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
녹취자: 김경애
교회의 절기상으로는 이 기간이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그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그런 때라 그런 절기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다음 주가 되면 우리는 거리에 성탄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그리고 교회마다 십자가로 또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한 모습을 보게 되는 명절과 같은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조들은 이미 성탄절이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 될 것을 기다리며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맞아야할지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대강절이라는 절기를 준비하며 지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가? 그리고 또 이어서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며 그리고 또 다음 시간에는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으며 그리고 그 다음 시간에는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제는 율법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했으니까 이 ‘의’라고 하는 것을 바울을 비롯해서 구약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의라고 하는 것들을 사모하고 바랐는가 하는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그 요구에 부응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을 만드실 때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이 온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성품을 인간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이 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과 같이 그렇게 인간이 세상을 다스리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고귀한 뜻을 드러내도록 지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인간의 처음 조상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명령이었고 또 하나는 말하자면 삶의 명령이었습니다. 종교적인 명령은 무엇이냐 하면 ‘동산나무 한가운데에 실과가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있는데 이것을 너희는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종교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온 세상을 다스리며 정복하고 그리하여 온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창조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상태를 이 온 세상과 우주가 유지하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선악과가 있었는데 그 선악과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신비한 나무도 아니고 무슨 요술나무도 아니고 무슨 마술나무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나무였습니다. 다만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무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먹지 마라.’ 이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시거나 혹은 따먹으려고 할 즈음에 인간의 손을 붙드셨다면 죄가 이 땅에 들어왔을 리도 없고 사망도 없고 슬픔도 없고 그리고 지옥도 없고 고통도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하나님이 마치 인간의 이 불의한 범죄의 원인 제공자가 되는 것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살고 있는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 아름다운 세상은 창조되었고 그 세상은 모두 아담과 하와에게 위탁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다음에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게 하셨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수많은 짐승들을 불러내어서 나아오게 하여 그들의 이름을 짓게 하였습니다. 땅위의 짐승이나 그리고 풀이나 나무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듯이 아담과 하와에게 복종하며 같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의 동기생으로서 함께 평화를 누리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아담과 하와의 손에 의탁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그 동산을 다스려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동산 한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곧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아담과 하와가 볼 적마다 깨닫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나는 하나님과 다른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거기서 깨닫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의 다스림에 복종하고 그리고 자기가 마음껏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을 때에는 몰랐지만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 서서 ‘먹지 말라.’ 아담과 하와는 인간으로서 그 나무의 실과를 먹거나 처분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실과에 손을 대고 따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 앞에 설 때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한없는 질적인 격차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전능하고 나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하여 자기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할 존재라는 이 평범한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동산 한가운데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각도에서 보면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하는 그러한 유혹도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떤 면에서 반대로 보면 이 선악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며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며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게 하는 훌륭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그 주신 아름다운 모든 동산의 수많은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그 나무를 탐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할 때부터 어떤 강제나 강요나 기계적인 복종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자유로운 마음의 의지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하나님을 배반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도덕적인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책임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형이 있는데 그것의 태엽을 감아놓으면 인형이 북도 치고 아니면 춤도 추고하면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속에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그러나 그 완전한 인간이 또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살수도 있고 또 죄를 선택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날 수도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함께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만들어진 그 처음부터 신앙을 갖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 때에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이성을 온전케 하고 그래서 이 믿음과 이성이 우리의 인식을 밝게 하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았고 주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의 참된 가치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동산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을 갖지 않고는 만물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고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신앙이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비록 아무리 두뇌가 훌륭하고 머리가 좋고 생각하는바와 통찰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언제나 어둠속에서 내리는 판단과 같습니다. 신앙이 없이는 우리가 온전한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식이 모자란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비록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하나님과의 열린 눈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이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으며 그의 손을 붙잡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혜롭습니다. 세상의 놀라운 지식에는 모자라도 그러나 언제나 현명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옳은 판단을 내립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으로 살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내가 두었느니 너희는 이것을 먹지 말라.’ 먹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여기에 있는 백합꽃 하나를 떼어간다고 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동산에 있는 나무중의 실과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그 일을 가지고 진노하시고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거두어가시며 심지어는 영원히 죄인이 되고 그 죄가 원죄로써 우리에게까지 물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그 실과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시고 ‘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의미를 부여하시고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 실과를 따서 먹는 그 순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뱀이라는 도구로 인간에게 다가온 사단의 궤계 ‘따먹으면 너희의 눈이 하나님과 같이 밝아지리라.’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이 불신앙의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인간의 탐욕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고나서 하나님이 금하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나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금방 일어난 사건은 인간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밝아진 그것은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 아담과 하와가 꿈꾸던 좋은 의미에서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악이 들어오게 되었고 죄가 들어오게 되자 이제 선과 악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조상들의 내면과 영혼과 삶속에서 철저하게 경험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세상과 말하자면 관계가 깨뜨려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그 모든 자연의 세계를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주셨을 때에 그때는 그런 부조화와 불균형, 관계가 깨뜨려짐,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서로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깨뜨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깨뜨려지게 되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느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95년에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커다란 사건중의 하나가 바로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지진이 일어날 때 쉽게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비웃던 일본의 그 훌륭하게 지었다는 그 건물들이 한번 지축을 뒤흔드는 그 지진 앞에서 20조 엔이 넘는 피해를 남기고 말하자면 커다란 피해를 남겼습니다. 5,000여명의 인명을 앗아갔습니다. 이런 부조화나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범죄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이 죄를 범할 때 자연과의 조화를 깨뜨려지게 된 것뿐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인류 최초의 사랑을 고백하던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그를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런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깨뜨려졌을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졌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졌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동산을 거닐 때에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사는 일들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늘 느끼며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언제나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종교의 영역과 다른 삶의 영역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영역과 육적인 영역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평상적인 일들 속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도무지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하나님이 없는 문화를 창조해나가고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런 세상을 쌓아갔고 그런 성을 지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내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육체의 소욕과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세상이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이 뒤틀린 세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비극이 무엇 때문일까요? 선악과를 따먹는 그 순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율을 파괴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림으로 그 순간에 죄는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오는 강도와 같이 그렇게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죄가 들어왔다는 말의 의미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면 이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영화 같은 것에서 보면 민란이 일어나거나 혹은 적군이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성위에서 그 성 밖에 몰려오는 적군들을 향해서 활을 쏘고 뜨거운 물을 붓고 돌멩이를 집어던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적군들이 그 모든 방어망을 뚫고 문 앞에까지 뛰어 들어옵니다. 새까맣게 밀고 들어온 적이 이제 막 문을 깨뜨립니다. 문을 밀어서 안 되고 그냥 안 되니까 고대시대에 커다란 통나무를 연필처럼 뾰족하게 깎아서 그래서 말과 사람이 몇 백 미터 밖에서부터 온힘을 다해서 밀어서 대문을 들이받습니다. 드디어 대문이 쪼개집니다. 그리고 대문이 떨어져나가고 그 다음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그 작은 문으로 일시에 확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들어와서 모든 인간을 노예로 삼고 지배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지은 죄를 인해서 자신이 낳는 그 모든 자손들에게 그런 자기의 죄책과 그리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인간의 그 사악한 심정, 그리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을 저항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말하자면 죄인 된 모습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세상은 더욱 더 절망적인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다시 찾을 수도 없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절망적인 인간이 바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특별히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한사람, 한 가정, 나아가서는 한 나라를 택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율법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본질적으로 이 인간의 내면의 세계가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능력과 재능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셨으나 그들에게는 그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율법을 다 해내면 의로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만들었던 그 요구에 부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것이 바로 구약의 오랜 세월을 지낸 후에 사도 바울이 그 율법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볼 적마다 그 율법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율법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절대적으로 무능한 인간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고 경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순종하는 것 같은가 하면 마지막에 탐심을 품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게 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 번째 계명을 범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골로새서를 통해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아홉 개의 계명을 지켰으나 열 개의 계명을 어김으로 다시 첫 번째 계명을 어긴 자로 정죄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의를 얻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그렇게 그들이 수많은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많이 애를 썼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주님께서 예고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로부터 인간과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힘입을 수 있을 것인지를 예고하는 일들을 계속해왔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그 직후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서 이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든 너 원수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라.’ 하는 메시아의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태복음 1장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따라서 이 땅에 오신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제는’ 이라고 말합니다. ‘Now’ ‘이제는’ 예전 시대와는 다른 완전히 다른 한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키고 그 율법을 지키면서도 의를 얻을 수 없고 그 율법을 붙들고 율법을 지키며 살려고 애를 쓰는 그 모든 수천 년의 결과 마지막에 깨닫는 것을 그 율법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소망이 없는 죄인이다. 비천한 죄인이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이 아주 훌륭하고 학식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고 신앙이 자신보다 훨씬 높은 그런 사람 앞에 개인적으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 그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그 사람 앞에서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과 같은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서 계신 분은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을만한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리라고 하는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렇게 인간이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직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온전히 믿어보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깨닫는 것은 오히려 전혀 딴것인데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는데 이가 바로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내가 무엇인가를 행하고 지킴으로써 불가능해지던 그 의를 하나님께서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통해서 우리를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주는 이런 사건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 말고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지 지나간 죄에서 용서해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의를 덧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사람들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주실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이전에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사라졌던 하나님의 형상 이런 것들을 우리가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바울은 ‘이제는’ 이라고 말합니다. 옛 시대와 새 시대, 옛날과 오늘, 그리고 옛 경륜과 새로운 경륜, 구약의 시대와 신약의 시대 그리고 율법의 시대와 은혜의 시대가 바로 ‘이제는’ 이라는 이 한마디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그 ‘이제는’ 이라는 그 지점에 바로 강보를 입고 강보에 둘러싸여 하늘의 그 좋은 권세와 영광스러운 영화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그 아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슴 벅차는 설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이제는 이 율법을 지키고 애를 쓰고 삶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으려고 하던 그러나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던 모든 일들을 포기하고 이제는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 우리는 공로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심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를 ‘옳은 사람이라 너는 나와 교통할 자격이 있노라.’ ‘네가 나의 아들 될 이유가 있노라.’고 말씀해주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종종 큰 죄를 짓고 수배를 당해서 도망을 다니는 그런 사람들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을 이리저리로 주민등록도 없이 도망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년의 세월이 흘러도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는 타지도 못하고 기차만 타고 이동하여야하는 골목에서 경찰관만 만나도 옆 골목으로 숨어버리는 불안한 사람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범죄가 큰 것이든지 작은 것이든지 어쨌든 그들은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 언제쯤인가 사면령이 내린 것입니다. 그때에 가장 기뻐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그렇게 수배 받고 도망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이것은 전혀 성탄절에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어도 기뻐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세상은 그 날을 세속적인 명절로 여기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타락하고 그리고 연락을 즐기기에 합당한 모든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그 날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하고 기다리고 즐거워하고 성탄절이 오는 날을 기다리며 설레어하는 이유는 틀립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이 땅에 도래한 것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알고 또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강보에 싸여서 구유에 누이셨을 때에 그 아기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가난한 집 아이중의 한 아이의 출생에 불과하였지만 그러나 그 아이가 이 땅에 옴으로 옛 시대와 새 시대가 나뉘게 되었고 그때와 이제가 나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그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으로 발견되기를 위해 율법을 지키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거는 그런 일들을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켜도 그런 이유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바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바로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육체를 신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육체를 통해서 율법을 지켰고 철저히 그 육체로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음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에 그토록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쳤지만 찾을 수 없었을 그때에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죄를 범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의로운 존재라고 자기를 용서하시고 불러주시는 그 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나의 가진 이의 하나님이 나를 옳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시고 너는 이제 나와 함께 너를 처음 이 세상에 만들던 너의 조상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 내가 교통하던 그런 사귐으로 나와 더불어 살자. 만들어주신 그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 땅에 오신 날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와 분명한 관계를 가지고 그 그리스도 예수를 기뻐하며 예수를 위하여 예수와 동행하며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예수를 믿은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적인 삶을 우리들이 오늘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아십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절망적인 죄인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끔찍한 죄 가운데서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도 끊임없이 사망 가운데로 우리를 잡아가는 그 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주신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이제는’ 이라고 말할 때 그는 한없이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고, 옛사람들이 그렇게 의로워지기 위해서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고, 오직 그 옛 시대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리스도 안에 예비되어 있는 한 의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을 때에 우리의 그 모든 죄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시고 우리와 사귀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깊이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그가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뿐만 아니라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역사에 기초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실제로 오셨느냐? 안 오셨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느냐? 안 죽으셨느냐? 죽으신지 40일 만에 하나님의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사 부활을 하셨는가? 안하셨는가? 그리고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이 땅에 오실 것인가? 안 오실 것인가? 하는 이 역사는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뿌리를 뒤흔드는 질문인 것입니다. 역사가 있고 그 위에 우리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이 땅에 도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한 주간동안 어떠한 삶을 살았건 지나온 인생에 여러분의 이력서가 어떻게 되었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절대로 절망적인 죄인임을 깨닫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는 설 수 없고 그리고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내가 스스로 의롭게 될 길이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 역사적인 사실을 굳게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는 예수에게 지게하시고 예수가 우리를 위해 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 오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오늘도 마음을 다해 그를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부르셔서 아담과 하와를 이 땅에 창조하고 난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그렇게 우리와 처음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그 사귐을 우리와 (여기서 끊김)
시대가 열렸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이변이라고 말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들은 다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도다.’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축복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우리가 얼마나 소망이 없는 존재들이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으면 죄와 슬픔가운데 절망하며 죽어갔을 인생들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며 그리스도 예수가 왜 우리의 인생의 전부여야 하는지를 가슴깊이 깨닫고 다시 한 번 그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놓으시고 동행하며 사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성탄절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