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따라간 예수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 23:26-27)
녹취자: 원수연
저는 TV에 제 얼굴이 나오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기 때문에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 주기도문을 하시겠다고 그래서 제가 쑥스러운 얼굴을 TV에 내밀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이렇게 직원예배 때 만나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혀 죽으러 가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셔서 정죄를 당하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실 때였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모든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는 형벌은 아니었습니다. 이 십자가형벌은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끔찍한 형벌제도입니다. 왜냐하면 목숨이 살아있는 한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의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이 십자가 사형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도는 로마 사람들이 변방의 민족이었을 때 고안해 낸 끔찍한 사형 방법이었고,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라고 불리어지는 이 십자가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에 내는 것조차도 매우 끔찍해하던 불결한 단어였습니다.
이 십자가 형벌은 죄를 지은 사람 중에서도 반인륜적이고 반국가적인 매우 끔찍한 죄에 대해서만 이 형벌이 언도되었는데 대개 하나의 가로 막대기에 사람을 묶고, 세로 막대기를 이미 세워놓은 그 터 위에서 도르래 같은 것을 이용해서 끌어올려 세로 막대기에 접합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양쪽 손에 못을 박았고 발에도 못을 박고 무게를 좀 버티기 위해서 나무를 받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런 형식의 형벌이 이루어졌는데, 시체들의 무게 때문에 자꾸 손바닥에 박힌 못이 손가락 사이로 찢어져 나오니까 할 수 없이 못을 손목에 박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못 박힌 죄수는 빠르면 반나절, 길게는 3일씩이나 죽지 않고 매달려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흐르는 피는 엄청난 출혈이어서 아주 커다란 두통을 가져오고 이것을 불쌍히 여긴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갈대 끝에다가 마취제 성분의 술을 묻혀서 죄수들의 입술을 축여주는 것이 자비의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십자가형벌을 언도받은 사람이 감당해야 할 당시 두 가지 중요한 로마의 규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약 130㎏에서 150㎏정도 되는 두 개의 나무로 된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못 박힐 처형 장소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한 대목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규례는 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을 사람은 반드시 채찍에 맞아야 했는데 예수님도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셔서 온몸을 벗기신 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뒤를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형벌은 예루살렘에서 커다란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던, 그리고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던 기적의 행자가 과연 순순히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이냐, 자기를 위한 아주 놀라운 제 3의 이적을 행할 것이냐 하는 토론 때문이었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조용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게 되었는데 이 때가 바로 유월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구레네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마도 구경을 왔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자꾸 지체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워서 메고 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 뒤에 많은 인파가 뒤따랐지만 성경은 아주 간명하게 이 사람들을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눕니다. 첫째는 ‘백성’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고, 둘째는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성경 35절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뭐라고 나옵니까? “백성은 서서 구경을 하는데”라고 했습니다. 48절로 내려가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47절에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백성이라고 기록된 사람들의 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호기심이 있었지만 특별히 어떤 신앙적인 주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광경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해서 이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거기에 모인 사람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는 이 형장에 모였을까요?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이 누가 아름답지 않고 끔찍한 것을 보고 싶어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어디 죽은 짐승의 끔찍한 시체가 있다고 하면 좋아하지는 않으면서도 그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호기심입니다. 자기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그것이 때로는 좋고 기쁜 일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욕심, 이것이 지적인 욕망이고 이것이 호기심입니다. 이 백성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잠시 예배 전에 틀어주신 선교사들의 일화를 보면서 마음에 감동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경을 하기 위해서 한국에 온 사람들에 의해서 한국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한국에 온 사람들에 의해서 한국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 영상의 핵심 아닙니까? 우리는 묻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편안하고 좋은 모든 조건을 버리고 가난하고 아주 불결한, 질병이 가득한 이 땅에 와서 그렇게 고생을 하게 하였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지만 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도 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 기독교 선교 방송에 종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보기 위한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모인 이 백성들, 이런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 긴 묘사가 동반됩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슬픔 때문에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슬픔이 극도에 달하게 되면 호흡에 곤란이 옵니다. 그 때 가슴을 두드리면 이완이 되면서 호흡이 편해집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십자가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슬픔이 얼마나 크고 극도의 슬픔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의 큰 무리였습니다. 위로가 됩니다. 큰 무리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교회가 썩었다고 말하고 올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만, 그러나 많이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희망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정말 오늘날에도 우리의 신앙 속에 십자가라는 주제가 살아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예수 때문에 평안하고, 예수 때문에 위로를 누리고, 예수 때문에 상처받은 자신이 치유를 받고, 예수 때문에 자아를 개발하고, 예수 때문에 자기를 실현하는, 그것이 선교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우리는 오늘날 자기 사랑을 부지런히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을 단 한군데서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압니까?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받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받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애의 길을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해에 75만부 이상의 기염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한 알프레드 아들러 시리즈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실 심리학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폐기처분된 이론들입니다. 그런데 그 알프레드 아들러가 일본과 한국에서 기시미 이치로라는 사람에 의해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지금 어마어마한 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아들러의 이야기 속에 우리들이 귀담아들어도 좋은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으로 보자면 결국 기독교의 가치하고는 상당히 충돌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그리스도인들이 아들러가 이야기하는 ‘자기’에 대한 올바른 규정을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에서 십자가를 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이 신자를 거룩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시련을 가리킨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선교의 사명을 안고 이 방송에서 근무를 하고 계시지만 여러분가운데 누구도 정말 자신은 아무런 고민과 근심이 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생각이 아주 없거나, 아니면 은혜를 하도 많이 받아서 시련과 고난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시련과 고난을 칼빈이 십자가로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해서 우리를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십자가 없이 살 수 없고, 다만 이 십자가를 진정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고 온전하게 만드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되도록 그렇게 인생을 헤쳐 나가느냐, 헤쳐 나가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 신앙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다양한 문제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시고 자기를 의지하며 살던 사람들의 자만심을 버려 하나님께 매달리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시편 1편서부터 마지막 편까지 한 장도 그냥 넘어가는 장이 없이 시인들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마음이 찢어지고 그렇게 가난해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런 모든 고통스런 시련의 과정을 거쳐서 불결한 영혼은 정화되고, 없었던 삶의 지혜들이 생겨나고, 죽었던 영혼들은 살아나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곳에서 참으로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 사명을 감당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시련과 고난, 사역에 직면하는 어려움,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십자가로 소화해내고 예수 사랑으로 이것을 극복해내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교수생활도 했고, 목회도 했습니다. 그리고 출판에도 깊이 개입해왔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겪으면서 하나 느낀 것이 뭐냐면 이런 기독교 유관 기관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방송을 제작해서 오늘 나 같은 사람을 눈물 흘리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선교의 불을 지핍니다. 그러나 여러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책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도 내 마음에는 그 불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불은 아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에 소위 텔레벤젤리스트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설교자들입니다. 한 20년 전을 기준으로 미국에는 약 2,500만 명의 불면증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수면제는 미국에서 엄청나게 팔리는 약입니다. 사람들이 밤잠을 못 이룹니다. 그래서 텔레벤젤리스트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특히 여류 설교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설교를 잘 하는지 그 밤중에 그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펑펑 울고 엉금엉금 기어서 양복장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왜? 포켓에 들어있는 체크를 꺼내서 사인을 해야지 잠을 자는 겁니다. 그리고 후원금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저명한 텔레벤젤리스트가 죽었습니다. 사인이 뭐냐면 수면제 과다복용입니다. 자기는 설교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잠들게 하고 평화를 찾게 하고 자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수면제를 먹는데 그것을 너무 과다복용해서 약물중독으로 죽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란 선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흘러넘치는 생수이신 주님의 선교입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선교지는 셋톱박스가 없는 제 3세계나 케이블TV가 없는 한국의 도서지역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 곳이 정말 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그를 위해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애달픈 울음소리가 가득하게 될 때 그가 비록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는 선교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나는 ‘아우라(aura)’라고 얘기합니다. ‘아우라 프라이젠토룸’. 영어로 하자면 ‘aura over present’. 그러니까 한 그리스도인의 현존의 아우라입니다. 사람들은 ‘아우라’라고 하면 일본말인줄 아는데 일본말이 아니라 라틴어입니다. 영어로는 ‘aura’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기풍, 영풍, 영기, 분위기, 그런 뜻입니다. 한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에 풍겨 나오는 어떤 기운, 존재의 독특한, 말하자면 기풍,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우라입니다. 전문가에게서는 이런 아우라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정신이 있는 전문가여야지 돈 받으면 아무 그림이나 그려주고 아무 작품이나 만들어주는 사람에게는 그런 아우라가 없습니다. 그런 현존에서 우러나오는 존재의 아우라가 가장 중요한 선교의 자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고, 예수 위해 충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정신적인 필연성, 소위 얘기하는 아낭케, 운명을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선교의 역사는 이루어져온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빚진 자라.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무슨 빚을 졌습니까? 유대인은 자기를 핍박했고 헬라인도 자기를 미친 사람 취급하면서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빚을 졌습니까? 그가.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제가 열다섯 살 되던 해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는 해였는데 정확하게 계산하면 14년 3개월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주일날 교회를 가는 길이었습니다. 서울 아주 변두리 시골 같은 곳에 살았습니다. 가다가 슬픔이 밀려와서 논둑위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왜 울었느냐?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의 마음속에 ‘난 누구인가? 인생은 왜 살아야하는가?’ 난 어려서도 죽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매일 아침 인간으로서 사는 것이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세계는 무엇인가?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그렇게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어도 아무도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고, 교회 다니는 많은 어른들과 사람들을 보면 생각이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렇게 혼자 엎드려서 한참을 울고, 그것이 교회에 가는 마지막 주일이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일어서면서 결심했습니다. ‘일생을 무신론자로 살리라.’ 그리고 무신론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주님을 만나서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너무 고민이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알았으니, 십자가를 통해서 안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알았으니, 이제는 그 십자가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고 사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니,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고 사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그 안에서 배우고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런 십자가의 정신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기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모두 이 곳에서 열심히 선교하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 것은, 우리같이 목회를 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충성스런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계를 위해서 일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 곳에서 좋은 기술을 습득해서 또 다른 근무지로 옮기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을 했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여기에 뼈를 묻었습니다. 사람은 그 세 종류의 사람들을 정확히 구별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기 있는 동안에 이 회사를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사역에 혹은 가정에 많은 일들이 일어날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생을 살면서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십자가로 여기면서 그런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통곡과 눈물로 예수를 따라갔던 이 여자들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사도바울이 얘기한 것처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 예수님의 생명이 충만한 가운데 나타나서 여러분 자신이 승리의 삶을 살게 될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