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아마도 사도바울은 고린도 지방에 있었던 것 같고, 사도바울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서신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신앙에 있어서 미약한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쓴 모든 서신서들 중 기독교 신앙의 대의를 가장 풍부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서신서가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은 유대인으로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의 신앙을 교정할 목적으로 이 로마서를 서술하게 되었습니다.
성경 66권 중 아마 이 로마서만큼 역사적으로 수많은 간증을 남긴 성경책도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결정적으로 회심하게 된 것도 로마서의 한 구절을 소년들이 들려주는 동요소리를 들으며 펼쳐 읽기 시작한데서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고,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종교개혁의 언어로 재진술하게 된 것도 로마서를 연구하면서였습니다. 18세기에 전설적인 설교가 중 한 사람인 요한 웨슬레의 회심은 마르틴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을 읽는 것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의미 깊은 이 로마서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로마서를 쓸 때쯤에는 사도바울이 이미 신학적으로 상당히 성숙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모든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고하게 중심에 와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와 완성과 이 모든 위대한 계획의 한복판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신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인간의 몸을 입고 와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야 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가 참 사람이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생식에 의해서 태어나신 분은 아니었으나 혈통적으로 다윗의 혈통을 타고 태어나신 것은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실 위대한 통치주가 되실 그리스도의 미래의 영광과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해석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다음 구절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성결의 영으로는” 애매하게 번역된 이 구절은 킹 제임스 버전에는 “성결의 영을 따라서”라고 되어 있고, NIV성경에는 “성결의 영을 통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 본문에는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혹은 “성결의 영을 인하여”, “성결의 영 때문에” 번역될 수 있는 이러한 표현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이신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릴 수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탁월한 믿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셨지만 참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공포될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사건은 바로 성결의 영을 통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결의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도 모든 만물을 성령 안에서 창조하심으로 모든 만물이 생명과 그리고 사랑의 상호 교통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이루어질 인류의 미래,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접붙임으로 미래의 인류를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성령을 성결의 영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 성령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모든 개인과 인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그 일이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들을 성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울로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자의 길을 걸어가는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일생의 지축을 뒤흔드는 신학적인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유대인 중 가장 엄격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지파에서 태어나 일생동안 엄격한 히브리인으로써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 당시에 그가 충실한 정통적 유대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유대교는 구약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그대로 정통적으로 전수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유대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완전히 망하고 흩어진 이후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 시대 때에 만들어진 구약 여호와의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진 유대인들의 종교였습니다. 정통적인 여호와를 믿는 신앙은 거의 유실되었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인 편견과 미래에 대한 다윗 왕국의 재건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엄밀히 말하면 구약 종교와는 다른 종류의 종교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II. 바울의 신학적 혼란
이 사람 사도바울도 사울이던 시절에 바로 이런 교육을 받으며 유대 종교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일생의 지축을 뒤흔드는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다메섹에서 발생하고 있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전파하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간일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기에서 경험하는 신학적인 혼란은 사도바울의 일생을 바꾸어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겪은 신학적 혼란은 모순되는 두 개의 명제적 사실의 조화문제였습니다.
A. 십자가의 처형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처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가 제국을 이룬 다음에 만든 사형제도가 아니라 변방의 야만족이던 시절에 만든 제도입니다. 아마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사람을 손목에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달고, 나무에 박고 그리고 그 가로막대를 도르래 같은 것으로 끌어 올려서 이미 서 있는 채로 막대에 끼우는 방식으로 십자가는 조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두 발을 세로 나무에 큰 쇠못으로 박아 세 개의 못에 의해 죄수의 몸이 지탱되게 하였습니다. 늘어지는 온 몸을 세 개의 대못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 못 박힌 자리는 그 살이 찢어지고 뼈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가져다주었고,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많은 출혈은 죄수들에게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잔인함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마지막 실낱같은 목숨이 살아있는 순간까지 최대한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6시간 만에 운명하셨습니다마는 당시 어떤 사람들은 3일씩 되도 죽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여러분은 마가복음 15장 13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외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 서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예수님께 씌웠지만 증인이라고 조작되어 자청하는 사람들의 증언도 일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빌라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종교지도자의 사주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도록 사주된 유대인들이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되 다르게 죽여서는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로마시대에도 이 십자가 형벌은 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큰 죄를 지어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죽이는 법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민란을 일으키거나 살인을 해서 용서받을 수 없는 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른 경우 이외에는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에 만족하지를 않고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해 달라고 그를 죽이는 방법까지 요구하였던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넓게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좁게 보면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인 음모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커다란 하나님의 계획의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마땅히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잔인한 형벌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모든 구원받을 인류가 지은, 짓고 있는, 짓게 될 모든 죄를 짊어지신 속죄의 어린 양으로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 죄의 크기가 무한대였기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적 공의에 어울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가깝게 보면 그것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아주 간교한 음모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살아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당신이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밝히 말씀하셨고 아마 그 소식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도 들어갔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는데 제자들이 그 시체를 치워버린 다음 우리 선생님이 부활하셨다고 선전을 하고 다니면 백성들이 미혹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착한 사역에 동정심을 품었던 사람들은 더더욱 마음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있는 것보다 더 큰 혼란을 유대교 사회에 가져다 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구하라고 백성들을 사주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의 법에 따르는 십자가 처형을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인 개념과 연결시켜서 설령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가 없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부활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대로 믿을 수 없도록 어떤 장치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고,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음에 대한 한 신념이었습니다. 마침 로마에는 십자가라는 형벌 제도가 있었고 그 십자가는 돌이나 쇠로 만든 십자가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십자가였습니다. 거기에 못 박혀서 죽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돌이킬 수 없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살리실 리가 없으니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헛소문일 것이라는 신념을 그 십자가의 처형을 보고 또 그 소식을 듣는 모든 유대인 가슴속에 아로새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바로 종교적인 음모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인 것입니다.
B. 부활사건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그들이 의도한 대로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형벌을 당함으로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사도 바울도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일생에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나무로부터 그런 부활의 소식과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부인할 수 있었지만 이 젊고 똑똑한 사도 바울이 영광의 빛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고, 그 분의 음성을 들었고, 그 분께 자신의 기도를 아뢰었던 아주 분명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자신의 일생의 지축을 뒤흔들 놓는 신학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하나님의 저주였다는 명제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자기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명제적 사실은 조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나타나는 부활 신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에는 어떤 사람들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들려올라간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런 몸으로 하늘로 들려올라간다면 아마 10km도 가지 못해서 질식해서 죽어버릴 것입니다. 몸 자체에 어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로운 선지자였습니다. 부패한 배교의 시대에 어두운 밤하늘에 불꽃처럼 나타났던 엘리야 선지자도 하나님이 죽음을 보지 않고 병거와 함께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이 사람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해 마지않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명백하지 않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시체를 찾을 수 없는 이유가 하나님이 어딘가 감춰놓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부활시키셨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이외의 문헌에는 모세의 승천기라고 하는 성경의 형태를 가진 또 다른 기록이 존재합니다.
III. 성령과 깨달음
A. 회심과 십자가에 대한 깨달음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살리셨을 리가 없고, 만약에 하나님이 다시 부활하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저주를 해서 나무에 매달아 죽이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가 없었는데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웠기 때문에 두 번째 명제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생각한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적도 없는 일이 그 안에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은 그의 회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을 넘겨보면 아주 놀랍고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이 풍부하게 나오는 것을 봅니다.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를 사도들이 살리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성령의 역사를 오늘 바로 여기에 재연해야 하고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옳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의 가장 고유한 사역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당신이 가야지만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가 오시면 당신이 아무리 가르쳐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예수님의 그 제자들을 데리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가장 고유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한 사람 안에 일어났다는 움직일 수 없는 중요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신비의 경험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인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아주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220V의 전압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예전에 아직 인프라가 완전히 구축되지 않았을 때에 어느 곳에서는 100V의 전압을 그대로 사용하고 어느 곳에서는 220V의 전압을 사용하기 때문에 가게에서 두 종류의 전구를 같이 파는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못 사 가지고 오면 이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게 되냐 하면 220V 전압이 들어오는 집에서 100용 전구를 사 가지고 와서 끼우면 제자 직접 경험했습니다. 한 3초 동안 그 필라멘트가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빛을 바래다가 퍽하고 끊어집니다. 그런데 반대로 100V의 전압이 들어오는 집에 220V 전압용 전구를 사다가 끼웁니다. 그 당시에 동그란 백열전구가 가정에서 쓰는 것 중에서 가장 밝게 나오는 것이 100W였습니다. 100W는 거의 100촉광쯤 됩니다. 그래서 끼우면 신기하게 그것을 끼워 보고야 비로소 전구를 잘못 사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발그스름하게 빛이 들어오고 더 이상 밝은 빛을 내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 예배당에 그런 전구 1000개를 켜놨다고 하더라도 결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정도의 빛의 밝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유를 한번 들어 보는 것입니다. 여기다가 한 2000개쯤 전구를 끼웠습니다. 그런데 너무 희미해서 들여다보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어느 한 순간에 100V의 전압을 220V로 한 번에 확 전환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예배당에 한순간에 20만 촉광의 빛이 떨어집니다. 눈부실 정도의 밝은 빛이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 예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모순된 두 개의 명제적 사실에 대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의 지성 속에는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찬란한 광채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회심이 이루어졌습니다. ‘회개하다’라는 희랍어 단어가 ‘메타노에오’(μετανοεω)라는 단어입니다. 이와 유사한 단어가 성경에 나오는데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ελομαί)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멜로마이라는 단어에서 영어의 'melancholy'가 나옵니다. ‘메타멜로마이’ 혹은 ‘메타노에오’ 모두 ‘메타’라는 접두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후에, 한 번 더, 나중에’ 그런 뜻입니다. ‘멜로마이’는 ‘후회하다’이고 그 다음에 ‘메타노에오’는 회개하다가 되었는데 ‘후에 다시 한 번’이라고 하는 메타와 노에오 ‘생각하다’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 ‘메타노에오’라고 하는 단어는 어떤 초자연적인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완전히 인간의 생각의 방향이 바뀌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가 기독교권에 들어오면서 ‘회개하다’라는 단어가 되었지만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 단어를 도입해서 종교적인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면서 회개하다의 가장 큰 중심이 지성에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진실로 올바르게 회개한 사람이라면 제일 뚜렷한 표가 두 가지인데 생각이 바뀐 것과 그 다음에 사랑입니다. 그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고 구약을 읽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들만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 안경이 벗어지게 되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전개된 모든 인류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의 사건을 향해 줄달음질쳐온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한 가지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미래에 신약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보여주고 마지막에 이 신약의 교회의 시대가 완결되는 일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어두운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 같은 큰 충격이 주어졌고,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찬란한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한 순간에 이 세계와 우주, 인간과 역사, 국가와 인간,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 인생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심리적인 회심과 신학적인 회심이 있습니다. 심리적인 회심은 왠지 친구와 함께 부흥회에 따라갔는데 우는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이니까 자기도 맘이 좀 짠하고 서러워서 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변화이지 지성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회개는 이 모든 우주의 중심에 온 땅과 만물 위에 계신 그리스도가 이 모든 창조와 그리고 이 모든 구속과 모든 이 세계의 완성의 중심에 서 있다는 신학적인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주 분명하게 세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인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만물들은 어떤 질서 속에 있어야 하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아주 또렷한 인식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렇게 인생관과 우주관이 딱 바뀌고 그 다음에는 이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모든 지식을 통합하여 기독교 사상을 일구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은 자기가 직접 경험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인데 그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 저주는 자신의 죄 때문이, 예수님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과 하나님이 그를 살리신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고,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구원받은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렇게 당신 자신을 모든 구원받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은 이 아들을 더욱 사랑하셔서 그를 살려 내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그리스도께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라고 하는 이 네 개의 단어로 집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첨착하는 생애였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구현한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규정하는 그곳에서 항상 부활의 의미도 함께 드러났던 것입니다.
복음을 가장 광의로 해석하면 성경 66권이 다 복음입니다. 이것을 좀 더 좁게 해석하면 예수님이 이 지상에 남기신 모든 가르침과 인격과 삶의 모본이 복음입니다. 그것을 더 요약해서 더 이상 줄일 수 없도록 한 문장으로 만들면 'Jesus died for us.'가 되는 것입니다. 이 네 개의 단어 'Jesus died for us.',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입니다. 이 for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의미이고,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의미이고,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형벌을 당할 때에 우리 떼어놓고 당신 혼자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당신 속에 끌어안고 당신이 그 모든 죄를 짊어지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그 덕택이 우리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내포적 대신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큰 충격이었고 이로 인해서 그는 이제껏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로서 살아왔던 그 인생을 지탱하던 그 축이 부러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이 복음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일생 그를 비진리 속에 살게 했던 세 가직 편견으로부터 해방 시켜주었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편견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메시야일 수가 없고, 그 메시야는 그런 방식으로 죽을 수 없다고 하는 편견을 교정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메시야였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심리적 편견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선택된 백성이요 이방인들은 쓰레기와 같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며 멸시하던 편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대인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이 심리적인 편견에서 벗어났고 그래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영적인 편견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육적인 이스라엘의 독립과 번영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그는 이스라엘 나라야말로 썩어 없어져야 할 육적인 나라요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영적인 더 아름다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그 영적인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이런 모든 것이 구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B. 새로운 자원을 소유함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비록 위대한 사도이고 특별히 하나님 사랑을 받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방식을 정확히 따라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정직하고 선명한 선포가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 복음이 현대인의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인간 스스로의 구원을 완성해 가는 존재로, 주체성이 있는 존재로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끔찍하고 절망적인 죄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부들부들 떠는 진노를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그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직까지 회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했다면 오늘 아주 명백한 이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여러분이 죄인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 여러분 자신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여러분의 영혼에 유쾌하게 되는 날들이 오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여러분에게 주심으로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그는 예전에 유대교 신자였을 때에는 결코 가지고 있지 못했던 새로운 하늘 자원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발견했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시는지를 발견했고, 또 예수님이 왜 사람의 몸을 입고 참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지도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까 놀라운 지혜가 찬란한 빛처럼 어두운 지성을 찢으며 비춰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왜 인간들이 타락했는지, 타락해서 망가진 이 세상을 왜 하나님이 버리지 않고 구속하시는지 그리고 구속된 이 세상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해 가는지 하는 모든 인류 역사에 대한 경륜을 한 번에 보게 되었고, 또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그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규명하면서 그는 거짓과 오류 속에서 죽어가던 자신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다고 단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도 첨착 하게 되는 신학적인 주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공허한 이론과 그리고 학문의 주제가 아니라 오늘 사도 바울로 하여금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해 죽고 다시 그 부활의 생명을 체험하고 살아가게 해 주는 실제적이고 그리고 실천적인 지식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이 사건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께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진 사람, 자신 안에 여전히 교만과 죄가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그리고 우리 주님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어야 했던 자신의 죄와 오류에 대해서 회개하고 죽을 때에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자신 속에 실제화 되어 그래서 교만과 죄를 죽인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렇게 죄에 대해서 죽는 것만큼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기운이 자신 속에 스며들어 자신을 새 생명으로 재창조 해 나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향해 죽는 것과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사는 경험은 사도 바울의 삶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 안에서 날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하나님이 이미 자신에게 주신 생명과 모순이 되는 죄와 싸우며 살아가는 실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속에서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성령의 생명과 사랑을 힘입어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유대인들을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저주를 받을 지라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사랑이 그 사람의 심령 속에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경험이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동일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모든 삶의 의미에 대한 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그 믿음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을 부어주셔서 그 사랑과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인간은 인류의 불행을 모두 자기 밖의 원인에서 찾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자원을 풍부하게 소유하면 인간의 대부분의 불행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러한 인간의 생각은 허위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 악과 고통은 근본적인 죄에 대한 하나의 증상일 뿐입니다. 그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바로 이 일을 해결하여 인류에게 희망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영광스런 생명의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에 깊이 묶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의 의미에 굳게 메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처럼 아직 용서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곤고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도 이 복음의 소식이 전해져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아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 다시 한 번 여러분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한때 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한없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 사랑 때문에 할 말을 잃었던 사람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찌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며 살았던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도 미운 이 더러운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구원을 얻은 것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새롭게 느껴졌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있는 것이고 나의 산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 그래서 생명이 있는 날 동안 자기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이 살아 있더라면 살아가셨을 그 삶의 뒤를 잇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그 생생한 사랑의 기억들이 사라졌고 이제는 십자가가 주는 의미보다는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원하는 내가 부여하는 의미가 더 큰 비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마음속에 사라졌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이 부활의 놀라운 기쁨도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미천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주일에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희망이고 내 인생의 중심이 되는지를 다시 가슴에 아로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심장에 예리한 칼로 새기듯이 그렇게 일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새겨 주님과 함께 생명을 위해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