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떡 예수(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녹취자 : 조원정
Ⅰ. 본문해설
요한복음은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쓴 책입니다. 아마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서까지 이 네 개의 복음서중 가장 선교적인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마가복음까지는 기록이 연대기적인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연대기적인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되어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책입니다.
2장부터 11장까지가 예수님의 기적과 강론하신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22절부터 71절까지 긴 강론이 이어지는데 이게 바로 떡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6장에 나타난 어떤 사건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그 기적의 사건이 있고 나서 이 가르침이 따라오게 됩니다. 예수님이 생애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 기적들 중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에 가장 강력한 인상을 주었던 기적이 바로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 기적의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신하셨는데 거기까지 따라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따라 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따라 온 것이 아니냐 하면서 그들의 동기를 비판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관심이 너희들이 먹고 기가 막히게 감동을 받고 또 그것 때문에 당신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썩을 양식을 위해 당신이 온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왔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늘에서 온 떡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Ⅱ. 하늘에서 온 떡 예수
A. 당시 문맥과 “떡”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 온 떡이 있는데 그 떡을 먹고 너희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 그 떡이 바로 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의 문맥에서 이 떡이 뭘까 하며 우리들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르토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학교 다닐 때 단어가 안 외워지니까 빵을 먹으면 알통이 나온다고 해서 배웠습니다. 사격이 되면 알통입니다. ‘아르토스’는 뭔가 하면 히브리 사람들이 먹는 주식으로서의 빵입니다.
우리는 떡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거의 떡 안 먹습니다. 제가 떡 장사 했다는 얘기 했습니다. 20대 때 떡 장사를 했습니다. 그게 계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새벽에 방앗간에 가서 불린 쌀을 가지고 떡을 합니다. 새벽에 한 여섯시쯤 자전거를 타고 떡 방앗간에 가서 떡을 다해서 포장을 해서 팔러 갈 때가 되면 9시 반쯤 됩니다. 납품도 하고 남은 것은 시장에 갖고 가서 파는데 신기한 것이 두시가 되어도 배가 안 고픕니다. 떡 냄새를 맡아가지고 배고픈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 떡 장사를 하고 나서는 20년 동안 떡이 보기가 싫습니다. 지금도 좋아하는 떡이 없습니다. 시중에서 파는 모든 떡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먹고 싶은 떡은 없습니다. 팥 많이 들어간 먹음직스러운 것 딱 한 개정도, 떡 자체가 싫습니다. 빵도 싫어하고 다 싫어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한 떡이라고 했을 때 나 같은 사람은 헐 그럽니다. 평생 안 먹어도 살 수 있는데 번역을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떡이 아니라 밥이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빵이 주식입니다. 특별히 히브리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은 막 위에다가 버터 바르고 한 그런 빵도 양과점에서 팝니다. 이 사람들이 원래 주식으로 먹는 빵은 그런 빵이 아니라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집트부터 조금씩은 다르지만 다 비슷비슷합니다. 빵을 반죽을 해서 약간 보들보들하게 했지만 소금만 집어넣은 그런 빵입니다. 뭉글하게 발효를 시킨 다음에 펑퍼짐하게 구워 냅니다. 찢어서 속에다 뭘 집어넣어 먹기도 하고 그냥 먹기도 하고 그 빵은 참 좋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떡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떡은 주식입니다. 너희 떡 없이 못 살지? 알토스 없이 못 살지? 내가 바로 그 알토스야.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한테 떡이라고 번역하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빵이라고 번역하면 더 모릅니다. 밥이라고 그래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한 생명의 밥이니, 밥 안 먹고 못 삽니다. 우리는 떡을 먹어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똑같은 쌀인데 형태가 다르지만, 그런 점에서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는 떡이다. 아르토스라고 하는 그것은 절대로 없이는 못사는 생명을 지탱하게 하는 양식으로서의 제유법입니다. 이 비유가 아주 재밌습니다. 물질적인 차원의 비유와 신령한 차원의 비유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섞여 있으면서 아주 고차원적인 방정식을 풀듯이 그렇게 문학적인 기교를 가지고 이미지를 만들면서 예수님이 당신의 가르침의 내용을 아주 극대화한 장면이 바로 이 떡 비유입니다.
B. 모세의 떡과 예수의 떡
예수님이 당신이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누구와 비교하느냐 하면 모세의 떡과 자기를 비교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떡이 무엇입니까? 만나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나올 때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먹을 것이 딱 떨어지니까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신 것입니다. 새벽이면 이슬이 내린 것처럼 내리고 그것들이 알갱이가 되는 것입니다. 가서 그것을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하루 먹을 것만 가지고 와야 합니다. 더 가져오면 썩어 버립니다.
안식일 전날은 두 배로 가지고 오고 그것을 그렇게 빻아서 떡을 만들어 먹고 하는데 그렇게 맛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 맛있었지 매일 먹으면 그것이 맛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고기도 먹고 참외도 먹고 뭐도 먹었는데 이까짓 거 맨날 만나만 먹어가지고야 우리가 정력이 없다. 그러면서 엉엉 웁니다. 그것이 울 일입니까? 하나님이 그래서 메추라기를 먹이십니다. 이 떡은 외관적으로 볼 때는 기적적이었습니다. 조상도 못 먹어본 떡이었습니다. 심지도 않고 뿌리지도 않았는데 하얗게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둬들여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양식을 먹었는데 죽었다. 그러니까 그 양식은 뭘 말합니까? 육신만을 위한 양식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만나만큼 기적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 볼 때는 저거 요셉의 아들 예수네. 마리아가 낳았으니까 요셉의 아들 예수구나. 그리고 요셉의 아들 예수가 목수를 하더니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 보니까 선지자가 되었네. 이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조금도 기적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해서 떡을 내리셨지만 예수님을 사용해서 떡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당신 자신을 떡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훨씬 신령한 차원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1. 물질적 차원
a. 만나가 물질로서 백성들에 먹힘
물질적 차원을 생각해봅시다. 만나가 쭉 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만나를 거둬들입니다. 그걸 빻아서 떡도 만들고 과자도 만들어 먹습니다. 그것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킵니다. 다 흩어져서 육체에 생명을 줍니다. 물질이라는 것이 무언가 하면 작은 것이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될 때는 주위의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큰 덩어리가 막 쪼개질 때에는 거기서 에너지가 나옵니다. 큰 덩어리가 작은 것으로 확 쪼개어 지는 것이 뭐냐 하면 폭탄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활발하게 찢어지는 것이 핵폭탄입니다. 그보다 더 활발하게 찢어지는 것이 수소폭탄입니다. 수소폭탄을 터트리려면 속에서 원자탄이 터져야지 수소폭탄이 터집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만나를 먹었다면,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큰 덩어리가 들어가서 잘게 부서집니다. 거기서 에너지가 나오고 몸속에 스며들고 소화되지 못한 찌꺼기는 뒤로 빠져나옵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육체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휴식과 음식을 통해서 충전이 됩니다.
b. 예수가 육신으로 십자가 죽으심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먹히시나? 먹히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먹히시기 위해서는 먹어도 좋은 음식이 되는 과정이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에게 떡이 되신 것이라면 우리가 그를 믿는 것은 그 예수를 먹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물질인 떡의 원리를 사용해서 아주 복합적인 층차로 문학적인 묘사로 하면서 궁극적으로 신령한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우리는 지금 다 이해하지 못하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2. 신령적 차원
신령한 차원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어서 육신적으로 배불렀습니다. 만나가 가나안 정복하고도 만나가 내립니다. 씨를 뿌려서 작물을 거둘 때까지 내립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배려심이 많습니까? 년말정산에서 세금을 거둬 가려고 했던 정부는 예수님의 자비심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들어가자마자 안 내렸다면 1년 동안 배고파서 어떡하겠습니까? 첫 번째 추수해서 먹을 때까지 내리고 그 다음에 딱 끝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도 만나의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해 주셨을 때 당신이 이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고플까봐 이렇게 만나를 줬다. 우리가 보기에 간단한 사건 같지만 300만 명쯤 되는 사람들의 매일 끼니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인들이 어떤 때 천 명 정도 밥을 먹으려 해도 정신이 없는데 하물며 300만 명이 밥을 먹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배부르게 긴 세월을 먹이신 것입니다.
a. 하늘 기적의 만나는 말씀을 예표
그런데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세를 통해서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이 아주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도 먹어보지 못한 만나로 너희를 먹이신 것은 이 다음 사실을 너희에게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너희가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내리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아침에 나가서 맨 처음에는 막 감격하면서 만나를 거뒀겠지만 그 다음에는 바가지 들고 투덜투덜 거리면서 에이 또 맛대가리 없는 만나야, 바가지 들고 투덜투덜하면서 걸어가는 표정이 예배당 나오기 싫은 사람이 주일날 교회 나오는 그 표정하고 틀림없이 비슷했을 것입니다. 가긴 가야 되겠고 그거라도 먹어야 되니까, 굶으니까 갔을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그렇게 했겠습니까!
신명기 설교가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유언적인 설교입니다. 그걸 다 회상하면서 해석을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조상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너희에게 만나를 먹이셨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모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만나는 먹었는데 그것은 육신을 살기 위함입니다. 아 이렇게 육신적으로 매일매일 이른 새벽에 나아가서 만나를 거두어서 우리들이 이렇게 요리를 해서 먹는구나. 하루의 생명을 지탱하는구나. 그러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배경이 모세의 시대 때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다 얘기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을 하면서 너희들이 생각하라. 그렇게 거둬들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아 우리의 영혼은 무슨 양식을 먹어야 하나.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이렇게 먹어야지만 육체가 이렇게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생명을 유지하겠구나.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나님이 만나의 사건을 허락해주셨다는 뜻입니다.
b. 말씀(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
신명기 8장 3절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했는데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지어졌다고 선언을 하고 요한복음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1장이 요한복음 연구에서 굉장히 관심이 집중되는 장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충격적인 선언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말씀이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사람들이 이미 사용하던 개념이었습니다. 로고스가 뭐냐 하면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원리입니다. 모든 만물들 속에 종자 씨가 있다. 이 세상에 무지하게 많은 만물들이 있는데 그리스 사람이 생각할 때 만물들이 모두 구슬과 같다면 무언가 이 구슬을 꿰어서 하나로 만드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가 뜨면 햇빛이 비취고 생기가 돌고 다음에 식물과 동물들이 자라고 성장하고 해가지면 다들 잠들고 이렇게 순환하고 하는 모든 과정들을 보면서 일정한 질서와 규칙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당시만 해도 엄청나게 과학이 발달했습니다.
지구가 동그란 공같이 생겼다는 것을 사람들이 언제쯤 알았는지에 대해 몇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14세기, 15세기,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주전 250년경에 인류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극비사항이었습니다. 헬라시대 때 그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는 나중에 내가 설명해 주겠습니다. 무지하게 재밌습니다. 확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움직일 수 없는 수학적인 증거가 딱 나온 것입니다. 그 대신 몰랐습니다. 동그란데 어떻게 반대편에서 사람이 붙어 있을 수 있느냐, 이런 것은 이 사람들이 해명을 못했습니다. 이게 만약에 온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면 어마어마한 사회적인 대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수학적 진리를 누설하면 피타고라스학파에서는 죽였습니다. 그것은 신들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고 은밀한 비밀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깨어 있는 그런 시대인데 로고스의 사상들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이렇게 질서정연한 것은 로고스 때문이다. 로고스를 발견해야지만 그 어떤 사물에 모양에 얽매이지 않고 그 의미가 무엇이고, 원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로고스가 너희는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 그냥 로고스라고만 부르지? 이 사람들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야, 그분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자였고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다. 그 당시 사람들은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로고스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로고스가 물질의 세계와 만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선이 악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이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사회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사회악의 연구입니다. 이 사람이 연구하고 이 사람이 연구하는 것이 다 달라서 방언하는 것처럼 딴 소리하고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면 다 통합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의 일정한 법칙과 원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만물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고스입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은 성경을 아는 지식이 중심에 있지만 그 중심에서 뻗어나가는 그 지식에 아름다운 연결체들을 통해서 모든 자연의 세계와 학문, 과학의 모든 세계들이 살아서 움직이면서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소리들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한 성자는 만물과 관계를 맺으심으로서 만물 안에서 원리를 움직이심으로서 학문의 근거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학문을 하면 그것을 과학적으로는 밝혀지는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도덕적인 의미 있고 하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서울대 다니는 어느 학생이 규범 윤리를 전공하는 어느 교수가 가장 비윤리적이랍니다. 학문으로서 윤리학은 공부를 해도 예수님을 모르니까 그 학문이 자기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에도 성자께서 그렇게 만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로고스로서 고대서부터 학문을 하면서 사람들이 그 속에서 로고스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완전하게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찾아낼 수 있었고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산속에 광맥들이 쭉 있는데 채굴을 하면서 그 광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한 2년 되었는데 유럽에 출장을 갔는데 티비를 탁 켜니까 영국인가 방송이 나옵니다. 벤츠 회사 인터뷰를 하면서 설명을 하는데 시연을 하는데 이미 벌써 다 만들었습니다. 서울에서 저 시골 어디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뒤에서 누워 책보고 차가 스스로 가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도시를 출발해서 고속도로를 지나 지방도로를 지나 샛길을 지나고 동네 작은 골목까지 다 지나서 그 집 앞에 탁 세워 주는 것입니다. 저것을 개발을 끝냈답니다. 2015년부터 양산에 들어간답니다. 우리나라 오늘 신문에 보니까 우리도 거의 90%까지는 따라 잡았고 올해에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주행할 수 있는 차가 현대에서 나온답니다. 5년 후에는 완전히 손을 떼는 차가 나오고 어떤 미래학자는 20년 후에는 운전을 하면 잡아가는 시대가 올 거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손을 대지 마시오.
실제로 우리나라하고 미국하고 큰 문제가 뭐냐 하면 노령 층의 사고, 굉장히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운동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데서 대형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는가 하면 찾아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리 많이 찾아내 봐야 우리의 영혼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집중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 그렇게 만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로고스가 되심으로서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의 근원이 되셨다면 그것은 아무리 찾아내봐야 집을 잘 짓고 기계를 만들고 악기를 잘 연주하고 즐거워하고 뭔가를 생산하고 육신과 우리의 정신 정도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뿐이지 영혼을 위해서는 봉사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질이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이런 모든 성품들을 빛을 품어내듯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것을 증거 했지만 비유를 하자면 그것은 mp3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D TV로 오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약 성경이 3D TV처럼 촬영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mp3에 담습니다. mp3는 너무 진전했습니다. 녹음테이프에 담아서 돌렸다면 신약시대에는 그것을 3D, 4D로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실제 사람의 몸을 입고 사셨던 생애가 있었기 때문에 3D촬영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우리 옛날에 티비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국과일본이 축구를 한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전부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코너 박스에서 누가 골을 몰고 어디로 간다든지, 전부다 사람들이 백지 한 장 놓고 그림을 그리듯이 그렇게 듣는 것입니다. 그것하고 대형 칼라 티비에서 막 선수들이 뛰어가서 땀방울 흘리는 것 보이는 것 하고 두 개를 비교해 보십시오. 지지직거리는 전기 라디오, 안 나오면 탁탁 치는데, 우리가 그랬습니다. 일제 라디오는 치면 망가지는데 국산은 때리면 나옵니다. 그런 것 하고 비교를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이 찬란하게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지 당신의 은혜가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3D, 4D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빛나는 구름 가운데서 얘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사랑하라. 배고플 때 이렇게 나눠주라 하면 감동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당신은 힘드셔도 섬기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믿음 없는 자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시고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주시고 그러는 과정을 모두 보면서 사람들은 찬란하게 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모세의 떡과 새로운 산 떡이신 예수님에 대한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C. "살아 있는 떡“ 예수
예수님이 당신을 살아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호 아르토스 호 존, 분사입니다. 생명력 있게 살아서 움직이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우리들이 생선이라도 물속에 있어서 그 자리에서 탁 잡아서 꺼내서 탁 올려놓는 것을 활어라고 합니다. 냉동된 그런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입니다. 이건 결국 무엇을 암시하는가 하면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생명은 더 이상 만나를 먹으면서 유지했던 육체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무리를 보시고 그렇게 가슴 아파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영적인 기근상태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기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과 함께 그 기근을 해결하는 핵심이 하늘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화) 15년 전쯤인가 미국에 집회를 갔습니다. 숙소를 잡아줬는데 나라면 절대 안 들어갈 것 같은 이상한 여관에다 잡아줬습니다. 침대의자도 부러지고, 그 사람들 시차가 바뀌어서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영어도 잘 못하지만 티비를 눌렀습니다. 이게 뭐야? 토크쇼를 하는 것입니다. 스웨덴 티비를 직방으로 보여주는데 한 이정도 인원이 모였습니다. 사백 명 오백 명쯤 모인 것 같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사람들이 토크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자이크 처리도 안 했습니다. 얼른 끄려 하다가 이 프로가 뭔가 해서 궁금했습니다. 20대 30대부터 시작을 해서 80대까지 있습니다. 인터뷰 하는 사람이 나왔는데 80몇 먹은 할머니입니다. 몸이 뭘 볼 게 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 끄고 나서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섹스문화가 보편화 되어 있구나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나이가 85세가 되어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었고 어디다 내놔도 그 육체를 탐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보여주는 자체가 사람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학대입니다. 난 학대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 아직도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니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길버트 체스터턴의 책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벌거벗고 나와서 미친 짓을 할 때 저게 결국은 하나님 우리는 굶주렸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거대한 함성이었습니다. 체스터턴이 그랬습니다.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중이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다니고 그럴 때는 굶는 게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서 그때도 돈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개 무시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지금은 잘 살다가 망했어도 먹고 입고 자는 것은 걱정이 없는데도 자존감을 상실한 것을 못 견디고 죽어버리든지 자살해버리든지 마찬가지 말이지만 그렇게 인생을 끝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사태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 힘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준비 오후 내내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제 끝이다. 내 인생 종착역에 왔다. 끝냈으면 좋겠다. 이번에 비행기 몰고 저먼윙스에 떨어진 사람, 그런 일들이 가끔 일어납니다. 비행기 잘 타야 됩니다. 나 죽는 김에 너희들 같이 사은품으로 가자. 떨어져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쁜 놈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살면서도 이제 끝이다. 심지어 예수를 믿었는데도 아 진짜 끝이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나한테 물었습니다. 목사님 자살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자살을 하면 구원을 못 받는데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까? 자살한다고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용기를 주면 실행을 할까봐, 그러다가 은혜를 받습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듣고 펑펑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났는데 교회 안에 있을 때는 어마어마한 변화가 내게 일어난 것입니다. 문밖만 나가면 현실은 손톱만큼도 안 변한 것입니다.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배당 문을 열고 눈물이 흐르고 찬바람이 싹 부는데 교회 들어올 때 그렇게 거대하게 보이던 세상, 나의 삶의 사태가 그렇게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문을 열고 나갔는데 놀랍게 만만하게 보입니다. 한번 해보자. 내가 그까짓 거 뭘 못 헤쳐 나가랴,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 짧은 시간에 생명이 충전된 것입니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가서 용서를 빌고 사과하고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궁금한 것은 도대체 그 생명이 뭘까? 그 생명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인간을 바꾸어 놓는 것일까? 더욱이 영적인 생명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놀랍게 바꾸어 놓는 것일까?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