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루병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
1993.12.26 주일오전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5-29)
오늘 읽은 본문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받아 본 사람은 누구든지 병 낫기를 바라는 환자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이해합니다. 그렇게 수전노처럼 돈을 아끼던 사람들도 병을 나을 수 있다면 집도 팔고 논도 팔고 심지어는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평생 종살이를 해도 여한이 없겠노라는 고백을 저는 여러 사람에게서 들어 왔습니다. 더욱이 의사의 도움으로 간단하게 치료될 수 있을 경우에는 안 그렇지만 쉽게 안쾌될 수 없는 불치의 병일때는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달린 문제 앞에서 여유 만만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혈루병 여인의 사건이 있기 전에 주님은 거라사 라는 지방에서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미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많은 군대, 많은 귀신 즉 무리지어 다니는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져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리사람들은 복음과 그 주님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그곳을 떠나시고 자기들은 오히려 그 군대 들린 귀신과 같은 그러한 사람들, 그러한 영적인 상황 속에서 살기를 구했습니다. 주님은 무리하게 머물지 않으시고 순순히 배를 타고 저 쪽으로 건너가시매 수많은 무리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 땅에 오신 예수를 거절하자 멸시를 받은 복음과 업수히 여김을 받은 예수는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다른이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이렇게 놀라운 이적을 행해도 그 주님을 믿고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오심을 목말라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기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왜, 5년, 6년, 10년, 20년씩 교회를 다녀도 도무지 불신자와 다름없는 삶, 도무지 하나님과의 분명한 만남의 체험 없이 속절없이 인생이 거미줄처럼 기다랗게 신앙생활이 연조만 길어져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예배당을 밟는 사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자기를 찾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뻐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 최고의 재앙은 주님이 없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무리에 둘려 싸여서 바닷가에 계셔서 분명히 주님은 말씀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 회당장 중에 한 사람인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주님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간절히 오래도록 간구하면서 주님 앞에 하는 말이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시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회당장은 회당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23명으로 구성된 각 성의 종교 재판소에 재판관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 회당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 틀림이 없습니다. 12살 난 어린 딸이 지금 병상에 누워서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아예 처음부터 이 딸이 죽어있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그 아이에 손을 얹기만 하면 그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리라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신 나사렛 예수가 병들어 죽은 자처럼 되어버린 이 사랑하는 딸을 살려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자식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에게 있어서 딸은 언제나 특별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딸이 시집가버린 특별할 것도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아직 어린 딸이었습니다. 이 어린 딸이 병상에 누워서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이 아버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 엎드렸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아니? 저 지체 높은 회당장이 땅바닥에 엎드려서 뭐하는 거야? 글쎄 모르겠어’ 개의치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의 눈에 보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살릴 수 있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기도와 소원이 간절하면 간절한 할 수록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그 한 분이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 가에 온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땅에 엎드려서 간구했더니 주님이 그 요구를 거절할 리가 없습니다. 믿음을 기쁘게 보시고 죽어가는 한 여인을 위해서 그 회당장의 인도를 따라서 그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그 곳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에워싸면서 예수님의 심방길에 동행하였습니다. 그가 회당장의 신분이었으니까 그 집에 딸이 죽게 되었다는 소문은 그 좁은 저자 거리에 뉴스가 되었을 것이고 더욱이 예수님의 가시는 발걸음에는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과연 우리 동네에서 살릴 수 있을까? 그 소문... 그 죽은 자를 일으키고 병든 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다고 하는 그 놀라운 소문이 정말일까? 이처럼 주목받는 한 사람, 회당장 야이로를 중심으로 병을 고치러 가는 행렬이 있을 때 회당장처럼 지체가 높지도 않고 회당장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그처럼 수많은 사람이 주목해주지도 않는 버림받은 여인 한 사람이 행렬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마가도 회당장의 이름은 야이로라고 밝혔지만 이 여인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여인, 그래서 이름도 없이 한 여자라고만 적고 있는 무명의 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나, 요안나나 수산나처럼 자기의 소유로서 제자들을 섬긴 헌신으로 이름난 여인도 아니었고 전도에 능하여 바울을 기쁘게 하고 주님을 기쁘게 했던 브리스길라처럼 사도들의 행적에 기록된 여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리는 표적은 다만 그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는 부정한 병자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12살 난 아이, 이 여자는 또 12년 된 여인, 회당장 아이가 태어 날 때 혈루병에 걸렸습니다. 주님은 지금 심방을 가고 계시고 12살 먹어서 여태까지 살다 죽어가고 있는 이 여자 아이는 예수님이 가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날 희망이 보이고 있었고 이 여자는 12년이 되어서 이제는 죽는 것 밖에는 아무런 미래의 꿈이 없는 그런 절망의 여인이었습니다. 야이로의 가정은 주님이 발을 옮겨놓으심으로 환난 가운데 희망이 빛이 감돌고 있었지만은 이 여인은 서서히 꺼져가는 등불과 같이 사멸하는 심지와같은 그러한 인생의 처지였다는 것입니다.
혈루병!, 이것은 여인들의 자궁에 암같은 것이 생기는 것으로서 출혈이 그치지 않는 병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질병이었습니다. 그 당시 민간에서 여러 가지 치료법이 있었으나 거의 치유가 불가능하였고 치유된 것 같아도 그것은 대개 의사들의 속임수였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피가 흐르는 이 병은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혈루증에 걸린 사람은 그가 만진 것 마다 부정한 것이 되었고, 그러니까 여기가 만약에 구약의 성소라고 하면 이런 것을 그 여인이 이렇게 만졌다 하면 그러면 이게 부정해져서 성소에서 치워져야 되요. 만지는 것마다 부정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이병에 걸린 사람은 성전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레위기 15장은 말합니다. 12년이었습니다. 1년 그것도 어려운 일인데 12년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헬라어 성경에서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라는 말 앞에 ‘보라’ 라는 말이 나와요. ‘보라,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냐! 12년 동안씩이나 지긋지긋한, 이 여인은 젊고 가장 좋은 시절을 질병의 고통으로 한없는 어두운 인생의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끊임없이 혈루가 흘러나오는 이 부정한 여인과 더불어 결혼 생활을 함께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혼을 하지 아니하였다면 결혼을 못했을 것이고 그 못한 이유도 이 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혼을 했다면 버림 받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다 곁을 떠나고 이제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이 혈루를 닦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소망을 걸어보며 그 행로에 나아와야 하는 홀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좋은 인생의 때, 한 남자에게만 사랑을 받고 가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소중한 때를 가장 저주받은 자가 되어서 처참한 인생의 불황의 구렁텅이에서 모든 인생길에 홀로 된 고독을 씹으며 처참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내야 했다는 것입니다 . 자신이 겪는 육체의 고통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더욱 더 그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자기가 만지는 것이 모든 것이 부정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어요. 이 여인이 만든 동물은 제사를 드리려고 가져가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에요. 여인이 만든 음식은 부정하다고 거절당합니다. 누구와도 함께 식사할 수도 없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따라 성전에 나아갈 수도 없었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일조차도 차단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육체는 흐르는 혈루 가운데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했고 영혼까지도 그 모든 사람들의 교제와 하나님으로부터도 단절당한 버림받은 고독 속에 둘러 싸여 살아가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습이 과연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성경책에 기록된 한 여인의 불행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조금 더 이 여인에 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대단히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아주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고통으로 점철된 12년의 처절한 생활 동안에 가만히 앉아서 아, 내 인생 끝났어! 하고 포기하고 불행한 인생을 맞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예화) 제가 살던 동네에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청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폐결핵에 걸려서 얼마나 몸이 말랐는지, 한 25kg 나 나갈까? 손이 소말리아에서 보는 사람과 똑 같애, 그런데 그게 매 달 모습이 틀려요, 죽어가는 거죠, 근데 동네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까 약을 안 먹는데요.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지만은, 왜냐, 이제는 포기한 것에요.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러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야겠다는 강한 욕망을 소유한 여인이었습니다. 우선 성경은 이 여인이 많은 의원을 찾아갔었다고 증거합니다. 한 번 찾아가서 ‘쯧쯧쯧, 가망이 없네, 안됬어.’ 이것 가지고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먹고 싶은거나 많이 해 드리십시오!’ 라고 식구들에게 얘기할 때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의사를 찾아가고 또 다른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백방으로 자기의 병을 고칠 방법을 강구해 내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행복한 가정을 단란함을 뿌리째 흔들어버린 이 불행의 도전 앞에서 이 여인이 택한 것은 의원을 찾아 간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상황에서는 그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최선의 선택을 이 여인은 했습니다. 그는 질병에 걸렸고 의사는 그것을 치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타당한 선택이었고 누구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무에게나 치료를 부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문난 의원을 다 찾아갔고 그들의 치료가 없을 때마다 더 유명하고 더 큰 병원을 찾았을 겁니다. 그 선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은 최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최악이었습니다. 선택은 최선이었으나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원을 찾아간 결과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오히려 병은 중하여졌더라’ 선택은 최선이었는데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많은 의원을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갔으나 그 의윈이 준 것은 괴로움이었고 그 괴로움을 겪기 위해서 그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병은 점점 악화되어서 흐르는 혈루는 점점 증가했습니다. 온 몸이 벌레가 먹고 이제는 차츰 차츰 죽음을 향하여 임박해 가는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당히 있었을 재산도 다 탕진해 버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병세가 악화되어 지금 여전히 흐르는 혈루를 닦으며 야이로가 앞서가는 그 행렬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야, 저 사람은 회당장이니까 그 병을 고치기에 능한 예수를 혼자 독점해서 자기 집으로 모셔가는 구나! 수많은 사람이 그 분의 아름다운 말씀을 듣고자 혹은 팔복산에서 혹은 갈릴리 해변에서 그렇게 깨끔 발을 띠고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까치발을 띠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자 하여도 무리에 둘려 싸여서 들을 수가 없어서 삭개오는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야이로의 심방길에 동행을 하면서 이 심방길에서 하나님께서 야이로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 병을 손 얹으시사 고쳐주시기를 모든 사람들이 축복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무도 주목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볼새라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면서 한 발짝, 한발짝 어려운 걸음을 수많은 인파를 헤치면서 예수께로 가까이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것은 흐르는 피를 닦으며 야이로의 앞서가는 행렬을 다가오는 신세가 되었을 때 가장 절박한 것, 무엇이었겠습니까? 육체의 생명은 끊임없이 죽음을 향하여 깍여져 나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제사의 길은 차단되었습니다. 영육 간에 곤고한 자가 되었고 깨끗함과 거룩한 것은 그녀의 손닿는 곳에서 모두 치워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소망마저 단절되었습니다. 모든 불행의 늪으로부터 헤어 나오는 것은 오직 혈루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의원을 선택했습니다. 마땅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밖에는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인생이 제 아무리 최선의 선택을 하며 성실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 인생을 영원을 향하여 생명을 보장할 수 없고 부지런히 살아도 그 인생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인생은 누군가의 도움, 그리고 누군가의 절대적인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과 그 분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는 것 ,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가장 절박한 문제는 혈루병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절박한 문제는 혈루병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이런 혈루병이 들리지 않았더라면 주님 없이도 넉근히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절박한 문제는 혈루병이었지만 이 여인을 향해서 하나님의 절박한 문제는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인생이 갖고 있는 꿈과 하나님이 인생을 향하여 갖고 있는 계획이 어떻게 다릅니까? 이 여인에게 있어서 절박한 문제는 혈루병이었습니다만 여러분에게 있어서 혈루병과 같은 문제는 무엇입니까? 끊임없는 최선의 선택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인생 한 가운데 버티고 서 있어서 수 없이 노력하고 애쓰고 그리고 유명한 의사를 찾아다녀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인생의 가장 깊은 문제가 무엇입니까? 12년 동안을 몸부림친 이 여인의 투병생활처럼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고 머리를 짜고 진저리를 쳐도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여러분의 인생에 버티고 있었어요.
여러분의 인생이 변화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 문제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전히 여러분의 심령에 흘러오고 인생을 사로잡아 와서 하나님 앞에 아무 힘도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혹은 인생의 한 때는 절박했던 인생의 문제가 이제는 완전히 체념되어서, 더 이상 그 문제를 치료받고 해결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이런 모습이 되어있습니까? 인간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그 모든 문제를 벗어나는 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그것을 벗어나는 소망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기가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항상 최선이라고 믿는 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보십시오. 선택은 최선이었지만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우리 각 사람의 모습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특별히 불행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성경이 하고 있는 것ㅇ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너희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그림을 통해서 너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이 여인을 보면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우리를 절망에 떨어뜨리는 문제, 근원도 알 수 없이 우리를 무기력에 사로잡아 가는 이 모든 영적이 나태함과 그리고 이 모든 무기력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이미 넘기를 포기해 버릴 정도로 여러분 앞에 높이 서 있는 문제의 벽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최선을 다해보셨죠?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결과도 여러분이 최선을 선택한 것처럼 여러분 앞에 최선입니까? 최선의 결과가 여러분 앞에 주어졌습니까? 선택은 항상 신중했고 도전은 늘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앞에 오늘도 나아와서 우리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 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리다만 수채화처럼, 붓다가 만 토기처럼 아무리 우리 자신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 보아도 만족함이 없는 그런 인생이 우리 앞에 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 한 이 여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더욱 심하게 흐르는 피를 닦으며 무리 가운데 떠밀리듯이 걸어가야 하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는 병을 고치셨으나 의원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병을 낫게 하셨으나 마술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이적을 행하셨으나 요술을 행하는 자가 아니셨던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께 나아가는 것 이제껏 자기가 의원을 찾는 심정과 결코 동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혈루병에 이 여인이 많은 의원을 찾아간 것은 비록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가 비록 최선의 선택을 하였지만은 이 선택은 육체에 속한 선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육신의 생각을 따라간 선택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일찌감치 혈루병이 당시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더욱이 악한 의사들은 이 절망적인 환자의 심리를 이용해서 눈가림으로 고액의 치료비를 뜯어내는 경우를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원자력병원에 가면은 전단지가 수없이 돌아,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암을 고쳤다! 그런 사람들의 사진도 나오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저를 찾아오십시오. 이런 황당무계한 말들이 많이 나와요. 이게 다 속임수에요. 현대 최고 의학이 못 고친다고 하는데 누가 그것을 고친단 말입니까? 무슨 나무 뿌리를 삶아 먹었다고 병을 낫고 벌레를 잡아먹었다고 해서 병을 낫고,... 병이 나을 때가 되어서 낫는 것이지 ... 풀잎 몇 개 뜯어먹었다고 병이 낫겠습니까? 근데 어떻게 해요. 거리를 간다고요.,,,, 인생의 마지막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어리석게 되는 것이에요. 이 여인의 경우가 비록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속한 선택이었어요. 그 여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인간의 집념을 소망으로 삼았다는 것이에요. ’나는 난다, 나는 낫고야 만다!‘ 인간의 집념을 자기의 소망으로 삼았던 것이에요. 이 여인이 12년 동안 병들어 있던 시간은 문자 그대로 집념의 세월이었어요.
죽음을 선고받았던 히스기야 임금처럼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네가 죽으리라, 벽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온 것을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으로 삼아야겠습니다. 투병의 최선을 다하는 신념이 자기를 절망의 늪에서 건져내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인간의 변함이 없는 집념을 세상에서는 가치를 높이 평가해주지만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이 정말 교만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주없이 살 수 없네, 주님은 아신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셔요. 주 없이 살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돈도 있지, 차도 있지 자식들 다 잘되었지, 남편이 속 안 썩이지, 걱정할 게 하나 없어, 그런 사람이 주 앞에 나와서 주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요! 주님, 주님이 저를 사랑하고 저를 붙들지 않으시면 저는 살 수가 없는 인생입니다. 이 모든 환경이 내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넉넉할 때에 그런 마음이 든 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 구멍을 지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다고 하신 거에요. 주님은 그런 마음을 가장 기뻐하신다고요. 오히려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주여! 의원들은 나를 고칠 수 있다고 나를 유혹하나 내 인생의 모든 희망이 이제는 끊어졌고 이제는 주님 밖에는 내 인생을 건져낼 이가 없사옵나이다! 라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을 주님은 기다리시고 사모하시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 여인의 다음 선택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저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도 알고 율법도 잘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옷에 손을 대니’ 그랬는데 마태복음에는 겉 옷가를 만지니 그랬어요. 옷가라는 말이 ‘찌찌듯’ 하는 히브리라는 말인데 민수기에 보면은 겉옷 귀퉁이에 술을 이렇게 달고 푸른 술로서 장식한 옷이었어요. 이것이 율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나아와서 주님! 손을 얹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이율법적으로 그게 맞지를 않는 것이에요. 이 여인이 아직까지도 예수님이 그런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개념은 없는 것이에요. 그 거룩하신 분이 그 거룩한 손으로 부정한 자기의 몸에 손을 대어서 기도하실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안수를 구하지도 못하고 옷 자락도 못 만지고 옷 가장자리를 주님이 모르게 살짝 만져 보려고 했던 거에요.
절망 중에 있는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거라사에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문은 그 분이 많은 병자들의 치료자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려 당당히 걸어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그 분이 자기의 인생의 문제의 유일한 해결자이심을 믿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병을 고치셨으나 그 분은 의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치료하셨으나 그분은 단순한 치료자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을 깨달았던 것이었습니다. 뭔가 알 수 없은 거룩함과 그리고 그 무언가 인생의 단순한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시지 않는 뭔가 능력이 깃들여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거룩하고 능력이 많아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더 그 분 앞에 나아가기에 부적합한 자기를 발견하기에 되었습니다.
그는 12년의 투병생활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선택을 믿었고 신앙을 따르기보다는 의원을 쫓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을 좇기보다는 사람의 생각을 따랐고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율법 상 부정한 병에 걸려서 거룩한 것으로부터 격리당해 있는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처지를 감추기 위해서 그는 홀로 예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무리 가운데 섞였습니다. 예수의 시선 앞에 마주 설 엄두를 못 내었기에 그는 뒤로 나아왔습니다. 그 분의 안수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그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자기를 안아주고 기도해 주는 것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작은 세미하였습니다. 살짝 가서 예수님도 모르게 옷가를 살짝 한 번만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동작은 세미하였고 소심하였지만 그 세미하고 소심한 행동에 깃들여 있는 믿음은 단호하고 확고하고 담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그 옷 가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이리라’ 이것이 이 여인의 선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12년 동안 매달렸던 투병 생활 그것이 한 순간 한 순간 의사를 찾아가고 약을 복용하는 순간마다 최선의 것만을 선택했습니다. 항상 자기가 최선의 선택을 따라서 살아왔던 이 투병의 집념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물거품처럼 부숴져 버렸습니다. 산산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선택해 온 그 모든 것들이 최선의 선택으로 믿었지만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맞아, 이 모든 나의 최선의 선택은 최선이 아니었어,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지만 이 결과가 최악으로 나타난 내 인생 내 선택으로 말미암아 항상 선택은 신중했고 최선이었지만은 그것은 나를 소용돌이 치는 물속으로 더 깊이깊이 빠져 들어가게 했다. 내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내 인생을 소망이 없는 인생으로 산산이 짓밟아서 비참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분의 옷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인의 마음속에는 갈릴리에 오신 이 위대한 구원자에게 손을 댄다면 나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믿음이 그를 살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무엇으로 산다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행하는 최선의 선택 그것을 의지해서 여러분들이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과가 얼마나 초라한지 여러분들은 인생의 자기의 모습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의 전능하심과 우리의 하잘 것 없음을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전폭적으로 붙드는 이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선택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리고 성과 같은 난공불락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도무지 건널 수가 없었던 홍해와 같은 인생의 극한 위험 속에서, 위기 속에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끊임없는 선택과 도전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이 혈루병, 이 절망 앞에서 이 여인은 이전의 자기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음을 깊이깊이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신 마음의 변화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교만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내 인생의 최고의 선택이 없고 내 인생이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선택을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지금 주님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자기의 모습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율법으로부터 정죄를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이 여인의 헐루는 여인의 마음속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 그 자체였던 것이었습니다. 흐르는 피를 닦으며 이 여인은 함께 흐르는 눈물도 훔쳐야 했을 것이었습니다. 저주받은 인생 수없이 죽고 싶은 나날이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지극한 선택과 자기의 인생을 향한 최선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흘러내리는 이 여인의 혈루는 인생의 종말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소망은 분명했습니다. 불행의 늪에서 헤매며 자기의 인생의 갈 길이 희미해지면 희미해질수록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 앞에 섰을 때 그녀의소망은 일시에 분명해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간절하여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 여인의 마음속에 찾아왔던 놀라운 변화였던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여인이 어떤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를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 그의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지 몸이 깨달으니라’ 흐르던 피가 멎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최선을 다해왔던 선택도, 12년의 세월 동안 포기하지 않았던 집념도 고칠 수 없었던 그 절망이 치료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성경은 말하기를 그 근원부터 말라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해결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해결은 잠시 그 흐르는 혈루를 멎게 할 수는 있을 수 있으나 근원을 치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을 치유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12년 동안 혈루병을 참은 것처럼 주님은 12년 동안 이 여인이 예수를 선택하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인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최선의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자기의 최선의 선택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의 전환점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그 분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그리스도를 찾아가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계속되어질 때 우리는 온전히 그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인도와 그리고 최선의 것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우리의 육체적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의 벽 앞에서 깊은 한계를 깨달으면서 그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택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선택이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셔서 이렇게 자기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며 제법 최선의 것을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믿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주님, 우리의 마음속에서 오셔서 진실로 우리가 매 순간 순간 그리스도를 바라고 그리스도를 선택한 그 믿음으로 이 어두운 세상을 이겨날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혹시 혈루병과 같이 치유할 수 없는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그것이 바로 인생의 비극이요 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택하도록 부르시는 기회임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