목사 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4학년도 늦습니다. 더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 갈수록 회심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때가 되면 주님이 하시겠지?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오늘 안 일어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그 의무는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분명히 여러분은 아이들의 유아세례 때 “이 아이의 구원을 내가 앙모하는 것처럼, 이 아이의 구원을 위해 앙모하며 이 아이에게 거룩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신앙의 거룩한 도리를 가르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의 안티 사이트에 욕지거리 퍼붓고 하는 아이들 중에서 상당수가 예수 믿는 집 아이들인 것을 아십니까? 마음이 기독교에서 진수를 맛보지 못하면, 그리고 모순을 발견하고 이렇게 되면 이 마음이 더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목회자로서 할 수 없는 것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고 했는데, 여러분들은 교회에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불신 결혼 한다고 하고 그 다음에 자식 낳아서 그 자식들 불신자로 키우고 하면 여러분 하늘에 가서 그것을 어떻게 내려다보겠습니까? 그 씨가 퍼져서 그 지옥의 백성이 되는 것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못합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교역자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1박2일을 하는데, 인도네시아에서 비행기를 태워서 모셔 오려니까... 대교회에서 4박5일을 해도 그렇게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번 비행기 타고 오셔야지, 숙박하셔야지, 강사료 드려야지, 얼마나 들어가겠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분은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혼신의 힘으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 몇 백 만원 들어가도 우리가 덜 먹으면 됩니다. 점심 한 끼만 밥 안 해도 그 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교회가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를 위해서 뼈 사이에 스며드는 슬픔으로, 여러분들의 몸의 일부이지 않습니까? 영으로는 우리 교회의 한 일부분이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잘 들으십시오. 지금은 1:1 입니다. 여러분하고 그 자식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불신 결혼하면 2:1 입니다. 2:1 인데 한집에서 살고 있습니까? 도망갑니다. 원거리 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운명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모가 좋은 신앙을 가졌으나 자식들에 와서 그 신앙을 잃어버리고 불신자로 살아가고 심지어 불교나 다른 종교로 빠져 버리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예화) 옛날에 우리 교회에 형제 하나가 있었는데 인생사는 것이 하도 고달파서 중이 되려고 절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지 스님이 서점에 다녀오라고, 읍내에 다녀오라고 하니까 머리를 빡빡 깎고 읍내에 내려 왔다가 김남준 목사 설교 테잎이 그곳에 꽂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인가 해서 하나를 사 가지고 와서 절에서 몰래 그것을 듣다가 회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걸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치면 담임목사께 끌려 간 것입니다. 주지 스님이 미친 놈이 절에 들어 왔다고, 이 놈이 이것을 듣고 있다고 휙 던지는데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호세아서 설교입니다. 그 주지 스님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하니까 “저는 불교가 길인지 알고 들어와서 여러 달 있으면서, 얼마나 착실한지 옷 맞춰 준다는 사람도 있고 다 이렇게 해 놓았는데 이 테잎을 들으면서 제가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이 주지 스님이 재미있습니다. “그래 가거라! 나도 옛날에 주일학교 선생이었는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해 주십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해 주십니까? 우리 교회 선생님들 같은 분들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 하나씩 하나씩 끌어안고 자기 영혼인 것처럼 그렇게 울지 않습니까?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도해 주십니까? 회심하지 않는 내 아이들을 위해서 눈물 흘려주는 그 선생님 이름은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번에 여름 성경학교 때도 보니까 두 번을 갔었는데 교역자들의 오직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이들이 회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좋은 위치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여자들의 눈물만 가지면 됩니다.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 지치지 않고 계속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속에는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그러면 안 됩니다. 마지막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정말 주님 만나고 이 아이들이 회심하도록... 다른 길은 없습니다. 자식의 회심을 경험한 모든 부모에게 물어 보십시오. 피 나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식이 주님을 만나서 깊이 변화되고 우리 아이들도 수련회 가서 회심하고 돌아 왔을 때, 그때처럼 기쁠 때가 없습니다. 그래서 표정이 그윽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줄때 아이들이 눈물을 글썽거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1
2.거듭나게 하는 복음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얼 하면서 살고 또 무얼 누리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아니하면 그것은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인간의 구원문제를 놓고 이야기할 때 “이 세상에서 아주 가난하고 병들고 비참하게 살면 하나님이 더 많이 필요하고, 또 배부르고 지위도 있고 모든 환경이 좋으면 주님이 조금 필요할 것이다”라고 말로는 그렇게 안하지만 느끼기는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끔 “목사님, 저희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요. 예수도 믿으면 참 좋겠는데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행복한 상태에 보태어져서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행복에 무엇인가를 보태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보충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이 없으면 그 사람의 살아있는 것도 그가 사랑하는 것도 그가 추구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것들은 그것이 변하거나 움직이거나 사라지거나 하면 우리마음에 끊임없는 고통과 번민을 가져다줍니다. 그 많은 것들은 대부분 시간 속에서 생겨났다가 시간 속에서 변하다가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이에요. 그러면 그 많은 것들은 시간 속에서 생겨났다가 시간 속에서 있다가 변하다가 사라지는데 우리가 만약에 그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도 역시 그것들이 변할 때마다 우리도 변하고 그것들이 사라질 때마다 우리도 그것에 의해서 버림을 받고 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번민이 계속이 되는 것이죠.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의 육체는 이 땅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이 땅에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가져야만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물질도 필요하고 적당한 명예도 필요하고 안정된 삶도 필요하고 또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도 필요해요. 그렇게 관계를 맺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죠.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 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행복한 삶일 수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가꾼 나의 육체도 언젠가는 시간 속에서 소멸해서 나를 버릴 것이기 때문이죠. 내가 나를 버리는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갈 곳을 잃게 되는 것이죠. 육체가 우리를 버려도 우리가 남아있어요? 안 남아있어요? 영혼으로 남아 있잖아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구원이에요. 이 구원은 우리의 육체만을 구원하거나 영혼만을 구원하는 그런 종류의 구원이 아니에요. 우리 중에 누구도 이 세상에 생겨나기 전에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없어요. 시간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시간 속에서 구원을 받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죄와 갈등하며 싸우고 살아가다가 시간 속에서 죽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육체는 마치 사람이 줄 끝에 돌을 매어서 돌릴 때 그것을 돌리는 원심력이 영혼이라면 그 돌리는 것을 따라서 휘도는 것이 육체에요. 육체가 끊임없이 시간 속에서 변하고 움직이면서 살아요. 어릴 때는 아직 어리지만 장년이 되고 장년이 되면 어릴 때 있었던 고민은 끝나지만 어릴 때 없었던 고민을 하게 되죠. 어릴 때 고민은 뭐예요? “숙제 안 해가면 어떡하지? 맞으면 혼나면 어떡하지? 친구들이 때리면 어떡하지?” 장성하면 그런 고민 없어지죠.
옛날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직장을 다니는데 얼굴이 쪽 빠졌어요. “직장생활하기 참 힘들지? 학교 다닐 때가 좋았지?” 당연히 ‘네, 목사님 할줄 알았는데’ “아니요, 목사님.” “얼굴이 그렇게 안됐는데? 너무 힘들지 않아?” “힘들긴 한데요. 학교보다 훨씬 좋아요.” “왜” “시험 안 보잖아요!” 직장도 요샌 시험 많이 봐요.
육체는 그렇게 변하잖아요. 그런데 영혼이 그것을 딱 붙들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오늘 육체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공급받고 그렇게 살지만 그것에 인해서 육체가 튕겨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주는 하나님이 계신 영혼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시간 속에서도 영혼에 의해 육체가 다스려짐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그리고 그 영혼은 다시 육체를 버리고 영원 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는 거죠. 우리들이 자녀를 위해서 많이 아무리 좋은 것을 애쓰고 힘써서 자녀들에게 준비해 준다고 해도 그것으로서 자녀들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려고 할지라도 부모가 일평생 그 자식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을 수는 없어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저와 여러분의 자녀들 중 과연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뭐 좀 잘못된 일을 할 때에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서 그걸 못하고, 하기 싫은데 꼭 해야 되는 의무인데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이 나서 ‘이러면 안 돼지!’ 하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의무에 충실한 자식들이 몇이나 될까요? 결국은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부모가 영원히 들어앉을 수는 없어요.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자식을 위해 아주 헌신적인 부모들도 있을 거예요. 물론 개중에는 아주 막돼먹어서 자식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서 내팽개치는 부모들도 있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 할지라도 자식의 마음속에 부모가 영원히 항상 그렇게 살아있기는 쉽지 않아요.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럴 필요도 없어요. 주님이 그 안에 살아계시면 돼요. 그게 답이에요.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계시니까 아무도 우리에게 너 왜 그렇게 사느냐고 야단치는 사람이 없어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까 때가 되면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도 나보고 손가락질 하면서 어떻게 인생을 그렇게 사느냐고 책망하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때가 되니까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아무도 너 왜 네 가족사랑안하냐고 그게 인간이냐고 그렇게 찔러주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 그때 가슴에 깊이 찔리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정말 내 가족을 더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는 고백의 눈물이 흐르게 되는 거죠.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안목이 짧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여러분의 자녀의 영원한 영혼의 영원한 운명에게 까지는 시선이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의 자녀는 거듭나야 된다 이거죠.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은 그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내 바깥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본성 안에 새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읽으면 이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길이 보이고 또 살아온 인생의 길을 마음을 통해서 보고나면 그 사람이 앞으로 걸어갈 인생의 길도 그 마음속에서 보이는 거예요. 그게 사실은 운명과 같은 필연을 형성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엇으로도 바꾸어놓을 수 없어요. 늘 다투기를 좋아하고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꽉 찬 그런 비관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물질이 넉넉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끊임없이 그렇게 살아요. 쾌락을 좋아하고 육욕을 쫒는 사람은 그가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 있던지 또 그렇게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아이의 본성이 바뀌는 거예요. 자연적인 본성 안에 있는 나쁜 본성, 그 제일 나쁜 본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는 본성이에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이 계실 그 위치에 자기를 놓고 살려고 하는 그것이 그 아이의 인생을 불행하게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중생은 그것을 바꾸어 놓는 놀라운 힘이 있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들 중에도 거듭나고 신자가 되었는데도 자기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어떤 본성이 있는 사람들이 있죠. ‘나는 왜 그렇게 사람들과 잘 다투는지 몰라, 안 그러려고 애를 써도 결국 그러고 말아.’ 또 욕심 ‘나는 그러지 말자고 매일 그렇게 다짐을 하는 데도 나는 왜 그렇게 사악한 욕심이 많을 까?’ 등등의 많은 그런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자연적인 성품하나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면 번번이 실패해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생각일 뿐이고 실제로 현장 속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씨름을 해도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느 한 순간에 그러지 말자고 입술을 깨물어도 결국은 마음 안에 있는 본성이 입술을 이긴단 말이죠. 아무리 진하게 깨물어도 그 본성이 이긴단 말이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신 그 사랑을 받으면서 그것들을 이기게 되는 거예요. 중생한 사람들 속에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 은혜의 세계가 있단 말이죠. 그럼 이기는 거죠.
아이들도 보세요. 우리 집 아이들도 회심했지만, 어른들하고 똑같아요. 수련회 갔다 오고 은혜를 받고 나면 아이들이 아주 부드럽고 연해져요. 그리고 가끔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가정예배 드리면 눈물도 뚝뚝 흘리고 그래요. 그러다가 또 이제 학교 바쁘다 핑계대고, 고단하다 기도생활 잘 안하고, 말씀 잘 듣지 않고, 그러면서 속상한일 생기고, 근심걱정 들어오고, 또 틈틈이 영화도 봐야지, 게임도 해야지, 이렇게 하고 가끔 이성에도 눈을 뜨고 그러면 똑같이 그 아이 안에 있는 성령님께서 슬퍼하시는 거예요. 그건 초등학생도 마찬가지에요. 똑같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냐 하면, 그렇게 하고 살아, 겉으로 보기에는 “저게 뭐 중생한 모습이나 중생하기전의 모습이나 똑같이 지 할 거 다하고, 컴퓨터 게임 좋아하는 거 다하고, 공부안하고 저렇게 뺀질대고 변하긴 뭘 변해!” 그런데 변한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곤고한 게 무언지 알게 되는 거예요. 참 신기해요. 곤고한걸 알게 되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냥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성질만 나고 기분이 나쁘고 요즘 애들 말로 마음이 꿀꿀한데 그런데 그게 왜 그런지 모르는 거예요. 왜 마음이 꿀꿀하고 그런지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힘들고 괴로우면서도 원인이 어딘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중생하고 난 다음에는 아주 명쾌하게 아는 거예요. 왜 아는지 아세요? 예전에 하나님이 자기 안에 오셔서 자기를 평안하게 해주시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이제 곤고함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똑같아요. 애들도 그 곤고함을 이기기 위해서 컴퓨터 게임도 해보고, 친구랑 펜팔도 해보고, 놀러도 가보고, 롯데월드도 가보지만 돌아오는 길에 조용히 생각하면 더 공허한걸. 애들은 조그만 걸 하고 어른들을 더 큰걸 해서 그렇지 똑같아요. 곤고해요. 애들은 게임을 하고 어른들은 더 타락하고, 애들을 흉내를 내고 어른들은 직접해보고 하는 것의 차이지 뭐가 틀려요? 그런데 곤고함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하여튼 하나님 앞에 잘 안나가려고 하죠. 다 여러분 뱃속에서 나왔는데 뭐 콩 심은데 콩 나지 않겠어요? 애들이 뺀질거리고 은혜 가운데 안 있고 그러면 여러분 본 듯하세요. ‘아, 정말 내 모습이 저렇겠구나!’ 그런데 일단 회심하고 나면 희망이 있어요. 가슴에 계속 찔리는 거예요. 엄마가 아무 말 안 해도 조용히 구석에 앉아서 훌쩍거리며 기도하면 가슴에 깊이 찔리는 거예요. 물론 그 기도를 들으면서 회개까지 하면 좋은데 강퍅하기가 그 엄마에 그 딸,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겠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깊이 찔리는 거예요. 중생하지 않았을 때에는 잘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거듭나면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는 도저히 못 견디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갔는데 찬양을 부르는 거예요.
“ 하나님이 세상을 ~~” 찬송이 쭉 들리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그렇게 방황하다가 교회당에 들어섰을 때 그 삑삑거리는 풍금소리에서 나오는 찬송가, 여러 곡이 있었는데 가장 가슴에 들렸던 게 그거에요.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찬송이 쭉 들리는 거예요. 그때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거예요. 화~악 그러면서 그 쪼그만 아이들이 회심집회하면 막~ 회개하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멀리 떠났다고,’ 언제 떠났어요? 매번 교회 나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걸 깨닫는 거예요. ‘제가 주님을 멀리 떠났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아이가 나이와는 상관이 없이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할 때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고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것이 외에는 소망이 없는 거예요. 그런 감정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인간이 참여하는 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일은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깨뜨리는 참회에요. 그런데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참회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 집회를 해보면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은 대부분 옛날에 그렇게 회심했던 아이들이에요. 그러니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필요하겠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아이가 중생하면 원격조정이 돼요. 하나님께 ‘주님, 주님 제 요새 손 좀 보셔야 됩니다.’ 주님이 리모컨으로 작동을 하셔요. 그럼 움직여지는 거예요. 중생하지 않아 봐요. 쉽게 안 된다고요. 되긴 되지. 결국은 응답을 받아서 회심하게 되니까.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여러분 중에 10년씩 넘게 자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도 응답 안 되는 분들 많을 거예요. 더 매달려야 되요. 더.
그게 되는 거예요. 그럼 다시 은혜를 받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시 한번 회심을 반복하게 되면 이번에는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다 더 확실하게 믿게 되는 거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반복할수록 시시해지는데 이 회심은 반복할 수 있도록 더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반복될수록. 그러니까 참된 신자는 누구냐 하면 회개할 죄 없이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많이 깨어져 본 사람, 그런 사람들이 훌륭한 신자에요. 아름다운 신자에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한마음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도록 회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그 이외에는 무엇으로도 안 됩니다. 회심해도 말 안 듣고 삐뚤어진 길로 갈 수 도 있지만 돌아와요. 정말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회심,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오늘 대답이 나와요.
“썩어질 씨로 되는 것이 아니요. 썩지 않을 씨 곧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하나님의 말씀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 복음을 들려줘야 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이 복음을 깊이 들어야 되요. 그래서 그 복음이 그 아이에게 전파되어야 되요. 들려져야 되요. 우리가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그를 회심의 길로 인도하기가 어려워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너무나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너는 죄인이야. 그래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아무 희망도 없는 형벌 받을 이미 형벌을 받은 인간이야”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정직하게 복음의 선포를 듣고 그 진리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존재가 노출되는 그런 일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거기에서 한 “나”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누구인지 확인이 되고 그리고 나의 참된 인생의 길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들려주는 거예요. 그래도 참 감사한 게 두 번 회심집회를 했잖아요. 그죠. 회심집회를 했는데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강조를 했는지 놀랬습니다. 작년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놓고 설교를 했는데 너무 많아서 요번에 좋은 강사님을 불렀는데 나는 이제 3,4,5,6학년 하는데 여러분보다 말씀 듣는 태도가 더 뛰어나요. 저렇게 움직이지 않아요. 몇 아이들 철없는 아이들을 제외해놓고는 여러분이 보면 아마 깜짝 놀랄 정도로 정자세로 앉아서, 잠깐 설교하는 줄 알았는데 70분을 했더라고요. 초등학생이에요. 저도 눈치가 있는데 비비꼬고 하품하면,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듣기 싫은 사람한테 말하는 것이거든요. 전 대학에 있을 때도 학생들이 내 강의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보따리 싸가지고 수업 일찍 끝내고 내려오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그 학생보고 나가라고 하구요. 어쨌든 강의가 시작되면 노트 필기도 하지 말고 나만 쳐다봐 야해요. 왜 다 복사해서 줘버리니까 노트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내가 예민한 사람인데 70분씩 설교를 할 때에는 그 애들이 얼마나 집중했는지 여러분들 생각하실 수 있잖아요. 틀려요. 마음에 벌써 기도하면서 엄마와 함께 아빠와 함께 준비하고 온 아이들은 마음에 작년 못지않게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는 결단이 서려있어요. 그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설교하는데 보세요. 설교하는데 벌써 눈물을 뚝뚝 흘린 다구요. 그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에요. 하나님은 작년에 마음을 더 큰 성전으로 생각하거나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아주 후진 천막정도로 생각하고 그러지 않으세요. 인간의 마음은 마찬가지에요. 오히려 예수님은 너희의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셨잖아요. 놀라워요. 그렇게 하고 집회가 끝났는데 나중에 거기서 회심한 애가 열린 신문에 글을 썼잖아요. ‘회심집회가 너무 좋았는데 아쉬운 게 하나 있었는데 설교가 너무 짧았다.’ 아니, 진짜 여러분이 읽었잖아요.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그렇게 썼잖아요. 한마디도 보태지도 않았어요. 설교가 너무 짧았다. 애들이 집에 가서 설교한거 그대로 반복하더래요. 그림처럼. 그러니 얼마나 놀라워요. 저는 전도사 때부터 사역을 하면서 아이들이 회심하는 광경을 참 다양하게 많이 봐왔어요. 평신도 때부터 주일학교 해왔는데 늘 회심의 축복이 따라다녔어요. 그렇게 따라다녔어요. 정말. 책에도 여러 번 썼어요. 오늘 기독교 교육을 보면서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죄를 책망하고 영혼을 중생하게 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회심의 역사라고 나는 죽는 순간까지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는 그것은 연령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저 아래까지 내려가요. 만 3살밖에 안되는 아이들이
의심할 수 없이 회심하는 광경을 많이 보아왔어요. 이해하는 가운데 회심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정말 놀래요. 그 우는 모습과 그 울 때의 정신적인 분위기가 자기가 무엇인가 골목에서 친구와 싸우거나 엄마가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울 때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요. 영적인 분위기에요. 아이가 깊이 회개해요. 그러니 아직 이세상의 불결하고 더러운 것들에 대해서 별로 때가 묻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자기를 진실하게 낮추고 참회했으니 그 아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겠어요.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저는 지금도 믿는 집안에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어요. 지금도 그래요. 내가 그 어린아이 적에 아직 악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 그때에 경건한 어머니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아주 어린나이에 회심하고 하나님을 향해 올곧은 부모 밑에서 인생을 배우면서 살았더라면 지금처럼 추루한 모습이 아닐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는 내가 자라온 고향에 가서 부모님들을 생각하면서 한참 울었어요. 내 나이가 벌써 50이 넘었는데 그 어릴 적 생각을 하면서 그 동네에서 한없이 울었어요.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넘치도록 채워주셨지만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 어릴 적의 추억이 나에게 없어요.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던 어릴 적의 추억이 없어요. 왜? 회심을 워낙 늦게 했으니까. 그러니 이 어린아이 적에 회심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해요. 얼마나 필요해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어른 한 생명을 주고 어린아이의 한 영혼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자녀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투자할 가치가 있는 거죠. 왜? 우리는 이미 하나님 없이 비척거리면서 긴 인생 살아왔고 이제 이 세상에서 쓴맛 단맛 다보고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이 맛 저 맛까지 다 봐서 불결이 많아요.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정결하지만 그러나 아이들은 지금 이 어린나이에 주님을 깊이 알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어요. 생각해보세요. 편지 하나를 받았어요. 한 한달 전에. 누구한테 왔냐하면. 목사님은 아마 제가 기억이 안 나시겠지만 저 아무개거든요. 기억이 왜 안 나겠어요. 제가 집사 때 돌보면서 거듭난 아이들인데 제가 스물 셋, 넷, 다섯 때에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하고 교역자 없는 주일학교에서 부장집사하고 그럴 때에 얘는 4학년 5학년 6학년 이런 시절을 거쳤어요. 아주 정말 분명하게 회심을 하고 정말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 것을 보여주던 자매였어요. 초등학교 4~6학년 그랬는데 벌써 나이가 40이 되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니 격세지감이 있죠. 한 30년 넘는 얘기죠. 그러니까 거 보세요. 그래서 어떻게 사나 보니까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살아요. 그다음이야기가 재미있어요. 한번도 잊어 본 적이 없대요. 그 때에 하나님이 선생님을 통해서 심어주신 그 믿음을 붙들고 여태까지 살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회심이 그렇게 놀라운 힘이 있는 거예요. 회심을 하고 갑자기 여러분들 자식이 그 회심을 이용해서 공부 못하던 애가 수석을 하기를 바란다든지 아니면 좀 버릇이 게을렀는데 아주 탁월하게 부지런해지기를 바란다든지 그런 생각 가지면 안돼요. 그것보다도 이 본성자체가 변하는 거예요. 전에는 자기가 게으르고 자기의무에 충실안하면서도 찔림이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 중생하고나면 거듭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만지기만하면 우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교회에 나와서 곤고해서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이면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거듭남을 경험한 아이들일 가능성이 많은 거죠. 그러면 그 다음에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인간의 모든 비극은 저가 약해지지 않는 데에 비극이 있는 거예요. 강하지 못해서 비극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약해질 줄 몰라서 비극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배우는 거예요. 하나님 의지하는 것, 그게 여러분들이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데 여러분들의 주머니에서 꺼내서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돼요. 여러분들의 자녀가 아니라도 교회 자체가 우리 모든 자라나는 모든 영혼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깊이 기도해야 돼요. 내가 정말 꿈꾸는 교회는 정말 어린이들이 예배에 감격에 빠지는 교회, 어린이들이 예배에 감격이 있는 교회, 전도사가 목사가 어린이를 인도하다가 펑펑 우는 교회, 말씀이 끝나고 나서 기도할 때 주일마다 어린이들이 어린영혼의 눈에 뜨거운 참회의 눈물이 흐르고 기쁨의 찬양이 가슴속에 메아리치는 교회, 그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의 삶이 교정되고 본성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채워짐 그래서 10대 때에 적어도 10대 초반, 적어도 10대 중반, 아주 늦어도 10대 후반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결단하고 인생의 비전을 발견하는 그런 교회가 제가 꿈꾸는 교회에요. 정말. 그런데 그럴 가능성들을 나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발견해요. 그래서 한 20년 뒤에 교회에서 자라나는 그 어린영혼들이 우리보다 더 훨씬 주님을 사랑하고 훨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건강한 교회를 이끌어가고 주님의 나라의 번영을 위해 참여하는 그런 영혼들이 된다면 얼마나 복되겠어요. 이제 여름도 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더위가 한풀 꺾인 것이 느껴집니다. 가슴에 확 펼쳐졌던 많은 분주한 생각들을 모아 담고 가슴에 깊이 우리의 마음을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주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이 도와달라고 그렇게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1
3.너희 자녀를 회심에 이르게 하라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I.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혹시 우리 말 가운데 “참척(慘慽)”이란 단어를 알고 계시는지 한번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비참할 ‘참’자에다가 애석하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는 ‘척’자가 결합되어 참척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참척이라는 낱말은 부모나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자식이나 손자가 먼저 죽는 것을 가리켜서 참척이라고 합니다. 그래선 안 되지만 부모를 두고 자식이 먼저 이 세상을 여윌 때 그 부모의 마음에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고통이요 형벌입니다. 차라리 자녀보다 자신이 먼저 죽었으면, 그것이 안 되면 두 생명이 결탁해서 죽어 버렸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심방을 가고 많은 성도들을 위로하지만 목회자도 제일 할 말이 없는 그 시점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아이가 병상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목회자인 제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 같은지 그 병상에서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면서 제 마음에 그런 눈물이 흘렀습니다. ‘얘야, 내가 너를 대신해서 여기서 죽어준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마음이 이러니 그 아이의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순조롭게 부모가 먼저 죽으면 산에다 그 시신을 묻고 오지만 부모 앞에 참척을 당하면 그 자식을 일평생 가슴에 묻어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들이 참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 일이고 혹시 자식이 이런 참척을 당하면 그 상가에 부모는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왜냐면 자식이 그렇게 죽는 것 자체가 부모에 대한 막중한 불효이기 때문에 거기에 부모가 나타나서 자기 자식에게 조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집에 있어서도 이미 형벌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도 이런 참척이 여러분 인생 가운데 일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척이 비참하다고 해 봐야 육체가 떠나가는 것, 불과 10년, 20년, 30년의 interval을 두고 나중 일어나야 할 일이 먼저 일어나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영적 참척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부모인데 자식이 먼저 영혼이 죽어버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고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의 가정에서도 이런 영적인 참척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때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영적인 참척을 당한 마음은 육적인 참척을 당한 부모의 마음처럼 그 아이의 영혼 때문에 슬퍼합니까? 영혼으로 주님 앞에 거듭나지 못해 영적인 참척 상태에 있는 그 아이의 영혼을 산에 묻지 않고 여러분들의 가슴에 묻고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II. 본성과 행위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우리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그림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정결하고 정결한 여부를 그의 작은 행동들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A. 행위로 나타나는 성품
우리는 여기에서 성품 본성과 그의 행동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놀라운 통찰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름철이면 우리들이 거미를 보게 됩니다. 뒤꽁무니에서 줄을 뽑아내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자기 집을 훌륭하게 짓는 거미를 봅니다. 그 뱃속에 이미 그렇게 뒤꽁무니를 통해 뽑아져 나오는 실의 성분, 그것들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성은 샘물의 원천과 같아서 거기에서 솟아나는 그것이 계속 흘러 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가 나고 나서 하나님이 노아의 제사를 받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이유였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악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교육을 할 필요가 없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위해서는 따로 훈련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본성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요즘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자녀들은 이미 다 된 인간입니다. 교육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5-6세가 되기 전에 인간의 모든 성품과 앞으로 살아갈 삶의 궤도가 80%이상 완성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 본성 속에서 끊임없이 삶이 흘러나옵니다.
교육학자들은 인간의 성품을 이야기하면서 삼각형의 이론을 제시합니다. 밑바탕이 타고난 본성이고 한편은 환경이고 다른 한편은 교육입니다. 환경과 교육의 여하에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삼각형이 나오지만 밑변 자체는 못 바꾼다고 합니다. 그 성품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행동이 흘러나옵니다. 그 흘러나오는 삶이라고 하는 것,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 안에 있는 어떤 본성이 시간 속에서 공간을 타고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므로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들이 그 아이의 마음속에 한꺼번에 들어가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펼쳐져 나올 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한 번에 아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에게서 선한 삶이 나올 수 없고 선한 사람의 삶은 가끔 넘어지면서도 선한 삶으로 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미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속에 본성이 있어서 본성은 그의 삶에 있어 필연이 되는 것입니다.
B. 자연적 성품과 신령한 성품
인간의 본성, 성품은 자연적 성품과 신령한 성품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자연적 성품
자연적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 주시는 그러한 자연적인 본성을 가리킵니다.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 안에 있는 자연입니다. 자연은 인간이 거스르며 살기가 어렵습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 바람이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 추워지면 물이 차가워지고 더 추워지면 물이 얼고, 열을 가하면 끓고 수증기가 되는 것 이런 모든 인과관계들은 자연 속에 있는 법칙입니다. 자연이라고 하는 자체가 당연한 어떤 법칙에 의해 저항 받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것이 자연입니다. 높은 곳에 있는 물을 낮은 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둘 수는 있지만 낮은 곳으로 흐르고자 하는 그것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사람 속에 있는 자연과 같아서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성품도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배고프면 무엇이 먹고 싶은 욕망은 자연적인 욕망입니다. 그냥 소박하게 먹으면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식생활을 위해서 지나치게 낭비를 하고 방탕을 해야지만 만족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또 다른 도덕적인 어떤 것들이 개입이 되어 타락한 성품이 먹고 마시는 데에 깊이 관여를 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자연적인 성품이 형성되기 때문에 자연적인 성품에 대해서도 선하다 악하다 좋다 나쁘다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자녀들이 있는데 아주 게으르고 자기의 할 의무를 잘 이행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가 교회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 믿어도 자연적인 성품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어도 그런 점에 있어서 자기 의무를 잘 하면 자연적인 성품이 선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품을 부모로부터 타고나기도 하지만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그것들을 잘 돌보고 교육시킬 때 자연적인 성품은 덕스러운 쪽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아이는 이 세상에 나아가서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많이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환영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연적인 성품도 잘 교육시켜서 자연적인 성품이 변해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른을 만나고 이웃을 만나면 아주 친절하게 인사할 줄 알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잘 설득을 하든지 상을 주든지 따끔하게 야단을 치든지 집에서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가 자라서 인사성이 없는 아이가 됩니다. 즉, 결국은 직장에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오해를 받고 감사한 일이 있어도 그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할 줄 몰라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자기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곡해가 되어서 인간 사회의 생활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데 자연적인 본성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돈도 있고 여러 가지 능력도 있어도 사회성이 없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자연적인 성품이 잘 선하게 발달해서 돈이 좀 부족하고 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연적인 성품을 올바르게 교육을 시키는 것도 부모의 책임이고 사회의 책임이고 특별히 학교의 책임입니다. 올바른 사람들, 진짜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학교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밥이나 벌어먹기 위해 학교 선생님이 되어선 안 됩니다. 모두 사회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에게는 엄격한 도덕적인 기준이 요구되고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사는 덕 있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교육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연적인 성품들이 아이들이 잘 자라게 되는 것, 이것이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성품이 발달하는 한 가지 요소입니다. 이것과 함께 이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성품이 있습니다.
2. 신령한 성품
도덕적 성품 즉, 신령한 성품입니다. 자연적인 성품을 교육을 통해 잘 함양하게 되면 이웃을 향해 덕스러운 사람이 되고 승리한 뒤에도 자기에게 진 사람을 짓밟지 않는 아량을 갖게 됩니다. 자연적인 성품을 잘 갖추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많이 벌수도 있고 공부를 잘 해서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적인 성품을 그렇게 획득하게 된 모든 자원들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그 올바른 길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신령한 성품의 핵심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창조의 목적대로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의 갈망을 불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신령한 성품은 그가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 하나님께 끊임없이 붙어있고 그 분을 사랑하려고 하고 자연적인 성품을 통해서 획득된 자원들과 좋은 특징들은 바로 그렇게 신령한 성품이 인도하는 대로 사용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베푸는 도구가 되어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복된 삶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칭찬을 받고 대접을 받으면서 주님의 영광을 발휘하고 사는 거기에 우리의 자식들의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습니까?
저는 TV에서 ‘강남 엄마 따라잡기’라는 드라마를 강남에 산적은 있지만 강남 아빠가 되어 본적이 없어 무엇인가 하고 몇 번 보았습니다. 시시합니다. 처음에는 신선했습니다. ‘아 저렇게 요즘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올인을 하는구나.’ 솔직히 말해서 지극히 세속적인 부모들인데 난 참 마음에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저렇게 자식들을 위해 올인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부가 대판거리 싸움을 하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 이혼을 하는데 자기 아이가 대학 시험을 볼 때까지는 원수 같아도 살아야 되겠다고 합니다. 정말 대답합니다. 심방을 하면서 강남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은 쪼가리가 드라마와 연결이 되면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마치 왔다 갔다 하며 설교를 들었는데 교리반을 하면 정리 되듯이 이것이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강남 엄마들의 서열은 자기 자식들의 등수의 서열 그대로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며 허무한 느낌이 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미친 듯이 과외를 시키고, 초등학교 아이에게 과외를 7개시키고 많이 하는 아이는 11개까지 시킨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아이 교육비가 350~380만원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일류대 보내기 프로그램을 짜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한 사람들이 모두 떨어지는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교육에 있어서는 한심할 정도입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기회가 닿아 교육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지방에 내려가는데 교육대학교 학장, 교육부의 고위급 인사들이 나왔습니다. 한 30분 동안 열변을 토하면서 교육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가서 제가 15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장관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 아이가 정말 올바르게 사는 것에 대해 가르쳐줍니까? 일주일 동안 만나는 열 명이 넘는 수많은 선생님들 중에 누가 그것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로 태어납니다. 이 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수의 감정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처음에는 아직 어리고 잘 모르니까 마치 쥐하고 같은 방에서 태어난 고양이처럼 그렇게 자기의 적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대적감은 구체화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원수로 대적하면서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어떤 기대를 갖는다면 도둑놈입니다. 부모도 명색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서 그 자식이 영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신령한 성품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그 부모 자체가 아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아는 은퇴하신 선교사 부부가 있습니다. 선교사니까 수없이 돌아다니고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두 잘 되었습니다. 후배들이 물었습니다. “사모님, 그렇게 고단하게 사역지를 옮겨 다니고 자녀들 교육도 못 시켰는데 어떻게 자제분들이 훌륭하게 되었습니까?” 사모님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없어. 나는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사람이야. 아무것도 못 해주었어. 그런데 한 가지는 항상 가르쳐 주었어.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느니라. 너희가 행복하기 위해선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 너희의 사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사신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품들은 마음이 깊이 깨뜨려지는 일 없이도 변해갑니다. 즉, 아이가 천성을 게으른데 부지런한 부모 밑에서 계속 생활하다보면 자기가 게으른 것에 대해 뼈 절이게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이가 천성은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하는 성품인데 부모가 철저하게 정직하게 교육을 시키고 학교에 가고 사회에 나갔는데 자기처럼 부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없으면 뼈 절이게 회개하지 않아도 정직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령한 성품은 그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좋아지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나빠집니다. 그래서 회심이 필요하게 됩니다.
III. 회심의 길
회심은 신학적으로 자기의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두 가지가 회심입니다. 회심은 한자어인데 후회한다는 悔자와 마음 心자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 회는 돌이킬 ‘回’字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이전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던 그 마음에서 돌이켜 서는 것을 가리킨다.
회심을 한다고 해서 이 아이가 갑자기 공부를 잘 하게 되거나 예술에 대한 감각이 갑자기 뛰어나지거나 회심을 한다고 해서 이 아이가 아주 놀라운 어떤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그렇게 보이는 적도 있는데 그것은 회심 자체 안에 있는 성격 때문이 아니라 회심이 바른 삶의 태도를 인도하고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근심과 걱정 욕망 이런 것들로 찢어져 있으면 신앙생활의 진전이 없습니다. 아이들도 매일 책상 앞에 앉아있고 도서관 간다고 거짓말해도 가서 도서관 책상에 앉아 다른 생각하고 앉아 있으면 매일 가방 메고 돌아다녀도 공부엔 아무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은혜를 받아요. 마음이 한 마음이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위에 공부해야 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아직까지는 게을러서 공부를 안 해서 발휘가 안 되었는데 이 아이 속에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인자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회심했기 때문에 아주 놀라운 학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가 대학에 있을 때 조교로 데리고 있었던 자매가 있었습니다.20년 전 이야기입니다.“목사님 우리 동생이 연세대 신학과를 가겠다고 하는데 학교에서는 서울대 들어갈 수 있는데 아깝다고 한다고 해요.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영문과 들어갈 수 있니?” “영문과는 달랑달랑 해요.” “독문과 들어가라고 해라.” “네 동생 원래 공부 잘 했니?” “그렇지 않아요. 중3때까지 반에서 중간도 못했어요.” 그런데 고1때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을 깊이 만난 후에 공부해야 할 목표가 생겼어요. 공부를 열심히 신학을 해서 선교사가 되어 사람들을 돕겠다고 합니다. 기도하며 공부를 하니 성적이 중간밖에 안 되었는데 3학년이 될 때는 목포에서 13-4명 중에 꼽을 정도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과외한 적 없고 집안에서 특별히 지원해 준 것도 없고 혼자 공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애도 회심하면 그렇게 될 거라고 하는데 본래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 그렇게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우리 집안이 얼마나 가난 했는지 압니까? 그래도 우리 집안이 밥 먹고 살게 된 것은 내가 예수님 믿고 나서부터 입니다.’ 예수님 믿으니까 사업에 복을 주셨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죠? 이 목사님의 간증은 틀립니다. 예수 믿었어도 돈 버는 것이 옛날보다 많지는 않았답니다. 예전에는 음주, 흡연에 돈을 쓰니까 거기에 돈이 무제한으로 들어가고 그것 때문에 집안에서 싸우고 속상하니까 부인이 병으로 눕고 병원에 돈 버리는 것으로 해서 가계가 기울었는데 예수 믿고 단정한 살게 되니까 가정이 화목하고 부인이 건강해지고 술 먹지 않고 화류계 여성들에게 주는 돈으로 아이들 교육을 시키고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고 그러면서 집안에서 밥 먹고 살게 되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바뀌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연적인 본성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 깊이 좌절한 나머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면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이 아주 놀랍게 바꿔놓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주정뱅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허탄한데 빠져서 가정도 돌보지 않고 바람이 피고 그러면서 식구들을 괴롭게 하던 사람들 있지요? 이렇게 단정한 성도들이 되었잖아요. 철학을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고시공부 하듯 성경을 파서 그렇게 되었어요? 아니잖아요. 주님을 믿는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한 신앙과 회개 속에서 새로운 날개를 단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회심입니다.
회심이 둘로 나뉩니다. 좁은 의미의 회심과 넓은 의미의 회심입니다. 좁은 의미의 회심 : 구원받기 전에 한번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구원을 못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분명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믿음의 경험 즉, 회심의 경험 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교회에 나오긴 했지만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죄 된 본성이 나의 가슴에 뼈 속 깊이 사무쳐서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이 없다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나의 죄인 됨에 대해서 깊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해 본적도 없습니다. 이러면서 마음이 녹아진 적도 없다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먼저 회심이 필요합니다. 회심 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보며 가슴 아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생에 단 한번만 일어납니다.
넓은 의미의 회심이 있습니다. 아주 거의 똑같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다시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도 넓은 의미의 회심이라고 합니다. 회심이라기보다는 회심의 반복이라고 봅니다. 이미 일어난 회심인데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니까 처음 회심의 감격이 다시 살아납니다. 모든 인간의 두 가지 숙제는 첫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께 돌아오는 회심이고 두 번째는 그 회심이 자꾸 식어지니까 그 회심의 은혜를 마음속에서 보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참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 터 위에 좋은 부모를 만나서 좋은 환경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으면서 그렇게 자연적인 성품도 올바르게 세워져 간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기에 아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오늘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지 생각해보세요. 결국은 두 가지입니다.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도덕적 품성과 함께 인간 사회에서 도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연적인 성품이 함께 꽃피울 때 그 사람이 모든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사람들로 하여금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 교육의 위기는 이 두 가지가 다 안 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품성도 꽝입니다. 어린아이라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라.’하고 어른이 타이르는데 돌 집어 던지고 발길질 합니다.그 아이의 본성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모가 발견하고 아이니까 다 그렇지 그러면 안 되고 그것을 깊이 염려하면서 올바른 품성으로 아이를 양육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그 아이가 자라면서 변화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런 자연적인 성품도 망가진 채 방치가 됩니다. 아이가 어떻게 태도를 갖든지 부모는 아이가 공부 잘하고 경쟁사회에서 이기는 것들로만 아이를 휘몹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전체적으로 망가진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행복할 가능성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인 여러분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될 것입니까? 이런 회심의 놀라운 역사는 인간이 단추를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 오늘 8시에 모두 거듭나는 시간이다.’하고 종을 친다고 회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이 3가지입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분들은 자녀가 회심하지 않았을 때 그것을 교회에 슬쩍 밀어버립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좋은 부모인 것처럼 보입니다. 찾아가서 선생님에게 이 아이가 회심하지 못하였으니까 도와달라고 하고 심지어는 담임 목사에게 와서 자기 자식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자녀의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많으면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할 뿐 자신은 별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회심은 일차적으로 교회에 위탁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위탁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생사를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아 세례 때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이 아이의 영혼의 구원을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우리의 거룩한 신앙의 도리를 이 아이에게 가르치기로 약속합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생 져야 할 약속입니다. 그런데 안 해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자녀를 둔 여러분, 신앙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이지요? 남편 사업에 위기가 오면 기도원 한 번 안 올라갔다온 사람이 누가 있나요. 물질적으로 궁핍하거나 가족이 병들면 2-3일 금식기도 안 해 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금식해 보셨습니까? 울어 보셨습니까? 날짜를 정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셨습니까?
제 나이가 50이 훌쩍 넘었습니다. 몇 달 전에 우리 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던 동네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 강가에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손자 볼 나이가 되었는데 그 어린 시절 40-50년 가깝게 지나 버린 시절을 놓고 왜 그렇게 목 놓아 울었을까? 난 지금 주님을 믿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동네에 가니까 가슴에 밀려오는 슬픔 때문에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저 유치원 다녔는데, 그것도 교회에서 한 유치원이었는데, 그때 내 마음이 비교적 깨끗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좋은 자연 속에 뛰 놀 때 우리 부모님들이 갈등하지 않고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었다면, 결국 내가 일평생 사랑하며 살아야 할 분이 우리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그 분을 경외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면 그렇게 후회가 되는 추루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죄악과 정욕, 무지와 어둠, 갈등과 불안 속에서 흘려보낸 그 젊고 수많은 날들을 낭비하지 않고 올곧은 신앙으로 주님을 붙들고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서 그 강가에 주저앉아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의 어린 아이들 중에는 한 3-40년 후에 나처럼 이 강가에서 우는 아이들이 없어야 될 텐데 라고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그 모니카가 방탕한 자기 자식을 위해서 얼마나 목 놓아 울며 기도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당시 유명한 목회자를 찾아가서 자기 아들을 한번만 만나서 뭐든지 좋은 이야기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회자도 매정했습니다. ‘다 쓸데없오.’나도 다 겪어보았는데 그맘때는 그러고 돌아다닐 때에는 마음이 교만해져서 좋은 이야기해도 귓전에도 들리지 않는 법이니 마음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립시다. 난 당신 아들 안 만나’라고 했을 때 모니카가 그 예배당에 엎드려져서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했습니다. 그때 이 목회자가 떠나면서 한마디 남긴 말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에미가 저렇게 목 놓아 우는데 눈물의 자식이 망할 리가 있겠오?” 거기에서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 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후에 자기 아들이 깊이 회심하고 신자가 되었을 때 자기 아들의 회심을 보고 한 2년 정도 살다가 56살에 죽었습니다. 그때에 어거스틴의 나이 33살이었습니다. 모니카가 그랬습니다.‘내가 왜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는 네가 예수 믿는 사람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다 들어주셨는데 이제 난 이 세상에 살 필요가 없다. 난 내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의 회심을 대견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의 육체의 부모일 뿐 아니라 영혼의 부모입니다. 그래서 깊이 기도합니다. 자기 자식의 영혼의 곤고함이 나 자신의 곤고함인 것처럼, 나 먼저 죽어 참척 상태에 있는 내 자식의 영혼의 형벌이 내 형벌인 것처럼 그렇게 울어야 합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죽어 온 자식의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부모들 보았지요? 내가 남인데도 불쑥 내가 저 사람 대신해서 거기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자기 속으로 낳은 새끼의 부모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백번도 죽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하지만 그 자식을 위해서 ‘사람의 힘으론 안 돼.주님이 하실 거야.’ 그러면서 깊이 기도를 하면 신앙인데, 그러면서 마음으로 깊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운명에 맡기는 것입니다. 운명에 맡기는 것은 사랑 없음입니다. 항상 여건이 나쁘고 아이의 심령이 강퍅해서 안 된다고 하면 안 됩니다.내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전도사 때 일인데 한동안 가슴에 깊은 상처가 되었었습니다. 아이가 회심을 하지 않아요. 나중엔 결국 회심을 했습니다만 부모가 와서 신경질을 내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결론은 ‘아이들을 맡겨주었으면 신앙이 들어가게 해야지 목회를 그 따위로 하는냐’ 말은 그렇게 험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요지는 그것이었습니다. 무지한 부모입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습니다. 목회자 때문에 회심 안하는 것이 아니라 ‘너나 잘 하라구’ 말입니다. 정말 자기 자식의 영혼을 끌어안고 가슴에 형벌을 받는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회심하지 않은 것을 누구를 찾아가서 왜 그렇게 못해주느냐고 따지겠습니까?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예배에 목회자들이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부모와 함께 책임을 진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직업은 모두 육체를 위한 직업입니다. 영혼을 위한 직업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목회입니다.목회자입니다.나머지는 다 육체를 위한 직업들입니다. 육체를 위한 직업은 오만가지가 넘지만 영혼을 위한 직업은 딱 하나 목회입니다.
목회자인 여러분들에게 영혼을 향한 눈물이 없다면 사실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눈에는 변화되지 않은 영혼들이 그 가슴 속에 가시가 되어야 합니다. 끌어 안을수록 가슴 아픈 가시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목회가 무어냐고 내게 묻는다면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 때문에 눈물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영국의 킨더민스터의 리차드 백스터 목사는 자기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기회 있는 대로 주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게으르지 않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네가 돌보던 영혼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때 나는 말할 것입니다. 힘닿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좋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끝없이 가르쳐주었지만 그들은 마지막까지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목회자인 내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솟을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곤궁한 영혼을 보면서 가슴이 에이는 마음, 부모조차도 그 새끼의 영혼을 위해서 울어주지 않을 때 목회자는 입술을 깨물며 그 영혼을 위해서 가슴을 쥐어뜯는 슬픔의 세계를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1부 예배 시간에도 내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영혼을 위해 흐르는 눈물이 우리에게 없다면 다른 것 다 잘해도 삯군입니다. 목회자만 삯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삯군 부모가 있습니다. 자기의 행복에 눈이 멀어서 자기 새끼들의 영혼, 그의 삶은 어떻게 되든지 아랑곳하지 않는 막되 먹은 부모들이 있습니다.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위해서.
여러분 가운데 자기 자녀의 회심을 목숨과 바꿀 사람이 있습니까? 내 새끼의 회심을 볼 수 있다면 하나님, 저 충분히 살았습니다. 이 아이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 빛을 나누어줄 수 있는 주님의 도구가 된다면, 이 아이 일생 흘러가는 그곳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이 땅이 고쳐지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죽어도 저 충분합니다. 그런 고백이 부모인 여러분들의 마음에 여러분들의 자녀를 향해 살아있습니까?
두 번째는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그 아이를 가르쳐야합니다. 우리의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않을 씨 세세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접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열린 교회 중고등부가 안 되었습니다.성도들은 그래도 모이는데 중고등부 아이들은 열 댓 명밖에 안 모이는 것입니다. 차돌 같습니다. 회심을 하지 않습니다. 하다가하다가 나중에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중고등부 전도사를 불러 ‘내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가보겠다. 내가 한 번 설교를 해보마.’ 15명도 안 모일 때였으니까 가 봐야 10명 정도 갈 텐데 그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수련회를 가겠습니까? ‘자네 친구들 교회 중에서 독자적으로 수련회하기 어려운 교회들에게 연락을 해서 김남준 목사가 강사로 간다고 해라.’제자들도 많으니까 크고 작은 교회에서 200명 정도 모였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가평에 있는 어느 기도원에 가서 집회를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집회 오라고 해도 안 가는데 일부러 집회를 하겠다고 강사를 자청해서 모은 것은 80%이상의 생각이 우리 교회에 다니는 죽어도 회심 안하는 아이들, 회심 안 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 같았습니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열심히 기도하고 김준성 목사님이 전도사 때였는데 정말 고생 많이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거기서 7명의 아이들이 회심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중고등부의 모태가 된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회심을 하고 나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가 무엇인지 아세요? 9시에 중고등부 예배를 드린 후에 누가 그렇게 하라는 사람이 없는데 장년 예배에 모두 올라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한없이 주일 설교 예배에 의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시집가고 취직하고 대학 졸업하고 그랬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죄인의 희망은 복음이 선포되는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들려주든지 누구를 들려주든지. 우리 큰 아이가 5학년이 되었는데도 회심이 없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회심이 없는 증거들은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집사람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아이가 우리교회 주일학교에서는 회심을 안 하는데 내가 들으니까 어린이 복음전도협회 강갑중 목사님이 정말 훌륭하시더라. 내가 직접 만났는데 그렇게 말씀을 잘 전하시고 영혼을 사랑한다는데 그분이 하는 캠프가 있다고 하니 보내고 기도합시다.6학년 때 아이를 보냈습니다. 부부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교회가 아니고 선교단체니까 급히 선생들을 조직해서 반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아들을 맡은 그 반 여자선생님이 내 책의 열렬한 독자였습니다. 이 선생님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이 아이의 회심을 위해서 일주일 동안 기도해 주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걸어가는 길이 거기에서 정해졌습니다. 물론 미끄러지고 그럴 때도 있지만 여러분도 마찬가지니까 정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여선생님이 우리를 만났습니다. 이번 여름 어린이 캠프는 이 아이의 캠프였습니다. 깊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역사는 복음이 선포되는 그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이라면 나는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회심하지 않았으면 목회자와 잘 의논해서 들어보고 우리 자식이 여기 와서 회심할 만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강남 엄마들이 차를 사서 그 아이들 과외 싣고 다니는 것, 100분의 일만 하면 회심하고 남습니다.
세 번째는 아이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움직여주고 속상한 것을 내색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오래참고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가 자라서도 아이가 부모인 우리를 생각하면서도 우리 엄마의 최고의 관심사는 내가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공부도 잘하기를 바라고 그러지만 그것보다도 우리 엄마의 최고의 소원은 내가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들의 영혼을 보며 가슴을 졸여야 합니다. 깊이 사랑하세요.
오늘 아침에도 마당에서 묵상을 하면서 우리의 자식들이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것 누리고 최고의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 사랑하는 우리 엄마, 하나님 섬기는 우리 아빠 만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었어.’라고 말하게 해서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도 저처럼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여러분 자식 중에서 없어야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우리의 자식을 버려두지 않습니다. 마음을 모두 모아서 더 늙기 전에 하나님이 그 마음을 녹여주시도록 온 마음을 다해서 아버지 앞에 매달리세요. 눈물의 자식이 망하겠습니까?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1
4.아이와 슬피 울며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채색 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눅 23:28).
이 세상에 누구인들 불행한 일을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그 불행한 많은 일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부모를 두고 자녀가 죽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고 형들이 잘 있는지 알아 보러 가는 요셉을 형들이 시기하여 웅덩이에 던져 버리고 옷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애굽의 상인에게 팔아 버리고, 상인에게 팔아서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고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그 아이의 옷에 염소의 피를 묻혀서 그래서 그것을 부모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이 혹시 아버지 아들의 옷입니까? 우리가 주웠습니다. 그때 채색 옷은 아무나 입는 것이 아닌 아주 귀한 옷 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식들이 참 나빴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비통하게 슬피 우는 장면이 여기에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자식의 죽음은 아비에게 큰 슬픔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도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에 그 죽음의 소식으로 말미암는 아비의 마음의 고통은 사랑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체를 잃어버린 이 자식의 죽음은 그 소식을 듣고 이 아비가 그렇게 애통하고 통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신앙도 별로 없는 상황이었고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식으로 인해서 그렇게 뼈저리게 슬퍼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 마음이 어떻게 야곱만의 마음이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 깊은 슬픔에 잠긴 부모들을 많이 봅니다. 부모가 죽으면 가슴속에 남았다 사라지고 간헐적으로 부모가 떠오르지만 부모가 자식을 여의고 나면 그 자식은 항상 자기 안에 살아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이런 마음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회심하지 못해서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는 영적인 침체 그 아래에 살았기에 우리들이 얼마나 더 많이 울어야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원했고 진심으로 원하던 바가 아니오 또 생각으로 그것을 바래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 영혼의 참다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영혼을 그렇게 불쌍히 여기며 안타까워 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사랑을 받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런 사랑을 받는 것이고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이며 다행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부모이면 자식을 다 사랑하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을 특별히 많이 사랑하는 때가 있고 덜 사랑하는 때가 있고 자식 중에도 더 마음이 끌려 아린 자식이 있고 덜한 자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육정으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패성이 배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자식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에, 친척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하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야 할 사랑은 뭐냐면 그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선행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말을 덧 붙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한 번의 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캄보디아 사람들 사랑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선을 베풀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럴 경우에는 “인연이 있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다.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먼저 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악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똑같은 사상이 사도바울의 말 속에 나오지 않습니까? “네 친족 특히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한자이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되 믿음의 형제들에게 특별히 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정으로는 자녀를 온전히 골고루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육정으로는 그 영혼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자연적인 본성에만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자기 자식이 정말 싫을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래서 오죽하면 그럽니다. 원수다. 그럴 때 있죠? 그때 무엇이 필요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자식을 온전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영혼과 육체와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으로 보아야지만 영혼의 가치가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육정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해서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지위, 이용가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할 능력 이런 것들을 보면서 사람을 차별 하지 않으십니다. 그 자식에게 그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끼고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우리가 자녀들을 깊이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면 그 영혼에 대한 끊임없는 안타까움과 눈물 그리고 기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한 소망 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자기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말 안 듣는다고, 섭섭하게 했다고 마음을 접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러면 기도가 안 나옵니다. 형식적인 기도이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것에는 자녀를 위해서 그렇게 애달픈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세상의 마지막 사람입니다. 자기의 자녀를 사랑할 마지막 사람입니다. 세상이 다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포기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 아이가 태어난 것이 아름다워서 이 세상에 만든 아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아이를 마음 깊이 끌어안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충고하면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많이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고 하면 그 아이들이 시집 장가가서 자기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표현 합니다. 전해지지 않습니다. 안 전해 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육적인 부모의 마음도 그렇다면 그의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 받은 우리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보여 주는 사실은 뭐냐면 사랑은 항상 슬픔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슬픔은 짝을 이루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랑은 기쁨의 감정인데 사랑의 경험 속에서 인간의 영혼 안에 일어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뻐함, 소중하게 여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녀를 사랑하게 되면 많은 슬픔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자녀가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에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기쁨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어 당신에게로 참여하여 돌아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답게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아름답고 예쁜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는 사랑과 즐거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혼이 항상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망가져도 가슴이 슬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슬픔입니다. 마음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깊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가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잘못되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돌아갔는데도 아파하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좋을 때 항상 기뻐하고 좋아 하는 것은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되었을 때 슬퍼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야곱은 아들 요셉을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요셉을 그렇게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잃어 버릴 수 있는, 사람들 속에서 잃어버릴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입니다.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남겨 놓고 그 사람 없이 사는 외로움과 고통 보다는 그를 남겨 놓고 대신 내가 죽는 것이 훨씬 편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을 때 그가 잃어버린 것은 요셉의 생명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준 모든 물질을 잃어 버렸다고 할지라도 아마 이렇게 슬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짐승에게 한쪽 팔다리를 물어뜯기고 장애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슬피 울고 통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관계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자녀들을 향해 보면서 얼마나 많이 육신적인 것에 쏠려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자녀들이 자기의 기대를 따라서 살아 주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속에 미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저도 한때는 참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깨뜨리셨습니다. 아이들이 못된 것이 아니라 부모인 내가 덜 익은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관계인데 이것들이 자식이 이러이러한 것을 안 하고 요건을 못 갖추기 때문에 나는 사랑할 수 없다 저 자식이 아니라 다른 자식이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까치발을 들고 이웃집 자식 아무리 들여다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에게 주신 나의 생명의 씨앗인데……. 그러니까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자식이 영적인 침체 가운데 있다 그래서 그 생명이 없다 그럴 때에 눈물이 안 나오면 아이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 부모인 우리의 마음이 망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침체 상태에 있는 영혼도 불쌍하지만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더 불쌍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면 우리가 이 세상에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을 팔게 되면 정말 우리의 인생에서 뼈저리게 중요한 이런 것들을 모두 다 하찮은 것처럼 내 팽개치고 살아가는데 우리의 인생을 살면 이것이 모두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회심을 안 하고 제멋대로 살고 아직은 어려서 우리가 말을 하고 강하게 잔소리를 하고 챙기면 말을 듣지만 이제 우리는 점점 늙고 자녀들은 점점 자라서 자원도 소유하고 우리가 노후라도 위탁하려면 눈치를 보아야 하는 때가 되면 이제 우리의 손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에 부메랑이 되어서 다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그런 신앙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자식을 향한 슬픔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우리는 마음에 그 자녀를 품고 그 자녀를 지켜 주는 것입니다. 흔히 여러분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얼른 시집이나 보내 버려야지 아니면 장가가서 뚝 떼어 내면 같이 안 살아, 지긋지긋해 합니다. 그런데 떼어 내어 집니까? 이제 시집가서 배가 남산만 해지면 제일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 누구 입니까? 그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걱정하는 사람이 누구 입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시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생이 시련입니다. 그래도 그 시련을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감당하면 그래서 그 모든 시련을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하게 세우는 그런 기회로 사용해서 자신의 사랑 없음을 발견하고 주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그런 시련도 주시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자녀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입니다. 정말 여러분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마음이 하나님께 쏠려 있고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있다면 자녀들이 아직 회심 안 한 것이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돈이 있겠다, 집이 있겠다, 남편이 가정을 잘 돌보고 자기 사랑하겠다, 아내가 남편 밖에 모르는 해바라기로 살겠다 무엇이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한 가지 숙제가 남았습니다. 우리 자식이 회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이런 설교만 들으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교회에서 목사인데, 내가 교회에서 장로인데, 내가 권사인데,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면 내가 이름이 나는데 그런데 수시로 외침이 있습니다. “네 자식은 회심 했냐?” 그때마다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최근에 제가 10년 전에 쓴 책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는 자신감이 있고 주위에서 나아가 말할 때는 교만해 지지만 사역의 현장에 들어와서 변화되지 않는 나의 양떼를 볼 때 나는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온전해 지고자 하는 부모에게는 그것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기도한다고 해서 내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자식의 마음을 바꾸시기 전에 부모의 마음을 먼저 바꾸어 주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내노라 할 만하고 흠 잡힐 것이 없는 사람인데 자기 자식을 끌어안고 그렇게 고민하면서 인간적으로 볼 때는 좀 교만해도 되는 사람인데 교만해 질수 없는 그러면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야곱이 덧붙입니다. “나는 내 아들과 함께 음부에 내려가리라” 이 음부는 뭐냐면 생명의 기운이 하나도 없는 말하자면 지옥의 한 모형입니다. 자기의 심적 상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면서 야곱은 나는 아들과 함께 음부로 내려가리라 아무 희망이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후에 이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꿈인지 생시인지 그 아들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이 아버지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죽을 줄만 알았던 너를 만났으니 이제는 내가 여한이 없다.” 그것이 아비의 고백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죽었다고 치부 했는데 가슴 속에서 요셉을 향한 그 사랑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왔을 때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를 위해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그의 미래를 위해서 적금을 부어 주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될 수록 이 세상은 무정한 세상이 되어서 자식이 아비를 맛보고 그리고 부모가 그 자식을 귀히 여기지 않는 그런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아픈 시대……. 이제는 자기의 행복과 고통 이외에는 안중에도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자신도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해 가는 것이지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내 아이의 영혼을 위해서 저렇게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아이 안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부모인 여러분 안에 문제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공부를 못해도 또 내 자식이 내가 봐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아도, 명민하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많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이런 일을 잘하고 저런 일을 잘하고 이렇게 내 마음에 들고 이렇게 소중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네가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역자들이 자주 이야기를 하는데 똑 같은 이야기 입니다. 아무리 회심하라고 은혜의 불을 심어 주어도 집안이 겨울 벌판입니다. 그 불씨를 가져가도 집안에서 계속 피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만날 싸우고 자식 보는 앞에서 이혼 하겠다고 소리 버럭버럭 지르고 그리고 아이가 마음을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사랑…….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이 주는 유익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깊이, 너무나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에게서 자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자식을 사랑하라.” 깊이 사랑하면 그 아이 속에 있는 고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시간을 뛰어 넘어서 그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아들이 중학교 1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 올 때쯤 깊이 제2의 회심을 하게 됩니다. 자식에 대해서 회심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항상 누가 1등 하라고 했냐? 2등이나 3등만 하라는데 그것도 못하고……. 그런데 깊이 깨뜨려 졌습니다. 그리고 막 눈물이 나오고 밀려오는데 그 아이가 옛날에 나한테 무시당하면서 그 상처 받고 아팠을 모든 것들이 시간을 초월해서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항상 우리 아들을 대하면 빚진 마음이 그때 빚진 마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과 생명을 가르치는 목사로서, 목사이기 이전에 아빠로서 참 나빴다. 참 잘못했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 기대가 무엇인데, 네가 하나님이냐 네 기대가 무엇인데……. 그 기대에 따라서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면 그것이 네 사랑이지 하나님의 사랑이냐?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자식들을 사랑하려고 했지만 나는 내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 원수 이름 모름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세끼를 사랑하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 하구나! 내 사랑으로 사랑하면 결국은 내 세끼를 굳게 만드는 구나! 삐뚤어지게 만드는 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마 전에 휴가를 나와서 우리 아들이 그랬습니다. “아빠 많이 변하셨어요.” 그때 몸도 많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 어떻게 변했니?” “예전에는 눈이 항상 불타고 목표 하나 이외에는 아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가까이 가기가 너무 힘들고 평생해도 저 사람처럼 못 할 걸 하는 이런 생각 밖에는 안 들었어요.” “그럼 요즘은 어떠니?” “요즘의 눈빛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지 그런 눈빛이에요” 그랬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나는 이해 못하는 사람이 힘들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목표가 있는데 어떻게 힘이 듭니까? 할일이 있는데 어떻게 잠이 옵니까? 저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이것은 해야 한다 하고 정신을 모으면 잠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틀 48시간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결심을 하면 힘이 솟았습니다. 내가 이해 못하는 사람이 허리가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허리가 왜 아픕니까? 또 배가 왜 나옵니까? 머리가 왜 벗어질까? 얼굴에 개기름은 왜 흐르나? 그런 것들이 내가 이해 안 가는 것인데 다 해보지 않았습니까? 허리 아픈 사람에게 “맨날 들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게 하고 저것 꾀병이지..” 요즘 제가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겸손해져 갑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식도 자기의 육정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면 배신당하고 많이 사랑했는데 그 사람이 그 아이 망치고 그 사랑이 오히려 상처가 되어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합니다. 그래서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샘물과 같고 기도는 그 옹달샘에서 넘치면 흘러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부모가 자기 자식을 향해서 얼마나 냉혹해 질수 있는 가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정말 지금도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내가 돌이 켰으니까 그렇지 만약에 안 돌이켰으면 그 아이들을 얼마나 많이 망쳐 놓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이 그 답 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삶인 생명과 사랑을 전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제일 먼저 그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내 혈육 그리고 내 자녀 그리고 내 가족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회심 집회까지 5일 남았는데 하나님 앞에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낙심하지 말고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면 금식도 하고 저녁이고 아침이고 교회의 프로그램만을 너무 믿지 말고 혼자 조용히 시간을 내어서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아이에게 편지도 쓰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하는 편지는 마음을 움직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 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만나 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1
5.회심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의 성품이 명확하게 계시가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아주 드문 행동을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맹세는 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변할 가능성을 염려 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변할 가능성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이런 맹세를 하십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맹세할 때에는 우리가 개에게 맹세를 하거나 나무에게 맹세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맹세할 때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아주 귀한 것 아니면 자기보다 훨씬 높은 관계에 있는 자기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의 명예를 걸고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보다 높은 것을 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걸어서 맹세 하시는 것이 최고의 맹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이하게 나의 삶을 두고 맹세 하노니 했는데 무슨 뜻 입니까? 직역을 하면 나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나니 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그리고 이 약속을 내가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생명이 없어지겠다. 사실 하나님에게 이런 표현을 쓴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말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준으로 내려와서 하나님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당신 자신의 생명을 걸고 죽으실 수 없는 그 분이 생명을 걸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이 말이 거짓말이라면 하나님 자신이 죽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내용이니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말씀이겠습니까?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렇게 강조하실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이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뽑아 버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하고 하나님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맹세를 하시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율법의 시대를 살면서 율법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그릇되게 살 때 준엄하게 심판하시는 광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선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을 입지만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징벌하시기를 좋아 하신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못 알았다. 나 여호와는 그렇지 않다.” 그러면 악인을 그렇게 멸망시키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구원을 재촉하고 경건한 백성들에게 신앙을 촉진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기뻐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사람이 보기에는 개개인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개개인인 동시에 모두가 이스라엘의 한 공동체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인은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징벌하시지만 목적 자체가 그 하나님 앞에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돌이키는 것을 나 여호와는 기뻐하노라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들이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악한 길을 가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 받아 삶의 희망이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그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아니 하시고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하나님 백성들의 자녀들은 어떻겠는가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들로서 어느 정도는 우리 자식들에 대해서 낙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낙심도 종류가 여러 가지 이겠지만 특별히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도 변화되기가 굉장히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는 정말 더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본 부모들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하나님 없이 회심 하지 않고 살았는데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도대체 그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 마음 안에 있는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인데 그 마음을 돌려서 다시 하나님께로 세상을 향하던 내 마음을 돌려서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 한 뼘이 되겠습니까? 두 뼘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수십 년의 세월을 흘러오면서 너무너무 어려웠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번 금요일 날 여러분들이 아이들이 950명 나왔다고 하니까 어른들도 많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변화 되는 것을 보면서 기대가 됩니다. 내가 정말 이 아이들을 위해서 온전히 쏟아 부어서 잘 기르면 20년 후에는 저 아이들에 의해 이끌어지는 이 교회가 우리 때보다 훨씬 낫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그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투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교역자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제발 세속적인 방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지 말자. 그 많은 상품, 먹을 것, 풍선, 놀이기구, 경품 어느 교회에서는 노트북까지 준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고 무슨 연예인들을 불러 오고 나는 정말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들 마음속에 주는 그 기쁨과 행복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아까 뉴스에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움직인 것입니다. 내가 뭘 사랑했나? 게임에 빠지고 컴퓨터에 빠지고 자기를 사랑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 입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 나머지는 모두 시시해지는 것입니다. 시시해지지 않는 놈을 못하게 떼어 놓으려고 하니까 그것이 떨어지겠습니까? 여러분도 그것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주님 만나고 은혜 받았다고 해도 계 좋아 하는 사람들 계 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화투 좋아 하는 사람들도 못 끊습니다. 그래서 계속 화투 치면서 주여 맞으면 아멘 할렐루야. 제가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안 끊어지는데 회심은 그것을 돌려놓은 아주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조금의 가식이 아니라 이제는 그 아이들이 은혜를 받았으니까 거꾸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어른 회심 집회를 하고 거기서 아이들이 기도회를 하면 되겠다. 우리 엄마 주님 만나도록 도와 달라고... 우리 아빠 회심하고 하나님 사랑 알도록 도와 달라고... 여러분들은 지금 웃고 있지만 누구의 기도가 더 응답될 것 같습니까? 목회자가 닦달을 해서 억지로 나와 자녀의 구원을 위해 비는 것과 따끈따끈하게 회심한 그 아이들이 예수님 제대로 믿지 않는 엄마 아빠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며 회심을 위해서 대신 기도해 줄 때 어느 기도가 주님의 시선을 먼저 끌 것 같습니까? 정말입니다. 여러분이 볼 때 저 아이들이 존경스러울 정도로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음세대는 우리세대 보다 훨씬 더 타락하고 어두운 시대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같이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놀랍습니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13년 만인데 내가 왜 진작부터 이렇게 헌신하지 않았을까? 한동안 주일학교 교역자들에게 맡겨 놓았습니다.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은 또 있고 나는 한번 맡기면 그래도 푹 맡겨야지 뭔가 되지 않겠는가 했습니다. 어느 날 뚜껑을 열어 보니까 20%도 회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인터넷을 통해 생생하게 아이들이 회심하는 장면이 전송이 되고 나니까 9월 7일 날 청소년 집회에 지방에서 계속 전화가 옵니다. 자기 아이들 데려와서 집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면 전주, 광주, 대구, 대전 그런 데에서 올라오겠습니까? 주일날 850명이 모이는데 어디에서 100명이 더 왔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설마 다 왔겠습니까? 50명 정도 안 왔다고 하던데 외국 나간 아이도 있고 부모가 안 데려온 아이도 있고... 약 150명 정도가 외부에서 온 것입니다. 광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습니다. 그렇게 사모 합니다. 부모들의 믿음을 봐서라도 정말 하나님의 회심이 있기를 우리들이 사모 합니다. 이제 청소년들이 남았습니다. 청소년들은 더 어렵습니다. 정말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유치부 이때에 정말 아이들이 회심을 잘 합니다. 눈물 펑펑 흘리면서 아이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복음을 진술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 깜짝 놀랍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심 합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사랑해 주면서 무르팍에 놓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만 해 주어도 회심할 아이들을 그냥 방치해 두어서 그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올라옵니다. 중고등부 사역자들 이야기 들어 보면 수련회를 가고 집회를 가도 옛날에 회심했던 아이들이 다시 회심을 하지 새로 회심하는 아이들은 아주 드물다는 것입니다. 처음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복음 듣고 단번에 돌아 온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수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해 주고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심방을 하고 해도 간신히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들이 얼마나 더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들은 초등학교 아이들하고 틀립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그래도 분산이 많이 됩니다. 그런데 중고등부 아이들은 제가 목회를 해 보니까 한번 꽂히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른은 재는 것이 많습니다. 회심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놀랍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고등부 때 아이들의 회심을 광범위하게 보았는데 말하자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제게 와서 상담을 합니다. “전도사님 큰일 났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집안에 고등학교 2학년 아이가 있는데요...” “그런데요?” “이 아이가 은혜를 받은 것은 깊이 인정을 하는데 그 아이가 두 시간 반씩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언제 합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기도를 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논리는 성립이 안 됩니다. 그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원래 머리가 없어서 못하는 것이지 기도를 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 받은 아이가 한 시간 집중하는 것이 났겠습니까? 아니면 장난치고 속이면서 친구들하고 돌아다니면서 회심 안하고 두시간반 공부한다고 가방 들고 뛰쳐나가는 것이 났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아이들이 애절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말을 안 합니다. 특히 중학교 아이들은 여러분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웬만해서는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 곤고합니다. 학교를 가도 대화가 통하지 않고 집에 와도 대화가 통하지 않고 또 집이라고 들어 왔는데 엄마 아빠 둘이서 영적 전투는 안하고 육적 전투나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골머리가 아픕니다. 그러고 나서 주일이면 교회에 가자고 깨우고 같이 차를 타고 오는데 아이들 입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 다 쇼로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민한 나이인데 그럽니까? 그런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분들이 그 아이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떻게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 쪽으로 쏠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지 마십시오. 저도 다 해 봤습니다.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괜히 관계만 나빠지지... 성적표를 가져다 놓고 작대기로 닦달을 했는데 깊이 회심한 이후로 성적표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초월해서 나의 피붙이, 내 새끼하고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그 아이들을 여러분은 버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결별하겠습니까? 후회 될 수도 있습니다. 왜 내 배속에서 이런 작품밖에 못 나왔을까? 공부 못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괴로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엄마, 아빠 한계를 아이들이 뛰어 넘겠습니까? 자기도 엄마, 아빠 한계를 못 뛰어 넘었는데... 어느 아이가 하도 공부를 하라고 하니까 “엄마는 공부 좀 했어?” 하더랍니다. “못했다.” “못했으면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뭘…” 그런 것들을 떠나서 자식으로서 인내심을 가지고 깊이 사랑하고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 아이가 습관적인 악행에 빠져도 그것을 이기게 하는 것은 몽둥이가 아닙니다. 그것이 4학년 미만입니다. 그 이상은 듣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습관적으로 지갑에 손을 대고 음란한 잡지를 가지고 다니고 열 받는 일을 수없이 해도 마지막의 답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그것을 이겨야 합니다. 아이들이 완악해서 회심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인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그 아이들이 시궁창에 들어가도 아이들 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형입니다. 꾸짖을지언정 사랑해야 합니다.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심을 하지 않았어도 기다려야 합니다. 목회자가 회심 하지 않은 교인 기다리듯이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악인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아이에게 끊임없이 돌이키는 은혜를 주십니다. 틀림없이 주십니다. 그리고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회심 집회를 앞두고 교역자들이나 선생님들이 기도하는데 보면 선생님이 많이 기도해서 회심하기도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부모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 아이들의 회심을 목표로 해서 고통하는 교역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부모의 기도가 가장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여러분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부모와 자식 간에 통하는 텔레파시 알지 않습니까? 지방에서 아이가 아파 들어 누워 있으면 부모가 그것을 느낍니다. 돌아가신 우리 장모님은 우리 집사람이 우물에서 까불고 놀다가 7m가 넘는 그 속에 풍덩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견딜 수 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어떻게 할 수 가없더랍니다. 그때 막 뛰어 와 가지고 물에 빠졌다고 하니까 거기에 내려가서 아이를 건져 냈습니다. 그때 안 건져 냈으면 장가도 못 갈 뻔 했습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 간에 흐르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그 부모와 자식의 영혼이 닮은꼴입니다. 부모의 특징들을 자식들이 물려받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영혼이 그 부모에게서 나왔든지 창조 되었든지 그것은 별개의 문제고 하나님이 그렇게 부모의 특성을 물려받게끔 아이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 통로가 바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기에 적합 하도록 하나님이 영혼을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미련한 자식은 아비의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어미의 근심이고 아비의 고통입니다. 그렇게 회심하지 않고 살아서 그 아이가 무슨 일을 하겠는지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 요즘 시집 장가보내는 부모들 보면 “목사님 이제 한시름 덜었습니다.” 하는데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이들이 품 안에 있을 때에는 안 되면 소리라도 지르고 작대기라도 때리고 인상이라도 썼는데 이제는 명색이 가장이랍시고 살림을 내고 사는데 둘이 만약 사네 안사네 하면 그것은 단순히 말을 듣는다, 안 듣는다, 학교 성적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 받는 것은 복에 겨운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딸린 아이들이 있는데 자식이 안 산다고 하면... 아이들이나 주렁주렁 낳고 그리고 다른데 장가간다고 하면 아이들을 덤으로 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웃음이 나옵니까? 내가 없는 이야기를 가상 속에서 지어내 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 설교 듣는 가운데도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부모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유산을 적게 물려주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아니면 아주 못된 며느리가 들어와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다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것이지... 그런데 안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 통제가 됩니까? 결국은 미련한 자식이 되어서 자식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은 눈 감을 때까지 안전 보장이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부모가 통제가 됩니까? 안됩니다. 아주 엄격하고 가풍이 뚜렷한 집안에서도 그렇게 이혼하고 하는 문제는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기가 안 깨뜨려지면 상대방이 박살이 나야 견딜 텐데 상대방은 놀고 있습니까? 그 양반도 회심하지 않은 양반인데... 혼처를 얻었는데 그 집안이 장로의 집안이더라, 집사의 집안이더라, 그런 것 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부모가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인가? 리얼 크리스천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부족하고 엉터리 같지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난과 슬픔이 오면 주님을 붙들고 매달릴 마음이 생깁니다. 아까 인터뷰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까? 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제 주님을 더 의지하겠다고... 누가 가르쳐 주어서 그렇게 읽은 것입니까? 회심하면서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인생의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나는 주님께 의지하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회심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의존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회심하지 못하면 시집 장가가서 둘이 만나서 열 받으면 둘이 너 잘났다 나 잘났다 그리고 집어 치우자 하고 주먹이 오고 가고 욕설이 오고가고 그리고 종잇장 하나 가지고 왔다 갔다 하고 이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심하고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한순간에 혈기가 나도 기도하면서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아닙니까? 주님 앞에 깨뜨려져서...아내의 손을 잡고 용서를 빌고 남편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빕니다. 이러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다시 합쳐져서...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 결혼해서 목회자에게 맡겨놓아도 목회자 알기를 떡으로 압니다.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왜 말을 듣겠습니까? 하나님 말도 안 듣는데...회심을 했으면 불러다 놓고 야단을 치면 회개를 하는데 회심도 하지 않았는데 불러다 놓고 야단을 치면 반발을 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엊그제 교역자들을 불러서 그랬습니다. “자네는 고3이 마지막 벼랑이라고 생각하고 팔을 벌리고 회심 하지 않으려면 나를 밀고 벼랑에 떨어뜨리고 가라. 왜냐하면 너희들이 가는 곳이 벼랑인데... 그리고 자네는 중3이 마지막 벼랑이라고 생각하고 팔 벌리고 서서 나를 밀어서 바다에 집어넣고 너희들도 회심하든지 말든지 돌진해라. 자네는 6학년에 서서, 자네는 3학년에서, 자네는 2학년에서, 유치부에 서서하고...” 그물이 많으면 하나는 걸릴 것 아닙니까? 이것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다 회심해서 고3 졸업 때 쯤 되어서는 대학의 합격 유무와 상관 이 신자로서의 기반이 잡히고 교리적인 기반이 잡혀서 성도의 맛이 나야 합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빨리 회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성경에 뭐라고 했냐면 교회에 일꾼을 맡길 때 아무리 열심이 있다고 할지라도 방금 회심한 사람은 시키지 마라. 그것은 무슨 이야기 입니까? 방금 회심한 사람이 얼마나 순수 합니까? 얼마나 따끈따끈 합니까? 그런데 아직 연단이 덜 되었습니다. 우리 여기에 심은 나무들을 보십시오. 처음에 요만한 나무 심어서 나는 속으로 좀 투덜거렸습니다. 기왕 심을 거면 좀 멋있는 걸 가져다 심지, 하나에 돈 십만 원짜리 가져다 살지 안살지도 모르는 것 비리비리한 것 심었냐 하고 속으로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웬걸 4-5년이 지나니까 뿌리를 내리고 쭉쭉 뻗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어느 화원을 하는 장로님이 싸게 해주셔서 이발을 했습니다. 너무나 생명력이 뛰어나서 다 덮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들어오면 으스스하게 숲속을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생명력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랐기 때문에 웬만큼 춥거나 가지를 흔들거나 해도 끄떡없습니다. 그럼 들어 보십시오. 아이가 유치부에서부터 회심을 합니다. 까불다가 까먹고 그래서 회심 집회에 와서 회개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또 미끄러졌다가 회개하고 하면서 점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깨지면서 흔들리고 하면서 고3까지 올라온 아이와 그냥 회심하지 않고 있다가 고3때 펑펑 울고 회심했는데 대학에 가니까 별천지인 것입니다. 자매들도 있고 형제들도 있고 미팅이다 놀러간다 MT를 간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방황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타락하면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대학 들어간 아이가 타락하면 이것은 문제가 틀려 집니다. 수준이 틀려 집니다.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빨리 회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하나님 만나겠지요. 그래도 하나님의 자식인데...” 아닙니다. 못 만나고 결국은 세상 뜨는 사람 많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정말 돌아오기 어렵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대학 때만이라도 좀 낫습니다.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면 술 먹고 사업상 어울리며 사회생활의 뿌리를 내립니다. 그런데 자기가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21살 때 회심을 했는데 얼마나 어렵습니까? 친구들 다 끊어집니다. 상대도 안 해 주려고 합니다. 토요일 캠핑 갔다가 일요일 새벽에 교회 간다고 가방 싸가지고 오니까 동물 보듯 합니다. 판 다 깨고 도망간다고 욕을 합니다. 그것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자기를 그런 인간이라고 인정을 해 주는데 거기에서 자신의 마음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 낫다고 할지라도 삶으로 이 변화를 구현해서 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빨리 회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설교해 보면 알지만 현저하게 틀립니다. 5, 6학년만 되어도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다급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진지하게 여러분들이 열린교회에 남아 있는 한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나한테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영혼을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위해서 정말 애절하게 기도하면 아이는 반드시 회심합니다. 시간이 차이가 날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회심합니다. 그 놀라운 비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궁이에서 불을 펄펄 떼는데 그럼 시뻘겋게 숯이 달아오르는데 그것 아궁이에서 펄펄 타 오르는데 시골에서 아궁이에서 꺼내서 찬바람 부는 얼음 벌판에 던지면 5분도 안갑니다. 금방 꺼집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주님 만나고 뜨겁게 회심했는데 집안은 아궁이입니다. 집안에 불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추운 겨울에 얼어붙은 아궁이에 새벽에 불 때 본적 있습니까? 성냥불을 키면 밑에서 찬바람이 불어 불을 자꾸 끕니다. 거기에 아이를 집어넣은 것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금방 그렇게 회심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애야! 네가 내 자식을 위해서 회심 기도 하다가 네가 회심을 반복해서 네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라. 그러면 내가 네 자식 불 붙여서 가져다 줄 테니까 둘이서 한번 타 봐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회심을 금방 안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데리고 왔는데 회심을 안하고...” “얼마나 기도를 하셨길래 또 그러세요.” 더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회개가 되겠습니까? 아이들의 회심을 보면서... 또 회심을 안 한 것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뜨겁게 사랑하면서 회심하지 않아도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손잡고 회심이 뭔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모르고 다 쇼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 아빠가 손잡고 “애야!, 나의 간절한 소원은 네가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것이다.” 눈물에 맺힌 이슬은 작대기로 때리는 것보다 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가 신앙의 세계에 있구나. 틀림없구나. 엄마의 눈빛이 말해 준다. 아빠의 눈빛이 말해 준다. 뭔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회심하면 이번에도 많은 아이들이 회심했는데 내버려 두면 한 달도 안 갑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못하지 않습니까? 아이가 그 은혜를 어떻게 유지 하겠습니까? 그래서 부모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 합니다. 성경을 읽게 하고 그 다음에 기도해 주고 안아 주고 사랑해 주고 이렇게 하면서 부모와 함께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 안에서 그 아이가 자라갈 수 있도록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회심하게 되면 특징이 기도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 기도하라고 하고 눈 감겨 놓으면 미칩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때 기도 오래 하면 안 됩니다. 예배시간에 회심 하지 않은 사람도 많이 들어오는데 10분씩 눈을 감겨 놓으면 어느 교회에서는 짜증을 내면서 교회를 뛰쳐나간다고 하던데... 집에서 10분 기도하고 2분만 하면 됩니다. 핵심만 간절히... 그래도 모든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어쨌든 아이들의 마음에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 그 아이에게 세계 평화를 위해서, 우주 전쟁이 없도록 그런 기도제목 주면 안 됩니다. 응답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기도 하려고 할 때 아주 현실적인 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그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들 속에 어른하고 똑같은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은 멀리 간 우리교회 지체 한분이 계셨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집 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와서 아마 우리교회에 와서 아이 셋을 낳았습니다. 한번은 아이 돌이라고 해서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하는데 옆에 있던 녀석이 입으로 잡채를 빨아 먹는 것입니다. 엄마가 툭툭 치면서 기도를 했는데 그때 누가 기도를 했는지 좀 오래 했습니다. 아이가 잡채에 코를 묻고 잠이 들었습니다. 계속 잡채에 코를 묻고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 형이 5살인가 6살이었는데 장난감 하나를 사달라고 그렇게 졸랐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 그것은 낭비다라고 했더니 “엄마 나 장난감 꼭 사줘” 그래서 아빠가 전화왔길래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니까 하나 사주라고 해서 “아빠가 너 사주란다” 하니까 아이가 갑자기 없어지더랍니다. 그래서 어디 갔나 했더니 자기 방에서 방석을 하나 깔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내가 장난감 달라고 기도를 그렇게 했는데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진지하게 기도 하더랍니다. 그런 기도 제목을 주어야지 세계 평화와 우주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 응답이 되겠습니까? 그런 것에서 우리가 보기에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아이들에게는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5살인가 6살 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아빠 놀라운 일이 있어!” “뭔데?” 했더니 “기도 응답 받았어.” “뭔데?” 밤에 잘 때 그때 닌자 거북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것을 꿈에서 한번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밤에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수준은 낮지만 그 아이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이 선명하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기도 제목을 줄 때 엄청난 것, 너 전교 일등을 위해 기도해라 이런 것은 원래 유전자가 그렇게 안 되는데... 수요일 와서 강사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은혜 많이 받아도 계속 공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지난주에 한 것을 그대로 베낀 것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현실성이 있는 것, 아이가 정말 느끼는 기도를 하게 해야 합니다. 거기서 아이가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확인하고 믿음으로 심어주고 하면서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회심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아이들에게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집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아이들의 변하는 놀랍습니다. 아이들이 회심해 봐야 뭘하랴?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이것은 한 다리 건너서 들은 이야기 인데 우리 교회에 그 아이가 2학년인가 3학년인데 회심을 했습니다. 그 아이가 어느 날 그러더랍니다. 저녁때 쯤 됐는데 “엄마 내가 아무래도 오늘은 철야 기도를 해야겠어.” 엄마가 하도 기가 막혀서 “네가 무슨 철야 기도냐? 왜 기도해야 하는데?” 했더니 “기도할 것이 많아! 아프간 사태도 있고…” “그래 해라.” 그래서 그냥 말만 하겠지 했는데 밤중이 됐는데 “그런데 엄마 우리 같이 철야 하면 안 될까?” 그래도 명색이 엄마인데 은혜가 떨어지지 않은 한 그럴 수 없고 “그래 하자” 그래서 이제 건너 방으로 가서 방석 두개를 폈습니다. “엄마 다니엘처럼 창문을 보고 기도할까? 마주보고 기도할까?” “그래서 마주 보고 기도하자 그럼 우리 찬송 부르고 기도하자”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려는데 “엄마 음악이 있어야겠지” 그리고 불을 끄더니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한 시간쯤 기도하고 이 아이가 분명히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을 거야 하고 했는데 계속 기도하고 있더랍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이야기라면 믿어지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아이들이 놀라운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기도할 때 자기가 기도하면 아프간 사태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해서 국제 정치를 모르기 때문에, 탈레반의 악명을 모르기 때문에, 아프간과 미국의 미묘한 관계, 한국과 미국의 미묘한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믿으면서 될 것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돌아가셨는데 존경스러운 분이셨습니다. 이분이 시골에서 교회에 다녔는데 어려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서 회심이 그렇게 중요 합니다. 당신이 직접 간증 하셨는데 6살이 되었는데 너무 분하고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냐고 하니까 선무당 어구에 큰 고목나무가 있는데 거기에서 동네 사람들이 돼지 삶아서 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교회 다니는데 마음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저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데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절을 해야지 저기 가서 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고목나무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그 고목나무가 범상치 않게 생겨서 동네에 신주단지가 된 것입니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매일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이 고목나무에 어른들이 절을 하는데 이것 하나님 날려 버리시라고... 하나님 이것 없애버려 달라고... 그리고 얼마를 기도했는데 어느 날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데 천둥번개가 치더랍니다. 정통으로 맞아서 한 번에 박살나 불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무서운 생각이 든 것입니다. 자기들이 조상 대대로 섬겨 왔는데 한방에 박살이 난 것입니다. 그 바람에 몇 사람들이 교회에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6살 때 이야기를 생생하게 증언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 일이 왜 일어났지 했는데 자기는 하나도 신기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구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셔서 그 아이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저도 믿습니다. 어른들은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될까 수 백년 내려온 것인데... 아이는 단순하게 내가 여기서 무릎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단번에 날려 버리실 것이라는... 위의 가지를 친 것이 아니라 밑동을 쳐서 박살을 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어마어마한 고목나무가 벼락을 맞고 뽀게지는 광경을 볼 때 이 아이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갈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일평생 지워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아이는 공중에서 음전기와 양전기가 만나고 피뢰침의 원리가 어쩌고 하나도 모릅니다. 모르니까 오히려 더 신비롭게 이 아이의 가슴속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새긴 것입니다. 그것을 회심한 아이들에게 여러분들이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회심한 것을 겸연쩍어 하면 안 되고 회심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늘 감사하게 해야 합니다. 원래도 네가 나에게 소중한 자식 이었지만 네가 회심해서 예수님이 네 마음속에 계시니까 이제 예수님처럼 나에게 정말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하면서 안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놀라운 광경들을 계속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런 회심의 이야기가 들어 올 때마다 내가 정말 꿈꾸는 이 교회의 가정이 그런 가정입니다. 그래서 자식과 부모 간에 성도의 교통이 있는 가정 그리고 그렇게 회심한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어떤 결점을 발견해도 용서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얼마나 약한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에게 죄 지은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해서 3학년, 4학년, 5학년, 6학년 거쳐서 대학에 가는 아이들을 어떻게 고3떄 달랑달랑 회심해서 대학에 쏙 들어간 아이하고 비교를 할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연단이 되면서 이 아이들이 자라 가는데... 그러니까 아주 빨리 회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해야 합니다. 9월 7일 날 중고등부 회심 집회 있습니다. 이번에는 중학생 고등학생 한꺼번에 모아 놓고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회심할 수 있도록 우리가 정말 기도 해 주어야 합니다. 작년에 어느 부모가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정말 죄송한데요.” “왜요?” “중고등부 회심 집회에 우리 아이들 좀 데리고 가면 안 됩니까?” 초등부 아이인데 데려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부모가 그런 간절한 사모함, 예수님이 수로부인에게 했던 것처럼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나이다 하면서 그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대전, 대구, 광주 이런 데에서 올라 올 때 그 부모의 심정을 여러분들 이해가 가겠습니까? 얼마나 그 아이의 영혼에 대해서 노심초사 했으면 인터넷을 보고 돌 같은 아이들을 회심 시키겠다고 데리고 오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미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들이 회심에 이르러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은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때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행복한 가정을 잘 만드십시오. 그것이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섬김입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1
6.회심의 화로, 가정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I. 본문 해설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고 오늘 읽은 본문은 구약 성경 전체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 구절이 공교롭게도 신약이 시작되는 맨 처음 예언이 응하게 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는 영혼, 마음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언하면서 구약이 끝납니다.그런데 여기서 예언된 엘리야는 예수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선지자로서 저는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아가게 하리라’는 예언이 덧붙여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아비가 하나님이고 자식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아비와 자식은 육신적인 혈통의 아버지와 자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이 땅이 타락하게 될 때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는 깨뜨려진 가정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주셔서 그 땅이 고쳐지고 회복될 쯤에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때에 가족 관계가 다시 회복될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는 그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였습니다. 그가 외친 것은 회개의 선포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선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교만하던 마음은 낮아지고 주저앉아 무너진 마음들은 돋워져서 예수님이 오실 때에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아들로 알아볼 수 있도록 그들 마음에 길을 내는 일을 위해서 세례 요한이 보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외치고 사람들이 많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에 무너졌던 가족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는 일들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 예언과 함께 그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되는 일들을 먼저 성경이 우리에게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여호와의 날
A. 땅과 사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도 손수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을 그들에게 주셔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세계를 창조하셨으니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당신이 직접 통치하셨지만 지상의 세계는 당신 닮은, 영혼을 가진 탁월한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들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고 이바지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상에서, 지상의 세계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직접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며 왕처럼 이 세상을 통치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가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두셔서 이것을 먹지 말고 이것을 볼 적마다 나 하나님이 너희를 이 땅에 창조한 것을 알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처음 두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지만 이 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이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그 부모의 결합을 통해서 육체 안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이 세상에 쏟아놓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생명이 없는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과 함께 삼위 하나님 안에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은 가장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창조된 인간은 그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존재의 성품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기의 새끼들을 이 세상에 번식시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남녀가 만나서 깊이 사랑하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속에서 둘이 서로 육체의 결합을 이루게 되니 이것은 그들 안에 있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남녀로 따로 존재할 때에는 누구 안에도 없었던 생명이 그 사랑의 결합 안에서 잉태되고 이 땅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그 자식들을 하나님이 전혀 새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얼굴과 온 몸의 생김새도 부모를 닮게 하시고 영혼도 부모를 닮게 해서 부모 닮은 새끼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부모들로 하여금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보면서 그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하신 우리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자식들 안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도 아닌 우리의 사랑의 결합을 통해서 삼위일체 안에서 만물이 생겨나듯이 없던 인간을 씨로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인간 생육의 원리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조금 흐리게 나타납니다. 동물들이 나누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 비슷하게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갖게 하시고 그래서 육체의 결합을 통해서 자기의 씨를 이 세상에 퍼뜨리니 그것 역시 사랑 안에서 생명이 움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곤충들,멀리는 식물들에 이르기까지 퍼져서 바로 그 사랑과 사랑이 있는 결합 안에서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하셨으니 이는 사랑이신 삼위하나님의 교통을 통하여 생명이 있는 만물이 이 세상에 산출되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입니다.
B. 여호와의 날의 양면성
만약에 우리에게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아주 유사한 사랑으로 부모인 우리들은 자식을 깊이 사랑하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처럼 우리의 자식들은 부모인 우리들을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함께 이 땅을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죄가 들어왔습니다. 이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켰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시켰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시켜버려서 죄는 철저히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존재가 되도록 그를 고립시켜 버렸습니다. 모두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기를 사모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온 우주의 중심이 자신이고 모든 행복의 기준이 자기인 것처럼 생각하는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파괴적인 현상은 우리의 가족들 안에서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동물은 아무리 노력해도 동물이하일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물보다 더 악할 수가 있는 존재이고 많이 노력하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이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이유는 그렇게 참된 신자가 되는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살아가는 참된 길을 걷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창조한 인간들은 타락해서 맨 처음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모든 복락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인간은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바깥에서 그 행복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치게 되었습니다. 만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떠난 어디에도 행복이 없거늘 그 하나님 안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발견하려고 할 때 영혼의 외도는 시작되고 삶은 무질서와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없이 여러분들에게 이 사실을 나열할 수 있지만 여러분들의 지성에 도움을 위해서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이 가장 잘 하는 것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 교만인데 사실 그 교만은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높음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간은 그 높으신 하나님께 부복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것을 흉내 내게 되니 이것이 바로 모든 것들 위에 자기를 높이는 교만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이런 행복을 흉내 보려고 할 때 교만해지고자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방탕은 이성의 규제 없이 욕망이 흔드는 대로 마음껏 살아가는 삶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를 흉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고 인간은 그 모든 것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랑으로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주권을 받아들이면서 사는 데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나 가능한 뭐든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는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바깥에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바깥에서 자유를 누려보려고 하는 그것이 방탕이고 이렇게 방탕하게 살고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수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치라고 하는 것은 분에 넘치도록 자신이 무한정의 소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음껏 분에 넘치는 영화와 만족을 위해서 물질과 정신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치 역시 하나님 안에 있는 풍부함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후히 나누어 주시고 세기 안에서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무리 낭비하여도 모자란 법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풍부함을 하나님 바깥에서 흉내 내보려고 할 때 그는 사치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그런 사치한 삶을 살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을 원수로 삼지 않고는 그 욕망을 실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 말씀을 못 드릴 뿐이지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아보려는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도전이고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지 않고는 그 행복을 찾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운명이 되었고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이 아니고는 인간은 이런 비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안 믿는 부모들 중에도 자식을 향해 한없는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진 분들을 종종 만나 보았습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이런 찬가를 받기에 합당한 부모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 부모들이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지상에서의 깊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이 지상에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부모가 그런 아름다운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으면서 살아야 할 인간의 근본적인 도리, 이것은 자연적인 사랑으로는 자식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식의 행복을 생각하는 모든 부모는 그 모든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고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그 행복을 밖에서 열렬히 찾으려하면 찾으려할수록 더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부모가 먼저 하나님 앞에 회심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아비와 자식들
A. 돌이키게 하는 말씀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큰 은혜가 이스라엘에게 임할 때에 먼저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자식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예언보다 먼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아니고는 자기 자식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께 속한 것을 물려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많은 재화를 누리며 명예를 받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문으로 재주를 자랑하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예술과 기회로서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의 삶의 편이나 지상에서의 영예와만 관계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모든 것들이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너무나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영원을 향하여 의미를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의 삶이 구현되는 인생의 양태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정말 행복해지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오래 전에 저희 교회에 남편은 변호사이고 아내는 의사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모두 사회적으로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밤늦게까지 사무실, 법정에서 일을 하다가 퇴근할 때는 비디오 가게에 들려 간답니다. 비디오를 빌려 나오는데 친구와 마주쳤습니다. 그 친구도 비디오를 빌리러 오는데 판사입니다. 그래서 둘이서 겸연쩍게 웃으면서 “야, 우리 왜 이렇게 사냐?” 친구가 말하기를 “너무 그러지 마라. 밤에 들어가서 이것 한편 때리고 자는 것이 인생의 낙이 되었단다.”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으로서 영혼의 행복을 달랠 수는 없고 영혼의 양식으로 그것을 삼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육신을 위해 필요한 것들로는 양식을 삼을 수 없고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를 통해 영혼은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말씀이며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자신이 은혜를 받고 회심한 사람이 되고 회심의 은혜를 간직할 채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기저귀 찬 아이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성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으니 남녀가 결합된 후에 동침하고 나면 그 다음날 아침에 성인으로 아이가 태어나게 하나님이 못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지성이 순수하고 마음이 순박하던 그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면서 창조 된 엄마 아빠가 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아이가 보면서 자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린 아이로 이 세상에 핏덩이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 아이가 눈을 뜨면서 엄마 아빠를 보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본성적으로 그를 따르며 살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1.회심해야 할 부모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 안에서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는 부모를 만난 자식입니다. 그 이상의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같이 부모들이 다 신앙이 없고 일대에서 믿음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이 간단한 말에 담긴 뼈 절인 눈물이 무엇인가를 다 압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부모로부터 핍박과 멸시까지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옵니다. 하나님이 이 목장으로 여러분들을 보내어 주셨고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지체들을 주시고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배워가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와 다름이 없는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강한 사람이 되는 지 이 세상의 시련과 고난 많은 유혹에 흔들리면서도 어떻게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주시는 손에 붙들려서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받으며 다시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을 찾아가는가 하는 것을 그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모인 우리들의 가장 큰 본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 나이가 50을 훨씬 넘겼습니다. 명백하기는 앞으로 남은 세월은 지나 온 세월의 절반 밖에 안 될 것입니다.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가끔 칼로 가슴을 에이는 것처럼 그리움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많은 악함과 온전하지 못함을 발견하면서 어렸을 적부터 잘못 굳어져온 불신앙의 습관들이 제 몸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될 때마다 나의 부모가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나를 무릎에 놓고 나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성령님의 한량없는 위로를 가르쳐 주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마다 우리 엄마를 보고 아빠를 보고 인간이 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지를 배우면서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도 누가 나에게 물으면 서슴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 중 가장 사람다운 사람은 우리 엄마였습니다. 아빠였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의 인생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외로움 속에 몸부림치며 마음에 붙어있고 몸에 남아있는 과거의 더러운 습관과 싸우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그릇행하면서도 그것이 그릇된 것인지를 모르며 산 무지의 많은 세월들이 얼마나 합쳐질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는 때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믿으시겠습니까?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들 위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여 그 보셨네 나 무엇으로써 큰 은혜에 보답하리이까? 무한하신 주의 사랑은 놀랍고도 크도다 나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살리라
이런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부모인 여러분들의 최고의 사명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저건 아니야 나는 절대 우리 엄마 같은 아내는 안 얻을 거야. 난 절대 우리 아빠 같은 삶은 반복하지 않을 거야. 라고 다짐을 하고 있다면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여러분은 없고 없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도 함께 지워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부모로 이 세상에 자식을 낳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멍에요 십자가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교인이 자식이 시집보내면서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목사님 이제 훨훨 벗었습니다. 저는 이제 자유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사고 치면 공부 안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부모의 속을 썩이면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일이거나 공부 안하겠다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회심을 안 한다고 얼마나 탈선을 하겠습니까? 이제 대학 다닐 때까지는 혼자여서 미끄러져도 혼자 미끄러지고 처박혀도 혼자 처박히지만 이제 장가, 시집을 갔으니 큰일입니다. 조금 있으면 자식이 태어나, 그런데 애미가 되어서 미끄러지고 애비가 되어서 미끄러지면 우리 같은 사람이 또 태어납니다. 기도하시오. 이게 십자가요.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일은 사람의 본분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으며 나의 갈 길을 다가도록 예수의 인도하시기를 바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엄마,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가족들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비는 우리 아빠의 기도를 보며 아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식에게 폭력을 가해서 못된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가 둘이 함께 사랑하며 서로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변화되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세워져서 예쁜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금은 너무나 흠이 많고 거칠지만 날마다 주님의 은혜에 깎이고 주님의 은혜에 다듬어져서 주님의 사람으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설교를 인터넷으로 듣는 사람이 열린 교회는 왜 이렇게 우느냐고 하는데 나도 좀 안 그러고 싶습니다. 정말 안 그러고 싶습니다. 오늘은 결심을 하고 올라왔습니다. 때로는 감사해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때로는 여러분들의 병든 마음 때문에, 때로는 여러분들을 섬기기에 너무나 모자란 나 자신 때문에 그렇게 눈물이 나네요.
옛날에 시골에는 난방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저녁에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소죽도 끓이고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마지막에 숭늉까지 끓여낸 다음에 어머니가 화로를 가지고 와서 불씨를 담고 담은 다음에는 항상 삽으로 아궁이 깊이 집어넣어서 고운 재를 불꽃위에 덮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윗목 위에 가서 난방기구로 삼고 거기 앉아서 밤새 도란거리며 이야기고 하고 감자고 구워 먹고 하다가 잠이 듭니다. 이른 새벽 엄동설한에 일어나서 아궁이에 가보면 냉기가 가득하고 불을 지펴도 불이 붙지 않을 정도로 냉기가 되고 온돌도 윗목에는 냉골이 되어 가는데 신기하게도 난로는 아침까지 불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난로에 그 온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그 불씨를 재로 잘 덮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궁이에서 훨훨 타서 시뻘건 불씨라고 할지라도 빈 화로에 담아서 얼음이 버석버석 어는 밤중에 그 한데에 내어 놓는다고 하면 아마 10분이 지나서 차가운 숯덩이로 변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이 회심을 해도 그 회심이 잘 간직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가정이 화로와 같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부족하지만 없는 살림에서 서로를 위하고 우애하고 엄마, 아빠 구심점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보면서 자라는 그것이 바로 그 아이의 회심의 불씨를 덮어준 따뜻한 재입니다. 그 안에서 자녀들은 오래도록 회심이 보존됩니다.
오늘 그렇게 뜨겁게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던 아이가 내일 집에 가보니까 부모가 사네 못 사네 싸우고 삿대질을 하고 집안에 냉기가 얼음장 같이 감돌 때 아이들 마음의 불씨는 금방 꺼집니다. 식어진 회심의 불씨는 마치 뜨겁게 달았던 쇠가 식으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은 회심하기 전보다 더 강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의 생명이 자기와 결탁되어 있다고 말하던 고백이 어찌 육체의 생명만을 의미하는 것일 수가 있겠습니까? 영혼의 생명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온 마음으로 권합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신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저녁때가 되면 부모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늦게 끝나는 아이들을 실으러 갑니다. 그때 어떤 한 아이가 아버지는 일찍 감치 와서 기다리는데 얘는 학교 문에서 아빠 승용차를 보고 끝까지 안 나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이에 회사도 잘리고 프레스토를 몰고 있는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친구들이 좋은 차타고 다 간 다음에 걸어와서 그 차를 탔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아직 생각이 어리기 때문에 부모의 참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도 장성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늦은 밤에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그 낡은 승용차를 몰고 자기를 태우러 오던 그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저는 눈이 나빠서 군대에 갔다가 도로 와서 방위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한 달 훈련을 받는데, 특수부대에 다니는 우리 아들에 비하면 훈련도 아니겠지만 출퇴근하기 위해 버스를 타야하는데 수 백 명이 줄을 서서 45번 버스를 기다려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때는 30분이 걸려도 차를 못타는 것입니다. 그때에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다 낡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항상 저를 태우러 오셨습니다. 사실 그때 부끄러운 마음은 없었지만 어쨌든 좀 그랬습니다. 그것이 승용차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토바이도 50cc에 시동 거는 발판까지 부러져서 쇳덩어리를 매달은 그 낡은 오토바이, 그때는 그렇게 매일 데리러 오는 아버지가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은 눈물이 납니다. 고단하게 하루 종일 훈련 받은 그 아들, 그래도 30분이라도 빨리 집에 데려다 놓고 저녁을 먹이고 쉬게 해 주려고 그것을 매일 비가 오는 날에도 비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몰고 올 정도로 지성이셨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하나님 알게 되고 나중에 철이 드니까 그때는 부끄러웠던 것이 지금은 아름답고 자랑스럽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는 추억거리가 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그 무엇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용돈을 왕창 주어서 산 권위는 하루밖에 안 갑니다. 좋은 컴퓨터를 사주어 아이들에게 산 환심으로 말미암은 권위는 일주일 밖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권위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는 부모로서의 그 사랑의 권위는 영원히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들이 더 중요한 것은 부모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잘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사랑은 하는데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되는 것을 내가 받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주지를 못합니다. 저는 평생을 살면서 아버지가 나를 한 번 안아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그 아이들이 자라나게 되면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엄마 아빠에게 배울 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그 안에서 배우게 됩니다. 어떤 남편을 얻고 어떤 아내를 얻어야 되는지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 이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1세대들에게 내가 마음 깊은 동정심으로 여러분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인생의 길에서 너무 쓰라리게 많은 방황을 했지요? 홀로 흘린 그 인생의 어두운 골목길에서의 수많은 눈물들, 누구도 채워질 수 없는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외로움, 이제 이것은 여러분들의 것으로 끝나야지 여러분들의 자녀의 것으로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깊이 사랑하셔야 됩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양육할 때에 실망하는 적이 있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자원으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그것이 실망과 고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되고 어떤 식으로든지 이익과 관련이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큰 은혜, 그 자식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은 자식이지만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될 때에 그 사랑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되어서 자식 때문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최종적인 목적지로 하는 사랑은 사람에게 기대를 걸기 때문에 실망을 하지만 하나님을 최종적인 목적지로 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최종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 버리시거나 실망시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면서 낙심하지 않는 유일한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은혜,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합니다. 한때 나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 내 자식을 사랑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자녀를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으로 원수를 돌보듯이 자기의 자녀를 돌봐야 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모든 자원이 바닥날 때 자식은 아비인 나로 인해 상처를 받고 아비인 나는 자식으로 인해 실망하고 쓰라림의 쓰라림으로 마음이 더럽혀졌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2.회심해야 할 자녀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이 회심한 부모, 회심의 은혜 가운데 있는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자녀들의 회심입니다. 자녀들이 깊이 회심하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맺은 채 태어납니다. 그 하나님과 원수 맺은 상태의 풀어짐은 어렸을 때 가장 쉽게 풀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굳어져서 웬만한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바위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작은 묘목은 손으로 잡아채면 뿌리 채 뽑히지만 5-6년, 15-20년 되어서 나무를 박아 놓으면 어른들이 여러 명이 매달려서 잡아 당겨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았다면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알았다면 가장 큰 의무는 자식들을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은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은 어떤 모습의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해 주지만 회심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참된 인간으로 살아갈 길을 그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안에서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이의 회심을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나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목자로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모두 회심에 이르게 될 때까지 이 노력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여러분들의 어린 아이의 영혼을 책임진 선생님들과 함께 그 영혼을 우리의 영혼처럼 여기며 그 아이가 진실한 회심에 이를 때까지 우리의 달려가는 이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됩니다. 부모인 여러분들이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사람이고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영혼이 회심에 이르지 못했을 때 가장 중차대한 책임을 지게 될 사람들도 부모인 여러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빌듯이 하나님께 그 자녀의 영혼을 위해 빌어야 할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그 자식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B. 회심을 보존하는 가정
부부가 두 손을 맞잡고 사랑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주님께 날마다 더 가까이 다가가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미 회심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회심에 이르렀지만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고달픔은 회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생의 고달픔에 비길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곤고함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이미 하늘의 은혜, 그 큰 신령한 축복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마음의 곤고함을 여러분의 자녀들이 겪고 있다고 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먼저 자녀에게 주고 싶어 하는 풍성한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진리와 성령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그 진리를 지식으로 삼고 양식으로 삼아 강건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의 영적인 삶, 여러분들의 주님 안에서의 안정된 삶, 진리 안으로 몰입되어가는 여러분들의 이 복된 삶을 자녀들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아이들에게 날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것, 하나님은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버지 앞에 구할 때마다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아이들이 경험하면서 자라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믿음의 가정에 태어났으니까 믿음의 가정에 태어나지 못했더라면 누릴 수없는 모든 하늘의 복, 모든 계시의 복, 모든 사랑의 복을 여러분 자녀에게 누리게 해 주는 것이 부모인 우리의 마땅한 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그 아이를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으로 살도록 유산을 물려주지 못했어도 여러분들이 인생을 다 접고 난 후에 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 여러분들의 자식들이 내 인생의 최고의 행복은 우리 엄마의 딸이었던 것, 내 인생의 최고의 축복은 우리 아빠의 아들이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하늘에서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상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총체적으로 가족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많이 실망시켜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답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몇 달 전에 우리 집사람이 나에게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합니다.‘여보 우리 딸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하고 틀린 면을 가지고 있어.’ ‘그것이 뭔데?’ 노트인지 시험지인지를 슬쩍 보았는데 여백에다 낙서를 했는데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한 낙서인데 우리 딸 글씨였습니다. 선생님을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설을 거기에다 퍼부었는데 새까맣게 써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여러분에게 보이는 그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일 납니다. 아이들이 여러분들이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로만 들었는데 우리 아이가 그런 세계를 가지고 있구나. 순간 나 자신의 모순된 행동과 이런 것들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불러다 혼을 내 줄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희 집 사람이 아주 아픈 마음을 누르면서 사랑의 편지를 썼습니다. 결론은 무엇이냐면 네가 이렇게 선생님의 욕설을 퍼붓고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을 지라도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 그 낙서 마지막에는 ‘누군가 이것을 읽는 사람은 되게 열 받겠지?’라고 써 있더랍니다. 우리 아내는 틀림없이 자기 보라고 그렇게 썼다는 것입니다. 며칠 후에 딸이 공부하기 위해서 노트를 펴다가 엄마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정색을 하고는 ‘엄마, 엄마 딸이 그렇게 개념이 없는 줄 알아?’ ‘이것 누가 썼니?’ ‘내가 강의 시간에 공부를 하는데 내 짝이 내 노트에다가 열심히 욕을 쓴 거야.’
IV. 결론과 적용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많이 실망시켜도 여러분들이 주님을 실망시켜드린 것에 비하면 머리터럭에도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세요. 용서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녀를 깊이 끌어안고 주님의 그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아이에게 그 한없는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보여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도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1
7.축복의 파문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시 128:3).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때 파문을 그리는 동심원의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멀리 던지면 퐁 하고 떨어지면서 돌멩이가 떨어진 그 자리부터 파문을 그리며 멀리멀리 동그라미를 만들어 내면서 물결이 퍼져 갑니다. 하나님의 복의 원리가 그러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은 자기의 영혼 안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은 그 동심원을 그리는 조약돌과 같은 자기 자신 속에 임하는 영적인 은혜와 그것으로 파문을 그리면서 멀리멀리 번져 나가는 또 다른 섭리의 축복으로 나누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속에 임하는 축복을 자기 자신의 영혼 안에서 찾지 않고 몸 밖에서 찿으려고 하는데서 모든 신앙의 타락한 양상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원리를 보더라도 그것은 이러한 파문의 원리를 그대로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 자기 안에서 쏟아져 나온 그 생수의 강물이 번지고 번지고 번져서 멀리 파문을 그리며 퍼져 그 복음의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 이것이 선교이고 전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자신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수를 통해서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는 내버려 두고 밖에 파문만을 일으키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탐욕들이 종교의 너울을 쓰고 생겨나고, 여기에서 종교의 타락성들이 연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에 영혼의 큰 은혜를 주셔서 그가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사람이 될 때 그 하나님 은혜의 축복의 생수는 제일 먼저 그것이 우러나와서 가정에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심령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가 되면 자식을 향해 무정했던 아비들이 회개하고 자식에게로 돌아가고, 부모에 대해 비정했던 자식들의 마음이 돌이켜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으며 그 넘치는 십자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사람은 그 파문이 제일 먼저 자기의 영혼 안에서 진동으로 일어나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마음의 변화가 자신의 삶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파문이 번져가면서 제일 먼저 혜택을 입는 사람이 자기의 배 속으로 낳은 자식들, 오늘 성경에 보면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은 자신의 아내, 이런 사람들에게 이 영혼의 변화의 파문이 복으로써 번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 아내는 이런 파문이 일어나는 것이 없이 주위에 파문을 불러 일으켜서 복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자신에게는 이러한 파문이 일어났다고 말하면서도 가족들은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참다운 축복의 파문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자기의 자식을 뭐라고 묘사 하였냐하면 '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그러니까 여기에서 '상'은 식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식탁에 쭉 둘러앉은 그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와 같으며' 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요, 아이들은 감람나무라고 했는데 이 두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포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로 말하자면 물과 같은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밥과 물의 상징입니다. 지금도 에스골 골짜기에 가면 포도 한 송이에 4.5kg~6kg 까지 되는 것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옛날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컸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실한 포도송이가 쭉 맺혀 있어서 포도나무는 이것이 옆으로 한 없이 뻗어 나가서 몇 미터씩 뻗어 나가는데 넝쿨을 매달면서 몇 미터씩 뻗어 나갑니다. 그러니까 그 나무는 겉보기에는 넝쿨 같은 나무이고 목재도 짤라 쓸수 없는 나무이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포도를 잔뜩 매달고 있는 그 포도나무는 얼마나 값지고 그 집안의 아주 고귀한 포도나무이겠습니까?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가정에서 누릴 수 있는 아내의 축복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핵심이 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가 나오는데 이것이 감람나무입니다. 이 감람나무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올리브입니다. 이것은 먹고, 바르고, 약용, 식용 여러 가지 용도로 쓰던 그 감람나무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감람나무를 아이들에게 비유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가정의 식탁에 둘러앉은 어린 아이들이 고귀한 사람들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감람나무의 열매를 어디에 썼는지 기억나십니까? 집에서 기름으로 짜서 먹고 했지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올리브의 특이한 용도는 여호와를 섬기는 성막에서 등잔에 불을 붙일 때 그 기름이 바로 이 올리브를 빻은 기름으로 하나님 앞에 태워 드렸던 것입니다. 그 올리브가 깨뜨려져서 나오는 그 흐르는 기름 그것이 하나님의 성소에 불을 밝히는 등잔의 기름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성소에 이런 등대가 있었던 것은 진리의 빛과 사랑의 열을 상징한다는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성소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게 될 진리의 빛 그리고 또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사람들이 받게 될 그 불꽃으로서의 사랑 이것을 하나님이 모든 제사하는 사람들에게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성소에 이 등불을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의 불, 지식의 빛일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교제하는 모든 사람들이 또한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던져주는 또 다른 종류의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으며, 식어지고 얼어붙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불길을 가지고 그들에게 생명을 심을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 성소의 등불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이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자기의 자녀들을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잘 양육하게 되면 이 아이가 이렇게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방향의 전환은 몇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는 나의 책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를 움직이는 지뢰점과 같은 존재가 바로 역사의 인물입니다. 시간이라는 지룃대를 가지고 인간을 지뢰점으로 삼아 능력의 힘으로 이 지구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겨울에 비탈길에서 굴리는 눈덩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사람을 만들어 사람 키보다 더 크게 만든 그 눈덩이가 사실 맨 처음에 시작될 때에는 주먹만한 작은 눈덩이로 굴려서 시작이 되었고, 아무리 눈을 굴려도 결국은 그 눈 속에 있는 핵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눈덩이가 그렇게 크게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이 역사를 일구어 가도 한 사람이 역사를 움직이는 계기가 되어서 이 세상을 굴려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의 손에 그런 역사의 전환점이 넘겨졌다면 하나님을 거스르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달려갈, 수많은 사람들의 으뜸이 될 그 지점에서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그 역사를 움직일 사람이 된다면 부모인 우리에게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양태, 높은 지위에 올라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많은 재화를 소비하면서 사는 화려함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꿈꾸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기회에 그러한 위치에 있어서 역사를 움직일 수 있을 때 그때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크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혼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우리의 이웃, 우리의 가족, 우리의 친구, 우리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함께 그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까지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이렇게 될 수 있는, 그 존귀하게 될 수 있는 그 약속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가정 안에서 잘 배우게 될 때 우리의 아이는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팔려서 빗자루 질이나 하는 하찮은 노예가 되었을 때에 누가 그 아이가 미래에 애굽과 온 세상을 죽음에서 건져낼 인물이 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높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섬기며 살 믿음과 그 마음을 가지고 살 사람들에게 역사를 움직일 기회를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이 존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제외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데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보람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식의 부모로서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의 위로는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이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이 되어서, 사랑의 불꽃이 되어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어디 가서 그 자식이 내 세끼라고 명함도 내 놓을 수 없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마음의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가 현세적으로 많은 재물을 누리고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부모의 마음에 진정한 기쁨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면 그것이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해서 남들처럼 그렇게 훌륭한 교육을 못시켜도 절대 그 아이는 인간으로서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훌륭하게 남 부러운것 없이 좋은 운동화, 좋은 옷 그리고 좋은 학습도구 이런 것을 사 주지 못했어도 그 아이의 마음에 하나님을 가지면 정말 존귀하고 아름답고 예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녀들의 앞날을 꿈꾸어 보십시오. 꿈을 꾸어 그것을 가슴에 꼭 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이 감람유를 짠 성소의 등불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과 사랑의 불꽃을 나누어 주고 혜택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요. 무엇보다도 아이를 깊이 사랑하며 참다운 회심에 이르도록 그리고 그 회심을 보전하면서 살도록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런 모든 복들을 여러분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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