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4.3 금요기도회
생명의 떡 예수(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녹취자: 이경순
I. 하늘에서 온 떡 예수
A. “살아있는 떡” 예수
수요일 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인데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생명의 떡 즉 살아있는 떡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심으로서 모세시대에 주어졌던 만나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영생하는 떡 사이에 차이점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이 생명이 뭘까 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을 우리들이 어떻게 설명하기 너무 어려우니까 우선 육신의 생명을 생각해 봅시다. 의학자들도 철학자들도 과학자들도 저마다 다 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다르게 말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과학의 일을 넘어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생명은 아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생명이 뭔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움직이고 활동하고 먹고 마시고 쉬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몸 전체가 잘 때도 몸은 쉬지를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죽었다는 것은 확실히 생명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시신이 되어서 싸늘하게 식기 시작하면서 호흡도 멎고 피의 흐름도 모두 멎어서 그냥 물질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서너 시간 지나면 부패가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시체에서 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합니다. 땅에 묻어도 7년만 지나면 완벽 하게 썩어서 모두 없어지고 뼈만 남습니다. 그러면 이제 생명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생명이 사라질 때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학자들은 인간의 생명이 무엇인가 할 때 생명이 뭐라는 것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생명의 중요한 특징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신진대사입니다. 기절하고 의식이 없어서 쓰러져 있어도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신진대사가 일어납니다. 돌고 땀이 나고 피가 돌아서 오줌으로 변하고 하는 신진대사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으면 그것이 우리 안에서 쪼개져서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고 뭔가 몸을 움직이고 사용하면 에너지가 고갈되고 다시 에너지를 요구하고 이런 신진대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의학자가 아닌 사람은 다 알 수가 없지만 엄청나게 많은 물질들을 우리 몸 안에서 스스로 분비해서 우리 몸이 정상적인 인간의 몸으로 작용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것을 신진대사라고 합니다. 신진대사가 계속 일어납니다. 죽는 그 순간부터 신진대사가 멈추는 것입니다. 이게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두 번째는 생명은 외부의 환경에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서 기도하고 있다가 바깥에 나가면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습니다. 좀 참으면 보입니다. 밝은데 있다가 어두운 방으로 들어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잠시 기다리면 조리개가 넓어지면서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추위, 더위, 이런 것들에 몸이 반응을 하면서 추우면 몸을 오그리고 더 입으려고 하고 배고프면 더 먹으려고 하고 누가 때리면 피하려고 하고 위험이 오면 도피하려고하고 이런 반응을 하면서 우리의 몸 자체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특성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 닮은 것을 끊임없이 생산해 냅니다. 여기에다가 이 컵 뚜껑을 백년을 내버려 둬도 두 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물체는 끊임없이 자기를 닳은 또 다른 것들을 생산해 냅니다. 그래서 벌레들도 끊임없이 새끼를 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미생물도 끊임없이 번식합니다. 인간도 끊임없이 자손을 퍼트립니다. 이게 생명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생명이 그런 것이라면 영혼의 생명은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있을 때 그 때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져 있을 때에 우리의 정신, 마음, 신체와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육체는 현저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충만히 있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그 생명이 충만히 있어서 우리의 지성 감정 의지 정신 이런 것들이 아주 조화롭게 작용을 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불쌍하다고 인식 할 수 있고 가엾은 마음이 들게 되고 의지로서 선한 일을 하게 되고 이게 바로 영적인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 신자의 심령 속에 영적인 생명이 사라지게 되면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는데도 자기에게 위험이 닥친다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시험에 이미 든 사람들은 좀처럼 다가오고 있는 또 다른 시험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생명이 현저히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충만하게 있으면 아주 작은 일에도 내 안에 성령께서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성령이 기뻐하신다는 이런 것들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주변에 펼쳐지는 환경, 그것들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 이런 것들을 바깥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드론 이란 것들이 나와서 많이 보급이 되려고 하고 있고 그런 기술들이 발달합니다. 옛날에는 그런 것 공중에서 뭐 하나를 찍으려면 헬기나 비행기를 띄우고 그랬는데 지금은 전부 다 드론이 찍는 것입니다. 비싸지도 않습니다. 드론이 떠서 아래서 조종하면서 조종하는 대로 활강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화면들을 찍어내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제 여러분이 핸드폰이 맨 날 땅에서 찍는데 핸드폰이 공중으로 올라가서 한 10미터 위에서 숲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나무 꼭대기에서 한번 찍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저기 나무숲이 있는데 둘이 손잡고 걸어가고 있는데 저 한 20미터 꼭대기에서 아래를 쭉 찍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날이 곧 옵니다. 지금도 몇 푼 안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생명이 충만하면 마치 자기가 이탈하는 것처럼 바깥에서 자기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아, 지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네. 나의 마음이 지금 미끄러지려고 하고 있네, 아니면 내가 지금 올바르지 않는 길을 가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런 것을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생명이 충만할 때 일어나는 환경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이 충만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것들을 생산해 냅니다.
예를 들면 밤에 가만히 수요예배 때 설교를 듣고 나니까 자기가 진짜 은혜생활을 안하고 있고 심령이 고갈되어 있고 그래서 자기가 삶의 순간순간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 내가 이러면 안 되겠다 진짜 기도 해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특별히 몸이 아픈 것은 아닌데 왠지 일어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떠서 교회를 가는 그 어두운 길부터 시작해서 기도 끝나고 직장에 가면 피곤할 생각, 수많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한 20분 동안 이불속에서 생각하다가 화장실에서 볼일한번 보고 들어와서 다시 이불 쓰고 푹 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인 생명이 모자라서 그럽니다. 영적인 생명이 충만하면, 물론 사람이 너무 아프고 그러면 못할 수도 있지만 마음속에서 생명이 충만하게 있으면 가치 있고 선한 일을 하고자하는 정신의 힘으로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행동을 산출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면 어제 오늘 계속 우리 교인들 애기 낳았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애를 가졌습니다. 막달이 다되었습니다. 빨리 낳으라는데 힘이 없어서 애가 못나옵니다. 힘이 있으면 힘 한 번 확 주니까 아이가 확 태어나는 것입니다. 힘이 강력하니까 힘이 있으면 아이를 생산해 내는데 아이를 가졌어도 힘이 없으면 생산이 안 됩니다. 마음속에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품고 이것이 쑥 영글어지는 것은 아기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실현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생산해내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뚝 떨어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힘차면 그런 것을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의 생명이 심령가운데 충만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쉽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생명이 현저히 결핍하게 되면 자기 손으로 일어나서 물 컵 하나 드는 것도 달달 떨어야 되는 것입니다. 수저들 힘조차도 없는 사람에게는 이 컵을 하나드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생명입니다. 얼마나 명쾌한 이야기입니까?
그러한 영적인 생명이 정말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오셨을 때에 그 종교지도자들의 지도아래서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가운데 버려진 채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질듯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명이 충만한 생명이 구약시대에는 신약시대처럼 부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이 신약성도들이 받는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령이 오셔서 신자 안에 충만히 계시는 이 놀라운 축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하신 후에 오순절의 성령강림이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그 사람보다 크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성령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령님이 오셔서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의 나라 거기서는 그 때에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그 복이 세례요한보다도 신약시대의 가장 작은 신자가 그것을 더욱 충만히 누린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루라도 만나를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먹지 않으면 육체의 생명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넉넉잡고 60일 정도 굶으면 끝나지 않겠습니까? 어째든 육신의 떡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 말씀드린 이런 영적인 생명이 없을 때 인간의 육체는 살아가지만 그러나 영혼은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죽음을 맞이하면 툭 쓰러져서 시체로 변하지만 영적인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맛있는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으면서 ‘야 이 집은 음식이 정말 맛이 살아있네, 그렇게 이야기할 때 살아있다는 것 하고 개구리가 막 뛰어다는 것을 보고 개구리가 살아있네 하는 그때에 살아있다는 의미가 다릅니다. 똑같이 죽어있다는 의미도 육체에 대한 것과 정신에 대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명이 뚝 떨어지게 되면 인간이 끊임없이 불평하고 분쟁하고 다투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그러면서 오히려 생명이 있을 때 볼 수 없었던 수많은 행동들을 하면서 아주 추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이 없을 때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반대로 생명이 있으면 그런 열매들을 안 맺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가져다주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이런 열매들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틀 동안 비가 와서 저는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개울에 물이 잔잔하게 고여 있을 때에 이루어지는 생태계하고 물이 싹 말라서 물이 하나도 없어질 때에 생겨나는 생태계가 완전히 다른 생태계가 생겨납니다. 물이 사라지고 나면 거친 풀 가시 이런 것들이 생겨납니다. 똑같이 생명이 사라지고 나면 그냥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육적 생명이 사라지면 무로 돌아가지만 영적 생명이 사라지거나 고갈되면 그담에 악이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신자를 신자답게 더 멀리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 힘을 이 세상에 충만히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영원하도록 있는 생명 그게 바로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런 생명을 충만히 주셔서 마지막 날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게 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즉시 그 생명의 은혜를 우리들이 누리면서 그 충만한 생명으로 늘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정말 예수님이 착하시구나. 그래서 정말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셨구나.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구나. 어떻게 이런 더러운 죄인의 큰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을까 참 놀랍다 그것이 십자가의 다 가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은 무엇을 주셨는데 그게 바로 충만한 생명을 주신 것이었고 이것을 마귀가 제일 무서워한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것을 직접 본 것은 아닌데 고등부인가 중등부를 지도하던 교역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래전 일 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와서 늘 욕설하고 폭력하고 술 먹고 하니 애들이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겠습니까? 조금만 사랑하지 않아도 애들이 잘못된다고 그런 세상인데 어떻겠습니까? 애들이 엄청나게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 부모를 죽이기도 하는 것들이 신문에 나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똑같이 그러니까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되고 아버지가 증오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가 수련회 가서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아이가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똑 같은 아버지를 그렇게 다르게 보도록 만들었을까? 그게 무엇일까, 그것은 이사람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충만한 생명이 아버지를 영혼으로 보니까 너무 가엾고 불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내가 만난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그 은혜와 사랑을 알았더라면 우리아버지가 저렇게 안 살았을 텐데 생각을 하니까 아버지가 피해자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너무 가엾은 것입니다. 자, 그러면 아버지가 욕하고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아버지를 ’저 자식이 인간이야? 이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아니면 그 학생처럼 정말 우리아버지는 너무 불쌍해, 어떻게 하면 나를 불살라서도 우리아버지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이었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럼 평소에는 왜 전자의 생각을 못하면서 산 것입니까? 생명이 없어서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미운사람 없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해도 이 사람은 좀 더 예쁘고 저 사람은 조금 들 예쁘고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성령 충만하면 누구도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미움이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D. 세상의 생명위한 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는 이 생명을 이 죽음의 땅에 물처럼 흐르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교회 한번 나오세요. 그게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는 생명의 물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학의천을 걷는데 제가 요새 허리가 아파서 못 걸었는데 진통제를 맞고 3일을 걸었습니다. 비가 쫙 내리는데 우산을 들고 걷는데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산을 받고 걸어가는데 어쩜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기쁜 것은 물소리가 안 났었는데 물이 다 말랐었는데 오늘 가니까 물이 콸콸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울을 내려다보면서 맞아 개울에는 물이 흘러야 되고 가족들 간에는 사랑이 흘러야 되고 교회에는 은혜가 흘러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그것보다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가정에나 내 마음 안에나 교회 안에나 항상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점도 있고 또 나쁜 사람도 가끔 가정에도 있고 내 마음 안에도 나쁜 성품이 있고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물이 확 흐르면 그런 것들이 내 마음을 썩이거나 우리 가정을 망가뜨리거나 교회를 부패시키거나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물이 흘러가면서 수시로 떠내려 보냅니다. 오물을 가끔 버려도 확 쓸어내리면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고기들이 떠내려 오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살려두시고 여기에다 교회를 주셨으니까 생명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이 교회는 가물어가는 이 동네에 있는 저수지입니다. 아무리 수문을 열어도 흘러갈 물이 교회에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이 생명이 얼마나 놀라우냐면 생명이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하는 일에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두드려서 그런 생명물이 정말 있는 거야? 그런 생명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 거야 ? 그러면 나의 요즘의 인생이 나의 삶이 생명이 없는 죽음의 삶이 맞구나 나 정말 그런 생명을 갖고 싶어, 그 심정을 가진 여자가 누굽니까?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그 여인, 수가성의 여인, 사마리아여자 그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오죽했으면 ‘아 선생님 그런 물이 있다면 정말 내가 마시고 싶습니다. 그런 물을 내게 주셔서 내가 다시 여기 물 길러 오지 않게 해 주세요.’ 그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여러분이 가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착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여러분의 삶과 그런 생명이 없는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대조가 되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부자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 기죽이는 것 그게 존재의 울림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서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 그것 존재의 울림 아닙니다. 다 아래 있는 사람들이 나도 좋은 부모 만나서 빽 있으면 너처럼 될 수 있어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의 울림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우리가 매일 주일마다 모여서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는 사람이 고민을 하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마음을 모아서 간절히 전하고 전한 그것을 풀어서 책으로 만들어서 읽으라고 주고 또 안 읽으면 왜 안 읽냐고 야단을 치면서 그것을 공부하고 외우게 하고 책을 읽다가 안 되면 들으라고 하고 보라고 하고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거 배워서 뭐하려고 그럽니까? 그게 바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셨던 생명이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 조상들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너희들이 만나를 광야에서 먹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것은 모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살 것이라는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만나가 내리는 위대한 사건은 신약시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신 이후에 이 세상에 부어질 충만한 생명 때문에 사람들이 ‘어디 길거리 깡통 들고 내일 아침에 한번 길거리 나가보세요. 어디 먹을 것이 있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땅을 파봐라 빵 한 개가 나옵니까? 없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세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이나 고행주의자들의 일생을 여러분 읽어보셨습니까? 조그만 생명하나를 얻기 위해서 잘못된 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르팍으로 기어서 돌계단을 올라가서 피투성이가 되고 그리고 거의 금식하다가 죽을 것처럼 그렇게 고행을 하고 마른 뼈만 남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몸을 채찍으로 때리고 이렇게 하면서라도 얻고 싶었던 것이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생명이 얻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주님이 그런 생명을 우리에게 충만히 주시기로 한 그 방편을 의지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성령께서 죽이시면서 그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할 때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처럼 걸어서 교회 왔던 사람이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들어올 때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까? 생명이 바꿔놓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어느 잡지에서 사람을 하나 찍어놨습니다. 의사였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몇 살쯤 되어봅니까 하고 탁 찍어놓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서른대여섯 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65세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가 보았더니 아주 과학적인 방법으로 운동도 하고 밥도 먹지만 약물도 다 하는 것입니다. 운동하는 사람들 얘기가 몸은 70대 80대 되면 할 수 없지만 50대 넘었어도 젊은이처럼 운동을 잘하면 몸은 20대처럼 만들 수 있는데 얼굴은 수술해야 된답니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안 된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얼굴을 끊임없는 의학적인 방법 주사, 보톡스, 그 담에 뭔가 피부에 좋은 것을 막 넣어서 얼굴을 매주일 마다 관리를 하는데 진짜 65세 된 사람이 35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보면서 부러웠던 것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육신의 생명도 계속 북 돋으면 저렇게 될 수 있구나 그러면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나는 우리교회 교인들을 영적으로 북돋우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육신이 후패해져 가서 탁 볼 때 나 몇 살로 보여요? 그랬는데 장가도 안 갔는데 ’아우 장로님이시죠?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이 충만하게 넘쳐서 영적인 나이는 20대처럼 보여야 됩니다. 제가 45세 쯤 되었을 때 청년하고 교역자들하고 생활할 때 제일 힘든 것은 모여 앉았는데 내가 20대 갖고 쟤들이 50대같았습니다. 뭘 해도 안 된데, 그리고 뭐 꼭 그렇게 까지 해야 될 필요 있냐고, 힘들대, 아우 그렇게 하면 복잡하답니다. 그것은 늙은 사람 들이 그런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밥 한 끼를 먹어도 늙은 사람들은 ‘아 됐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다 합해서 비벼서 먹고 끝내는데 젊은 사람들은 다 따로 따로 담고 색깔도 다 맞추어서 줄도 다 맞추어서 혼자 먹어도 그렇게 먹어야 됩니다. 젊은 사람이 그러는 것입니다.
정신의 힘이 모자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생활도 그런데 이것이 영적인 생활이 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 안에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욕망이 없습니다. 영적인 욕망이 없습니다. 나 조금만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라든지 아니면 내가 정말 말씀을 더 습득하고 싶어 라든지 나 정말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어떤 자기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고 싶고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실 것이고 좋아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 욕망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설교 묵상하면서도 목이 메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시면서 마지막 당신의 교회에 주고 싶으셨던 것들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무얼 주고 싶으셨겠습니까? 사람마다 얼굴은 다르고 문화는 좀 다르고 교파는 여러 가지 인간들에 의해서 갈라지고 찌그러졌다고 해도 뭐가 있기를 원하셨겠습니까? 충만한 생명이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생명이 충만히 있을 때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그게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나와 자타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 생명이 충만이 있을 때에는 저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처럼 느껴져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위대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떡으로 오셨고 그래서 우리들의 교회가 대치할 수 없는 이 위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는 그렇게 생각지도 않지만 어째든 탁월하게 개혁신학을 잘 소화했다 그래서 탁월하게 무슨 청교도 적이다. 탁월하게 성경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생명이 없으면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그게 뭡니까? 그렇게 우리가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이유는 더 충만하고 올바른 생명을 위해서 우리들이 올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면 여러분이 마지막 적용을 하면 어떻게 함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런 생명을 주셨습니까, 이 떡을 먹어라 이 뜻은 나 자신을 먹어라 영적인 의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죽을 테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를 믿음으로 나를 먹어서 그러면 나는 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사라져도 너희와 함께 살고 너희는 나와 함께 살면서 내 생명을 너희에게 주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가 없었고 당신이 고난을 당하고 우리를 위해서 씹어서 먹히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마치 떡이 우리의 입에 씹히면서 흩어져서 모두 형체를 잃고 사라진 가운데 우리에게 생명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면 이런 생명을 충만히 가진 사람은 정말 이 생명이 없이 핍절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가슴아파하고 자기를 주어 그들에게 씹히면서 까지 라도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람들에게 생명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므로 생명이 일어난다면 내가 죽는 것이 그대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도구가 된다면 그럼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신자의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은혜 조금 받은 사람보고 계속 해서 십자가를 져라 죽어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 은혜 받은 사람만 힘들고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하는데 두 가지로 답할 수 있는데 죽으란다고 그렇게 모두 고분고분 죽어요? 또 한 가지는 우리들이 생명이 없는 눈으로 남에게 생명을 주기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그게 한없는 고통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십자가지는 삶 자체가 무서운 것으로 느껴지지 실제로 그 생명이 충만하게 있으면 하나님은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위로하시고 생명을 끊임없이 부어주셔서 그 생명이 이렇게 받아서 이렇게 전달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생명이 자신 안에 충만히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과 은혜 위로와 행복 그런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받아본 사람들만 압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그 십자가에 굳게 붙들려 이 신비한 생명을 누리고 전달하는 주님의 도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