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십자가
(2011년 설교모음)
기독교와 십자가 1 (2011.4.3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기독교와 십자가 2 (2011.4.10 주일오전설교)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기독교와 십자가 3 (2011.4.17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4. (2011. 04. 20. 수요예배)
1. 하나님의 일을 이룬 십자가(마15:21-23) 2011.4.3 주일오전 1
2. 다 이루신 십자가(요19:30) 2011.4.10 주일오전 9
3.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행2:36-37) 2011.4.17 주일오전 18
기독교와 십자가 5. (2011. 04. 22. 금요예배)
4. 구원의 십자가(눅23:43) 2011.4.20 수요예배 24
5. 포도주를 거절하신 예수님(마27:33-34) 2011.4.22 금요기도회 32
기독교와 십자가 6 (2011.4.24 주일오전설교)
6. 십자가와 부활(롬1:4) 2011.4.24 주일오전 36
7.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빌2:11-12) 2011.5.4 수요예배 43
기독교와 십자가 1
기독교와 십자가 1 (2011.4.3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2 (2011.4.10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3 (2011.4.17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4. (2011. 04. 20. 수요예배)
기독교와 십자가 5. (2011. 04. 22. 금요예배)
기독교와 십자가 6 (2011.4.24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7 (2011. 05. 04. 수요예배)
1.하나님의 일을 이룬 십자가
I. 본문의 배경
II. 최고의 신앙고백
A.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B.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치심
III. 최고의 책망 받음
A. 사단아 물러가라
B.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IV. 결론
2.다 이루신 십자가
I. 본문의 배경
II. 십자가로 달려온 구원역사
-천지창조와 인간을 지으심
A. 언약과 인간의 타락
B.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죽음을 유보하심
-메시아를 약속하심
III.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A. 오직 십자가에서 선언하심
B.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
IV. 십자가 아래서 살자
3.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의 구원 경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사람들
-마지막 날에 주실 은혜의 실현
-다윗 왕국과 하나님의 나라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이루는 통치
III.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심
A.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 되심
B.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
-인간의 손에 죽으심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
IV. 그대의 마음을 찌릅니까?
-우리가 어찌할꼬
-마음으로 회개함
4.구원의 십자가
I. 본문해설
II. 십자가에 배달린 두 강도들
III. 낙원으로 부르신 예수님
A. 공로 없이 믿음으로 부르심
B.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
IV. 그대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5.포도주를 거절하신 예수님
I. 본문해설
II. 십자가 형벌과 포도주의 관습
-경건한 부인들의 전통: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통을 기억치 아니하리라”(잠 31:6-7)
-대조;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도 다 하시고 하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III. 포도주를 거절하신 예수님
A. 잡히던 날 밤의 예언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 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8-29)
-나실인의 서원: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민 6:3-4)
B. 특별히 자신을 바치심
IV. 고통 없는 십자가는 없다
6.십자가와 부활
I. 본문해설
II.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중적 묘사
A. 인성에 관하여: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시고”(롬 1:3)
B. 신성에 관하여:
“거룩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됨”(롬 1:4)
III. 부활을 통해 드러난 십자가의 의미
A. 부활- 죽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1. 성결의 영(πνευμα ἁγιωσύνη)- 거룩함의 영, 곧 성령(聖靈)
2. 성령으로 다시 살리심
3. 하나님께 아들로 인정됨
4. 죽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B. 드러난 십자가의 의미
IV. 결론: 부활 신앙으로 살자
7.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I. 본문해설
II. 십자가 고난의 결과
A. 영광스러운 부활
B. 온 세계를 통치하심
III.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A. 예수를 시인함
B.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감
IV. 결론: 십자가의 삶
기독교와 십자가 1
기독교와 십자가 1 (2011.4.3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2 (2011.4.10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3 (2011.4.17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4. (2011. 04. 20. 수요예배)
기독교와 십자가 5. (2011. 04. 22. 금요예배)
기독교와 십자가 6 (2011.4.24 주일오전설교)
기독교와 십자가 7 (2011. 05. 04. 수요예배)
1.하나님의 일을 이룬 십자가
“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 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 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9:21-2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신앙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받은 사건,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신 이후로 이 시점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그냥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을 뿐이었지만 이 시점을 계기로 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점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공적인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시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중 아무도 교회에 가기만 하면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어디서나 정확하고 공정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신학자와 기독교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다른 하나님으로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고, 목회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 성도들은 예전에 기독교 신앙을 믿으려고 할 때에 그때에 마음에 가졌던 신앙의 동기와는 다른 동기를 가지고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삼자가 협력하여 점점 상황은 나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이 삼자가 모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인 성경의 계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정한 마음으로 여러분이 성경을 펼치고 읽어보십시오. 특별히 복음서부터 시작해서 신약을 천천히 읽어본다면 여러분은 그 성경 안에서 압도적인 주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의 약 1/4 이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사건들로 채워져 있고, 이후에 기록된 사도행전과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어떻게 전해졌고, 어떻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교회 안에서 어떻게 그것들이 받아들여지고 거절되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도들이 가르쳤던 도덕적인 삶은 바로 이러한 기독교의 십자가 진리에 토대를 둔 윤리적인 생활을 위한 권면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압도적으로 흐르는 십자가라고 하는 이 주제는 신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이 짐승을 희생하여 그 가죽을 벗겨 아담과 하와의 겉옷을 삼으신 그때로부터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희생의 제물이 필요하고 그것은 제사 속에 구체적인 형태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사람은 메시아의 고난을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함으로써 희미하게만 보이던 구약의 제사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보기를 원하셨던 그 모든 우리의 구원의 원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이러한 대속의 교리의 사상을 이미 하나님이 명백하게 보여주셨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는 과정을 통해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치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회적으로만 필요한 교리처럼 여기고 심지어 오늘 날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없이도 얼마든지 인간에게 구원이 가능하다고까지 말하는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진보적인 사람들은 구원이라고 말하는 그러한 모든 개념들, 우리가 영 죽을 죄에 빠져있고 하나님이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그런 종류의 구원은 계몽주의의 빛을 받지 못한 미몽의 어두운 사람들이 살아가던 그 모든 종교의 굴레들이고 이제 우리에게는 참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자율적인 힘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고까지 말하는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모습은 있지만 이러한 비진리들이 교회 안에 조차 가득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과 영적인 놀라운 은혜의 힘들이 교회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의 힘이고 은혜의 능력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독교의 장고한 역사를 지켜온 힘인 것입니다. 이 모든 거대한 기독교 사상의 구조물의 한복판에 그 골격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II. 최고의 신앙고백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에 보면 이 최고의 신앙 고백이 등장합니다. 원래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장소는 수많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와서 제사를 드리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던 그런 다신 숭배로 유명한 장소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에게 역사상 최고의 신앙고백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세 가지의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들을 내포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A.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첫째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는 이것은 원래 희랍어로 ‘크리스토스’라고 하는 말을 그냥 우리말로 음역을 한 것입니다. ‘크리스토스’라고 하는 이 명사는 ‘크리오’라고 하는 동사 즉, ‘붓다’라는 동사에서 온 피동 남성 단수명사입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마태가 이것을 기록하였을 때 이것을 말하거나 듣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림은 구약의 메시아의 그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라는 말을 당시 통용어인 희랍어로 옮긴 것이 그리스도스였기 때문입니다. ‘붓다’라는 의미를 가진 ‘맛사’의 피동 남성 분사 단수가 바로 메시야입니다.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나라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답게 운영해 나가기 위한 세 솥발과 같은 하나님이 정하신 직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기 위해서 주님이 세우신 직분이었습니다. 둘째,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시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세우신 그 율법을 그 시대에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살아야할지를 가르치는 말씀의 전달자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제사장은 죄 지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겠는데 어떻게 죄 있는 백성들이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지를 보여주고 또 그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이었습니다. 각각 다른 일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만 세 솥발처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유지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귀한 다스림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 솥발과 같은 삼직은 마지막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그림 안에서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도 바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모든 기능들을 통합한 신적인 존재로서의 메시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에서 우리에게 예언하였던 이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가슴에 새겨두셔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메시아 사상이었는데 당시 유대교를 신봉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메시야는 이제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는 육적인 왕국의 껍질을 깨뜨리고 영적으로 왕국을 이루실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서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육적 이스라엘이 영원히 번영하고 강력한 나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이 통치할 때에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던 것처럼 메시야가 오시면 이방의 모든 침략을 막아줄 것이고, 탁월한 지혜와 지도력 그리고 기적을 베푸는 놀라운 신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최강의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하는 왜곡된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핍박을 받으신 것은 기적의 떡을 베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여주셨거나 혹은 병든 자를 고쳐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당신 자신이 메시야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꿈꾸고 기대하던 메시야처럼 행동하지는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이스라엘 육적 왕국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라고 고백을 했을 때도 그 고백은 참 맞는 고백이었고 아름다운 고백이었지만 고백하는 이 베드로 속에도 이미 잘못된 메시야 사상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는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이 신앙의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잘못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라고 고백했지만 우리는 바로 알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라고 고백할 수가 있게 된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하늘로 물러가 상관하지 않으시는 완전히 세계와 단절된 신이 아니라 또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되 법칙까지 만들어 놓으셔서 법칙만으로 이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런 종류의 철학적인 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 모든 인간의 삶 속에 오셔서 당신의 은혜와 능력과 자비와 아름다운 모든 속성을 보여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의 인생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그렇게 우리 안에 역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신다는 신앙의 고백, 거기에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리고 시련과 핍박을 견딜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와 같은 동일한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으나 사람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입니다. 본질상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가 그렇게 연약한 그리스도의 육신 너머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자라는 사실을 고백했다고 하는 것은 아주 놀라운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아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의 이 신앙의 고백은 아주 훌륭하고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아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바로 이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약의 교회를 세우기로 한 예언이 바로 베드로의 이 훌륭한 신앙의 고백이 있고 난 직후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가 이 세상에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하는 동안에 영영토록 그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기독교 성립의 기본 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모든 영적인 지체들은 바로 이 고백을 통하여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교회에 들어온 영적인 지체들은 이 신앙의 고백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 신앙의 고백을 체험하는 가운데 견고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견고한 신앙의 고백의 의미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이 의미가 완전히 우주적으로 성취되는 영광스런 전망을 바라보며 사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모든 강함과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형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신앙의 고백들이 사라져 버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자랑하는 그 일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근본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모든 사람들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다다를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모든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난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이것이 신앙의 길로 들어오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B.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치심
그래서 신앙생활 전체는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이며 그 분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 있고 난 직후에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전에도 당신의 고난에 관해서 가르치셨지만 구체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신앙의 고백이 있고 난 후에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미움을 당하여 모함을 받으실 것과 그리고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배반을 당하고 죽을 것을 말씀하심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그려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모든 고난의 가르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도록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이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말입니다. 단순히 제자들에게 ‘내가 죽더라도 놀라지 말라 내가 죽더라도 너희들은 잘해야 된다’ 라는 격려의 차원에서 죽음을 예고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루실 일들을 십자가에서 이루셨는데 그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증인이 되어서 이것을 대대에 전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그리하신 것입니다.
III. 최고의 책망 받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 죽으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당신을 고난당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내 한 몸을 던져 당신을 보호해 드릴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고백은 훌륭한 것이었지만 베드로도 그 신앙고백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사단아 물러가라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은 왜 베드로가 자기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한 이 고백을 칭찬하신 것일까요? 어차피 이 고백의 의미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성령이 오셔야지만 우리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실 수 있는 진리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고백을 기뻐하시고 그 고백의 내용을 충만하게 임하실 오순절 성령을 통하여 이 고백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험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함으로써 막아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책망을 내리셨습니다. 최고의 신앙고백 이후에 그는 즉시 최고의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치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돌아보더라도 자기의 제자들 혹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진노하여 책망하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윌리암 헨드릭슨이라고 하는 주석가는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사단의 계략은 아주 집요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루시지 못하도록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의 마음속에 역사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말도록 유혹한 것이다’ 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물론 사단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구체적으로 몰랐던 것 같습니다.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이 베드로의 마음에까지 역사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려고 하는 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또 어떤 주석가들은 실제로 사단이 베드로에게 역사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베드로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위하는 이 생각이 사단에게 도움을 주는 생각이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나는 이 해석이 아주 어울리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고 책망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듣기를 원하셨던 대상은 사단이라기보다는 사실 베드로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사람의 일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은 소중한 분이시니 내가 예수님을 위해 대신 고난을 받더라도 주님은 오래 사셔야 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오래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너무나 분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죽으시기 위해서는 희생 제물이셔야 했고, 희생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는 충분히 성숙하셔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30세가 될 때까지 공생애에 등장하지 아니하고 사적인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십자가 고난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동안에 우리에게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속성들을 당신 자신의 인격과 삶,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였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치열하게 희생적인 생애를 사셨다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하셨다면 그 분은 우리의 메시아일 수도 없고 그 분이 우리의 구원의 이유가 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 사건은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바로 그 마지막 당신 자신을 바쳐 이 세상의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대업을 이룰 순간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으시지 말라고 앞길을 가로막았을 때에 이것은 사단에게 도움을 주는 생각이었기에 예수님은 준엄하게 책망을 하고 당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도대체 기독교에 있어서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이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대가를 치를 수 없는 무한한 죄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도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한 분량의 죄를 지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아름다운 세계는 죄가 물밀듯 들어와서 이 모든 세상을 망가뜨려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창조세계에 가득했던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하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서 영적인 모든 생명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미워하며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연과의 관계가 깨뜨려졌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야 할 인간이 자연의 지배를 받는 비참하고 왜소한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내버려 두셨더라면 인간이 영원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고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토록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을 주기로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의 자원뿐 아니라 영혼의 자원입니다. 육체는 이 세상의 것들로 먹고 입고 마시며 소비하면서 생명을 유지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서 그래서 허무하게 육체가 움직이는 데로 고통을 받으며 주님이 인간을 원래 창조하셨던 목적으로 한 번도 돌아가 보지 못하고 행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모진 반역이 되어서 이후에 받을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를 쌓아가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눈뜨게 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지, 왜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나신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 위에 기독교의 터를 세우기를 원했는지를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될 때에 우리의 영혼에 육체를 장악하고 영혼이 주인 노릇할 수 있는 영적인 생명들이 충만하게 부어지게 되고 그리고 비로소 망가진 이 세상에서 조각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이으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합일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리 떠나 불행과 궁핍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부요와 생명으로 다시 불러내시는데 그 길이 오직 단 하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와는 신학적인 입장이 다르지만 20세기에 칼 바르트라고 하는 거대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건너가서 그는 자신의 신학을 열심히 강의하였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이 강의 끝난 후에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바르트 교수님 그러면 당신의 그 신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노 신학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대답대신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양)
예수 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누가 나더러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찬송대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베드로의 이 신앙의 고백을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실현하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시 한 번 신앙의 정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 믿고 어떻게 성공을 하고, 예수 믿고 어떻게 번영을 누리고, 예수 믿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을지를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복을 받고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번영주의는 복음의 이름은 가졌지만 사실은 쓰레기입니다. 우리는 이 쓰레기의 복음을 혐오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복음의 핵심이고 세월이 많이 흘러도 하나님은 언제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셨고 기독교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더 많이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고 그리스도를 위해 더 많이 희생한다는 것 말고 무슨 의미 있겠습니까? 영적인 깊이가 더해진다는 것은 어렸을 때는 잘 몰랐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비춰오는 찬란한 무지개 빛깔과 같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속성을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말고 무슨 의미를 가진 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인간의 풍조가 바뀌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바뀌는 세상의 풍조를 가지고 우리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말씀해 주지 않았습니다.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언제나 서 있어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억하십시요. 십자가가 작아 보이면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세상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크게 보일 때 세상은 작아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이긴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격에 다시 한 번 굳게 붙들려 그 십자가 아래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체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몹쓸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보면서 그 몹쓸 죄인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용서하고 자기의 아들은 징계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묻고 우리에게 지워주신 우리의 삶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 끝 날까지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2.다 이루신 십자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시는 광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는데 마지막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가 만약에 개인적인 기도였다면 ‘다 이루었다’ 하는 이 기도는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기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마지막 생명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 이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은 무엇을 이루셨다는 것이고,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십자가로 달려온 구원역사
먼저 우리가 이 뜻 깊은 성경 구절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여기에 있기까지 달려왔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이 두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세계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영적인 피조물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졌다면 지상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을 창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밀접한 영적인 연관을 가지면서 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부리며 직접 다스렸지만 이 세계는 인간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뜻과 생각을 따라서 가꾸고 돌볼 왕과 같은 대리자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인간은 아주 독특하게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영혼을 주심으로써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교제하고 아래로는 이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하셨으며 옆으로는 자기와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들과 서로 알고 사랑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 당신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흔적들을 남기셨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크고 작은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연결을 이루면서 하나님 창조주의 큰 영광의 찬란한 빛을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러한 모든 이 세상에 가득한 찬란한 영광의 빛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들어오는 그 중요한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A. 언약과 인간의 타락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한 분께 복종하고 이 모든 피조물의 왕과 같이 통치하는 그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범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죄를 지음으로서 하나님 한 분의 다스림을 받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타락한 것입니다. 이러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순간에 이 세상에는 죄가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왔고 온 창조의 세계를 뒤덮어 버렸습니다. 이 세계 안에 가득하던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거두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는 완전한 어두움과 그리고 타락의 폐해들이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영적인 생명을 더 이상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져 사랑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내야할 인간관계들이 미움과 원망과 복수심과 살인으로 가득 찬 그런 불행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은 본래 인간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었으나 타락한 이후 이 자연의 세계와의 관계도 끊어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에게 복종할 이 세상에 오히려 지배를 받으며 복종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고, 심지어는 이 자연을 신처럼 떠받들어 섬기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지만 모든 관계가 끊어진 채 인간은 고립한 존재가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서 그는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인생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자원들을 상실한 체 살아가도록 되었던 것입니다.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신 아닌 것이 복종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이 불행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B.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타락한 인간을 차마 그냥 버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당연한 결과였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이 인간들을 버릴 수 없게 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향해 아주 특별한 당신의 은총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지만 인간들은 하나님께 도전하듯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결과대로라면 그는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하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이 타락한 즉시, 두 가지 놀라운 은총을 베푸심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없어지지 않도록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육체의 죽음을 유보하신 것이었습니다. 범죄 하는 즉시 그의 영혼은 죽었습니다마는 육체의 생명은 하나님이 즉시 거두시지 않으시고 죽음을 유보하심으로 이 땅에 씨를 뿌리게 하셨고 그리하여 자손들이 대를 이으며 자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즉시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발뒤꿈치를 물리라’는 이 예언은 명백하게 여자의 후손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즉시에 이루어진 약속이고, 예수님께서는 벌거벗은 그들을 짐승의 가죽 옷을 입혀 추위와 부끄러움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들을 하나님의 의로 덧입힐 때에 속죄의 재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로 여자들은 하나님의 이 언약을 따라서 자기의 몸에서 태어나는 그 아이가 바로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태어날 메시야일지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아이를 낳았고 경건한 사람들 속에서 이 소망은 이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고 난 후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여호와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도다’라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에 부모는 그 아이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는데 그 노아의 이름은 ‘여호와로 말미암는 쉼’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메시야 사상은 점점이 이어졌고 그 후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선지자들은 때로는 분명하게, 때로는 덜 분명하게 메시야의 출현을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년 전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메시야를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이 약속의 예언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언약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33년 동안의 생애를 사셨고 그 중 3년 동안의 생애는 개인의 삶을 떠나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공적인 생애에 바쳐진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셨다는 것을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III.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A. 오직 십자가에서 선언하심
예수님은 오직 단 한번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말씀하신 곳은 오직 십자가 한 곳 뿐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오직 단 한 번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십자가의 죽음보다도 더 찬란한 영광이 깃들여 있는 발자취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아나게 하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먹였을 그때에 사람들은 열렬하게 환호하였고 예수를 임금 삼고자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때에도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인파에 에워 쌓여 호산나 찬양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들어서시던 그때에도 예수님은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죄인의 몸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여 마지막 절명하시는 그 순간에 예수님은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나 우리처럼 죄는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여야 할 이유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죄는 없으셨으나 죄인들이 죄로 말미암아 겪는 그 모든 악과 고통의 증상들을 주님이 당신 바깥에서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생애를 사셨으니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 받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그리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을 이 세상에 사시면서 온갖 멸시와 치욕을 받으시고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처럼 대접을 받으시는 일이 없이 노예처럼 하인처럼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섬기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마치 자신을 남을 위해 모두 주기 위해 오신 생애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었지만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고독이 그 분의 친구였고 병든 자들은 그의 이웃이었고, 고통 받고 귀신들린 자들은 그 분의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온전히 그 인간들을 위해 주심으로서 헌신적인 긍휼과 봉사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생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들을 향해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빛이 되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의 인격과 말과 삶을 통해 비취는 찬란한 은혜의 빛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 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눈부신 불빛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이렇게 사시면서 당신 자신은 죄가 없으셨지만 인성 안에서 순종을 배워가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차마 사람의 몸을 입기 전까지는 아실 수 없었던 그 죄로 말미암는 인간의 모든 경험적인 지식을 체득하셨던 것입니다. 그럴수록 주님의 마음에는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지셨고, 그래서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속죄의 재물로 아버지께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의 헌데를 어루만져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고 버림받은 자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그 모든 순간에도 사람들이 위로를 얻었으나 그 모든 은혜로운 사건들은 한 지점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부터 계속 기침이 나고 이렇게 자꾸 눈이 감기고 콧물이 나와요. 무슨 일이 제 몸에서 일어난 걸까요? 감기가 걸린 거죠. X-ray를 찍어보고 MRI를 찍어도 내 몸에 감기가 들렸다는 흔적을 찾아낼 수는 없어요. 볼 수 없어도 감기 들린 것을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독특한 감기의 증상이 몸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그 많은 끔찍한 고통과 악들, 괴로움과 많은 시련들은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자신이 그 죄 아래 살아가기 때문에 겪는 증후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를 고쳐주셨지만 그는 또 다시 병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린 자에게 기적의 떡을 먹이셨지만 그는 소화되고 나면 다시 배고플 사람이었고 그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당하여야 하는 이 모든 질병의 증상을 증상이 아니라 근원부터 치료할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그 구원의 방법이 바로 당신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구속이라고 부르고 바로 이 구속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을 구속하실 모든 근거들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주님은 마지막에 죽으시는 그 순간에 ‘다 이루었도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B.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
이 구속은 값을 주고 산다는 뜻인데 두 가지로부터 이 구속을 가르칩니다. 첫 번째는 율법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율법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있고 그 돌판에 새겨진 율법 말고 우리의 양심에 새겨진 율법도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이 두 율법이 완전하게 일치하였으나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마음의 율법이 희미해지기 시작해서 돌판의 율법을 두 눈으로 똑바로 지켜보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율법을 어긴 가책도 느끼지 않는 화인 맞은 인간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율법의 정죄하는 기능을 따라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나쁘기 때문에 우리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올바르신 하나님을 우리가 거스렸기 때문에 정당한 저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렇게 죄 없는 몸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죄 없을 때 지었던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리고 그 대신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심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율법의 저주를 모두 성취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낼 모든 필요한 일들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를 모든 의식적인 율법으로부터 구속해 내는 일을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들이 완전히 하나님이 없다면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일부 인간들에게 제사의 제도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의식을 따라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써 잠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모든 의식적인 율법과 제사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여 옥체를 찢으심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었던 휘장을 갈라 놓으셨고,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그 휘장도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자신의 공로인 신발과 같은 인간의 의를 벗어버린 자, 보좌에 이르는 피 뿌린 새롭고 산길을 걸어 휘장을 지나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모든 죄인들이 주님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시고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또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행위의 율법을 따라서 구원받을 필요가 없도록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받아 들여질만한 인간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그렇게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힘으로는 공로를 얻을 수 없다는 패배적인 결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완전히 감당하고 우리를 위한 죄 값을 모두 치러주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제는 자신의 의가 아니라 넝마와 같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의 공로를 보고 구원해 주실 수 있도록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일들을 이루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구속하심으로서 다시는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정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모든 그 후손인 사람들은 두 가지 면에서 죄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신분과 지위 면에서 그는 죄인으로 태어나 그리고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예라고 등에 인친 노예의 표는 비누로 씻어도 물로 닦아도 지워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죄인이라고 낙인 찍혔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죄의 종살이로부터 건져낼 어떤 희망도 없는 영속하는 신분이었고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로 신분을 바꿔 주셨고 아버지의 집에서 모든 것을 유업으로 누릴 수 있는 상속자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죄인은 마음의 상태와 영혼이 죄의 사슬에 얽매여 있어서 이따금씩 자신이 의롭게 살고자 하여도 마음 안에 강력하게 잡아끄는 죄의 얽매임 때문에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였습니다. 마치 물 위에 떠오르려고 몸부림치지마는 그러나 몸에 커다란 돌멩이를 묶어 바다에 가라앉게 하는 무게처럼 이 모든 죄의 법이 그의 영혼과 마음을 칭칭 감아 사로잡아 도저히 선한 것을 선택하나 그 선택한 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속에서 도저히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얽어맨 이 모든 죄와 사슬에서 우리를 끌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필요한 일들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셨기 때문에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외치는 그 순간에도 병든 자들은 그 땅에 많이 있었고 눈멀고 아직까지도 고침을 받지 못한 문둥병자들도 더 많이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해 주님이 설교해 주셔야할 영혼들도 많이 남아있고 다시 한 번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여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굶주린 백성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또 당신이 이 십자가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저주를 한 몸에 받으시고 죽고 나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못하고 가신 그 일들의 뒤를 이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회심한 성도들이고 또 여러분 중 상당히 많은 성도들은 이 교회에서 회심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맨 처음 회심하였을 때 혹은 회심의 은혜가 새로워져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찬란한 복음의 빛이 여러분의 영혼을 두루 덮었을 때에 그때에 여러분은 어떠했습니까? 아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인생 중 알아야할 많은 진리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십자가 하나가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그 찬란한 빛은 다른 많은 것들에게 빛을 비추는 광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러면서 어린 아이처럼 이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십자가의 빛이 없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아서 우리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았던 지난날들이 서러워서 울었고, 이렇게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살았던 우리의 죄과 때문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에서 두 손을 모으고 다짐했습니다.
(찬양)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의 사랑 안에 주님과 우리의 형제들과 하나 되어 이 땅에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살도록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설교자만 받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셔서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매달렸는데 사실은 매달릴 사람들은 여러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며 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의 의미에 감격하는 성도들은 마지막 남은 소원이 예수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몸부림 치고 살아가는 쓰레기 같은 일들이 주님이 만약에 오늘 밤에 오신다면 내일도 계속해야 할 일들일까요? 삶의 질서와 섬김의 순서가 뒤바뀐 가운데 십자가를 묵상하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주님을 공경하기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에는 자신의 영광을 찾기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불탔던 회심의 불길은 식어 연기가 나고 그리고 여러분의 뜨거웠던 마음속에는 시베리아보다도 더 차가운 얼음이 얼어있지 않습니까? 오늘날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마치 돌 가슴 철 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인해 기뻐할 줄도 모르고 주님으로 인해 가슴 아파할지 모르고 주님을 인하여 희생할 줄 모르는 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죠. 골난 사람처럼 예배당에 왔다가 화난 사람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반복하는 예배생활 속에서 여러분의 영혼은 쓰레기더미를 구르는 그런 처지가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멸시와 욕을 당하신 그 큰 고난으로 여러분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분을 위해 무얼 하셨습니까? 아니 그건 그만두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 하기는 하는 사람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했더니 자신을 믿는 사람들, 주님을 섬기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불렀더니 십자가 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예수는 죽으셨으니 더 죽으시고 나 좀 살려달라는 신앙, 이게 과연 피 묻은 복음이 가르쳐 주는 신앙일까요? 눈만 뜨면 눈을 감는 밤까지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몸부림쳐도 발길이 닿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이 우리의 목이 메이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서 잠시 후 우리 주님을 어떻게 뵈오시렵니까?
우리 노회에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수십 년을 목회를 하시고 은퇴를 얼마 안 남겨놓으셨을 때의 일이었답니다. 노인네가 밤에 주무시는데 꿈에 선명하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셔서 얼굴 위로 붉은 피가 한없이 흘러내리는 고난의 형상이 총 천연색으로 비취더랍니다. 그러고는 당신을 한참 바라보시더래요. 너무나 놀라서 깨보니까 새벽 두 신가 몇 시더래요.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 목사님이 그 새벽에 예배당에를 가셨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대요. 근데 은퇴하셨잖아요. 항상 섬길 기회가 주어지는 것 아닙니다. 술 먹고 살인하고 바람피고 남의 돈을 훔쳐야지만 발악이 아닙니다. 가슴에 이렇게 생생하던 십자가의 은혜!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IV. 십자가 아래서 살자
이 십자가 아래서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이 마음이 사라진 것, 그게 타락입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지막 남은 소원이 있다면 우리의 인생의 날수가 더하여지고 우리의 얼굴에는 골이 패이고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늘어가고 검은 머리는 하얗게 변할지라도 인생의 마지막 죽음의 종소리가 들려올 때에도 노령의 몸을 이끌고 어린 아이처럼
(찬양)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렇게 사도바울처럼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신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세월이 많이 변했어도 언제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만큼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한번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 보십시오. 위선과 거짓의 껍질을 다 벗고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인지 한 번 마음으로 말해보십시오. 그리고 살아있다고 일컫는 이 날 동안에 놀지 말고 쉬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예수위해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서 넘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6-3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직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강력하게 임한 성령은 사람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핍박의 두려움에 떨던 작은 무리들을 담대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갖고 있었고 그것은 설교로 나타났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해 주듯이 성령의 강한 역사는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언의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서 모여왔고 모인 이 사람들이 바로 그 오순절 날 각각 자기 나라의 말로 방언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방언은 오늘 여러분이 받은 방언하고는 차원이나 정도가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말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오늘 일상적인 방언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심리학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비교될 수 없는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구원 경륜
이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다고 성경이 기록하는데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바로 자신들도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방언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방언의 역사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고 나서 공중에게 첫 번째 보여주신 이적이 바로 방언이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신학적으로 창세기 10장과 연결하여 생각하셔야 합니다. 창세기 10장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서 살았고 그들은 하늘 꼭대기까지 이를 수 있는 높은 탑을 쌓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 높은 탑을 쌓는 것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 탑을 보면서 그 탑 아래로 모이자고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 닿을 탑을 쌓아 우리가 흩어지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커다란 반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시도록 창조하셨고 이 세계 구석구석까지 흩어져 살아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도록 인류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벨에 저주를 내리셨고 이로 인하여 일시에 사람들이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통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작은 집단을 이루게 되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점점 떨어져 살게 되어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력한 간섭으로 온 지면에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이때 내린 혀의 저주를 풀어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에 있어 기적적인 방언을 주셔서 여전히 갈라진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일시에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언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큰일 곧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구원경륜에 관하여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교가 다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방언을 말하게 하셔서 선교의 목적으로 사용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방언을 해서 선교를 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거니와 당시는 로마제국 시대였는데 온 제국의 공용어로서 꼬인의 헬라어가 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시대의 평민들이 사용하던 이 언어는 쉽고 표현이 정확해서 제국 전체를 다녀도 불편이 없도록 교육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도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역사적인 왕국이 다름이 아닌 다윗 왕국이었습니다. 다윗시대에 하나님이 그 나라를 복 주셔서 다윗은 훌륭한 임금이 되었고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나라는 부강했으며 주변에 있는 작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 왕국의 시대가 재연되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예수님이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을 때 바로 그 사람이 그런 다윗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오신 유대인의 메시아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방법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해 주지 않자 기대는 미움으로 바뀌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예수님이 약속하심 바와 같이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 후에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주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이젠 그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모든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통치하는 그러한 일들을 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렇게 성령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첫 번째 임재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너희는 예전에 나와 같이 지상 다윗의 나라의 재건을 꿈꾸고 있지만 사실 그 다윗의 나라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은 그보다 더 훌륭한 영적인 나라’라고 하는 것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다윗이 다스리다 죽었지만 이 나라를 다스리는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그 선포를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그 사람들이 흩어졌던 이들이 이제는 하나로 모여 한 주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그 분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임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마지막 이 설교에 귀결을 지었던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 위대한 구원의 경륜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III.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심
A.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오늘 여기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만약에 부활하신 후에 사도 베드로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면 그러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는 주와 그리스도가 아니셨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대답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셨고 그리스도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주셨고, 또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 곧 그리스도로 등극하신 것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주요 그리스도셨지만 그것을 감추시고 겸손한 종처럼 우리를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이후에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주 그리스도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앞에 무릎을 꿇어 복종하여 주로 시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하늘에 오르셔서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을 대신해 이 모든 세계를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는 사실상 성부의 대리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주’라는 말이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 바로 그 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연결되면서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고 아버지께로부터 왕권을 위임받아 이 모든 세계에 여호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시고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셔서 우리의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역사하사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시고 사람 안에 있던 죄와 사망의 법은 무너뜨려 버리시는 위대하고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B.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바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 지상에 있는 불쌍한 인류에게 쏟아지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죄 짓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있었건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심으로 저주는 당신이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를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후 하늘나라 영적인, 공중의 영적인 권세는 마귀에게 넘겨져 버렸고 그리고 이 세상은 죽음이라는 카드를 가지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면서 이 모든 인류를 죄로 지배하고 통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모르고 주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는데도 주님을 미워하고 순종하고 하나님께 선을 행하도록 지음 받았는데도 죄 짓고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그렇게 마귀의 사주를 받으며 주님을 거역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알던 자들이었습니다. 내버려 두시면 영원히 그런 비참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일생을 사시면서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그 분의 인격과 가르침, 삶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무한하고 큰 사랑을 알게 해 주시고 일생동안 우리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공중 권세 잡았던 자들의 마귀의 권세의 구멍이 뚫리고 어두움을 가르는 찬란한 진리의 빛이 들어왔고 죄악으로 가득찬 그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물밀듯 밀려왔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했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도입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고 이로 말미암아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시 열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곧 영생이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IV. 그대의 마음을 찌릅니까?
이러한 복음의 사실을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 하였을 그때에 그들은 마음에 깊이 찔렸습니다. 그리고는 교만하기 짝이 없던 유대인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형제들아 그러면 우리가 어찌해야 할꼬’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분의 죽음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대들의 마음을 찌르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언젠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마음에 찔렸던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에 깊이 찔림을 받고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요.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손에 피를 묻힌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복음을 좋아한다는 사람들도 가슴을 벌리고 감동부터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감동은 명확한 지식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그야말로 감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찔림은 양심의 찔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드러났고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이 모든 구속의 경륜을 듣고 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었고, 그 손에 못 박았을 때 그 자신들이 죽인 것은 바로 자신들 속에 하나님이 주시려는 생명을 죽인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은 명백했고 양심은 아무리 숨을 곳을 찾아도 허허벌판에서 피할 곳을 찾는 한 마리의 짐승처럼 찬란한 양심의 빛 앞에 숨을 곳이 없이 부끄럽게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찔렸던 것입니다.
(찬양)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오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한때 여러분도 그렇게 떨리는 찔림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와 관계없는 것이 보이는 동안 우리는 주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변명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도록 너 때문에 예수가 죽였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채찍질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붙은 우리의 욕심이 헛된 줄 알고 버리게 됩니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대할 때마다 할 말을 잊고 이렇게 깊은 찔림을 경험하는 것은 거룩하고 위대한 성도의 본분이 아니라 기본적인 자격 조건입니다. 자기가 누구였는지 모르는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이 벌레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러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힘으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죄악은 쓰나미같이 밀려오고 세상의 풍조에 도전하는 자들마다 외롭게 되고 버림을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성도다운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한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생각으로 짓는 죄를 위해 가시관을 쓰신 주님의 머리에 낭자한 피와 그릇된 사랑으로 주님을 버리고 세상에 속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창에 허리 상하신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 없이 살다가는 주님의 그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에 우리도 마음에 큰 찔림을 받으며 우리의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십자가 은혜의 날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진작 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수시로 묵상할 때나 기도할 때나 찬송을 부를 때나 여러분의 마음을 찔러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부당한 일이었고 내가 구원 받은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여러분 속에 지금도 있어서 오늘도 찔리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우리 교회가 교회 큰 일군들을 뽑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뽑아야 할지 오늘 오후부터 제가 설교를 하겠지만 빼놓지 말아야 될 중요한 조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찔리는 사람들을 뽑아야 합니다. 모자란 것 같아도 주님의 말씀에 늘 찔릴 줄 아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은 못나도 내일은 고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좋아도 일 잘해도 찔림이 없는 사람들은 뽑지 마십시오. 지금 잘하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꼭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베드로가 외치며 열한 사도와 함께 설교하고 에워싼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리가 어찌해야 할꼬’ 하면서 가슴에 깊이 가책을 받는 이 광경을 생각합니다. 소위 영성을 찾고 싶다는 미명아래 가슴팍을 벌리고 감동부터 받겠다고 덤벼드는 오늘날의 일부 교인들의 경박함에 비하면 얼마나 진지합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반성해 보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을 때 참 잘 찔렸어요. 언제 성경을 읽어도 나를 보고 쓰신 말씀 같고 설교를 들어도 마치 저 설교자가 한 주일동안의 내 삶을 다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는데 그때만 그런 게 아니라 늘 그랬어요. 근데 그때에 성령의 은혜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찔림을 받은 거죠. 은혜는 반드시 찔림을 통해 옵니다. 그래서 어느 영국 청교도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복음의 아름다운 색실로 우리의 마음을 꿰맬 때 하나님은 율법의 바늘에 그 실을 꿰신다’ 그랬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뉘우치는 역사가 있는 그 곳에서 찢어진 마음들이 복음의 실로 꼬매어 지는 거예요. 쭉 꼬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오늘 이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이 말씀은 바늘이라고 표시하기에는 너무나 미안할 정도로 큰 창과 같은 찔림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된 가슴을 콱콱 쑤셨습니다. 그리고 시커먼 먹물 같은 더러운 죄의 먹물과 같은 죄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사도는 어찌할꼬 하고 믿는 이 사람들에게 여러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두 가지를 말했는데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징표로서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사도 베드로가 설교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신 이 구원의 경륜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모두 이룬 이 구원의 경륜은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 속에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안에는 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항하는 죄악과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악들을 봅니다. 이것들이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찔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매일 매일 반추하며 그 분의 죽음이 바로 나의 삶을 위한 것이었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지신 십자가는 그 분의 몫이었지만 그 분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준 십자가를 지고 갈 때마다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고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찔림을 당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이루신 그 큰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도 내가 주님의 이 큰 은혜를 몰랐다면 이 십자가의 사랑을 몰랐다면 우리는 여지껏 방황하고 이 세상에서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극히 불쌍히 여기셔서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데 우리 같은 죄인 한 사람, 한 사람 아무것도 더 착한 것이 없고 의로운 것이 없는데 우리의 행실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와 중생에 씻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탐하며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붙어있는 욕심이 크게 느껴질 때마다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한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깊은 찔림을 받고 우리가 생세함의 의지할 분은 우리 예수님 한분 밖에 없는 것을 믿고 붙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구원의 십자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가운데 두 번째 하신 말씀의 내용이 본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예수님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떠받들던 그 예수가 사형당하여야 할 더러운 강도들과 같은 류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심어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부끄럽게도 두 강도와 함께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II.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들
두 강도는 아마도 서로 아는 사이였던 것 같고 교회의 야사에는 이 사람들의 이름도 나옵니다만, 어쨌든 이 사람들은 강도로 업을 삼던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아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십자가로 처형하지 않았던 당시 로마의 법 제도를 본다면 이들이 흉학한 죄인이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욕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둘 중 한 강도가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나오니 아마도 처음의 두 사람은 일치하게 예수님을 욕하고 대적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 사람 마음속에 복음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을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이 두 강도는 분명하게 십자가에 매달릴 만한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당할 형벌을 대신 당하여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이 두 강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쪽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쪽 강도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의 죽음은 자신들의 죽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강도들은 십자가를 지고 끌려오시는 예수님의 그 광경도 다 지켜보았을 것이고 나무에 매달린 채로 자신들은 원망과 저주를 퍼부을 그 때에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조용히 우러르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도 그들은 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강도의 마음은 여전히 강퍅했습니다. 그러나 한 강도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한 순간에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믿어졌고 구속의 모든 비밀에 대해서 이해했을 리는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죽음은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어졌습니다. 아마 십자가에서만 예수님을 처음 보았더라면 이런 것들이 믿어지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전에 예수님을 만났거나 혹시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과 이야기들을 들은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보들이 지식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면서 받은 감동이 그 지식들을 해석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제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일치하게 욕하고 원망하다가 결국은 찢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야사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다이마스와 가이마스라고도 나오고 혹은 게다스와 미다스라고도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아마 형제였던 것 같다고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몰라도 강도짓을 하면서 두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일치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십자가를 가운데 놓고 이 두 사람의 마음이 찢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은 더욱 불신앙으로 마음이 굳어졌고 한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낙원으로 부르신 예수님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사람의 이성을 초월하는 복음의 진리가 사람들 마음속에 스며들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감동시키자 일생 동안 강도짓을 해 오면서 악하게 살았던 이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놀랍게 태도가 변했습니다. 제일 먼저 변한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뭐냐 하면 아마도 틀림없이 예전에는 정말 자신들이 죄가 있어서 이 형벌을 받는다고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화) 제가 언젠가 형무소에 갔을 때 거기에 있는 간수가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에 갇혀 있는 죄수들 가운데 자기는 이러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재수가 없어서 여기에 왔지, 진짜 나쁜 인간들은 밖에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정의가 중요한 것입니다.
A. 공로 없이 믿음으로 부르심
이 사람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보고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마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 속에는 이미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시인의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할 때 당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그리고 전도를 합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파고드는 적도 있는데 어떤 때는 거의 반응을 못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보고 죄를 못 깨닫는 적이 있어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놀랍습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보았기 때문에 죄인으로 고백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모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마지막 십자가에 매달려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셔서 낭자하게 피가 흐르시는데 왜 그런지 그 분의 죽으시는 그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시는 모습은 자신들같이 악에 받쳐 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실 때 당신의 손과 발에 못 박는 간악한 로마 병정들을 위해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저희들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만, 몰라서 그러니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 한 강도의 마음을 깊이 찔렸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나라는 인간에 대한 생각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생각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복음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죄 없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될 때에 인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적인 감격이 마음에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더러운 인간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친구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렇게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속에 살아있으면 일생을 강도짓 하면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이 뭐 말라 죽은 신이냐는 불신앙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의 구별도 없이 강도짓 하고 악을 행하며 일생동안 살아와서 사형을 받을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저도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뵈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 사람의 생각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려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우리의 온 삶에서 느끼면서 살아가면 그게 가장 훌륭한 선교입니다.
(예화) 언제나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에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이 책을 한 권 내셨습니다. 유고를 모아서 내신 것 같은데 책 제목이 ‘죽기 내기로 기도하자’는 것이 책 제목입니다. 추천서를 써달라고 나한테 와 있는데 그 분이 50이 넘어서 교회를 개척을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서 개척을 해서 설교를 하시는데 한국 최고의 신학자니까, 그런데 신학교에서 강의 하시고 설교를 하시는데 그 교회 수요일인가 주일 저녁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예배에 참석했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단에 속한 사람이었답니다. 한 6개월을 교회에 다녔을 때에 그 교회 부목사가 불어봤습니다. 교수님, 우리 박 목사님 설교를 한 6개월 들어보시니까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저는 솔직히 박 목사님 설교가 맞는지 우리 교주가 하는 이야기가 맞는지 아직도 헷갈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습니다. 건강이 안 좋으셔서 결국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저렇게 연세를 드셔서 연세 드신 분이 저 노인이 저렇게 쩌렁쩌렁하게 피를 토하듯이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잘 모르지만 진리가 아니라면 자기가 그 진리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저렇게 설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거예요. 그러니까 이 강도는 사람이 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손을 벌리고 거기에다가 기차 레일에 박는 못 같은 것을 손목에 두드려 박고 뼈가 으스러지고 동맥이 터지면서 못에 박히는데 그것도 양손과 양 발에 그 때 평정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치 그들의 영혼이 받을 형벌이 당신이 받을 형벌인 것처럼 그렇게 안타깝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아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어느 어린 아이가 집안 식구들이 교회를 나가니까 따라 나가기는 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더랍니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더니 엄마가 벌떡 일어나서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병원으로 뛰면서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엄마가 울면서 외치면서 뛰어가는데 그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 가십니까?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와 더러움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순결하고 신령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하게 바뀐 생각이 마지막으로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무슨 뜻이에요? 내세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티끌만큼이라도 죽은 후에 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졌다면 이렇게 악을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예화) 몇 달 전에도 신문에 보니까 남편이 여자를 살해를 해서 야산에 묻었는데 공사를 하다가 이 여자의 시신이 나왔는데 죽여서 묻은 지 5년이 되면 사실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7년이면 뼈만 남습니다. 묻힌 지 7년이 됐든지 17년이 됐든지 상태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5년이 됐는데 이 여자의 지문이 남아 있더랍니다. 그래서 수사관이 한이 맺혀서 손이 못 썩었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원한이 있다는 것, 그게 무슨 영혼에 영향을 준다는 것, 내세가 있다는 것, 희미하게 사람들 속에 믿어집니다.
B.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
이 사람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지고 어두운 사람이라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던 광경을 보면서 누구에게 기도를 올렸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그 기도하던 광경을 보면서 저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은 여기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데 유대인들의 평균적인 신앙으로는 지옥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주 음습하고 불쾌한 곳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들이 음부라고 믿었고 스올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도 자신이 죽어서 그런 곳 가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러한 음습하고 불쾌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소망이 있는 낙원의 나라고 이 마음속에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의지하면 갈 수 있다는 신앙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감히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이야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양심상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온 길이 너무 죄만 짓고 악을 행하며 살아온 길이기 때문에 도저히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께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무슨 뜻입니까. 내가 감히 나를 데려 가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나같이 불쌍한 인간, 당신을 믿던 인간이 있다는 것은 기억을 해 주십시오라는 사실은 더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였습니다. 이로써 이 사람은 내세에 대한 신앙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 성도들은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마다 내세를 묵상하면서 꿋꿋이 견뎠습니다. 왜냐하면 죄 많은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고 영원히 빛나는 하늘나라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고 여기에서 잠시 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그것이 다가올 나라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정조를 지키면서 믿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땅에 있는 이 나라에 살아도 너희는 하늘을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 다시 말해서 몸은 여기에 살아도 소망은 하늘나라에 두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자기 설교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열심히 설교를 했더니 예배 끝나고 나오는데 어느 강남에 있는 교회인데 그러더래요. 목사님이 잘 모르셔서 그런데 여기 강남도 아프지만 않으면 살만 합니다. 굳이 천당이 아니더라도 아프지만 않으면 왜, 돈은 있으니까. 아프지만 않으면 살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사실은 향기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향기는 몸은 이 땅에 살아도 소망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는 데서 오는 향기입니다. 향기입니다.
(찬양)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들 수 없도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을 멸시합니다. 잠시 지나가는 것들아 라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도 잠시 잠깐 후면 이 지겨운 삶의 휘장이 드리워지고 그리고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오리라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뼈아프게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들도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용서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십자가. 십자가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 보다 더 분명하게 당신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몇 시간 후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도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늘을 향해 열어 놓은 그 구원의 길의 첫 번째 동반자로 이 천하에 더러운 강도를 삼으셨습니다. 길 닦아 놓으면 문둥이가 지나간다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더니 강도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엄청난 감동을 우리게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길 닦아 놨는데 첫 번째 간 사람이 일평생 전 재산 전 생명을 들여서 하나님 위해서 순교한 사람이 갔더라 하면 우리하고 뭔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차피 그렇게 살 수가 없는데. 그래서 결국은 공로 없이 믿음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 철저한 공산당이 복음을 듣고 나서 조용히 계단을 내려오고 나서 목사님 손을 붙잡고 귀에다 대고 나 같은 죄인도 예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훌륭하고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은 구원하지 않으시고 쓸모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에, 세상에 성경을 통 털어서 제일 행운을 얻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왜, 젊어서 자기 할 대로 다 살다가 마지막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도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절제를 주옵소서. 순결을 주옵소서. 믿음을 주옵소서. 그러나 아직은 주지 마시옵소서. 왜, 아직 젊고 혈기 왕성하니까 쾌락도 즐겨 보고 싶고 절제 보다는 자신을 스스럼없이 허비하면서 방탕의 즐거움도 맛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젊은 시절에 하나님을 조롱하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절제를 주옵소서. 순교를 주옵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옵소서. 어떻게, 마지막 죽기 직전에 탁 막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야, 이 사람 정말 땡 잡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진짜 십자가의 예수님을 못 만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제가 하나 질문 하겠습니다. 한번 시원하게 대답을 해 보십시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척 하면서 큰 선물을 주는 것이 어려워요? 두 번째, 너무너무 사랑해서 모든지 주고 싶은데 꾹 참고 안 주는 것이 어려워요? 1번이에요, 2번이에요? 1번이에요? 2번이에요? 2번이지. 1번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도 못해 본 사람입니다. 2번이지, 2번. 자기가 싫은 사람한테 선물을 줄 때, 뇌물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줄 때는 역겨워, 그런데 그 정도로 끝납니다. 그런데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데 무엇인가 해 줄 수 없을 때는 가슴을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역겨운 게 힘들어요, 아니면 칼로 찢는 것처럼 아픈게 힘들어요? 또 1번이라고 그러려고 그러지, 몇 번이에요? 2번입니다. 2번. 그것은 자식이든지 아내나 남편이든지 누구든지 사랑해 본 사람은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번 망설이지도 않고 금방 2번이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 중에 이 강도를 보면서 야, 진짜 행운아다. 열심히 기도도 할 필요도 없고 새벽 기도도 나올 필요도 없고 돈 낼 필요도 없고 놀다가 마지막에 무임승차로 탁 타고 야, 그것도 첫 번째 길을 길 닦아 놓으면 문둥이가 간다고 그렇게 얼마나 좋으냐. 그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야, 정말 좋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죽으면서 주님이 얘야, 내가 너를 생각하마. 이제 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자꾸나. 그리고 손잡고 가실 때에 룰루랄라 노래 부를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이제껏 몰랐습니다. 죄악이 나를 삼켰고 잠겨서 지냈습니다. 천국도 몰랐고 지옥도 몰랐고 고집하며 살아간 이 더러운 세상이 얼마나 추한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빛이 들어왔습니다.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그리고 우리는 정말 더러운 죄인으로 살았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있구나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주님을 섬기며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강도짓 하며 사람을 죽이고 피 눈물을 내게 하는 그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아픈 자를 고치고 쓰라린 자들을 위로하며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셨던 그 섬김을 본받아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텐데 단 한 시간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기회가 허락이 되지 않았고 마지막 하나님 섬긴 일이라고는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변호한 일 그것 딱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손잡고 하늘나라 가는 이 강도의 두 눈에는 아마 이슬이 맺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아직도 주님을 올바로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이 남아있는 우리를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 하는 마음금보다 더 귀하다
깊이 깊이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늘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그 강도에게 만약에 우리하고 있는 자리를 일년만 바꾸자고 그러면 그가 얼마나 행복해 했을까요. 아마도 주께서 일년을 더 살게 하셨더라면 생명 다 해서 내가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혔었는데 그 분은 너희들을 정말 사랑하셨고, 그 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십자가에서 살 찢어 뼈 부러져 죽어가시면서도 너희를 위해 기도하셨단다 라고 증거 하면서 일생을 살다가 예수 위해 죽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그 날들이 우리에게 허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아도 사실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편지지와 같습니다. 주님을 위한 섬김을 써 내려 갑니다. 종이가 없으면 사연이 있어도 글로 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날들은 소중합니다. 더욱이 살아있다고 항상 주님을 섬기십니까.
오늘도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일생 동안 방황하며 살던 노인이 우리 교회에 중풍이 걸리고 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요양원에 있는데 혼자 잘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내가 가니까 눈물을 흘리십니다. 말을 못 해서 오오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먼발치에서 이따금 휠체어를 타고 와서 설교를 들으며 자기에게 은혜를 끼치던 목사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짓말 같으니까 펑펑 웁니다. 울면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는데 듣는 것은 정확하게 들으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온 가족 교회 오는 날 우리 교인 보내서 휠체어 태워 가지고 우리 교회 올 테니까 교회 마당에서 만납시다 그랬더니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아멘 아멘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씀이 들어가서 정말 그렇게 요양원에서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이 만약에 한달 동안만 성한 다리 주시고 온전한 입을 주시고 온전한 두뇌와 손을 주신다면 얼마나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겠습니까. 살아있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시는 특권이 아니고 살아있어도 누구 도움 의지하지 않고 사지백체 움직이며 교회 마당 쓰레질이라도 할 수 있는 이 특권을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의 날은 우리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살아있는 날만 우리의 날이고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날만 하나님 섬길 수 있는 날입니다.
IV. 그대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생명 있는 날 동안에 주님 섬기면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생 살지만 모든 직업 활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뭔 큰 영광을 드러냅니까. 좀 심하게 말하자면 밥 벌어 먹다가 죽는 것이지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뼈져리게 드러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살아있어서 사는 대로 살면 우리는 하늘나라 향해서 사는 사람들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이슬 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잠시 지날 이 세상의 꿈보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더 사모하는가. 그래서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항상 하늘나라를 위해서 준비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꽤나고 힘들 때마다 이 강도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날이 강도가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라고 믿으면서 그러면서 주님 의지하고 하나님 섬기며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포도주를 거절하신 예수님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마 27:33-34)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가셨고 그리고 거기에서 십자가에서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계실 그 때였다고 믿어집니다.
II. 십자가 형벌과 포도주의 관습
그때에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십자가 형벌과 포도주의 관습을 말해 줍니다. 얼마나 자주 이런 종류의 사형이 집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죄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경건한 아낙네들은 전통적으로 마지막 죽어가는 사람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잠언 말씀에 기초한 선행이었습니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 고통을 기억치 아니하리라는 잠언의 말씀에 기초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며 죽어가는 죄수들에게 그 포도주를 갈대에 꿰어 높이 올려서 그래서 매달려있는 죄수의 입에 닿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면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흘리게 되고 이 때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온 몸에 피가 빠져 나가면서 절실한 목마름을 겪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이 포도주를 죽어가는 죄수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냥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짐승의 쓸개를 탄 매우 쓰디쓴 포도주였습니다. 그러니 그 자체가 독주와 같이 되어서 어떤 약성분이 들어가서 그래서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그러한 진정제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죽어가는 죄수들을 향해 베풀어야 하는 경건한 부녀자들의 자비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이 일에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III. 포도주를 거절하신 예수님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포도주를 맛만 보고 안 잡수셨다고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그랬습니다. 이 모든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그 포도주를 맛만 보시고 그 포도주가 쓸개를 탄 그런 종류의 포도주라는 사실을 아시고는 그 포도주를 안 마시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포도주를 예수님이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셨을까. 왜 예수님이 이 포도주를 거절하셨을까. 또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융에 꿰여서 그래서 포도주를 적셔서 갈대에 꿰여서 십자가로 올려 줄 때에 그것이 그런 종류의 포도주인 것을 모르셨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만약에 이것이 포도주인 것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은 안 드셨을 것이고 아예 맛보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육신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육체의 쓰라린 고통을 충분히 경험하셨고 타는 듯한 목마름은 그분의 살을 찢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모금의 물이라도 목을 축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맛 보셨고 그것이 포도주인 것을 아신 후에는 그 포도주를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A. 잡히던 날 밤의 예언
무엇을 근거로 이것이 포도주였다면 예수님이 결코 잡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 잡히시던 날 밤에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 보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그 전까지 예수님이 늘 포도주를 즐겨 드시고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도 애용하시던 포도주를 왜 이 최후의 만찬에서만 굳이 다시는 이 포도주를 안 마실 것이고 결코 포도나무에서 난 것 그 자체, 포도 자체도 안 드시겠다고 누구도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 제자들에게 약속이나 하듯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 민수기에 나오는 성경 구절에 빛을 받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되는 구절입니다. 민수기 6장에는 소위 하나님 앞에 자신이 구별되어 바쳐진 사람, 곧 나실인의 서원이 나옵니다. 거기에 기록되기를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를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사는 씨나 껍질까지라도 먹지 말지며 라고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늘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바치면서 이제까지 섬기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양떼들을 돌보아 오셨지만 이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둔 이 마지막 저녁 최후의 만찬 그 자리에서 그는 이제 앞으로 특별히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만 온전히 바칠 것을 서약하시는 장면입니다. 원래 하나님 앞에 구별된 분이었지만 이제 마지막 당신에게 지워지는 이 큰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셔서 양 떼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육체와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나실인의 서원을 적용하시며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이 포도주, 포도에서 난 어떤 것도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셨던 것입니다.
B. 특별히 자신을 바치심
예수님이 이 율법을 지키셔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율법을 잘 알고 있던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얼마나 비장한 각오로 고난을 당하고자 하시는가 하는 것이 느껴졌을 것이고, 하나님께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쳐 죽음에 이르고자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말씀을 마지막으로 이제 고난의 길에 접어들게 되셨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이 끌려가시고 그리고 빌라도에게서 헤롯에게로, 헤롯에게서 빌라도에게로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다가 결국은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으니 그 때가 금요일 새벽이었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9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타는 듯한 목마름과 살을 찢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액체를 적셔서 스폰지처럼 갈대에 끼워서 높이 올려 예수님의 입가에 베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맛보시고 이것이 마취 성분 혹은 진통제 성분이 들어있는 약용 포도주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왜 그러셨을까요? 단지 율법에 나와 있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자신을 바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형벌을 주님이 담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큰 고난을 감당하시고자 하였던 것은 어쩔 수 없이 감당하셔야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예수가 대신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어린 양으로서 고난을 받고 계셨으니 응당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기 위해서는 뼈 속 깊이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감당하시며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고통스러운 죽음 속에 감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진통제를 원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결코 원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십자가는 당신이 온전히 감당하심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실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몫의 태인 십자가를 지고 끔찍한 형벌 속에서 지속되는 모든 고통 속에서 죽어가시면서도 그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거절하시고 홀로 자신을 육체로 우리를 향한 그 큰 고난의 형벌을 고통 속에서 다 당하셨던 것입니다.
IV. 고통 없는 십자가는 없다
십자가 찬송을 부르는 것은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대가가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고통의 길입니다. 인간이 누구든 행복하기를 원하지 괴롭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는데 달콤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영광과 친교와 사랑과 인정과 유익과 물질의 복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수취와 멸시,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고난과 아픔, 고통과 쓰라림,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 없는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고 심지어 달콤한 십자가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에 달콤할 수 있다면 이미 십자가가 아니고 즐거울 수 있다면 그것은 고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성격 자체가 누구도 나뉘어질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한 사람의 목회자가 교회에 대해 깊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칩시다.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의 마음을 가지고 똑같이 눈물 흘리고 아파한다고 해서 그 목회자의 교회를 향한 아픔이 줄어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아마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에서 이런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가족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가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아파할 때 다른 교인들이 그 소식을 듣고 함께 아파해 준다고 해서 그 고통이 덜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고통이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모양일 뿐이지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통이 없는 무통의 십자가를 원합니다. 언제든지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하지만 그 십자가의 고통이 묻어나올 때 언제든지 그 십자가를 버릴 마음이 생기는데 그 십자가를 버릴 때 사실은 십자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짊어지어진 이 십자가가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마다 항상 십자가에 매달려 물과 피를 모두 쏟으며 죽어 가시면서도 당신의 고통을 경감시킬 그 포도주를 거절하셨던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은 온전히 십자가를 지시려고 포도주조차 마다하셨기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의 모습을 보면서 고통없이 십자가를 지려고 했던 것, 언제든지 그 십자가를 지고 벗어 버릴 생각을 했던 것, 십자가를 지고 있으면서도 무통의 십자가가 되기 원하며 고난 받지 않을 길을 찾기 위해서 타협하고 야합하고 신앙의 정제를 버리고 했던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히 그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십자가와 부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그러하듯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가 되었다’라는 자기 고백이었습니다. 바로 그 복음은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전해 내려온 것이었는데 예수님에게 와서 이 복음이 찬란한 광채로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중적 묘사
A. 인성에 관하여: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시고’(롬 1:3)
오늘 사도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중적인 묘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성에 관해서인데 인성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기 때문에 육신의 부모가 있었고,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살과 피를 빌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B. 신성에 관하여: ‘거룩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됨’(롬 1:4)
그러나 사도는 또 하나 신성에 관해서 특이한 설명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성결의 영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은 희랍어 성경에 ‘푸누마 하규슈네’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냥 거룩함의 영입니다. 그냥 성령 하면 이미 그 속에 거룩하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 안에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못 받았었는데 부활하고 나서 하나님이 인정을 해주셨다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이 원래도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온 다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지상의 생애 동안에는 감추어져 있었어요. 아주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그 나사렛에, 촌 동네에 목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그 분이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만민, 그리고 모든 하늘의 천사들에 이른 피조물들까지도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함으로 이제 그 하나님의 아들이 참 이 온 세계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확실하게 모든 피조물들 속에 드러내 주셨다 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Ⅲ. 부활을 통해 드러난 십자가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찬란한 영광으로 부활하셔서 그리고 세계와 모든 피조물들 심지어 하늘에 있는 천사들까지 무릎을 꿇고 그 발 앞에 경배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게 하셨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부활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기초해서 일어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고, 죽으시지 않은 분이 다시 살아나시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런 이 부활이 바로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커다란 보상이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통해 드러난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만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부활 - 죽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바울은 한때 유대교 신자였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으로서 종교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던 야심에 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 예수님의 시체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문제는 부활도 죽음도 움직일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고 증인들도 있고 그를 무덤에 가둔 아리마대 요셉도 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허망한 풍설이 온 제국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다메섹에서 이런 괴이한 소문이 강력하게 떠들고 있었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교로 전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때에 혈기 충천했던 이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여 권세를 가지고 다메섹에 가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소문을 퍼뜨리거나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둘 각오로 이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 분을 직접 뵈었습니다. 찬란한 빛 앞에 그는 눈이 멀어버렸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기이하게 빛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주님의 명료한 음성까지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이제는 부인할 수 없게끔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이 이 젊은 사울의 마음속에 폭풍처럼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서를 잘 읽어보시면 기이한 장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원래 다수의 백성들은 예수를 죽이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기필코 예수를 죽여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 복음의 선포를 통한 율법의 재해석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득권들을 공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부터 참으로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진리에 대한 증언을 들으면서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죽여 버리면 자신들의 모든 의도가 성취될 텐데 놀랍게도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일치하게 소리 지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법입니까? 죽이면 죽여라, 살려달라면 살려달라지 죽일 때에 총살을 시켜라, 목에 매달라 죽여 달라, 물에 빠뜨려 죽여 달라 이렇게 주문하는 것이 과연 백성들이 소리칠 권리가 있는 내용입니까? 그런데도 신기하게 이 사람들은 일치하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거대한 종교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음모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나무에 매달려 죽인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 십자가 형벌은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게 아니라 로마인들이 변방의 야만족이던 시절에 만들어낸 잔인한 처형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율법의 규례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를 다른 방법으로 죽이면 다른 어떤 의로운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이 지난 후 누명이 벗겨지고 예수의 죽음은 야비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인 음모 때문에 죽은 것이었다라고 하는 것이 탄로 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이 많은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구약의 규례에 따라서 이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죽었으니 이는 단순히 로마의 병정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저주하셨기 때문에 로마의 병정들이 도구로 사용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뿐이라고 하는 신앙적인 확신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있는 예수만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누명이 벗겨질 예수도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게 해 달라고 일치하게 대모했고, 그리고 빌라도는 확신도 없으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사울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의 가슴 속에 선명하게 그 예수는 바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자라고 하는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려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녹이라는 사람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그리고 300년을 더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고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도 죽음을 보지 않고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의 믿음 속에는 모세도 사실 죽은 것이 아니라 천사가 데려갔다라고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산 것은 고사하고 그냥 죽음을 보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구약의 인물들에게만 일어난 일이라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이것은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인정을 받기 전에는 역사상 일어난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고 실지로 발생할 일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구약의 에녹이나 엘리야나 모세나 이런 사람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인정받은 사람이었다라는 이야기인 거죠.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해 주실 사람이면 저주해서 십자가에 못 박지 말으셨어야죠. 저주해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살리지 마셨어야죠. 이 둘 사이에서 이 젊은 사울은 유대교 신앙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엄청난 모순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B. 드러난 십자가의 의미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자 그는 이 두 가지 사실 중 어느 한 가지 사실이 거짓이 아니라 둘 다 엄연한 사실이요. 부활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양립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먼저 죽은 그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의 죄 때문에 자기의 더러운 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찬란한 복음의 빛이 십자가 신앙이 이의 마음속에 빛줄기처럼 들어왔고 그는 구약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갔던 저주받은 수많은 짐승들의 시체와 제사의 광경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이제 이 사울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어마어마하게 고통을 받으시고 치욕스럽게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형벌 당해야 할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당하신 대속의 저주요, 대속의 고난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모순된 두 사실은 하나로 놀랍게 통합을 이루면서 죄를 향해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공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찬란한 복음의 빛이 유대교의 거짓된 신앙으로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사울, 이 청년의 마음속을 찢으며 한 줄기의 빛처럼 번갯불처럼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로 말미암아서 그는 예수님 그 분이 바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이 십자가가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때까지 이 십자가라는 말에는 어떠한 종교적인 의미도 없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희랍어로 스타우르스라고 하는 것인데 그냥 서 있는 나무 그 뜻입니다. 그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죄인들을 잡아 죽이는 형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도 바울에 의해서 바로 자기 자신의 생애동안 종교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은 이제 이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의 새로운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인데 그러면 도대체 그 드러난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전에는 예수님이 흉악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더러운 강도들과 함께 끔찍한 고난을 당하고 마지막에 창에 허리를 찔려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시는 치욕스러운 고난을 당하셨다 라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모든 피로 얼룩진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다름이 아닌 그 자신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대속의 교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찬란한 빛이 들어왔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주님의 저주가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사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말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찬양)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형벌 때문에 예수님을 멸시하고 조롱했는데 이제는 그 분의 십자가의 형벌이 극심하고 비참한 것을 보면서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큰 것과 그 분이 대속해야했던 우리의 죄가 얼마나 더럽고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로부터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무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미친 사람처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고 외쳤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미 십자가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그 선언이 숭고한 신앙고백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만약에 오늘 제 손에 형무소에서 죄수들을 목 졸라 죽이는 밧줄 하나를 들고 제가 내게는 이 밧줄 이외에는 자랑거리가 없나니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미쳤다고 비웃지 않겠습니까? 그런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내가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고 외쳤고 그 십자가는 자신의 자랑이요, 그 십자가는 자신의 사랑이요, 그 십자가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이고 동시에 죽어야할 이유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미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는 너무 차갑습니다. 냉fod합니다.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을 때에는 그렇게 타는 가슴으로 열렬해지던 사람들이 어쩌면 교회에 와서는 그렇게 차가운 가슴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생활은 마치 교회 안에 모여서 돌 가슴, 철 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묵묵한 얼굴로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앉았다가 동상처럼 앉아다가 일어서 나가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도 버티기 힘들어서 졸음과 공상으로 예배 시간을 채우는 차가운 가슴은 이미 예배당을 떠나 세상으로 들어가자마자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말미암아 뜨거울 준비가 된 마음입니다. 청교도 리차드 십슨 목사는 말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는 딱딱한 마음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부드러운 마음은 세상을 향하여는 딱딱한 마음이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독선적이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던 이 젊은이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지신 그 십자가가 바로 자신의 죄의 깊이를 말해준다는 사실과 그런 끔찍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대신 죽여 살리고자 했던 것은 자기를 향한 거룩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고 목회자가 되었고 텐트를 깁는 사람이 되었고, 수리하는 사람이 되었고,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되었고 죽기까지 자기를 이방인들을 위해서 내어주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런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습니까? 오늘날 영적으로 부활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확신,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해 어찌하든지 나를 분골쇄신하여 주님 앞에 드리고 싶다는 헌신의 마음이 생겨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얼마나 적은 무리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십자가를 딛고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산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 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의 기쁨이 무엇인지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음에 죄악이 가득하고 양심에 가책이 심령에 번민을 일으킬 때 예배당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예배당에 앉아서 찬송을 부르고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마음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쓸모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고 그리고 온 얼굴에 피가 흐르고 채찍에 온 몸이 벌거벗겨 상하신 그 위에 매달린 십자가의 무수한 침 뱉음과 그리고 채찍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 분이 죽으시는 그 십자가의 고난의 광경을 생각하면서 그 분을 그렇게 죽게 하는 것이 할 만한 이유가 그 분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고 영혼과 육체와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좋으신 하나님이 그 사랑스러우신 아들을 그렇게 모질게 다루시고 십자가에 처형하실 그때 사실은 아들 때문에 죽이신 것이 아니라 아들이 짊어진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렇게 끔찍한 고난을 당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예수를 죽이는 일에 손에 피를 묻혔고 그래서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죄 짓고 악을 행하고 자기 살기 위해서 예수를 죽인 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양심을 찌르는 율법의 빛과 그리고 그 율법의 그늘 아래서 우리를 송사하는 양심의 비양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피할 곳 없이 길거리에 버려진 상처받은 짐승의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피할 바위요, 산성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분의 십자가의 공로 그늘 아래 스며들면서 우리는 만세 반석을 경험하게 됩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신 그 십자가 그늘 아래 기어들면서 우리는 이렇게 악을 행하고 죄를 지었으나 예수가 우리를 위해 대속하였으니 그 그늘 아래에서 용서를 받게 해 달라고 빕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내가 주님의 명령을 거슬러 행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자기를 깊이 책망하게 되고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죄를 지었던 자신을 미워하고 그 자신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못 박았다라고 하는 자책감 때문에 찔림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죄에 대해서 죽어가는 그 순간이 2000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비하게 자신의 마음속에 죽음의 그림자로 스며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는 한없고 맡겨주신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티끌 같은 것인데 티끌 같은 사명을 지고도 그것이 무겁다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리고 그 십자가 벗어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던 주님의 고난 받은 형상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그 은혜에 비하면 자기에게 지워진 이 십자가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짐을 지고 가는 동안 어려웠던 모든 일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기억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주님의 형상 닮도록 성숙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지워주신 모든 고난과 무거운 인생살이의 짐들이 있습니다. 질 때마다 괴롭고 아프기만 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그 순간 그 십자가가 자랑스러워집니다. 내게 고난 받을 십자가가 있음은 아직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주님께 쓸모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 벌레 같은 인간이 어디가 고와서 주님의 그 고난의 십자가에 참여하게 만들어주실까 생각하며 참습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Ⅳ. 결론: 부활 신앙으로 살자
깊이 아파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충성스럽게 살고자 할 때 비로소 그런 마음을 하는 자신의 심령 속에 2000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스며 들어와서 게으르게 살려는 자신을 죽이고 나태하게 살려는 자신을 죽이고 예수 위해 죽기 싫어하는 자신을 죽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 편하게 살기 위해서 무수히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칼질하였던 그 끔찍한 범행을 생각나게 되고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살리시면서 나를 구원해 주셨을 때 나는 언젠가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제는 주님이 사시기 위해 제가 죽을 차례입니다. 라고 고백했던 착한 마음이 사라지고 예수 죽이고 나 살려고 했던 그 끔찍했던 불순종의 날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자아들이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그늘 아래에서 ‘아,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으셨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자기를 끝까지 부인하셔서 구원의 대업을 이루셨다면 아직까지도 죄가 가득 찬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이 예수 앞에서 죽어야 할까’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귀찮게만 느껴지고 고난으로만 다가왔던 십자가를 인해서 주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더러운 인간이기에 방종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고 지지 않으면 안 될 십자가를 주신 주님,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괴로워하면서도 날마다 죽게 하시는 주님의 그 큰 은혜가 큰 것은 바로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는 그곳에서 예수와 함께 사는 영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한 후에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명의 운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하면 나의 생명도 죽음도 아깝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마음을 다 드려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십자가 때문에 사실은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날마다 삽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나는 자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주님이 버리신 자 같으나 사실은 택한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믿음의 길을,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시 머무는 우리의 인생길은 나그네 길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길은 영원한 길입니다.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어서 예수와 함께 영원히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7.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1-12)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모든 서신서들 가운데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 아니 더 나아가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아울러서 가장 아름다운 기독론에 관한 고백이 오늘 이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복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의 결과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II. 십자가 고난의 결과
A. 영광스러운 부활
우선 첫째는 십자가를 지고 그렇게 죽으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들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그 때에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바대로 그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 하나님 앞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그 일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운명하시기 직전까지 살아오셨던 그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 삶에 대해서 그가 말하기를 그것은 복종의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복종의 삶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자기의 뜻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은 삶이었고 그 삶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복종하시되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철저한 복종의 삶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받으며 살아야 할 모본을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복종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나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고 그리고는 자신의 뜻을 주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키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죽는데까지 나아가도록 복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뜻이 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 합치하면 지키지만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합치하지 않을 때 언제든지 주님께 저항하고 불순종하려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그 정신에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 복종은 죽기까지의 복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것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당신에게서 생명을 빼앗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기꺼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십지가를 지고 죽으시는 고난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예수님이 당신이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고 죽으셨을 때 그 고난의 결과는 영광스럽게 나타났습니다.
B. 온 세계를 통치하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그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렀던 것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상급이었습니다. 십자가 고난으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대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를 통치하실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오직 여호와 한 분이 주님이셨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셨으니 이는 구약에서 여호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께 이 모든 우주와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에서 참 사람이 사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바로 이 지상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의 세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 효과는 지상의 세계에만 미치지 않고 천상의 세계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은 천상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길을 여셨을 때에 이 천상과 지상의 세계가 다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제 땅 아래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 구별이 없이 모두 그 발아래 무릎을 꿇어 주라 시인하게 하셨노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승천하신 후 이 지상의 세계만을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인 천상의 나라도 통치하시는 주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이후에 당신의 큰 창조주의 영광으로 구속주의 영광으로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스르고 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대답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신 후에 온 세계를 실제적으로 통치하시고 천상의 세계까지 다스리심으로 모든 인류와 하늘에 있는 천사들까지도 당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 여호와라 인정하고 그 분의 뜻을 따르도록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땅과 만물 위에 탁월하게 뛰어난 영광과 권위로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또한 구속된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모든 만물들이 통치를 받고 있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받고 시련의 길을 가면서 인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에게 권세를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당신과 관계하는 이 세계를 다스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어느 정도 그 심판의 주체로 참여하게끔 영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이런 영광이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물으면 여러분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예수와 함께 누릴 영광의 약속에 참여할 준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영광의 통치주로 계신 이 때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그리스도는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렸으며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그리스도는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으로 통치하십니다. 주님을 믿기 전까지 우리는 오직 율법의 통치만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부흥하게 살면 질서를 지킴으로 어느 정도 마음에 평안이 오고 안정된 삶을 누립니다. 율법을 어기고 그것을 파괴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있어서 우리 안에 끊임없는 율법인 양심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는 다 알지 못했지만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여 우리의 삶에 안정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드넓은 세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계를 율법으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정된 삶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우리들은 율법으로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종종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지만 그 율법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예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와 넓이를 알고 그 은혜의 무궁함을 날마다 깨달음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 사랑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우리의 뜻들을 버릴 마음들을 같게 하십니다. 행복하고 평안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가치 있는 일을 발견하고 난 후에는 그 가치를 이루기 위해서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그러한 일들도 서슴치 않게 됩니다.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들을 소망하면서 고난의 길을 갈 용기도 그렇게 해서 얻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통치로 신자들을 다스리시는 방법입니다. 율법의 칼로 우리의 목을 겨누며 이것을 행하면 살고 저것을 행하면 죽는다고 위협을 해도 지킬 수 없었던 의무들이 주님의 사랑에 붙들리고 나면 그렇게 할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위협과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은헤의 통치 속에서 살아가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그 영광과 위엄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III.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A. 예수를 시인함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해야 하는 의무를 하게 되는 일들을 둘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한다고 하는 것은 고개를 끄덕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시인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의 강요나 억압, 유혹이나 권유가 아니라 내면에 있는 생각과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솟아오르며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나사렛에서 나시고 유대 땅에 사셨던 한 인간이 아니라 지금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 온 우주와 이 세계를 향한 통치주가 되어 계시다 라는 사실에 대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인정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의 삶이 예수를 중심으로 재편되게 됩니다. 아무리 주님을 우리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도 주님에 의해서 삶의 질서가 재편되지 않은 진심으로 주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경험하는 것이지만, 선생님이 숙제를 많이 내 줍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너무 힘드니까 뭘 고민하냐 하면, 다른 반에서 그 숙제를 내 주고 선생님이 검사를 하더냐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반에서 숙제만 내줬지 이번 주에는 검사는 안 하더라 그러면 아이들은 신이 납니다. 그리고 숙제를 안 해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설마 검사하랴 하고 생각을 했는데 물어보니까 숙제 검사를 해서 안 해 가지고 온 학생들은 반 죽도록 맞았다라고 하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러면 무서운 생각에 얼른 밥을 새워서라도 숙제를 해갈 마음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지 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후에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되었으니 이제 그 사실 때문에 우리의 삶이 그러한 사실에 의해서 다시 조직이 되고 다시 질서가 잡힌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의미가 바로 예수를 시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살도 피도 섞이지 않는 아무 상관없는 남녀가 결혼을 앞두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렇게 고백을 했다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제 이 여성이 남성에게 고백을 한 다음에는 이제 인생의 모든 계획이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는 내년에 유학가려고 했는데 결혼하는 그 사람이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자기 계획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시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통치주가 되신 가운데 그 통치주로서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또 왕처럼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그 인정하는 것이 구원받을 하나님의 사람들의 첫째가는 의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렇게 예수를 시인하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이 시대는 예수를 모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주라고 시인하고 그분을 따르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 커다란 핍박의 이유였던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오. 로마에서 핍박이 워낙 심화된 시절에는 아침에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저녁 때에는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 입으로의 시인 이것은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일 매일 반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요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 자신이심을 우리들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속에서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 누구인지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분께 온전히 복종하고 그 분의 통치를 받을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가 그 분의 백성이요, 그 분의 사랑하는 자녀인 것을 시인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감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받은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갈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그 순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의 전부라고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칼빈 선생만 해도 우리의 구원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마지막 우리들이 이 모든 세계를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심지어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덧입을 그때까지 전부를 구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구원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한순간에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러한 의미의 구원 뒤에 이루어지는 구원에 합당한 모든 삶 전체를 포괄하여 그 모든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의 구원이 한 사람 속에 확실하게 이루어갈 때에만 처음 받은 그 구원이 의미가 있는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겨울이 되어 보십시오. 찬바람이 몰아치고 두꺼운 얼음이 땅 위에 뒤덮힙니다. 그러나 봄을 감당할 겨울은 없습니다. 봄이 물러가고 이제 따뜻한 햇빛이 돋기 시작하고 언 땅들이 녹기 시작하면 놀랍게 새싹이 나고 잠시 후에 푸르러 우거진 녹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미국 다녀와서 제일 먼저 마당을 보니까 변했습니다. 8일 전에 갈 때보다 훨씬 잎이 무성해지고 너무나 예뻐졌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생명 때문입니다. 생명 때문에 그렇게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가운데 우리에게 어느 한 순간 예수를 믿고 뜨겁게 회개하며 구원받게 하셨을 때 그것은 예전에는 그러한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는 면에서는 이미 구원을 이룬 것이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면에서는 이제 구원이 겨우 시작된 것입니다. 완전히 죽었던 것 같은 영적인 생명인데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비춰질 때 그들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놀랍게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렇게 일단 살아난 나무는 누구도 그 생명을 억제할 수 없고 아름다운 잎과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그 구원은 단순한 구원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주시는 특별한 종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합니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이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온 모든 죄의 결과들을 모두 회복하여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환원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은 성화가 끝나는 죽음도 아닙니다. 낙원과 음부에 있는 그 때에도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를 모두 살리셔서 다시 그 분의 생기를 힘입어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바로 그 때에 그 때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때이며 우리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스며들었던 죄로 말미암았던 모든 부패와 갈등들까지 완전하게 치료가 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죄 없는 세계에서처럼 찬란한 창조와 영광이 이 모든 세계에 가득하게 되는 그 날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 개인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모든 사람의 구원이며 접붙여지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따라 접붙여진 그 수가 찰 때까지의 구원입니다. 그들이 모두 이 세계와 함께 아름다운 교제를 회복하게 되는 이 모든 하늘과 땅의 구속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완성된 구속을 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느 순간에 회심하고 중생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그것, 그것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구원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모두 이루어지기까지는 아직은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 된 세상 이편에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회개하고 들어가는 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거친 세상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다가 우리들이 가야 할 요단 건너 저 하늘나라에서 보면 구원의 감격은 겨우 출발의 감격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떨리는 마음도 없이 구원을 이루어 간다라고 하는 긴장도 없이 그냥 우리의 생긴 대로 사는 그 삶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구원 받았을 리 없고 백번 양보해서 현저한 지식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소위 존 오웬이 이야기 하는 비영적인 틀들에 갇혀서 그래서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셨을 그 때에 캄캄한 밤바다에 하나의 등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등대가 필요 없고 온 세상이 주님의 빛으로 가득 차게 되는 날을 꿈꾸고 그리워하는데 그 나라가 바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떨리는 마음을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확신을 굳게 갖고 있지만 매 순간 만약에 내가 하나님과 맺은 이 언약에 충실하며 살다가 마지막 날까지 승리하지 않으면 어쩌면 나의 이 구원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긴장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내 영혼 하나님을 만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친 아버지이신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확신 속에서 살면서도 내가 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해서 마지막 이 언약에서 떨어져서 결국은 내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 구원도 사실이 아니게 될 수 있다는 최종적인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면서 방종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믿음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어쩌면 이 구원을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언약을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마음, 그리스도가 나를 붙잡았다가 떨어뜨려 버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내가 결국은 불신실한 자로 입증이 되어 맨 처음 내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구원이 거짓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IV. 결론: 십자가의 삶
여러분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얼마나 처절한 박해를 받으며 자신의 믿음을 지켰는지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화형 불 앞에서 신앙의 정조를 굽히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정치적으로 협박할 뿐만 아니라 금전과 명예로 사람들을 구슬리고 유혹할 때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언약사상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이 언약을 믿고 주님은 우리와 맺은 당신의 언약에 충실해서 이렇게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하기 까지 언약에 충실하셨는데 나도 이 언약에 충실하지 않으면 나는 배교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 영원히 사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번 죽기를 원했고 고난 없이 길게 살기 보다는 오히려 넘치는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나도 기꺼이 그 고난을 당하고 감당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진보를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독교와 십자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