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실 때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눅 8:22-24)
녹취자: 박효준
이스라엘을 가기 전까지는 이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이 갈릴리 바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길이가 한 70Km 정도가 되고 폭이 그저 뭐 좁은 데는 그저 몇 백 미터, 넓은 데라야 그저 수 km 정도 되는 기다란 호수이기 때문입니다. 호수에서 어떻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풍랑이 일어날까? 성경 말씀이니까 의심한건 아니지만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가보고 나니까 의문이 풀렸는데 갈릴리 호수가 있고 양쪽에 높은 산이 있습니다. 산맥이 형성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그 정도 풍랑은 아니었는데 그 사람들, 현지인들의 설명을 들으니까 계절풍이 부는데 그 높은 산을 헤르만산이 거의 2000m 정도 되잖습니까. 그 산에서 바람이 불고 그러면서 여기서 올라가는 습기가 있어서 여기서 바람이 휘돌면서 그러면서 그 바람이 아래를 때린답니다. 그러면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지만 민물인데 2.5m의 파도가 친답니다. 그러면 2.5m면 상당한 파도였고 지금같이 이렇게 배가 크고 조선이 발달한 시대에는 그까짓 파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 작은 목선으로 고기를 잡고 하던 그때에 2.5m의 파도는 굉장한 파도였던 것입니다. 그때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때 아마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재밌는 게 뭐냐면 “광풍이 호수로 내려치매” 그랬습니다. 아까 그 사람들의 설명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산에서 바람이 거의 아래로 발사하다시피 확! 내려서 그 호수를 때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풍랑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시련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럴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이 배에 함께 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풍랑과 말하자면 폭풍이 일었습니다. 예수님이 동행하는 삶을 산 사람들이 모두 평탄한 인생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았던 사람들도 시련과 환란 그리고 많은 핍박들을 받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 배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타셨습니다. 또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인생길을 가는 성도에게도 시련과 폭풍, 환란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배의 고물에서 잠들어 계신지라 했습니다. 큰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제자들은 깨어서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렇게 그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은 그런 폭풍 속에서 주무실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하루 동안의 사역이 얼마나 고단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은 이런 큰 풍랑과 파도가 일어도 예수님 안에는 얼마나 커다란 평화가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쨌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러면서 예수님 도와달라고 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이 제자들은 별로 좋은 칭찬을 받질 못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자, 시련을 만났습니다.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님을 깨우며 “예수님! 예수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호소한 것이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의 의지하는 기도일 수 있잖습니까? 그러면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할 텐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본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들어오는 아주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여러분의 가슴 속에 다가오고 있습니까?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빌고 의지한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의 생각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주무시고 계시면 안 계신 것과 같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은 소위 얘기하면 'Euphemism' 돌려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 마음에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 믿음 없는 자들아. 어찌하여 믿지 못하느냐?” 이런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무라신 것은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한 것을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이 이 모든 폭풍과 그리고 풍랑 속에서 건져내실 수 있으실 것이라는 그 믿음 보다는 엄습하는 큰 두려움이 이들의 마음을 더 크게 사로잡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나무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커다란 풍랑과 그리고 폭풍 속에서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그래서 의지할 분이 하나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큰 풍랑과 시련 속에서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든든하게 의지하게 하는 하나의 'Momentum'이 되어야지, 계기가 될 뿐이지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엄습해서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한 가운데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깨어 계시는 것과 피곤해서 배 고물에서 주무시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차피 예수님은 모든 만물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은 잠시 고물에서 잠들어 계실지라도 그의 신성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깨어서 모든 만물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시니 그분이 잠들이 있는 것과 깨어 있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엄습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 떨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도 그 풍랑 앞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을 의지하는 간절한 기도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기도가 엄습하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이뤄질 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도보다는 너희들의 믿음을 회복하라고 외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면 “그것은 모두 우리 주님이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시기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주님의 인도를 따랐기 때문에 풍랑과 시련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환경여하가 아니라 우리가 그런 처지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사느냐하는 마음의 중심이 가장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이끄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깊은 신뢰를 갖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환란과 시련 그리고 폭풍과 같은 환란을 만나고 그래도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오히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이 보시기에 훨씬 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호모가 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보면 특별히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오디세우스가 천신만고 끝에 여행을 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부하들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이제 돌아옵니다. 그 때 돌아와서는 자신들이 겪은 천신만고 끝에 말하자면 전쟁에서 살아남고 귀환하는 길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련을 지났습니다.” 키클로프스라는 외눈 밖이 괴물을 만나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헤치면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인생을 살면 또 어떤 시련과 환란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시련과 환란의 연속인데 그까짓 것 나타나려면 나타라지요! 우리는 극복하고 이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고대의 모든 현인들과 현대의 사상가들에 이르기 까지 긍정적인 인생의 철학을 펼쳤던 모든 사람들은 삶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고 인생에 시련과 고통을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인생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꿈을 가지면 그 꿈을 반듯이 이뤄진다고 하는 것만을 교육하니까 아이들이 단기적으로는 확신에 가득한 것 같아도 그것이 좌절 될 때 못 견디는 것입니다. 견딜 수 있는 인생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꿈도 갖게 하지만 꿈을 갖은 사람들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가 훨씬 많다는 것. 내가 정말 꿈에 그리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다음 생애에는 다시는 안 만났으면 생각하는 사람들을 훨씬 더 만나고 더 만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기 보다는 오히려 갖고 싶은 것을 못 같을 때가 훨씬 더 많고 욕심을 포기해야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아이들에게 진실하게 알려줘서 그래서 오히려 삶에 다양한 사태들을 만났을 때 그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극복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시야들을 갖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예수님, 그러면 그 믿음이 어디에 있기를 원하셨습니까?” “너희의 마음속에! 내가 너희에게 줬는데 그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줬는데. 저 호수에 있느냐? 아니면 저 산 꼭대기에 있느냐? 아니면 물속에 빠졌느냐? 나는 너희의 믿음이 너희 안에 있기를 원하노라.”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우리들이 단순한 인생의 열정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은 사람들의 부인할 수 없는 특징이 무엇이냐면 열정만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뭔가 일이 원하는 데로 되지 않고 힘들 때 만나기 싫은 사람을 또 만났을 때. 만나기 싫은 사태를 직면했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 60년을 시련과 고난 속에서 살았는데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시련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라고 그랬는데 올 테면 오라지. 나 그 사람 만나기 싫었는데 만나려면 오라지요. 어차피 보기 싫은 사람들 수 없이 만나면서 60년을 만났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고 떠나고 그랬을 때 쓰라리고 가슴이 아프지만 헤어지라면 헤어지지요. 죽음의 강물을 타고 이생에서 떠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어차피 나의 인생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 인생인데요.’ 이렇게만 생각하면 어떤 놀라운 유익이 있냐면 말입니다. 뭐가 잘 될 때는 항상 보너스입니다. 그리고 뭐가 잘 안될 때는 이게 평균입니다. 이게 원래 인생이 그런 겁니다. 사역을 하다 이게 내 뜻대로 안된다고 고민을 하고 어떨 때는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우리들 속에 늘 들잖습니까. 그거는 왜냐면 그릇된 기대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설교 시간에도 말했지만 저는 성도들에게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그게 목회에서 너무나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처를 주거나 말을 안 들으면……. 그런데 이게 교역자들에게는 잘 안됩니다. 그걸 좀 기억을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못할 때 ‘아~ 이게 당연하구나.’ 이렇게 생각이 안 되고 ‘왜 못하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특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직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못했을 때 “당연한 거야.” 잘 했을 때 “아!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저런 인간이 이런 놀라운 일을 할까?” 이래야 되는데 이게 안 됩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마음이 잘 됩니다. 하면 너무 잘 됩니다. 아무리 정상적으로 생각해도 괴로운 건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래서 그게 “그냥 그런 게 인생이다.” 어떨 때는 내가 말할 수 는 없지만 너무 쓰라리고 가슴이 아픈 일을 당합니다. 주위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가족들도 당신 너무 괴롭겠다고 그럼 나는 그냥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내 인생의 실존인데. 그게 바로 나의 일부인데. 그걸 때어버리겠는가?” 프레더릭 니체가 “꼽추에게서 그 굽은 등을 때어버리면 그 사람의 영혼을 파내는 것이다.” 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운명으로 생각하고 살아라.” 그 뜻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자신과 헤어질 수 없는 실존입니다. 그런 것을 늘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너무 고달프고 십자가가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 인간 좀 보십시오. 저렇게 십자가도 별로 없고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사는데 제 십자가는 이렇게 고달픕니까?” 그러니까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대리고 천국으로 올라가더랍니다. 월드컵 경기장 수십 배 되는 어마어마한 창고가 있더랍니다. 수십억 개의 십자가가 있더랍니다. 그래서 “너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너의 십자가를 여기에 내려놓고 너 마음대로 좋은 데로 여기서 골라가라.” 하더랍니다. 어떤 거는 찾았더니 너무 가벼운데 이건 너무 긴 겁니다. 작은 것을 찾았더니 너무 무겁고 박달나무로 만들어서. 어떤 것은 크기로 적당하고 너무 가벼워 맺더니 등에 가서 옹이가 튀어나와서 뼈를 계속 누르는 겁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딱 맞는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자신이 평생 짊어진 십자가였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이면 활짝 웃고 행복해 보여도 그 뒤에는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때 그런 것들을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왜 하필 내가! 왜 나에게 이렇게 오래도록?” 그렇게 말하지 말고 거꾸로 그런 십자가를 사랑하려고 하고 깊이 끌어안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일부입니다.” 그러고 좋은 것은 내가 버려도 가져갈 사람 많습니다. 내가 어느 단체의 영광 받는 회장이야. “아! 나 오늘 부러 그만두겠습니다.” 회장하고 싶은 사람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기다렸다는 듯이 가져가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예화) 오늘 열린교회 마당에 앉았는데 후배가 찾아 왔습니다. “선배님 부럽습니다.” “뭐가 부럽냐?” 그랬더니 “어우~ 얼마나 좋으세요?” “왜?” “남들은 그냥 어떻게, 어떻게 수 십대 경쟁에 들어가서 장로들에게 들볶이는데 목사님은 목사님 마음대로 하시잖아요.” 저는 마음대로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자기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그래? 허긴 뭐 내가 하자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은 없겠지. 또 뭐가 부러운데?” “교육을 했는데 아무리 교인들이 말 잘 들어도 10명 이상 말 잘 들으면 뭔 소용 있습니까? 교인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고.” “그래? 또 뭐가 있는데?” “목사님은 또 책도 쓰시고 사람들에게 막 팔려서 돈도 많이 들어오고.”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내가 들어온 인세를 다 모았으면 작은 빌딩을 하나 샀다. 그런데 지금은 없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없다.” 그런데 제가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부럽냐?” 그랬더니 부럽더랍니다. “너는 내 자리에 있으면 한 달 안에 사표 낸다.” 그래서 왜 그러냐는 겁니다. “내가 당신한테 말할 필요도 없고…….”
(찬양)
뉘에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러면서 내가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죽이신다.” 그리고 그 흘린 피가 설교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굳이 풍랑을 만나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 풍랑을 말고도 지겹도록 많은 풍랑이 우리 인생 속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잔인한 이야기 갖지만 자기가 처한 이 상황을 살아가십시오. 살아가라는 이야기는 이 상태에 계속 있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육체는 쇄잔 해가도 자신의 영혼에는 기쁨과 은혜와 사랑이 샘솟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영적인 비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합시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제자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아서 괴롭고 두려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뭐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겠습니까? “그 믿음이 제 마음 안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