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못 박은 예수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오늘 읽은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직후에 베드로가 외친 설교입니다. 성령강림은 사도들을 비롯한 유대인들 또 평소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로 하여금 구속역사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준 놀라운 각성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오순절 성령강림은 강력한 설교자를 만들어낸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설교자들의 핵심적인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이 결국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인류의 구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열쇠로 해서 풀리는 구원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구속사건입니다.” 구속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구속사건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속사건이 66권 모든 성경책에 똑같은 두께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희미하게 그리고 신약에서는 아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신약성경도 각 책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사건을 다루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빛이 각기 다릅니다. 또 그것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움이 다양한 층차를 드러냅니다. 이렇기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진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사건이 하나님의 아름다움 성품을 드러내는 절정이고 그 정점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역사는 구원이 없는 일반세상의 역사에 바탕 위에 놓고 보아야지만 아주 아름답게 보이고, 그 구원의 역사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가 왜 그렇게 기독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 부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구원역사를 아는 것이고, 구원역사를 올바로 알아야지만 이 세계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고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밖에 모른다는 것은 가치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범위 적으로 볼 때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구원역사도 모릅니다. 그냥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뿐이지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경륜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전도와 선교를 통해 만들려고 하는 세상의 계획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이 원래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만드신 계획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종말에 이루어질 위대한 세계 역사의 전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매우 소아적입니다. 내가 평안하고 내가 은혜를 받고 그런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가 알아야할 진리의 핵심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했는지, 그 인류를 구원하여 어떤 공동체로 만드시려고 했는지, 그렇게 만들어진 교회는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완성해 가는지에 대한 위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을 때 거기에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게 안 되어 있으니까 세계관, 가치관 그런 게 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냥 내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도 경건생활을 뜨겁게 해서 약간 무지해도 그 복음이라도 계속 마음에 불타고 있으면 최소한 죄는 짓지 않는데 그게 그렇게 그 사람의 마음속에 불이 붙습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지식이 없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불이 지속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게 단순하게 복음을 뜨겁게 외치는 사람이 이상하게 삶이 부도덕합니다. 그리고 뭔가 삶에 있어서 아우라가 없습니다. 존재의 울림이 없는 것입니다. 시끄럽기만 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쿵’하는 충격을 오늘 이 베드로의 설교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면서 그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요엘의 예언이 인용이 됩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남녀종들에게 부어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예언을 끌고 옵니다. 그 다윗의 예언, 그리스도로 하여금 죽음을 보지 않게 하겠다고 하는 예언을 끌고 오면서 예수 부활 사건을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본체 상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에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오기 전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뵈오며 하나님과 말하자면 교제를 갖고 있는 장면이 다윗의 예언 속에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썩음을 당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육체를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썩음을 당할 수가 없는 분이시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만약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썩고 파멸하여 흙으로 돌아갔다면 그러면 사람과 그 육체를 입은 하나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이 당연히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예수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와 예수의 주되심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집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일평생 하나님을 섬겼던 것을 하나님의 집에 사환으로서 충성하였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가족 관계의 이상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분히 육적인 것이었다면,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 가족이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부나 귀천이나 혹은 혈통이나 인종의 구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서 그렇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구현하는 그 관계가 고용주와 고용인 그런 관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의 자식이 되면 내 인생에 도움이 될까 손해가 될까 그것은 가족이 아닙니다. 이 새끼를 내 새끼로 삼을 때 내 인생이 경제적으로 플러스가 될 것인가 마이너스가 될 것인가 계산하고 자식들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가족은 그런 관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제일 나쁜 사람이 가족보고 해준 게 뭐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가족은 뭘 해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그런 것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있느냐고 하는 것은 안 살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느냐고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이미 가족에서 지웠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그런 말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어느 가족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사랑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에 가족관계를 지탱해 나갈 수 없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의 눈앞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랑으로 함께 묶어져야할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한 집으로 불렀지만 그 집은 온전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집에서 각 식구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 하는 삶의 질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여러 번 반복하셨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II. 십자가와 예수 주되심
A.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심
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주(主)’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주’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설명하고,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주되게 하신 것은 우리의 대속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후에는 하나님으로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기독론을 담고 있는 빌립보서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는 “곧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기독론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라는 것은 희랍어로는 ‘퀴리오스’이고 이것의 동치어가 히브리어에서 ‘아도나이’입니다. 이게 바로 ‘야훼’라고 하는 글자를 읽을 때 내는 소리였습니다. 결국 ‘주’ 혹은 ‘아도나이’라고 하는 사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대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소유주시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소유하는 주인이시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의 처분권이 주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수납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Lord’라고 하는 것은 일반 영어에서는 옛날로 말하자면 ‘주인님’입니다. 자기의 모든 재산과 가족, 심지어 생명까지 주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주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할 때는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소유가 그분에게 있고, 나의 인생과 모든 것이 그분의 처분에 달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정된 사실을 기준으로 삶의 모든 질서를 재편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립 서비스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주의 종이라고 불러주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취급하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 립 서비스가 아닙니다. 진짜로 그분이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나의 인생 나의 모든 것은 그분의 손에 처분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으로 자신의 삶을 재편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이 세례의 조건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이 머리의 구조가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1930, 40년대 중국이 공산주의화될 때 장개석의 국민당과 싸웁니다. 그럴 때에 공산주의가 전파되던 역사를 읽어보면 선교의 역사를 방불케 합니다. 그리고 모택동은기본적으로 철학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한 사상가였습니다. 그 밑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잘 훈련되어 있고 논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도 그리스도인과 똑같습니다. 생각 없고 열심만 있는 사람들이 있고 사상이 잘 갖추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 없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이단에 잘 빠집니다. 이단에 있는 사람들 굉장히 열심입니다. 여기도 몇 분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제 곧 밝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늘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없겠지만 혹시 들어왔으면 매주 설교할 때마다 그 사람들이 오늘 회심하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그런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연설을 하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외면하고 부르주아의 삶을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참회합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로 전향을 하는 것입니다. 즉 유물론을 자신의 로드, 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물론을 중심으로 자기의 사상을 재편해 버리는 것입니다. 곧바로 할아버지도 동무가 되고 공산주의 이념에 어긋나면 자기 아버지도 처단할 수 있는 무서운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뚜렷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서 공산주의도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면서 그런 뚜렷한 회심이 없이 공산주의자가 되는데, 붙어서 완장이라도 하나 차보고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하고 공산주의가 된 사람들은 말하자면 날라리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덜렁거리고 다니는데 머리는 텅 비었고 가치관의 재편이라든지 주되심 앞에 자기 인생을 재편한다든지 그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의 울림이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위협하면 곧바로 무릎을 꿇고 조금만 이익이 있으면 곧바로 자기의 입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존재의 선교가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주’가 바로 그런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보여준다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입니다. ‘구원자’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구원자입니다. 결국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것이고, 부활하게 하신 것은 그게 끝이 아니라 보다 더 완성적인 지위에 그분을 올려놓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지위에 올려놓은 궁극적인 과정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여호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우편이니까 좌편에는 누가 앉습니까? 그게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장소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해서 의자 두 개 놓고 가운데 의자는 좀 크고 옆의 의자는 작은 의자이고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성자가 성부의 위임을 받아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중심적인 위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 개의 축,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가 아니라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믿는 자와 불신자, 구속역사와 세속의 역사,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먼지와 티끌하나 아니 진공까지라도 그분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처분에 달려 있고, 그 모든 것들은 그분의 뜻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분에 의해 유지되고, 그분에 의해서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만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들을 깨우쳐서 주님의 주되심에 무릎을 꿇고 인생을 재편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선교이고 전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엄과 영광을 알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재편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옛날에는 자매들에게 인생의 계획을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개똥참외 같이 굴러가기도 하고 호박이 되기도 하고 그럽니다. 제가 가르쳤던 제자 중에 세계 선교에 불타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사원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냥 회사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게 사명을 저버린 것인지 아니면 착각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주되심 앞에 자신의 인생이 재편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무엇에 매이지도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선교는 예수를 믿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 아래서 행복한 것은 선교에 도움이 안 됩니다. 돈 많고 얼굴 예쁘고 젊고 건강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똑똑하고 그리고 좋은 데 시집가고 훌륭한 데 장가가고 그래서 행복하다면 그것은 아무라도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교가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존재의 울림이 있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선교이고, 돌아오는 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알 뿐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질서가 재편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사랑해서 그 사람 때문에 질서가 재편되지 않았으면 그것은 사랑한 게 아닙니다. 사무적인 관계입니다. 사랑하면 당연히 질서가 재편이 되어야 하고 그 사람도 질서가 재편될 것입니다. 서로 그 질서에 굴복하고 그 질서가 하나님 전체적인 질서에 어울리는 그게 사람이 만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두 개의 큰 기둥입니다. 하나는 ‘주’(主),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세계의 만물의 주인이 되어서 그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 주되심 아래로 안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그렇다고 고백을 한 사람이 수시로 변심을 합니다. 그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사람 잡아다 제자리 갖다놓으면 또 저 사람이 변심하고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화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돌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한 축입니다. 또 하나는 구원입니다. 주는 통치를, 그리스도는 구원을. 구원자 예수를, 한편으로는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는 궁극자 하나님을, 두 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사회를 바꾸고 구현되게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런 목적을 궁극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두 그리스도의 세계에 대한 주되심과 그리스도의 구원받을 백성에 대한 구원자 되심을 동시에 선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셔서 세상의 머리이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그것을 인정하든지 인정안하든지 간에 모든 세계는 그분의 통치의 권한 아래 있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것에서 교만의 수많은 죄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도 결국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시고 그리스도 되심이 바로 승천과 함께 이루어졌고, 그 승천은 부활 이후에 일어난 일이고,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상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그리고 승천 그리고 주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신 것, 이것이 하나의 고리처럼 계속 엮여져서 어느 한 부분이 끊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B. 성령의 부으심
그러면 성령강림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인간들을 복종시켜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서 살게 하시는 것이 인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결심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강력한 죄의 세력들이 여전히 인가의 마음 사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들 안에 있는 그 죄의 세력, 그 안에 있는 어두움의 세력들을, 육신의 법처럼 욕망을 따라서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경향성들을 파괴시키는 영적인 대 파괴가 일어나기 전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법을 그 안에 심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강림하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다시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생기를 가진 산 사람처럼 서게 하신 사건이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주되심 앞에 굴복한다는 게 쉽습니까? 솔직히 여러분들 중에서 남편에게 완전히 종처럼 복종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양심에 손을 얹고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해서 이 남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있는 한 나는 완벽하게 복종하여 아내의 자리로 들어갔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그런 사람 있으면 천사가 와서 목회를 해야 될 것입니다. 남편은 그 비율이 더 낮을 것입니다. 만날 배우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서도 어려운데, 만약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없다면 보지도 못하고 만져보지도 못한 주라는 분한테 인생을 통째로 드리고 그분에 의해서 가치관을 재편하나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론이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회심이, 바로 그런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생 가도록 흔들릴 때는 있지만 그것이 무너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회심의 중요성입니다. 오늘 기독교의 위기는 중생과 회심에 대한 확고한 견해가 약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렇게 주가 되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성령을 보내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내가 가면 보혜사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보혜사 하는 일이 당신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계셨을 때 하셨던 그 일을 그대로 뒤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증거 하셨는데, 성령은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병 고침의 위대한 역사는 오늘날의 기도응답을 통해 나타나는 병 고침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의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뒤 잇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신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언제나 같은 표증이 나타나는데, 예수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성령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 부으심은 결국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막혔던 관계가 다시 열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신유와 기적과 기쁨을 바로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서 강물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가 쏟아지게 된 증거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적인 관계가 완전히 열리게 될 때 받을 축복을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물은 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안하느니만 못한 선물이 아내에게 선물하는 바가지 아니면 가위, 애들이 제일 짜증나는 선물이 학용품, 운동화입니다. 어차피 사주어야 하는 것인데 선물을 위장해서 때워 버리는 것입니다. 짜증난다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목사에게 선물하는 성경책, 많습니다. 각국 성경책이 수십 권이 있습니다. 차라리 도서상품권이 낫습니다. 선물은 자기 돈으로 안 살 것 같은 것 그런데 갖고 있으면 정말 만족할 그런 것을 사주는 게 선물이고 그런 사람이 작은 것을 사주어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현찰로 주는 것 좋아한다고 아내나 남편들이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기억이 별로 안 남습니다. 물론 그것도 아주 많이 주면 기억이 남겠지만, 기억에 남겠습니까? 그러니까 성령을 선물로 주셨는데 'extraordinary'한 것입니다.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게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위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온 인류에 한꺼번에 아무데나 부어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교회 위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안에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된 것처럼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성령을 받으면 가장 뚜렷한 표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그리고 함께 믿는 모든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는 형제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지 않는 영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못 박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성경이 일목요연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을 때 저자의 심정을 전수받아서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성경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게 되면 거룩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게 모두 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게 결국 잠재적 교회를 향한 사랑입니다. 나중에 기회 닿으면 연합의 교리를 설교하면서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고 치료하고 선포하시는 일을 하셨고, 그것을 성령이 오셔서 그대로 뒤이으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공간 안에 계셨기 때문에 직접 설교하셨지만 이번에 성령은 사도들을 깨우쳐서 사도들로 불타게 해서 설교하게 하고 교회를 통해 가르치게 하고 그 다음에 교회를 통해 치료하게 하고 하면서 예수의 사역을 뒤이어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 성령의 위대한 부으심의 특별한 선물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영원한 중심주제가 되는 이유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결국은 우리의 구속은 두 축, 세상의 구원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하나에만 갇혀서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지, 어떻게 그 통치를 온전히 구현해 갈 수 있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감히 그러한 자신들의 사회적인 노력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순간에 초월적으로 임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이 변화되어가면서 나타나는 뚜렷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의 증거를 통해서 세상은 울림을 듣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아주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결국은 성령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고 당연히 승천도 없고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 되심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충만한 우주적인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축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그렇게 영원한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교회와 이 모든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적인 힌지(hinge)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을 타고 돌아가는 돌쩌귀라고 하는데, 움직이는 중심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위대하게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충만한 은혜가 십자가에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국은 특별한 몇 개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이 제일 먼저 싹튼 선구자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가 영국이고, 그런 어떤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탈신의존적인 인간의식이 생겨난 원초적인 나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계몽주의적인 정신이 강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식으로 거기 가서 설교하고 이야기하면 계몽주의 이전의 미신적인 시대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시인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교회를 놓고 보면 그렇게 그 사람들이 보기에 무식하게 성경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리고 설교자가 사람들이 동의하든 말든 시대정신하고 상관없이 뜨겁게 외치는 교단들, 'Free Church'라고 하는데, 그런 교회들은 지금도 성장을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저하고 신학적인 입장이 같지는 않습니다만 피터 마스터스라고 여러분도 그분의 책을 몇 권 읽었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갔을 때 그 교회의 소문을 듣고 그 목사님하고 좀 만나자고 해서 가서 만났습니다. 한 시간 동안 신학적인 대화를 나눴는데, 저하고는 신학적인 입장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보기에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치우쳤다고 할 정도로 보수적입니다. 보수적이라기보다 근본주의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엄격하고 근본주의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그 목사님 부임했을 때 한 40명모이던 교인이 지금 900명 정도 모이고, 더 놀라운 것은 주일학교 학생이 600명 정도 모이고 있고, 그 회중 1500명이 거의 모두 주일을 교회에서 보낸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밥하지 않고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은 옷 일으켜도 각자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펼쳐놓고 먹으면서 교제하면서 하루 종일 교회에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미련해 보이는 복음의 교리를 그래도 붙잡으면서 살려고 하는 교회는 그래서 성장합니다. 결국은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훌륭한 각성제는 자기하고 둘도 없이 친하던 사람이 회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양쪽에 있는 사람이 모두 회심할 때 엄청난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그 소외감을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기독교에 뭔가 실체가 있는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지지 않은 사람에게 최고의 전도는 들려주는 것도 좋지만 그 정도가지고 안 깨지니까 자기하고 똑같은 인간이 놀랍게 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약입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경험했습니다. 매일 같이 몰려다니던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회심하니까 너무 너무 무섭더라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왜 즐겁지 않고 무서울까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기 양심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이성주의를 외치는 곳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고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위대한 사건과 그 보혈의 능력을 말하는 그 곳에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 전혀 없는데도 금이빨 사건처럼 영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다른 영의 역사겠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깊이 묵상하는 것은 충만한 성령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십자가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