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아버지께 기도하신 십자가(눅23:34上) 2004.2.29 주일오전 1
2. 용서를 구한 십자가(눅23:34下) 2004.3.7 주일오전 13
3. 본향으로 인도하는 십자가(눅23:43) 2004.3.14 주일오전 26
4. 돌아온 십자가(요19:27) 2004.3.21 주일오전 38
5. 버림받으신 십자가(마27:46) 2004.3.28 주일오전 48
6. 다 이룬 십자가 (요19:30) 2004.4.4 주일오전 60
7. 다시 사신 예수님(요20:11~15) 2004.4.11 주일오전 69
1. 아버지께 기도하신 십자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눅23:34상)
1. 서론
일찍이 주님을 만나고 청년 시절에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했습니다만 여러분에 비하면 너무 늦은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썼던 젊은이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무지한 상태를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세계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학교를 모두 마치고 교수가 된 후에 제 영혼에 모종의 강력한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성경말씀과 함께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이 복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 신앙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때 깨닫게 하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큰 능력이 하늘로부터 부어졌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신학생들을 보면서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타이프라이터로 정성껏 타이프해서 그래서 그것을 좀 값싼 종이에다가 인쇄를 하고 그리고 표지는 예쁘장하게 만들어서 붙여서 마치 오늘날 초등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공책 비슷하게 그렇게 꾸며서 학생들에게 읽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바로 그맘때 어느 클라스에 들어가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꽤 큰 대형 강좌였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에게 세 개의 리포트를 내도록 부탁했는데 그 세 개의 리포트가 제가 그렇게 해서 쓴 내용들이었습니다. 대게 성경과 설교를 가르치던 과목이었으니까 그 리포트를 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리포트를 냈는데 그 중에 어느 한 리포트가 하얀 표지에 정성껏 타이프를 친 그런 예쁘장한 리포트였습니다. 원래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리포트 껍데기가 예쁘고 반듯하면 내용도 좀 있습니다. 개발 새발 그러면 속의 내용이 별것이 아닙니다. 열어보니까 깨끗한 글씨로 정성껏 타이프를 쳤는데 모양은 그렇게 예쁜데 속의 내용은 칼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 기억을 못하겠습니다만 그때 제 마음에 남았던 인상은 아주 거칠게 저에게 항의를 하면서 이렇게 다 아는 내용을 가지고 우리 보고 읽으라고 그러고 리포트를 쓰라고 그렇게 합니까?
그런 어떤 항의조로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냥 덮었습니다. 이름을 알면 기억하고 제가 미워할 것 같아서, 그래서 이제 치워놓고 그리고 한달 두 달 흐르고 두 번째 리포트를 냈는데 똑같았습니다. 이번에는 한술 더 떠서 이 리포트를 읽고 기분이 나쁘면 연락하시오. 그리고 점수를 안 줘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아주 거칠게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나가고 잊어버렸습니다. 기말고사 쯤 되어서 마지막 리포트가 나갔는데 생긴 것도 똑같이 생긴 리포트가 또 그 몇 백 개 속의 리포트 속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또 무슨 말로 충격을 주려나 하고 넘겼더니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의 리포트는 자기가 정말 교수님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자기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썼는데 세 번째 쓴 그 리포트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해서 묶는 책이었습니다. 아주 조잡하게 인쇄된 그것을 읽으면서 이 형제가 회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때 그 내용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지금 새가족반에서 공부하고 있는 “십자가를 경험하라”가 거의 그때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을 그 학생이 읽어가고 있는데 자기가 지금껏 너무나 알지 못했던 그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한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표현하기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지금 피가 떨어지는 십자가 아래 서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인데 나는 그동안 뭘 믿고 살아왔나. 그리고 마지막에 교수님 제가 정말 거듭난 사람입니까?
이런 일들은 그 형제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는 낯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말과 기독교의 분위기에 익숙해진다. 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오랫동안 사상적으로 방황할 때 이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만들어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작가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레오 톨스토이였습니다. 저는 여러 사상가를 편렵하면서 진짜 누구든지 나에게 인생의 참된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으면 종이 될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한때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내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 되겠다. 라고 안정감을 가져다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내가 편렵했던 수많은 사상가들 속에서는 읽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자유함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레오 톨스토이였습니다. 그래서 레오 톨스토이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회심의 경험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구소련의 제정 러시아 시대에 어마어마한 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하고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누릴 수 있었는데 가난한 사람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회심의 경험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자기의 마음속에 모시는 그 순간 자기는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 욕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고 자기가 사랑하던 그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오신 그 예수님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예전에 자기가 사랑하고 누리던 그 죄악 된 삶을 다시 찾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그런 그 사람의 변화된 사상을 잘 나타내는 게 레프로도프가 나오는 부활과 같은 그 소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람이 단순한 도덕 주의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도적적인 삶으로 비쳐지게 만드는 근본중심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기독교 신앙은 불구가 되다시피 해서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고 변화되지 않은 채 옛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습에는 야, 누구누구 있지 은혜 받고 놀랍게 변화되었데. 그게 화제 거리가 됩니까? 야, 누구누구 있지 그 애가 교회를 꽤 오래 나왔는데 은혜를 못 받고 옛날 그대로 있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진짜 연구대상이다. 우리 한번 구경하러가자. 이래야지 이게 정상이 아닙니까?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그 한복판에는 반드시 이 복음의 참된 가치를 잃어버린 세속적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참 훌륭한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그리고 고난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켜온 선배들의 신앙의 모범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그 피어린 핍박과 공산치하에서의 그 처절한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순수성을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신앙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성경 신앙이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지 된다. 성경말씀을 어기면 큰일 난다. 이런 성경제일주의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내세 신앙이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와 만나고 누리게 될 그 영광은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내세 신앙이었습니다. 이 핍박과 고난으로 가득 찬 욕된 세상이 지나가고 나면 찬란한 영원세계가 온다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기대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최종적인 내세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내세 신앙을 복음적으로 잘못 받아들였기 때문에 현실도피적인 삶을 사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건전한 내세 신앙을 가졌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은 마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천국까지 뭘 이 세상에서 돈만 많고 병에 안 걸리면 살만합니다. 그저 내세는 관두시고 이 땅에서나 좀 밀어주십시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년 회장의 집에 심방을 갔더니 혼자 사는 집인데 가훈 같은 것이 액자로 해서 붙어 있어서 혼자 살면서 무슨 가훈인가. 그리고 안경을 고쳐 쓰시고 쳐다보니까 ‘오늘도 오시려나.’ 그게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더니 ‘오늘은 주님이 오시려나.’ 그 뜻입니다. 이게 사실은 웃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 선조들이 그 고난으로 가득 찬 시대를 이기면서 살았던 훌륭한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많은 사람들이 조국근대화의 기수들이 되었습니다.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민족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내세가 소중했기 때문에 그 소중한 나라에서 뵈올 주님을 위해서 맡게 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얀 치마저고리 입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종말을 기다리는 것은 참된 내세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세 신앙은 이 세상에서 더 치열하게 살도록 만들고 내세의 초월적 신앙을 통해서 공급받는 그 힘으로 눈에 보이는 역사적 현세를 고치는데 자원으로 활용합니다. 그게 예수님과 사도들이 경건한 사람들이 이 땅을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2. 오늘날 필요한 것, 고난 신앙
마지막 세 번째 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고난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기까지 고통 받으셨으니 이번에는 그 십자가의 은혜로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나도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신앙입니다. 성경은 고난 자체를 찬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떤 동기에서 당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여야 할 상황에서는 담대하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난’ 그 자체에 미학을 느끼는 것은 복음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행주의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어느 책에 읽어보면 그분의 일과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누리는 시간이 산책하면서 하나님을 명상하는 시간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치열한 삶을 사는데 하루는 마차를 탔습니다. 그때도 마차는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이미 벌써 큰 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일등석 마차를 탔습니다. 옆에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는 삼등석을 탔습니다. 이 사람이 볼 때 저는 일등석에 타서 편안하게 타고 나는 삼등석에 타서 이러고 가고 속으로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투덜대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이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교회 돈을 아끼고 있는 중입니다. 스펄젼 목사님께 당신은 뭘 하고 있는 중입니까? 나는 지금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주의 종을 좀 아끼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나 휴머니스입니까.(?)
어느 곳에서도 고난 그 자체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참된 가치는 그 고난이 무엇을 위한 고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 시간에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오셔서 사신 예수님의 생애 전부가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핵심은 바로 다름이 아닌 십자가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반쯤 잠들어있는 채로 인생을 살다가 아무 보람도 없이 자기만을 위해서 살다가 간 그런 많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정말 어두운 시대를 불꽃처럼 살았던 훌륭한 헌신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금박을 물린 성경이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원래 성경은 이렇게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복음의 말씀이 내게 오기까지 예수님이 원조로서 피 흘리시고 그 예수님의 희생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타고 이 진리가 내게까지 오게 되었다. 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나는 왜 이 빨간 것을 거두어버리고 금매끼를 칠해서 다니는지 난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이 성경의 모서리가 붉게 되어 있는 시대는 다르고 나라는 다르고 피부색깔이 다르고 해도 그렇게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둘기처럼 온유했으나 사자처럼 강하게 살았고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으나 놋 성벽과 같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성숙한 경건과 연단된 꿋꿋함으로 자기의 시대를 살면서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자신의 생애를 산화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문은 틀리고 문벌과 성별이 달랐어도 학식의 차이는 있었어도 그들에게 모두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냉담하게 신앙생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는데 어떻게 냉담할 수 있겠으며 거룩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에게 피처럼 쏟아 부어졌는데 어떻게 그들이 차가울 수 있겠습니까. 가슴에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을 가지고 어두운 시대에서 자기 자신을 기름삼아 살랐습니다. 그들은 약했으나 그들을 붙잡은 십자가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강한 사람으로 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젊은이로서 보다 더 일찍 예수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수련회에서 복음을 전했더니 그때 어느 젊은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나이 20을 갓 넘었는데 어떻게 벌써 복음에 생명을 걸겠는가. 왜 살아보지 않은 삶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이 이른 나이에 어떻게 벌써 복음에 생명을 걸겠는가.
그러나 역사를 보십시오. 역사를 움직였던 기라성 같은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아주 젊은 나이에 젊다기보다는 어린 나이에 예수를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찰스 스펄젼을 비롯해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선교의 역사를 움직였던 많은 선교사들이 십대 초반이나 후반에 늦어도 20대 초반에 그리스도를 예수를 만나고 그분께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기독교적 문화생활을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문화를 즐길게 있어서 기독교 문화를 엔조이합니까.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술이 있습니까, 노래가 있습니까, 향락이 있습니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깊이 사로잡혀서 복음에 붙잡힌 사람들이 될 때 그들은 역사를 움직이고 그리고 사회를 바꾸는 그런 지렛대 같은 삶을 살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잊어버렸던 이런 고난신앙이라고 하는 이런 복음을 다시 되찾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본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마지막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광경을 보도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두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고 그중에 첫 번째 남기신 그 한마디의 말씀을 오늘과 다음주에 이어서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원래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스타오르스’인데 여기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도 원래는 없었습니다. 그냥 막대기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십자가 사형제도는 인류가 역사 속에서 고안해낸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로마가 제국을 차지하기 전에 변방에 있는 작은 민족이었습니다. 아주 난폭한 민족이었고 그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보다 더 무섭고 엄중한 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놓은 사형제도 가운데 하나가 십자가 형벌이었습니다.
이런 십자가 형벌의 요령은 먼저 재판을 통해서 죄를 정한 사람을 막대기에다가 매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손바닥에 못을 박았지만 자꾸 손바닥이 찢어지면서 몸이 흘러내리자 사람들이 드디어 못을 그 손목에다가 박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손목을 뚫고 들어간 그 못은 정맥과 동맥을 터트리고 그리고 힘줄을 찢고 마지막에 손목뼈를 부수면서 나무에 가서 박혔던 것입니다. 그렇게 양쪽에 못을 박고 도르래 같은 것으로 매달아서 이미 땅위에 세워진 세로막대기에 끼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발도 똑같이 그렇게 나무에 세로 막대기에 못으로 박아서 매달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60-8-킬로 되는 몸이 아래로 중력에 의해서 쳐지게 되고 그 쳐질 때 그 몸은 세 개 내지 네 개의 못에 의해서 지탱됩니다. 그 중력이 몸을 아래로 잡아당기고 못 서 너 개가 그 몸을 모두 지탱하고 있을 때 그 고통은 자신의 흘러내리는 몸에 의해서 살이 찢어지고 몸이 부스러지는 고통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그 사형방법을 고안해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동맥과 정맥을 터트리고 들어간 그 못 때문에 온 몸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과다한 출혈로 인해서 사망하게 된 것이 그 형벌의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피가 흐를 때 인체에는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견딜 수 없는 목마름과 하나는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격렬한 두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죄수들은 그 두통 때문에 혼절했다가는 깨어나고 깨어나다가는 혼절하기도 했다고 하니 그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래서 정작 로마 사람들은 스타오르스라는 말을 들먹이는 자체를 금기시했다고 하니까 십자가 형벌의 두려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 형벌에 잔인성은 숨을 거두는 그 직전까지 목숨을 연장시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마지막순간까지 경험하게 하는데 그 잔인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수는 3일씩이나 죽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가 받아야 했던 고통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소원은 속히 죽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더욱이 규례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셔서 치열하게 매를 맞으셨습니다. 이미 채찍으로 온 몸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리고 그분의 머리에는 팔레스타인의 가시면류관이 씌워 있었습니다. 그 가시관은 눈과 이마를 찌르고 온 얼굴을 피로 물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드리우고 그 몸에 붉은 보자기를 씌웠으니 이것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50킬로가 족히 되는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치열한 고통을 가져다주는 사형방법을 택하시고 거기에서 자기 아들의 목숨을 받으신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형벌이 너무나 지독하고 치열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그분이 대신 속죄하셔야 했던 우리 인류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렇게 고난을 받고 있는 중에 일어난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생애는 가시고기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주시는 생애였습니다. 온 세상이 당신이 창조하신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누이실 곳이 없어서 말의 밥통에 누이시기까지 낮아지시고 가난과 결핍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시고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였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그런 생애를 예수님이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보약을 먹이는 것입니다. 물질과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 세상 정욕에 이끌려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본분이 무엇인지 망각하기가 십상입니다. 그때마다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분이 왜 우리를 위해서 죽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원래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와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너무나 자주 주님이 우리를 어떤 죄악 중에서 건져내셨고 그분이 고난당하신 것이 무엇 때문인지 잊어버립니다. 그때마다 십자가를 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그 형상 볼 때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상의 생애 전부는 병든 자를 고치시는 생애였고,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 진리 때문에 박해를 받으신 생애였습니다. 저는 자의 친구였고 문둥병자의 보호자였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 계실 때 자기의 몸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섬기는 생애였습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그 죄 없으신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계신 것입니까?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병든 자와 함께 아파하시고 그들을 고치고 무지한 자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셨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척이 되어주시고 고아와 과부들의 아버지와 남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섬김에 모본을 친히 보여주시던 그 제자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기적을 일으켜 그들을 먹이며 위로하던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벳세다 광야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구경하고 있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버림받으시고 하나님 한분 앞에서 내친바 된 사람처럼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오, 그가 당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입었도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이었습니다.
3. 아버지께 기도하신 때
바로 그와 같은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이에 가라사대 “가라사대”라는 말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를 못 박는 자를 향한 원망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향한 불평도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 속에 버림받은 채 호소하시던 예수님의 그 말씀은 바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한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였으니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이 당신의 고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에게 이렇게 고난을 줌으로서 하나님께 형벌을 받게 될 그들의 영혼을 염려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일생을 무수히 삶을 사시고 따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들에게 섬김을 받는 대신에 당신을 다 드려 섬기신 생애를 사셨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으로 당신이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이유를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으로 오셔서 형벌 받을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고난을 당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천군천사들이 합창소리를 마다하고 이 죄악 된 세상으로 내려오셨다고 할지라도 그분이 수많은 사람들의 발을 씻기며 그 곤궁한 영혼들을 위해 피 흘리신 생애를 사셨다고 할지라도 죽으시지 아니하시고는 우리의 속죄를 이루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육체를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거룩하신 아버지께 바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극심한 정신적인 괴로움, 온 몸을 찢으면서 달려드는 죽음의 악마의 고통, 이 모든 것에 에워싸인 채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그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제일먼저 하신 일은 하늘을 우러러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기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그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서 그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악마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전 삶이 고난을 이기며 사신 기도의 실천의 생애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같은 좋은 환경도 없이 그분은 치열한 고난에 불에 대인 것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처절한 환경도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그 기도의 불꽃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아들이셨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이 구속의 대업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온 마음과 힘을 다해서 우리 아버지를 의존하는 마음속에서 사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은 고난이 없는 신앙, 희생이 없는 복음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과 극기 같은 것은 필요도 없는 설탕 친 복음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신앙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행복을 누리기까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환경에 의해서 자주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삶을 핑계거리로 삼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무에 매달리신 채 하늘을 향해 기도하셨고 매달리신 6시간 동안 거의 기도로 당신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까? 상황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도와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의 머리끝까지 발끝까지 구속구석 배이게 합니다. 아버지께서 결국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시는 어린양으로부터 한사발의 피를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그토록 원하셨던 아들의 그 보혈을 받으신 것은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짜서 드리는 이 기도의 헌신을 받으신 후였습니다. 눈물로 드리신 기도를 받으신 후에야 옥체를 깨트려 흘려주신 보혈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 것이 정말 환경이 강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정신이 있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상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있다면 우리가 능히 환경을 극복하고 예수 서신 곳에 우리도 서고 예수 엎어지신 곳에 우리도 엎어지고 그 길이 신앙의 길이 아닙니까?
영국의 신학자로서 젊은 나이에 나치 독재와 함께 싸우다가 죽은 뒤트리본 헤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사상은 우리와 일치하지 않은 점이 많지만 그분의 박사 논문을 읽으면서 저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박사 학위논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직한 마음으로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다 이리 오너라. 우리 함께 죽자고 말입니다.
성도의 생애가 무엇일까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고 인생의 참된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았으니 죄 때문에 그 세상을 더럽히고 망가트린 것을 깨달았습니다. 타락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구속의 길을 연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구속의 완성을 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허무한 것에 굴복하여 종노릇하던 아무 희망이 없는 우리 인생들을 그 피로 속죄해주셔서 다시는 허망한 세상위해 살지 않고 예수 위해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값없는 구원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가 나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전부에다가 헌납 증서를 써서 사인을 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은 우리 죄를 위해서 형벌을 당하신 거기에 우리가 참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피조물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야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환경 때문에 기도를 못한다기보다는 사실 진정한 이유는 우리의 내면에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회심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고 은혜에서 부패해서 생각은 엉클어지고 마음은 세상 사랑에 물들고 의지는 다시 자기중심적이 되고 마음의 소원은 정욕에 불타고 이렇게 되면서 우리는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환경 속에 산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십자가의 정신과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젊은 시절에 방종하게 살며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해서도 진지해지지 아니하고 더군다나 우리에게 이런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고 그분이 이 고난의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생각지도 않는 그냥 즐겁기만 하고 쾌활한 젊은이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허무한데 굴복하며 살아가는 것 말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님의 정신을 우리에게 배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새벽에 일어나면 얼마나 힘든지 감기 기운이라도 있으면 우리의 몸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그때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예수님, 많이 아픕니다. 그러나 기도하러 갑니다. 예수님도 많이 힘드셨지요? 핍박과 고난을 받으며 고달픈 삶을 사셨고 기도하러 가셨지요. 저도 갑니다. 힘을 주십시오. 유혹받을 때 기도해보십시오. 예수님,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해서는 제 믿음이 너무 연약합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지요? 그러나 유혹이 예수님을 굴복시킬 수 없었지요. 제게도 힘을 주십시오. 그러면 힘이 생깁니다. 그게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그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셔도 여러분들이 이런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은혜가 보존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보면 기도의 문을 열면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여, 이것은 왕자가 왕인 아바마마를 부른다기보다는 평범한 여염집의 어린아이가 식탁에서 아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입니까, 유대인들입니까, 로마의 병정들입니까, 완악한 유대인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정작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분은 하나님 당신이셨습니다. 왜? 우리의 죄를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아들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르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재물 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셨으나 아들은 십자가에 매다셨습니다. 당신을 죽이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으신 그 아버지를 뵈면서 그 형벌 받는 고난 속에서 아드님은 그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아버지와 철저하게 연합된 삶에 연속이었습니다. 고난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었고 환난이나 박해도 갈라놓을 수 없었으며 궁핍과 시련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살을 찢고 들어오는 치열한 죽음의 악마도 아버지를 의뢰하는 이 아들의 온전한 신뢰를 부서트릴 수가 없었습니다. 꺾어지지 않는 치열한 연합으로 예수는 아버지께 붙어 있었습니다.
4. 기도의 시작: 아버지여
신앙의 참된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이렇게 예배당에 주일이 되면 일주일에 죄지은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건들거리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세상을 이길 힘이 나올까요? 세상을 이길 거룩한 힘은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들인 우리가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할 때 우리가 무엇이 두렵습니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방백과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는 편이 낫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말할 수 있는 신앙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삶,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은 사시고 주님이 좋으시면 내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싫으시면 내 마음 속에서 치열하도록 그렇게 행하고 싶어도 그것을 버리는 삶, 그래서 왕이신 그분의 보좌 아래서 엎드리기까지 낮아지는 그 복종된 삶을 통해서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연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모든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담대한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의 온갖 힘이 우리를 흔들고 우리의 속과 그리고 밖에 있는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의 생명을 노려도 아버지를 이렇게 친밀하게 부를 수 있고 그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던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분을 연애하고 그분을 첫사랑으로 받아들이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인생의 전부였고 그리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그분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에 무제한의 순종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눕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나 많은 날 동안 엉클어진 우리의 생각과 덧없는 세상에 대한 사랑, 야금야금 정복되어가는 거룩한 삶, 은밀하게 타협하는 젊음의 정욕, 이런 것들이 서서히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세계들을 파괴하고 결국 어느 날 눈을 떠보니까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머신 분이 되지 않았습니까? 과연 이런 삶을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참된 축복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그래서 우리를 굳게 붙든 주님의 그 손 때문에 폭풍도 헤치고 흑암도 가릅니다. 그분과 동행하는 그 삶이 정말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금과 은보다 더욱 소중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절 기간으로서 고난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계절입니다. 나는 이때에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많이 생각하도록 충고하고 싶습니다. 예수 죽으신 것을 생각하시고 그리고 예수님과 가까이 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철저히 우리의 죄와 영혼의 싫증 때문에 해이해졌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굳게 하고 다시 한번 우리 안에서 터치며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이런 고백들이 여러분들의 고백 속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그렇게 탁월한 믿음은 없어도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자랍니다.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여러분들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경험하게 해주셔서 여러분들로 변화된 세상을 살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 용서를 구한 십자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눅23:34하)
1. 용서의 중요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이 첫 번째 말씀을 보도하는 성경 34절을 가지고 지난 시간에는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이 십자가 위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본을 보며 도전을 받았습니다. 상황에 너무나 쉽게 굴복하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참회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기도를 묵상하면서 우리들이 분투하면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해야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 살펴본 것은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그 친근함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컸지만 고난을 이길 위대한 힘이 아버지와의 친밀함 속에서 나왔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셨던 특이한 화목의 관계된 것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바로 세상을 이길 힘들을 우리들도 공급받게 되고 따라서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과 실제적인 연합의 교통을 누리면서 살 때에 고난을 이기고 이 어두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그 첫 번째 기도의 말씀, 그 내용 자체를 가지고 오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는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는 인간들의 사죄를 비는 중보의 탄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말씀이 일곱 마디였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이 사죄의 탄원은 그 일곱 마디의 기도 가운데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이제껏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오신 삶의 방식과 지상 생애를 보여주는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인간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엄청난 고난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신 동안 말로 할 수 없는 그 비참한 지경에서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낮아진 종처럼 일생을 사셨습니까? 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비참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이 모두 질문은 많지만 한가지의 대답을 향해서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가운데 한마디 말씀은 “내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마지막으로 남기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라고 하는 개인적인 기도를 제외하고 나면 사실상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었으며 돌아가시기 직전에 남기신 말씀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적과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자주 보여주신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셔서 기뻐할 때도 다 이루었다고 말씀 안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그 장대한 행렬을 보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꼭 한번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뭘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구약이 이제껏 바라보며 달려왔던 인류 구원의 대업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를 다 감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대속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뭘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는 일, 그 일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능력은 있지만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당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사람은 다 작은 철학자입니다. 저마다 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의 아들이 되고 그리고 다양한 인생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인생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에 대한 태도도 각각 다 있고 자기가 이제껏 인생을 살면서 견지해온 삶의 방식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사회적인 지위가 어떠하든지 간에 성경을 펴면 성경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네 이야기를 나에게 하기 전에 내가 너에게 묻는다. 용서받았는가? 네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았는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범죄하고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던 그 죄에서 네가 용서를 받았는가?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우리 인생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기독교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견해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용서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십자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범죄 한 채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더러운 존재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한 이 세상에서는 하늘의 자원을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치열한 경쟁관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남의 자원을 빼앗으려고 하고 자기의 자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세상의 자원은 그렇게 해서 소유하고 보호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죽음이라는 질병에서 구원해내기 위해서는 세상의 자원만을 가지고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불행은 하늘의 자원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늘의 자원과는 상관이 없이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소유하고 그것을 가지고 몸부림치다가 죽는 것인데 죽음 이후에는 치열하게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이 그를 삼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그 지옥에서 영원히 경감되지 않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치열한 고통 속에서 그야말로 날마다 지옥과 같은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용서받지 못한 자의 운명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시골에 가면 돼지를 많이 사육을 합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습니다. 새끼들을 돼지들은 많이 낳습니다. 적으면 한 댓 마리 낳지만 많이 나면 한 열 마리씩 그렇게 낳습니다. 새끼들을 그렇게 많이 낳으면 그 돼지 새끼들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러갈 때 돼지를 한 마리 한 마리 올려놓고 돼지 인상을 보면서 코는 어떻게 생겼나, 눈은 큰가, 작은가, 쌍꺼풀은 있는가. 그런 것을 따지면서 예쁜 돼지를 골라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위에서 보고 좀 덩치가 커 보이고 씨알이 굵어 보이는 놈들을 골라서 그냥 가지고 갑니다. 돼지는 뭐 인물을 보고 잡아먹습니까? 마치 이 하나님 앞에서의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그렇게 곧 멸망당할 돼지가 자기의 눈에 색칠을 하고 입술에 루즈를 바르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도살의 날이 다가오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를 치장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언젠가 한번 김용옥 선생의 특강을 몇 번 들었습니다. 날보고 자꾸 그 사람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책도 좀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루 저녁에 집회를 갔는데 그 방에 ‘나는 동양불교 이렇게 생각한다.’ 책이 있습니다. 탁 폈는데 600페이지를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감탄했습니다. 나도 이렇게 재미있게 써야지 되는데,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모른다고 말하는 게 정직합니다. 그런데 쭉 해나가면서 나는 제일 궁금한 것은 이게 이치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노가리 같기도 한데 저게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우리인간들에게 무슨 효능을 주는가. 그런데 어느 강좌에서 그것을 쭉 강론하더니 마지막에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결국 이것을 모두 배우는 게 무엇인가? 이것이 뭐냐. 그러더니 왜 웃습니까? 마지막에 이게 뭐냐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렇게 함으로서 인간은 비로소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나도 모르게 질문했던 게 그 다음에는? 이 땅에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행복해지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답이 없습니다.
그 치열한 하나님의 심판이 진노가 기다리고 있는데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그것도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비결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의 빛 아래 보면 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성을 찾아서 갔으니까 뭔가 거기에도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맞는 이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용서받지 못한 인간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뉴스위크지에서 특집으로 다룬 것이 팩션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개봉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화입니다. 원래 그 팩션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것을 (?) 그것입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되었지만 그러나 흥행하리라고는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미국의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동성연애자들을 결혼하라고 정식으로 법적인 허가를 내주는가 하면 법원 앞에 세워놓은 십계명을 철거하라고 소송이 들어가고 학교마다 전부다 성경을 가리키는 것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제재를 가하고 심지어는 학교에서 기도하는 것도 신앙에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해서 소송이 들어가고 하는 이런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지금 상영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첫날 2,600달러의 흥행을 올렸습니다. 사상 최고라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려듭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렇게 펑크머리를 하고 그렇게 살던 10대들이 와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그 영화를 봅니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인산인해가 되어서 극장으로 몰려 들어가고 그 젊은이들 눈이 충혈 된 채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장면과 그 기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제 잘났다고 몸부림을 치고 그리고 그 얼마 안 되는 이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살아도 인간의 참된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용서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한때 프리드리히 니체라고 하는 사람에게 깊이 심취했습니다. 그때는 사실 그 사람의 애독자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작품이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쓴 책을 모든지 읽으려고 했고 읽은 것 중에서 모든지 다 줄을 칠 정도로 그렇게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결국 주장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초인사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말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나는 도저히 그 사상이 그 사람을 살렸다고 생각이 안 듭니다. 1888년 어느 날 그는 결국은 정신질환 비슷한 착란 증세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정신 이상자가 되어서 사망하게 됩니다. 제 눈에는 초인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또 쇼펜하우어에 깊이 빠졌습니다. 뭔가 이렇게 그 사람이 던지는 인생에 관한 수많은 의문들은 아주 가슴에 불을 붙입니다. 그런데 마침표가 없습니다. 수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한때는 또 헤르만 헤세에 빠졌습니다. 수많은 의문들을 불러일으키는데 엄청난 감동을 줍니다. 그게 문학이 주는 한계입니다. 결국은 수많은 물음표는 만들어내지만 느낌표나 혹은 마침표는 찍지 못합니다. 우연히 책을 한권 대했는데 그때는 고등학교 때입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인류에 비참함에 대한 생각의 연민으로 압도당한 채 젊은 시절을 보내왔다고 했습니다. 버트란트 럿셀 이었습니다. 또 그 사람에게 한참 빠졌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보다 훨씬 난 것 같았습니다. 너무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서 수많은 지성인들을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만들었던 유명한 책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그런데 결국은 그 사람도 마지막에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적인 진단을 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폐허가 될 것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어둡고 암울한 진단으로 끝을 냅니다.
결국 인간이 저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이 인생의 가장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수없는 방법을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나는 아무 암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내 인생을 가치 있게 살게 하고 그리고 참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면 백번이라도 종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주인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잠시 마음을 사로잡기는 했는데 결국은 내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을 대신 산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결국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복음으로 돌아오는 모든 회심전의 준비였다고 나는 그렇게 섭리적으로 생각합니다. 아마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쉽게 복음에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받아들이니까 지금 그렇게 고민하던 세월로부터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엇 그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만난 복음인데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죄가 사하여졌다. 이제는 너는 내 진노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리고 나의 자녀고 그리고 너는 내 가족이라고 하는 하나님 자신에 의한 복음에 선고를 듣기까지는 마음의 평정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울레리우스 어거스틴이 자기 참회록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는 그 똑똑한 젊은이가 결코 마음에 안식을 얻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그의 고백론 속에서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이후로 자신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모든 욕망을 버리게 되었고 그 안에서 안식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치열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그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영원에 잇대어 사는 인생이 아니면 그것은 단지 소모품으로서 열심이 되어 가고 있는 그런 존재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까지 확실하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이전의 모든 죄에서 용서해주셨으며 나를 주의 자녀 삼으셨다. 라고 하는 이 구원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깊이 설교를 듣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죄의 용서를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수난을 통해서 용서를 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간절한 탄원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떨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흔히 이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라고 말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그 십자가의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이 적용되었을 때 우리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십자가 사건 하나만을 보면 그것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전에 죄에 대해서 진노하고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그 무서운 엄위와 공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던 옛날 시대에 전염병은 아주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역사 학자들은 찬란한 왕국이 어느 순간에 완벽하게 역사 속에서 사라진 원인을 대부분 전쟁이나 이런 것들 보다는 질병에서 찾습니다.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염병에 걸렸을 때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전염병일 경우에는 사람들이 그들을 격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질병과 함께 거기서 자기끼리 죽도록 놔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은 사람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밉거나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그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그렇게 죽일 수밖에 없고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미워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걸린 그 치명적인 전염병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그들의 전염병이 하나로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죄와 결별될 때 그 인간은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사랑하시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친절과 사랑과 위로를 베푸십니다.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 죄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고 도전이고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그대로 끌어안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도 성품상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그 죄를 용납하심으로서 드러나지 아니하고 그 죄를 파멸하심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이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어도 그 죄와 결별하면 과거에 어떤 죄를 행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많이 사랑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죄가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위대한 용서는 항상 위대한 사랑의 경험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이전에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나를 주의 일꾼 삼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붙들고 있는 한 더군다나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 계속 살아가고 있는 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버린 죄들 때문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나타나지만 자기가 붙들고 있는 죄를 통해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죄를 붙들고 있어서 그 죄와 죄인들이 하나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죄인들은 스스로 죄를 사랑하고 집착함으로 죄와 하나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분에게 담당시키시고 담당시키셨을 때 그분은 자력으로는 그 죄와 떨어질 수 없는 죄를 짊어진 희생의 재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죄만 남겨놓고 당신은 도망가고 그래서 죄에 대해서만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붓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가능하기는 했지만 그랬더라면 하나님의 용서가 성취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들이 가능했다면 구약에서 그렇게 수많은 희생제물들이 제사 속에서 죽어갈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짊어진 수많은 죄는 그 죄를 대신 진 제물에서 나타났고 제물과 그 죄는 하나 되었으며 죄와는 상관이 없는 제물이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 제물은 하나 되었고 그래서 죄에 대한 진노를 그 제물에게 쏟아 부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사망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것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감당하신 것은 바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죄를 향한 무서운 진노를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심성이 곧고 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먼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며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아도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신 대신에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만 구원받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를 그렇게 죄에 용서받게 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그분의 주권이었습니다. 사람의 선한 행실이나 도덕적 품성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히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깨끗케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 공로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돌려드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주도하신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돌려드릴 영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이 일을 하셔서 우리를 구원받게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누군가 그 예수의 사랑을 먼저 알고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그 죄에 유일한 희망되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전해준 고마운 복음전도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의 증언이 있었으니 우리들이 인생의 참된 진실을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흘리는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강퍅하고 굳은 마음이 녹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써서 수고하는 그들의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도저히 인간의 지성으로는 믿어질 수 없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복음의 진실을 듣고 내가 바로 하나님의 부들부들 떠시는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것과 바로 나같이 구원받을 사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무서운 진노를 친히 감당하시고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밖에 의지할 것이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두운 우리의 지성의 휘장을 찢고 흑암에 가려진 우리의 영혼에 커튼을 찢고 찬란한 지식의 빛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속에 흘러 들어와서 그래서 발견한 것이 세월은 많이 흘러도 우리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동일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감당하고 우리를 건지셨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구원을 얻고 그 죄에서 모두 용서함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이 그 순결한 상태에서 즉시 하늘나라에 데려가지 아니하고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그 모든 피로 구속하시고도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더 많이 주님을 닮아서 하늘나라의 맞보기로서의 삶을 살고 그리고 힘닿는 대로 나를 구원하신 이 예수의 아름다운 십자가의 복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증인으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바로 이 그리스도에 관한 증인들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우연히 학생 책상 옆을 지나가다가 어느 학생이 자기의 노트 위에다가 기록한 그 글귀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뭐라고 쓰였는가 하면 ‘나는 이 세상이라는 법정에 선 영원한 증인이다.’ 내 일평생 예수의 누명을 벗겨드리리라. 쓰여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부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누명을 씌워서 그분이 결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인생의 소망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얼마나 유창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관심한 재판관, 편견에 사로잡힌 재판관과 같은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누명을 벗겨드리고 그래서 우리를 사로잡았던 죄의 용서의 그 찬란한 빛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도 받고 그렇게 새롭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선택해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진노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고 생각 없이 이 땅의 자원을 얻기 위해서 골몰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옷소매를 붙들고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감당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거의 대부분은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을까요? 죽음을 향해 달음질치는 그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을까요?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잠시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들이고 잠시 잠깐 후면 인생의 마지막 휘장이 드리워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아래 끌려갈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서로 친교를 나누고 자기들끼리 즐거워하는 대신에 이렇게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서 더 많이 눈물을 흘리고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흐느낀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의 눈물이 모여 강이 되고 그 강물이 이 세상에 강물 되어 흐를 때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십자가의 그 회심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정말 우리의 모든 관심은 영혼들에게 있었고 그리고 그 영혼들을 구원하는 그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습니까. 만난 영혼들은 모두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로 보여 졌고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우리의 수고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웠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이제는 불평과 불만들이 생기게 되었고 구원이야 기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들이 생겨나서 1년 365일이 흘러도 자기의 죄를 위해서 대신 고난 받으신 예수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일도 없고 그리고 자기를 그 죄에서 구원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용서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감격해하는 것도 없이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굳어짐이 찾아들게 되었고 그리고 우리의 심령은 예전에 그 소중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것은 진정으로 자신이 그 십자가 앞에서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온갖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도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해택으로 인해서 교만해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도 피 떨어지는 그 십자가 앞에서 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이 더러운 인간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지만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부랑 무도한 죄인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형벌아래 있는 저주받은 죄인이었으니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용서받았을 뿐이라고 하는 그 고백 속에서 살아옵니다. 그래서 의인으로서가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불러주셔도 남은 이 생애를 사는 동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여야 하고 스치던 만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우리는 예수의 향기여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탄원했다면 우리의 가족들이 아직까지도 불신 상태에서 주님을 등지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엄마가, 우리 아버지가, 내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아직까지도 죄악의 어두움 속에서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에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서 용서를 비는 눈물의 기도가 우리의 마음에서 마른 것을 인해서 깊이 회개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경솔하게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그들의 강퍅함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보십시오. 당신을 향해 못질하고 그리고 욕한 그 수많은 죄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저들의 강퍅함 때문에 저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시는 대신에 저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것이니까 용서해달라고 어떻게 보면 구차해 보이는 변명을 그들을 위해 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탄원하셨습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기도가 살아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가 넘치게 느껴지는 날 마음 한구석에 아직까지 이 은혜의 복음을 모르고 이 십자가의 사랑을 몰라서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영혼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어느 수련회에서 제가 말씀을 전하고 났는데 은혜를 받은 지체들이 몇 있었습니다. 둘이 서로 의논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닌데 똑같은 고백을 저에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간 다음에 뚜렷한 현상이 나타났는데 기도만 하면 수십만 명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그게 오늘 실상입니다. 그게 이 번영한 도시 한복판에서 영혼들의 그 울부짖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으로도 그들의 울음을 멎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히신 그 손만이 그들의 영혼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그들에게 친근한 용서의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십자가의 죄 사함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직업은 바로 이 일을 위한 수단이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지성과 재능들은 간접적으로 이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물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모든 건강도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홀로 있을 때 자기를 그 어두움 속에서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함께 모였을 때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우리와 같이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그 멸망으로 치닫는 삶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끊임없는 화해와 용서의 초청을 거절하고 주님을 대항하며 그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때로는 피어린 외침으로 때로는 눈물의 호소로 때로는 지극한 사랑의 속삭임으로 그 세대의 언어로 그 시대에 맞게 그들의 언어의 옷을 입고 다가가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랑만 그 사랑 알도다
정말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모여서 거듭나지 못한 우리의 지체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아직도 용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 엄마 아빠를 위해 기도하고 동생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아마 하나님께서 더 많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스치듯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와의 만남이 그 사람의 인생에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는 이 일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그들에게 간절히 전해줄 때 어리석은 복음을 통해 지혜로운 구원의 역사는 나타날 것입니다. 쉼 없이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용서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능욕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인내
마지막 또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에서 능욕을 참고 견디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 치욕스러운 죽음을 소문난 강도들과 함께 맞이하셔야 할 어떤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이 세상에 손해나는 어떤 일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탈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능욕을 견디고 참으신 생애를 사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낮아지신 비참함의 극치는 바로 그 십자가에서 아주 쓸모없고 더러운 강도들과 한 동무가 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이야기한 후에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 있으니”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그런즉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저는 자기 앞에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궁극적으로 당신의 생명을 드려서 이루셔야 할 사명이 있으셨기 때문에 멸시와 치욕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지만 이런 고통은 처음 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영혼 전에도 이런 부끄러운 고통을 당하신 적이 없고 영혼 후에도 없으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 처절한 고난은 고난만이 아니라 영광이신 하나님이신 그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불명예였으며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고 능욕이었던 것입니다. 그 능욕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받고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친히 그 십자가에서 그 능욕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하신 이 능욕, 그리고 이 능욕을 당하시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그 능욕 받는 고통을 건짐을 받았으니 우리가 결코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에 은혜는 한번 경험하고 구원을 얻은 후에 휴지조각처럼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닙니다.
성도다운 거룩한 삶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복음적인 모든 거룩한 성화가 어디에서 근원을 두고 있습니까? 죄를 이기며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사는 비결이 어디에서 흘러넘칩니까? 그 모든 자원은 오직 복음이고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다신 사신 것입니다. 그 복음을 통해서 그 복음을 보면서 그 빛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 복음의 빛 앞에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복음의 빛 아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도록 우리의 손에 피 묻힌 죄인들이고 일생 살아온 삶의 발걸음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야 했던 죄를 생산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는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과 작별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위해서는 그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오늘 하루하루를 매일 매일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을 받고 영광을 함께 누릴 것만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신 것은 영광이 아니라 능욕이었고 그리고 존귀가 아니라 수치였습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렇게 주님은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존귀와 영광을 통해서 주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예수 죽인 것을 그 일에 그 고난에 그 죄를 짊어지고 자기 인식 속에서 사는 것을 통해서 더 많이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내게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라”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일꾼이라고 생각할 때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대 사도라고 믿었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고백대로 약한 것을 시인할 때 주님의 강한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자기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한번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능욕과 그 수많은 고난 속에서 한번도 그것을 정당한 것이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동안에 스스로 자기는 예수를 죽인 더러운 죄인일 뿐이고 단 차이가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죄인들은 아직 용서받지 못했는데 자신은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죽인 것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생애를 일생동안 견지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회심하고 예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순수했습니까? 하늘 문이 열리고 그 영혼의 축복들이 쏟아져 영적인 축복들이 쏟아져 내릴 때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갈망으로 불탔습니까?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했고 신령한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더 많이 터득하고 싶어 했으며 그 모든 신령함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 많이 자라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은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에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매일매일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마음이 그런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무엇을 희생해서든지 예수 닮기를 원하고 그리고 무엇을 버리고서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택하고 싶은 그런 간절한 갈망이 우리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이 자신 있게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없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원인은 세상 사랑입니다. 세상에 있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우리는 마음에 이제껏 알고 있던 그 체험적인 지식들은 차가운 지식으로만 남고 그리고 우리는 그 내적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욕을 모두 견디시면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형벌 받으시는 그 광경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먼 길을 가는 순례자일 뿐이고 우리의 인생에 길은 순례의 길일뿐입니다. 그 긴 순례의 길을 가노라면 즐겁고 기쁜 일도 있고 괴롭고 아픈 일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헤어져야 하는 이별의 슬픔도 있습니다. 평안하고 즐거울 때가 있는가 하면 우리의 본향을 바라보고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기 때문에 유리하는 객처럼 취급받고 이 세상에서 외로워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나그네는 자기가 지나가는 이 나그네 인생길에 영원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나그네의 길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세상이 그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랑의 마지막 결국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버리고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 사람들의 마지막이 무엇일까요? 예전에 우리가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났던 것도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깃들었고 우리의 지성은 눈이 멀게 되었고 우리의 의지는 세속적인 욕망과 충동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죄악의 즐거움을 누리고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사라질 쾌락과 방종함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유익이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이 말했듯이 이 세상과 정욕은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경외하는 자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 십자가와 양립할 수 없는 세상 사랑을 선택하지 말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세상이 한 일이 아닙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침 뱉고 그분을 때렸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이 모두 세상이 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는 날마다 예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는 진지하고 순결한 성화의 삶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담대함은 세상의 모든 사랑을 포기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붙든 사람, 그래서 내게 있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 세상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믿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안일한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은근한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주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드리되 마지막까지 드리려고 하지 않는 부정직한 우리의 삶의 태도, 이 모든 것들이 죄가 우리 가운데 융성하게 자라는 못 판이 되고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 그리고 철저한 자기부인의 삶 없이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은 언제나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이 소중하게 되어질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면서 그분이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형벌의 능욕을 참으셨던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세상의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고 일편단심 우리가 처음 만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순수한 사랑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본향으로 인도하는 십자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1. 잊혀져가는 내세신앙
지금은 다들 자가용들이 많아서 놀러갈 때는 각자 자기 차들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습니다만 우리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만 해도 동리에서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주 희귀했습니다. 그래서 즐겨 애용하는 것이 교회선이나 경춘선 중앙선 같은 기차들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저희 집이 기차역 옆에 있어서 종종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름철이나 또 가을 같은 행락 철이 되면 사람들이 수없이 기차역으로 몰려옵니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의자를 찾고 시간이 지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 사람들이 그냥 맨 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아서 화투도 치고 술도 마시며 또 어떤 사람은 그것도 자리가 없어서 역 앞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모자를 눌러쓰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구내방송이 울려 퍼집니다. 춘천 행 열차가 곧 도착하니 기차표를 구입하신 분들은 개찰구로 나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면 앉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한걸음이라도 빨리 가서 기차를 타려고 개찰구에 줄을 서고 역무원이 나오면 이제 사람들이 물밀 듯이 빠져서 플렛트 홈으로 몰려갑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대합실에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신문지 그리고 굴러다니는 술병 같은 것들로 가득합니다. 이제 누구도 자리를 다투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는 인생을 바로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사람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대합실에서 ‘영원’이라는 기차를 기다린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기차를 타고 영원히 지옥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간다.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신앙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내세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세 신앙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지키고 이 땅에서 믿음을 따라 사는 중요한 방편이 되었습니다. 내세 신앙은 십자가 신앙과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내세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십자가에 대한 강력한 현재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비록 불의하고 죄 많은 인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그 놀라운 구속의 공로 때문에 천국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내세 신앙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힘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면서 일생을 살다가 만나는 강렬한 유혹들을 이 내세 신앙으로 이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악을 행하고 어떻게 잠시 후 그 예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인가. 하면서 내세 신앙으로 유혹을 이겼고 환난과 핍박이 오고 고난이 겹칠 때도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이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당장 눈앞에 찾아오는 그 끔찍한 고통과 괴로운 시련들을 이기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여전히 내 안에 융성하고 있는 수많은 죄들도 역시 이런 내세 신앙으로 이겼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사명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엄밀한 의미에서 건설적인 내세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역사성과 초월성은 항상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굴러갑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들을 잘 감당해나가기 위해서 수고하고 많이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질기도록 돋아나는 그 부패한 죄성들, 그리고 정욕들 이런 것들을 믿음의 선배들이 내세 신앙으로 죽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기에는 적합한 세상이지만 그러나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이 세상에서 적합한 임무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세상을 경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세 신앙으로 마음속에서 돋아나는 독버섯과 같은 죄의 정욕을 효과적으로 죽이면서 그들은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끊임없이 순간을 살면서도 그 순간의 삶이 영원을 잇대 이게 하고 오늘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현세를 뛰어넘어서 영원을 향하여 어떤 가치가 있고 그리고 나의 영혼을 어떻게 책임져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반문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눈멀고 미련한 육신의 소욕이 저항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보다 확고한 신앙을 붙듭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림에 있어서 지체함이 없도록 합시다. 주님이 오시는 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여기며 사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음하며 탄식하는 가운데 그 날을 기다리며 삽시다. 이것이 바로 요한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죄를 이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참다운 모습입니다.
성경은 어디서도 가난을 덕목이라고 가르치거나 또 부가 악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그 사람이 어떻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가. 그런 존재가 되는가,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거기서 구원받았다고 할 때 그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만이 아니라 죄와 그리고 죄의 결과인 비참한 영혼의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그리고 그 비참의 모습인 인간의 모든 악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서만 우리는 진정한 구원을 실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쓰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방탕한 외국생활 가운데 이런저런 질병에 걸렸더라면 아버지가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 그렇게 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진정한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비참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도 포함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대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진실한 견해를 따라서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데올로기에 붙잡힌 유별난 삶의 견해를 택하면 복음 신앙이 반드시 뒤틀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인생을 살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도록 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창의적이고 그리고 성실한 노력으로 기업을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돈을 법니다. 그러면 셋방으로 전전하던 사람이 집을 사고 여유가 좀 생기면 조금 큰집에서 살고 또 여유가 생기면 자동차를 사서 타고 다니고 좀더 여유가 생기면 좀더 좋은 차를 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19세기의 설교자 가운데 제가 깊이 존경하는 설교자 찰스 하던 스펄젼 목사님이 있습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린 것 같은데 그는 초인적인 사역을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 일등 마차, 이등 마차, 삼등 마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일등 마차를 타고 또 다른 분은 삼등 마차를 탔답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이 그 목사님에게 당신 지금 뭐하고 있는 중입니까? 물었더니 나는 교회 돈을 아끼고 있는 중입니다. 스펄젼 목사님보고 당신은 지금 뭐하고 있는 중이요? 나는 주의 종을 좀 아끼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나 유머가 풍부합니까. 그는 초인적인 사역을 감당해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생각했습니다. 테베네클 처치에서 그가 설교할 때 시인, 정치가, 노동자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회심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오늘 일등석을 타고 육신을 편안하게 한 다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지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조금 여유가 있었을 때 조금 그것들을 여유를,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칼빈 선생도 그 사람은 분명히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이 세상에서 성도가 누리면서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소망이 이 땅에만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부르실 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에 적은 사랑을 두고 이 세상보다는 오히려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사랑과 소망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 우리에게 천국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이 병만 들지 말게 해주시고 건강만 주시면 천국보다 여기가 살만 합니다. 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정말 복음이 무엇인지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까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누리고 누리지 않고의 의미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향한 사랑은 소유의 다과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재물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영혼의 진실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내세 신앙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는 각종 모순과 많은 죄들을 인해서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이며 그 위로를 통해서 공급받는 하늘의 자원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곳에서 칼빈 선생은 말합니다. 우리가 만약 죽음을 통하여 이 땅의 포로 된 상태로부터 아버지의 나라, 천상의 조국에 영원히 살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찌 이 사실로부터 위로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탈색된 복음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참다운 복음은 그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맞게끔 살아가는데 관심이 있지만 값싼 복음은, 싸구려 복음은 그런데 관심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인간들에게 인간이 이 세상에서 찾는 것이 하나님께도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습니다.
꼭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진실한 자세로 성화의 길을 걷는 사람과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에 차이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최고의 가치가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성화의 길을 걷는 신자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하찮고 우스운 것이 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은 그 사람을 바꾸어놓고 새사람을 만듭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도록 넉넉한 눈에 보이는 물을 공급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여인이 변화되자 물 긷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양동이를 내동댕이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가서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을 보십시오. 여전히 자기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자기 힘으로 이 세상에 있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예수의 힘과 능력을 빌어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복음의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진실한 성화의 길을 걷는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커다란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고 우리의 죄로 인해서 잠시 좌절된 것 같았던 창조의 계획을, 특히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완성하시는지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옛 과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신자가 되고 주님이 자신의 존재 때문에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현세는 끊임없이 경멸되어야지 하며 현세에 대한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둥지를 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내세의 신앙의 빗자루로 쓸어내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작은 이 세상의 일을 행할 때도 주께 행하듯이 행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이 소명이 라틴어로 보카치오입니다. 그 보카치오가 바로 영어의 ‘vocat1on’ 이 되는 것입니다. 직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이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충성스럽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별개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축복으로 주시는 것들을 적절히 누리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과 나의 소망이 그것을 붙잡고 결탁되어서 세상과 짝한다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사랑하고 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셔서 세상에 보내신 계획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슬픔이 많은 괴롭고 어두운 세상에 우리를 보낸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존재가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비쳐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빛을 비추게 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은 한편으로는 죽도록 사랑해야 하는 세상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목숨을 걸고 사랑해서는 안 되는 그런 역설적인 대상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신앙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진리를 외치며 진리와 함께 살고 죽어갔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태도와 정체를 분명히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살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를 누리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고 잠시 죄악의 악을 누리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받는 것을 더 큰 보물로 여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만큼 하나님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나도 축복할 것이고 저주하면 나도 미워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자기의 인식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 땅에 있는 원주민들이 아브라함을 향해 네가 누구냐 하고 물을 때마다 아브라함은 나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주신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약속으로 받은 가나안 땅을 즐거워하고 환영하다가 죽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나그네로 일컬음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던 것은 영적으로 보면 더 낳은 언약의 본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돌아가고자 하였더라면 돌아갈 뻔 하였거니와 그러나 두고 온 고향보다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한 것이 바로 그들의 믿음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내세 신앙으로 현세 유혹을 이기고 육신의 정욕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이 죄 많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이 있는 자로라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을 따라서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세 신앙입니다. 이 내세 신앙은 죽음을 앞둔 연로한 노인들이 몇 구절 성경의 위안을 삼으며 인생의 쓸쓸한 황혼을 스스로 달래기 위해서 갖는 말년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일평생 예수를 위해서 산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내세 신앙에 불탔습니다.
지금도 오엠 에프 선교사들의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인지에 도착하면 그날 밤에 제일먼저 유서를 쓰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한해가 시작될 때마다 유서를 쓰고 고난주간이 올 때마다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유서를 쓰면서 마지막 날에 온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중요한 그 일을 위해서 내세 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매일매일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어두운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썩은 세상에 한줌의 소금이 되는 것도 만족하지 않고 서 말의 가루에 넣은 한줌의 누룩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누룩이 되기보다는 가루가, 소금이 되기보다는 설탕이, 그리고 빛이 되기보다는 불 꺼진 등불이 되고 그래서 어두움과 하나 되고 싶어 하던 일은 오늘날에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그런 일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빛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때는 몰라서 그렇게 살았지만 시퍼런 진리를 가지고도 우리가 그런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면 우리의 죄가 얼마나 중하겠으며 우리의 영혼의 깊은 어두움을 무엇으로 밝힐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내세를 묵상하고 그리고 그 찬란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 아래서 티끌과 같은 우리의 인생의 존재의 크기를 생각하고 그리고 죽음의 휘장너머에 있는 쇠하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는 그 찬란한 나라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인 됨을 묵상하고 내세 신앙의 앞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찬란함을 명상하면서 우리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이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자랑들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날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는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을 명심하며 매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내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오늘 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사역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운데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곁에 못 박힌 두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만 성경 이외의 문헌에 의하면 한 사람의 이름은 디스마스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은 게다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강도짓을 한 사람이었고 어쩌면 형제이거나 혹은 동업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이 비루한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전적으로 유대인의 간교였습니다. 너절한 죄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매달아놓음으로서 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는 고상한 선지자가 아니라 잡범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중앙에 놓음으로서 양쪽에 거느린 이 강도들의 괴수쯤 된다고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이 치욕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기회를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또 한 사람에게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처음에 이 두 강도가 똑같이 예수님을 욕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에 와서는 한편의 강도가 중대한 변화를 마음속에 경험하게 됩니다. 회심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치관이 바뀌는 중대한 변화를 그 십자가상에서 못 박힌 채 경험하게 됩니다. 강퍅해질 대로 강퍅해진 가슴을 가지고 일생 동안 흉악범으로 살았던 이 죄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회심하는 이 장면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위대함과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고 안일하게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지만 정작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랑은 이 세상에 베풀지 않는, 전도하지 않는 우리의 태만한 모습들을 보고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2. 강도에게 일어난 네 가지 변화
여기서 이 강도는 크게 다섯 가지로 가치관의 강력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제가 서대문 형무소에 설교를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교도관들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여기에 오신 분들이 여기에 와서 많이 반성을 합니까? 아닙니다. 왜요? 그 사람들은 여기에서 진짜 죄인들은 모두 밖에 돌아다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죄가 많아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재수가 없어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예수 믿고 참회한 사람들이 자신을 반성하지,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범행을 모의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도 죄라고 하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한편 강도가 말합니까? 너 우리를 한번 구원해봐라. 그러다가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하자 이 사람은 마음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강력한 변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하신 그 첫 번째 기도의 장면에서 많은 감화를 받은 결과인 것 같습니다. 자기를 침 뱉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고 피투성이로 만든 죄인들을 향해서도 주님이 고요히 기도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해주십시오. 회심하는 한 강도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파고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이 만약에 죄인이라면 저렇게 죄인을 위해서 정말 눈물로 간절히 아버지께 기도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역설적으로 의로우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죄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왜 찔림을 받습니까? 나의 죄 때문에 그 십자가의 형벌 받을 죄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깊이 찔려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두 번째로 이 강도에게 일어났던 강력한 변화는 하나님에 대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모욕하는 한 강도를 향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거니와” 그랬습니다. 이 강도짓을 일삼으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악한 죄를 업으로 삼으며 십자가까지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깊이 깨닫고 성령이 역사하시자 회심하면서 그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인간을 판단하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중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눈을 뜬 것입니다. 재수만 좋으면 일평생을 악한 일을 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초로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당연히 심판하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자기들이 매달린 이유와 같지 않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함께 네 번째로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의 죄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거니와 이분은 옳지 않은 일을 행한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 강도는 악행을 저지르며 일평생 살면서도 어쩌면 간간히 들려오는 선하신 목자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처참하도록 죽어 가시면서 형벌 받을 죄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을 뵈며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분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무엇인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베푸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고 그 믿음이 이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가치관의 변화는 마지막 다섯 번째로 이 사람을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주여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예수님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일생동안 구원받을만한 선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살아온 모든 날들은 부끄러운 범죄의 날이었고 자신이 가는 인생의 길에는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죄인인 한 강도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당신의 나라에 이르실 것을 굳게 믿으셨지만 자기는 생각이나 해달라고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옷깃을 잡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탄원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이 바로 이런 신앙이 아닙니까? 아침안개처럼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져가고 나면 마지막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던 경건한 성도들은 모두 이 세상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좋은 것을 내게 안겨주어도 그것이 내 인생의 무게를 덜 수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믿음의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허무를 직시했습니다. 믿음을 갖지 못한 불신자들조차도 진지하게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가지고 공정하게 인생을 생각한 모든 사람들은 인생은 모두 헛된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기독교를 심하게 핍박한 마르크스 아울렐리우스 같은 사람도 그의 명상록에서 인생의 헛됨을 비탄하게 노래했습니다. 정말 헛되고 헛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헛됨을 직시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결코 참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의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강력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회심하기 전에 저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레오 톨스토이였습니다. 그분의 인생론은 제 인생 이제껏 살아온 길에 뒤통수를 치는 엄청난 지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복론 같은 책들은 저를 눈뜨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때 눈떴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제가 이만한 복음을 가지고 오늘날 톨스토이를 읽는다면 톨스토이에 대한 평가가 또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저를 그 희미한 어두운 골짜기에서 어째든 하나님에 관한 신앙으로 인도해주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허무를 지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러고 나면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딱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정신을 차리고 살든지 아니면 진통제를 맞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진통제가 바로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쾌락주의입니다. 젊은 여러분들이 오늘날 빠지고 있는 이 엄청난 쾌락주의의 병폐는 7-80년대의 이단보다 더 무섭습니다. 그런 쾌락주의에 자기를 매몰해버립니다. 그것이 결국은 질병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을 종교 심리적으로 깊이 파 들어가 보면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몸부림입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저에게 지금은 다 지난 얘기입니다만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서갑숙씨가 그 책을 써서 인쇄 오억을 챙겼습니다. 그렇게 매력 있는 외모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째든 그런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 평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 책을 검찰청에서 외설이니 뭐니 그랬는데 하나도 흥분이 안 되고 마지막에 책장을 덮으면서 내 마음속에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저는 그 책 속에서 한 여성이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절규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또 인터넷에 썼더니 그게 어디 굉장히 큰 홈페이지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나는 쓰고 나왔는데 자기들끼리 머리가 터지게 싸우는 것입니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눈물이 나는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과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터지게 싸웠습니다. 참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은 좀 해야지 됩니다. 문학을 못하니까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왜 그렇게 못 알아듣는지, 제발 나를 더 이상 관심 갖지 말고 내버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은 사랑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이해를 못하는지, 그 다음부터 내가 다시는 거기에 안 들어갑니다. 안 씁니다. 지금은 뭐 쓸 시간도 없지만. 그런데 저는 정말 깊이 그 속에서 그것을 봤습니다.
그런 오늘날에 만연하고 있는 이 쾌락주의가 결국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불안에서 나옵니다. 공식입니다. 그러면서 이 향락이 흐르면서 그러면서 진통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눈을 뜨고 나면 그 현실이 사라집니까? 제가 여러분같이 젊었을 때 기억 중에 제일 싫은 순간이 밤에 술 먹고 아침에 눈을 뜰 때입니다.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침은 이성이 활동하는 시간이니까, 밤은 감정에 치우쳐서 술도 먹고 그랬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그렇게 후회가 되고 인생이 무거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무서우리만치 섬찢하게 다시 덮어두었던 인생의 진실이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쾌락으로 그렇게 미친 듯이 줄달음질쳐도 거기에 답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쾌락을 통해서 인생의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그 고속도로에는 끝이 없습니다. 벼랑밖에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길이 있는데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길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은 단지 나그네 길이오, 순간의 삶은 영원을 위한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인생의 근본적인 허무를 잃어버리는 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나는 어떻게 하나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그 치열한 일제의 박해 속에서 옥 속에서 성도들은 이렇게 천국의 소망을 노래했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 그들은 그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집은 저 하늘너머에 있고 천사들은 하늘에서 나를 오라고 부르니 나는 이 땅에 있을 마음이 없어요.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오.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나를 오라 부르니 나는 이 땅에 정들 마음이 없어요. 이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죄 많은 세상에 섞여 살면서도 그들의 양심은 죄 많은 세상에서 오지 아니하고 신령한 하늘나라에서 왔습니다. 바다에 떠있는 뱃사람들이 물위에 떠있어도 그 물을 마실 수가 없고 타는 목을 부여잡고 하늘을 향해 비를 호소하듯이 믿음의 사람들은 죄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하는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다고 믿지 않고 내세 신앙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세를 경멸했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했고 이 세상을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자처럼 담대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따라서 살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나타나기를 원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게 이 사람들의 신앙이었습니다.
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늘을 열고 주님이 부어주신 그 기이한 회심의 은혜들의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죄악의 샘들은 막히고 은혜의 샘들은 터졌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 신실한 소원이 마음속에서 생겨났습니다. 죄의 지배는 깨트려지고 은혜의 지배가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스러운 은혜를 간직하며 삽니까? 무엇이 그 아름다운 샘을 막아버립니까? 무엇이 그들로 그 은혜에서 물러나 부패하게 만듭니까? 무엇이 잠든 동산 봉한 우물 덮은 샘과 같은 그 아름다운 주님과의 교제를 상실하게 만듭니까? 세상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꿈꾼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낸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 그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늘 머물기를 원했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으나 떠나 있으나 모든 기대를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이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을 했고 “내가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고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고단하고 지친 인생의 길을 마름하고 이제는 내게 와서 쉬어라.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아멘 주 예수 내가 주께로 갑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사는 것이 매일매일 성도의 삶의 목표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안일한 삶, 그리고 적당하게 야합하고 이 세상과 타협한 삶, 마음의 깊은 사랑의 뿌리를 세상에 박고 은 삼십에 예수를 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성도의 마지막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엎드려졌습니까? 돌아갈 수없었던 애굽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을 말할 수 없는 지혜 가운데 우리의 구속으로 삼으시기는 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를 찌른 것도 세상이었고 세상의 칼과 창이 그분을 배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영원히 타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로 섞여 살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믿고 이 세상에서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왜냐 하면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이니까. 아픈 자 고치고, 병든 자 위로하고, 상한 자 싸매어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사로잡힌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집이라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극적으로 구원받은 이 강도를 럭키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강도가 오랜 세월 동안을 영혼의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행한 일이라고는 부끄러움밖에 없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안겨다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십자가, 이 못 박힌 자리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신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낙원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깨달은 그 새로운 인생관 안에서 살수 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한 이 강도의 손을 잡고 예수님께서 그를 낙원의 첫 열매로 삼으셔서 데리고 가셨는데 십자가에 매달리는 육체를 버려둔 채 영원이 그리스도와 손잡고 그 육신을 떠나오면서 강도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이제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는데 이제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는데 그대로 살 수 있는 시간이 허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만약에 하루의 시간을 주었더라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무렇게나 자기 즐거운 대로 죄악을 행하며 쾌락 속에서 하루를 지냈을까요? 아마 그는 목이 터져라 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어떻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으며 자기와 같은 죄인이 어떻게 공로 없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어 낙원에 이르기까지 목이 터져라 외쳤을 것이고 피가 토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아무렇게나 살고 보내고 있는 이 하루가 어제 그렇게 죽어간 그 강도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우리같이 전혀 쓸모없는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정말 옷깃을 여미며 그렇게 강도가 살고 싶어 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던 그의 내일인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오늘 하루의 삶이 영원을 잇대게 하고 그리고 오늘 하루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날들이 되기를 원하면서 살아가야지 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시퍼런 진리가 우리에게 있고 그리고 더욱이 우리는 그 진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맛보았고 죄 가운데 사는 고통의 쓴물도 마셔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분량과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과 우리에게 들려주신 서슬 시퍼런 그 검의 그 날이 아직도 빛나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아무렇게나 평범한 삶을 살수가 있겠습니까. 내세 신앙의 소망을 걸고 그 수많은 박해와 고난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면서 살았던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재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비한 사냥꾼들의 산탄의 공격을 받으면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새같이 낚시꾼의 미끼와 공해로 더러워진 모천을 회기하면서도 피멍이 들도록 자신의 몸을 던지고 튀어 폭포까지 뛰어오르며 그 모천으로 회기 하는 그 연어들의 처절한 행진과 같이 우리가 갈수 있는 곳은 한곳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았고,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이제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은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구원받은 강도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삶을, 그가 생명을 연장시켜주었으면 살았을 그 삶을 주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충성스럽게 살다가 주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그 날이 이 지상 생애에 있는 날 동안 가장 성화된 날이 되게 합시다. 그리고 주님을 가장 부끄러움 없이 사랑하는 날이 되도록 매일매일 그 기록을 경신하고 그래서 더 온전해가기를 힘쓰는 성도로 살다가 그렇게 살았던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이 지상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회고합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4. 돌아온 십자가
“또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서 모시니라”(요19:27)
1. 서론: 예수님을 따르던 두 무리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세 번째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말씀을 강도에게 하신 이후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세 번째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 가운데 이 말씀은 마지막 남기신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란 기도와 함께 극히 개인적인 대화처럼 보이지만 이 말씀의 내용과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속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중요성을 갖는 말씀들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오늘 이 시간을 통해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있고 십자가 아래 네 명의 여인과 한명의 사랑하는 제자가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모두 전부 다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외에도 틀림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을 것이고 특히 여인들이 많이 남아 있었을 터인데 특히 예수님의 관심을 끌었던 십자가 바로 아래 있는 이 여인들의 이름과 제자들을 거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친 마리아는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님을 낳고 길러준 그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모라고 되어 있는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살로메라고 하는 여인이고 세베대의 아내였으며 오늘 이 요한복음을 적고 있는 요한의 어머니였으니 요한이 자기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어서 예수님의 이모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아마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로 여겨지고 뒤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는 잘 아는 바와 같이 한때 일곱 귀신이 들렸으나 고침을 받았던 여인이었고 아마 예수께서 식사하시는 자리에 와서 눈물로 발을 씻기고 향유를 붓던 그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떻게 해서 이 여인들이 오늘 여기까지 따라오게 되었는지 요한복음에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 경위를 상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그리고 사형언도를 확정 받으신 다음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시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모였으니 때가 유월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대거 모였고 모인 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뉴스는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였습니다.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죽으실 리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물위를 걸어 다니고 수많은 병자와 연약한 자를 고치시던 기적의 행자이신 예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그 곤경에서 구출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마 그냥 죽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면에는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다는 그런 후회와 불평이 섞여진 심리가 작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째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뒤따랐습니다. 남녀노소가 섞여서 골고다 언덕을 함께 올라가고 있었지만 누가는 이 사람들을 명확하게 두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라고 말입니다. 백성과 그리고 예수를 위해서 우는 여자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고 그 백성의 정체를 누가는 구경하는 사람들이라고 같은 곳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따를 때 올라오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셨던 위대한 일을 듣고 본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얼마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료나무가지를 꺾고 겉옷을 펴서 길에 깔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고 환영하던 군중들도 들어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말씀을 듣다가 기진해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그들을 먹이시던 예수님의 기적의 현장을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실 때 썩어서 시체에 냄새가 나는 그 무덤에서 수의를 두른 채 걸어 나오는 기적의 현장을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팔복산에서 낭랑하게 울려 퍼지던 그 감동적인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거기에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더 심하게 고소하자면 예수님이 고쳐주신 다리로 예수님이 고쳐주신 손으로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구경하던 사람들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듣기에 좋은 설교를 많이 이해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축복을 하나님 앞에 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풍부한 기도응답 속에 살았는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방식으로 자기들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을 뵈옵고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못박혀죽으신 이 순간에 그들은 차가운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반적인 섭리를 타고 들어오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영적인 축복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필수적이고 그리고 그런 강력한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회개가 없는 구원, 그리고 진실한 참회가 없는 신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진정한 신앙생활은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진다거나 아니면 사교의 현장을 세상에서 교회로 바꾸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예전에 알 수 없었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분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가던 인생길에서 돌이켜서 이제까지 살아왔던 이 세상에 일과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길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진실로 그분이 당하신 고난이 나의 형벌 받을 죄를 위해서 당한 고난이고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한히 더러운 죄인이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해보지 못한 사람이 거듭났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기적의 떡도 먹고 그리고 놀라운 기적의 현장도 보았지만 그러나 이들은 직접 주님이 다가오셔서 그의 영혼을 깨트리시고 그리고 자기가 죄인임을 처절하게 회개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이런 영혼의 부딪힘의 경험이 없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질 때 구경하며 따라오는 방관자들로서 그들의 마각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생활과 너무 유사하지 않습니까? 참회가 없는 복음, 그리고 진실한 죄와의 투쟁이 없는 쉽고 편안한 신자의 삶, 십자가의 고난과는 거리가 먼 예수 때문에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찾는 세상적인 기독교,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이런 배신의 결말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고 오늘 가시면류관을 쓴 채 당신이 매달리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죄도 알지 못하신 그분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기에 수많은 사람이 그분을 벗기고 그리고 채찍으로 치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하늘높이 매달았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백성들을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었습니까?
사람들이 아직 그분이 누구신지도 모르던 그때에 사람들이 아직 그분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사랑하지도 않던 그때에 이미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주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래서 이 십자가의 사랑이 선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의 이니셔티브를 인간이 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쥐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보도했던 동일한 사람이 요한이 자기의 편지 속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이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그 시간에 그들은 많은 신앙을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변화된 적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주께서 가장 고난당하시는 이 처절한 순간의 시간에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등록을 양심의 가책의 은신처 정도로 생각하고 교회의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을 보면서 과연 그날에 주께서 우리의 믿음의 진실을 드러내주실 때 정말 믿는 자로 드러나지 못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의심할 여지없이 죄 없으신 몸으로 그분 앞에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 은혜를 입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이 자기들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며 매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었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그분은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았고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으며 그분이 가혹한 채찍질에 희생당하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이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바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되고 싶으셨을 그런 존재로 살아가고 그분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아감으로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고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 모두 그 예수의 분신처럼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진실한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시는 정사의 경험이 이례적일 수 없습니다.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의 삶 속에서 폐기처분이 되는 교리가 아니라 날마다 예수 죽인 사실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자신을 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와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우리는 지금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셨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집안의 가족이 되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며 예수를 죽이는 그 일에 손에 피 바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삶이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저마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이 세대를 본받는 대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의 삶의 모본과 그 가치와 그 길을 따르고 살아가는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정확한 자기 인식이 없이는 그 길은 너무나 힘겨운 길이어서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자신은 세상을 위해서 살수 없는 사람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지키고 세상의 길을 버립니다. 신적인 가치와 하늘의 자원을 힘입어 살기 위해서 이 땅에 속한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갖습니다.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많은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당합니다. 예수를 따라가기 위해서 걸어가는 이 길에서 안팎에 있는 수많은 대적들을 만나고 내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에 집요한 추격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방으로 우겨 싼 가운데 우리는 확인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의 자아가 이렇게 분투하고 고난을 받는 현실 속에서 한번 죽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죽어감으로 그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죽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습니다. 날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죽음의 실체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날마다 예수와 함께 사는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고난을 이기고 시련을 극복하고 안팎에 에워싼 수많은 원수들과 피 흘리기까지 분투하는 동안에 우리는 이전에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와 함께 못 박히고 다시 살아났던 부활의 경험이 오늘 우리의 현재적인 삶 속에서 재현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산 그 부활이 오늘 나의 삶 속에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구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래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정사의 자리에서 우리에게는 없는 하늘의 능력으로 벌래 같이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을 날마다 다시 살리시는 그 부활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와 함께 못 박혔으니 예수와 함께 또 살았도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그런 진실한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십자가 앞에서 거꾸로 본적이 없는 사람들, 때와 기한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이렇게 배신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것과 함께 회심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할 때 쏟아 부어졌던 그 십자가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간직하고 죽을 때까지 사는가, 이 두개 말고 신앙에 있어서 진짜 중요한 관심사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한 백성들 이외에 일당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다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갈릴리로부터 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친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메와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들을 포함한 많은 여자의 무리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백성들은 구경했고 이들은 울었습니다. 백성들은 남의 일처럼 보며 걸어갔고 이 여인들은 슬퍼했습니다. 통곡했습니다. 형장이 가까워지고 이 여인들의 흐느낌소리는 울부짖음으로 피어린 통곡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간단합니다. 그 백성들에게는 없는 것이 이 여인의 무리들 속에 있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이런 치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나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이며 그래서 만유의 주, 만왕의 왕, 썩지 아니하고 세세무궁토록 있는 통치주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몰랐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십자가는 그냥 멸시의 십자가, 치욕의 십자가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멸시와 치욕, 이상의 아무 것도 모르는 십자가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이 고난에 동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렇게 예수를 통해 나타난 나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붙잡혀서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삶 속에서 내가 그분을 향해 갖고 있는 사랑의 기대를 따라서 그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고민하고 이것을 인생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조국교회 속에 번지고 있는 눈물도 없고 피도 없고 정말 피도 없고 눈물도 없는 이 냉정한 신앙생활은 거의 배교적인 차가운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가 그렇게 차가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기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아직 피자국도 지워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냉담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누룩처럼 번져가는 이 배교에 가까운 냉담함이 곧 우리 안에 예수를 향한 사랑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차가움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을 때에 함께 못 박히고 싶으셨던 우리의 옛 자아는 허물고 우리 안에 예수가 살아계시도록 끊임없이 순종하고 분투하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 죽으셨으나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는 계속 죽어감으로서 계속 우리는 또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재 속에서 느끼면서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하늘의 길과 가치를 따라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2. 여자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을 여셔서 자기의 모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여자여” 라고 자기 어머니를 비하해서 부르셨을까? 의문을 갖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니 첫째는 우리말의 비하처럼 느껴지는 “여자여” 라는 이 표현이 희랍어 문학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명백히 자신의 육신의 모친인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 라고 서민층처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이 현장이 마리아의 육신적인 아들로서 박힌 것이 아니라 인류의 메시아로서 못 박힌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자여” 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이 호칭 속에서 우리는 육신의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착한 아들의 모습을 봅니다.
본문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창세기 22장에서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가 되는 이삭의 기사가 생각이 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인지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는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한 산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나를 위해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많은 갈등이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순종하며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주님이 지시하시는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이제 단 둘이 되었고 그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갈수록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타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의 마음에도 모친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보면서 느꼈던 그 처절한 마음이 동일하게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 기적적인 출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시절과 그리고 지금 이렇게 다 장성하기까지 그로 인해 얻었던 수많은 기쁨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 산으로 오르던 아브라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뼈저린 대화가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버지여 번제에 쓸 나무와 불과 칼은 여기에 있는데 제사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칼과 나무와 불은 여기에 있어도 어린양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칼로 너는 죽여 이 나무 위에 올려놓고 이 불로 너를 태우라고 너를 명령하셨단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이 호칭 속에서 아브라함은 절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을 것 같은 애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매달려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더라면 느꼈을 꼭 같은 것을 아브라함이 이미 모리아산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동정을 구하는 대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고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마땅한 분량 이상의 슬픔에 잠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여자여 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옆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이니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의심할 여지없는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로 하여금 그 어머니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혹자는 이 부분을 해석하기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친의 노후를 제자에게 부탁하신 것으로 인간 예수의 효성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계시고 그리고 잠시 후면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얼마든지 마리아를 만날 수 있었고 승천하신 후에는 아버지께 왕권을 받아 만왕의 왕, 온 우주와 세상을 다스리시는 대 주제가 되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모친의 노후의 생계를 위해서 제자를 불렀다면 본문을 너무 초라하게 만드는 해석이 아닐까요? 오히려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신 양심의 가책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이 요한의 영혼을 격려하기 위한 말씀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요한이 오늘 여기서 예수님의 유언을 받자올 수 있었을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것은 베드로 혼자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부인할 필요도 없이 멀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셨다 했습니다. 큰소리치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버릴 것이고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는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고난의 순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이 십자가를 지셨고 제자들은 한사람도 예수님 곁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열두 명의 제자들은 더 많이 사랑하셨고 그 열두 제자 가운데 특별히 세 사람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는 예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더 특별한 친교를 누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나이가 어린 이 요한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 덩어리였습니다. 자주 만찬석상에 함께 했고 예수님의 품에 있기를 즐겨했던 어린제자였습니다. 그분의 품에 기대고 그분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기 가깝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교제의 특권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기치 않았던 고난을 당하고 무서운 공포 속에 사로잡혀 가시는 공포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로잡혀 가시는 광경을 보면서 일시적으로 요한의 마음속에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멀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도망간 그곳에도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아직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고 있을 때에 이 어린 요한의 마음에는 잠시 예수를 버린 후회와 뉘우침이 그의 마음속에서 불일 듯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지 얼마 안 되는 시간에 이 요한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이 사람은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성경은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잠시 예수 버린 것을 뉘우치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아직까지 위험이 남아 있는 그때에 자기가 받았던 예수의 사랑을 생각하며 십자가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이 사람들이 떠들며 골고다 언덕을 내려오고 있을 때 인파를 헤치며 걸어 올라가고 있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요한이었습니다.
새벽닭 울 때 나는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나는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3. 보라 네 어머니라
자신의 목숨을 사랑할 때는 두려운 것투성이지만 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그는 두려운 것이 사라졌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버렸던 예수님께 다가갔고 도망간 사이에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시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피투성이 된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냥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깊이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한 후회와 슬픔과 죄송함에 눈물을 흘리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보라 네 어머니다. 네가 잠시 나를 버리고 배신한 것 때문에 가책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나는 이미 너를 용서하였고 그 표로 내 육신의 어머니를 너에게 부탁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아직도 자기를 형제처럼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이 순간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사람들은 정말 순전하게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버린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다시 취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그 길이 주님의 생명을 나타내며 사는 길이라고 확신하며 매일매일 그 길을 걸어가야지 됩니다. 그러나 우리 중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은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붙들려 살았던 사자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돌아온 자를 향한 용서를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죄의 용서함에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을 깨달았고 그 용서하시고 자기를 다시 용납하시는 그 위대한 십자가용서의 사랑을 통해서 그것을 원천으로 삼아서 자기 안에 죄를 이기고 이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며 일관된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은 신앙의 원리가 있습니다.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멀리 멀어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자신의 수를 다 누린 유일한 사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요한의 삶이 다른 사도들보다 덜 고난 받은 삶이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교회를 떠나 절의 고도의 외로운 섬에서 그는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밧모섬에 가면 그분이 머물렀던 굴과 계시를 받았던 그 숲 속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번 예수 버린 그 실패와 배신이 영원히 이 사랑스러운 사도의 가슴속에 남아서 오히려 사자와 같은 삶을 살게 했습니다.
날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죄인 중에 괴수된 그 인식이 바울로 하여금 힘에 넘치도록 예수를 위해 살게 했던 것처럼 그도 역시 자신의 실패, 그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그 한량없는 용서덕분에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미 버렸던 세상의 길과 가치를 예수 때문에 다시 발견함으로 우리가 이 신앙의 길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신자는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는 그런 세상의 길과 가치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우리가 산 것이 아니요 우리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고 이제 우리는 하늘의 길과 가치를 붙들고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참 신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잠시 사도처럼 예수를 버리고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떠났으나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영원한 쉼과 자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할 또 다른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죄인들을 부르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피 묻은 십자가 앞으로 잠시 예수 버린 죄를 회개하고 백성들처럼 회심하지 못한 채 방관자로 살았던 날들을 뉘우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새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자기의 의의 신발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육체의 휘장을 찢어서 피 뿌려 놓으신 그 보좌에 이르는 그 보혈의 길을 걸어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의 옛사람과 우리의 이 세상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 기대하셨던 그 삶을 살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고 주님은 날마다 사셔서 그분의 생명을 나타내보여주는 성도의 길을 우리들이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참회가 필요하고 새 삶을 살게 하시는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버림받으신 십자가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1. 서론: 온 땅을 뒤덮은 흑암
예수님이 남기신 이 네 번째 말씀은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말씀 중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끄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기도도 아니었고 또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독백도 아니었습니다. 남을 위해 비는 기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 자신을 옹호하는 기도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하신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였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은 오후 3시였으니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계셨던 것입니다. 이 6시간을 둘로 나누어서 아침 9시서부터 12시까지 3시간, 그리고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다시 3시간으로 구분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남기신 첫 번째 세 마디의 유언적 말씀은 전반부 3시간 동안에 말씀하신 것이고, 그리고 후반부 3시간 동안에 다시 네 마디의 말씀을 하심으로서 십자가에서 드리는 가장 칠언의 기도가 모두 끝나게 됩니다.
12시쯤 되었을 때 온 땅에 깊은 어두움이 내렸습니다. 이 어두움의 원인을 두고 어떤 사람은 달이 해를 가린 일식 때문에 아마 이 땅에 어두움이 내렸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구름이 두텁게 내렸기 때문에 해가 빛을 잃게 되었다고 해설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분이 하나님이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내린 3시간의 앞을 볼 수 없는 그 칠흑과 같은 어두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예수님으로 예표 되었던 어린양의 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기적적인 능력을 베푸셨고 애굽 전역에 짙은 어두움을 내리셨고 그 어두움은 삼일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애굽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었었고 그 이후에 어린양이 죽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죽어간 그 많은 어린양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바라보며 죽어갔던 어린양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 거기에서 흘러나온 이 네 번째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비통한 탄식과 울부짖음이었고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그 광경을 오늘 성경에서는 부르짖으셨다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이 기도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가지고 계셨던 그 친밀한 교통이 끊어진 것처럼 암시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던 주님의 마음에 어떤 흔들림을 표현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몇 주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남기신 첫 번째 말씀,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해주옵소서” 하는 그 기도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하나님 아버지와 나눈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거기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리만치 친밀함을 유지하셨고 그리고 그 친밀함 속에서 죽어가는 당신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형벌 받게 될 죄인들의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대신 기도하셨다고 우리들이 배웠습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그런 친밀함 보다는 아버지와의 거리감이 느껴지고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신뢰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의문의 울부짖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어떤 흔들림이나 혹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아버지와의 친밀함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것은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구원, 혹은 구원자였고 그 구원자라는 이름을 가진 예수께서 오늘 사팍타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당신이 버리셨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구원자이고 그런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구원자,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렇게 못 박혀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받으시는 그 형벌이 얼마나 중대하고 컸었는가 하는 것을 오늘 예수님의 그 울부짖는 사팍타니의 부르짖음 속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받아야 할 우리 인간들의 죄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건은 일종의 하나님의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 인간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렇게 죄가 들어오게 되자 인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죄의 세력들은 제방 둑이 터지면서 흙탕물이 밀려들었던 것처럼 온 창조세계를 뒤덮었고 그리고 모든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던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영적인 연합의 관계들은 산산이 부셔버리고 깨트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온 땅은 죄로 가득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렇게 죄로 가득 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영광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죄가 그 영광을 사라지게 했다기보다는 죄가 들어오자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속에 있었던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스스로 당신 자신에게 돌려버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인간의 죄는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잠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는 욕망 때문에 죄를 저질렀지만 그 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태어났고 죄 아래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 죄에 사로잡힌 가운데 태어나서 더욱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렇게 영혼 속에 들어온 죄는 인간의 지성을 어둡게 만들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사는 참된 이치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사물의 연관성이나 이치들을 옳게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총명은 어두워졌고 생각은 허무한 것에 굴복하게 되었고 그의 모든 마음은 일제히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함께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로 변해갔습니다. 그 죄의 크기와 넓이와 그 다음에 그 깊이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었으나 그가 지은 죄는 무한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무한이 범죄 한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내리실 수 있는 공의로운 심판은 인간을 무한히 형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런 무한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악과 고통을 맞보다가 위로할 자 없이 죽어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더럽힌 그 죄에 대한 값을 충분히 치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지극히 일부분도 치룬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한한 죄를 지은 죄인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한히 징벌하실 수 있는 형벌의 장소를 예비하시고 그들이 그곳에서 점진되는 고통 속에서 무한한 형벌을 받는 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공의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리고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을 때 가지고 계셨던 그 아름다운 계획을 포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범죄 한 모든 인간들을 그 죄 값대로 하나님께서 치르게 하셨다면 우리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진노의 형벌을 받고 이 세상에서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당신이 뜻을 거슬러 범죄 한 인간들의 그 죄악 때문에 더 이상 영광 받으시기를 포기하고 당신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그 더러운 인간들의 시신을 담고 있는 장례식장으로 쓰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잠시 창조의 목적을 좌절시키신 것 같았던 죄의 세력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들은 그런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해서 본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었습니다.
그 창조의 목적을 상실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하심으로 다시 이미 이 땅에 편만하게 들어오고 자기 안에 이미 충만한 나라로 서게 된 죄의 세력들을 하나님이 깨트리고 부셔버리셔서 다시 은혜를 가지고 그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실 때 그 영혼 속에 두 가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데 하나는 그 사람의 영혼 속에 예전에 없던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속에 생명과 성령의 원리를 심으심으로 그 생명을 가지고 부어진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살아가고 그것을 거스르게 하는 세상의 유혹과 자신 안에 있는 많은 죄를 이기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힘이 모자라서 순종하지 못한다든지 힘이 부족해서 하나님께 범죄 한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죄를 사랑하고 택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미 신자 안에는 주입된 은혜가 있고 또 주입되지 않은 은혜가 계속 살아 역사하도록 이 속에서 작정하고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그 은혜와 능력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충분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작은 죄들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고 그 작은 죄를 온전한 성화의 삶을 살수 있도록 매우 큰 것처럼 느껴져서 우리를 곤고하게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능히 동행하며 날마다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의도적인 죄들을 범하고자 하는 모든 욕구를 죽이고 그래서 우리를 죄가 죽은 그리스도인, 모티파이드 그리스도인으로 모티파이드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실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런 내적인 자원, 즉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주입된 은혜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는 생명과 성령의 원리가 살아있지 아니하다면 아마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자기 자신도 이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했을 때 홍수의 물결과 같이 온 땅을 뒤덮는 창일한 죄의 지배가 온 땅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죄에 오염된 채로 태어나고 죄 가운데 생각하고 죄 가운데 먹고 마시며 죄 가운데 자신을 더럽혀서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하나님께서 예언하셨고 그리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죄에 완전히 지배받지 않고 죄와 거슬러 싸우는 일당의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제 이것이 한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엄청난 한 나라로서 올 것을 예고하셨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자마자 당신의 나타남과 함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고 외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사망으로 가득 뒤덮인 이 세상 죽음이 두려워서 죄에 종노릇하는 이 세상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샘으로 해서 솟아나는 강력한 맑은 생명의 물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졌던 흙탕물과 같은 이 온 세상을 맑히기 시작할 작정이었습니다. 마귀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왕국의 엄청난 도전이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것이 그 샘을 막아버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간교한 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 궤계가 성공하여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의 어느 교부가 말했던 것처럼 사단이 낚시 밥을 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생명을 일으키는 예수를 잠시 죽이려고 하는 사단의 궤계를 사용하셔서 오히려 사단을 능가하는 크신 지혜로 예수의 이 죽음을 구원받을 모든 인간들의 죄 값을 치르는 대속적 형벌의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 처음 등장하셨을 때 세례 요한은 그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 오셨고 30년의 생애는, 그리고 3년의 공적인 생애는 바로 이렇게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대신 형벌을 받아서 죽으시기 위한 준비적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전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마귀의 자식이었으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고 그리고 자기의 뜻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제왕적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벌레만도 못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세상의 가치는 자기의 만족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안하무인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우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것은 우리들이 그 죄를 붙들고 우리들 안에 그 죄가 있었기 때문에 진노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의지하자 그 죄는 사라져버렸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마음에 원하던 대로 행하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이 변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보이는 이 세상 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수 있을까 고민하는 착한 주님의 백성들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바꾸어놓아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섬기고 창조의 목적으로 자신이 돌아가고 동시에 온 피조세계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는 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죄인들로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입어서 이제는 대적하던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을 거슬려 싸우던 그 악한 그 죄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 세력들은 우리처럼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산이 부셔서 파괴시켜버리고 잔존하는 작은 죄들과 죄의 본성들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미 우리 안에 있던 악한 죄의 본성들은 산산이 부서져서 기동도 하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모두 파하신 것이지 그들을 변화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사도는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되나니” 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주체인 부패한 옛 성품을 가리키는 하나의 은유적 비유이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원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이고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원수 되는 반감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죄인을 향한 사랑과 죄를 향한 하나님의 미움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니까 예전에 내가 죄를 지을 때도 하나님이 나를 참 사랑하셨구나. 그래서 오래 동안 참으셨구나. 지금이야 알게 되었지 옛날에야 알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죄를 자기가 붙들고 그 죄를 짊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고 하나님은 그들의 양심에 화살을 보내어서 그들을 찌르시고 그들을 고통하게 만드심으로서 그들을 참된 회개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속에 있는 이 죄는 하나님과 화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지만 우리는 이미 죄와 한 덩어리가 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죄를 파괴하실 수 있는 방법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을 파괴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구약을 생각해보십시오. 죄인들이 성소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자신의 죄를 어린양에게 옮겼습니다. 죄지은 자는 헌 제자였는데 기도와 함께 죄는 어린양으로 옮아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을 만족시켜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보고 죄인은, 혹은 죄를 짊어진 재물은 내버려두고 죄만 레이저로 쏘아서 맞추듯이 부셔버리십시오,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실제이기는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형벌을 받을 수 있는 실체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모두 도입한 주체가 있고 그 주체는 도입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실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에 법칙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2. 버림받은 구원자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죄를 짊어진 어린양은 구약에서 처참하게 죽어갔고 칼로 사지가 찢기고 피가 낭자하게 되었고 그리고 불에 태워져서 연기로 변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재물이 짊어지고 있는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커다란 진노의 대상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현적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죄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 옮아가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신 것이 바로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그리스도는 죄와 분리될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당신 몸에 짊어지신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하나님의 눈앞에 그 재물과 죄는 이제 더 이상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있는 그 죄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불길같이 쏟아 부으셨고 그리고 그것은 개개인이 지은 죄에 대한 무한한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모두 담당하셨기 때문에 오늘 그 십자가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매달려 당하신 그 엄청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과 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엄위하신 그 분노에 대해서 우리는 추측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그 모든 것들을 우리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도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아본 적이 없는 영원 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분이 죄를 알지 못한 분으로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그 육체와 한 덩어리가 된 무한한 범죄에 처한 인간의 무한한 죄, 무한한 형벌을 개개인이 받아도 끝남이 없는 그 어마어마한 죄를 향해서 무한대의 징벌을 하나님 앞에 받게 될 때 그분이 당하시는 그 고난에 깊이와 넓이는 우리에게 영원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중 육체의 고난은 작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선인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 상당수는 예수님 못지않은 고통을 받으면서 형틀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육체가 죽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죄가 없으셨지만 인간의 무한한 죄를 짊어지신 분, 그래서 죄와 떨어질 수 없는 재물로서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는 그것은 죄에 대한 진노와 자신에 대한 진노가 나누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잔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그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장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겁함과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의 약한 인성을 발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추측입니다, 그런 해석자들이 인간의 무한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와 떨어질 수 없도록 재물로서 하나가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당하게 될 이 버림받은 이 무서운 형벌, 이해나 할 수 있을까요?
이 순간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예수님의 그 모습을 한번 묵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쓰여 있었고 채찍에 맞은 온 몸은 다 터져 피가 낭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과 발은 깊이 못 박혔고 3시간이라는 시간을 예수님은 육체의 힘을 소진해가고 있었습니다. 지옥을 넘나드는 그 육신의 치열한 고통이 예수님의 몸에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버림받은 그 영혼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은 우리인데 그래서 우리 각자가 십자가에서 그렇게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죄가 한 덩어리 된 우리들이 바로 그 십자가에서 그렇게 짓이겨지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무한한 형벌을 받고 육신은 그 형벌 속에서 멸하여지고 영혼은 그 무한한 고통을 지옥 속으로 던져져야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죄를 주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 품으신 적도 없으신 그분 이 오늘 이 십자가에서 힘없는 어린양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울정도로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울부짖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게 결국은 아무 것도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오직 어떤 하나님 자신의 이기심도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당신의 형상을 밟은 우리 인간들이 죄 가운데서 멸망당하고 죽는 것을 보실 수가 없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 모든 측량할 수 없는 구원의 지배의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사랑의 사람으로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성껏 창조하신 온 세계를 파괴하고 곤경 해야 할 당신을 대적하며 사는 것을 업으로 살았던 그 인간들이 그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차라리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훨씬 기뻤을 정도로 그렇게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세상에 존재하던 인간들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이런 목 매이는 사랑을 안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일생동안 그의 가슴을 녹이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 아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몰랐을 때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래서 아직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필요로 하지 않던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그토록 가슴저며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보라 사랑이 여기 있나니 우리가 그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을 향하여 원수처럼 대하고 그리고 당신을 향해서 파괴적인 기대를 품고 주님이 계실 자리에 스스로 등극하고자 하는 이 파렴치한 인간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당신과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관계에 있었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송하여도 모자라는 그 찬송의 제목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 수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누군가가 돌이킬 수 없이 일어난 우리 중에 이 엄연한 사실, 어린양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당신의 길을 여셨다고 하는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측량할 수 없는 지혜가 바로 십자가에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예수님과 함께 도입되기 시작한 생명 물을 막으려고 했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자 하나님은 그 죽음을 사용해서 이제껏 까지 막혀있던 제방 둑을 부셔버리시고 더러운 흙탕물을 정결하게 바꾼 은혜의 강물이 넘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3. 십자가, 우리의 옛 정체를 보여주는 거울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명심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언제나 기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 열심히 추구하고 힘을 다하여 애쓰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우리가 제법 하나님을 위해서 뭐 좀 하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다가보면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거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보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보십시오. 그것은 모두 껍질에 불과하고 사실 그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우리의 진실 된 모습이 말할 수 없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흉악무도한 죄인들이었고 그리고 그 영원한 형벌 아래서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그래야 마땅한 죄인들이었다고 하는 사실밖에는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가 당할 형벌을 대신 당하심으로 죄 값은 그분이 치르고 생명은 우리가 받도록 만드신 것들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제법 쓸만한 사람이요,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우리는 다만 용서받은 죄인들뿐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용서받은 우리와 용서받지 못한 채 지옥의 형벌로 들어가고 있는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 사이에 차이는 오직 은총으로서의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적용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 그렇게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버림받은 채 어린양으로 매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으신 모습을 통해서 거기서 메시야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입니까. 대부분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 가신 그 죽음이 사람들에게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과 같고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신 그 가난하고 핍박받으신 생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강물이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그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지금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함께 그 사람들처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묘사했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자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의 진실을 비추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사람의 눈으로 우리에게 비추게 하지 말고 우리는 세상이 어떠하든지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변함없이 서 있는 십자가의 진리로 우리의 삶을 비추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며 그리고 우리들이 지은 그 무한한 죄, 그 형벌을 아들이 감당하고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그 구원의 해택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 부당한 것을 우리에게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그 가히 없는 사랑에 대해서 감격할 줄 모르면 그것은 배은망덕하고 패역무도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말하기를 신자가 하나님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그분을 향한 묵상 속에서 살아가야지 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신자에게는 신성모독의 범죄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 주어진 은혜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중국에 제가 알고 있는 중국인 목사님 한분이 있습니다. 연세가 아주 많으신 분인데 그분이 개인적인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에 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학교에 가서 이제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했는데 문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기독교에 대해서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불러왔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져서 아주 인적도 없는 그 외딴 깊은 산속의 탄광에 끌려갔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22년을 복옥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 막장 속에서 신앙의 불길을 끄지 않고 간직하다가 혁명이 모두 끝나고 그리고 이제는 풀려났습니다. 연락도 되지 않던 고향에 22년 만에 찾아갔습니다. 아내는 죽었고 아들들은 마약중독자가 되었고 그리고 집안은 무너져 내린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에게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래도 나만 사랑하는가?’ 22년 동안 예수를 위해서 오직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그렇게 처참하게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돌아왔는데 아내는 병들어 죽고 자식들은 마약중독자가 되어서 집안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폐허가 된 집터에서 무릎을 꿇고 한없이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지난주에 우리는 두 명의 사랑하는 성도를 천국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 중에 한분은 우리 교인이었고 자매였습니다. 열린 교회를 너무 많이 사랑했고 저를 많이 사랑하던 자매였습니다. 하나님 부름을 받기 삼주 전에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온 몸이 피골이 상접해있었고 병색이 역력했습니다만 거기서도 은혜를 받고 있는 그 지체의 모습을 보고 몇 주간 안 남았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참된 신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자주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잊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후회할만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주님을 섬기고 그리고 교회 안에서 생활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우리의 마음의 즐거움이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부터 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이미 그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존이란 죄 많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은 인식할 수 없는 피 떨어지는 그 십자가를 인식하고 주님이 지금 내 앞에서 내 죄를 짊어지고 한 마리의 재물이 된 어린양으로서 그렇게 고난 받으며 죽어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래도 행하여야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를 떠나보내면서 좀더 더 많이 만나주지 못한 것을 마음에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이 고단한 인생의 길에서 저렇게 부름 받는 저 자매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죽음이나 이별의 아픔, 그리고 육체의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을 것입니다.
4. 십자가 앞에서 사는 삶
이 세상이 모두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민권을 이 세상에 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 땅을 살면서 영혼을 잇대어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 미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때가 되매 아직까지도 젊은 나이에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게끔 데려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이고, 이 땅에 남겨두신 것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 생명, 오늘 누리고 있는 이 날, 이 날의 이 생존 이런 것들이 그 자매가 그렇게 누리고 싶었던 것들인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체의 안목과 마음의 정욕을 따라서 행복해질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거듭나는 순간에 우리 안에 소프트웨어로 바꾸셨습니다. 다시 그 프로그램으로 행복해질 수가 없는 인간입니다. 잠시 독주에 취하듯이 고통을 잊을 수는 있으나 그러나 깨고 나면 더 치열한 고통이 뒤따르고 이미 우리는 그런 식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들로 거듭남과 함께 하나님이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항상 그 십자가의 빛 아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거기에 매달린 자신을 생각하고 도저히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었던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것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번씩 매일 생명 있음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지 됩니다. 하나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오늘 누리고 있는 이 오늘이 바로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습니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 동안에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 살고 한 걸음 한 걸음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는 그 섬김에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아름다운 섬김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하러 교회에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긴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날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만약에 이 모습 이 대로 인생을 마름한다면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정말 어둡고 캄캄한 이 세상에 그런 십자가의 진리로 깨어난 현자들이 되어서 그래서 세상 사랑에 얽매어 십자가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간 많은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의 진실을 가르치고 인생의 본분을 가르치는 보람이 없다면 우리들의 삶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벌레다. 그리고 죄인 중에 괴수로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고 고백을 하고 주님이 주신 은혜로 그 살려주신 생명도 모두 주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활용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잊혀져가는 십자가의 감격이 새롭게 살아나고 그 정직한 복음의 빛 아래서 우리 인생의 실존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존재가 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의 날을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아래서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6. 다 이룬 십자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1. 서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신 때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중 여섯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일곱 번째 마지막 말씀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라는 개인의 영혼을 위한 기도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여섯 번째 이 말씀이 사실상으로는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너무나 명료하고 의심할여지 없이 분명한 것이었으니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우리들이 파악하기 전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의 짧지 않은 생애 속에 한번도 반복된 적이 없는 유일 무일한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주어졌다는 것, 더욱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처음이 아니라 운명하시기 직전에 남기신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중요하고 심각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괄목할만한 일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갈릴리로 돌아가실 때도 그러했고 더군다나 가난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사건, 벳세다 광야에서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던 때는 더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완악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죽어서 사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난사로가 수의를 두른 채 무덤에서 걸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두고두고 유대인들 속에 그 사건은 오래도록 이야기되어 내려왔을 것이고 따라서 그 사건도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보기에 저주받은 것 같고 하나님께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바 된 것 같은 이 십자가의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거역하고 범죄한 이후로 온 땅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죄 아래 태어나서 죽음을 향하여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는 영혼의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져다주었고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질병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병적 증상을 가지고 살게 되었으니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모든 질병과 죽음, 늙음과 고통, 그리고 모든 비애가 바로 그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 망가진 피조세계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하늘에는 일찍이 하늘나라를 주님을 두시고 땅에는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수많은 온 천하 만물들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은 작은 미생물에부터 커다란 천체까지 말할 수 없이 신비한 영적인 영계를 이루었고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신적인 권능과 지혜 아래서 조화와 탁월한 균정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영적인 연결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은 가득 찼고 그래서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길가에 구르는 돌 하나, 공중에 나는 새 하나,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잎사귀 하나도 창조주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었고 그래서 주님이 창조하신 그 태초의 아름다운 세상은 거대한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연주장과 같았습니다. 흐르는 물소리와 지나가는 바람소리부터 시작해서 모든 자연계에 찬란한 아름다움이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고 그리고 인간은 그 모든 피조물 앞에 깨끗한 옷을 입고 지휘봉을 들고 선 지휘자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이 창조 세계를 지휘하고 가꿈으로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천사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지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온 피조세계를 지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인간이 죄를 선택했고 그리고 그 죄를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만물 속에 깃들었던 대부분의 영광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갔고 자신의 형상 속에 깃들었던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찬란한 영광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통해 들어온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던 아름다운 피조세계의 만물이 영적 연결을 통해 스며들었고 온 세계는 저주받은 정원과 같이 창조의 원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황폐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온 땅이 더럽혀지게 되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돌보고 지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인간은 반란의 괴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에서 그 죄의 저주를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을 긍휼히 여기셔서 두 가지 은총을 베푸셨으니 하나는 즉시로 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셔서 가고 오는 세대에 자손들을 남기며 결국은 이 땅에 남아 있는 인간들이 변화되어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로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은 그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그 죄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구원해낼 메시야를 약속하심으로서 그 메시야를 바라보며 인류의 역사가 달려오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심판하고 영원히 멸망시키는 대신에 영혼은 죽었으나 육체는 살아있게 하시고 그들에게 제사를 가르쳐주심으로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재물이 자기의 죄를 지고 죽는 그 대비적 희생을 통해서 잠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셔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게 하셨고 그 교제를 통해서 잠시 비추는 은혜의 빛으로 그들은 다가올 미래의 보다 완전한 구원자 메시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구원 얻을 수 있었고 또 그 은혜로 각 시대마다 주어진 계시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그릇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계시를 그 그릇 속에 담으셨고 각 세대는 그 신앙의 그릇 속에 담긴 구원의 계시를 가고 오는 세대에 전달해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많이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지은 죄, 심지어 인간 안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죄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고 원수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반드시 처리하셔야지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형벌하여 그 죄 값을 치르게 하셔야 했지만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어도 죄 값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는 것인데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인간의 죄 때문에 잃어버리고 상실되어버린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름다운 창조세계의 파괴를 보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제사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헌제자가 제물을 가지고 와서 기도를 하고 죄인의 죄가 그 제물에게로 옮겨갑니다. 제사장의 선언을 통해서 그 짐승은 갈 갈이 찢겨지고 피 흘리고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거기서 믿음이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지은 것은 자기인데 자기 대신 어린양이 죽는 것을 경험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두 가지를 체득할 수 있었으니 하나는 죄에 대한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고 자기가 지은 죄를 짐승에게로 옮겨서 짐승을 오히려 형벌하시고 죄 있는 짐승은 죽이시고 죄 있는 자신은 오히려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었고 제사가 끝나면 인간은 또 다시 범죄 할 수밖에 없었으니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막혔고 그래서 죄 없는 수많은 제물들이 어린양이 되어서 죽어간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인간을 도저히 돌려놓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모든 제사의 제도는 이렇게 일시적으로 죄를 용서받는 그런 구원이 아니라 이 제물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메시야로 오셔서 구원받을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정당한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저주를 받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실 하나의 본보기요 예고편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선지자들의 피나는 일대기를 기억해보십시오. 핍박과 환난, 그리고 칼날과 죽음 앞에서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온 힘을 다해 외치셨던 그 진실하고 피 저린 그 외침을 기억해보십시오. 그 부르짖는 수많은 외침이 결국은 한순간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죽어간 그 수많은 짐승들의 제사가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짐승들의 그 끔찍한 죽음이 오직 하나의 지점을 향해서 역사가 달음질쳤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죽음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끔찍한 형벌은 율법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었으니 예수님은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율법의 요구대로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우리를 위한 완전한 영원한 단번의 희생 제물로 구원받을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죄 있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많이 사랑하셨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하나님이 끔찍이 아끼셨지만 그러나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구원받을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셨으니 죄 없으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인류의 죄를 지고 죽으신 죄를 지었으나 자신의 힘으로 그 죄를 해결할 수 없어서 죽음에 매어 살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아가던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한 아들이 아니라 우리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신 희생의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몸서리쳐지는 고난을 우리는 피로 물든 십자가에서 봅니다. 온 몸은 채찍과 매 맞음으로 짓이긴바 되고 머리에는 가시관, 그리고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악인의 창끝은 주님의 허파를 지나 심장을 터트렸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그 십자가에서 모두 흘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피로 물들어 있는 그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시신은 그분의 육신의 고난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그분의 영혼의 고난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이 생명 자체이신 그분이 하나님과 뛰어난 친교 속에서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셨던 하나님이신 그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실 때 영이신 그분이 당하셨을 그 사망의 고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간의 필설로서는 다할 수 없는 고난이고 우리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느낄 수 없는 고난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안 기뻐하신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에도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남김없이 율법의 요구를 따라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그 거룩하고 불붙는 진노 앞에 예수님이 놓이셨을 때 그 순결한 예수님의 영혼이 당했을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을 영혼 속에서 경험하셨을 것이고 그분의 그 피 저린 고난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남김없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려주시며 자기를 철저히 버리셨기 때문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대리적인 희생의 고난을 보시며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죄 값은 예수님이 받으시고 죽으시고 정작 죄의 원흉인 우리는 값없이 용서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구약의 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꿈꾸고 그리워하던 바였으니 목매이도록 사모하던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심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있는 예수의 마음이 살아 역사하는 만큼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교훈은 간략하게 요약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말하자면 일평생 자신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갖고 그 인식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를 깨닫고 자신은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주님이 지으신 이 창조의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한 그 반란의 원흉인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아 사망에 처해져야 마땅한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이 고개를 들 수 없는 흉악하고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 끔찍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집안의 유업을 누리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마음속에는 항상 이 사랑이 부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왜 죄 없으신 좋으신 예수님이 나같이 아무 쓸모없는 더럽고 흉악한 이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가. 한번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 하나님 어찌해서 이 벌레만도 못한 이 더럽고 추악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철저히 썩은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셔야 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기 때문에 그분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이 믿음이지 예수가 나를 위해 죽은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을 때 그런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이 떨어지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앙으로 충만해지게 되면 점점 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값인가
정말 믿음이 생길수록 믿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길수록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다. 나 같은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죽으셔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 나같이 흉악한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처참하게 그 주님 앞에 죽임을 당하여 할 이유가 있었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두 사이에서 우리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있는 신앙은 바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그것을 가슴에 새깁니다. 그래서 무한한 부채의식을 느낍니다. 무한한 부담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 같은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으셨으니까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그 예수님의 큰 사랑을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머리를 잘라서 신발을 삼아 예수님의 발에 신겨드릴까? 내 살가죽을 벗겨서 예수님의 고운 옷을 만들까?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죽음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치열하게 미워하고 그래서 그것이 자기 안에 함께 거하는 것을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이 세상의 높은 지위와 많은 지위와 명예가 없어도 이 세상에 하찮은 소시민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기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 부채의식이 없으면 그것은 인간도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잊어버린 그 사람이 과연 인간일 수가 있습니까? 더군다나 그 사람이 참된 신자일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모든 타락하고 더러운 삶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에서 마르기 시작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아니하고도 고도의 아름다운 삶을 살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술 먹고 난봉하고 사기치고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칼을 꽂고 자기의 육체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으며 더러운 범죄자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예수님 만나면 그러니까 그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를 보니까 개처럼 살던 짐승처럼 살던 그 인간의 눈에는 성령의 감동으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눈물이 씻겨서 비로소 마음의 창이 맑아지고 그래서 인생의 떠나갔던 그 총명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보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정말 더러운 인생을 살았구나. 내가 좋아서 그렇게 물고 빨던 모든 죄악, 내가 사랑하던 그 검은 돈, 더러운 제물들, 사랑하는 사람의 칼을 꽂던 그 잔인한 미움들, 그 더러운 것들을 위해서 그것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깨달으면서 어느 순간에 의롭다고 믿었던 자기 손에 시뻘건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그게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게 회심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 다음에는 사랑하면서 계속 눈물이 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 우리가 모두 가슴을 반 토막 내어서 뚜껑을 열면 우리 모두 서로 더럽다고 도망가 버릴 존재입니다. 그런 더러운 인간들이었는데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그 순간에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고 어떻게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철저히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수 있을까? 내가 뭔데 나같이 집 떠난 더러운 새끼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진노를 당하셨을까?
옛날에는 자기 것이 최고라고 뽐내고 온 우주의 목적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잔인할 정도로 짓이겨진 예수의 고난당하신 형상을 보면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너는 정말 귀하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닙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서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살아가던 인간들인데 아들을 십자가에서 못 박으실 정도까지 우리가 그렇게 소중했습니까? 의문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항상 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이 짐승처럼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처참하게 못 박히신 예수님을 뵈오며 눈물을 흘릴 때 샘처럼 우리의 눈물이 눈에서 쏟아졌고 흐르는 그 눈물로 우리의 마음이 그 창이 닦여지며 죄와 욕심에 어두웠던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새 시야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들 중에 이 은혜에 있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소원은 이 땅 칠천만 동포의 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눈물이 샘솟듯 흐르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저 아오지로부터 시작해 마라도 앞 동리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의 죄를 대속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줄을 깨닫고 그렇게 회개하는 역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친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대다수는 그렇게 한없는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더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선명하게 복음을 알았고 그리고 그 피로 속죄함을 받은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추잡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단정하고 사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과거와 결별하고 이제는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답게 새 삶을 살고 싶어 했던 여러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그 은혜에서 미끄러진 많은 모습들을 여러분들 가운데서 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힐 때 여러분들이 이렇게 오늘 예배드리지 않았습니다. 늦기를 다반사로 하고 예배 시간에 들어와서 다리를 꼬고 음료수를 마시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 간식을 주절거리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까지 있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올라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뭐라고 여러분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얼굴이 뜨뜻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4.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
목자인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도록 가르쳤습니까? 이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장난처럼 들립니까? 여러분들에게 허락된 이 예배의 축복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정신적인 오락거리로 여러분들에게 느껴지고 있습니까? 이게 정말 피 묻은 가슴이 있는 신자들의 예배입니까? 이것이 정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입니까? 여러분들의 얼굴 속에 흐르고 있는 그 교만함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뻔뻔스러움,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에도 불구하고 일년이 지나가도록 그 철통과 같이 굳은 얼굴에 한번도 눈물이 흐를 줄 모르는 그 돌같이 굳은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나는 과연 여러분들이 거듭난 사람들인지 묻고 싶습니다. 어느 날 광풍과 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주라고 부르냐. 나는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한 적이 없다. 그런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이 밖의 어두운 곳에 내어 칠까. 저는 두렵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 앞에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매 순간 정직과 성실로 가감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했고 참된 성도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려고 애썼지만 저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예배시간에 상습적으로 늦고 거의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불한당과 방불한 예배를 드리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신자라고 뻐기고 그러면서도 파렴치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힘입어서 이 땅에서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예배당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태어난 날을 후회할 것이고 목회자로 일평생을 살았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저의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저의 목자로서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참된 신자가 되는 것만큼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두 눈에 뜨거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눈물이 그쳤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혔던 여러분들은 내려왔고 그리고 예전보다 더 험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토해놓았던 그 끔찍한 죄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하고 그리고 입을 열어 험하고 더러운 그 말할 수 없는 더러운 찌꺼기와 같은 것들을 토해놓아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더럽히고 지체들을 더럽히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의 번영에 눈이 발개지고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차가운 가슴으로 매일 선포되는 이 무거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견디기 힘든 부담감을 느끼며 교회에 나오고 있는 이런 신앙생활이 신앙생활인가 하는 것입니다. 겨우 예수님이 그런 위선자들을 양선해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까?
바로 우리들이 매일매일 세상으로 살아 돌아가려는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이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좋은 일을 하나님 앞에 기대하겠습니까? 사업이 잘되어서 번영하고 돈을 많이 벌고 여러분들이 지위가 높아지면 (?)하나님이 가슴에 없는데 말입니다. 예배시간은 바로 이렇게 나의 모든 죄를 위해서 다 이루신 우리 공로는 없지만 주님이 홀로 피 흘려 이루신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잠겨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씻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채워지는 시간입니다.
일주일동안 한번도 예배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그러고도 예배에 나와서 무엇인가 주실 은혜를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들을 크게 실망하게끔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급했던 것처럼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조사해야 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여러분들 자신의 행실을 조사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 거룩한 십자가의 희생 앞에 부합하지 않는 방종하고 오만한 신앙생활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단지 복음이 울려 퍼지는 이 예배당을 드나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끓어오르는 분노 속에 외쳐도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눈물을 흘려도 듣지 않는 자신의 굳어진 마음을 한번 깊이 돌아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그 오만함이 얼마나 위험한 수준에까지 도달했는지 한번 스스로를 점검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하는 성도의 마음은 마치 피 묻은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어지신 예수님의 육체와도 같은 마음입니다. 멍들고 상하여 그래서 자신은 도저히 의지할 수 없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살 수 없는 마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살수 없는 그 정말 애절한 마음, 그래서.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매일매일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주님은 나를 당신 자식으로 불러주셔서 하늘자원을 주시고 이 땅에 모든 것을 유업으로 누리게 허락하셨지만 내가 아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좋으신 예수님을 못 박기 위해서 손에 그 피를 묻힌 죄인이라고 하는 그 고백이 항상 이 속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그 죄악 되고 반역된 삶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에 어떤 평안도 깃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분이 이루어놓으신 임마누엘의 샘을 보십시오. 지금보다 더 더러운 죄인이었던 때에도 우리들이 믿음으로 나아가니까 아무 공로 없이 우리를 그 피로 발라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인 우리들에게도 이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이고 정결케 하는 십자가입니다. 거기에 나와서 그 피로 깨끗이 씻음 받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다시 사신 예수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곳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요20:11-15)
1. 부활의 첫 영광을 본 여인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금요일이었고 다시 사신 것은 주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사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예수님이 다신 사신 부활의 사건인데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첫 모습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주셨어야 맞았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하신 그 첫 모습을 그 사도들이 아닌 이름 없는 여인들에게 보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한 사람이 아니라 좀더 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달려가서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리고 그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리자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왔고 역시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때 사도는 돌아가고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의 부활하신 첫 모습을 보여주셨으니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당신의 살아나시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첫 모습을 제자들에게는 감추시고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들에게는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임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왜 예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 어차피 이후로도 그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실텐데 그 부활의 첫 영광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 제자들이 아닌 여인들에게 보여주셔서 이 여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아나신 부활의 소식을 듣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 부활사건을 보도하는 것 이전에 예수님이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사형언도를 받으신 다음에 골고다 언덕으로 가셨던 누가복음 23장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도 되지 않는 엉터리 사건을 통해서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그리고는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셔서 갖은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마 일반인에게 예수님의 모욕당하시는 광경이 공개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 벗으신 몸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고 길거리로 내동댕이쳐지듯이 밀침을 당하셨을 때에 그때에 예수님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났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는데 그들 중에 대부분은 다 구경꾼들이었고 특별히 그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따르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바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랐던 여인들이었고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갈릴리로 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바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랐던 여인들이었고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갈릴리로부터 온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오르실 때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고 그리고 그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주님을 따르던 그 모습은 예수님이 체포되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의 비겁한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을 텐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 처형의 광경을 보면서 돌아갔지만 이 여인들은 그 십자가 아래서도 피 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의 그 죽어 가시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광경을 객관적인 한 사건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한 사건인 것처럼 뼈저리게 동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 죽으심을 바라보는 이 여인들이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그 고난의 장소에 있어준다고 해서 예수님의 고난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 고난을 나누어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사랑이 여인들로 하여금 아무 희망이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요한 칼빈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여인들은 그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이 이 고난의 순간을 지나시고 나면 찬란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그저 멸시와 천대와 욕의 십자가였고 부끄러움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이 여인들로 하여금 그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와서 그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밤에 모두 도망간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그 뼈저린 고난을 감당하시며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순간까지 다른 사람들에 의한 평판과 자기에게 주어질 그 모든 미래의 종교적인 핍박과 박해의 예고와는 상관이 없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따라왔던 여인들이 얼마나 대조적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비록 요한이 늦게나마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로 돌아왔으나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하신 그 첫 모습을 십자가 아래 끝까지 동참했던 여인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기 때문에 동참했던 그 여인들에게 가장 슬퍼했던 이 여인들에게 당신의 죽음을 인해서 가장 고통 받았던 이 여인들에게 당신의 부활의 첫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그 상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놓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으셨고 신체조차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지만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그 무덤 앞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다가올 두려움,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알려져서 예수와 한패로 몰려서 당하게 될 고난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식일인데도 거기에서 예수님을 찾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들이 찾았던 것은 상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셔서 화려한 옷을 입으신 찬란한 영광의 모습의 예수가 아니라 그냥 죽은 예수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이 여인들에게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없는가 하고 그렇게 다그치는 것은 우리의 분량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 누구도 예수님의 이 부활의 위대한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고 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도 이 사람들에게 생각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그 무덤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고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셨지만 이 여인들 속에 예수님을 향해 간직했던 사랑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소원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향품이라도 넣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형벌을 당하고 죽으신 그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 생전에 자기들을 끊임없이 섬기고 사랑하셨던 그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 죄의 어두움과 그 외로움의 구덩이 가운데서 건져주신 그 한없는 교제의 사랑을 기억하며 채찍과 그리고 모진 폭력으로 멍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씻겨드리고 싶은 것이 이 여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박하고 단순한 희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여인들 속에 있었던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와 같은 마리아라고 여겨지는 여인, 그 죄 많은 여인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곳에 와서 아무 대사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황망히 긴 풀 미역 같은 머리카락으로 그 눈물을 씻어내고 향유를 붓던 그 죄 많은 여인 말입니다.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전하여 나를 기념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죄 많은 한 여인이 한 그 일이 무엇이었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여자의 행한 일도 행하여 예수님을 기념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이 여인의 행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였도다. 이는 그가 나를 사랑함이 많음이라.” 이 여인 속에 있는 예수님을 향한 눈물겨운 사랑이 바로 그 여인이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악 된 날들을 돌이키고 그 더러운 정욕 속에서 살았던 그 추악한 날들을 진심으로 뉘우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 여인은 창녀요 기생이었던 여인으로 여겨지고 그 시대의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비참한 직업에 종사하던 쓰레기 같은 여인이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 여인의 인격을 보면서 우리는 더러운 여자가 아니라 순결한 한 여인을 봅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 가지고 있었던 힘입니다.
한주일 내내 율법을 지키면서 살던 그 일평생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며 살았던 종교지도자들이 쌓아올린 그 모든 자기 의가 한순간에 진실한 참회로 얻은 이 여인의 의만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여자가 되었고 그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 여인에게는 죄를 용서받지 못했던 그런 많은 윤리적인 사람들 안에 없었던 독특한 인격의 특징이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말할 수 없이 깊고 진실하고 순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행하게 되어 당신을 기념하리라고 하는 그 말씀은 복음이 전해지고 복음이 참 뜻을 아는 사람들마다 자신의 죄인 됨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죄의 용서함을 경험한 사람들의 인격 속에는 피할 수 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생겨날 것인데 이런 놀라운 일들은 복음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 속에 항상 같이 경험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것입니다.
과연 주님의 이 예고는 정확하게 실현되어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예언이 실현된 것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고 이 여인 또한 우리들이 알지도 못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참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복음의 빛 아래서 자기가 누군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가 바로 그렇게 우리 모든 죄인들, 형벌 받을 죄를 위해 박히신 그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죄에 대한 깊은 참회가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 받고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수난의 모습을 뵈면서 우리들이 이제껏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만들었던 우리가 간직했던 이 세상의 길과 그리고 이 세상의 헛된 가치들은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온 몸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리신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씻고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신앙생활의 시작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이 가슴 저미는 냉담함을 한번 직시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정말 자기와 같이 더러운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뼈저린 용서의 자각을 그 속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까? 무덤 옆에 서있는 망부석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도 그들의 뺨에는 결코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돌같이 굳어진 심장으로 마치 철 가슴 경연대회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굳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서 존재도 없이 녹아내려본 적이 없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못 박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이 정말 부당하다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당연하다고 느낀다고 하는 사실은 그 사랑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아래서 입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현저히 실존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개념적인 참회의 경험에서 진실한 경험적인 참회로 넘어간 모든 사람들은 그 십자가의 사랑이 새롭게 다가왔고 그리고 그것은 이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 자기의 실존 안에서 반복되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터득하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가슴 저미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아니하고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드릴 수 있는 삶은 아무 것도 없고 이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아니하고도 거룩해질 수 있는 성화의 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일이면 예배당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축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썰물처럼 예배당을 빠져나갑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빈 무덤과 같은 교회에서 주님이 계신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채 그 예배당을 떠나면서도 마치 그 떠난 모습이 베드로와 요한과 같고 그 빈 무덤 앞에서 예수님을 어디에 두었는가 하고 흐느껴 우는 이 여인과 같은 진실한 추구의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감격과 은혜 때문에 참회하고 그 십자가에서 살기로 다짐하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씻는 것은 참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한 빈 무덤과 같은 예배 속에서 모두 돌아가 버린 빈 예배당 한 구석에서 자신의 어떤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었는지를 돌아보면서 그리스도께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그 성도의 추구어린 몸부림은 그 앞의 사람의 그 참회의 눈물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약에 조국의 교회가 만약에 이 여인처럼 주님을 만나지 못한 그 예배에서 자신의 죄를 위해 주님을 뵙지 못한 그 냉담한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을 뼈저려하며 그 그리스도 예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통곡하고 탄식하는 성도들이 많다면 아마 우리는 좀더 다른 주일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얼음같이 차가운 냉담한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그런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 위풍당당함이 문제입니다. 정말 자신만만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가득 찬 교회당의 예배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뵙기를 원하고 그리고 나를 위해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기를 원하는 그 깊고 진실한 하나님을 향한 추구, 그분을 뵙기를 원하는 그 진실한 몸부림이 없이는 이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부활의 근거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신 이 사건은 이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러나 이 사건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합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사람에게는 강이 가지고 있는 그 무서운 힘이 느껴지지 않지만 그러나 강물을 따라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에게는 그 강물의 도도히 흐르는 힘이 얼마나 커다란 힘인지를 느끼게 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포기하고 현실화라는 미명하에 맛 잃은 소금처럼 불 꺼진 등불처럼 현실과 타협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천 년 전에 죽으신 그 예수가 이천년 전에 죽었을 뿐 오늘 자신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늘의 삶 속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예수와 함께 오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자기들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시대를 거스르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신앙으로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사는 그 분투하는 그 삶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한 삶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때로는 그 일은 너무나 힘겹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젊음의 정욕과 밖에 밀어닥치는 수많은 유혹은 차치하고라도 참된 신앙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언제나 그 길이 옳은 길인데도 당연히 옳은 그 길을 걷기 위해서도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따라 살던 우리도 어느 한순간에 정말 이 시대의 아들들이 행하는 그 궤휼을 우리도 행하면서 간교하게 이 세상을 살고자 하는 유혹이 우리에게 강물처럼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깁니다.
눈앞에 펼쳐진 끊임없는 고통스러운 삶, 더욱이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를 향해 도전해오는 이 세상의 수많은 거친 파도와 고난, 그리고 핍박의 장애물들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섬김의 항진을 계속합니다. 목적지가 가까울수록 곳곳에 수많은 산호초들이 널려져있고 그 암초들은 이제껏 잘 행진해온 우리의 신앙과 섬김의 배를 한번의 구멍을 내어 바다 밑에 수장시켜버릴 수 있는 수많은 위험을 간직한 채 우리의 인생의 항로 좌우편에 널려져 있습니다. 젊음의 정욕들과 어느 한순간 방심하면 떨어지고야 말 육체의 모든 욕망들, 그리고 우리 안에 역사하는 죄와의 친화적인 경향들과 잔존하는 부패의 위대한 힘들을 우리들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면 그 순간에 우리는 끊임없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순례와 이것들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과 원수의 궤계와 그리고 가시밭길과 같은 그 고난의 길 앞에서 우리는 날마다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이천년 전에 죽었으나 사실은 그 죽음이 오늘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 속에 투영되어서 그래서 그 고난을 통해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이 단지 용서를 위한 믿기만 하면 되는 한 선언인 줄 깨달았는데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 성화의 과정, 수많은 장애물들 앞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고유한 사명을 위해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는 그 몸부림 속에서 우리는 뼈저리게 밀려오는 그 수많은 죽음의 그림자들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커다란 고난의 파도 앞에서 우리는 마치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그리고 이제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돛대도 부러지고 삿대도 없는 그런 조각배와 같이 거친 파도 위에 버려진 것을 경험합니다. 온 하늘은 어둡고 별빛 하나 보이지 않고 삼킬 듯이 밀려오는 이 세상의 파도 앞에서 우리는 아무도 없이 홀로 떠있는 것 같은 위기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죄악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죽음을 보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임을 당하는 현재적인 고난 속에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임하신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복음에 참된 의미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모두 그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귀신들을 제압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능력을 보여주는 그런 초자연적인 힘만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임한 성령강림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하게 체험하도록 만들어주었고 그래서 그들의 가슴에는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 쫓는 그 제압하는 카리스마 이외에 그들의 지성과 온 영혼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그 복음 진리의 화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바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현재완료의 사건
거의 예외 없이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할 때 그들이 사용한 희랍어 단어는 에게게르 타이였으니 이것은 바로 현재 완료의 고백이었습니다.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사건의 의미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들을 기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에 붙잡혔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산 사건의 의미에 그들의 전 존재가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외칠 수 있었고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으로서 수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앙의 외길을 걸어갈 수 있었고 자기의 마음속에 엄습하는 수많은 육체의 정욕들을 제어하며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그 길에서 거룩함을 좇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역사적 사건을 에게게르 타이라고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에스타오르 타이라고 하는 고백이 필요했으니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할 때에 못 박혔다고 하는 현재 완료동사였습니다.
사도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또 “그리스도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향하여 못 박히고” 라고 말했을 때에 그 못 박힌 사건은 이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재현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미 오래전에 일어났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사건의 의미가 그들의 삶과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타오르 타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그 사건의 현재적인 연관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사건의 현재적인 연관성과 짝을 이루면서 그들의 온 삶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 존재로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들을 위해 죽으신 그 사건이 자신 속에 현재 완료의 사건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경험했고 그 반복되는 죽음의 사건 속에서 또한 그들은 반복되는 부활의 경험들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핵심은 이렇게 죽음의 경험과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히고 부활의 경험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심겨진 새 사람은 계속해서 다시 사는 그것이 성화의 핵심이었습니다. 죽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소수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들이 경험해보지 않은 이천년 전에 그 십자가의 경험이 오늘 예수를 위해서 살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구원받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그 간절하고 절박한 그 주님을 향한 온전한 추구 속에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와 더불어 살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 12시 40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자기 전에는 항상 말씀을 묵상하다가 잠이 드는데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안에 죄가 있다. 주님이 맨 처음 창조하신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었을까? 아침마다 교회 마당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제 마음에 작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죽었던 것과 같았던 나무에 새싹이 돋아나고 아침마다 가보면 어제 보다는 훨씬 더 많이 새순들이 나와서 아주 가녀린 이파리들이 일생을 시작하는 광경을 봅니다. 간밤에 새로 태어난 수많은 작은 잎사귀들이 비치는 아침햇살을 부끄러운 듯이 맞이하는 수많은 손짓들을 봅니다. 몇 그루 심겨지지 않은 나무에 그 새싹에서 떨어지는 그 피톤치들을(?) 맞으면서 정말 생명 아래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새들도 날아와서 몇 마디 노래하고 가는 아침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인간 말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느끼게 됩니다.
그때마다 창조의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발아래 심겨진 한 뼘밖에 손바닥만한 그 한 뼘에 심겨진 파란 잔디도 이렇게 아름답고 발아래 놓인 돌맹이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데 그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그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작게는 풀잎 끝에 매달려 반짝이는 이슬방울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저 멀리 떠가는 그 어마어마하게 떠가는 흰 구름까지 물속을 헤엄쳐 떠다니는 작은 플랑크톤에서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그 큰 바다의 생물과 그리고 들판을 뛰노는 짐승들과 그리고 이름을 다 붙일 수 없이 수없이 많은 나무와 꽃과 풀, 그리고 하늘에 떠있는 끝없는 우주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고 그 창조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가족관계로 연결되어서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가득 채웠고 그리고 그 처음 창조된 세계의 아름답고 신비한 광휘를 찬란하게 드러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묵상합니다. 그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3. 부활의 영광에 참여함
그런데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죄가 바로 그 아름다운 세상을 산산이 파괴했고 오늘 우리들이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담고 걸어가는 우리의 이 고단한 이 순례의 길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 아름다운 세상이 산산이 깨트려지고 그리고 창조의 세계에 존재하였던 그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운 광채는 대부분 하나님께로 돌아갔으니 이는 하나님의 의지적인 작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름다운 세상을 그렇게 초토화시켜놓았던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게 만들었던 그것이 죄인데 그게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신비한 아이러니입니까?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우리의 죄로 인해 더럽힌 것을 가슴아파하고 그런 죄에서 도저히 구출 받을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세상을 파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에 대한 사랑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 죄가 내 안에 있습니다. 일순간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마음에 가득하고 그리고 이것을 내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기도했지만 어두움 속에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루한 인간들에게 성실하게 새로운 아침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마당에 내려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때 잠시 잠깐후면 괴로움과 죽음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를 옮기시고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로해주실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던 우리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이 땅에서는 죽음이라는 강 건너편으로 현실의 나루터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하고 함께 있는 사람을 죽음 건너편으로 떠나보내기도 하고 혹은 너무나 사랑하고 같이 있고 싶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헤어져야 하는 그런 뼈저린 이별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럼 이제 거기서는 다시는 죽음이 강 건너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그 현실의 나루터에서 우는 일도 없고 그리고 다시 헤어짐도 없고 눈물과 결핍도 없는 그곳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간 사랑하는 성도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고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 죽음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잠깐 후면 그들을 기쁨으로 그 천국의 나루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괴로움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더 살자. 이게 부활의 경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고 그 현실에 주어진 그 큰 고난 속에서 내면의 주어지는 그 깊은 고통 속에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임을 경험하고 그 사망이 오늘 우리에게 실제화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이 믿음으로 주를 볼 때 우리는 화려한 부활의 아침이 우리에게 밝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꾸러진 자 같으나 다시 일어난 자이고, 이 세상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사실은 유명한 자이고, 버림받은 자 같으나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그리고 우리를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주의 호령소리로 우리를 부르실 그날에 우리를 찬란하게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부활 사이에서 우리들은 그 부활을 경험하고 또 그 부활을 기다리면서 오늘 또한 다시 살아나는 그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날마다 예수와 함께 죽고 날마다 구주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그 죽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죽고 그리고 새 사람은 반복된 부활의 경험 속에서 다시 살아나 예수를 위해서 다시 살게 되는 이 복된 은혜의 역사를 날마다 경험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