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따라간 사람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눅 23:26-27)
녹취자 : 윤은정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본질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도 본질적인 일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은 이 기독교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다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이미 이 십자가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다가 온지 오래 되었지만, 그러나 원래 이 십자가에는 아무런 종교적인 의미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나라의 커다란 악을 저지른 죄인들을 처벌하는 형 집행의 한 방법일 뿐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형벌은 인류가 고안해 낸 사형방법 중에 가장 잔인한 제도였습니다. 로마민족이 제국을 이루기 전 변방의 야만인이던 시절에 만든 이 사형제도의 특징은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형벌이었습니다. 히랍어로 ‘스타우로스’라고 하는 이 십자가는 원래 막대기라는 의미입니다. 후에 이 스타우로스의 두 개의 막대기가 가로, 세로로 놓인 십자가를 의미하는 뜻이 첨가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스타우로스라는 이 말을 말하거나 듣는 것 자체를 몹시 꺼려할 정도로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이 형벌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로마인들에게는 어떠한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이 형벌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럴 정도로 이 끔찍한 십자가 처형의 형벌을 예수님이 받으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입니다. 십자가 형벌도 죄인을 죽이는 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나마 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는 법적인 선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그 앞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은 저지르지도 않은 죄목으로 고소되었고,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죽일만한 일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핑계 낌에 마침 예루살렘에 휴가차 와 있는 헤롯에게로 보내었으니 이미 예수님이 원래 갈릴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갈릴리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에게 보내버렸던 것입니다. 헤롯은 예수가 행한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어떤 기적이라도 보고 싶어 했지만,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때려서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었고 빌라도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소에 따라 재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이 보더라도 이 재판은 매우 잘못된 재판이었습니다. 원래 재판은 죄 있는 사람을 실사하여 처벌하기 위하여 치루는 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이 재판은 처음부터 무효였습니다. 인간은 불안전하기 때문에 혹시 죄 없는 사람을 죄 있는 줄 알고 착각하여 법정에 세웠을 지라도 사실을 심사하여 법이 없는 사람을, 죄가 없는 사람을 풀어주는 것이 이것이 고금 이래로 법의 정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은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형벌하기 위한 음모로서의 십자가 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 있는 자, 바라바, 이 사람을 놓아주고 예수는 사형시킨 불법한 재판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에는 한 사람의 죄수를 풀어주는 특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풀어주기를 빌라도는 원했지만은 사람들은 일치하게 밀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한, 이 흉악한 바라바는 용서해 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도록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애 썼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든 인기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미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된다 할지라도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난다면, 그런 소문이 퍼진다면, 민심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쏠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예수를 죽이도록 사주하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백성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고, 예수를 사형시켜 달라고 빌라도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예수를 죽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그들은 예수를 죽일 뿐 아니라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에 대한 사형집행 방법까지도 지정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가운데 율법이 주는 하나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념은 다름이 아니라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하는 율법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렇게 운명하시면 하나님에 의해 저주받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헛소문 같은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또 소리쳤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국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조차도 예수의 무죄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데리고 ‘브라이 도리온’ 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갔던 것입니다.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이 왕궁 수비대는 약 600명의 군사들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브라이 도리온’이라고 하는 곳에서 십자가를 질 죄수들이 겪어야 할 당시 2가지 규례를 몸소 당하여야 했습니다. 첫 번째 규례는 채찍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죽도록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브라이 도리온’이라고 하는 곳으로 가서 모두 옷을 벗기고 그리고 채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때렸습니다. 신약시대에 채찍을 연구하는 고고학자에 의하면 당신에 통영되던 채찍은 오늘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채찍이 아니라, 아홉 가닥으로 되어있는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그 가닥 끝에는 뼈나 혹은 쇠붙이로 만든 금속 장식들이 달려 있어서 살을 벗은 몸에 채찍을 후려치면 채찍이 온 몸을 감고 떨어질 때에는 살저름을 물어 떨어지는 살인적인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이 채찍에 예수 그리스도는 몹시 맞으셨고, 거기에 백성들은 침 뱉고, 주먹으로 예수를 쳤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머리에는 굵은 가시관을 눌러 씌웠고, 홍포를 예수 그리스도의 등에 걸고, 소매는 갈대를 들려주어 임금이 손에 들고 있는 황금 홀을 대신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희극 배우와 같았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던 예수가 저런 희극배우 모양으로 서 있는 것을 보며,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자여! 네 꼴이 어떠한가 보라” 하고 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규례는 바로 이렇게 십자가에서 못 박히기 전에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는 자기 스스로 지고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두 번째 규례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120kg에서 약150kg 정도 되는 무거운 두 개의 나무로 되어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습니다. 그 전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으나 죽음을 앞에 놓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편안하게 포식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땀이 피가 되기까지 쏟으시면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눈물과 통곡으로 올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 배반되어 체포당하시고 가야바의 뜰에 끌려가시고, 빌라도에게로 끌려가시고, 다시 헤롯에게 끌려가시고, 헤롯에게서 다시 빌라도에게,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브라이 도리온에서 모욕을 당하신 후,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길에 서셨으니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모든 육체의 진액이 쏟아진 그 때였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셨던 것입니다.
자꾸 이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셨기 때문에 이제 이 십자가는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억지로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이 날이 바로, 이 때가 바로 유월절이었기 때문이고, 유월절은 유대인의 최고의 명절이었으며,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최고의 뉴스거리였습니다. 과연, 그가 순순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물 위를 걸어 다니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눈 먼 자를 뜨게 하던 놀라운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 행사함으로 기적을 일으킬 것인가 하는 것이 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다가 자꾸 쓰러지셨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인파들이 뒤섞여, 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이 길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렇게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길을 가득 메운 인파를 둘로 뚜렷이 구분합니다.
27절은 말합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 한편은 백성이라는 사람들이었고, 또 한편은 여자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백성이 어떤 사람들인지 성경은 한번 보겠습니다.
34절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누어 제비뽑을 쌔 백성은 서서” 무얼 했다고 했죠?
47절입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다 하고” 이를 무엇 하러 모인 무리들이 있었죠?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된 일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그럼으로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를 토대로 할 때에 백성이라고 이름 지은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처형당하는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서 따라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오늘 여기 처음 나타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이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그리고 데가볼리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유다 땅에서 행하시던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도 이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팔복 산에서 고요히 들려오는 산상수훈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으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뱃세다 광야에서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많은 사람을 먹일 때에 그것을 먹고 배를 채우던 기적을 경험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고쳐주신 팔과 다리, 그리고, 그 몸으로 예수께 나와서 오늘 이 십자가의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기적을 경험하거나 눈의 보이지 않는 신비를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고, 겉옷을 펴서 예수님 오시는 길에 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열렬하게 외쳐, 외치는 것을 종교 지도자들이 반대하였지만, 그들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일주일도 되기 전에 싸늘하게 마음이 식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제 자신들의 소원이 성취되어서 예수께서 죽임당하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에 싸늘한 시선으로 구경하는 사람들이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예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망하였고, 그 실망 때문에 지금 이들은 예수를 배반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예수를 기대했을까요? 그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외쳤던 말을 기억해보면 압니다.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히브리말로 ‘제발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들의 구원의 개념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로마의 끔찍한 정치적 압제로부터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 저들을 무찌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다윗의 왕국같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번영한 나라가 이 세상에 오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 예수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을 벳새다 광야에서 먹이실 때에 그 능력이 그런 일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예수를 찬양했고, 예수를 임금 삼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으로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본격적으로 일하실 것이다.’ 라는 기대를 예수님이 저버리셨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경하며 따라가는 방관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이 땅에 오게 하시고 싶으셨던 나라와, 이들이 오게 하고 싶었던 나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서 이 세상이 천지개벽을 하고, 정권이 바뀌는 것이 이들의 소원이었고, 다윗 왕국과 같이 강성한 나라가 다시 서서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조급 공을 드리러 오는 것이 이들의 꿈꾸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그런 육적인 이스라엘의 왕국을 깨고 영적으로 통치하는 왕국이 오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강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구분적으로 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치료하는 종교입니다. 성전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의 꿈은 성전에 오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몇 푼의 돈을 던져주면 그것을 가지고 하루를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자비심이 발동할 만한 성전 미문 앞에 앉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기다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에 그 거지는 처량한 얼굴로 손을 내밀며 무엇을 얻을까하고 간절히 바라보았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어떻게 보면은 야박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돈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갔다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일부를 떼어 줄 수 있었건만, 실제로 그런 일을 하였건만, 베드로는 기독교의 본질에 주목함으로 그 앉은뱅이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였습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하였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지만은 교회 역사에 보면은 이런 이야기가 내려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도사이던 시절에 로마의 교황은 인노센티 2세였다고 합니다. 경건한 수도사가 교황청에 들렀을 때에 교황은 어마어마한 교황청의 금고를 열어 보이며 금고 안에 가득 넘치는 금은보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보게 수도사! 이제는 교회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그러자 경건한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교황이시여! 그럼으로 이제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인생의 문제를 구분적으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종교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때에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물질도 주시고, 직장도 주시고, 좋은 형제와 자매도 주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이런 저런 삶을 살게끔 인도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바로 우리의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 즉,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통로가 막혀있는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비참한 인간을 하나님이 죄에서 구원해 주심으로써 다시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생명과 사랑이 넘치게 하는 구원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새 인생 살게 하시는 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본질이 아닌 것에 기독교의 희망을 걸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에게 몹시 그들은 실망했고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이처럼 욕하고 버리고 십자가에 내어 주도록 가편투표를 하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죽는지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가르치신 가르침은 정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은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불의한 재판에 항거하지 않고 조용히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는 이렇게 무법한 사람들이 악한 마음으로 예수를 대적하고 생명주기 위해 온 예수를 죽이기만 하면 이 생명을 말살할 수 있다고 믿는 마귀의 사주를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마귀의 궤계조차도 뛰어넘는 감추어진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구원하신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받음으로서 당신이 구원할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 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는 모두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이 구원의 공로를 적용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고, 우리들이 대신 받아야 될 형벌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시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재판이 불의한 재판이고, 무법한 재판인 줄 아셨지만, 바로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 속에서 당신의 십자가 희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불법한 재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람들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까? 그분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어떤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오히려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들은 의료혜택도 없는 그 때에 고쳐주셨습니다. 지혜가 없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그리고, 비참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사랑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까지도 기꺼이 사랑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을까요? 바로 이런 흉악한 백성들,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이제껏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였던 악한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사늘한 눈초리로 구경하며 따라 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거론 되고 있는 이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율법도 아는 사람들이었고, 제사도 드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대로 예수를 만나지 못했고 몰랐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 끔찍한 죄를 지으면서도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 백성들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뿐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기신 이 고난을 아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고난의 깊이와 넓이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기독교 신앙은 바로 하나님의 대한 무한한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 아들이신 그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비천하고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하나님을 등지고 불순종하며 악한 길을 걸어가던 그 죄인들을 꺾으시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0대 초반, 저도 여러분처럼 방황하던 젊은이였습니다. 매일매일 아침이면 인간으로 살아야 된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눈을 뜨던 젊은이였습니다. 인생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에 예수를 꽉 붙들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 분들에게 말씀드리는데 그냥, 게임이나 하고, 핸드폰이나 차고앉았고, 맨날 인터넷에 들어가서 장난이나 치고 앉았으면 그가 예수를 안 믿어도, 끝까지 안 믿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안돼요. 사람이...
요즘에 여러분들을 보면서 너무 괴로운 것은 뭐냐하면은 제가 여러분만 할 때 느꼈던 인생자체에 대한 괴로운 고민이 너무 없는 거에요. 너무 해피고 럭키해. 행복해. 그런데, 그게 요동쳐. 그런데, 맘대로 안되면은 낙심하고, 자살하는 것도 인생의 어떤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해서 어떤 고통 속에 죽는 사람들도 물론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의지가 박약해서 어느 순간 좌절 되버리면 홧김에 확 죽어버리는 거죠. 어떤 고민이 아니라... 사상적인 어떤 확신에서 오는 죽음이 아니라... 그러면은 안돼요. 다 망가뜨리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책을 읽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성경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책들을 읽어요.
최근에 저는 단편소설 몇 개를 읽었어요. 제가 몇 년 만에 소설을 읽었는지 몰라요. ‘도대체 어떻게 쓰고 있나?’ 하고 단편소설을 봤어요. 상당히 많은 것들을 느끼게 만들어요. 왜? 답은 없어요. 읽고 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울렁증이 나요. 그런데도 공감이 돼. 왜? ‘이렇게 답을 못 내리는 것이 결국은 인생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책을 접하면서 인생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해야 됩니다.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들, 노래와 엔터테인먼트, 그 다음에 여가 보내기, 이런 모든 오락이나 이런 것들은 인생의 본질적인 것들을 보지 못하도록 계속 장막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다 살다 죽으면은 그는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왜 복음이 외쳐지고, 진리의 말씀이 들려져도 그 진리의 말씀이 소중한지 모르는지 아세요? 아픈 사람들이 약을 찾는 겁니다. 통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약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경체계가 망가져가지고 곪아서 손가락이 막 문둥병이 걸린 것처럼 떨어지고, 발은 짓무르고,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는데도 이게 고통을 못 느껴요. 그리고 그 오락이나 하고 앉았는 거에요.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되겠어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 자체가 죄라서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죄면은 얼마나 죄겠어요. 그까짓게... 그런데 그게 궁극적으로는 아주 나쁜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거에요. 인간으로 하여금, 도대체 여러분들의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몇 년 전에 철학교수 한분이 날 찾아왔어요. 그리고, 이제 책 이야기도 하고, 여러 가지 관심사를 나누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제가 철학자가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왜 이렇게 띵킹이 안돼죠?” 띵킹이 안된데요. 띵킹이... 사색하지 않으면 그는 짐승하고 똑같은 거에요. 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들잖아요. 아무 뇌 속에 기억력이 없어요. 그러고 그냥 단세포 생물로서 그냥 창문처럼 빛이 환이 나면 그게 좋아서 왠지도 모르고 돌진하는 거에요. 타죽다가 간신히 나와요. 오는 길에 또 까먹고 또 달려 들어요. 그런 삶을 살다가 죽으려고 태어났느냐 이 얘기입니다. 그건 아니라 이것입니다. 정말 고민을 많이 하던 사람, 인생에 대해서... 그때에 이 기독교에 진리에 대한 태도도 아주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아, 이거다.’ 이런 태도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마 잘 다니고 있을 걸요? 한 6-7년 전, 7-8년 전 일인가? 교인이 열린공간 마당에 서있는데 어느 자매를 데리고 왔어요. “목사님, 이 자매가 우리교회에 나온지 6주된 자매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회심을 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불교신자였습니다. 불교신자였다가 너무 힘드니까 “나 좀 교회 좀 데려다 달라”고 그랬답니다. 그래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와가지고 그때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 울려 퍼지던 때였습니다. 첫 시간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시리즈, 쉬운 시리즈가 아니거든요? “어렵지 않냐?” 그러니까 하나도 어렵지 않고 모두 이해가 된데요.
그게 뭐죠?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니까 진리가 다가올 때에 그것을 꽉 붙들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제안합니다. 그놈의 핸드폰하고, 컴퓨터하고, 아이패드, 다 집어치우고, 한 달만 벽장에 묻어 놓고 살아봐요. 그리고, 그 시간에 얼마나 여러분들이 그런 것에 중독되었는지를 한번 느껴 보라구요. 아마, 거의 금단현상이 일어날 거에요. 그 시간에 조용히 책을 읽어요. 그리고,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라 이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기적도 보았고, 놀라운 능력도 경험해 보았지만 정말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채로 따라다녔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 어떻게 죽나? 구경하며 따라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예수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저 멀리,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은 빌라도의 법정에 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 여자들은 들어가지도 못한 채 두려움으로 떨며 혹시나 하고 마음을 조렸지만 마지막에 들려오는 이야기는 사형언도를 받으셨다는 소식이었고, 이윽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브라이 도리온’에서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쓰러질 듯 벗은 몸으로 골고다 언덕 올라가는 길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평소에 예수님을 뵈옵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 줄 압니까? 울음이 아주 깊어지면 폐가 핏줄이 움축이 되고, 그러면 이 속에서 가슴이 옥저여 오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요. 그때 이것을 두드려주면 이 핏줄이 굵어지면서 혈액순환이 잘 되면서 이 고통이 덜해지는 거에요. 그래서 반사적으로 힘들고 원통 하는 일이 있으면 가슴을 두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서 청소년들을 섬길 때 하나님이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기도를 시키셨어요. 여러분도 기도하면 아마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에요. 밤 11시 서부터 기도회를 하면 거의 새벽 5시에 끝이 났어요. 쉬는 시간 없이... 나도 몰랐어요. 그러고 기도회를 하고 어는 월요일날 가서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는데 여기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어요. 나만이 그런게 아니라, 거기에 모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어요. ‘우리가 만약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가슴을 치고 이 여자들처럼 슬피 운다면 우리의 목양에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잃어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여자들은 그러면 무엇 때문에 남들은 구경하며 올라갈 수 있는 골고다 언덕 예수 가시는 그 길을 가슴을 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을까요? 왜 울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을까요? 여기 ‘울다’ 라고 하는 이 동사는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통곡하며 우는 동사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남들이 구경하며 갈 수 있는 길을 이 여자들은 이렇게 통곡하지 않고는 가줄 수 없었을까요? 질문은 많아도 대답은 하나입니다. 이 여자들에게는 백성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 무엇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타나셨을 때에 그분의 아픔은 곧 자신의 아픔이었고, 그분의 그 고난은 자신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분이 받으시는 모욕은 자신의 모욕이었기 때문에 이 여자들은 통곡과 눈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 따라 갔던 것입니다. 이 여자들이 아무리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그 악한 로마 병정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도록 허락했을 리가 없습니다. 사형장이 가까울수록 이 여자들의 울음소리는 피어린 통곡으로 변했고 수많은 여자들이 목 놓아 울며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달라고 몸부림 쳤습니다.
아마 이렇게 울던 여자들 중에는 예수를 대신해서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힐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들이 이렇게 눈물로 통곡하며 예수를 사랑했지만 결국 예수님은 악한 자들의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병든 자를 섬기시던 그 손에 못 박힌 채로 하늘 높이 달리셨고, 거기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지금도 조용히 눈을 감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찬양)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십자가도 치워지고 슬피 울던 여인도 돌아가고 구경하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양심에 심한 가책을 받으며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그 길에 이름 모를 집들이 들어섰고, 다만 여기저기 예수가 넘어진 곳이라고 하는 표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십자가는 사라졌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는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를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경하며 이 십자가를 따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도 예수님이 남겨놓으시던 고난에 교회를 섬기며 동참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2천 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을 2천년 후를 살아가면서 지금 느끼고 거기에 참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듯이 우리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주님을 전심으로 믿는 이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놀라운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니 굳게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이 밤에 예수 만나게 해달라고, 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를 경험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고 비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이 그렇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회심 이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그 십자가의 은혜에 어떻게 부흥하며 살았는지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새로워져서 무거웠던 우리의 죄와 태만을 떨쳐버리고, 맨 처음 그 십자가 아래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겠노라고 했던 그 다짐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다시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당신 앞에 나아와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오늘 이 밤에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그래서 나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도록 도와달라고 주님 앞에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