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녹취자: 김인철
그동안 열린교회에 와서 14년 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의 교회를 섬기던 우리 양 목사를 그리고 그 부부와 가족을 이제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선교사는 선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교사의 기능이 선교를 하는 일이니까 선교사가 선교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교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단지 예수교를 사람들에게 알려서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를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그것도 신령한 각도에서 생각해 봅시다. 교회가 어떻게 해서 교회가 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특정한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고 그것이 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천국비유로 말씀하시는 가운데 그물로 고기를 잡는 비율을 가르쳐주신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것과 같으니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가 잡히면 그것을 끌어 올려놓고 먹고 쓸 수 있는 고기와 못 쓰는 고기를 갈라냅니다. 그물은 교회요 그 고기를 갈라내는 것은 마지막 때의 주님의 심판입니다. 어차피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죽도록 순결하게 교회를 유지하려고 해도 완벽한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거기에는 신자가 아닌 사실상의 불신자 그리고 참 하나님이신 복음의 열매가 아닌 가라지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추호의 오차나 착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회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에 영적으로 접붙여지게 됩니다. 이것은 붙었으면 붙은 것이고 안 붙었으면 안 붙은 것이지 중간의 상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이 각도에서 선교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결국 선교는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몸에 참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이미 접붙여 있는 이 우주적인 교회의 영적 연합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접붙여지게 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밖에서 하는 선교나 국내에서 하고 있는 목회나 본질적으로 그 소명이 동일한 것입니다. 본질적인 일치가 형태의 다양성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복음적인 사실을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인 양선교사의 파송 문제와 관련지어서 생각해 봅시다. 양선교사는 지금 중국으로 파송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쉽지 않은 사역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신학교에 가르치는 자로 파송이 되고 그곳에서 많은 지역교회와 그리고 일꾼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 교회를 세워야 되는지를 14년 동안 이 교회에서 배운 목양의 원리와 헌신적인 실천의 경험으로 가르칠 소명을 받고 떠납니다.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적인 소명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고 그 선교의 소명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만약에 양선교사가 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부러워하고 또 어느 정도의 선교사로서의 영광과 명예를 얻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선교학자들이 성공사례라고 추켜세우면서 그의 사역과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물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표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가 안 되어 있으면 그 모든 영광은 풀잎에 매달리는 가짜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없어서는 안 될 그 한 가지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적으로 번영하고 확장되고 번영한 교회는 양선교사 부부의 사역을 통해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진정한 성장과 온전함은 한 사람의 신자가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 안에 새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모든 성화의 목표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이 충만하게 살아야 할 것인데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이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리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충족성을 못 믿는 것일까요? 혹시 알미니우스주의자가 아닐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이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아직까지 남은 고난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의 근거로서 이루신 고난은 인간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고난이고 이미 완성된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기 봉헌의 죽음은 인류 모든 죄를 대속하기에 유효하고 충분한 근거가 되었고 그 이상의 또 다른 보충적인 근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충족하고 그래서 사도바울과 다른 많은 사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또 다른 이름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다고 충분하다고 단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고난을 예수 홀로 완전히 이루게 하셨지만 이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그의 접붙여진 교회가 번영하고 온전하게 되는 이 일은 하늘에서 하나님 혼자 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과 모든 성도들을 이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하심으로서 당신의 교회에 대한 경륜을 이루어 가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정확하게 번역하면 남겨진 고난을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남겨진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인지를 알고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고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이 고난에 참여할 자격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도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하시는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신이 기꺼운 마음으로 교회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자신이 죽음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케 하는 일에 이바지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공과시간에 많이 배우셨겠지만 1740년에 스코틀랜드 켐버스랜이라고 하는 곳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습니다. 그때 회중가운데 머리가 하얀 백발 노인네가 어린아이처럼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장 신학교의 교의학 선생님이었습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이전의 나는 일평생 속죄의 교리를 가르쳐 왔지만 오늘은 나를 속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사랑하게 될 때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와의 사랑에 일치를 이룰 때 거기에는 반드시 교회에 대한 사랑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는 사실상 구분은 되지만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보이는 교회의 지평 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보이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전망했고 그 이후에 사람들은 보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양 목사는 14년 전 열린교회 전도사로 들어 왔고 14년 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그리고 헌신적으로 양떼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열린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본을 따라 그 목양의 원리를 자신의 사역 속에 적용하려고 가장 헌신적으로 애쓴 교역자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사역을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육체를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가운데 당하는 고난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때로 그 고난은 매우 쓰리고 독하여 우리를 죽음 가운데 데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믿음 좋았던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만물의 찌끼같이 여김을 받고 살 소망같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으로 우리를 데려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누군가가 그렇게 죽음으로서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답게 살게 되는 것이니 죽는 자가 많은 교회일수록 그리스도의 생명은 교회 안에 충만하고 그리고 죄의 역사와 권세는 소멸되는 것입니다.
(예화) 하늘에 빛나는 별들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은 결국은 죽는 것에 덕을 입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약 60조개의 세포로 되어 있고 어느 세포도 6개월 이상 사는 것은 없습니다. 3개월에서 6개월이 지나면 60조개의 모든 예전 세포들은 사라지고 새 세포가 된 것입니다. 뇌 세포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뇌 세포는 한번 죽으면 새로운 생성이 불가능합니다. 이 60조개나 되는 세포들이 꼬마전구처럼 뭉쳐져서 깜박거리며 죽어가고 살아나고 죽어가고 살아나는 것이 우리의 몸이니 어떤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죽는 것들 때문에 겨우 살아 있는 것입니다. 세포의 죽음은 자연적인 괴사가 있고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죽음이 있습니다. 전자를 네크로시스라고 하고 후자를 아포토시스라고 합니다. 아직도 과학이 왜 세포가 스스로 자살하는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한 세포가 죽으며 전기에너지를 화학에너지를 옆 세포에게 전달하면 그 전기를 이용해서 세포가 공장을 돌리고 분열하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다 우리의 몸에 이상이 생겨서 아무 세포도 안 죽겠다고 몸부림을 칠 때 한 덩어리가 되고 몸에 있는 수많은 영양분들을 빨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안 죽는 세포들 때문에 모든 세포들이 함께 죽게 되는데 이것을 의학적으로 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양선교사를 파송하면서 나는 이제까지 배운 대로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세기에 남을 영광을 위해서 선교사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서 보다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심지어는 많은 사람을 호령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선교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중국에는 잘 죽을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말할 것입니다. 왜 그 많은 사람들 말고 내가 죽어야 합니까?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찬송)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 고난을 중국 사람도 죽지 않으려고 하는 그 죽음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잘 죽기 위해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있기 위하여 양선교사는 중국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날들이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 육체를 지니고 살아 있는 지상의 날들 동안만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인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게 하게 하신 것이 복음 사역자의 운명인데 어디인들 고난이 아닌 곳이 있겠으며 어디인들 슬픔이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위해 잘 죽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충만하게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알지 못한 그 사랑을 당신의 고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 붇듯 부어주셔서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신령한 기쁨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신비한지 보십시오. 죽을 때, 질병에 걸려 죽든지 사고로 죽든지 인간이 죽는 순간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죽는 그 순간에 우리의 온 몸에 있었던 엔돌핀이 한꺼번에 다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죽는 그 순간에 말할 수 없는 희락을 맛보고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주님을 위해 잘 죽을 때에 하나님은 아무도 모르는 사랑 부어주십니다.
(찬송)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사귀며 살아 온 행복하고 달콤한 모든 시간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매일매일 교회를 위해 죽는 경험과 하나입니다. 그래서 양선교사가 중국에 가서 잘 죽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육체를 가득 채워 죽음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고 그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열매로 나타나서 그들은 또 어딘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찾아가서 스승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 죽고 또 다시 살게 하고 또 다시 죽는 일들이 되풀이 되어 그리스도의 푸르고 푸른 계절이 중국 땅에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