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2010-2011년 설교모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1 (2010.12.15 수요예배설교)
설교기간|2010-201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2 (2010.12.19 주일오전설교)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3 (2010.12.25. 성탄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4 (2010.12.26 주일오전예배)
1.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사53:1-2) 2010.12.15 수요예배 1
<sample>
2.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요일4:9) 2010.12.19 주일오전 8
3. 그 이름 임마누엘(마1:23) 2010.12.25 성탄예배 14
4.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요일4:10) 2010.12.26 주일오전 21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5 (2010.12.26 주일오후예배)
5.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빌2:6-8) 2010.12.26 주일오후 29
6.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요1:14) 2010.12.29 수요예배 37
7. 성육신의 영광과 구원(요1:14) 2011.1.2 주일오후 48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6 (2010.12.29 수요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1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1 (2010.12.15 수요예배설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2 (2010.12.19 주일오전설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3 (2010.12.25. 성탄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4 (2010.12.26 주일오전예배)
<sample>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5 (2010.12.26 주일오후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6 (2010.12.29 수요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7 (2011.1.2 주일오후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1 2010. 12. 15 수요예배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1-2)
I. 본문해설
II. 믿기 어려운 진리
III.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A. 연한 순과 줄기
B. 모양과 풍채가 없음
C. 흠모할 아름다움이 없음
IV.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
V. 결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2 2010. 12. 19 주일낮예배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I. 본문해설
II.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A. 하나님 사랑의 나타남
B. 인간을 살리려 하심
1. 죽음의 징후들
2. 생명을 주시려고
III.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IV. 결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3 2010. 12. 25 성탄절예배
그 이름, 임마누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I. 본문해설
II.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
A. 동정녀 탄생으로 오신 예수님
B. 임마누엘의 하나님
1. 인간 불행의 뿌리: 하나님을 떠남
2. 함께 하시려는 하나님
III.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IV. 결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4 2010. 12. 26 주일낮예배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I. 본문해설
II.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A. 사랑의 존재로 창조하심
B. 먼저 사랑하시는 하나님
III. 회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
IV. 결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5 2010. 12. 26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요일 4:9)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A. ‘본체’란 무엇인가?
B. 성육신
1. 인성 안에서 동등함을 포기
2. 신적 본질로서의 자기를 비우심
3. ‘비우셨다’는 의미
III. 사람으로 오셔서 종처럼 산 예수님
IV. 결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6 2010. 12. 29 수요일밤예배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I. 본문해설
II. 육신이 되신 말씀
A.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의미
1. ‘성자는 말씀이시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B.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이유
1. 참 하나님의 성품을 보이심
a. 참 하나님을 보여주심
b. 참 인간을 보여주심
2. 희생 제물로 죽으심
a. 희생 제물로 죽으심
b.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심
III. 성육신의 영광과 구원
A. 성육신과 하나님의 영광
1. 육신의 눈으로 봄: 성육신하신 사람
2. 신앙의 눈으로 봄: 하나님의 영광
B. 영광의 정체: 은혜와 진리
1. 은혜를 주심: 구원과 거룩함의 존재론적 원천
2. 진리를 주심: 구원과 거룩함의 인식론적 원천
3. 경륜 속에서 이 둘을 엮어 펼치심
IV. 결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7-끝 2011. 1.. 2 주일 오후예배
성육신의 영광과 구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I. 본문해설
II. 성육신의 영광과 구원
A. 성육신과 하나님의 영광
1. 육신의 눈으로 봄: 성육신하신 사람
2. 신앙의 눈으로 봄: 하나님의 영광
B. 영광의 정체: 은혜와 진리
1. 은혜를 주심: 구원과 거룩함의 존재론적 원천
2. 진리를 주심: 구원과 거룩함의 인식론적 원천
3. 경륜 속에서 이 둘을 엮어 펼치심
III. 결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1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1 (2010.12.15 수요예배설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2 (2010.12.19 주일오전설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3 (2010.12.25. 성탄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4 (2010.12.26 주일오전예배)
<sample>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5 (2010.12.26 주일오후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6 (2010.12.29 수요예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7 (2011.1.2 주일오후예배)
1.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1-2)
녹취자: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구약 성경에서 이사야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메시야 고난과 영광의 53장입니다. 이사야서 후반부는 40장부터 시작이 되는데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돌이키시는 주님 때문에 은총을 받게 되고 하나님이 범죄한 그들을 구속하시고 속량하시는 은총이 주어질 것이 예언됩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운 민족적인 회복은 멸망당한 후에 바벨론으로부터 포로로 귀환해 올 국지적인 사건을 염두 해두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더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되어질 위대한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들을 구속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영적인 왕국입니다. 그 영적인 왕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전한 것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사실은 전한 것이 아니라 들은 것, 혹은 소문 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뇨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들은 소식.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메시야의 예언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실텐데 그의 고난을 통해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아서 죄인들이 구원을 받아서 영적인 이스라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전해주었고, 자신들이 그것을 전하여야 했던 그것입니다.
알다시피 선지자는 주님께서 직간접적으로 들려주신 메시지를 증거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주시지 않은 말씀으로 전파하지 않았고, 그러한 일들은 거짓 선지자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우리의 전한 것, 혹은 우리의 들은 것 어느 쪽으로 번역을 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그러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하물며 아직까지 그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그렇게 황당한 소식, 메시야 주님께 기름 부음 받은바 된 당신의 종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실 것이고,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오실 것이고 그가 고난을 받음으로 하나님이 택한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나음을 입을 것이라는 그 놀라운 소식이 전파되었을 때, 누가 그것을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그 당시에 매우 믿기 어려운 진리였고, 또 지금도 그 진리는 여전히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Ⅱ. 믿기 어려운 진리
구원받은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자연적인 이성을 사용해서 우리 인간이 철저하게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희생의 공로가 오늘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실 것이라는 이 결론에 도달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여러분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죄에서 건져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이처럼 이 믿음이 우리에게 매우 절실한데, 하나님은 이것을 믿은 사람들에게 영생의 놀라운 소망을 주시는데,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그렇게 귀중하게 보시고 심지어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에 머물러 있도록 그렇게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고, 그리고 복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중 하나입니다. 이유는 이러한 것입니다.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서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이 팩트(fact),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인간이 살아온 어느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러한 논리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없고 도저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아멘 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사실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 사실을 주관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거짓말하실 리가 없는 완전하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 의존의 마음에 기초해서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그러한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누가 어떠한 사실을 나에게 말해주는데, 그 사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도 그러한 일들이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이해가 되어도 말하는 사람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도 먼저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떠한 사람이 정말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또 그가 자신과 자신에 대해서 아주 선할 뿐만 아니라 신뢰할 만한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게 되고 믿게 되면 그가 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그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나 자신을 살피면서 어느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지 결론부터 내 놓고 그 다음에 나 자신에 대해서부터 문제를 풀어가는 그러한 경우를 여러분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뢰입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잘못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어도 그것은 잘못된 증거의 것이라고 하는 믿는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을 해설하면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그것이 해석적 경향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그것을 아멘하고 받아들일 때에는 그것은 예수를 알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아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사실은 성부에 대한 믿음과 성자에 대한 믿음이 분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는 데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있습니다. 시작서부터 믿음으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성격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의존 그리고 그분께 대한 맡김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참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 분의 죽음이 나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 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진리를 우리는 믿음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III.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은 연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굳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연약한 모습으로 내려 보내셨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알 수 없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A. 연한 순과 줄기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연한 순과 줄기 같았다라고 말합니다. 연한 순과 줄기라고 했는데, 이 줄기가 히브리말로 요넥()이란 단어인데, 이것은 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싹이 이렇게 나는 것, 그리고 동물이나 사람에게 이 단어가 적용이 되면 젖먹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싹이 나오는 것입니다. 연한 순, 그리고 마른 땅에서 나온 싹, 그러니까 습기가 적절하고 햇빛이 잘 비추고, 영양이 잘 먹은 땅에서 나오는 싹은 같은 싹이어도 아주 튼튼하겠죠. 그리고 그 잎사귀는 파랗고 탄탄할 것입니다. 그러나 습기도 없고 삐쩍 마른 영양 없는 땅에서 나오는 싹은 아주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면서 나온 싹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역사가의 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주 탁월하게 준수하였다고 기록을 하였습니다만,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연한 순과 그리고 아주 마른 땅에서 간신히 돋아난 새싹과 같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어떠한 비범한 능력이 눈에 나타내 보이는 그러한 육체의 출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던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연한 순 같지 않았습니까. 거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그 겨울날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새싹과 같지 않았습니까. 원수들이 짓밟으면 짓밟힐 것 같은 아무 힘이 없는 그러한 지극히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B. 모양과 풍채가 없음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의 모양과 풍채도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사람의 몸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셨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무지한 자를 깨우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도록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과 풍채는 하나도 아름다운 것이 없으셨습니다. 허름한 옷 하나 입으시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둘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건만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고단한 노역 속에 당신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셨기에, 30이 갓 넘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은 50세쯤으로 되신 분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모양과 풍채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위엄이 있었다면, 그것은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이었지 그분의 외모에는 어떠한 귀족의 풍모나 꾸밈이나 그리고 권세 높은 자들의 풍채 같은 것들이 없었습니다.
C. 흠모할 아름다움이 없음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과거로 말하기를, 우리가 흠모할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끌렸을 때에 그분의 육체나 그리고 그분의 육체에 깃든 완력이나 힘, 그분이 차지한 지위나 벼슬, 사람들에게 높이 여김을 받는 그분의 추종자들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인류 중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주님을 믿어지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구원의 방법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수많은 걸림돌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기독교 신앙을 맨 처음 갖게 될 때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극히 높으신 신이라고 하는 사실은 잘 믿어졌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나사렛에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쉽게 믿어지질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유사한 믿음의 과정을 겪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다름이 없는 지극히 연약한 모습의 예수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그 믿음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를 주님께서 시험해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에 걸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떠한 사람은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분을 보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의존한 강한 믿음을 갖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약하디 약한 육신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영적인 구원의 방법들을 신뢰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제로아()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의 이 팔은 권능, 능력, 보호 등을 의미하는 그러한 종류의 상징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들이 전해주는 것, 혹은 우리가 들은 것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이 정말 능력이 있으시다면, 어떻게 이렇게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새싹 같은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예수의 이 모습을 구원자로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 라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뵈었을 때에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솟아 나온 새싹 같아서 고운 모양과 풍채도 없고 우리의 마음을 끌어 흠모하게 할 만한 어떠한 아름다움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찾는 강함과 아름다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강함과 아름다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이렇게 나사렛에서 나온 저 젊은이가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분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고, 더욱이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어서 채찍에 맞고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죄를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시고 그가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으실 때에 이것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연약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더 그리스도를 싫어하였고 흠모할만한 어떠한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Ⅳ.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
사도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는데 그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모든 상식을 깨고 하나님께서는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처럼 온갖 고난과 질고의 고통을 받으며 결핍과 가난 속에서 일생을 사셨고, 마지막에 당신이 그토록 섬기시던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서 홀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벌레 같은 더러운 악인들이 그를 때릴 때에 그분은 맞으셨고, 그들이 침 뱉을 때에 그분은 맞으셨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분은 아무 능력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창에 허리를 상하고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팔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참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능력의 나타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이 사람 편에서 보면 가장 비천하고 힘이 없고 무능한 것이었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비천한 인간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폭발하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마음에 걸린바 되었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비참한 죽으심이 바로 정사와 권세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죄의 세력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사망의 또 다른 사망을 가져왔고, 죽음의 종식과 함께 생명을 우리에게 도입하는 구원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복음적인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구원을 얻고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성화의 삶 속에서도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와 같은 이웃들, 내게 끊임없이 아픔을 주고 고통스럽게 하는 나의 가까이에 있는 많은 지체들과 가족들을 대할 때마다 그때마다 큰 힘으로 그것에 맞서고 복수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큰 능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이 나에게 악을 행하고 그리고 나에게 고통을 줄 때, 조용히 참고 그러한 부당한 대접과 그 고난 앞에서 자기를 한없이 낮추고 주님을 의존하는 그 모습은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게 해 주지 못합니다. 그냥 짓밟힐 때에 짓밟히는 자들은 약한 자들일 뿐이고,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고통을 줄 때에 괴로움을 당하는 그것은 그저 연약한 것 일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주님의 고난에 관한 깊은 뜻을 이해하고 예수가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나를 위해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을 입었은즉 나도 내게 맡겨진 이 십자가가 나를 거룩한 성숙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믿으면서 주님을 깊이 의지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죽는 그곳에서 우리를 정말 강하게 살아나도록 만드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복수하는 그 속에서는 사람 보기에는 강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습니다. 악한 인간의 힘과 위력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싫어 버린바 되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는데, 그렇게 연약하게 죽을 때에 우리 중 아무도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징계를 받을 때에 그것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하시기 전 채찍에 맞으실 때에 저분이 저렇게 고난을 당함으로써 내가 나음을 입게 된다고 하는 그 확실한 믿음과 신념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보기에 가장 연약해 보이는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는 방법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해 가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는 우리 모든 이들로 하여금 참된 능력이 약한데 있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약한 그곳에서 잘 고난을 당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고 자신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살아 역사하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육신 안에서 우리로 많은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매순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아주 초라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 그 연한 순과 마른 땅에서 나온 새싹과 같으신 그 분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깃들였던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장 연약한 육신을 입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도 때로는 꺼져가는 심지의 불꽃과 같고 상한 갈대와 같을지라도 주님이 바로 그러한 우리의 지극히 연약한 것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하여 가장 연약한 그 인간의 몸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셨으니, 그리스도가 그 마음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약한 사람일지라도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극히 연약한 육신과 몸을 입은 사람이지만, 자신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크고 능력 있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사람의 몸으로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온갖 연약함에 에워싸여 있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연약할지라도 내 안에 예수가 살아계시면 사람의 몸을 입고 연약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힘입어 당신 자신이 구원의 위대한 능력이 되었듯이 우리도 또한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힘입어 강한 사람들이 될 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념하는 이 성탄은 온갖 연약함에 에워 쌓여 있는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의지하고 약한 것이 발견될 때마다 여러분 안에 더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살아계셔야 할 필요를 느끼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가운데 나온 구절입니다. 그것은 바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II.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영원 안에서 성자는 아버지께 낳은바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 그 분에게 육신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성자는 영원한 신성 안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에 있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속의 역사는 창조 역사의 핵심을 이루고, 이 구속의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입니다. 이 성육신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A. 하나님 사랑의 나타남
제일 먼저 성육신은 하나님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지식을 주셨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지성과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의지도 주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은 인간의 반역이었지만, 인간이 반역하였고 이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캄캄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강물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스며들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많은 선지자들과 많은 주의 종들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무엇인지를 예언으로 선포하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들을 전파하였습니다만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줄 수는 없었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이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증거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 설명한 것처럼 희미하였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분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시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눈 어두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시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인간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으로서 하나님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생애, 특별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의 그 지상의 생애동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고, 분노하시며 사람들과 똑같은 소통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당신 자신이 말없이 삶으로 모본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람에게로 내려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에게 이르기까지 교재하고 있는 참된 인간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을 통해서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도저히 핑계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도록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먹고, 마시고, 숨쉬고, 마지막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 기도하신 그 모든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감당할 수 없는 찬란한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섬기시고 그들을 어루만져 위로하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병들고 연약한 자를 고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를 깨우치고, 힘없고 연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기에 하나님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고 했던 것은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확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재판을 하다가 확증을 얻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변명도 필요 없고 여러 가지 반론도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확실한 증거를 얻었기 때문에 법관이 판결이 흔들리지 않도록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믿어지지 않는 사랑을 확실히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주님께 돌아올 때에는 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아 우리를 위해 구속재물로 스스로를 바치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하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너머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눈으로 하나님은 볼 수 없지만 예수는 볼 수 있었기에 그 사람들은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데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일 14:9)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B. 인간을 살리려하심
독생자를 보내신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목적은 인간을 살리려 하심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반문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사람을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그렇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죽어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죽은 것도 대충 죽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은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육신으로서는 그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에 주님은 분명히 정령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의 그 명령이 즉시 실행될 것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인류는 즉시 멸망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이 없는 창조 세계가 되었을 텐데 그것은 하나님에게 무의미한 세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에 주님이 진정 보고 싶으셨던 것은 당신을 닮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어 주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통치하셔서 하나님 마음에 있는 나라가 이 땅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령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실행하지 아니하시고, 인간들이 잠시 이 세상에 생존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불멸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그 불멸성은 빼앗겼지만 잠시 더 이 세상에 살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손들을 번식하게 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죽음을 연기하셨지만 영적으로는 즉시 죽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주님을 알만한 희미한 지식은 남아있었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참된 생명은 주님이 거두어 버리셨습니다.
1. 죽음의 징후들
육체로 죽은 사람들은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이 육체가 썩어가지만 영혼에 있어서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어있을 때에 영혼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일들을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죽음의 행실들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돌아가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 죽음의 행실이 실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에 꼭 맞는 일만 일어나겠습니까? 세상 자체가 이미 그러한 질서가 다 깨진 세상이고 내 마음에 있는 욕심도 질서가 깨졌기 때문에 그렇게 내 마음에 맞는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 나도 내가 싫을 때가 있는데 어떻게 남이 내 마음에 꼭 맞을 때가 있겠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해하게 만들어 주시고, 참게 만드시고,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근데 이것이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그것들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죽음의 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눈만 뜨면 들려오는 그 무서운 이야기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교역자 수련회에 가서 쉬는 시간에 잠시 텔레비전, 잠깐 틀어져 있어서 봤는데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토막이 탁 나오는데 아버지가 계속 나쁜 짓을 해서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나쁜 짓을 하고 형은 개심을 해서 좀 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 잘 지내세요?’ 이렇게 해 놓고 ‘아버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출옥하실 텐데 이제 감옥에서 나오시면 제발 죄 짓지 말고 좀 착하게 사세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러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미안하다 아들아’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엿이나 먹어라, 이 자식아’ 아버지가. 그게 뭡니까? 죽음의 기운이 모두 들어와서 도덕이든, 가치이든, 선이든, 악이든 이 모든 것을 따라갈 인간의 모든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막 보는 세상의 풍조입니다.
이러한 무서운 죽음의 징후들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도 이런 죽음의 징후들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믿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받고 착한 교인으로서 눈물로 예배하고 기쁨으로 기도하고, 소망을 품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하늘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며 사는 동안에는 이런 죽음의 징후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른 지체들이 또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런 불완전성 때문에 죽음의 기운과 냄새가 일어나서 나를 아프게 해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고, 그 분께로부터 부어지는 사랑 안에 있으면 힘들기는 하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지게 될 때에 교인들은 거칠어지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안중에 없는 그러한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수많은 분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중대한 사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홀히 하는가 하면 혈기와 교만함 속에서 주님의 교회의 질서를 현저히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막되 먹은 교인들은 바로 죽음의 징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성화의 삶을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성화의 진전이 있으면 진전된 만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를 찢으신 온전한 자기희생과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분의 대속적인 죽음을 화목제물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렇게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바치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분을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보좌의 우편에 앉게 하셨고, 예수께서 그렇게 당신이 철저히 죽으시고 화목제물로서의 당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님을 이 세상에 보내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2. 생명을 주시려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버리심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이 화목재물로 죽으시기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들이 두 눈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볼 수 있도록 종처럼 철저히 섬기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어 복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님을 통해서 이번에는 영적으로 우리 안에 당신 자신이 친히 살아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친히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교만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을 향한 경외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에게는 당신 자신을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지고 주님을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히 임재하시기에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을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는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생명의 정체입니다.
III.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충만히 계신 사람들, 그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운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시기와 분노, 그리고 죄악과 슬픔, 이 모든 죽음의 기운들이 우리의 심령에 한없이 밀어닥칩니다. 그때에 우리가 은혜 안에 있고,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면 이 생명이 죽음의 기운을 삼켜버립니다. 이렇게 우리와 함께 영원히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해서는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한없는 축복의 통로가 되지만 하나님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것은 그분에게는 한없는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되시고, 당신 자신에게는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율법 아래 사시고, 그 율법을 따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정죄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힘없이 못 박혀 망치질을 당하고 온 몸을 채찍에 맞을 그 때에 그 분의 어느 한 구석에서도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고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고난을 당한 그 모든 것은 바로 우리를 그 고난 속에서 살리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죄는 우리가 지었고, 주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더럽힌 것은 우리 사람인데 왜 우리 인간이 지은 그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이 당하여야 할 모든 형벌을 대신 당하게 하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인간들을 당신의 품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대신 짐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고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IV. 결론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날 동안은 항상 자기를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게 하신 그 원인이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려야 할 그 고난을 육신을 입고 오셔서 대신 매달리신 그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착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부채 의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그래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성탄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는 기쁨이지만 그 분에게는 수치요, 슬픔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시려고 그 분이 슬픔을 택하셨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하시려고 그 분이 비천해지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허락하신 우리 주님의 최고의 뜻은 우리가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돌아올 뿐 아니라 이 사랑으로 돌아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이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것입니다.
3.그 이름 임마누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아이를 수태할 것이라고 하는 고지를 받았을 때에 천사로부터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II.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
본문은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실 것과 아이가 태어날 것,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탄생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내려오셨고 또 하나님만 위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시는 대제사장이셔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직접 아들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A. 동정녀 탄생으로 오신 예수님
만약에 여자의 몸에서 수태되지 아니하였다면 참 사람이실 수 없었고 여자의 몸에서 수태하되 모든 인간들이 그러한 것처럼 결혼의 생식을 통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면 그분은 필연적으로 죄 없으신 인간이 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기 위해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했고 죄 없으시기 위해서는 결혼의 생식이 아닌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도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기적과 선지자들의 예언과 꿈과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역사 속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지만, 언제나 희미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칠 때에 많은 지식의 양을 스스로 읽게 하는 것보다는 아직 지력이 어렸을 때에는 아주 이해하기 쉽게 감동적인 이야기로 신앙을 들려 줄 때에 아이들이 더 많이 변화됩니다. 백 마디의 말로 아이들에게 신앙을 설명하는 것 보다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이 직접 볼 수 있게 해 줄 때에 그것은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쓴 수 십 권의 책 보다는 감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가 아이들의 마음을 끌고 말에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많은 말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선생님의 모습 속에서 자기는 볼 수 없어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더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린 자를 먹이시고 곤고하고 슬픔에 차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언제나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가셔서 누구도 믿음이 없이는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이 하나님인 줄을 눈치체지 못하도록 그렇게 사람의 몸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들려주는 수많은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다가와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는 주님의 그 섬김의 모습 속에서, 곤고한 자들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리시는 주님의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B. 임마누엘의 하나님
초대 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우리 중 아무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거나 그분께로부터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에 예수님께 직접 섬김을 받았던 사람들 못지않게 그분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한 기록들이 복음서에 남아있고 성령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섬기셨던 예수님에게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육신은 예수님 살아계실 때에만 성육신의 효과를 가져 온 것 뿐 아니라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던 이후의 모든 사람들을 신앙의 세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신약의 근거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신 그 이유는 바로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증표였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입니다. ‘엘’은 하나님이고, ‘임’이라는 단어는 전치사로서 함께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전치사 뒤에다가 소유격을 붙여서 나와 함께, 너와 함께, 그들과 함께, 이렇게 변화를 주는데 ‘누’가 붙음으로써 우리와 함께 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도다 하나님.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임마누엘이라는 이 이름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사람들에게 불려 지던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이름은 예수로 불려 졌고, 그리스도라고 호칭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들려지지도 않고 불리워지지도 않을 임마누엘이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불리워질 이름이라고 계시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불려 진 이름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징표와 상징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커다란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 이번 성탄절에도 여러분은 한두 가지 선물을 주기도 했고, 또 받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받기만 했을 것입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기만 했을 것입니다. 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탄이 되었는데 너도 한번 먹어보라고 하며 케이크를 사서 반씩 나눠 줬다든지 이런 의미와 남녀가 반지를 주고 받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케이크는 반지보다 비쌀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물질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입니다. 같이 지내던 형제가 자매에게 반지를 하나 선물 한다면, 난 니가 좋다 그런 뜻입니다. 물론 케이크를 줄 때, 난 니가 싫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것도 좋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반지를 줄 때에는 좀 더 다른 의미로 나는 니가 좋다는 그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너희에게 보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보라고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힌네라고 하는 말, 이 보라는 뒤에 뭔가 의미 있는 큰 역사적 사건을 동반할 때 쓰이는 감투사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일이라는 것은 겨우 여자의 몸에서 어린 애가 하나 태어난 것입니다. 그 자체는 이 세상에서 늘 있는 사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사건이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반지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싶어 했던 의미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 언제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표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고 하나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기뻐하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항상 나와 계신다고 스스로 임마누엘이라고 자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항상 하나님과 완벽하게 동행하는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그러한 생애였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이 이 세상의 사람의 몸을 입고와 우리 가운데 있으신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의 시대는 하나님이 하늘위에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신 시대였고,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시대였다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생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1. 인간 불행의 뿌리: 하나님을 떠남
하나님은 맨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 세상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내재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불행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이 바로 인간 불행의 뿌리이고 모든 피조 세계의 고통의 뿌리입니다.
(예화) 몸이 불편해서 며칠 쉬는 동안에 저는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전에 녹화해 놓은 것인데, 대륙에서 동물들의 이동 행로를 추적하는 그러한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영향력을 이 자연의 세계에 미치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물을 따라서 이동하는 수많은 짐승들의 무리를 추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짐승은 일 년에 수천 킬로미터씩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순한 동물들의 경우 태어난 수의 50% 정도가 일 년이 되기 전에 다른 동물들에 의해서 잡아 먹히거나 죽는 것입니다. 특별히 순한 짐승 가운데 누라고 하는 짐승이 있는데, 말하고 소하고 중간 정도 모양으로 생긴 짐승인데, 아주 순합니다. 그것은 일 년에 이동하면서 백만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한 해 동안 이동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면 절반은 남고 절반은 다른 동물들에게 먹이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형편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바다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비롯해서 모든 세계에 거의 통용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자연의 세계가 아름답고 고요한 것 같아도, 이면을 살펴보면 끊임없는 무서운 약육강식의 삶과 죽음의 투쟁이 서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과 죽음의 투쟁을 인간도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자란 자녀들은 자신들이 그런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복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어나 부모의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인생을 많이 방황해 본 사람들은 그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함께 하시려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기 이전에 창조하셨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그렇게 택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임마누엘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인간들이 불행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렇게 스스로 멀리 떠났던 참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귀향입니다. 그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더니 하나님 아버지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교회인 어머니도 있었고, 그리고 거기에는 함께 구원받은 사랑하는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에는 그 사랑 안에서 어머니도 사랑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동기간들도 사랑하고 동기간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그렇게 사람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교회의 신령한 유익과 하나님의 자녀 된 가족의 행복을 동시에 누리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깊은 뿌리는 우리들에게도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임마누엘을 떠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철저하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없이 누리는 자유가 좋아서 이 임마누엘을 스스로 저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나타나는 현상은 똑같은 것입니다. 잠시는 하나님을 떠난 자유 때문에 행복하고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유는 독약이요, 그리고 쓴 약입니다. 그 약을 먹고 나서는 그 다음에는 자유가 주는 고통스러운 속박 때문에 다시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는 지난 한해를 오늘 새벽에 깨어서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한 한 해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주님께서는 아주 훌륭한 목회자가 아니라 나를 보내어서 여러분을 양 무리로 치게 하였습니다. 완전한 천사도 아니고, 역사상 이따금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도 아닌 사람, 여러분과 똑같은 연약함에 둘려 쌓여 있는, 여러분 중의 한 형제인 저를 불러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셨다는 점에 있어서만 여러분과 다를 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울고 웃고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던 한 해였다면, 제게도 올해는 그런 해였습니다. 그래서 울고 웃을 때도 있었고, 가슴아파하고 눈물을 흘렸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을 다해서 주님의 음성을 여러분에게 들려주는데, 나의 인간적인 약점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임마누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에게 참다운 행복과 아무리 기뻐해도 영혼에 해가 되지 않을 즐거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서 오는 행복이요,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나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할 때에 고통을 느꼈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제한적 고통을 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동반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리 떠나고 임마누엘에서 도망친 사람들의 기쁨은 그 속에 쓰디쓴 고통의 눈물을 배태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임마누엘 속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속에는 지복의 영광이 배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커다란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전부라고 생각하는 신앙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한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뜨거운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하나님이 한껏 자신을 낮추어 여러분에게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서 오신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주셨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 피를 여러분의 마음에 발라 구원하실 때에 내 아들을 너를 위해 죽였으니 이제는 네가 나를 위하여 죽으라고 주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은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습니까. 주님은 아무 값없이 당신과의 임마누엘을 저버리고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불행의 늪으로 들어가고 있는 우리가 불쌍하셨기에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해주신 삯을 달라고 우리에게 요구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기뻤고, 주님은 당신과 함께하는 우리 때문에 행복해 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셨던 이유였습니다. 신앙이 어릴 때에는 자기가 물러가 죄를 짓고, 임마누엘의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신앙이 깊어지면, 내가 회개하고 돌아갈 때에 하나님이 다시 나를 사랑해 주셨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좀 더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내가 하나님을 싫어 버린 그 때 조차도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셔서 나는 주님을 버렸어도 당신은 나를 버리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 아래서 숨 쉬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나를 버린 것이, 오히려 임마누엘 속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버렸습니까. 그리고 누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까.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버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반지처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면서 비로소 우리를 사랑하시기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저히 당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반지를 주셨습니다. 그 반지가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멸시와 욕을 다 당하시고 치욕 속에서 우리를 섬기시던 종 같은 당신의 생애를 십자가에서 마름하셨습니다.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죄 없는 그 분이 죄 있는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아기 예수로 말 구유에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결코 사람이 아니신 그 분,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 분이 구유에 누우신 것은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자라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슨 나쁜 일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셨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은사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는 그 사랑을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고 선언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이 한 해 동안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는데,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죽어간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들이 아님에도 남겨두신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단 하루라도 그분과 임마누엘 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이 땅에 남겨 주신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정말로 회심하고 중생했다면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천국에서 임마누엘 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영원한 세계에서가 아니라 이 유한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임마누엘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주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고,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하시기 위해서 지불하여야 할 비용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임마누엘 하기 싫어하는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 구유에 오신 이 성탄절에 여러분이 주님께 드릴 최고의 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당신과 함께 있자고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것 보다도 더 큰 성탄선물이 하나님께 어디에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 때 행복했습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셔서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마련해 주셔서 우리는 즐거웠습니까? 아닙니다.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 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이 함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 오신 이 성탄절에 우리는 세속의 분위기에 들뜨는 대신 아들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제가 태어나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성찬식이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7년 만에 태어나서 유아 세례를 받을 때였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직후에 그 어린아이를 가슴에 안고 주님의 살과 피를 기렸습니다. 그때에 마치 주님은 내게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도 네 품에 있는 그 아들이 생명처럼 사랑스럽지? 그렇지? 그런데 얘야. 내가 너를 위해서 너보다 더 사랑하는 내 아들을 그렇게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를 흘리게 내어 주었단다. 나는 내 아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죽는데 내어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 성찬을 받으며 한 손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한손으로 벽을 집고 한 없이 울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IV. 결론
하나님이 그렇게 고귀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줄을 알면서도 사람의 몸 입혀 이 구유에 내려 보내신 이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무것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라시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너는 나와 함께 살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 이 성탄절에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께 축하 인사를 드리는 것은 정말 잔인한 것입니다. 오히려 정말 축하의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세우신 여러분의 목자로서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이 하나님의 화목의 요청을 받아들이십시오. 이제는 주님과 함께 있지 않겠노라고 뿌리치지 마십시오. 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면, 내가 어떤 역경과 시련도 이길 수 있고 주님이 나와 함께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려도 나는 외톨이가 아니라고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것이 여러분의 최고의 삶의 가치가 되도록 이 성탄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4.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어렸을 때 우리들이 즐겨하던 놀이 가운데 거울 놀이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거실에 두고 초등학교 아이들이 거실 벽에 햇빛을 비춰줍니다. 작은 햇빛이 무슨 물건인 줄 알고 어린 아이들이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저만큼 빛이 달아나고, 따라가서 잡으면 이번에는 손등 위로 올라옵니다. 다른데 있는 손을 펼쳐서 손등 위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면 빛은 또 다른 손등 위로 올라오곤 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나면 그때 비로소 그것이 빛의 성질이고 거울의 역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됩니다.
II.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이 세상에는 사랑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저마다 참스러워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측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랑은 그 자체 안에 행복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할 때에는 마치 그 사랑이 주는 행복을 자신이 얻은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사랑 안에는 쉼의 요소도 있어서 사랑을 하고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동안에는 나름대로의 정신의 안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하나의 그림자이고, 한 가지 사랑으로부터 굴절되 나온 다른 조각난 사랑들입니다. 그 사랑을 오늘 성경은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사랑의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저의 표현을 빌자면 애성적인 존재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과 사랑이야말로 인간과 하나님을 맺어주고, 또 모든 인간과 인간 사이를 맺어주는 가장 훌륭한 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과 사랑은 종종 거리와 시간을 초월합니다. 함께 같이 몸을 맞대고 있어도 서로를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진정으로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떠나 있어도 심지어는 죽고 사라져도 그 사람은 없어도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은 마음에 남아 있어 어찌하든지 나와 그 사람을 맺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우리 사이에 끈이 되고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A. 사랑의 존재로 창조하심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할 능력을 주셨고, 이 능력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타락한 후에도 이 능력이 감퇴되거나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이 사랑의 능력을 옳게 발휘하고, 또 올바른 방향으로 사랑을 질서 지울 수 있는 능력을 죄 때문에 거두어 가셨다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그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인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아담에게 데려가셨을 때에 아담은 그 하와를 보면서 한 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 안에 없었던 사랑이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능력이 정말 자기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하와를 보자 불끈 솟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능력은 타락하고 난 뒤에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결혼한 후에 여러분은 가인이라는 아들이 태어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둘째가 바로 아벨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함께 사랑하며 살아야 할 관계가 끔찍하게 깨어졌고,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데려 오실 때에는 한 번에 사랑에 빠져 버렸는데 이번에는 동생을 보자 형이 들판에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무언가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제사는 하나님께 거절되고 동생인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 되는 것을 보면서 시기심이 생겨나서 동생을 죽이게 되었으니 이것도 사실은 가인 자신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결혼을 한 건 아담과 하와였고, 이번에는 사랑 때문에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전자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이었고, 후자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지 않은 빗나간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게으름과 나태의 원인이 뿌리가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빗나간 자기 사랑이라고 배웠습니다. 열심히 주를 위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고,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것은 빗나간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는 인간의 사랑의 크기를 감퇴시킨 게 아니라 그 방향을 전적으로 왜곡된 데로 틀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악이란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질서에 대한 사랑이 악이니 누구든지 사랑이 없으면 선을 행할 수도 없지만 악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인데,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한은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인간은 어찌하든지 악이든, 선이든 선택하여 그것을 행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사랑의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 멂 속에서 본체인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쪼가리, 쪼가리 찢어진 사랑에 자신의 목숨을 걸며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1, 2, 3 부 시간에는 안 해준 이야기인데 4부에서만 해 드리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대에는 알다시피 로마시대였습니다. 로마시대에도 비극이 아주 유행했습니다. 이 비극의 유래는 사실은 로마이전에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람들이 들판에서 일을 끝낸 후에는 모두 원형 극장에 모여서 석양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배우들이 연출하는 비극을 감상합니다. 끝나고 어둑어둑 해진 길을 눈물을 펑펑 흘리며 돌아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비극이야 말로 인간을 참되고 순수한 인간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믿었습니다. 후에 로마가 이 헬라 문명을 계승했지만 그들이 꿈꾸고 있는 이상은 세계적인 웅장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국가의 상징이 바로 독수리였습니다. 그렇게 나라를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비극을 배제하고 젊은이들을 강하게 훈련시키는 그러한 교육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을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자연적 본성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가슴 아프고,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것이 비극인데도 지금도 돈을 내고 그런 영화를 보고 가서 진짜 사람 앞에서는 흘리지 않던 눈물을 허연 천 쪼가리 앞에서 펑펑 쏟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비극을 사랑했던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연극으로 보면서 자기가 마치 그의 분신이 된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울고 웃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자신의 영혼의 곪아터진 상처였다고 고백을 하면서 이것이 어찌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까지 토로하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인간을 이런 애성적인 존재로, 사랑의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이루어지든지 이루어지지 않든지, 비극이든지 희극이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어쨌든 사랑을 발견하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하고, 또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거기에서 어느 정도의 만족과 안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B. 먼저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오늘 사도 요한은 이 모든 어리석은 인간의 시도에 못을 박듯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희랍어 성경에는 ‘그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인간들이 여기에 사랑이 있다, 저기에 사랑이 있다, 나는 여기에 울고, 나는 저기에서 웃고, 나는 이 사랑에서 안식을 맛보고 나는 저 사랑에서 기쁨을 누린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바로 한 사랑일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은 아니다.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만들고 사람을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하는 그 사랑은 아니다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하나님은 볼 수도 있는 분도 아니고, 만질 수 있는 물건도 아닙니다. 유대인과 많은 철학자들은 신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을 때 오히려 믿을 수 없었지만 우리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없어도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하러 내려오기 전에 잠깐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 1서 강의를 읽고 내려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사랑을 보는 것이다. 사랑은 크기와 형체와 빛깔이 없으니 누구도 사랑을 직접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사람들의 발을 이끌어 교회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사랑은 볼 수 없으나 우리는 사랑을 가진 사람의 손이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뻗는 것을 본다. 다리도 팔도 사랑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다리와 팔을 통해서 사랑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사람 속에 있는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III. 회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이미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다리요, 하나님의 팔이요, 하나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듬어 알 수 없는 무한량한 분이시지만 그 분이 사람 한 뼘 크기로 작아지셔서 우리 인간들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병든 자를 향하여 손을 뻗어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아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떠나보낸 이들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두 눈에 굵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볼을 타고 그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은 멸망 받을 것이기에 당신의 구원이 아니면 멸망 받을 자를 향하여 이 동리, 저 동리 다니셨습니다. 주님의 그 팔도, 그 발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의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눈물이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두 뺨에 굵게 흘러내려, 눈물 자위를 만들 때에도 그것은 눈물이요, 눈물 자위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볼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는 주님의 눈과, 손과 다리와 그리고 그 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보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마치 생생하게 본 것보다도 더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을 버린 사실도 깨달을 수 없었고, 더욱이 그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더더욱 알 수 없었습니다. 설령 그 길을 안다 할지라도 그 길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못을 박고 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찾아 나서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성하고 철이 다 든 어른이 집을 나가면 기다립니다.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집을 나갔을 때는 부모는 그 아이를 기다리지 않고 찾아 나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집을 더듬어 알 수 있는 지력도 없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 분에게 담당시키셔서 우리를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사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은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 나서시는 선도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해를 회고해 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는 회고할 때마다 감사한 기억도 있을 것이고, 회고하기 싫은 고통스러운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주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여 주님께로부터 멀리 도망쳤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지 하나님이 하셨거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주님을 버리고, 주님을 배반할 충분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바로 자기 사랑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새롭게 생겨났을 때 예전에 사랑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이지 새롭게 사랑할 것이 태어나지 않았는데 옛날 사랑을 배반하는 일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에서 멀리 떠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전적으로 잘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릇된 사랑이 여러분을 충동하여 주님을 배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여러분에게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올바로 섬긴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누가 영광을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에게 참다운 어떤 것이 있어서 주님을 사랑하고 봉사한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좋은 일을 만나게 해 주셔서 좋은 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 사랑하게 하시는가 하면 여러분이 옳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 묶여 있을 때에는 때로는 나빠 보이는 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때리심으로서 모질도록 끊어지지 않는 잘못된 사랑의 마음을 찢어놓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신 일입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목적이 화목 제물로 하나님이 보내신 역할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희랍어로 ‘히라스모스’(ἱλασμός)라고 하는 이 단어는 화목제라고도 번역되지만, 화목 제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나는 오히려 이것이 훨씬 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말 성경에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으니’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에는 이 죄가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지은 혹은 지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가능한 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죽으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종 시골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알을 잘 낳는 닭인데도 그것을 죽여서 요리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털을 깨끗이 뽑아서 배를 가르면 놀랍게도 이 닭의 내장 하부에 이미 하얗게 된 달걀이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만져보면 몰랑몰랑 합니다. 이제 하루나 이틀정도 지나면 그것이 딱딱해지고 그래서 꽁지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달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펼쳐보면 그 위에 큰 닭 알부터 시작을 해서 좁쌀보다 더 작은 알까지 수많은 알들이 그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씩, 하나씩 커지면서 내려와 달걀이 되어서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미 생산된 우리의 죄악을 위해서만 예수님이 죽으셨다면 예수님은 한 번 죽으셔서는 안 되고 수시로 죽으셔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양계장의 닭처럼 끊임없이 죄들을 새롭게, 새롭게 쏟아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한 죄가 아니라 우리의 안팎에 있는 가능한 모든 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 화목 제사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당연히 이 제사는 죄에 대한 속죄를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화목제를 위해서는 짐승이 죽어야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주님이 온전한 화목의 관계를 주셨으나 불순종과 죄악 때문에 그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깨뜨려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화목하기를 원하려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가서 제사장이 기도를 받으면 제사장은 그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었음을 선언하고 죄를 짊어진 그 제물을 죽입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며, 이 제물은 완전히 목숨이 끊어집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불태워 제사를 올립니다. 이때에 죄인에게는 이러한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제사의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우선 첫째로 이 제사는 이런 제사의 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방법을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와 언약적 충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포함합니다. 율법에 지정한 대로 제물을 바쳐야 하고, 그 제물은 산채로 다시 가져갈 수 없고 반드시 죽어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진실한 죄에 대한 참회와 회개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짐승이 죽어 태워지고, 연기와 그을음 속에서 피가 난자한 그 곳에서 제사가 올려질 때 그 연기 속에서 정결한 흰 옷을 입은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고 헌제자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게 됩니다. 이로써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열리고 화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고,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복된 은총이 쏟아지게 되고, 그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큰 사랑의 빛 때문에 자기에게 사소한 죄를 지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허물을 사해질 수 있는 마음의 자원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고, 이어서 이 평화를 가지고 그는 다른 사람과 평화를 이룸으로써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완전한 화목이 이루어진 그 십자가에 자기 존재가 각자 각자가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사람이 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또한 그 사랑을 이웃 모두에게 흘려보냄으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통치가 구현이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신학적인 변론 속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한 그 유명한 명제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과 관계된 명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그 속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설을 했는데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영으로 모든 인간을 하나님과 묶으시고, 또 그 영으로 조각난 사랑을 추구하며 불행해진 모든 인간들을 참 사랑으로 묶으시는 것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혀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과 화목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과 온전한 평화 속에 살고 싶지 않은 신자가 있다면 그는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은 그런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 속에서 살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기 자신이 충분히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뱃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귀하긴 하지만 진리의 말씀을 단지 설교하신 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릉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서 심하게 채찍질 당하시고 거반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숨이 끊어지고 죽으셨을 때에 주님은 우리와 당신 사이에 평화를 주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골고다 언덕 바로 그 위에서 단 한 번 ‘다 이루었다’고 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 앞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짓고 싶어 하는 죄, 그리고 주님만이 계실 수 있는 지위를 넘보는 우리의 모든 교만함, 욕망이 생길 때마다 바로 이 욕망의 결과인 죄 때문에 좋으신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나의 그 죄 때문에 오늘 내가 짓고 싶어 하는 그 악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당하고 화목제물로 죽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든 그 죄를 버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된 것처럼 사람과 완전한 화해와 화목 속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화목을 이루고 싶어 할 그때에 그것이 온전히 성취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전히 마음속에 사람을 향한 독한 미움을 품고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고, 오래전 마음에 입은 상처에 대한 복수를 꿈꾸면서 사람들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마음속에 피 묻은 미움의 칼을 품고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전히 자기를 너무 많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복음적 사실을 기억하면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나는 이미 죽은 자라고 하는 자기 죽음의 철저한 고백이 없기 때문에 한번 미워하는 사람을 마음속으로 풀어 줄 수 없고, 한번 상처 준 사람에 대한 복수의 칼을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자신을 찌르는 칼이고,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 오신 그 목적을 가슴에 다시 새겨야 합니다. 그 분은 자기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화목 제물로 버려 인간들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또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는 그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크신 십자가의 사랑 앞에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온전히 죽지 못하고, 그랬기 때문에 주님이 날마다 죽으셔야 했던 그러한 슬픈 기억들은 한 해가 넘어가는 세월 뒤편으로 던져 버리십시오. 그리고 다가오는 한 해에는 어찌하든지 내 삶의 최고의 가치를 우리 주님과의 화목, 그리고 주님이 주신 사랑하는 형제들과의 완전한 화목이라고 목표를 삼으십시오. 그래서 끊임없이 내가 화목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온전한 평화를 이루고 내가 온전히 희생으로 바쳐져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도 평화가 이루어지는 그러한 하나님의 도구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산다면 여러분의 내년 한 해는 정말 복되고 하나님 앞에 좋은 선물을 많이 받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을 가슴에 품고 주님이 오신 이 계절을 보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6-7)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내용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본질과 그분의 인성에 관한 묘사 중 그림처럼 가장 아름답고 탁월한 묘사로 불리워지기에 신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독론이 됩니다. 평소에 우리들이 잘 생각 해 보지 않은 내용을 오늘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II.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A. ‘본체’란 무엇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리스도 예수는 근본이 하나님과 본체이시다라고 아주 중요한 내용을 선언했습니다. 늘 읽는 성경구절이지만 그러면 도대체 이 본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희랍어 성경에는 모르페(μορφή)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래 형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신 영이신데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체를 가지신 분이라고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사용된 모르페(μορφή)라고 하는 단어는 어떤 사물처럼 이렇게 유리가 있고 이 끝 지점에서는 유리가 끝나고 다음에는 공기입니다. 이렇게 끝나는 지점이 있어서 이 끝 언저리들을 기준으로 이 모든 둘레와 면적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형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형체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형체라고 할 때 이 형체를 물질적인 형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무슨 사물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쉽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에 돌멩이가 있다고 할 때는 머릿속에 금방 딱딱하고 차가운 돌덩어리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돌덩어리가 예배당 한 가운데 어떤 크기를 가진 돌멩이이든지 하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있다 라고 하는 주어가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만약에 공기. 산소 혹은 연탄가스라고 한다면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자! 우리 방 안에는 산소가 있습니다 하면 이제 이 산소는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볼 수 없는 공기 속에 많은 성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우리를 숨 쉬고 살게 해주고 혈액을 잘 돌게 만들어 주고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그런 기체가 공기 속에 섞여 있다고 할 때 이곳에 산소가 뭉쳐 있고 저곳에는 산소가 없고 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한계가 없이 어느 공간 안에 볼 수 없도록 퍼진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배당 안에 있는 산소가 어떤 형체를 가졌나요 하고 물어 보면 그 형체를 그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릴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로 더 뛰어 올라가 봅시다. 인간에게 육체만 있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도 사라집니까? 영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영혼은 만약에 여러분이 예배당에서 죽었다면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의 영혼이 전당포 집이나 내과나 외과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집의 장롱에 있는 것이라 여기에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죽으면 어떤 식으로든지 영혼이 이동해야 되겠죠? 그때 영혼이 이 방안에 있다 라고 할 때 그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산소 하고는 또 다릅니다. 자! 한번 물어 봅시다. 여러분의 영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몸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코에 있다 입에 있다 심장에 있다 이러는 것은 다 미신이고 동네마다 다 어디에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예화) 우간다의 독재자였던 이디아민을 기억하죠? 군인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반역을 일으킨 군 간부를 붙잡아서 사형 시킨 후 배를 갈랐습니다. 그리고 생간을 먹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미치지 않았느냐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 생각에는 아주 진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 사람들은 간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였어도 간을 없애 버리지 않으면 거기에 붙어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어떤 식으로든 괴롭힐 것입니다. 육체 속에 갇혀 있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만약에 육체에 갇히지 않으면 그것은 무서운 귀신이 되어 자신을 공격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비결은 먹어서 자기 몸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은 것입니다. 피를 뚝뚝 흘리고... 영화에도 나왔습니다. 다 정신병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있다고 할 때에는 분명히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형제 속에 들어갔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체인지 한 것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있는 데가 있고 없는 데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영혼이 권사님 호주머니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지... 그러면 이런 질문도 생깁니다. 나는 옛날에 요만했는데 지금은 몸집이 커져서 이렇게 커졌습니다. 저도 허리가 27인치이던 시절이 있고 몸무게가 56kg이던 시절이 있는데 몸집이 커졌습니다. 그러면 내 영혼은 이 안에 있어서 몸집이 커진 다음에는 몸집이 커진 부분만큼 영혼이 없는 몸만 되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배가 나오고 몸이 커짐에 따라서 영혼이 확장 되는 것이냐? 다이어트를 해서 10kg쯤 빠지면 영혼이 다시 줄어드는 것이냐 그런 것은 우리들이 대답을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지금 이만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을 때는 이 안에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짝 말라서 몸이 반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원래 있던 그 반쪽 옆에 내 몸 없이 영혼이 반쪽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여기에 영혼이 있다 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은 산소가 있다 하는 것하고는 또 다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신데 우리 인간의 영혼은 끝자락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가 영혼이 거할 수 있는 마지막 경계선입니다. 내 영혼이... 죽기 전에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둘레가 없는 것입니다. 이 안까지 내용은 있지만 바깥에는 내 영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경계가 없으신 분입니다. 완전하게 무한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다 라고 할 때 그것은 또 다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멩이가 있다 산소가 있다 그 다음에 영혼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이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이런 것입니다. 돌멩이가 있다 라는 말과 사랑이 있다 라는 말은 또 다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본체라고 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형체가 아니라 본질을 가리키는 또 다른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해석을 하자면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질이었지만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무한한 본질이신 온 세계를 다 뻗어 나가서 안 계신 데가 없이 그렇게 계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모든 곳에, 아무 곳에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신 그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안에 다 들어 갈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고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그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유한하신 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의 모든 진리를 종합할 때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본질만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 경우에는 예수님이 무한하고 영원하신 신적 본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화목 재물이 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 했고 인간의 몸은 몸이고 참된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는 껍질로 몸만 입으면 안 되었고 인성을 지니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성은 공간의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는 나사렛에 없으셨고 유대 땅에 계실 때는 사마리아에는 안 계셨습니다.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에는 유대에 없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서는 계신 곳에 계시고 안 계신 곳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성에 있어서는 안 계신 곳이 없이 다 계신분이 바로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그런 신적인 본질을 예수님이 가지셨다 그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본질과 예수님의 본질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없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람으로 낮아지신 하나님이라고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B. 성육신
1. 인성 안에서 동등함을 포기
그렇다면 두 번째로 성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육신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내려오시기 위해서는 참된 인성을 가지셔야 인간이실 수 있었고 인간이셔야 사람들에게 보이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인격은 두 인격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한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인격이 사람의 인격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인격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그 분이 인격 없는 사람의 성품을 취하여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한 인격이어야지 두 인격이면 다중인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인격으로 오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유비를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격 없이 태어나는 인간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고 인격이 없이 인성만을 입으셔서 사람이 되셨고 신적 인격을 가지셔서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본질이라면 사실은 그 본질에 맞는 대우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부터 이미 하나님의 본질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접이었던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아마 사극에서 그런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순시라고 해서 왕궁 속에 살면 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때 임금이 아주 단촐하게 뛰어난 무사 몇 사람을 변장시켜서 시종처럼 데리고 밤중에 혹은 낮에 사람들이 사는 거리고 나타나서 그래서 민심을 살피는 것을 잠행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왕이 나타나면 궁궐에서 만났을 때에는 감히 얼굴도 쳐다 볼 수 없는 사이인데 동네 사람들이 마치 지나가는 과객에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고 주막에 앉아 술을 한잔 걸치기도 합니다. 후에 이분이 상감이시니라 할 때 그 사람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사색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을 임금답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방법과 자비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인간의 눈높이까지 낮아지신 하나님의 겸손함입니다.
(예화) 요즘은 많이 일반화 되어 있지만 맨 처음 눈높이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싱가폴 에어라인이라는 항공사입니다. 지금도 그 항공사는 아주 친절하기고 정평이 나 있는 항공사입니다. 예전만 해도 그 항공사에서는 마일리지를 안 주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제는 하도 경쟁시대이니까 할 수 없이 거기에서도 마일리지를 주더군요.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비행기를 타서 손님은 앉아 있고 스튜어디스는 서 있습니다. 그리고 키가 너무 작은 여자들은 스튜어디스로 못 뽑히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신장이 있어야지 그래도 뽑히는데 165cm가 서 있고 사람이 앉으면 1m쯤 될까 하는데 그렇게 하고 이렇게 쳐다보려니 무엇을 물어 보려고 하면 고개가 아프도록 들고 물 한잔 주세요 하고 이야기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손님이 무엇인가 손짓을 하면 빨리 달려가서 손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앉은키와 손님이 앉은키가 조정이 되고 눈과 눈이 수평으로 닿게 됩니다. 그러면 마치 같이 서 있는 것처럼 물을 좀 주십시오 수건을 가져다주십시오 아니면 차를 한잔 주십시오 라고 부탁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 서비스가 보편화 되었지만 맨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서비스 업체에 갔을 때 한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이 하는 다담이 있고 온돌방이 있는 술집에나 가면 모를까 누가 감히 손님 앞에 무릎을 꿇는 그런 것이 어디 외국에서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와서 사람들이 신발 신고 지나가는 그 바닥에 무릎을 대고 꿇어앉는 다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이후에 감동으로 변했습니다. 그것이 회사의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톡톡히 이바지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눈높이에 맞게끔 그렇게 내려오신 것입니다. 어느 전시회에서 어린이들이 출품해서 당선된 작품을 높이 걸어 놓았더니 아이들이 고개를 꺾고 들여다보아도 그림이라는 것이 수평으로 감상을 해야지만 그림이 제대로 감상이 되지 볼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전시를 해서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그림이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양이면 어른은 불편해도 아이들이 눈높이에 맞추어 주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매우 어려운 신학적인 교리인데도 제가 무릎을 꿇고 여러분 눈높이에 맞게 이렇게 쉽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렵게 하면 이것이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내용들이 많이 들었는데... 그런데 다 접고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성육신이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신데도 인성을 입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는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과 동등 되게 여김을 받기를 스스로 포기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주고 당신 자신이 화목재물로 죽으시기 위해서 인성 안에서 동등함을 포기한 것입니다.
2. 신적 본질로서의 자기를 비우심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것을 말하기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형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사실은 희랍어로 본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어 종의 본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비우다 라는 이 말이 케노시스인데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을 이렇게 비우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오해를 한 사람들이 나왔는가 하면 봐라 비웠다고 되어 있지 않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내려오시면서 신의 본질을 하나님께 반납해 버리고 순수한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케노틱 이단이라는것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파 버리고 나면 예수님은 순수한 인간이 되고 그러면 그는 그야말로 이 모든 인류 가운데 있었던 훌륭한 종교적인 능력을 가진 그런 위대한 성인 중 한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은 우리에게 감화를 끼치는 도덕적인 모본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서 수 없이 증거한 예수의 이름은 임마누엘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 그리고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던 모든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비우셨다’는 의미
그러니까 여기에서 신적 본질로서 자기를 비우셨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은유적인 가르침입니다. 즉 무슨 뜻인가 하면 스스로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에 어울리는 대접을 이 세상에서 받거나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찬란한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추셔서 누가 보든지 예수님이 사람이심을 의심할 수 없게끔 그렇게 오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자리를 비우셨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삼위일체의 논쟁이고 신성과 인성 양성에 관한 논쟁이고 이성이면서 한 인격이라는 두 성품 일 인격에 관련한 아주 난잡한 신학적인 교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바울이 이렇게 신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복잡해 보이는 이 어려운 교리를 사변적인 목적에서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이유 때문에 이 교리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빌립보 교회는 아주 신앙의 본이 되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목회사역 가운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교회가 몇 있었는데 그중에 한 교회가 바로 이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여태까지만 그러지 말고 앞으로도 주님을 잘 섬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위로할 것이나 교제나 긍휼과 자비가 있으면 이것을 서로 자랑하면서 다투듯이 하지 말고 너희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한 뜻으로 만들어서 허영이나 다툼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섬기도록 그렇게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잘 타일렀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려워 보이는 기독론은 이론적인 것입니까? 실천적인 것입니까? 그렇죠. 이론적이지만 이론을 위해서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해서 이론적인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가장 실천적인 것이 이론적인 가르침에 대한 이해 위에 서고 그리고 어떠한 가르침도 이론도 반드시 실천적으로 열매를 맺게끔 습득이 되어야지만 그것이 올바른 실천적이고 올바른 교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III. 사람으로 오셔서 종처럼 산 예수님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이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기를 거절하셔서 참 인간이 되시고 신성을 인성 아래에 감추셔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 분이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물론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인성 너머에 있는 신성을 발견 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으로 오셔서 종처럼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 이었습니다. 이런 정도의 생각을 하고 나면 이 성육신이 커다란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화목재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라는 선언이 감격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에 감동의 쓰나미를 경험하지 말고 이런 데서 감동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나님이면서도 나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날이 바로 우리들이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후로 부터는 망원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없었는데 그 예수님의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본질이면서도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을 거절하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렌즈 삼아서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때 맨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이셨고 심지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망원경으로 해서 창조세계를 바라보면 그 창조세계에 대한 감동이 새롭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절정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육신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성육신의 계획과 목적이라는 구도 속에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게 될 때 이때에는 이것 못지않은 더 큰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입니다.
(예화) 3D 영화 보셨습니까? 저도 한번밖에 못 봤지만 그것 정말 굉장합니다.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도 사실 3D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조잡했습니다. 그래서 보면 마치 무엇과 똑같은가 하면 똑같은 그림 여러 개 겹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 입체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이 3D는 굉장합니다. 미국 집회에 갔을 때 가보고 싶은데 없냐고 해서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여 달라고 했더니 아이맥스 영화관에 저를 데려 갔습니다. 거기에서 연달아 두 편을 보았는데 한편이 바다 속에 있는 생물들을 촬영한 것이었습니다. 마침 부활절 휴가 기간이라서 꼬맹이들이 많이 왔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이... 그 아이들도 떠드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니 조용해 졌는데 이번에는 아이들이 저마다 안경을 쓰고 손을 올리는 것입니다. 해파리가 헤엄을 치니까 그것을 잡느라고 너나 할 것 없이... 저도 몇 번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아주 찬란하게 다가오는데 안경을 벗고 보니까 정말 시시합니다. 흐릿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보니까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인간을 맨 눈으로 볼 때에는 그냥 사람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그 구도를 가지고 인간을 볼 때 3D로 보는 것입니다. 찬란하게... 그래서 주님이 없었더라면 쓰레기처럼 보였을 인간인데 성육신의 목적을 가지고 그 인간을 바라보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가득 담은 인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쓰레기와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의 구분도 우스운 것 아닙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교리를 서술하고 있는 바울도 한때는 쓰레기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자 그렇게 아름다운 신학적인 유산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구도를 가지고 인간을 볼 때 아주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보다 놀라운 절정이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목걸이를 누가 선물했는데 콩알 만한 다이아몬드가 하나 박힌 것, 은줄에 콩알 만한 다이아몬드 한 3캐럿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멋있습니까? 안 멋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포도송이로 달렸다 멋있어요? 안 멋있어요? 그렇게 한 인간을 바라볼 때 그렇게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 그러한 아름다운 인간들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의 렌즈를 가지고 교회를 볼 때 교회는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망원경으로 사용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교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는가 하면..
(찬양) 내안에 가장 귀한 것 주님을 앎이라
그 고백처럼 예수님을 정말 제대로 알고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들이 정말 존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속에 밀려들어오는 최대의 적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상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신비체험이나 가져다주는 분으로 요술쟁이처럼 생각하거나 예수님을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용역사원정도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물건을 배달해 주는 퀵서비스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참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교회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정말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정말 우리가 참된 사람이 되는 길이고 이 모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 한해에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그 지식을 위해 애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결론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 길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그것이 사도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이 다 흘러간 다음에 마지막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지식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 하늘나라에 들어가 주님 만나고 어디서 많이 본 분 같은데 어느 교회에 다니다 왔수? 그렇게 물어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서 김 목사는 몰라봐도 괜찮습니다. 거기서까지 제가 혼을 내겠습니까? 명색이 천국인데... 주님을 몰라보면 큰일이겠지요? 그런데 주님을 곧 만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이 드신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나이 드신 분들이 더 열심히 예수를 배워서 이제 곧 만날 텐데 예수님 만났을 때에 아저씨 누구세요 하고 헛소리 하지 않도록 철저히 배우고 사랑해서 배웠을 때 말씀 속에서 늘 만나던 분 기도 속에서 언제나 뵈었던 분 그렇게 고백을 해야지만 그것이 정말 제대로 예수 믿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6.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녹취자: 김세나
I. 본문해설
똑같이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인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각각 다른 관점에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어떤 산을 우리가 오른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의 직업에 따라서 똑같은 산을 올라도 관심사가 좀 다릅니다. 식물학자가 산을 오른다면 아마 올라가면서 많은 나무와 풀에 관심을 갖을 것입니다. 지질학자가 산을 오른다면, 깎아지른 절벽과 계곡을 보면서 지질학적인 연대나 토양의 성분들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이 복음서도 똑같이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사람이 각각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예수님을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그래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를 해석하기도 했지만, 주된 관점은 예수님의 생애를 그대로 적어서 예수님이 그들 눈앞에 계신 것처럼 생생하게 사람들에게 생각나게 해주게 하는 것이 마태, 마가, 누가의 관심이었다면, 요한의 관심사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장수의 순서가 거의 일어난 사건의 연대기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전부다 재구성을 해서 주제별로 묶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요한은 비유를 하자면, 헬기를 뛰어서 이렇게 산을 찍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여기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연대 기술적으로 그대로 묘사해서 보여주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 보다 그 사건들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요한복음이 기록될 때에 사도요한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수신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편지를 보낼 때에 상정했던 사람들은 헬라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로마 제국의 많은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기 위해서 애를 쓴 책이 바로 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해석이 담겨져 있어 이야기보다도 해설이 많아 어렵고 지루한 면이 있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보다도 요한복음은 해설이 친절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데 재빠른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책이기에 예수 처음 믿은 사람에게 자꾸 요한복음부터 읽기 시작하라고 하는 겁니다.
II. 육신이 되신 말씀
그런데 오늘 이 1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안 중요한 장이 하나도 없겠지만,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알 듯 모를듯한 어려운 내용들로 이 요한복음의 첫 장을 엽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여러분이 이 문장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누가 계셨길래, 말씀이 계셨다는 겁니까? 또 이게 우리 말 성경에 보면 계시니라 하고 나오는데 희랍어 성경을 보면 헨(ἦν) 이라고 하는 완료형 동사입니다. 태초를 기점으로 태초 이전서부터 계속해서 말씀이 계셔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면 함께 있을 필요가 있는데, 둘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같이 계셨다고 해놓고 똑같이 하나님이라고 설명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어졌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창조하셨다는 겁니까.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내용들로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가 쓰여지던 당시에, 그 헬라 문화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보았을 때, 둘 중의 하나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충격을 받거나 아니면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면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그냥 간단하게 넘어가고 우리 오늘 관심사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기 말씀이라고 하는 단어가 헬라어의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희랍 사람들이 사용하던 철학적 용어입니다.
그 로고스가 뭐냐 하면 신이 있는데, 그리스 신화 읽어 봤죠? 별의 별 조잡한 신들이 다 나옵니다. 변심하고 배신하고 또 까불고 그러다가 제우스한테 혼나고 술 취하고 바람피우고, 그리고 혼내주고 그러는 신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도 그러한 것들도 모두 신이 없다고는 생각은 안하는데,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다 하등한 신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신들 위에 진짜 탁월하게 이 하류의 신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모든 하류의 신들의 신성의 원천이 되는 정말 가까이 하기에는 먼 신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신은 너무나 거룩하고 신령하기 때문에 이 조잡한 물질 세계와 관련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와서 이렇게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는 것은 체면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황제인데 어느 날 와서 너희 둘이 결혼 하면 안 되겠냐. 날 봐서라도 나이도 찼는데, 웬만 하면 가라. 그러더니 둘이 이 황제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듯이 사람들 속에 나타나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조잡한 신이 하는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한 신이 있는데 그 신보다도 더 높이 뭐가 있느냐 하면, 이 모든 세계를 움직이는 이성적인 어떠한 큰 원리와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것도 이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기는 하지만, 진짜 최종적인 그 신은 아닙니다. 그게 바로 로고스입니다. 그 신은 어떻게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 같이 사람의 형상을 한 하등한 신은 아니고 훨씬 그것 보다 높은 신으로써 모든 신들까지도 있게 하고 없게 하는 하나의 원리로서의 그런 존재가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는 완전한 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러나 인간이나 하등한 신이라 말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는 중간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로고스입니다. 그 로고스를 사람들이 잘 알면, 사람들이 놀라운 지혜도 생기고 그러한 로고스가 모든 세계와 학문 속에 녹아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학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로고스를 이해하고 있었는데, 뭐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과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신의 하나의 중계자인데, 그 신에 의해서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플라톤이라는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이 모든 이 세계와 천상의 존재가 일렬로 위로부터 우열의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갈수록 아주 거룩하고 고상한 것이고, 내려올수록 열등하고 악한 것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고상하고 선하며 영적인 것이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질적인 것입니다. 가장 물질적인 것은 가장 악한 것이라 본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그랬습니다. 육신은 사르크스, 즉 고기입니다. 살코기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물질입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거룩한 영계에 속한 지극한 선인 로고스가 악의 대명사인 물질 속으로 들어와서 육신이, 살코기가 되었다라고 할 때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까 이야기 했듯이 충격을 받거나, 아니면 조롱을 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했단 말입니다.
요한 자신으로서는 이렇게 편지를 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쓴 이유는 그냥,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 충분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에 오래 전에 그 유대교에서 뭔가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다가 죄 형벌을 받고 죽은 예수라는 인물밖에 사람들의 기억에 없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기 전에 그 때에도 그 분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전하는 자신과 듣는 사람 사이에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설명을 찾은 것이 그 당시에 사람들의 가지고 있었던 로고스를 딱 찾아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학자들은 로고스 사르코스, 사르코스라는 것은 육신을 입었다는 뜻이고 로고스 아사르코스, 육신을 안 입었다 이렇게 나눕니다. 그래서 원래 예수님이 로고스셨는데, 그 분이 육신을 받아서 이 세상에 마리아의 몸에서 오신 것이 사르코스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는 육신을 입지 않고도 그리스도, 로고스로 계셨던 것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A.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의미
오늘 여기에는 육신이 되신 말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선 제일 먼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될 때에 처음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지은바 되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없는 데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가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도 원래가 없었던 존재였기 때문에, 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사람과 똑같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자연적인 성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출산하여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원래 있으셨던 분인데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신 것은 그 원래 계셨던 그 분의 인격에 인간의 몸을 입히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은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이 마리아의 몸에 예수가 잉태되셨을 때, 즉시 창조하신 것도 아니고 원래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그 분이 육신 없이 계셨다가 육신을 입게 되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1. ‘성자는 말씀이시다’
그러면 도대체 성자가 말씀이시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이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이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와 맺으시는 관계를 염두 해 둔 명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창조하기 전에 영원 속에 성부, 성자, 성자 계셨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 성부, 말씀, 성령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틀립니까 말하는데, 틀리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조금 안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마치 무엇과 똑같으냐 하면, 형제가 자매와 결혼을 하는데 자매가 같은 회사의 부장님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말할 때 나는 부장님과 결혼했다 고 하면 좀 이상하잖아요. 나는 오늘 내 아내와 함께 잔다고 해야지, 나는 오늘 부장님과 같이 잔다 그러면 이상하잖아요. 말이 좀 안될지 모르지만, 말씀, 성자의 대명사로서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맺으시는 관계를 염두에 놓으시고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 창조한 세계와 삼위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실 때에 왜 성자를 말씀이라고 하필이면 칭하실까 하는 궁금증이 나옵니다. 이것은 굉장히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밤새도록 해도 못할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 성자를 말씀으로 칭하신 이유는, 그 중에 한두 가지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을 하시기 바랍니다. 굉장히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선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구속하고 마지막에 완성하시는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잖아요. 이 때에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창조하실 수 있으실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다양하게 창조 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렇게 안 하고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느 나라 언어로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또 누구 들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빛 보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죠. 있었다면 창조하실 필요가 없고 그렇죠. 창조되었다면 있으라 하고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아마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요엘은 유안겔리온으로 나오는데 그 단어는 공기를 움직이는 소리의 발화로 사람들에게 말하는 그것만을 의미하는 동사가 아니라 이 속에 머물러 있는 생각까지도 말하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럴 때에, 아 하나님이 설교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셨구나. 그러면 도대체 그 설교는 누구 들으라고 하는 설교였을까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라고 할 때에 그것은 바로 성자의 또 다른 대명사인 말씀, 그 분이 중보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그런 뜻입니다. 인간을 구속하실 때에는 성자께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아주 복잡한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조에서는 그러한 낮아진 모습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그 창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모든 물질세계를 있게 만드심에 있어서 성자를 우선적으로 관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성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생각이고, 계획이고 또한 말씀이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그 세계를 성령 안에 있게 하심으로써 이 모든 세계가 하나의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통치의 질서, 생명적인 유기체적 질서들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자는 말씀이시라고 할 때 말씀을 설교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단 이 세계가 창조되고 인간이 존재하고 난 다음에 특히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이제 말씀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번에는 인간의 마음 안에 당신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발화하는 사람의 언어를 통해서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설교의 가치, 내가 동네에 가서 말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언어 전도의 가치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없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예화) 요즘 어느 교회에 가보니까 목사님이 와서 설교를 하는데 영상과 함께 설교를 하더라고요. 요새 세븐일레븐에서 세븐일레븐이 턱 나오는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껌을 샀다는데, 오바마가 탁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 볼 때에는 졸지는 않겠더라고요. 너무 신나. 그런데 뭐냐 하면 이 설교는 하나도 안 들리고 계속해서 세븐일레븐, 오바마, 껌, 그 다음에 뭐 호빵, 이러한 것으로 계속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정말 만약에 사람들에게 전달을 해 주기 위해서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의 수단으로만 말이 쓰여졌다면, 말 보다는 그림이나 노래, 연극 이러한 것들이 훨씬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게 아니라 말 자체 속에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을 말하자면 일깨우고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하시니까 그 말씀이 그 말씀이 아닌데 그 말씀이 나중에는 지금 우리들이 이해하는 그 말씀으로 변화되고 그 말씀 선포 속에 성령으로 함께 하면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니까 놀라운 아이러니라고 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교한 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럴 때 이제는 그게 외치는 김 목사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오늘은 본전은 하신 것 같습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두 번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그런 것입니다. 영원 전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그 중 성자는 하나님께서 성자를 말씀삼아 이 세계를 창조하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창조하신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 모든 관계들이 깨뜨려 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무질서와 부패에 종속되었고, 인간은 원래 자기가 창조된 본래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허무한 일에 복종하는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을 본래의 상태로 바꿔 놓으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다스리시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절대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고, 주님께 돌아오지 않고는 그들이 원래 창조된 인간의 본래 존재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즉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계시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 계시는 바로 감추어진 하나님을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만약에 감추어진 것이 물질이라면 이러한 식으로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나면 보여 지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사람, 사건, 역사, 인간의 경험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것을 전파할 사명을 갖은 종들을, 인간이 타락하면서 항상 주셨고 항상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때로는 사건을 통해 혹은 언어로 혹은 이미 주신 하나님의 언어적인 말씀을 해석하는 작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계시의 역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고 특별히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계시의 홍수의 시대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셔서, 귀 속에 이 하나님의 언어가 들리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 해석할 여지가 없도록 그렇게 명백하게 말씀하시기까지 하면서 인간에게 알려 주시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비행기를 타잖아요. 요즘에는 비행기를 하도 잘 만들어서 이륙할 때 컵에다가 물을 따라 놔도 쏟아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이륙을 하잖아요. 그리고 단번에 막 8천미터, 9천미터 올라가서 거기에서 수직으로 쭉 8백킬로의 속도로 달리고 그러다가 늦으면 밟아요. 950킬로까지 밟거든요. 막 달린단 말입니다. 그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가만히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그게 95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고요. 그 뒤에서 왔다갔다 뒤에서 날아가는 꼬리에 있는 날개에 있는 바람의 속도가 뒤에서 부는 속도가 초속 53미터, 60미터의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안 보입니다. 만약에 거기에다가, 우리도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아무 사물이 없으면 바람이 부는지 모르잖아요. 빨래 줄을 걸어놓고 빨래를 널어 두면 그것을 보면서 야 바람 무섭게 부는구나 라는 것을 바람을 못 느껴도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당신 자신은 보이시지 않지만, 인간의 역사, 인간의 나라의 흥망과 성쇠, 개인에게 일어난 많은 사건들을 빨래 줄에 걸어 놓은 빨래처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어떤 분인지를 사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이러한 하나님을 깨어 있는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해서 생생하게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계시를 주시는데 그 계시의 정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에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몸일 뿐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인성과 신성이 아울러 계시지만, 가지고 계시지만 실제의 인격은 하나님이신, 본질은 하나님이신 그 분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이시다라는 의미가 이번에는 시간과 공간속으로 들어와서 한 사람 예수가 되셨는데, 그 분을 가리켜서 말씀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 존재 안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인간들에게 들려주시고 싶으셨던 모든 음성을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 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의미의 말씀으로 등장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아까 똑같은 이야기인데, 예수께서 2천 년 전에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해야지, 2천 년 전에 말씀이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하거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할 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해야지, 말씀이 매달리셨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을 때 말씀이라고 한 것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 분이 말씀이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시면서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자의 말씀은 세계가 있게 한 원인이고, 후자의 말씀은 있게 한 원인이신 것은 오히려 감추어지고 오히려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 세상에 말씀을 전달해서 인격으로 말로 외치는 선포로 행동으로 모든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모든 생각과 인간에게 드러나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이 증거 하신 말씀만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삶의 기록 자체가 다 복음입니다. 그 분 자신이 복음입니다. 그 분이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 자신에 관해서 알게 하고 싶으신 그 소망을 예수에게 담아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사람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B.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이유
1. 참 하나님의 성품을 보이심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그 다음에 바다 위를 걸으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또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기도하시고 등등의 모든 삶을 사셨는데 그러한 기적과 이적, 희생적인 삶,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으니까, 믿음 없이 우리가 탁 보면 그 분은 인간이에요, 하나님이에요? 인간이시잖아요. 그러니까 그 분은 인간입니다. 그 분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분이 인간이신 것이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안 믿으려는 사람에게. 어, 화장실도 가시네. 아니 밥도 먹는 단 말이야?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목이 마를 수가 있어? 뭐 이렇게 등등의 생각을 하면, 안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그 분이 사람이시라는 사실이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렇지만 만약에 믿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그 분이 사람이신 것이 잘 믿을 수 있는 놀라운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랑은 예수님도 보여줄 수 없지만,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주실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선을 행하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그 모습 속에서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놀라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라고 말입니다.
a. 참 하나님을 보여주심
그래서 제가 지난 주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사랑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 사랑을 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사랑이 사람들의 발을 이끌어 교회로 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사랑을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람들의 손을 뻗쳐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하기 때문에 그 손과 그 발이 사랑이 아니지만, 뻗쳐진 손과 걸어가는 다리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굉장한 사실입니다. 마음은 언어와 모든 것 속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자꾸 보여 달라고 그러는데 그런 말 하지 마. 보여 줄 수가 없어. 보여 주려고 갈비 뼈 두 개를 뜯어봐야 허파밖에 안 나와. 거기에 사랑이 숨어 있는 게 아니거든.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라고 하는 것이 방해가 되겠지만,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생하게 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b. 참 인간을 보여주심
그런데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셨지만, 또 예수님은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참 사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참 하나님처럼 사시는 것이 인간들에게 참 사람처럼 사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지 참 된 모본을 하나님이시니까 제대로 보여 주셨지, 인간은 그것을 제대로 보여 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반영하겠죠. 그러나 완벽하게 보여주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인간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제가 청소년들을 목회할 때 있었던 일인데, 거기에 잘 사는 집 아이가 교회를 나왔어요. 그런데 한 일곱 여덟 명이 똘똘 뭉쳐서 다니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대단하다는 게 신앙이 대단하다는게 아니라 몰려 다니는 우정의 뭉침이 대단합니다. 새벽 4시 반에 교회옵니다. 와 가지고 그 다음에 코펠 버너 다 싸가지고 산에 가요. 새벽에 거기에서 밥을 해 먹어요, 주일날. 그리고는 내려 와가지고는 세수하고 예배드리고 그 다음에는 하루 종일 농구하고 배구하고 축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뭉쳐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애가 하도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렸는데 그 아버지는 불신자였어요. 교회 다니는 얘를 갔다가 절에다가 집어넣었어요. 그래, 너 학교 다니지 마라. 여기 있다가 검정고시 쳐서 공부해가지고 대학가라 그리고 얘를 던져 버렸어요. 그래서 얘가 교회를 한 일년 가까이, 8개월인가를 못 나온 것입니다. 그 사이에 큰 부흥이 일어났어요. 그래가지고 그 완전히 생짜배기처럼 뭐 허막합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요즘같이 제가 성화되었으면 안 그랬을 텐데, 그 때 저는요. 그 뭐 각목가지고 패면서 목회를 했어요. 여러분은 그런 교회 절대로 보내지 마세요. 막 팼어요. 목사님 아들도 막 들입다 팼어요. 대걸레로 붕붕 날면서 팼습니다. 반쯤 죽였어요. 그런데 하여튼 얼마나 회심을 안 한 흔적이 뚜렷했으면, 그렇게 싸웠겠어요. 그런데 요즘 같으면, 골목에서 나를 아마 테러를 했을 것입니다. 요즘 애들은 무섭게 회칼 까지 가지고 다니는데 당하겠어요. 그래도 그때는 뒤에서 욕했어도 앞에서는 못 했어요. 그런데 부흥이 일어났어요. 아이들이 막 놀랍게 회심한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나는 아직 일평생 목회하면서 그런 회중을 못 봤어요. 아침 9시에 예배 시작하면, 9시 반쯤 설교하기 시작해서 12시 30분까지 설교를 했거든요. 180분. 중간에 잠깐 쉬고 계속 했어요. 그런데 정말 보통 한 90분 내지 100분을 설교 했는데, 목사님이 설교 길게 하는 것을 되게 싫어하셔서 당신은 주일 예배도 딱 15분밖에 안 하셨거든요. 저는 90분 했는데, 모든 목회자들 설교를 그렇게 길게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포기하신 유일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저였어요. 저는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집중하며 듣는지 놀라워요. 그래서 이제는 코펠, 버너 다 집어 치워 버리고 새벽엔 새벽기도 나오고, 그리고 예배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 지하실로 내려가서 아주 콧구멍만한 방에 20명씩 모여서 열렬하게 기도를 합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얘가 이 상황에 온 것입니다. 왔는데 고향에 왔건만 고향은 옛날 고향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다 변했어요. 그때에 그 두려운 눈빛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걔가 변화 받는 것을 못보고 그 교회를 떠났거든요. 그런데 아무하고 만나도 말이 안 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애들이 우는 것입니다. 자기 보고 너는 구원도 없고 회심도 없다. 그러면서 애들이 막 울어요. 그때에 느끼는 두려운 눈빛, 그게 뭐냐 하면요. 인간은 자기네들이 다 제대로 된 인간인 줄 알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변화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인간들이 변화되는 좋은 방법은 하나님 만나기 전에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면 되요. 그러면 자기같이 살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야. 왜, 끼리끼리니까. 자기하고 어울리는 사람하고 만나서 놀지 야비한 비회심자가 거룩한 신자와 만나가지고 재미있게 화토를 칠 수가 있겠어요. 노래방을 갈 수가 있겠어요.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가 아니니까 힘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딱 봤을 때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가정 복음화의 길이 뭐냐고 묻는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 다음에는 식구들이 모두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러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복음의 실재를 가지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엄마, 예수 믿어, 교회 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는 그것은 폭탄이 터지는 것입니다. 물에 물탄 것처럼 술에 술탄 것처럼 그러니까 그런 거지 확실하게 보여 줘야 합니다. 그 때 어느 그 비회심자의 어느 교인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날 무심코 가족들이 모두 모였길래 니가 한 번 기도해라. 자기 아들 기도를 시켰는데, 20분 이상 기도를 하면서 나중에는 뭐 우리 아버지 이 불쌍한 영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면서 펑펑 우는데 느낌이 어땠냐 그러니까 무섭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입니다. 무슨 두려움이냐 하면 저 아들이 자기를 어떻게 할 것이라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 계시네. 그런데 어디 계신 것입니까? 어디 계신 것을 본 것입니까?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 것을 예수님 안에서 보여 준 것입니다.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참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고, 참된 사람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참된 하나님 되심도 성육신 안에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이 참된 인간이 될 때 어떤 인간까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그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육신은 위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는 망원경이고, 아래로는 창조 모든 세계를 바라보는 망원경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눈이 먼 사람입니다. 그것을 아주 열렬하게 설교를 한 시리즈가 있는데, 제목을 알아 맞춰 보세요. 알면 상도 주고 싶은데, 뭘까요?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입니다. 오늘 가는 길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아니면 저기 서점에 가서 하나 구해가지고, 생각난 김에 금년이 지나가기 전에 확 한번 속독을 한번 해 보세요. 그게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도 있고 세계도 있는데,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왜 태어났다고요? 공부하기 위해서. 뭐에 대해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그런데 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 안 하고, 왜 예수에 대해서만 그렇게 이야기 하냐고 그러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렌즈입니다.
사도바울이 완전히 깡통이었거든요. 깡통도 똑바로 된 깡통도 아니고 찌그러진 깡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는 사람을 잡아 족치기 위해서 대제사장 공문을 청해가지고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막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이제는 하나님 참 하늘을 바라보고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니까 이제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도 알고 영혼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니까 이 모든 세계가 그냥 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것이 마지막에 완성될 위대한 전망까지도 에베소서에서 쭉 기록을 한 것입니다. 무슨 사건이 있었어요. 어디 가가지고 신학교에 가서 뒤 파고 수석을 했어요? 아니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거야. 정확하게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육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를 딱 보고 아 진짜 예수가 살아 계시구나. 그러니까 무엇에 대해서 재평가하게 된 거예요? 예수님이 남기신 모든 말씀에 대해서 재평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뻥이다. 수많은 인간들이 뻥을 쳤고 사기 친거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예수님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남기신 수많은 어록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 것 아닙니다. 기록도 있었고, 누가복음에 보면 그 기록이 많았다고 그랬어요. 보면서 이제 한 번에 망원경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눈 수술한 처음 해에 달에 토끼가 있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토끼만이 아니라 계수나무까지 보이더라고요. 거기에 떨어지는 나뭇잎도 보이더라고요. 확실하게. 그 순간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뭇잎은 안 보였지만, 어쩌면 저렇게 선명하게 보일까. 감격을 했어요. 아, 진짜 토끼가 있구나. 토끼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못 봐요. 망원경을 탁 하고 보니까 쫙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에 어땠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감격은 확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이 태어난 목적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것인데, 이상하게 하나님, 세계, 인간에 대해서 안 가르치고, 그렇게 예수에 대해서 가르치는 이유. 그리고 우리는 뭐라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지만 새사람이 된다고 이야기 하는 이유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2. 희생 제물로 죽으심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두 번째 이유가 있는데, 다음 시간에 해야 되겠네요.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희생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 전가를 받아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여야 했는데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죽으실 수 없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죽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죽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뿐이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향해서 까지도 그러한 진노를 퍼부으셨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 안에서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지만, 신적인 인격 안에서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친밀함을 누리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시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이 재물이 되셔야 했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재물만 되셨다면, 그 재물을 바칠 누군가가 필요하죠. 그게 바로 대제사장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면 대제사장은 제물보다 훨씬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 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의 실현으로써 당신 자신이 제물로 죽으시지만, 독특한 방식으로 죽으시는데 당신 자신이 헌제자이시면서 스스로 당신 자신이 제물이 되신 그런 종류의 죽음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희생 제물로서의 죽으심을 단지 구약의 제물의 죽음과 연장선상에서만 보면 안 됩니다. 놀라운 것은 죽으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고 죽으신 그분의 육체는 제물이었고, 신적인 인격 안에서 당신 자신이 스스로 헌제자인 대제사장이 되어서 당신 자신을 신적인 인격 안에서 대제사장이 되어서 인간의 당신 자신의 인성의 육체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성의 육체 위에 하나님의 큰 진노가 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시기 위해서는 참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유령 같은 존재에서는 죽으실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목숨이 끊어지면 죽는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성경은 배운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배울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시잖아요. 그런데 인성으로서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성육신 하신 그 인성으로서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심을 인성아래 감추셔서 자연적인 방식으로 지식들을 습득해 가시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배우셨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시고 예수께서 아버지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인간의 육체 안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그 생생한 죽음의 지식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저는 너무 조잡한 학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참 헤아릴 수 없는 탁월한 방법임을 알았습니다.
(찬양)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렇게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낮고 천한 자들 가운데 계시면서, 하나님이시면서 종처럼 섬기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성육신의 생애가 우리의 마음속에 확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난한 자를 위하여 적선을 베푼 선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병든 자를 위해서 인수를 베풀어 주신 의사가 많이 있지만 우리는 병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할 때처럼 그렇게 감격하고 눈물 흘리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인정일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섬김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으로 우리를 아무리 위협하셔도 두려워 떨지 않던 꺾어질 줄 모르던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IV. 결론
교회를 세운지 17년이 지났지만, 나에게는 변함없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이 아무리 예전에 생애적인 은혜를 체험했어도 그것으로서 오늘 성화의 생활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안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순종하게 되고, 그분을 섬기게 되고 그분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참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7.성육신의 영광과 구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저는 지난 시간에 앞부분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하나님 계시의 최고의 영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성육신의 영광과 구원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II. 성육신의 영광과 구원
A. 성육신과 하나님의 영광
우선 먼저 성육신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니까 사도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렇게 큰 영광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왕의 가문도 아니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더욱이 이 가난한 목수 부부가 호적을 하러 가다가 잠깐 들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아서 구유에 누였습니다. 그런데 그 구유라고 하는 것이 통나무를 사다가 깎아 파서 밥그릇처럼 만든 것인데 옛날의 구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 가보고 나서 나무로 만든 한국 구유에 아이를 눕혀 놓은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짐승들이 있는 한쪽에서 바위 같은 것을 파서 거기에 짐승들의 먹을 것을 준 것이었습니다. 사실 밥그릇도 서양과 동양이 다른데 말 밥그릇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거기는 돌그릇입니다. 그곳은 돌천지인 나라여서 석회석을 파서 거기에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돼지 밥통 같은 곳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쨌든 짐승의 밥그릇 아닙니까? 거기에 아이가 강보에 싸여 누였다 했는데 가난한 집안의 옷감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그냥 험한 광목에 싸서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냥 사람으로 오신 분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연한 순과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아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때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라고 하는 것은 이미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눈으로 보니까 성육신 하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더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눈이 아니면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안 보이고 로고스가 사르크스 몸을 입었더라 혹은 살코기가 되었더라 육신이 되었더라 라고 했을 때 우리의 눈에 로고스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르크스 다음에 육신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육신을 보면서 비로소 로고스를 깨닫게 된 사람들은 신앙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중간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눈으로 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을 방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겠죠? 말구유에 태어 나셔서 거친 강보에 싸여서 예수님이 참 사랑이었으니까 어린 아이의 성장과정을 죄는 없으신 분이었지만 다 거짓이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보면서 이 사람이 특별한 분일까? 더욱이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라셨는데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것이 없다 라고 까지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목사님이 이렇게 교회 생활을 하라고 가르쳐 주었더니 교인들이 말을 안 듣더랍니다. 그래서 내가 가르쳐 주었는데 말을 안 듣냐고 했더니 목사님 안 계실 때에 강사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특강을 해 주셨는데 반대로 이야기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도 화가 나서 나도 다른 교회에 가면 강사인데...
그러니까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자라온 과정을 모두 보았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그렇게 쉽게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자라서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자라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교회를 다녔는데 얼마나 개구지게 장난을 했는지 옥상에 물이 끊어지면 거기에서 물이 나오는 비상 물통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친구들하고 들어가서 수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추우니까 옥상에 팬티 바람으로 올라가서 누워서 햇빛에 몸을 말리고 있는데 교회 장로님들께 혼을 내셨는데, 이런 성장의 과정을 다 지켜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나중에 그 교회의 목사님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목사가 되어 그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장로님 권사님들이 전부 다 활짝 웃으시면서 좋아 하는데 그것이 목사로서 좋아 하는 것이 아니라 애기처럼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동안은 없을 때에 아무개 아무개 하고 자기 이름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 사실은 그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을 보게 하는데 방해가 많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도 육신의 눈으로 보면 전혀 로고스이신 것도 알 수 없고 더욱이 그렇게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없이 예수님의 지상생애를 보면서 오히려 사람들이 걸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는 주님이 눈에 보이는 것이 신앙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었는데 그 생생한 사람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병든자를 고치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그들을 돌보시는 그 모든 성육신으로서의 삶을 통해서 주님이 깊이 이해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볼 때 많은 의문이 떠오를 것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사셨기 때문에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데 도움이 되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반복하는 말로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듣기만 하였는데 참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셔서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했을때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오히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그 육신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B. 영광의 정체: 은혜와 진리
그러면 도대체 그 영광이라고 했는데 영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확 잡아 땡겨서 다른 것은 거의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영광의 효과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예화) 자! 이렇게 예를 들어 봅시다. 어둑어둑해 보이는 예배당에 들어 왔는데 갑자기 밝은 전구 하나가 확하고 센 빛으로 켜 졌습니다. 그러면 그 불빛이 없었을 때에는 어른어른하고 여러 가지 물건이 보였는데 그 불빛이 확하고 비취게 되면 갑자기 그 불빛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어두운 공간이 되어 버려서 그 불빛 하나만 안 보이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하게 됩니다. 밤거리를 달리다 라이트를 환하게 켠 마주 오는 차를 만나든지 할 때 그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영광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최상의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서 자기 인생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그 영광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는 그런 가치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구체적으로 오늘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충만한 은혜, 예수님께 충만한 진리 예수님은 은혜 그 자체였고 진리 그 자체였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영광이었다 라고 우리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생각해 보십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때 요한이 생각했을때 갓난아기로 구유에 누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지상세계를 염두해 두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을 것 같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광의 정체가 충만한 은혜와 진리 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은혜 다음에 진리 이 두 가지가 충만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독생자의 영광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원래 성자 이셨는데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인성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공유했던 영원한 성자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 시간 세계 속에 왔을 때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서 신앙의 눈이 아닌 불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기껏해야 랍비처럼 여겨졌고 선한 선생님처럼 여겨졌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분이 바로 독생하신 영원한 성자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 받아 들여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영광이셨는데 그 영광의 정체가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그에게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진리는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임과 동시에 아버지가 어떤 분이지를 아는 지식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아는데 있어서 지식의 원천이 되고 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는데 있어서도 예수님이 지식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됨으로서 이 지상에 있었던 인간 예수뿐 아니라 영원하신 성자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 까지도 알 수 있게끔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펼쳐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도록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시는 첫 번째 원천이고 진리는 두 번째 원천인데 이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를 그렇게 계속 살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예화) 저는 최근에 유도탄에 대해서 한번 자료를 보았습니다. 미사일인데 어마어마 합니다. 대륙에서 대륙으로 쏘는 유도탄은 인공위성을 쏘는 것처럼 대기권 밖으로 올려 버립니다. 대기권 안에서는 아무리 빨리 날라야 최고 기록을 세운 비행체가 미국에서 몇 년 전에 기록했는데 시속 8,000Km입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그런데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 버리고 나면 그 다음의 속도는 인공위성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날라 갑니다. 그래서 한 시간에 인공위성 같은 것은 거의 2시간 40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에 수만Km를 날아가는 어마어마한 속도를 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목표한 지점으로 다시 대기권으로 진입을 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유도탄의 원리는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그 속에 화약을 장전해서 계속 태우면서 폭탄에 실은 엄청나게 무거운 물체가 수천Km를 날라 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 기술이 있어야지만 유도탄을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쏜 것이 아무데나 떨어진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기들이 목표로 하는 지점에 오차 불과 몇 미터를 두고 정확하게 떨어질 때 그것이 훌륭한 유도탄입니다. 그러면 계속 날아가게 만드는 힘은 화약이고 그 다음에는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날아가게 만드는 것은 정보입니다. 그 두 기술이 합쳐질 때에 훌륭한 미사일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 하는 존재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 있음으로 세계를 창조하신 주님의 목적에 티끌만큼이나 이바지 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지점을 향해 날아가는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을 해 보면 두 가지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옳은 길인지를 알아도 힘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속으로는 원수를 사랑해야 해 그런데 원수도 아닌데 미운 것입니다. 그러면 옳은 것을 알아도 내가 그것을 할 수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내게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구선수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욕을 하지 않습니까?
(예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축구선수가 공을 모는데 좀 못했던 모양입니다. 관중에 있는 사람이 계속 뛰어 다니면서 바보 같이 그것도 못한다고 하니까 경기 중에 이 사람이 볼을 세우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이 자식 네가 내려와서 한번 해 보라고... 그래서 그 사람 징계 받았습니다. 중계방송이 다 되는데...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알아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해서 몰라서 못한 것도 많지만 아는데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 많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의 마음에 역사할 때 놀랍게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하고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화) 공부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집집마다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해서 시험에 많이 듭니다. 은혜를 유지하는데 시험거리가 많이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원래 머리가 없어서 아무리 시켜도 안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 시켜도 탁월하게 잘하는 아이들이 드문 것처럼 그 이이들도 드믑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이 무엇인가 감동을 받아서 아! 공부해야지 하면서 확하고 선한 의지가 솟아올라야 하는데 이것이 안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이것이 확하고 솟아올라야 합니다. 복습 한번 할까요?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무엇의 아름다움입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얼굴을 가지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러지 말고 못생겼어도 그냥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냥 참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누가 영혼이 아름답다 하니까 목사님!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목사님이 늘 데리고 계시고 우리는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장가를 갈래요.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자기들끼리 모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의 크기 입니까?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런 마음이 확 솟아나서 이 사람을 가득 채우고 있을때 그때 좋지 않습니까?
(예화) 생선 중에서 시사모라는 생선이 있습니다. 그 생선은 멸치보다 큰 생선인데 배 전체가 알인 생선 아시죠? 모르면 시장가서 한번 사 먹어 보십시오. 조그만한 데 배 전체가 알입니다. 그것을 먹을 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어쩌면 그렇게 알이 몸 전체에 거의 전부다가 내장도 없습니다. 알 밖에 없습니다. 꽁지부터 머리까지 알로 꽉 찼습니다. 그것을 먹으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도 선한 의지가 이렇게 가득 찼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예쁜 생선이 될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의지가 꽉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전에 말씀드렸듯이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때려서 죽였습니다. 왜 그랬냐고 했더니 공중전화에서 전화 오래 한다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안에 선한 의지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악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은혜를 받으면 일이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선한 의지를 주셔서 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힘이 솟겠지만 은혜와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로부터 아주 멀어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진리는 지식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진리가 기준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판단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면 교통사고 전문가들이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신호만 정확히 지키고 차선만 위반을 안 해도 대형사고는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고가 많이 나 봐야 쎄게 달려가서 앞차 들이 받는 것 밖에는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사고 나는 것을 보면 교차로에서 신호를 위반하거나 아니면 차선을 급변경하다가 뒷차 하고 들이 받는 차들... 똑바른 차선에서 똑바로 같은 차로 안에서 뒷차가 앞차를 박는 경우는 있어도 같은 차로를 달리고 있는 차에서는 대형사고가 많이 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 차로를 이탈할 때에 큰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차선과 같습니다. 이것이 없이 잔재주로 사는 사람들은 대형사고가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진리를 이탈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III. 결론
복이 있는 사람은 늘 이 진리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진리와 함께 진리를 기뻐하며 진리를 위하여 길을 걸어갑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들려 주셨고 삶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셔서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이 독생자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은혜와 진리를 시간과 공간속에서 둘을 엮어 가면서 찬란하게 펼쳐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깨우침을 받을 때에 우리에게는 없던 선한 의지를 은혜로 불러 일으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는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은혜를 매일매일 발견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 갈 수 있는 사람들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의 일생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우리의 의무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리고 세계를 알고 인간을 알고 나를 아는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복된 사실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탄을 기뻐하고 이 시간에도 주님의 지상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는 이유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주신 최고의 선물은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