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죄죽임의 교리
녹취자: 윤은정
이것은 용어부터 먼저 설명을 하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편의상 ‘모티피 케이션’이라고 편의상 많이 쓰겠는데 ‘모티피 케이션’이라는 말은 신학용어입니다. 그래서 ‘모티 파이’에서 온 명사입니다. ‘모티 파이’는 ‘죽이다’ 그런 뜻입니다. ‘모티피 케이션’ 그러면 ‘죽임’ 그렇게 됩니다. ‘죽임’, 혹은, ‘죽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정식 명칭은 ‘더 닥트린 오브 모티피 케이션 오브 씬’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죽음의 교리’, 혹은, ‘죄를 죽임의 교리’, ‘죄 죽임의 교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의를 하고 ‘모티피 케이션’ 그러면 ‘아, 죄를 죽인다는 이야기구나!’ 그것과 함께 이제 또 하나, 강의시간에 기억해두어야 할 용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비비 케이션’ 이것은 정 반대로 ‘비비 파이’에서 왔습니다. ‘비비 파이’는 아까 ‘모티 파이’하고는 정 반대로 ‘살게 하다.’, ‘살리다’ 그뜻 입니다. ‘비비 케이션’ 정확하게 말하면, ‘더 닥트린 오브 비비 케이션 오브 그레이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살림의 교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얘기하면 ‘비비 케이션’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뭐라고 알아들어야 하면 은혜를 살리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은혜를 어떻게 살립니까?” 그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라기 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살아있는 영적인 삶을 일구어 가게 하는 은혜! 이런 말 합니다. “야, 너 요새 은혜가 떨어졌구나!” 그런 말 하죠? “어우, 너 요새 은혜 많이 받았구나! 은혜 충만하구나!” 그렇게 말할 때 그 은혜입니다. 그래서 ‘비비 케이션’ 그러면 ‘은혜 살림’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모티피 케이션’, ‘비비 케이션’ 두 개 기억하십시다.
제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난 다음에 처음에는 그런 것을 별로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신학적인 혼란이 하나 왔습니다. 그 신학적인 혼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 내가 그 현장도 보고 옆에서 다 봤으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쉽게 뒤로 물러갈까?’ 그리고, ‘그렇게 감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놀라운 말씀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쉽게 허물어져 버릴까?’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창기에는 제가 어떤 중간결론을 내렸냐면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아마, 은혜를 덜 받아서 그렇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만지고 지나가시는데, 그게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간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름대로... 또, 그렇게 성경적인 근거를 댈려면 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실제의 기독교인의 삶의 현장에서 보면은 그럼 그 이야기가 맞느냐? 입증할 수 있느냐? 할 때에 상당히 어려운 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깊이 그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셨느냐?’ 하는 것은 사실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면도 많이 있지만은, 그러나 안 드러나는 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나 깊이 만지고 지나가셨느냐?’ 하는 것이 그래도 ‘약간 신빙성이 있게 드러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깊이 만지고 지나가시는 것이 그래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 그 부분이 뭐냐?’ 그렇게 이야기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얼마나 그가 신앙의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바뀌었다.’ 라고 하는 말 자체는 오늘날에 신앙에 대해서 배우거나, 익히는 그런 교훈들이 상당히 탈색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짜피 하나님이 깊이 만지고 지나가시면은, 인격 전체에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그중에서 제일 깊이 일어나는 변화가 뭐냐 하면은, 옛 삶에 대한 철저한 부정입니다. 여기서 부정이라는 것은 삶으로 부인한다기 보다도, 예전에 자기가 살았던 삶과 신앙생활 이런 것들이 굉장히 잘못 됐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인식, 그런 깊은 인식, 그런 것이 있느냐? 그것이었고, 그 다음에는 또, 하나, 얼마나 그가 하나님이 영혼을 깊이 만지고 지나가셨느냐? 하는 것을 잴 수 있는 또, 하나가 어떤것들 이냐면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열정적이라는 말을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건 이제 뭔가 이렇게 급격하게 막 타오르는 그런 열정! 그런 것보다도, 얼마나, 쉽게 이야기 하면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입니다. 혼자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교회의 상태나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 됐다는 것이 확인될 때, 자기의 영적인 생활이나, 아니면 교회의 생활 자체에 대해서 뭔가 깊이 하나님의 복음의 도리에서 뭔가 어긋나있고,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달을 때, 그 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느끼는가? 이것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근거라기 보다도, 상당히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 한 영혼을 하나님이 깊이 만지고 지나가실 때에는 반듯이 거기에는 뭐가 있냐면은 하나님의 마음의 부어주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각성을 통하지 않고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는 일... 그래서, 하나님처럼 막, 애통하고, 아파하는 일... 그런 일... 요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좀 더 설명을 듣기를 원하면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는가’ 챕터 파이브를 읽어보시기를 꼭 권합니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는가 5장’
그 다음에 이제 여러 가지 쭉 나오는데, 얼마나 삶이 일관성이 있는가? 일관성이 있다는 문제...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데로 산다고 한다기 보다도,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셔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라는 인식이 확실해지니까 그 다음에는 일관성이 있어지는 거에요. 생각이나 판단이... 이 문제가지고 이야기 할 때에는 세속 주의적이고, 이 문제가지고 이야기 할 때에는 합리 주의적이고, 이 문제가지고 이야기 할 때에는 신비 주의적이고, 이 문제가지고 이야기 할 때에는 전통 주의적이고, 그럴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깊이 만지고 지나가시면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뭔가 깊이 만지고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인격을 깊이 체험하면, 거기에는 반듯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인생과, 교회와, 역사와, 이런 것들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벧엘로 올라가자’ 같은 데에서는 하나님의 시각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말도 조금 어려우니까 더 구체적으로 쉽게 이야기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통곡하면서 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깊이 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도 예루살렘 성을 봤는데 그렇게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고사하고 예수님이 왜 우시는지도 아는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런 시각이 없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겠어요? 부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저는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신 증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지금도, 그 외에 여러 가지 많이 있습니다 만은, 중요하게 대게 그런 것들이 한 영혼을 하나님이 얼마나 깊이 터치하시고 지나가셨는가 라고 하는 것들을 말하자면은 깨닫는, 확인하는, 그런 시금석으로 본다 이 얘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해당이 안되는 사람이 쉽게 물러간 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은, ‘아직까지도 눈물도 흘리고, 변화도 자기는 나름대로 경험했다고 하지만, 아직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간단히 처리가 되잖아요? 합리적으로...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보면은 그렇지가 않더라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물론,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고 미끄러지는 것은 우선 시간도 좀 걸리고, 완전히 뒤로 물러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고, 그 다음에는 프로테지도 확실히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하면, 그런데도 내가 그런 성경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볼 때, 분명히 하나님을 상당히 깊이 만났는데, 뒤로 아주 쉽게 물러가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게 원인이 뭔가? 그래서 중간에 결론을 내린 것은 뭐냐하면은 ‘똑같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깊이 터치하고 지나가셨고, 덜 터치하고 지나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깊이 만났는가의 문제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상당히 한쪽면만 봤지, 체험이 신앙에 미치는 한쪽 면을 본거지, 다른 한쪽 면을 보는데 상당히 결함이 있는 구도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불과, 뭔가 결함이 있다라는 생각은 했는데,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보다 성경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생각을 이제 하게 된 것은 몇 년 안됩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집요하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특히 목회를 하면서 더욱 그런 문제는 아주 현실적으로 대답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깊이 그렇게 고민을 하고 고민이 정지되다가, 또, 비슷한 유사한 사례가 일어나면은 또 그 관심이 일어나면서 ‘왜 그럴까?’라는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파고들어가게 되었는데, 결국, 혼자서는 정답을 별로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존 라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가운데 ‘거룩’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전체가 대답을 준 것은 아니고, 그 ‘존 라일’의 서문을 보면서 누구를 만났냐고 하면은 ‘제임스 파커’를 만났습니다. ‘파커’가 그 앞에다가 서문을 썼는데, ‘라일’은 옛날 사람이니까 ‘라일’의 책을 리바이블 해 내면서 거기에 추천서를 ‘제임스 파커’ 리전트 칼리지 교수인 ‘제임스 파커’교수가 썼습니다. 그런데 ‘제임스 파커’가 서문을 쭉 써내려가고 자기의 ‘라일’을 만나기 전에 그 비참했던 자기의 간증에 대해서 써내려 갔는데, 내 상태하고 너무 유사한 것입니다. 내가 내 상태라기 보다는, 내가 염려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꼭 같은 고민을 한 것입니다. 그 고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면은 이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이 제임스 파커가 옥스퍼드 대학에 학생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주님을 만나서 참 뜨겁게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주님을 향해서 기대는 굉장히 높은데, 늘 말하자면은 신앙적으로 기를 펴지 못하는 침체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충고해주는 이야기인데, 그때에는 선교단체 비슷한데 다녔는데, 그때 충고해주는 이야기가 뭔고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넌 죽고 예수 그리스도는 살았다.’ 그것은 가르쳐주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도 자기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다고 말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리적으로만 그렇지, 주님이 내 안에 살아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패배하고 비참하게 질 수 있느냐? 그랬더니 그 때의 대답이 뭐였냐면은 이런 요지입니다.
그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주님이 들어오신 사람은 자연스럽게 승리하고 이기면서 살게 돼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너의 자아가 승리하지 못하도록 불순종하는 요소가 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만 속에서 죽어 지내면 주님은 저절로 사셔서 너의 신앙생활을 승리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서부터 무슨 작업을 하기 시작했냐면은 검찰관의 눈을 가지고 도둑놈을 조사하는 것처럼, 자기 내면의 세계를 철저하게 망원경으로 조사를 하면서 내 안에 어떤 불순종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영적인 상태는 거의 계산이 안되는 것입니다. 거의 계산이 안되는 죽어있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때 이제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신의 삶의 전혀 승리를 안겨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저 흐느적 거리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그런데, 실제로는 흐느적 거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석과 같은 책을 두 권을 만나는데 존 라일의 ‘거룩’이라는 책과, 존 오웬의 저작전집 제 7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도 라일의 책을 읽었잖아요. 존 라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때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시대, 이미 벌써 한 세기 전에 그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던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 세기가 아니라 벌써 칼빈은 그 캄캄한 시대에 그런 문제를 벌써 다 파악을 한 것입니다. 다 파악을 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내 놓은 것이 ‘모티피 케이션’의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가지고 있던 통찰이라고 하는 것은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캄캄한 중세의 암흑시대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당시 2차 대전 후에 영국에 굉장히 복음주의적인 교회 속에서 유포되고 있는, 아까 얘기한 파커가 선배들에게서 배우는 교회의 그런 가르침이 이미 1세기 전에는 이단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논쟁이 붙은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이단으로 정제되지는 안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이 아니라고 하는 치열한 논쟁속에서 결국은 결퇴 됐던 것이 한 세기 후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삶에 있어서 역사를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말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그런 기록들의 역사를 대면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5년, 10년, 혹은, 일평생동안 썩혀버릴 그러한 영적인 잘못된 오리엔테이션, 방향을 잘못 잡은 것들을 올바로 보여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발견하는데 라일이 그 문제를 극복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거룩’이라는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거룩’이라는 그 책속에서 한 7편인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꽤 여러 편의 논설이 실려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앞에 것 2편은 아주 탁월하게 가치가 있고, 뒤엣 것은 약간 덜 가치가 있어요. 그런데, 앞에 나오는 그 2편정도의 논설은 제가 새빨갛게 언더라인을 하면서 충격을 받을 정도로 아주 탁월한 비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라일도 그것이 자기 원판이 아니라 물론 이제 자기의 사고도 많이 체험도 담겨있겠지만은, 거기서 라일이 자기 나름대로 세웠지만은 그것보다도 훨씬 튼튼한 원판을 발견한 것입니다. 원판이 뭐냐하면은 라일보다도 벌써 한 세기 훨씬 전의 사람인, 한 세기가 뭐에요 두세기 전의 사람인, 오웬에게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웬의 ‘모티피 케이션’의 교리, 칼빈의 ‘모티피 케이션’에 대해서 쓴 박사논문 한 권을 읽고, 오웬의 ‘모티피 케이션’의 교리를 아주 정독을 했습니다. 보면서 하여튼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 뭐냐하면은, 나는 나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페이지 넘기면서 넘기면서 뭘 느끼냐면은 ‘아, 나는 짐승이구나. 나는 인간도 아니구나.’ 진짜에요. 우리 집사람이 옆에서 봤어요. ‘나는 짐승이구나. 나는 인간도 아니구나.’ 내가 그렇게 양떼들에게 생각하면서 살라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생명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뇌하는 동안에 나는 한 줄도 다 내게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게 거기서 다 읽고 나니까, 아까 궁금하게 생각했던 문제들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리가 깨끗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오웬에게서 발견한 것은 제게 있어서는 성경 다음으로 엄청난 만남이었고, 그것을 읽으면서 무릎을 꿇고 내 평생의 선생님은 딱 한분밖에 없다고 그랬습니다. 오웬 밖에 없다. 그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죠. 제가 그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을 하면서 기도를 했는데, 주님이 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주시더라구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종 오웬이 있지 않느냐.’ 여러분들은 웃는데, 나는 그것이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웬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웬이 벌써 그 영어가 300년전의 영어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으로 유학간 형제 한 사람이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러면 당신은 2개 국어를 해야되는데...” 그러더래요. 그래서 이 친구는 ‘뭐 오웬이 독일어로 글을 썼나?’ 그랬더니 뭐가 2개 국어냐고 그러니까 ‘영어, 그리고, 17세기 영어’ 그렇게 이야기 하더래요. 그러니까 읽어 내려가며서 한계가 많이 있겠죠. 오웬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보니까 카테스트가 잡히면서 이제 읽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읽으면서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내 평생에 이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겠다.
그런데, 어느 청교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무엇인가 신앙에 대해서 당신이 좋은 것을 읽고 싶다면 저는 말하겠습니다. 에드워드와 오웬을 읽기 전에는 아무 책도 읽지 마십시오. 그게 안전합니다. 그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오웬은 굉장한 사람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그런 분은 안 나타날 것입니다. 굉장해요. 16권의 전집을 남겼는데, 그것을 번역을 해서 책으로 풀어내면 제가 보기에는 최소한 300페이지짜리 50권 정도는 될 분량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중에서 거의 번역된 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읽은 것이 뭐냐하면은 엄청나요. 지금 칼빈 이야기 하는데, 오웬으로 왔는데, 그것은요 스토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마음에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딱 때가 됐다라고 생각될 때에는 제가 오후예배를 필기로 설교를 하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와가지고 매주일... 이렇게 해가지고 한 20번정도 해가지고 완전히 ‘모티피 케이션’의 문제에 대해서 뿌리를 뽑아버려야겠다. 그런 생각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언제 여러분들이 들을 마음이 될른지 그게 이제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들을 마음이 되지 않으면은 웃기는 거에요. 다 듣고 나면은 ‘목사님, 예수 믿는 것이 너무 복잡해요. 옛날에 농부들은 어떻게 믿었을까요?’ 기껏 강의하면 이런 소리 합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면은 오웬은 그런 것을 자기가 그냥 만들었느냐? 아니에요. 이미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칼빈 이에요. 칼빈은요. 생각보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논리나 구조 자체가 굉장히 조직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그렇게 크게 사용하시나 봅니다. 22살 때 파리에서 공부할 때에 이미 그 시대 동시대의 사람이 유럽의 최고의 지성인 한 사람을 뽑으라고 그러면 칼빈을 이야기할 정도였답니다. 그렇게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철학, 법학, 인문, 사회, 그 사람의 독서량은 법학을 전공했지만, 하나에 그친 것이 아니라, 철학, 사회, 인문, 과학, 법률까지 해가지고 광범위 한 것을 섭령을 하면서 그 속에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파리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어렸을때, 어렸을 때가 아니라, 그렇지 어렸을 때지... 그러니까 처음에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반대하는 글도 쓰기도 했거든요.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복음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복음의 빛이 확 들어오니까, 머리가 돌대가리 였으면은 ‘뭐가 번쩍하고 지나갔다.’ 이렇게 이야기 할텐데, 쾅하고 주님을 만나니까 구약성경의 불이 확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인간사, 그 다음에 인간의 심리, 이 모든 것들을 보는데 전부 다 불이 들어오기 시작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확신하건데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 중에 10분의 1도 글로 다 못 쓰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인식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미 벌써 하나님을 만난 사람,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성도들이 뒤로 물러가서 깊이 타락에 빠진 것에 대해서 루터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통찰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대해서 교리를, 성경을 통해서 교리를 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모티피 케이션’의 교리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
그럼 결론적으로 그 죄 죽임이 말하는 것은 뭐냐? 이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고 바울에 버금가는 체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끊임없이 죄를 죽여서 그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 없이는 그 놀라운 체험이 당신의 신앙을 안전하게 붙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옥스퍼드에 다니던 이 파커가 한때 빠졌던 생각, 이렇게 하나님앞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서 충만하게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게 사실 수 있는데, 뭔가 내가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그 삶이 부자연스럽게도 노출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하고는 아주 다른 죄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나는 다시 말합니다.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은 맛만 보고 끝나겠지만은,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깊이 동의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내가 보았던 수 많은 사람, 그런 실패를 경험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진리의 빛이 여러분들에게 들어와서 여러분들이 정말 참 신앙이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믿어야지 올바르게 믿는 것인가에 대해서 황홀할 정도의 체험을 했다고 하고, 그 체험이 비정상적인 체험이 아니라 아주 성경적이고 깊은 하나님의 터치가 있는 체험이라고 하더라도, 이 죄를 죽이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그 도리를 깨닫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뒤로 물러갑니다.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웬하고 칼빈하고 비교를 했을 때 어떠냐? 오웬이 훨씬 치밀합니다. 칼빈보다... 칼빈은 서술 그 자체가 물론 목회적이지만, 그러나 굉장히 논리적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구조를 가졌습니다. 이 오웬의 ‘모티피 케이션’의 교리는 한 페이지를 넘기면 한편의 설교가 나오게끔 그렇게 목회를 하면서 철저하게 파고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만 파고든 것이 아니라 성경을 파고드는 열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파고든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 사람처럼 인간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깊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을 다루는 방법이 어떠냐 하면은 ‘모티피 케이션’의 교리를 설명을 하면서도 ‘이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고 뭐라고 그러나면은 이렇게 내가 말하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발론을 재기할 수 있을 겁니다. 예상되는 발론 1. 이렇게 하면서 이제 어디로 도망갈지를 미리 쓰는 것입니다. 쓰고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쭉 설명을 하면서 결국은 ‘그 길은 아니다.’ 하고 못 박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또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예상되는 모든 퇴로를 다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뭐냐하면 마지막으로 지성적으로 자기가 제시하고 있는 그 진리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방법입니다.
그런 식의 논법으로 설교한 게 오웬 만이 아니라 조나단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 해놓고 그 다음에 오브잭션. 그러고 나옵니다. 반대. 어디로 도망치려고 그러느냐. 죽 이야기 합니다. 이 길도 길이 아니다. 어떤 때는 여러 페이지를 하례를 하면서 필요 없을 정도로 요점만 얘기하면 되는데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도망칠 것이다. 죽 이야기하면서 그 길도 내가 가봤는데 아니더라. 그 길도 가봤는데 아니더라. 아니더라. 아니더라. 아니더라. 그래서 이게 대게 대 여섯 개정도 나가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그것 말고는 추론을 해도 정상적인 인간의 논리적인 추론에서 나오는 도망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퇴로가 차단 됩니다. 그런 배경들을 가지고 있던 것이 뭐냐하면은 청교도들이 지성적으로 먼저 무릎을 꿀리지 않으면 그 다음에 변화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지성적으로 무릎을 꿀린다고 해서 반듯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데, 지성적으로 승복 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도 말이죠. 설교시간에도 다룰 수 있는데, 설교 시간에 다루면은 이렇게 치밀하게 다루기가 조금 어려워요. 잘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이것을 깊이 생각을 하면서 동의를 하겠으면 하고, 말겠으면 말으라고...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렇게 깊이 지성적으로 탐구하면서 동의를 하게되면은 그 다음에는 삶은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 ‘모티피 케이션’의 교리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나서 나의 영적인 삶에 날개를 다는 것 같은 그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죄와 싸우고 이러는 것들에 대해서 ‘슬프고, 그냥, 왜 이럴까?’ 이런 생각만 들었는데, 그게 아니라 너무 기쁜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
그러니까 오웬 같은 경우에는 말입니다. 뭐라고 얘기하냐면은 ‘한 사람이 회개했다라고 하는 것이 뭐냐?’ 죄가 죽어야지만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범죄를 했잖아요. 예를 들자면은... 돈을 훔쳤다든지, 타락했다든지, 무슨 문제가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때, 그것이 잘못인줄 알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온전한 회개인가를 생각하려면, 니가 그 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생각할 때에 그 죄에 대해서 아직도 매력을 느끼고 있다면 그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는 됐는데 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회개라는 말의 ‘매타노이아’거든요. 회개... ‘매타노이아’를 회개라고 번역한 것은 이것은 정말 영어가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매타노이아’는 두 번 생각하는 건데 히랍어의 원래 이야기는 단지 두 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슬퍼하고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번역을 회개라고 한 것입니다. ‘회’는 정서적인 깊은 슬픔이고 ‘개’는 삶의 변화입니다. 기가 막힌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는 되고 개가 안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은... 그러면은 어떻게 돼야 되느냐? 니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그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니가 범죄한 그 죄를 떠올릴 때, 니 안에서 극도의 혐오감이 발동되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 그 끔찍한 것, 있을 수도 없는 건데, 내가 왜 그것을 만졌을까? 내가 왜 그것을 훔쳤을까?’ 그러면서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감정이 솟아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무슨 문제냐면은,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 회개했다고 그러는데 그 정도로 해당되는 게 몇 명이나 돼요? 그러니까 그런 논리의 구조를 가지고, 그 오웬이나 칼빈의 틀에서 보면, 죄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죄 위에 죄가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삶을 고사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냐면은 회개했는데, 진실했는데, 맞잖아요? 진실했는데,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억도 안하신다고 했는데, 그런데,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회개, 그 다음에는 죄의 영향, 이걸로는 그 구도를 가지고 신학적으로 자기가 처하고 있는 이 영적인 상황이 해결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해결이 안되잖아요. 회개하면 주님이 기억도 안하신다고 그랬는데, 참 마음으로 회개하라고 그래서 마음으로 회개했는데, 회개 장난으로 하는 사람있어요? 그것은 벌써 자기 자신의 양심이 회개 아니라고 안다고요... 자기가 최소한도 내가 회개 했다라고 외부적으로 말할 수 있을 때에는 진실로 그 죄에 대해서 슬퍼한 것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후회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뭐해요? 생명이 없잖아요. 생명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양심도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머리는 뭐라고 말하냐면은 넌 회개했으니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이 신앙적인 구도에서는 지금 내가 여러분들에게 제시한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전 이것을 해결을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습니다. 해결이 안됩니다.
그러면 또 뭐라고 충고할 수 있어요? 이제 우리도 예상되는 충고1. 뭐라고 충고할 수 있어요? ‘회개해라.’ 그런데, 다시 이 회개를 하려고 그러는데 회개의 강도가 옛날 것만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옛날의 회개가 그러면 거짓이었나? 진짜였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했다는 것을 자기가 알잖아요. 그런데 용서하신 흔적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 씰링, 하나님이 용서하신 보증, 이것은 어떻게 나타나냐면은, 하나님이 용서하셨을 때에, 단지 죄 의식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용서를 하고 나면은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들어와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다시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상태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게 진정한 의미의 사죄의 인침입니다. 사죄에는 인침이 있어야 된다 말입니다. 씰링이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그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회개하기 전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빠지는 것입니다. 제 얘기 잘 들으세요. 회개하기 전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빠지는 것입니다. 왜? 회개하기 전에는 분명했습니다. 뭐냐하면, ‘내가 이렇게 영적으로 곤고한 것은 죄를 짓고도 회개를 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교적 문제가 단순합니다. 그리고, 늘 회개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있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해주시면 나는 회개해야 될 사람이라고 하는 자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진실하게 눈물을 흘리고 뉘우치고 회개를 하고 나니까 이제 목표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해결이 됐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잖아요? 해결됐다고 말 안하면은 그러면은 논리적인 결함이 생깁니다. 옛날의 회개가 아니라는 것은 다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게 그게 성경적인 가르침입니까? 회개를 한번 하고 한참 있다가 죄가 생각나면 또 하고, 죄가 생각나면 또 하고, 죄가 생각나면 안해 버려도 되고, 그게 성경적인 가르침일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논리적인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그 회개를 할 수 없어요. 해도 옛날처럼 신명나게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첫사랑이 있고, 첫 회개가 있잖아요. 비슷한 것이란 말입니다. 죄를 처음 지었을 때 그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느낄 때 즉시 무릎을 꿇을 때 실감나는 회개가 되는 것이지, 한번 한 50%쯤 회개하고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아무래도 이게 하늘로 올라가다고 회개가 떨어진 것 같애.’ 그리고 인공위성 추가로 쏘는 기분으로 가서 내가 이거 회개해야 되는데 하는 의무감으로 가가지고 ‘주여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회개가 되냔 말입니다. 이것은 심정과 그런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혼란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만난 굉장히 많은 사람, 여러분도 그 추측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기에서 죄 지은 것 보다도 더 잘못된 사고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자, 회개했습니다. 죄 지은 것까지 인정을 하는데 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기존의 성경적인 자기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으로는 한번 회개 했고, 진실하게 회개했고, 누가 나에게 와서 목에 칼을 들이대도 진실한 회개였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또 내가 그 죄를 짓고 싶으냐 그러면은 그것까지는 아닙니다. 지금도 그 죄에 대해서 목말라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그때 죄를 지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그랬는데, 이 오웬의 구조에서 보면은 해결이 안된 것입니다. 그게...해결이... 그것은 오웬의 이야기에 의하면은 울부짖고 안 울부짖고 그 문제가 아니라 그 죄는 용서를 받았는데 ‘모티피 케이션’이 안되니까 그젠지, 저젠지는 모르지만 죄의 영향이 살아서 그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무슨 생각을 하냐면은 오직 그날에 지은 그 죄 하나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놈이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양심이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지 실제 상황은 안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 문제를 붙들고 씨름 하는 동안에 다른 죄들이 막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하나, 하나, 구역을 정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합력하여서 악을 이루어 갑니다.
그다음에는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은 그런 것에 대한 통찰이 없으니까, 죄를 지었고, 나는 깊이 회개했고, 하나님이 기억도 아니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기억하시는 것 같습니다. 뭔가 되는 게 없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뭐가 자라냐면은 겸비하고 하나님앞에 ‘내가 이럴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나를 용서하소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이 추축을 여러분들이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원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아버지앞에 매달리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기억도 아니하신다고 그랬는데 ‘내가 진실하게 회개하는데 나에게 아직까지도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시는구나.’ 하는 강한 원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원망이 도가 점점 깊어지게 되면은, 깊어질 거아니에요. 왜? 오웬의 구도에 의하면은, 칼빈의 구도에 의하면은 이런 죄의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을 회복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현재적인 문제는 생각을 안하고 이 사람은 오직 한 죄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놈만 없었으면은 나는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점점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래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못합니다. 포기해요. 포기... 포기하게 되면은 그 다음에는 급격하게 마음이 굳어지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 나의 힘으로는 더 어찌 할 수 없다라는 포기, 자포자기, 이런 것들이 함께 하나로 덩어리가 지면서 마음이 이제 돌같이 굳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들어도 그 진리가 간간히 자기의 마음을 건드리면서 눈물을 자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은 근본적으로 ‘모티 파이어’가 안되는 것입니다. ‘모티 파이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굳어진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결국은 자기가 받았던 변화, 그 변화가 가져다 주었던 신앙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구도. 이런 것들을 이 지성은 유지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문제는 상태가 그것을 써포트를 안해 주는 것입니다. 상태가... 상태가 지원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결국은 그 지성도 결국은 설복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복을 안 당하면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은 머리가 ‘넌 전혀 그게 아니야.’ 그러는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부작용이라고 그럴까? 이런 것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 가면은 결국은 인간의 마음, 사고, 이런 것들이 전부가 다 흩어졌던 것들이 다시 만나려고 합니다. 내말 이해가 가요? 예를 들자면은 처음에는 생각, 감정, 이런 것들이 어떤 충격을 받게 돼서 흩어질 수 있지만은 그러나 곧 다시 모일려고 합니다.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봐야 될 것인가? 결국은 이 문제에 대한 칼빈이나 오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아까 어떤 사람의 경우를 제가 예를 들었습니다. 옛날에 죄를 짓은 것에 대한... 칼빈이나 오웬의 답은 옛날의 그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옛날의 죄가 문제가 전혀 안되나? 아닙니다. 문제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그 죄 때문이라고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적인 상태의 계산의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회개할 수 없잖아요. 안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칼빈과 오웬의 대답에 의하면은 이 문제는 옛날의 지은 특정한 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시선을 주목해야 될 것은 현재 그 사람 내면 속에서 성장해서 그의 영적인 삶을 억압하고 있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러스트, 즉, 정욕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정욕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강력한 욕망을 가지고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게 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죄의 공통점은 뭐냐하면은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씨앗을 뿌리잖아요. 그러면은 처음에는 하나님앞에 불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체험을 안했다고 하더라도, 처음에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뭔가 깊이 깨닫고 눈물을 흘렸어요. 그런데 그게 잘 보호를 받으면서 살려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려줄 수 있게... 그러면은 그 은혜가 계속 자라서 커다란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말이죠. 강한 부흥과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있는 곳에서도 신비한 체험을 하지 않고도 굉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인식을 가지고 변화되는 사람들을 몇 명 만났어요. 신비한 체험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방언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눈물을 흘리고 깊이 감화를 받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막, 불 받았다고 하면서 안변하는 것은 왜 그래요? 그쪽 사정이 있겠죠. 그런데 저는 그것을 보고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 쥐불놀이 할 때, 손이 새까매져가지고 쥐불놀이 하잖아요? 그런데 애들이 또 불씨가지고 서로 재잖아요? 요만큼 불씨만 있으면 갖다 놓고, 나뭇잎 같은 것 이렇게 해놓고 어떻게 하냐면은 꺼져갈 것 같애요. 그런데 후~ 후~ 후~ 후~ 후~ 후~ 하면 쫙 불이 올라오잖아요. 은혜 살림이 ‘비비 케이션’이 말하자면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칼빈과 오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무슨 인상을 받냐면은, 강력하게 하나님이 부흥에 가까울 정도로 부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뭔가 이렇게 주시면, 후~ 후~ 후~ 후~ 이렇게 살리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죄로부터 피하고, 더 많이 은혜에 수단에 참여하고, 더 하나님의 말씀께로 가까이 다가가고, 세속적인 것보다는 거룩한 사람들과 만나려고 하고, 그 안에서 교제하고 싶어하고 하는 것이, 비유를 하자면은 후~ 후~ 후~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만한 불씨를 교회에 와가지고 받아 가가지고는 쫙, 쫙, 물을 끼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되는 일이 있나? 눈물 펑펑 흘리고 불씨 꽤 큰 것 받았어요. 이만한 것을 지난주에도 불씨 꽤 큰 것 두 개나 받아가지고 갔는데 가자마자 쫙, 쫙,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거기에...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 이것은 소낙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소낙비가 끌 수 없을 정도의 불씨를 못 받았기 때문이다’가 옛날에 제가 생각했던 방식입니다. 그런 단편적인 사고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상당히 신선하죠? 그런데, 그 신선한 이야기가 4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짐승같지 않아요? 짐승들이에요...이정도만 합시다. 이정도만 하고 기회가 다으면은 이제 예고를 하고 ‘모티피 케이션’에 대해서 아주 칼빈, 오웬 모두 통털어 가지고 결정판을 한번 만들어서 완전히 죄의 그런 영향이라든가, 역사라든가, 이런 것들을 밝히 다 들어 내가지고 능지 처참해 버리는 그런 역사를 한번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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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모티피 케이션’의 교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화교리의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여기서는 성화교리의 토대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교리를 음미하는 것으로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혜의 통로 이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무슨 얘기냐 하면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면, 우리의 지난 죄를 사해주시잖아요. 지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사해주시는데, 십자가에서 주님이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십자가 사건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지 옛날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뭐냐하면은 그리스도와의 유니온입니다. 연합입니다. 그 즉시 그리스도께 접붙임바 되어서 신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연합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그 연합을 통해서 죄인 되었던 우리를, 이제는 용서받은 우리를 향해 흘러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냐면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 그리고 그 은혜는 능히 그 죄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다 주는 그런 놀라운 은혜는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보겠습니다.)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성화(나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거룩해져가는 삶의 변화)로부터 생겨나는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이것이 칼빈 신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입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죄 있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은 거기에는 나름대로 아주 중요한 계획이 있었는데 그게 성화에요. 날마다 자기를 깎여지고 다듬어져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는 변화를 통해 영광돌리게 하실려고 죄 있는 사람을 의롭다 이렇게 인 쳐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것은 이겁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에 관하여서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말하고, 명상하고, 행하지 않도록 하나님께만 성별되고, 받쳐진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를 따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바를 추구하는 것을 우리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연약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약함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쉽게 얘기하면은 목표를 정하는 것은 연약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다가 못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만, 전쟁 나간 사람이 목표가 뭐냐고 그러니까 ‘집에 가는 것’ 이건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싸우다가 도망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목표는 ‘이기는 것’ 이렇게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정해져 있어요? 요즘 한국교회 교인들한테 이런 것 물어 보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겠죠. 목표를 삼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것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우린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합시다.(이것이 전제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죄된 인간을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양은 변화된 삶에서 비롯된다(노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관심(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이런 집착을 가지고 계신다. 구원 받은 너희들은 내게 영광 돌려야 된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으로 표현된 인류를 향한 사랑을 감하지 않는다. (역시 그렇게 구원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신자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이 그들과 함께 기꺼이 하나 되시려고 하는 의지를 통해 들어난바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가장 고상한 행복은 사람이 하나님을 담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은 그분과 연합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고상한 선은 하나님과의 단순한 연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닮을 때 그것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 생각이 단편적이 아니잖아요? 예수를 믿으면 주님과 연합되는데 여기에서 또 연합은 성화의 연합을 얘기하잖아요. 우리들이 온전히 주님을 닮아갈 때, 그 때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하나 됨을 느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의 최고의 가치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해 질 것이냐?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릴 것이냐? 얼마나 큰일 하다가 죽을까? 그런 것들이 가치가 되게 되면 그것은 거룩한 삶을 목표로 하는 삶이 아닙니다. 목표는 거룩한 삶입니다. 큰일을 하고 죽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들만 그리스도를 들어내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의 주위에서 보면은 일에서는 성공했는데,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서는 실패한 사람들을 보죠? 제가 어디서 읽은 이야기인데, 미국에나 카나다 같은데에 보면은 ‘텔리밴젤 리스트’들이고 있죠? 텔레비젼에 나와서 심야에 설교하는 사람들입니다. ‘텔레비전’ 플러스 ‘이벤젤 리스트’라고 해서 ‘텔리밴젤 리스트’ 라고 하는데, 이번에도 하용조 목사님하고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미국에서도 정말 영적인 설교자들은 ‘텔리밴젤 리스트’ 안한답니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그렇게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텔리밴젤 리스트들’중에서 어떤 여류 설교자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유능하게 설교를 잘한답니다. 설교를 하고 나면은 밤에 자다가 불면증 환자들이 설교를 듣고 일어나가지고 양복장에 가서 수표책을 꺼내야 된데요. 왜? 헌금, 그 자리에서 헌금을 긁어야지만 잠이 온데요. 그래서 2500만 명이나 되는 그 많은 불면증 환자들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설교 한번 쫙 하고 은혜를 받고 다 잡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이 여자가 변사채로 발견됐습니다. 수사를 했더니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입니다. 어떻게 됐냐고 그러니까 수년 동안 과다한 양의 수면제를 복용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잠재우고 자기는 들어가서 못자는 거고, 수면제를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몸이 시퍼렇게 변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그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꼭 같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일에는 성공하고, 삶에 있어서는 완전히 실패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뭐라고 그러냐 면은 일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많이 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니까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펄전 같은 사람들 보면은 눈코 뜰새 없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정말, 눈코 뜰새 없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런 많은 일을 하면서도 일에 안 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삶의 목표가 ‘업적의 성취’가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라고 하는데, 목표가 되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많이 일하면서도 하나님앞에 은혜가 마르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을 많이 하고 일을 줄이고 그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얘기 했잖아요.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복잡한 도시에 서면은 더 갈급해서 부르짓고, 숲속에 들어가면 하나님 찬송하고 싶지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그분을 위해서 깊이 살려는 이 기본적인 내적인 갈망이 없는 사람은 도시에 들어오면 타락하고 싶고, 숲속에 들어가면 돼지 불고기 해먹고 싶다고 그러잖아요. 뭐 선한 것이 나오겠어요.)
더욱이 칼빈은 신자로 하여금 최상의 선(얼마나 정확한 통찰이에요.)이 뭐냐? 하나님을 닮게 하심에 복종하는 것을 성취하는 방법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중요성에 대해서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와 접붙임바 되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합하여졌으며, 그러므로 그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은 우리가 장성하여 그분과 한 몸을 이루기까지는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뭘 얘기하면 거듭났을 때에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 아까 말한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고, 성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 되는 연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서 뭐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모티 파이브’, ‘모티피 케이션’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말하자면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가 누린다 이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칼빈은 신자들이 어떻게 2권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사역의 은혜로운 결과들을 분여받게 되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에 있어서 이 중요한 전이, 2권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와의 사역을 3권에서 신자의 유익에 적용하는 것은 전이는 3권의 제목,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그것으로부터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또, ‘어떤 효과가 오는가’ 라고 하는 제목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이 단원에서 칼빈은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역할에 대해서 많은 사실들을 드러내 보여준다.
첫째, 무엇보다도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성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논증하기를 이러한 연합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단지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대하여 유익이 없고,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분께 연합시키고, 우리를 그분의 몸에 지체로 삼으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성화를 포함한 그 속의 모든 유익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타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몸에 접붙이사 우리를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모든 유익뿐 아니라, 자신 안에 참여하는 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의 몸에 접붙이심으로 죽으심과 부활의 유익을 전해주시지 아니하였다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이때 이제 반대되는 이론들이 나오는데, 이게 영적인 연합이 아니라 본질의 연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게 오시안도 같은 사람들인데, 이 오시안도는 루터시대에 루터파에 속했던 신학자입니다. 루터하고는 견해를 달리해서 떨어져 나옵니다.) 칼빈은 이 연합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을 유비로 사용합니다. (아주 좋은 예입니다.) 이 연합만이 우리에 관한한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오신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보증합니다. 꼭 같은 목적이 우리가 그분의 살 중에 살이 되고, 뼈 중에 뼈가되는 신성한 결혼생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부부가 결혼한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장기가 서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고 독립된 개체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합을 이루면 여러분 내 장기가 왔다 갑니까? 물론, 주면은 가지만 저절로 왔다 갔다 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신비한 연합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그런 것을 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이러한 연합은 인간과 그리스도의 고유한 본질의 분리를 허락합니다. 이처럼 칼빈이 그리스도와 신자의 하나됨을 묘사하는데 강력한 표현을 사용했으나, 칼빈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본질적인 연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그러한 연합은 사람됨과 혼돈되지 않으면서도 친밀하고 인격적인 연합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형상으로 변화시켜주게 하는 연합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그리스도인과의 이러한 연합은 따라서 하나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리만치 매우 신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 연합을 결속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칼빈은 이러한 연합의 영적인 성질은 오직 성령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효능있게 연합되도록 결속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게으른 사색으로서는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거룩하고 신비한 연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입니다. 칼빈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분이 우리속으로 자신의 본질을 부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오시안도의 견해죠.) 그의 영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아버지의 축복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의 성화를 가져오게 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십자가의 거룩해하는 은혜들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과 은혜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직 믿음(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입니다.)을 통해서만 확립된다. 믿음에 의해서 천상의 왕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우리를 그 몸의 지체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믿음, 그 믿음을 보고 역사하시는 성령, 이것에 의해서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입니다. 첫째, 믿음은 인간이 자유롭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릴 때까지 견고하지 않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 믿음이 그리스도와 우리와 하나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일 수가 있겠습니까? 칼빈의 진정한 믿음에 대한 이해는 (다섯줄 내려와서)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며 초자연적인 은사와 같다. 성령은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선도권을 쥐셔야 하는데, 이는 인간의 영적인 소용됨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능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인 무능을 해결하는 방법이 성령의 조명입니다. (성령이 비쳐주셔서 참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칼빈이 믿음을 정의함에 있어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을 소유하게 하는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을 포함한다. 우리가 만약 어떤 지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주어진 진리위에 세워지고 우리의 지성의 드러난바 되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인친바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에 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면 믿음에 대해서 올바른 정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
칼빈에 의하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에 있어서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는 칭의와 성화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이 그거 아니에요? 주님을 믿고 거듭날 때 칭의가 주어지잖아요. 의롭다 칭하시잖아요. 그때,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연합이 뭐냐하면은 우리가 매일매일 죄를 죽이고 주님을 닮아감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면서 그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들어와서 그 은혜로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같이 강조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으로서 원리적으로 우리는 이중의 은혜를 받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무흠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되었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심판주 대신에 은혜로운 아버지를 모시게 됩니다. (이게 칭의 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하여 순결하게 되었기 때문에 무흠한 삶과 순결을 가꿀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성화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국교회의 커다란 문제는 뭐에요? “자, 믿습니까?”, “아멘”, “주님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할렐루야. 구원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뭐에요? 이제 복 받고 사는 일만 남았죠? 그런데, 복이 그렇게 쉽게 안 온다는 말입니다. 쎄게 기도해도 쉽게 안 온다는 말입니다. 혼미한 것입니다. 혼미... 그러니까, 누가 얘기를 해요. 칼빈이 한국에 와서 장로교회를 보면은 “내가 언제 이런 거 하라고 그랬냐”고 그럴꺼라고... 쉽게 얘기하면 칼빈의 신학적인 강조한 무게점이 어디에 가 있냐면은 바울하고는 좀 달라요. 바울의 경우에는 구원론하고 기독론이잖아요. 이 사람도 기독론인데, 이 칼빈의 강조점은 뭐냐하면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루터의 신학의 강조점은 ‘솔라피데’ ‘오직, 믿음이어야 한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사람이 설명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오직 믿음으로서든지 모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칭의. “구원받았다. 할렐루야” 해놓고 성화에 대해서 안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할렐루야 구원받았다. 정죄함이 없나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은혜를 마구 부어주십니다. 이제는 주님이 우리를 어쩔 줄 몰라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 보면은 안 그러는 것 같애요. 주님이 우리를 찬밥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게 꼭 뭐와 똑같으냐하면, 오토바이가 두 바퀴를 가지고 다니게 되어있는데, 칭의와 성화를 가지고 가게 되어있는데, 앞바퀴는 왕창 크고, 뒷바퀴는 없습니다. 그러니, 가긴 가는데 오죽 하겠어요... 오죽 하겠어요... 여러분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물어봐요. “예수 믿었습니까? 구원받았습니까?” “예” “확실합니까?” “예, 확실합니다.” “분명합니까?” “예,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뭡니까? “잘살아야죠. 복 받고 잘 삽시다.” “할렐루야. 성령충만, 운수대통”
그러니까는 결국은 비유를 하자면 어떻게 되냐면은 홍해의 역사를 보고 건넜는데, 그 다음에는 가나안으로 안가고, 그 홍해 건너편에 앉아서 불고기나 먹었으면 탈영하면서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향수병자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목표 있어요? 나는 내가 그런 게 없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물론, 내가 그렇다고 해서 날라리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어요. 나도 은혜를 받았지요. 주님 뜻데로 살고 싶었지요. 그래도 뭔가 은혜를 받고 양심있는 사람은 무조건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막 들어오는 것입니다. 일단 가고 보자라고... 그건 하나의 뭐라 그럴까? 보상심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갈적마다 그래요. 이 중에서 3분의2는 다 가짜다. 왠만하면 가서 햄버거 장사라도 해라. 궂이 이 길 갈려고 하지말고... 그런데, 그런 것이거든요? 그게 뭐냐하면은 은혜 못받은 사람은 그럴 수 없고, 은혜 받은 사람은 뭔가 한풀이 식으로 주님을 위해서 한 건 올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한건... 뭐, 시골 벽지에 들어가서 한 건 올려야 되겠다 라든지, 새까만 사람들이 모인 선교지에 가서 자기도 한번 새까매져서 한건 올려야 되겠다든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일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서 얘기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칭의와 함께 주님을 닮아서 거룩해져가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무한한 기쁨이 되고, 신자의 무한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동의가 되요? 글쎄, 동의가 진짜로 되는지 한번 봅시다.)
칼빈은 칭의를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운데 의로운 사람으로 받으시는 용납함으로 정의하는데, 이 칭의는 죄의 용서와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칭의는 즉각적이고 도덕적인 완전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렇죠. 회개하고 거듭났다고 그래도, 사람의 도덕적인 수준이 신통치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과 화목케 하신 자들이 행위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들은 과연 여전히 죄인들로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잖아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헛된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죄의 용서에 의해서 죄책들이 깨끗이 씻겨버렸을 때에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칭의는 소극적으로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즉각적인 전가를 통해서 죄책을 영원히 제거하심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루어진 신자의 화해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성화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점점 더 철저히 본받음으로서 죄된 본성의 뿌리를 잘라내는 과정이다. 칼빈은 단언하기를 성화는 하루만에 즉각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도 그렇게는 안하신다.) 오히려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장막을 벗기시고 그의 의로 우리를 채우실 때까지 우리의 생애의 전과정을 통해서 서서히 성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신자의 삶 전체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칭의라고 하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행동과 혼돈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생각이 칼빈으로 하여금 의롭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간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거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아니에요? 피조물이라고... 너도... 왜? 거듭났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우리는 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런데, 사실은 칼빈의 무게는 성화쪽에 굉장히 많이 가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 바울의 견해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지로 말이죠. 성화에 대한 문제가 중대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은 어떤 결과가 오냐면은 감격적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다음에는 삶은 엉망징창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구원을 하신 목적은 뭐냐하면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온 땅에 알려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다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게 삶이 거룩으로 나아가는 삶이 안 돼면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그 자체가 좌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교회적인 커다란 문제는 뭐냐하면은 이 문제에 대한 강조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도, 나쁘게 말하면 구원을 해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는 구원이 됩니다. 교회가 늘어나도... 그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껏해서 하는 이야기가 윤리를 회복해야 된다고 이제는 거룩이나, 하나님과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거기에서 오는 능력의 공급, 그것을 통해서 죄를 이기는 삶, 영적인 충만함, 그러면서 죄를 혐오하게 되는 삶, 이런 기초는 다 무너뜨려 버리고, 일단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보자 그러고 뛰어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데올로기라고... 이것은 나쁘게 이야기하면은 우상입니다.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수정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특징 아니에요? 하나님도 판단하지 못하는 그렇게 이데올로기화 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조각으로 나누어지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함께, 그리고 나란히 이해하는 이 둘, 즉,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 둘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첫째, 칭의와 성화는 함께 인간타락의 두 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이중의 정결함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인간에게 두 가지의 죄가 있는 거죠? 교리적으로 뭐가 있어요? 조상으로 물려받은 원죄가 있죠? 그 다음에 또 뭐에요? 자범죄. 살아가면서 죄를 지으면서 죄의 경향, 죄책들이 우리 안에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칭의는 원죄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이제는 용서함 받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짓는 그 죄는 칭의의 문제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어떻게 해야 돼요? 성화에 의해서 그 죄가 매일매일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갇다가 정죄의 문제하고 혼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신앙적인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주님 날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도를 했더니,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하니까 ‘용서해 줬다.’ 그때에 ‘무슨 죄를 용서해 줬냐?’ 물으면은 ‘이 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짓는 죄는 어떻게 해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돼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죄 덩어리인 인간을 ‘넌 의롭다.’ 이렇게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은, 과거의 원죄뿐만 아니라, 또한 과거의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를 모두 다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은 하나님이 죄를 징벌하지 않겠다고 용서해 주셨다고 해서 그 죄의 영향이 그친 것이 아닙니다. 이해되요? 원죄가 지금 우리에게 영향을 줘요? 안줘요? 원죄가 지금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요? 안 주고 있어요? 주님이 용서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용서하신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죄는 영향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앞으로 정죄함이 없다.’ ‘지옥에 안 간다’ 그 문제가 아니라, 죄의 경향과 영향이 남아있으면 주님의 용서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고, 그게 지금 우리를 사로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못 살게끔 우리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모티피 케이션’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느냐? 안 받느냐?’ 그 문제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 ‘모티피 케이션’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누가 아니래요? ‘주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한 번 구원을 하시면 후회를 안하신다는데...’ 그 문제가 아니라, 사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그 죄가 사죄, 용서 해주시고 정죄 안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데 어떻게 하냐 이 얘기입니다. 어떻게 하냐? 그게 문제입니다. 실제적인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설명합니다.)
이제, 깨끗게 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단번에 이루신 것인데, 우리의 죄를 날마다 쳐부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결하고 의로운 자로 만들어서 바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육체의 소욕을 죽임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양자의 관계와 관련하여 조나단 레인보우는 이렇게 관측합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변화시키는 은혜, 즉, 성화의 은혜는 항상 의롭다 하시는 은혜와 (이것은 칭의의 은혜입니다.) 칭의의 의는 쌍두 마차의 관계입니다. 죄책과 오염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항상 함께 있다. (죄책은 해결이 된 것이에요? 안 된 것이에요? 죄에 대한 책임. 원죄의 책임만 해결시켜주고, 자범죄는 두고 보자 그러셨어요? 그러면 한 사람도 천국 갈 사람이 없죠. 죄에 대한 책임의 문제는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염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염이 사고, 생활, 의식, 의지, 감정, 도덕, 여기 전체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죄를 짓잖아요. 죄를 지어도 주님이 이미 우리를 용서해 주셨는데, 용서해 줬어도, 그 죄가 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또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주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죽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일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입니다.’ 이게 똑같은 얘기입니다. ‘비비 케이션’은 ‘모티피 케이션’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모티피 케이션’이 안되면 ‘비비 케이션’도 안된다 이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어도 그 은혜로 죄를 죽이면 은혜가 살고, 죄가 살면 은혜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칭의와 성화는 둘 다 동등하게 그리고 한 가지로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룹니다. 이 두가지의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 용서와 회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칭의는 용서와 관련되고, 성화는 회개와 관련된 것입니다.) 복음의 전체가 이 두 개의 머리말, 회개와 용서라는 말 아래에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람들을 성령으로 거룩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의에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의롭다고 칭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칼빈은 결론 내리기를) 그러므로 신자들로 하여금 칭의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성화 때문에 하나님 기뻐하기를 배우게 하라. (무슨 얘기에요?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기쁨,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 이것을 제가 설교 속에서 뭐라고 표현했어요?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 기쁨? 그렇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즐거움,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방법을 배우게 해야지, 성화가 천국가기 위해서 죽어라고 고생하며 가야되는 십자가 짐같은 고생길이라고만 생각하면 안된다 이 얘기입니다. 하나님앞에 사는 즐거움을 가지라.)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분리된 믿음(성화와 칭의를 구분해버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구속목적을 나누어놓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놀랍죠?)
셋째로. 칭의와 성화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있어서 공통적인 출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 (즉, 공통적인 출처는 뭐에요? 하나님의 은혜에요.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리고, 또 용서와 함께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처럼 은혜라는 말로서 구속의 양면을 모두 이야기해야 된다. 즉, 죄의 용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하신 사죄와 성령의 거룩케 하심,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새사람을 만드시는 성화이다. 회개와 죄의 용서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며, 둘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획득됩니다. 말하자면 이처럼 삶의 실제적인 거룩함은 의의 자유로운 전가와 나뉘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거룩케 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획득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닮음에 있어서 신자의 수동적인 역할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성부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신바대로 그리스도를 끌어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단지 우리의 죄와 용서, 평화만을 위해서 드려진 것이 아니라, 또한, 성화를 위하여 드려지셨기 때문에(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이 왜 죽으셨냐? 그럴때 우리가 강조되는 것은 우리를 죽지 않게 하시려고 죽으셨다는 것은 강조되지만,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죽으셨다는 사실은 강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정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용서해 주려고 죽으셨다 사실만 강조되고, 그분을 닮아서 거룩하게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동일하게 강조되야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해도 전면적인 수정을 요하는 것입니다.) 의심할여지 없이 누구도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동시에 이해하지 않고는 그분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만약 누구든지 더 쉬운 진술을 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부터 떼어놓고 이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경건한 내면의 마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믿음으로 칭함을 얻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반듯이 의의 성품이 생기게 됨으로 칭의와 성화, 이 두 가지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 땔레야 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를 거룩케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도권은 신자가 성화의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필요가 대치되지 않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신자를 거룩하게 하심에 있어서 신자가 거룩해 질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거룩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게 칭의와 다른 점입니다. 칭의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주님이 ‘넌 의롭다’ 그렇게 하시면 끝나는데, 성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게으름을 타파하고 부지런히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앞에 끌고 가고, 그리고, 기도하지 않으려는 자기를 끌고 가서 기도하게 하고, 은혜의 수단에 참여시키고, 신령한 교제를 하고, 이렇게 변화되어 가야지만 된다 이 얘기입니다. 이런 노력없이 은혜, 은혜만 이야기하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화에 있어서 신자의 개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신자를 성화에 참여케 하면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죄와 능히 싸우게 하고 점점 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한다. 칼빈은 ‘모티피 케이션’과 ‘니제리느 레이션’을 성화와 동요로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 합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죄를 완전히 멸할 때까지 여러분 안에서 시작된 육체와의 싸움을 계속해서 싸워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게 해주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었으며, 그 능력은 영원하며, 언제까지나 창성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죄와 더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육체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직설법(이것은 이것이다.)과 명령법(이렇게 해라.)을 사용하여 가르치는 바울의 패턴을 분명하게 재의미합니다. 칼빈은 직설법으로 진술된 하나님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또 명령법으로 진술된 바 신자의 적극적인 순종을 통해 밝히 드러납니다. 이처럼 칼빈은 신학에 있어서 불일치를 재음미하기 보다는,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득권과 인간의 순종하는 반응 사이에 성서적 긴장을 지지하였습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성화와 칭의 모두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칼빈은 죄인이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향하여 점차 점차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점차 점차 하나되어 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설교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라고 하는 표현이 이 표현입니다.) 더욱이 구원은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미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구분했지만, 칭의와 성화는 경험에 있어서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정죄함이 없다. 주님은 나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가 거룩한 삶을 살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분리되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는 칭의를 바꾸어보니까 나중에 생각이 난 생각이거나, 혹은 나중에 끌어낸 문제거나, 심리학적인 구원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성화는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마치 칭의가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화는 선택의 문제이거나 자기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필수 불가결하고 피할 수 없는 의문이다.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이제 좀 제대로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게 성화의 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선택하고 취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한국교회 교인 중에 거듭났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굉장히 많다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 논리대로, 이 구도대로 보면은...)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의 나누어질 수 없는 성격은 두 가지 모두 진실한 신자의 삶에 있어서 실제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죄 죽임에 관한 연구의 시종일관 우리의 마음을 떠나지 말아야 된다. (그러면은 칭의는 그렇고 성화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기 좋아하는 인간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어갈 수 있느냐?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은 죄 죽임의 교리라는 것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는 뭐와 관련돼요? 칭의가 아니라 성화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리를 파악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신을 보지 않으면은 성화의 중요한 걸림돌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에 따르면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그리고 이 은혜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법적, 하나는 경험적이다. (법적은 칭의, 경험적은 성화입니다.) 법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가 받았다고 하더라도, 칭의, 전인의 역사하시는 성령의 거룩한 사역으로 경험적으로 그의 형상(이것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형상입니다.)을 닮아간다. 그리스도의 의의 법정적 전가에 대한 신자에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칼빈에게 있어서 이 회개는 실제적으로 성화와 동의어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는 것, 그것이 죄를 죽이는 삶의 첫걸음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회개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이런 것은 외워났다가 회개가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한테 그냥 외워주세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로 돌이키는 것, 그분께 대한 순전하고 열망있는 두려움으로 비롯된 돌이킴이며, 이것은 우리의 육신과 옛사람이 죽는 것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사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것이 뭐죠? 두 가지입니다. 뭐냐하면, 죽는 것과 사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죄를 깊이 뉘우치게 되면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 죄에 대해서 죽는 것과 함께 다시 은혜가 역사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함께 들어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화와 회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죽이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바 은혜를 살리는 것, 이처럼 칼빈에게 있어서 죄 죽임과 은혜살림은 칭의에 이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달려있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와 성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그 문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고로 오웬에게 있어서 이 ‘비비 케이션’은 상당히 약해요. 약하다기 보다도 구지 이런 말을 사용 안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철저히 죽이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는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 차이가 나요. 그러면서도 역시 여기서는 ‘비비 케이션’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합니다.)
칼빈에 따르면 죄 죽임의 대상은 육신 혹은 옛사람이다. 칼빈이 육신을 가르치는 말로써 생내적 성향, 인간의 공통된 본성, 원래적 본성의 부패를 포함한 수많은 동의어를 사용한 것은 그 용어가 단순히 인간의 물리적인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오히려 육신은 아담의 죄로부터 직접 물려받은 도덕적 타락의 상태 가운데 있는 인간의 본성의 총체가운데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진술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린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우린 아담 안에서 죽었다. 아담은 범죄 함으로 불행과 파멸을 스스로 좌초했을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을 파괴와 방불한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까지 퍼진 죄의 전염은 모든 인간을 사악하고 타락한 상태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믿음, 사랑, 자비, 의에 대한 열심을 이루고 있는 영적 은사들을 빼앗겼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지성의 건강함과 마음의 올바름도 동시에 잃어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타락한 마음을 이루고 있는 육체인데,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적대적인 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이러한 상태로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육신이 제일 먼저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이 육신이 죽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육신은 성령의 검에 의하여 무참하게 죄된 경향이 죽어야 한다. (그것은 말이죠. 결국은 완전히 죽는 방법은 없습니다. 죽었다가 또 살아나고 또 살아나고 하는 것입니다. ‘모티피 케이션’ 했다. ‘모티 파이’ 돼버렸다. 그것은 어떤 상태냐? 완전히 죽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된 육체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모티 파이’됐다. 죽여 버렸다. 그것은 어떤 상태냐 하면 남아있긴 남아있는데 나의 삶에 거의 영향을 못 끼칠 정도로 거의 죽은 상태가 된 것, 그러한 ‘모티 파이’된 상태에서의 감격에 찬 고백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십자가 그리스도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아니면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거가지고도 저는 고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그게 날 가리키는 말 같은데, 따라하다가 대입을 해보면은 아예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화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칭의가 아니라...)
칼빈에 의하면은 육신은 성령의 검에 의하여(여기서는 이제 두가지가 됩니다. 성령과 말씀. 두 가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려서 영향을 거의 못 미칠 때 육신(이것은 죄를 좋아하는 육신입니다.), 이것이 죽은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자녀들 가운데 공통적인 본성이 죽으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죄 죽임은 두 표현 속에서 나타납니다. (거기에 중요한 얘기가 나옵니다.) 신자는 중생을 통해 죄에 대한 멍에로부터 자유로와 졌다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로마서 6장에 나타난 죄에 대한 신자의 죽음에 관해 칼빈이 언급하는 속에서 묘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동시에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중생하게 하실 때에 우리는 단번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6장 12절에 ‘그러므로 너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고’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죄를 우리 마음안에 솟아나고 우리를 죄짓도록 강요하며 그리고 우리의 모든 악한행동과 사악함이 뒤따르게 하는 본래적인 타락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처럼 죄에 의한 인간의 마음에 절대적인 지배는 본래적인 타락은 신자에 있어서 종식되었습니다. 칼빈은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실로 이 일을 당신의 백성들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이루십니다. 죄의 지배를 그들 안에 종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죄와의 투쟁가운데 우리를 획득하실 수 있고, 승리자가 되는 능력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지배하기를 그쳤을 뿐이지 그들 안에 거하기를 그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그들의 죄된 육체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느낄 수 없으리만치 완전하게 누리지는 못한다. 비록 죄의 절대적인 지배는 끝났지만 죄의 실체는 신자 속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즉, 이런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면은 주님을 모르고 살다가 주님을 믿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그에게 접붙여주셨잖아요. 칭의를 통해서... 성화가 남아있기는 하지만은... 그런데, 이렇게 주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해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령의 법이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하 면은, 무슨 선언이냐 면은, 예수 믿기 전에 거듭나기 전에는 죄가 왕처럼 굴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 속에서 죄가... 그러니까 그 죄가 왕처럼 굴림 해서 철저하게 자기가 원하는 데로 인간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는 순간에 그러한 인간을 향한 절대지배가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지배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서는... 그래서 뭐냐 하면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처럼 죄가 꼼짝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살수밖에 없게끔,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지배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지배... 꼼짝도 못하고 도저히 거기에 항거할 수 없이 죄 가운데 살아야 되는 그런 식의 지배는 아무리 후진 삶을 사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종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뭐가 이루어지냐 면은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새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8장 1절에서 그렇게 얘기한 다음에 8장 13절에 뭐가 나오냐 면은요. ‘누구든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할 때 그 누구든지가 누구냐 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그 사람을 가리킨 너희라는 것입니다. 이 오웬의 설명은...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동의할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은 불과 10절을 사이에 두고 ‘정죄함이 없나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던’ 그 사람을 밑에 가서는 ‘그러나 너희 중 누구든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그 문장을 조금 뒤집으면 어떻게 되냐하면은 ‘너희 중 누구든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아니하면 너희는 반듯이 죽으리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망은 그런 마귀에게 지배를 받는 사망인데, 뒤에서 이야기하는 죽으리라는 영적인 생명력과 생기를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로마서 8장안에서도 죄 죽임과 이 성화가 얼마나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인 문제인가? 이것은 단지 선택의 문제라든지 아니면 열심히 하면은 상받는다는 문제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는데, 그렇게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성화를 이루면 살고 못 이루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는데도 역시 죄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는다는 개념이 아까 말한데로 생명력 있는 신앙의 생기를 모두 잃어버린 것을 죽음으로 본 것이고, 생명력 있는 신앙의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산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웬의 경우에는 이 산다는 것을 영적인 정력, 영적인 힘, 권능, 이런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속에서도 굉장히 커다란 함정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권능 달라고 기도하는 대부분의 기도 있잖아요? ‘하나님, 더 충만한 권능을 주시옵소서’ 그 기도를 해야 될 필요성은 지금도 여전히 느끼는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은혜와 권능도 주님이 주신 것들을 이렇게 영으로서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철저한 죄 죽음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내안에서 고사시키면서 더 능력을 또 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당착에 빠지는 것입니다. 주셔도 즉시 자신 안에 들어오면 또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계속 죽이면서 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뭐냐하면은,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능력을 달라는 것인데 ‘그런 것은 없다’고 하나님도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없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하면은 저는 주위에서 살아가면서 예수 믿었는데 예수 믿으면 생명과 성령의 법이 해방했다고 그러는데, 그런데 예수 믿기 전보다도 더 죄에 눌려서 흉학하게 사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건 왜 그래요? 생명과 성령의 법이 해방시켜줬는데,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전혀 죽이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그 속에서 은혜는 거의 철저히 죽고, 그리고 ‘모티파이’ 되어야 할 죄의 영향은 강성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비유를 만들어 냈거든요? 뭐냐하면은 쿠테타가 일어났어요. 쿠테타가 일어났다고 하면 말이 안된다. 전쟁이 일어났어요. 전쟁이 일어났는데, 다 수내부를 다 두들겨 부셨어요. 그리고, 결국은 평정이 되어 버렸어요. 예를들면... 평정이 되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젠 어디가서든지 대한민국 화폐가 통하고, 법률이 통하고, 세금이 거치는 상황이 됬어요. 그런데 문제는 한놈, 두놈, 빨지산이 생긴것입니다. 한놈, 두놈... 처음에는 하찮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정치를 잘못하니까 점점점점 빨지산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경찰서보다 빨지산이 더 많아져 버렸어요. 여전히 거기 법이 지배하고 주권도 법이 거기있는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법적인 주권은 있는데, 실제적인 주권은 안 미치는 것입니다. 빨지산들이 일어나가지고 다 때려부시고 빨지산들이 자기네끼리 세금 거두고, 자기네끼리 먹고 살고, 자기네끼리 깃발을 올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산치하제 사는 것 보다도 더 혹독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아까 말씀드린 예수 믿고서도 어떻게 죄가운데 살아가는 억압된 그 인간성이 예수믿기 전보다 더 비참할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그 책임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폭격을 하시고 다 괴멸시켜 주시고 다 항복의 깃발을 받아내 주셨는데 다스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계속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이 단지 천상적인 생활만 하도록 믿는 첫날에 완전히 거듭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육신에 남아있는 것이 그들 안에 있어서 그들은 그들의 온 생애에 걸쳐서 죄와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절대적인 통치가 사라졌다고 할지라도(지배는 사라졌지만은 영향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부패가 우리 안에 남아있다. (이것을 우리의 육신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죄의 절대적인 통치아래 있었던 이런 타락한 본성들이 죄 죽임을 요구합니다. 칼빈은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없애 하기위해 죽으신 것처럼 당신도 또한 장래에 죄를 그치게 하기 위해서 단번에 죽었습니다. (이것은 칭의 입니다.) 실로 당신은 죄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당신 안에 시작한 육신의 대한 죄 죽임에 있어서 매일의 진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의 죄 죽임의 과정을 통해서 죄의 절대적인 지배로부터 신자의 자유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는 그것이 우리안의 시작되는 바로 그날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점차적으로 증가하며(그런데, 점차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처럼 은혜도 번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도 번창하고, 은혜도 번창하고...) 매일의 진보는 우리로 하여금 정도에 있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완전에 가깝게 나아가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 절정에서 한 선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뭐, 이런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죄를 대항하는 진보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마땅히 기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죄와의 투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죄의 독침이 우리를 괴롭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복종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그것들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죄 죽임은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 짝이라고 하는 은혜살림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칼빈은 이 은혜살림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거룩하고 헌신된 삶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 열망, 즉, 거듭남으로부터 비롯되는 열망,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시작하려고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은혜 살림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과 경건을 향한 갱신된 열망이며 태도이다. 이러한 지성과 심령의 새로움은 성령께서 새로운 생각과 정서를 우리의 영혼에 불어 넣으시고 그의 거룩하심 속에 잠기게 하실 때에 이루어 집니다. 성령의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생애적인 적대감을 해결하고 타락한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사라진 의에 대한 능력을 새롭게 하는데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레이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은혜살림이라고 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살아계시고 통치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아주 적합한 묘사입니다.) 비록, 죄 죽임과 비비케이션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할지라도 칼빈은 이 두 가지 일에 참여하여야할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신자의 의무를 전쟁, 매일의 싸움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싸움은 인간의 전체적이고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합니다. 비록 복음적인 완전함은 성취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은 칼빈은 확신하기를 진보가 미미하더라도 사람은 그렇게 비참하게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권면합니다. 진진한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의 목표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를 열망합시다.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지도 말고, 또 우리의 죄악된 행위를 변명하려고 하지도 말고, 우리의 목표를 향해 (뭐죠?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 되는 것) 지속적으로 분투하여 우리들 자신 안에 있는 의를 버리고 마침내 참된 의를 얻도록 말입니다.(이게 사도바울의 사상입니다. 이전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쫒아가려고 쫒아가노라. 내가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성령은 죄 죽임과 은혜살림을 따로따로 역사하지 않고, 신자의 지속적인 훈련된 노력을 통해서 죽이는 곳에 은혜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고, 은혜살림이 있는 곳에 죄 죽임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에 오웬이 한 구도에서 본 것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실제입니다. 죄 죽임을 그러면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느냐? 이 문제거든요? 자,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자기 부인 (마이 와이프가 아니에요) 그 다음에 십자가를 짐. 그 다음에 내세에 대한 묵상입니다. (자, 그러면 책을 한번 보겠습니다.) 칼빈은 신자가 맞서야 하는 최대의 적이 마귀나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여기에서 이것은 후레쉬 입니다. 죄된 육체입니다.)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의 죄 죽임의 목표로서 자아는 성령의 의해서 새롭게 되어져 가는 것, 즉 우리의 새로운 본성이 아니라 내주하는 죄의 영향아래 머물러있는 육신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죄악된 육신에 너무 흠뻑 젖어있기 때문에 지성, 의지, 그리고, 정서를 포함하는 전기관이 그 영향아래 있습니다. 칼빈은 자기 부인이 우리의 지성, 혹은 이성과 함께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죠? 청교도들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보다는 자기 이익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먼저 이성을 성령께 복종시키고 굴복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나 성화의 교리에 대해서 보면은요. 오웬이 다른 모든 청교도들보다도 칼빈에 훨씬 가깝습니다. 성령론도 그렇습니다.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인간의 지성을 육신적인 감각이 없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요구에로 돌이키게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과 욕심을 부인하여야 합니다. 칼빈에 따르면 육신의 이성에 작별을 고하고 우리의 욕심에 재갈을 물릴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헌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이성에 안녕을 고하라. 그리고, 우리의 욕심에 재갈을 물리라.) 레이스는 우리의 인격의 모든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어야 하며 자아를 향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자기부인은 우리의 지성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과 정서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 모두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새로운 방향설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우리가 단지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 자신의 인생 계획이나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한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속한 모든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정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 행함을 지배하게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합당한 목표이신 하나님 자신께 대하여 힘쓰게 합시다.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와 지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자기 부인은 자포자기의 소극적인 개념만이 아니라 동시에 적극적인 요소까지 포함합니다. 자기 부인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칼빈은 먼저 우리가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멸시하는 자기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의 부인은 우리가 자신에 대한 병적인 평가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뛰어남이나 우월함에 대한 교만으로 가득 찬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태도를 극복하기 위하여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다툼에 대한 사랑,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는 치명적인 염병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의 깊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갈갈히 찢어버리는 것 외에는 다른 처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두 가지로 함양될 수 있는데,
첫째는 우리의 달란트와 소유를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한 후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밑으로 내려가면, 마지막으로, 그가 행하는 부인이 진정한 자기 부인인지를 시험하는 참된 시금석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소원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짊입니다. 그러나 더 높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높은 산 위까지 부르신 것은 경건한 지성을 가진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곧 누구든지 주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죄 죽임의 두 번째 국면으로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의 내면적 복종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신자의 외면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의 본을 따를 뿐 아니라 그분의 낮아지심과 고난, 핍박 받는 삶의 패턴을 따라 살기를 추구하여야 하는데,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 고난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가 끊임없이 십자가를 지는 생애였기 때문에 신자들은 마땅히 힘들고 고통스럽고 쉼 없는 다양한 악으로 가득 찬 삶을 위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면적인 행동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데 사용하는 이러한 고통을 칼빈은 ‘십자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죄를 죽이는 것이 첫째는 자기 부인이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기의 죄 된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라, 그리하면 죽으리라.” 그것이 자기 부인의 요점입니다.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라. 반드시 죽으리라. 살려면,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는 네 마음에 있는 생각을 ‘아니’라고 거부하라.” 그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십자가를 짊이 무엇이냐면, 그렇게 죄 죽이는 삶을 살 때 고통스러운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죄를 죽이고 나면 기쁨이 오지만, 죽일 때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여러분, 담배 한 번 끊어보셨습니까? 그것을 참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술 먹고 알코올 중독 된 사람이 술을 끊으려 한다고 해봅시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하루아침에 절대로 먹기 싫다고 하는 것은 괜히 하는 무용담이고 일반적인 경우는 계속 먹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담배 끊고 3년 반이 됐는데도 버스에서 앞 사람이 담배 피면 나도 ‘후읍~하’ 그랬다고 말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것을 끊을 때 얼마나 고통이 오겠습니까?
하고 싶은 것을 안 하려고 몸부림칠 때 고통이 옵니다. 그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도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것은 “네가 지금 막 했으면, 했으면, 했으면 하는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너를 구원했으니까 네가 그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면 죄를 죽이는 데 있어서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현재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없이는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없다고 한 이야기의 맥락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흠뻑 젖고 십자가의 놀라운 감격과 죄 사함의 은혜, 주님이 나를 위해서, 비천한 인간을 위해서 처참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현재적인 슬픔이 일어나는 동안에 도둑질하러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가 순간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죄가 억압당한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 짊의 요지입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은 육신을 죽이는 죄 죽임에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를 대면하시고 우리의 고삐 풀린 육신을 십자가라는 치료책으로 복종시키고 억제하신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십자가를 짊어진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죄를 죽이게 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방식을 알려줍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수치와 가난,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기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재앙을 만나게 하심으로 고통하게 하십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육신에 대한 허황된 자신감으로 높아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소유나 사랑하는 가족, 건강을 상실함으로 고통을 당할 때 비로소 물리적인 환경 속에서 안전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육신을 신뢰하는 우리의 자만심이 부서지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인내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모두 드러내시기 위해서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만약에 인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된다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뜻에 반하는 상황과 고통은 우리에게 인내를 확증하는데 필요한 환경을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믿는 신자로 하여금 부요하신 덕목들이 묻혀있지 않고 분기시키게 하시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상황을 제공함에 있어서 정당하게 행하신다면 성도의 고통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성도가 인내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고통을 통하여 그의 자녀 됨의 여부를 시험하십니다. 칼빈은 불신자가 징벌을 받으면 더 악해지고 더 완고해지지만 신자가 고난을 받으면 노예가 아닌 자유민처럼 참회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회개의 촉구에 대해서 마음을 계속 굳히고 대항하고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의 입증이라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간에, 칼빈의 십자가를 진다는 ‘십자가를 짊’의 교리는 인간의 감정을 배제한 고난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칼빈은 모든 고통과 슬픔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묵상하는 태도를 고취시킵니다. 칼빈은 모든 고난 가운데 즐거움을 보여주도록 요구합니다. 우리는 마치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주어지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겪지 않으려는 것처럼 언제나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신자들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칼빈은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인내가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마비상태가 되어 아픔을 모르게 하거나 고통스러운 느낌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고통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세에 대한 묵상입니다. 죄 죽임에 있어서 세 번째 요소는 내세에 대한 묵상입니다. 이 주제를 도입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종류의 환란이 다가와도 우리는 그 끝을 바라보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을 경멸하고 일어날 내세에 관한 삶을 묵상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이렇게 가져야 할 필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칼빈의 전제에서도 발견된다. 육신의 꾐에 빠져 그물코에 걸린 전 영혼은 지상에서 행복을 찾는 법이다. 죄 죽임 motification을 못하고 죄에 코 낀 사람은 기껏해야 원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승하게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어떤 심정으로 자포자기 하느냐면 ‘내가 죄를 더 지어도 더 나빠지겠는가?’ 그러면서 죄에 대한 담대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 가운데 깊이 빠져 들어가서 여러분들이 가끔 보면 그리스도인인데 이해할 수 없는 죄를 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죄가 창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면 그렇게 됩니다.
첫째로, 이러한 육신의 소욕에 굴복하는 대신에 지고의 행복으로 찾아오는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도록 권면합니다. 칼빈은 다시 인간의 환경, 세상보다는 그들 안에 있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내다보았습니다. 죄 죽임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육신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몇 가지 내세에 대한 모습으로 첫째, 이 세상의 비참한 행태에 대해서 각성해야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비참한 세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현재의 삶에 대한 경멸이 있어야 합니다. 단, 세상을 그냥 무조건 미워하거나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말하자면 예배를 드리고 세상으로 나아갈 때 “주여, 가선 안 될 곳으로 가나이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세를 사모해야 합니다.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것과 함께 천상의 몸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사모함이 포함됩니다. 눈멀고 미련한 육신의 소욕이 저항한다 할지라도(세상의 미련을 내 안에서 못 떨치려고 하는 것) 확고한 견해를 붙듭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면서 지체하지 않도록 합시다. 이 일을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여기며 사모함에 있어서 신음하고 탄식함으로 기다립시다. 내세에 대한 묵상은 현재의 삶에 대한 육신적인 애착을 죽이는 유익 이상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위협을 극복함에 있어서 우리를 도와줍니다. 칼빈은 묻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이 땅의 포로된 상태로서 아버지의 나라, 천국에서 살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찌 위로를 얻지 못하겠는가? 내세의 삶에 대한 묵상은 이 세상의 불의를 견디도록 도와줍니다.” 이렇게 결론 맺습니다. “신자가 부활의 능력에로 시선을 돌린다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이 제 설교 속에서 무엇이 포함되었느냐면, 부활의 소망을 현재적으로 느끼고 세상에 대해서 멸시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갖지 않으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그렇지’ 하면서 세상에 대해서 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죄를 죽이고 경건을 유지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 분 정도만 질문 받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세상을 멸시하고 적대해서 천상을 그리워하며 사는 것 자체가 너무 이원론적인 사고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가 견지해야 할 삶이, 제 책을 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 만큼 많이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신앙이나 이 신학은, 그 이원론적인 사고와 신학을 이미 칼빈이 깨고 나온 신학입니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칼빈 이전에 있었던 카톨릭 신학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골격이었습니다. 거룩한 성직의 무리가 있고 그 다음에 고신도들이 있고 평신도들이 있고, 그 다음에 거룩한 교회가 있고 속된 세상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 세상의 백성이 있고 하는 그러한 것, 그 다음에 하나님과 교회와 선교에 관계된 일은 거룩하고 나머지는 세속적인 것이라는 그런 사고방식,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사고방식 등은 모두다 카톨릭이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칼빈이 깨고 나온 것입니다. 이 한 면만을 보고서 그렇게 평가하면 칼빈이 나중에 화낼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칼빈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영역이 우리의 전 문화의 분야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한국 교회가 물려받은 개념들은 다분히 세대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인 분위기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 분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들을 다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이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으면 정치에 개입했겠습니까? 종교개혁 자체가 종교와 정치를, 신앙과 정치를 일치해서 하나로 만들어 보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성공했고 역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마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국가 지도자가 세워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의회가 만들어지고, 그들에 의해서 작성된 모든 법이 성경의 정신을 반영해서 그 법을 지키고 살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의로운 나라가 되는 그런 것을 꿈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칼빈에 있어서는 발붙일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편견이 없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은 신자들에게 세상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과 같은 사람들의 서신 속에서 계속 나오는 것이 ‘나는 떠나고 싶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나는 살아서는 안 되는데 재수가 없어서 여기 살고 있다.’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 것입니다. 자기 일, 선교 사역, 사람 사랑하고, 그리고 또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을 보면 그들은 깊이 사랑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국회의사당에 거의 늘 가다시피하고 관중석에 앉아서 국회를 지켜봤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믿겠습니까? 로이드 존스의 부흥과 같은 것을 읽어본 사람들이 그분이 굉장히 많은 수의 정치인, 연예인, 정계 지도자들을 만나서 그들을 권면하는데 시간을 썼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성경 자체가 이미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야 하지만 신자가 이 세상을 영원한 집이라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내세에 대한 소망 그것을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교리를 균형 있게 잘 받아들이고 묵상하면서 영적인 자원으로 활용할 때에 죄를 죽이는 삶에 있어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더불어 살면서 싸우면서 느끼고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피해를 본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자신의 모든 삶에 대한 결과나 청산과 평가가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는 내세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당한 믿음의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완전주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완전주의하고는 다릅니다. 완전주의는 말 그대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죄에 대해서 완전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것을 부인합니다.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motification을 해도 그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주의는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 죄가 자기를 향해 거의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 자기의 삶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고 완전히 그 죄 자체가 사라져서, 인간 그 자체가 거듭나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완전해진다는 웨슬리안주의적인 완전주의하고는 견해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제가 두 사람의 질문을 받으면서 순간적으로 느낀 것은 굉장히 우리가 많이 세뇌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게르하르드 보스라는 사람이 도표 하나를 그려서 일약 세계적인 신학자가 됩니다. 오는 그 세상은 이미 왔고, 올 세상 안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집니까 안 이루어집니까? 그 나라하고 우리가 앞으로 갈 하나님의 나라는 비교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천국은 아무리 아름답고 황홀해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조지 엘던 라드와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이 많이 이루어지면 황홀해질 수 있는데 가불로 미리 맛보기로 보여 주신 것이다.” 맛보기는 양념입니다. 진짜는 굉장한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엿장수가 와서 아이들이 새카맣게 모이면, “야, 맛보기 줄테니까 가서 엄마 고무신이라도 벗겨와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 먹을 때 황홀함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천국이 그런 것입니다.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맛보는 천국은 진짜 맛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정말 굉장한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은혜를 받고 온전히 지내면 이렇게 황홀한데, 이 황홀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완전한 것들을 보면서 완전한 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칼빈은 현실도피적인 피안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mortification을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면 산 속으로 들어간 신비주의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죄의 기원이 세속과의 접촉에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에 의하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 속으로 수도원 끌고 들어가서 아기 뼈 묻고 하는 것이 드라마 같은 데 나오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한참 모른 것입니다. 세상을 피해서 죄의 접촉을 피해서 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세상보다 더 빨리 타락한 것입니다.
칼빈이 만약에 자매(질문자)가 염려하는 것과 같이 현실을 뛰어 넘는 피안주의자였으면 그런 식으로 반응을 했지, 여러분,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생인데 죽을 각오로 죄 죽임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한번 죽일 때마다 천국에서 별이 하나씩 붙습니까? 아닙니다. 죄를 죽임으로서 별 붙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할 뿐입니다. 살려고 죽이는 것입니다. mortification하는 것은 죄 많은 세상에서 불꽃처럼 몸부림치면서 살려고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mortify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에게 성경적인 기반이 약한 사람에게 덤벼드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기초부터 완전히 흔들려 버립니다. 그런 술책을 강하게 도전 받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성경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냐면, 형제(질문자)는 무엇인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인지를 확인받는 것이 어마어마한 작업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 철학자 빼고는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펼치면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분명하고 명쾌한 약속들을 찾고 그 약속들을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믿음으로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크게 흔들리는 확인이 무엇입니까? 근심과 믿음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순간순간 ‘이 성경이 전부 다 거짓말이면 어떻게 하나’ 혹은 ‘내가 이렇게 뼈 빠지게 주님의 일하는데 천국 없으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이 순간순간 스칩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듭나지 못한 표라고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거듭나고도 그런 것에 한참동안 엄청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성숙해지고서는 그런 것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런 것은 순간순간 밀려오는 의심입니다. 그 생각이 지배합니까? 구원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형제의 삶을 지배합니까? 구원받은 것을 어디서 발견하고 확인하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칼빈에 설명에 의하면 성화의 문제이지 칭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형제와 같은 혼돈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기가 죄를 죽이면서 거룩해져서 주님과 함께 연합되는 것을 느끼는, 동행하는 영적인 삶을 못 사는 것을 정죄의식으로 연결시키고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다, 제가 아까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구원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리스도가 우리를 모두 지배하는 삶을 저절로 살게 되는 것이라는 교리를 받아서 고통 하는 사람이 파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대답이 됩니까?
종교개혁자들이 ‘솔라 피데’라고 말했지만, 그때 이야기한 것을 칭의와 관련된 것이라고 강조점을 거기에 두고 그것이 다 인 것 같이 받아들인 것은 우리지, 종교개혁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루터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 무지와의 싸움에서 획득되는 자유에 대해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개혁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받아들인 우리가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쉽게 얘기하면 신학의 깊이 문제와도 관련이 되고 한국인의 심성문제와도 관련이 됩니다. 복을 좋아하는 성격의 삶에 있어서는 성화 문제 이야기하면, 복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현세적입니다. 그런 가운데 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것도 당대에 잘 사는 것입니다. 걱정 없고 건강하고 배부르게 잘 먹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성화는 그리스도와 만나는 미래에 대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다보니까 성화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와~ 세상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와~ 그런데 그 복은 어디 있습니까? 천국에. 너나가라~ ’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이 모든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여러분이나 저나 배운 것도 가르친 것도 잘못된 기독교였다는 것이라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쓸어 버려야 합니다. 다 쓸어버리고 새 것을 건축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5, 6장에 썼습니다. 한번 꼭 읽어보십시오. ‘부수고 파멸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칼빈은 성경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 예배에 참석하는 것 이런 것들을 굉장히 중요한 vivication의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성찬에 참석하고 하는 것을 vivication의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이 얘기한 vivication의 수단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방편하고 거의 일치한다고 보면 됩니다. 뭔가 vivication이라고 해서 새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를 하고 성찬에 참석해도 별 것 없더라.’는 것인데 그것은 그 수단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도 그 수단이 잘못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vivify 하신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거나,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vivify 하신다고 해도 예배에 가도 전혀 복음을 들을 수가 없고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없고 목마름도 없고 그렇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도 vivify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딜레마에 빠지냐면 ‘해도 소용 없더라’ ‘성경 읽어도 도움이 안 되더라’ ‘예배 참석해도 도움이 안 되더라’ 하니까 지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는 비유를 하자면 죄에 대해 항거하다가 꽉 누르니까 이렇게 대들기보다 그냥 발 아래 밟혀서 살자 하고 쫙 개구리처럼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마음 놓고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칭의에는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고 성화는 여러분들이 거룩해 지려고 노력 안하면 하나님도 내버려 두십니다. “냅둬요. 하나님. 이대로 살다 죽을게요.” 하면 “그래라” 하십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원하셔도 인간의 개입과는 상관없이 이뤄 가시는 부분이 있고 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셨는데도 이상하게 인간이 개입할 여지를 봉쇄시키시면서 신비하게 개입하셔서 인간의 잘못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영향을 못 미치도록 하시는 경우가 있고 처음서부터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인간의 협력을 미리 경륜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함께 묶어져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이 세 번째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놀랍게 역사하셔도 인간이 거룩해지기를 포기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홀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서 가끔 나오는가 하면, 여러분들이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변화될 줄 알지만 잘못하면 그 모습 그대로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얘기를 수시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성화에 있어서 이런 교리의 토대를 지닌 것입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우리에게 떨리는 것입니다. “네 마음대로 살래? 그러면 반드시 죽으리라. 내가 원하는 대로 살래? 그렇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살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게 강조되어야 합니다. 내가 반응해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은 무언가 발동 걸리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렇게 싸울 수 있도록 충전시켜주시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도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정사와 권세를 밝히 드러내사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저도 설교를 한 번 한 적 있지만 거기에서 강조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사건을 내가 믿고 거듭날 때, 그때 하나님은 사죄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죄 이상의 충분히 죄와 싸워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을 거듭난 즉시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붙는데,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간직하고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vivify하는 삶을 살면 죄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엉겁결에 구원받고 나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팡질팡하다 은혜 다 까먹고 손 들고 옵니다 하고 은혜를 받았는데 다시 옵니다. 찬송하면 기쁘고 신이 나고 교회 봉사하면 등허리에서 땀도 나고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마음이 다시 식어집니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모르고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신앙생활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 모든 것들이 철저한 지성적인 기반이 없기 때문에 무너져도 왜 무너졌는지 모르고, 알아야지만 다음에 안 그럴 것 아닙니까. 경험이 도무지 신앙생활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비스마르크 재상이 ‘지혜로운 자는 역사를 통해 깨닫고 어리석은 자는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고 했는데 하나 더 포함해서 ‘그리스도인은 경험을 통해서도 못 깨닫는다.’ 무너지고 나서 왜 무너졌는지 모르고, 회복되고 나서 왜 회복되었는지 모르고 또 충만해지고 나서는 하나님이 왜 충만을 주셨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회복 자체를 재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 그러는데 엉겁결에 받은 재수라는 운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운이 나빠서 회복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서론이고, 다음에 mortification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면 광고를 하겠습니다. 한 20주 정도 시리즈로 뿌리를 뽑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