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사랑과 가정
(201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6월 18일
온전한 사랑과 가정1 (2013.05.04 주일오전)
목 차
온전한 사랑과 가정 2 (2013.05.08. 수요예배)
온전한 사랑과 가정3 (2013.05.12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4 (2013.05.19 주일오전)
1. 네 자녀를 사랑하라(엡 6:4) 2013.5.5 주일오전 1
2. 자녀를 위한 눈물(눅 23:38) 2013.5.8 수요예배 10
온전한 사랑과 가정 5 (2013.05.26 주일오전)
3. 네 부모를 공경하면(신 5:16) 2013.5.12 주일오전 16
4. 복종하고 사랑하라(엡 5:24-25) 주일오전 28
5. 남자와 여자를 지으심(창 2:22-24) 주일오전 36
6. 브니엘에서 만나자(창 32:21-33:4) 주일오전 47
온전한 사랑과 가정 1
온전한 사랑과 가정1 (2013.05.04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 2 (2013.05.08. 수요예배)
온전한 사랑과 가정3 (2013.05.12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4 (2013.05.19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 5 (2013.05.26 주일오전)
온전한 사람과 가정 6 (2013.06.02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1) 2013. 05. 05 주일오전
< 네 자녀를 사랑하라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I. 본문해설
- 사람을 통해 사람이 되게 하심
- 영혼과 육체: 목양+가정교육
- 일차적 의무: 부모에게 있음
- 주의교양+교훈: 성경+사랑
II. 부모의 마땅한 의무
A. 자녀를 양육하라
- ektrepete: 양육하라 (자라게 함, 영양을 공급함)
- 육체와 영혼에 영양을 공급할 의무
- 육체: 음식, 영혼: 진리
B. 교훈과 훈계로 하라
1. 주의 파이데이아 (en paideia)
- 훈련+가르침: 주님의 것
2. 주의 훈련으로
- 지식을 삶으로 실천하게 함
- 영혼의 좋은 힘을 길러줌
- 적절한 격려와 책망 필요
C.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음
1.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
-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
- 가르침과 불일치한 생활
- 과도한 기대와 관계 파괴
- 과도한 징계와 상처 받음
2. 자녀에 대한 사랑없음
- 모든 가르침, 사랑으로 통합
-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게 함
- 사랑으로 가르쳐야 할 진리
- 하나님, 나를 다루신 것처럼
III. 적용과 결론
- 네 자녀를 사랑하라
- 기대하는 삶을 살라
- 주님의 은혜가 필요함
온전한 사랑과 가정(2) 2013. 05. 08 수요예배
< 자녀를 위한 눈물 >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A. 눈물이 있는 신앙
B. 자녀를 위한 눈물
1.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
2. 다음 세대 사회의 전망
III. 자녀의 미래를 위한 길
-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 살아감
- 회심+회심의 보존이 필요함
-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함
IV. 결론 - 자녀 위해 빌라
온전한 사랑과 가정(3) 2013. 05. 12 주일오전
< 네 부모를 공경하면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I. 본문해설
II. 십계명과 인간의 행복
- 두 번 나오는 십계명: 창조+구속
- 인간의 행복: 관계=인간+주님
- 깊은 사상 없어도, 행복에의 지침
- 믿어야할 규칙+살아야할 교훈
- 약속이 있는 첫 계명
-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림
III.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
A. 부모 공경 의미
1. 세 종류의 효도
- 정치적, 동정적, 신앙적 효도
2. 공경(yare): 두려움+사랑
B. 부모 자식 관계의 경륜
- 하나님과 인간의 가족관계
- 보이는 부모가 그 성품으로 기름
- 참사랑으로 한 가족 됨(부+모)
IV. 네 부모를 용서하라
A.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 무관심과 사랑 없음
- 폭력과 비인격적 대우
- 그릇된 모범과 모순들
B. 네 부모를 용서하라
- 공경: 사랑에서, 사랑 없이 불가능
- 용서: 관계 회복의 길
- 하나님께 받을 사랑을 생각하라
-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의 원천
- 자녀에 부모사랑의 본을 보게 함
V. 적용과 결론
- "화해할 부모라도 있다면‥"
- 부모 살아있음이 너무 큰 축복임
- 서로 사랑하라, 네가 희생하라
온전한 사랑과 가정(4) 2013. 05. 19 주일오전
< 복종하고 사랑하라 >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4-25)
I. 본문해설
II.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A. 영적인 연합의 신비
B. 영적인 연합의 결과
1. 교회의 복종
- 영적인 연합의 외적열매
- 사랑으로 진리에 복종함
- 지체로서 머리에 복종함
2. 하나님의 사랑
- 삼위간의 사랑의 교통
-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
- 선과 진리, 사랑의 일치
III. 남편과 아내의 관계
A. 평화를 가져오는 기준
- 누구도 기준이 될 수 없음
-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님
- 진리를 기준 삼는 신앙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B. 남편에게 복종함
- 남편의 권리가 아님
- 아내에게 주는 명령임
- 진리에 합당하게 살라
C. 아내를 사랑함
- 애완견적×, 인격적 사랑임
- 둘 사이의 사랑 자체가 목적×
- 하나님의 선을 구하는 교통애
- 인간의 존엄성을 향한 경외
IV. 적용과 결론
- 서로를 긍휼히 여김
- 오랜 참음으로 기다림
- 모든 만족을 하나님께 둠
- 그 은혜의 힘으로 서로 보완해줌
온전한 사랑과 가정(5) 2013. 05. 26 주일오전
< 남자와 여자를 지으심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2-24)
I. 본문해설
II. 사람을 지으심
A. 남자를 지으심
- 육체: 흙으로 지으심
- 영혼: 직접 창조하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B. 여자를 지으심
- 남자의 몸의 일부로 지으심
-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III. 가정을 이루게 하심
A. 남자와 여자의 질서
- 정복과 개척, 가꿈과 보존
- 가정의 질서: 교회+그리스도
-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경외
B. ‘돕는 배필’로 지으심
- “그를 위하여” kennegedo
- “배필” ezer-응원군, 도움
- 아내 없이 일찍 사망, 죽고픈 남자
C. 서로 사랑하게 하심
-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사랑의 원리: caritas의 통합
- 독립의 원리: 부모로부터 독립함
IV. 타락과 가정의 회복
A. 인간의 타락과 가정
- 관계의 파괴: 신, 인간, 자연
–가정의 파괴: 영원관심X, 이기심
–질서와 사랑의 파괴, 가정 도구화
B.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
-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영생
1. 남편: 교회 향한 예수 사랑
–자기를 주심같이(엡5:25)
- 죄를 기억하지 않는 사랑
2. 아내: 예수 향한 교회 사랑
- 예수께 복종함 같이(엡5:22)
- 사랑으로 인한 온전한 복종
3. 온전한 사람으로 기르심
–아내와 남편을 용납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부모와 형제를 섬기면서
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나라와 가정
- 온전한 사람이 되어감
- 서로 사랑하며 긍휼히 여김
온전한 사랑과 가정(6) 2013. 06. 01 주일오전
< 브니엘에서 만나자 >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 32:21-33:4)
I. 본문해설
- 형제 관계의 중요성
- 야곱과 에서의 화해
- 하나님과의 관계, 형제 관계
II. 형제와 맺힌 것을 풂
A. 에서의 원한
- 어머니의 편애, 축복을 뺏김
B. 야곱의 헌신
- 화해를 간절히 바람
- 많은 선물을 준비함
- 일곱 번 굽혀 절을 함
C. 화해의 은혜
- 하나님을 깊이 만남(창32:27)
- 하나님께 울며 회개함(호12:4)
- 용서와 겸비의 은혜를 주심
-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남
III. 화해하게 하시는 은혜
A. 야곱을 겸비하게 하심
- 복 받았으나 형이 두려움(32:11)
- 전심으로 하나님 의지하게 하심
- 하나님 주권 신앙을 깊이 체험함
B. 에서의 마음을 바꾸심
- 다리 저는 동생을 긍휼이 보게 하심
- 안고 입을 맞추며 화해하게 하심
- 눈물로 서로를 용납하게 하심
IV. 적용과 결론
- 선악은 분별하나 주권에 맡김
- 심판할 대리자× 사랑할 대리자임
-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자
온전한 사랑과 가정 1
온전한 사랑과 가정1 (2013.05.04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 2 (2013.05.08. 수요예배)
온전한 사랑과 가정3 (2013.05.12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4 (2013.05.19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 5 (2013.05.26 주일오전)
온전한 사람과 가정 6 (2013.06.02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 1
온전한 사랑과 가정1 (2013.05.04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 2 (2013.05.08. 수요예배)
온전한 사랑과 가정3 (2013.05.12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4 (2013.05.19 주일오전)
온전한 사랑과 가정 5 (2013.05.26 주일오전)
온전한 사람과 가정 6 (2013.06.02 주일오전)
1.네 자녀를 사랑하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은 기독교 교회에서 꽃주일이라고 불리우는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래 ‘어린이’라는 말이 없었고, 아이 그리고 애놈이라고 아이들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방정환 선생이 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고, ‘이’라고 하는 말은 사람을 존중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리다고 무시되지 않고 ‘어린이’ 다시 말해서 나이가 어린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이’라는 명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은 당신 자신이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성숙한 정신까지도 주셨지만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태어나게 하시되 태어난 그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특히 부모를 통하여 사람이 되어 가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이 되는 근본적인 도리에 관한 지식은 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해서 습득되는 지식과는 종류와 차원이 다른 지식입니다. 이런 것들을 부모로부터 섭취하며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특별히 좋은 환경에서 사람답게 자랄 수 있도록 영양을 공급받고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하나님이 격려하셨고, 또 영혼은 하나님의 진리와 교양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교육받기 위해 가정의 교육과 교회의 목양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자녀가 사람답게 사람이 되는 그 일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낳는 그 순간 이 아이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게 하여야 할 중차대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양으로 아이를 잘 교훈하고, 성경 말씀을 사랑으로 잘 가르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하여야 할 중요한 의무이고 또 이것이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교회만 하나님이 온전한 사람을 만드시도록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함께 나란히 가정을 세우심으로 그 속에서 당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II. 부모의 마땅한 의무
오늘은 이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아비들이 자녀를 노엽게 할 위험이 많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고, 이 의무는 포괄적으로 아버지에게만 해당되는 의무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게 어머니에게도 해당되는 부모의 공통된 의무인 것입니다.
A. 자녀를 양육함
그 첫 번째 의무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에크트레페테’(ektrepete)라고 나온 이 단어는 그야말로 어린 아이들을, 갓난아이를 유모가 잘 돌보아 양육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자라게 하다, 자라도록 돌보다, 영양을 공급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아주 사악하고 나쁜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을 때에 이 아이를 양육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자신이 어떻게 이 아이에게 양육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실제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특별한 보호와 안전한 환경이 필요하고 육체를 위해서는 아이에게 알맞는 영양분 있는 음식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어머니로부터 섭취하는 모유의 양분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양육이 안전한 환경과 그리고 음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영혼의 양육은 교양과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참다운 양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 세상의 자원과 하늘의 자원을 사용하여 적절히 이 아이에게 공급해 주어서 이 아이가 무엇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온전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라도록 해 주는 것이 부모의 마땅한 의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는 영양가 있는 음식과 안전한 환경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마땅히 아이가 마땅히 섭취하여야 할 정신적인 자양분들, 예술과 그리고 정서를 순화시킬 수 있는 교양이 있는 환경,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 아이가 받아들이고 회심하고 주님을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알아가는 이 모든 것들이 자녀의 양육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신의 자녀들을 돌아보면서 부모로서 자신의 의무를 충분히 다하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하고 이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최선을 다하여야 할지 깊이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무책임한 부모는 커다란 폭력을 자녀에게 행사하는 것이고, 어쩌면 그 아이는 태어나지 아니하는 것이 오히려 나았을 만큼 그렇게 불행한 자녀로 만드는 것이니 부모는 자녀를 향한 자신의 양육의 의무에 대해 돌아보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 앞에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B. 교훈과 훈계로 하라
두 번째는 교훈과 훈계로 양육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교훈과 훈계로 되어 있으니까 희랍어 성경에도 두 단어로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마는 사실 희랍어 성경에는 ‘파이데이아’라는 하나의 단어로만 되어 있습니다. 즉,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파이데이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이 ‘파이데이아’는 꽤 어려운 단어입니다. 이 ‘파이데이아’가 원래는 교육, 교수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페다고지’라고 하는 교수학이라고 하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이야기하는 ‘파이데이아’가 무슨 뜻이냐 이런 것입니다. 이 ‘파이데이아’는 단순한 지식을 아이에게 전달해 주는 그런 종류의 지식적인 교육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지식적인 교육은 없이 억압과 폭력으로 어떤 삶의 태도에 복종하게 하는 것도 ‘파이데이아’가 아닙니다. 이 ‘파이데이아’는 아이에게 정확한 지식을 가르쳐 주어 아이의 지성을 설득하고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 지식을 어떻게 실제의 삶에 적용해서 그 진리의 말씀대로 이 아이가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실천까지도 지도해 주어서 아는 것과 느끼고 사는 것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이 ‘파이데이아’를 통해서 그 지식이 실천적인 지식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에 베이게 하는 교수가 바로 ‘파이데이아’입니다. 여기에 맞먹는 단어가 영어에도 없고 우리말에도 없기 때문에 유수한 영어 성경들이 이 희랍어를 번역할 때 고민을 하다가 아예 ‘training and teaching' 혹은 'training and instruction'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즉, ‘훈련과 가르침’ 혹은 ‘훈련과 교훈’ 다른 곳에서는 아예 ‘책망과 교훈’이라고까지 번역을 했는데 어쨌든 ‘훈련과 가르침’ 이 두 개가 하나의 단어인 ‘파이데이아’의 번역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자녀를 ‘파이데이아’로 양육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이에게 부모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가르쳐 주고, 그 지식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아이의 마음속에 그 지식이 적용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몸에 베일 수 있도록 이 지식과 경외가 일치된 방식으로 ‘파이데이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이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양육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가 이런 ‘파이데이아’를 가르치려면 본인 자신이 그런 ‘파이데이아’를 부모로부터 받았든지 아니면 교회로부터 받았든지 스스로 탐구하여 얻었든지 이런 ‘파이데이아’를 통해서 자신도 그 진리의 가르침을 알고 그렇게 훈련을 받아서 주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구도자가 될 때에 비로소 아이에게 가르칠 ‘파이데이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훈련과 가르침, 그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의 ‘파이데이아’로 그렇게 양육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넉넉한 재산이나 아이를 경쟁사회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하게끔 만들어 주는 여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여 우위를 차지하게 하는 지식과 참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지식은 종류와 차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신이 비록 높은 수준의 교육을 못 받았어도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녀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울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참 사람이 되게 하는 지식은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고, 오히려 적게 배웠어도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훈련하고 이것이 실천적인 지식이 되어 삶과 결탁된 부모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참 사람답게 살게 하는 탁월한 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훌륭한 선생님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배우고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사람다운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중요한 의무는 이러한 파이데이아로 지식을 삶으로 실천하도록 아이를 가르치고 그의 영혼 안에 좋은 힘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할 때 그것은 정신의 크기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의 크기는 지성의 크기와 감성의 크기입니다. 감성은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힘이고, 지성은 사물의 이치를 잘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고, 이웃이 누구인지를 바로 헤아리며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지를 깨닫는 지식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지성과 감성의 크기를 키워갈 수 있도록 부모는 아이에게 좋은 교육적인 환경을 제공하여 양육할 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을 이렇게 지식과 삶이 일치된 파이아로 잘 길러서 이 아이의 영혼의 기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발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커다란 의무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그들이 기독교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행복해져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지혜가 없이 행동하며 살 때에 겪는 고통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자녀들이 무지로 말미암아 그렇게 자신처럼 어둡고 고통 속에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을 ‘파이데이아’로 양육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젊은 부부들에게 아이에게 유아 세례를 주고자 하면 철저하게 훈련을 받고 교리를 익히고 시험을 치른 후에야 유아 세례를 주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찌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겠으며 살아보지 않은 진리를 어떻게 아이에게 전수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는 주의 파이데이아로 양육되어야 하고 이것은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지식과 생활의 일치에서 오는 아름다운 삶과 그 삶을 위한 마음의 열정이야 말로 자녀들에게 경건한 파이데이아로 양육하는 가장 중요한 부모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온 마음을 다해 이 자녀를 위하여 양육하고 온 마음을 다해 이 자녀가 주님의 파이데이아로,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도록 양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해 봅시다. 정말 우리에게는 주의 파이데이아가 있습니까? 그리고 자녀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래서 자녀가 그것을 따라 살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고 만약에 자녀가 그것을 따라 살지 않을 때에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불처럼 느껴집니까? 자녀들이 올바로 교육받지 못함으로 여러분들이 무지 속에서 살았던 불행하고 어두운 날들을 본받아 살기를 원치 않아야 할 것이고, 또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위로와 큰 사랑을 받았다면 이런 위로와 사랑을 아이들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뱃속으로 낳은 새끼가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들이 고통 받으며 상처 속에서 어두움과 함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아이에게 파이데이아로 가르쳐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는 부모님께로부터 경건한 신앙을 물려받지 못하고 스스로 신앙을 갖게 된 1세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진리의 빛, 복음의 광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허비하였던 인생의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부모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이미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왜 이러한 끔찍한 불행을 우리의 자식들에게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부모는 주의 파이데이아로 자녀를 양육하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힘을 기울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가르침을 받는 부모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C.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음
마지막 세 번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이것은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확률적으로 볼 때에 여자인 어머니보다는 남성인 아비들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부는 아버지에 대한 명령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포함하는 부모 모두에 대한 명령인 것입니다. 어른들은 노여움을 타게 될 때에 그 노여움을 자기를 노여워하게 만든 사람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아직 그렇게 노여움을 타도 그 노여움을 표현할 수 있는 권력이 없고 더욱이 부모에게는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이 노엽게 되면 이 노여움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 노여움이 마음에 싸여 일평생 그를 사로잡아 제 2의 천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커다란 폭력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 대한 중대한 파괴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가 어떤 것 때문에 이렇게 노엽게 되는 것일까요? 첫째는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입니다. 자식은 낳았지만 그러나 부모로서 기본적으로 자녀에게 대한 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될지에 대한 아무 생각이 거의 없고 사랑도 없어서 자녀를 방치하는 것, 이것은 자녀가 말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이 무관심과 버림받은 방치의 기억들이 쌓여 지워질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되고 이것이 자녀들의 마음에 노여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녀들의 마음속에 있는 노여움은 일생을 두고 이 사람의 앞날에 발목을 잡아 고통 속에 살게 할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화장실에서 신문을 보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신문에는 꽤 길게 미국으로 입양간 아이가 자기의 뿌리를 찾는 절절한 과정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처음으로 한번 그렇게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그리고 정말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도 확인할 수 없는 그 입양아들의 처지에서 인생을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어느 길거리에서 버려졌다는 사실만 알뿐 부모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입양되어 양부모에게서 자랐고 그 가족들의 냉대를 받으며 설움을 받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어느 수업시간에 “한 커다란 나무가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때에 쓰러졌다. 그러면 그 나무는 존재하는 것인가? 본 사람도 없고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안 사람도 없고 나무 자신도 의식이 없을 때 그 나무는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가슴을 때려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처럼 느낀대서 뿌리인 부모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 “네 부모를 용서하라”는 설교를 했을 때에 60은 되어 보이시는 어느 신사 한분이 비서실 문을 벌컥 열고 들고 들어오셔서 소파에 앉으셔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이 부모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여태까지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저를 낳은 지 일주일 만에 부모가 저를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말입니다.” 그 긴 세월동안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본인도 지워버릴 수가 없어서 운명처럼 붙들고 살았고 이제는 손자 손녀를 볼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 고통의 상처는 노여움과 함께 사라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식은 항상 부모 앞에는 아기일 뿐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어렸을 때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가슴속에 남고 오히려 더 많은 세월이 흘러 부모조차도 자식을 버린 사실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식은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무관심하게 방치되었던 기억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자신의 운명처럼 붙들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늘 내가 결심하고 떨쳐버릴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기억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 아이의 영혼 깊은 곳에 본성처럼 자리 잡아 일평생을 붙들고 온 것이기 때문에 그 노여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부모가 되었다면 절대로 자식을 버리지 말기 바랍니다. 물리적으로 길거리에 갖다가 버리는 것만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무관심하고 방치하는 것, 아이가 부모인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 그저 그런 관심사로 밀려나는 것 자체가 자녀에 대한 무언의 폭력이고 아이들이 이 폭력에 항거할 권력이 없어 침묵하고 있지만 이미 그 마음 안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처들은 종종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그 사람의 운명까지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한 사람을 이렇게 폭력 가운데 짓밟도록 권력을 주신 사람이 누구에게, 누가 그런 권력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이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행복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리고 아이가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아이의 이러한 처지를 인식하고 그 아이가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모두 바쳐 이 아이를 위해 이바지 하겠노라고 하는 무언의 서약이 포함된 것이고 이것이 없이 자식을 낳고 새끼를 갖는 것은 짐승이 번식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자식들은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뿐 아니라 가르침과 불일치한 부모의 생활을 보며 노여움을 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의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부모의 얼굴 앞에서 배우지만 나이가 먹으면서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비록 앞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은 어눌하고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해서 청산유수와 같지 못했다 할지라도 부모의 올바른 삶을 보면서 가르치고자 했던 그 진리와 일치한 생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그러한 삶이 얼마나 힘들지를 성인이 되어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그 부모를 충심으로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물리적으로 내어버리는 것이 무관심과 방치라면 가르침과 불일치한 생활은 아이들의 도덕의식에 대한 심각한 폭력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자녀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아이들과의 관계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면 누구나 다 최고의 학자가 되겠습니까? 아이들이 운동을 하면 누구나 다 월드스타가 되겠습니까? 아이들이 노래를 하면 모두 훌륭한 연예인이 되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자녀를 향한 빗나간 사랑이 자녀에 대한 아이의 능력을 뛰어넘는 과도한 기대를 갖게 만들고 자신이 못나게 살았기 때문에 한풀이 하듯이 자녀에게 그런 기대를 이입시켜서 그래서 그 아이가 그러한 사람이 되어주기를 강요하는 것은 결국은 마지막에 관계의 파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서 부모와 자식 간에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사랑의 관계가 간곳이 없어지고 이로 말미암아서 아이들은 깊은 상처를 받으며 부모와의 관계를 일생동안 파괴된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자식들 중에는 부모가 성심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해 줬는데도 아주 못된 놈들이 있어서 부모에게 그 절절한 사랑을 불효로 갚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효하는 자식들은 대부분의 경우 부모로부터 충분한 인격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나실 때 괴로움을 다 잊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아이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어떻게 그 자식이 그렇게 불효한 자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아이의 작은 잘못에 대한 과도한 징계와 폭력, 폭언, 이런 것들은 아이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고 어렸을 적에 받은 이 상처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서 제 2의 본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부모로부터 올바른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자식들은 커서도 자기가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는 한 대물림되기가 십상이고 그래서 결국은 불효자식의 집안에서 또 다른 불효자식이 나오고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식이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식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어 자신의 고통을 대물림하게 되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소극적인 것이라면 적극적인 것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가르침, 모든 파이데이아는 반드시 사랑으로 통합되어야 하고 사람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사랑을 받는 가운데에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깨닫는 가운데 사랑을 받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가도록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진리를 따가운 채찍으로 우리를 때림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녹여 마침내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붙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그리고 우리의 본성대로 자라도록 우리를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매일매일 돌보심으로 죄 된 본성을 버리고 우리 주님을 따라가기를 인격적인 승복의 과정을 통해 그 일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종종 생일이나 기쁜 일이 있는 때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종종 저에게 화분을 선물해 오는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제가 들어오자마자 번쩍 들어서 밖에 내다버리는 화분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도 그런 화분을 누가 하나 가져와서 얼른 들어오자마자 리본 떼고 바깥에 가져다 버렸습니다. 그것은 분재입니다. 분재에다가 작은 나무를 심어놓고 그리고 나무를 구리철사로 칭칭 감아 그 철사를 감아 놓은 사람의 의도대로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하고 그리고 싫습니다. 그리고 더 혐오스러운 것이 새장 안에다 새를 가두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저희 할머님이 운명하시기 전에 저에게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얘야, 내가 죽거든 제발 묶지 마라. 나는 일평생을 묶여 살았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에 죽으면서도 묶여서 가기는 싫다. 그냥 치마저리고 입혀서 자는 듯 관 속에 뉘어다오.” 그래서 저는 할머님의 그 분부를 따라서 그대로 해드렸습니다. 수의 대신 하얀 인조견 치마저고리를 입혀드리고 제가 직접 얼굴을 닦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일체의 줄 없이 그대로 침대에 눕히듯이 관속에 누이고 몸이 흔들릴까봐 가상 자리에만 솜을 박아서 그래서 움직이시지 않도록 해서 매장을 해 드렸습니다. 저는 그때 그 할머님의 말씀이 절절히 기억에 납니다. “나를 묶지 마라.”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는 마치 그 말씀이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노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억압과 폭력, 폭언과 자신의 생각으로 아이들을 강요하며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신의 자식이 특별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 점에서 저도 그저 평범한 그런 부모에 불과했습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아들을 하나 낳고 그리고 이 아이가 정말 특별한 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영특하고 책도 많이 읽고 학교 가면 항상 앞뒤로 100점을 맞아서 왔습니다. 그러던 아이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했고, 한동안 아이를 잘 못 돌보았던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빗나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정말 내가 원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책망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가끔씩은 매를 들어서 아이를 피멍이 들도록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늘 내 마음속에 위로를 주는 말씀은 잠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아이를 초달하기를 마다하면 아이를 망치는 것이다.” 영어 속담에도 "Spare the rod, and spoil the child."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 이것이 부모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이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그리고 아이는 점점 저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쯤 되었을 때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다가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혼자 조용히 차를 몰고 집회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마음이 열리며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고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바라. 너도 나에게는 자식이고 네 자식도 너에게는 자식인데 너는 왜 네 자식을 내가 너를 다루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느냐? 나는 너를 오래 참고 한없이 사랑으로 돌보지 않았느냐?” 운전을 하고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동안에 자식에게 했던 그 모든 잘못된 부모로서의 사랑 없는 행동들을 그리고 지나친 책망과 징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기의 견해와는 맞지 않는 자식의 행동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는 부모로서의 회심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매를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래참고 주님이 나를 위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기다려 주셨던 것처럼 비록 이 아이가 내 기대만큼 공부를 못하고 다른 아이들만큼 재능이 없고 탁월한 점이 없어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런 조건에 의해서 부모가 되는, 자식이 되는 계약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가 설교를 잘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성품이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이 자신의 피를 발라 구원한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나의 자녀를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그날 운전을 하고 오면서 운전대를 붙들고 기억에는 차를 세운 것 같습니다. 참 많이 울었습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모든 부모들이 저를 따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 그 회심한 이후 대학원에 다니는 지금까지 난 단 한 번도 아이에게 성적표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체의 오래 참음으로 사랑하고 믿어주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내가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만 하면 그것 때문에 가장 기뻐할 아버지다.’라는 마음이 아이의 가슴속에 새겨지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루신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내가 하나님에게 아들인데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아들이 되지 못한 것은 우리 아들이 나에게 온전한 아들이 되지 못한 것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그런 폭언이나 폭력, 위협이나 그리고 비인격적인 억압으로 나를 다루신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리실 적도 있었지만 한 번도 그분은 당신 마음 아팠던 것들을 내게 복수하기 위해서 때리신 적은 없고 언제나 부드럽게 타일러 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려고 마음을 때려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게는 그런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오랫동안 참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는 하나님과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자녀는 여러분들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매우 특별하고 여러분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특별합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의사인 잘 나가는 아들을 사고로 갑자기 잃어버린 다음 비통한 시간들을 보내다가 자기 친구 집에 마실을 갔답니다. 그리고 사지를 잘 못 쓰는 장애인 아들을 돌보고 있는 친구를 한없이 부러워하면서 마음속으로 “너는 그래도 사랑하고 돌봐줄 장애가 있는 자식이라도 있구나. 나는 그렇게 사랑해 주고 싶어도 이미 아들이 없단다.” 라고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를 꽃으로도 때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사람으로 길러달라는 우리 주님의 부탁을 따라 온전히 사랑하며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녀를 양육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자녀를 위한 눈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3:28)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해설
본문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을 때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였고 예수님은 예언대로 이 유월절에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고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지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는 구경꾼들도 있었고 또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통 받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이 여자들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여자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뒤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가진 이 여자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태도가 나옵니다.
A. 눈물이 있는 신앙
제일 먼저 이들에게는 눈물이 있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있는 신앙이 이 여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들을 섬기고 일평생 모든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깊은 사랑과 그리고 존경을 표하며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그 고난에 대하여 고통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내 마음을 품고 살아간 그것에서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선하신 뜻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만만하고 좋은 환경만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믿음을 따라 살려는 사람에게는 항상 분투하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이 성취되지 못하고 좌절할 때 눈물을 흘리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에서 받으시는 고난은 우리가 함께 참여하며 받기 원하시는 고난이고, 그 고난을 통해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해져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정도의 많고 적음, 고난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유무의 문제가 하나님께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을 받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고난이 어떤 종류의 고난이고 누구를 위한 고난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평탄하고 아무 근심이 없는 형통한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은 마음에 기름이 져 지방이 가득하여 희희낙락하며 일생을 살았지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분투하며 사모하며 사느라고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받고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진리를 멀리 떠난 어둠속에서 죄악 가운데 흘리는 눈물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눈물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신앙은 눈물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은 사람도 벳세다 광야에서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었던 사람도 그 분께 섬김을 받으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도 막상 예수가 고난을 당하실 때에도 그 분 곁을 떠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여인들은 예수님 곁에 남아서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실 때 그 고통에 참여하지는 못해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 눈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해 흘릴 눈물이 있는 신앙,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할 눈물이 있는 신앙,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신앙인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당해야 할 고난이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밤새도록 주무시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받으셨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왕궁 수비대에 끌려가 심하게 채찍질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채 홍포를 입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길에 쓰러지실 듯이 나타나실 때에 주님을 사랑하던 이 여인들은 경악하였을 것입니다. 평생 예수님이 종처럼 자신을 섬기셨지만 그러나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목숨처럼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 채찍을 맞으며 등장하셨던 적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행렬이 골고다 언덕으로 가까울수록 이 여인들의 눈물은 피어린 통곡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위해서 가슴 아파 하며 울고 있는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몸을 돌이켜 이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 십자가를 지고 큰 고통을 당하시다가 그것도 지시다가 자꾸 쓰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구레네 시몬에게 짊어지게 하고 예수 홀로 그 골고다의 길을 오르실 때 몸을 돌이켜 당신을 위해 통곡하고 있는 여인들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여인들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를 위한 눈물을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B. 자녀를 위한 눈물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는 촉구였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며 울고 있는 여인들의 고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는 멀리 갈릴리로부터 온 여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여인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그 많은 약속의 자녀들, 특별히 이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지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이 여자들은 모두 예루살렘의 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예루살렘의 딸들이란 표현은 구약에 비추어 보면 예루살렘에 딸려 있는 많은 동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언약백성인 여성들이 이렇게 예수를 사랑함으로 통곡하고 있을 때 “너희들은 나를 사랑해서 나 때문에 우는데 이제 나를 위해서 울지 말아라. 나는 어차피 너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때문에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란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바로 역사적으로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대 파멸에 관한 예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끊임없이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보다 못해 로마의 조정은 디도스라고 하는 장군을 보내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공략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은 저항하다가 함락이 되었고, 함락된 그 이후에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뒤를 이었습니다. 남은 유대인들은 ‘맛사다’라고 하는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서 저항하였지만, 다시 공격하는 토성을 쌓으면서 쳐들어오는 로마군인의 공격을 받아 모두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 속에서 일어난 심판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울고 있는 이 여자들에게 내가 죽는 것은 너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이지만,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고, 그 때 당하게 될 큰 환란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니 거기에서 너희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너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예수님이 눈물로 권고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며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이 세상이 너무 낯섭니다. 20년이나 30년, 혹은 5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번영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인간은 그때보다 훨씬 더 정신적으로 비참하고 방황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50년 전보다 지금이 자살률이 훨씬 더 높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이러니 이러한 세대가 계속 진행될 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처럼 성인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살아갈 그 때에는 이 세상에 어떠한 풍조가 찾아오게 될 것이고, 어떤 사조가 오게 될 것인가는 우리들이 예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물질적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번영하는 시대를 살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인간이 더더욱 진리를 싫어하고 상대주의에 흘러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사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독교의 진리는 과학적 진리에 의해 지금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공격을 당할 것이고, 그리고 교회도 이러한 상태로 진행된다면 이러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녀들이 20년 혹은 30년 후에 살아가게 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게 그리고 방황하기 쉬운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볼 때 20년 정도 후에는 기독교 신앙보다는 무신론이나 불신앙이 훨씬 더 보편화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구도 현격하게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과 이성의 설득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될 것이고, 이제까지 우리들이 비교적 성경과 합치되었다고 믿는 가치관들을 모두 버리도록 강력하게 이 세상의 제도와 법에 의해서 요청받게 될 것입니다.
(예화) 우리나라에서도 차별금지법이 입법 예고화 되었고 아마 커다란 저항이 없는 한 통과될 것이라 하는데 많은 우려를 낳게 됩니다. 영국을 예로 들자면 이미 그러한 법령이 오래 전에 통과되었고 그 결과 교회는 선교적인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남자 두 사람이 교회를 찾아서 “목사님, 우리 주례를 서주십시오.” 하는데 목사님이 “남자끼리 무슨 결혼을 하냐? 주례 안 서준다.” 하면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그 법을 피해갈까 생각하다가 교회가 정관을 만들어서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 교회 담임 목사는 이러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례를 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교인들 전체의 뜻이다.”라는 법을 만들고 당신들이 나보고 결혼 주례를 해 달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다는 거를 보여주면 겨우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한 시대를 아주 가까운 장래에 마지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될 때 우리 자녀들은 지금보다도 자력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고, 우리 자녀들이 그렇게 신앙을 가질 수 없을 때 우리의 자녀들의 그 다음 세대인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물려받게 될 확률은 훨씬 더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루살렘을 덮치고 있는 로마의 살육하는 멸망은 단지 육체를 죽이는 멸망이었지만, 우리 세대 앞에 드리우고 있는 미래의 어두운 불신앙의 그림자와 세속주의의 어두움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죽이는 끔찍한 살육이 될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둔 이 여자들에게 눈물로 자녀를 위해 기도하도록, 울도록 촉구하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 이ㄹ유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Ⅲ. 자녀의 미래를 위한 길
그러면 자녀의 미래를 위한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 살아가기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모두들 찬송하는 기쁨의 분위기였지만, 예수님 홀로 예루살렘 성 가까이 오셨을 때에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오늘날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루살렘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다음 세대의 이 어두운 전망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제일 먼저 우리의 자녀들이 회심해야 하고, 회심한 후에는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어른들의 영혼과 아이들의 영혼이 종류가 다른 영혼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영혼이 살고 죽는 원리도 어른들의 영혼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진리를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정말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아오던 보좌를 우리 예수님께 내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회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함으로써 참 신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자녀들의 회심 문제를 진지하게 강조하였고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의 회심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우리의 자녀들이 회심하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속에 심겨지게 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겨진 회심의 씨앗이 계속 싹이 나고 잎이 펴지고 그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 회심의 은혜가 우리의 아이들 속에 보존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은혜가 보존되지 않으면 그는 속히 옛 삶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회심한 것이 그의 인생에 기쁨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가 우리의 자식들에게도,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아이가 회심하였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회심한 후에는 이 아이가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성경말씀을 배우며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노력을 하고 이것을 위해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가정은 이렇게 부어진 은혜를 식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화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이 세상의 거짓된 가치관과 그리고 거짓된 사상을 성경 진리의 말씀으로 극복하고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의 진리가 이 세상의 이성적인 지식의 체계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우월하다고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으로 든든히 세워주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Ⅳ. 자녀를 위해 빌라
그러므로 자신의 자녀가 회심하지 않았다면 이 처음 회심을 위해 부모들은 간절히 울어주어야 할 것이며, 회심하였다면 이 아이가 은혜를 보존하고 날이 갈수록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래서 그가 주님의 자녀임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정체성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교회는 순수한 경건의 진작을 위해 복음의 교리들을 가르치고, 또한 이후에 그들이 획득하는 모든 지식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는 아주 분명한 지식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이 아이들을 교육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고 든든한 삶인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회심의 은혜를 보존해야 하고 그래서 교회는 마음을 다해 목양에 헌신함으로 이 어린아이들을 돌봐야 합니다. 교회에서 받은 바 그 은혜를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경건한 분위기에서 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봄으로 그 회심의 은혜가 보존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능히 지적으로도 끊임없이 성장해서 세상의 헛된 가치관들을 유치하게 여길 수 있도록 사상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전한 경건의 정서 속에서 세속적인 정서를 이기며 살아갈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보이는 우리 교회의 자녀들, 우리 가정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나타나도록 그래서 우리의 시대의 그 자녀들의 믿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이들이 어리지만 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커다란 나무로 자라서 우리가 그들을 보호하고 사랑한 것보다 훨씬 더 능력 있게 자기의 다음 시대의 자녀들을 끌어안고 거룩한 믿음의 기반 위에 그들을 세우도록 그렇게 큰 사람들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산은 한 두 그루의 나무로 지탱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 강원도 깊은 산속에 들어가 보십시오. 월정사 같은 곳에 들어가 보면 두 세 사람이 끌어안아야 될 만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100m 가까이 되는 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습니다. 뿌리의 길이는 나무의 높이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나무들이 땅 아래에서는 깊이 뿌리를 박고 옆으로 퍼지며 서로 나무끼리 땅 속에서 굳게 손을 잡고 얽혀 있는 것입니다.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산을 산답게 지탱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마어마한 홍수가 쏟아지고 비바람이 쳐도 나무 한 그루라면 쓰러지고 뿌리가 뽑힐지 모르지만, 그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땅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하게 얽혀 생명력 있는 뿌리들을 서로 붙들고 있기 때문에 산 전체가 그들에 의해 장악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시대의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서로 거룩한 신앙에 굳게 붙들려 서로가 서로 사이에 아름다운 신앙의 연결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자녀들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과 삶 속에 강력한 복음과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3.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명기 5: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이 서로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행복하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이지 불행에 빠지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그렇게 마음의 소원만큼 행복한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이 불행하거나 혹은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삽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행복이 소유나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많고 사상이 깊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부족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십계명과 인간의 행복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 십계명을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이 계명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배려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II. 십계명과 인간의 행복
구약 성경에서 이 십계명은 두 번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0장에 한번 등장하고 신명기 5장에 등장합니다. 출애굽기의 문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 반도로 가서 시내산에 모였을 때에 하나님이 돌판에 직접 새겨서 주신 십계명이었습니다.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이 십계명은 40년 가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한 후 이제 저 요단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모세가 유언처럼 남긴 설교 속에서 되풀이 되는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내용은 양쪽 다 정확하게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도입하는 도입부의 이야기는 서로 다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 십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면 이 신명기의 십계명은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속해 내신 여호와라고 하는 구속의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모든 인류에게 십계명을 지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더욱 삶의 지침으로써 이 십계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고, 또 성경은 수평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게 될 때에 진정으로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바로 이런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를 어떻게 올바르게 정의하고 살아야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교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믿어야 할 규칙이 하나님께 대한 규칙이라면 살아야 할 생활은 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람들 속에서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삶의 지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은 2부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사람들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아마도 이 두 개의 돌판이 하나에는 1번부터 4번까지, 또 하나에는 5번부터 10번까지 새겨졌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10개의 계명 중 단 하나, 부모 공경의 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열 개의 개명 중 가장 첫 번째 계명이 중요합니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그러나 거기에서 끝납니다. 약속이 뒤에 깃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 공경에 대해서는 약속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하였습니다.
1940년대 한국을 기준으로 남성 평균 수명이 42세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조혼의 풍습이 유행했던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80세로 보면 40세가 중간인데, 40으로 보면 20세가 중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14살에 17살 먹은 할머니에게 장가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기억에는 신혼 시절에 대한 기억이 없고 철없는 애가 뛰어다니던 기억 밖에 없답니다.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도 마흔 일곱에 돌아가셨습니다. 좀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그렇게 짧았던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17세기에 남성 평균 수명이 34세에서 36세였습니다. 그러니까 대게 20대 초반에 박사를 다 마치는 것입니다. 그게 지금으로 보면 벌써 60세쯤 된 나이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빨리 장가가서 굉장히 조숙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학문적인 수준을 보면 놀랍습니다. 10세쯤 됐는데 그 교육의 내용이 굉장히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더 시대를 뒤로 돌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생활 동안에 수많은 전쟁과 환란을 만났고, 자연 재해를 만났고, 수시로 질병에 시달리며 죽음의 위협을 느끼던 시대에 오래 장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하시는 이것은 그들에게 엄청나게 인상 깊은 현상금이었다는 것입니다. 좀 이해되십니까?
더욱이 여기에서 복을 누리리라 할 때의 이 복은 영적이고 신령한 종교적 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섭리에서 받는 모든 복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복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이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상급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이 이렇게 10가지 계명 중에서 특별히 이 허리부분에 와 있는 다섯 번째 부모 공경의 계명에 이렇게 다른 계명에는 없는 커다란 현상금을 거셨다는 이야기는 이것은 반드시 인간들로 하여금 지키며 살게 하고 싶었던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면적이 넓고 사람들 수가 많기 때문에 살인 사건 중에서 미제 사건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을 당해도 억울하게 결국은 수사 결과를 못 보고 그냥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냐 하면 경찰에서 도저히 범인을 잡을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 독자적으로 사비로 현상금을 겁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거는 것입니다. 10만 불, 20만 불, 30만 불씩 현상금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에는 그놈만 잡으러 다니는 직업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은 포기해도 이 사람들은 그게 생업이니까 집요하게 찾아서 결국은 잡아냅니다. 그래서 폭력배나 혹은 강도들도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은 굉장히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현상금을 걸어서 반드시 자신들을 추적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큰 현상금을 걸었을 때에는 반드시 이것을 지키게 하고 싶다는 하나님의 마음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오늘 여기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셨는데 그러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원래 이 ‘공경하다’라는 동사가 히브리어로 ‘야레’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의미는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공경이라는 이 단어는 두려움인데 공포만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라 떨리는 두려움과 함께 이끌리는 사랑이 함께 어우러져서 그 정서가 인격과 삶으로 나타나는 그 총체를 가리켜서 공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원래 하나님께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부모를 공경하다에도 똑같이 사용이 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녀를 향해서 부모와 어떤 관계를 갖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부모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부모에 대한 깊은 존중심과 두려움과 함께 부모를 향한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주께 하듯이 부모를 섬기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식들이 부모에 대해서 갖기를 바라시는 태도였고, 여기에 하나님이 현상금을 거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 성경구절을 뒤집어서 읽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지 말거라. 그러면 너는 길거리에서 젊은 나이에 객사할 것이고 쪽박을 찰 것이라” 이렇게 읽으시더랍니다. 뒤집으니까 그렇게 됩니다.
III.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
A. 부모 공경 의미
우리나라에서는 이 공경을 “효”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효”라는 한자를 보면 늙은이를 아들이 업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의 생각에도 이 효는 부모를 부양하는 것 그래서 부모로 하여금 자기를 의지하여 살게 하는 것을 공경의 도요, 효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효도가 모두 효도가 아니라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진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정치적인 효도입니다. 이것은 뭔가 의도가 있어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재산을 전혀 안 물려주면 자식에게 맞아죽고, 조금 물려주면 볶여죽고, 다 물려 주면 굶어죽는 답니다. 셋 중에 무얼 택할지는 여러분이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어느 할아버지가 경로당에서 투덜거렸습니다. “이 놈들은 뭐가 바쁜지 지 애비 생일에도 안 온다.” 그러고 불평을 털어 놓았더니 옆에 있는 노인네가 팁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음에는 그러지 말고 전화를 이렇게 해 봐라. 얘들아. 일주일 후에 내 생일이다 모두 오너라. 그러면 틀림없이 며느리가 받고 아버지 저 이번에 우리 애가 무슨 체육대회 나가는데 그럴 거다. 그래 너무 바쁘면 오지 말거라. 우리가 와서 밥 한 끼 먹고 마지막에 차 마시면서 우리 유산 문제 배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면 모두 올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끝나면 그 카드는 한번밖에 못 쓰니까 절대 나서지 말고 너희들끼리 먼저 의견을 얘기해 보라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의견이 합치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 금년에는 결론이 안나니 내년에 다시 얘기하자. 그러면 매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효도가 동정적 효도입니다. “에이고 다 늙으셨는데 뭐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인데 우리 아버지 그래도 밥이라도 제때 챙겨 드려야지” 이것은 마치 노숙자들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해 주는 이런 효도,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효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앙적인 효도입니다. 이 신앙적인 효도는 인격적인 효도이고 그 부모님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깊은 존중심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떨림과 사랑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이것이 진정한 신앙적인 효도입니다.
B. 부모 자식 관계의 경륜
하나님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렇게 커다란 현상금을 걸듯이 이렇게 강력하게 부모를 공경하는 관계가 되도록 자식에게 요구하신 것은 부모 자식 관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커다란 경륜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특히 소나 말과 돼지, 들판을 뛰어다니는 야생 동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그 어느 것과도 관계를 갖지 않으시는 사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분이 맺으시는 관계는 각각 같지 않고 다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이 사람과 당신이 어떤 관계를 갖으실 것인지를 생각하시면서 사람을 만드셨겠습니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사람을 지으셨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마음속에는 이 인간을 만들어 놓으면 이 인간과 당신이 어떤 관계를 가져야 되겠다는 그림을 가지고 원대한 계획 속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수준의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를 생각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주시지 않은 영혼을 주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셨고, 그래서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모든 사람과 사물을 이해할 수 있게 하셨고, 또 믿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과 사물들을 바라보며 기쁨과 슬픔, 그리고 분노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이 설정하시려고 했던 그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지는 유비, Analogy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가족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 “나 여호와는 너희의 사장님이니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나 여호와는 너희 제품들을 만든 공장장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나 여호와는 너희의 아버지다.”라고 하면서 아버지라는 그림을 가지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아버지라는 말을 우리들이 이해하는 것은 결국은 사회적 경험이 언어에 대한 이해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언어에 대한 이해는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귀납적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불행히도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자매들은,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에 감동을 해본 적이 없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사실은.
134개국의 사람들에게 앙케이트를 해서 가장 가슴 설레는 기쁜 단어가 뭐냐 그랬더니 모두 일치하게 1위를 뽑은 게 뭐냐 하면 엄마입니다. 그러면 엄마가 1위면 아빠는 2위나 3위, 좀 양보하면 4위쯤은 나와야 되잖아요? 10위에도 안 나오고, 20위에도 안 나오고, 30위, 50위에도 안 나오고 70위 바깥에서 72윈가 74위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요번에 송호근 교수가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50대 아버지들의 슬픈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춘은 아플 권리라도 있지 이 아버지는 아플 권리도 없습니다. 울어도 혼자서 웁니다. 이게 너무 가엽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참 감사한 게 40대, 50대 남성들이 참 회심을 많이 합니다. 내가 사실은 그 분들을 등산도 데리고 다니고, 다른 교회에서는 낚시도 다니고, 심지어 골프도 데리고 다니고 이렇게 서비스를 많이 해 주는데 나는 사실 잘 만나서 밥도 잘 안 먹어 주거든요. 그런데 그 50대들이, 40대들이 여기에 와서 회개하고 그 어둠 속에서 홀로 흘리던 눈물들을 정리하는 것을 생각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십시오. 어쨌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의 그림이 우리는 지금 타락한 이후에 가장 일그러진 그림이 아버지에 대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 그럴 때 우리들이 경험한 아버지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안 맞고 감동이 안 됩니다. 차라리 하나님 우리 엄마 그러면 감동이 될 사람들은 숫자가 확률적으로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돌아가신 황수관 박사가 한번 간증을 하는데 동경에서 온 가족이 모여 살고 있는데 미군이 와서 폭격을 했답니다. 아마 그게 내 생각에는 대동아 전쟁 때 일이었나 봅니다. 폭탄이 여기 저기 떨어지니까 엄마는 애들을 끌어안고 방구석에 엎드렸는데 아빠는 어디로 도망가서 광 밑에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폭격이 끝나자 돌아와서 나도 내 정신이 아니라서 그랬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깊이 사과를 하고 이제 죽든지 살든지 생사를 함께 하마 그러셨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좀 살다보니까 6.25가 터진 것입니다. 그래서 6.25가 터져서 이제 피난을 가는데 산길을 걸어서 쭉 애들을 데리고 보따리를 매고 가는데 막 중공군의 총소리가 막 들리더랍니다. 엄마는 세 아이를 끌어안고 길바닥에 엎드렸는데 아빠는 잽싸게 뛰어 내려가서 절대로 총에 안 맞는 그 바닥에 엎드려서 굴에 숨은 것입니다. 이게 우리 인상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 그림입니다. 그러니 이게 감동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에 이 그림이 보다 완전한 아버지이고, 이 완전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합친 그림입니다. 그래서 모성과 부성이 공존하는 그래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성이 공의로운 부성을 침해하지 않고 아버지로서의 공의로운 부성이 어머니의 긍휼에 넘치는 모성을 방해하지 않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의 그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어머니라는 별도의 칭호가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허랑방탕한 아들이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유산을 빼앗아 가지고 가서 다 탕진하고 굶어죽을 때가 되니까 아버지 집을 찾아왔는데 그 아들을 먼저 발견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날만 동구 밖에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아들이 떠난 그날부터 매일 눈이 짓무르도록 동구 밖에서 기다렸는데 요즘 어느 아버지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엄마의 일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부성과 모성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로서 다시 말하면 어머니가 필요 없는 아버지로서 자식들과 관계를 맺게 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부성과 모성을 남성과 여성에게 나누어 주시고, 그들이 서로의 성품을 필요로 하도록 관계를 맺게 해 주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그 결과로 아이를 태어나게 하셔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각기 다른 하나님의 성품을 보양 받으면서 삶의 교훈을 터득하며 참된 인간이 되는 비결을 터득해 가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그런 사랑 속에서 모두가 형제가 되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속에서 한 가족처럼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이 인류 사회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경륜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식이 부모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표준에 맞게끔 공경하는 거기에서 자식은 인간으로서의 자아의 완성을 발견하게 되고 부모는 부모로서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고 주의 교훈과 교양으로 양육함으로써 그 과정을 통해서 부모는 참된 인간으로서의 부모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서 사도 바울이 여자가 해산을 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랬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젊었을 때 팔짝팔짝 뛰는 신앙은 모릅니다. 그게 중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시집가서 아기를 낳아보면 그 신앙이 정말 깊이 들어간 신앙인지 알게 되는데 그것도 연년생이나 혹은 쌍둥이를 낳아봐야 압니다. 연년생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키우면서 이제 거기서 비로소 이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지금 그러면 애 못 낳아본 사람은 그러면 인간도 아니란 말입니까? 아직까지 시집 장가 못한 것도 서러운데 “예 아직은 인간이 아닙니다.” 마늘을 먹을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됩니다. 그게 도저히 섭리 속에서 어렵다고 그러면 주일학교 가서 애들의 구원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 해산에 맞먹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되십시오.
자, 아무튼 그렇게 되면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게 되고 공경을 하지 않게 되면 손해를 보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식이 가장 불행한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IV. 네 부모를 용서하라
A.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자, 그러면 이제 명료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우리가 모두 행복하고 창조의 질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해야 하는데 이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앙케이트에서 조사를 했는데 10대, 20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72%가 아버지가 밉다 그랬답니다. 72%인가 78%가 아버지가 밉다 그랬답니다. 그리고 절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다시 태어나면 우리 엄마, 아빠 밑에서 안 태어나고 싶다고 그랬답니다. 이 얘기는 뭘 보여 주냐 하면 사랑은커녕 이미 부모와의 관계가 깨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이 “나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나는 우리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며 다시 태어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는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배나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고, 불효한 것에 대해서 핑계 댈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이 부모를 공경하기 매우 어려운 마음의 장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부모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선결과제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부모를 용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기억이 오래 남지 않는데 부모로부터 자식이 받은 상처는 평생을 갑니다. 그게 내리사랑입니다. 어린 시절 무관심과 사랑 없는 방치, 그리고 폭력과 폭언, 비인격적인 대우, 그릇된 모본과 모순된 부모의 생활이나 행동들, 이런 것들은 물리적으로 치고받아서 생긴 상처보다 훨씬 오래 가는 것이고, 이것은 물질적인 보상이나 이런 것들로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어떻게 부모를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으로 공경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이고, 못하는 것은 솔직히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부모를 충심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공경은 사랑에서 나오고 그리고 사랑이 없는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용서는 바로 이 끊어진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고, 이 용서하는 것은 오직 그 사람 안에 주어진 사랑의 힘만이 이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타자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영혼의 힘과 경향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올바로 맺어지면 좋은 사람이고, 나쁜 중독이나 게임이나 도박 같은 것으로 이어지게 되면 이게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사랑은 끊임없는 이끌림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B. 네 부모를 용서하라
두 사람이 관계가 문제가 생겼을 때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그 사람과 관계를 계속할 욕망의 크기가 더 큰 사람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 너 같은 거 없어도 좋아” 이러는 사람들은 한 마디 말실수로도 절연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 가끔 그런 사람 있지 않습니까? “나 한번 안본다면 안 봐” 뭐 이렇게 자기 우월하게 얘기하는 사람 있잖아요. 이게 자기의 정신적인 힘인 것처럼 정말 유치하고 그것은 추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얼마나 짐승 같은 인간인가를 대놓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좋으면 꼬리치고, 싫으면 물고하는 것이 개나 하는 거지 인간이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게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의 관계에 있을 때에 끊임없이 용서하고 끊임없이 이해하는 그 사랑의 정신의 크기가 훨씬 큰 것이고 그 사람에 의해서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랑이 끊어졌을 때 그 사랑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용서입니다. 성경에는 비상하리만치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 특별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훌륭한 집안, 좋은 가정교육, 그 다음에 호화로운 집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경험한 용서의 깊이가 사랑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십자가를 아주 중요한 종교적인 심벌로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 하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평화로운 관계의 길을 충분히 유일하게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머릿속으로는 저 사람하고 일해서는 안 되고 더 사랑해야 되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그럴 힘이 없을 때에는 결국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에게 남을 사랑하게 하는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한 다음에 인간이 처하게 된 가장 커다란 어려움을 결국은 사랑 없음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법이고 불의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법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이 은혜가 바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말하면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정말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최고의 마크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사랑은 모든 spirituality, 기독교적 영성의 최고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온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랑 같이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유학 보낸다고 공부를 잘 시킨다고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방에서 사업을 하시고 가끔 서울에 올라오십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게 “시험지 가져 오너라” 그러면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시험을 보면 하나씩, 하나씩 집게에다가 꽂아가지고 벽에 걸어놨다가 가지런하게 갖다 드리면 넘기면서 “이거는 왜 이렇게 못했니? 점수를 더 잘 받아야 되겠다.” 그게 다였습니다. 그렇게 한번 헤어진 아버지는 두 달이나 6개월 후에나 다시 잠깐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룻밤 주무시고는 다시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무릎을 꿇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앉아본 적이 없고 항상 아버지와 대면했을 때에는 무슨 핑계를 대고 여기에서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을까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았었고, 그래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아버지가 보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만나면 나쁘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보고 싶은 적은 없었습니다. 21살에 회심했지만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도 아버지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6살 되는 해에 2월에 어느 날 동네 근처에 있는 예배당에서 마룻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제 마음을 깊이 어루만지셨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러면서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네 아버지를 용서하거라. 네가 나를 몰랐더라면 너는 네 아버지보다 더 나쁜 아버지가 되었을 거다”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버지가 나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성격이 정말 유별나고 신경질적이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폭력을 휘두르고 이러시는 분은 아닌데 한마디로 자기감정에 충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을 쓸데는 막 별로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혜택을 주고, 그런가 하면 정말 도와줘야 될 사람들에게는 아무 감동도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가족들 중에 아무도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떠오르는 게 아버지의 불쌍한 영혼, 그 긴 세월동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그러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그 아픔이 나에게 전해왔고, 그러면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엄청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렇다고 자신 할 수 없는데 적어도 내 양심을 향해서는 그 후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미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잘못해준 기억은 그래도 안 사라지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다 아문 상처처럼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게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치료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얘기해서 좀 안됐지만 우리 아버지 그렇게 쉽게 사랑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유별나도 너무 유별난 분입니다. 65세가 넘으면 그 당시에 노인 아닙니까? 그러면 조용히 앉아서 그저 경로당이나 왔다 갔다 하시고 그러잖아요. 어느 날 빈 노트 조그만 거 하나를 들고 와서는 나보고 글씨를 쓰라는 것입니다. “뭘 써드릴까요?” 그러니까 “한자로 모든 사람이 알아보게 똑똑하게 내가 부르는 것을 써라” 그러시는 것입니다. “예. 뭐예요?” “비행장. 기차역. 정류장. 식당. 시장. 경찰서. 대사관. 한국. 약국” 이런 단어를 쭉 쓰라는 것입니다. “이게 뭐예요? 받아쓰기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냥 쓰기만 해라.” 그리고 그 수첩을 가지고 이 분이 외국이라고는 한발자국도 안 나간 이 분이 이것을 들고 전 세계 무역 항로를 개척하신 것입니다. 영어도 한 마디도 못하는 분이 이것을 들고 제일 처음은 중국 그 다음에는 대만, 나중은 South Africa까지 가셔서 보따리장수를 하셨습니다. 뭐, 활발하게 움직이셨습니다. 청춘처럼. 결론은 몇 년 뒤에 1억을 까먹으셨습니다. 그리고 “얘야. 이것을 어떻게 하냐?” 옛날 같았으면 여기에서 치밀어 올랐을 텐데 목사가 1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형제들이 모아서 아버지 집을 사드리기로 한 그 돈을 다 정리해서 그래서 갚아드렸습니다. 그런데 웃으며 갚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사고치는 아버지가 너무 귀여워. 귀여워도 너무 귀여워.
이 분이 나중에 예수님을 잘 믿고 돌아가셨지만 하여튼 이 분은 예수 믿은 다음에도 조상님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9대조 할아버지 산소가 무너졌는데 일수 돈을 내서 그것을 고치고 매일 일수를 찍으시는 분입니다. 그런 아버지 여러분 쉽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은 명절에 만났는데 “큰애야” “예” 그러니까 “너 좀 신경 좀 써다오.” “뭘요?” “우리 8대조인지 몇 대조인지 할아버지 묘가 또 무너지는데 그걸 아무래도 우리가 고쳐야 될 거 같다.” 갑자기 여기에서 불뚝하고 올라오는 거예요. 아니 8대조 할아버지면 그 자손이 수천 명인데 그걸 왜 내가 고쳐야 되는 거야. 그 할아버지 내가 얼굴이나 봤어? 지옥의 아랫목에 누워있을 그 할아버지 산소를 왜 내가 고쳐줘야 하는 건가? 그 돈 가지고 차라리 노숙자들이나 동네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주는 게 그게 성경적이지. 그래도 인제 그러면 안 되잖아요. “아버지 그거 꼭 하셔야 되겠어요?” 그러니까 “야, 그 할아버지 산소. 그 자손들이 있는데도 아무도 안 와본다. 내가 못 봤으면 모르는데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 그 피 받아서 태어났는데 내가 안 고치면 누가 고치겠냐?” 이 황당한 사명감. 그래서 “그러세요. 아버지. 그게 그렇게 좋으세요?” 그러니까 “아 그럼 나 그것만 하면 진짜 잠이 잘 오겠다.” “그럼 하세요.” 그랬더니 옆에 있는 우리 친척분이 보시더니 하도 기가 막히니까 “여보게. 어떻게 아버지가 그런데 돈을 쓰겠다는데 자네는 자네도 목사여서 부자는 아닐 텐데 어떻게 그런데 돈을 드리나?” 150만원인가 200만 원쯤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몇 분이서 이렇게 한데요. “아니 부모를 공경하면 뭐 여행도 보내고 오락도 시켜주는데 나는 이게 다 헛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헛일에 돈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우리 아버지가 그거를 하는 동안에 행복하대니까 그러니까 나는 오락비처럼 드리는 것입니다.” 참 정말로 가까이 사랑하기에는 너무 황당한 당신이었습니다.
70세 거의 다 되가실 때에 암이 발견되셨습니다. 아버지가 상이 용사입니다. 중공군을 그래도 북괴군하고 중공군하고 포로를 세 명이나 잡은 훈장을 받은 용사입니다. 그러니까 병원은 항상 보훈 병원에서 무료였습니다. 이 분도 또 얼마나 오지랖이 넓은지 동네 사람들 어디가 아프냐고 그러면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서 나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다고 그러면 당신이 가서 나 머리 아프고 배 아프다고 해서 약 타다가 동네 사람들 가져다주고 그러셨습니다. 어쨌든 암이랍니다. 다행히 5cm도 채 안되었는데 발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가 막히게 도려내고 항암치료도 안 받고 완치가 되셨는데 그래서 그 병원이 여기에서 차타고 거리는 굉장히 멉니다. 36km 정도 되는데 거의 매일 그 병원을 문병을 다녔습니다. 그 날도 교회 일을 하고 오후에 이제 부지런히 차를 타고 갔는데 어머님하고 다투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세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정말 못 살겠다. 저렇게 더러워서 며칠 동안 침대에 드러누워 있어서 머리가 저렇게 떡이 됐는데 좀 감으라고 했는데 싫다고 신경질을 낸다.”고 그래서 “아버지 제가 머리를 감겨드릴까요?” “그래라. 그래라”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내려와서 이제 밀고 가서 그리고 이제 목에다가 수건을 감겨드리고 그리고 샴푸로 머리를 감겨드렸습니다. 그런데 확 복받치면서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 당당하던 어깨는 홀쭉해지셨고, 머리는 거의 많이 빠지셨고,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머리를 감으면 허연 살갗이 이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부모 자식 간인데 그게 내 인생의 아버지 머리를 감겨드린 첫 번째이고 아버지가 내 머리 감겨준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정성껏 감겨드렸습니다. 세수까지 다 씻겨드리고 마지막에 손까지 씻겨드렸습니다. 그리고 깨끗이 머리를 말려서 빗질까지 해드렸더니 “야 네가 머리를 감겨주니까 정말 좋구나. 정말 시원하다.” 그러셨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천국에 계시겠지만 한 일주일만 휴가를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내가 뭐든지 해드릴 텐데.
부모를 깊이 용서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아마 여러분의 부모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됐을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여러분이 부모를 공경하는 참된 인간의 본을 자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여러분의 불행이 아이에게 대물림 되지 않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종 눈물을 흘리며 우리 부모님과 화해하지 못해서 너무 괴롭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그래도 화해할 부모가 있잖아요. 그런 화해하면 함께 누리고 사랑하며 살아갈 엄마 아빠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얼마나 커다란 가능성이고 행복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아버님을 여의고, 또 아버님보다 내가 더 사랑했던 할머니를 여의면서 하나 깨달은 아주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부모님이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아직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잘못된 관계면 화해할 여지가 있고, 그리고 사랑하지 못했으면 다시 사랑할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랑하며 살아도 너무 짧은 시간들입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부모님을 찾아가셔서 그리고 말없이 부모님을 사랑해 드리십시오. 나는 가능하면 부모님과 신체적으로 접촉을 많이 하도록 그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이렇게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낄 적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게 부모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안 되는 또 중요한 이유 하나가 있는데 부모에게 자꾸 기대를 거는 게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이렇게 한번만 마음을 열고 용서해 주거나 효도를 하면 엄마가 확 바뀔 거다, 아빠가 확 바뀔 거다, 그거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분들은 그것을 효도 받았다고 생각도 안하고요. 자기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내가 하도 그게 한이 되니까 우리 집사람이 물어봤답니다. 시아버지한테 “아버님. 왜 아버님은 애비를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여태까지 한 번도 안 안아주셨어요?”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이 너무 간단합니다. “그땐 다 그랬다” 그러니까 아무 가책이나 의식,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걸 보면서 자꾸 실망하고 주저앉으면 관계 회복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계속 사셔도 하나님 사랑 때문에 내가 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고, 우리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 때 그때 최고의 혜택을 보는 사람은 엄마, 아빠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왜? 내 영혼이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내 마음의 순수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게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자원이 끊어진 것이 바로 멸망이고 이런 자원이 다시 주어지도록 회복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와서 이것이 떨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새롭게 깨달음을 얻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매일매일 잘못한 건 우리 아버지인데 내가 용서를 빌고, 내가 은혜를 구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의 십자가지는 생활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겉으로는 죽는 것 같지만 이렇게 우리들이 죽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그 죽음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다시 살고 또 다시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아니 돌아가지 않아도 치매라도 걸려서 여러분 알아보지 못하고 혹은 병에 누워서 식물인간 상태로라도 들어가시게 되면 이제 화해의 길도 없습니다. 항상 그 일이 어렵다고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과 화목하시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모두 쏟으며 죽으신 복음적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이나 희생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아버님이 참 그리웠습니다. 평소 같으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즐겁게 식사하시고, 그리고 용돈도 받아 가시고 그럴 텐데. 명절이 다가오면 너무 허전합니다. 제가 제일 윗자리에 앉아서 세배를 받는 것도 싫습니다. 살아계실 때에는 매년 세뱃돈을 최고액으로 갱신했습니다. 드릴 때마다 지상 최대의 세뱃돈입니다 그리고 드렸습니다. 그래서 올라간 기록이 150만원까지 드려봤습니다. 그러면 항상 “너도 돈이 없는데 이런 거 왜 주냐” 그러시면서 얼른 호주머니에 집어넣으십니다. 그런 모든 기억들이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고 그러면서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웃으면서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다는 것, 만약에 내가 그때 아버지를 깊이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내 마음속에 내가 복음적인 사실에 눈을 뜨면 뜰수록 얼마나 씻을 수 없는 깊은 고통으로 남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하고 아버님 먼저 가셨지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일을 생각하면 그 분이 내게 준 상처도 사실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로 해석을 하면 그것도 내 마음속에는 감격이 됩니다. 여러분도 부모와 맺힌 것을 풀고 부모님을 충심으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그래서 이 땅에서 생명이 길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4.복종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에베소서 5:24-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는 4장까지 유장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5장서부터는 그러한 기독교의 영광스러운 교리를 실제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며 살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5장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제일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은 사람들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 가운데서 모든 것을 행하여야 할 것이며 이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신 그런 사랑으로 우리들이 구속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출발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이 영원히 영벌에 처하여질 수밖에 없는 비천한 우리 인간들을 위해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는 것, 그 안에서 무한한 그리스도의 희생과 비천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은혜와 감격이 모든 거룩한 삶의 동기가 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후에 나오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이 세상 직장에서의 모든 삶을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은혜에 잠기는 것,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의 전 방면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은혜의 충만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II.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A. 영적인 연합의 신비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하기 전 먼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세우신 기관은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가정과 그리고 교회입니다. 알다시피 교회는 타락 후에 가정이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가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사후적 기관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한 가정으로 삼으셨을 때에 그것은 모든 인류가 번성하면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되는 사회를 꿈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이러자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도저히 제 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는 갈등과 미움의 공동체가 되었고, 하나님이 세우시려고 했던 아름다운 인류 공동체의 이상은 실현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망가진 것은 제도가 아니라 제도를 이룩하고 있는 인간이 망가졌기 때문에 이들을 고쳐내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 원래 가정의 모습을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고유하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생겨났지만 넓은 의미로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교회가 이루어졌고, 더 넓은 의미로는 이미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실 때부터 이미 교회는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여기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의 가장 커다란 관계의 중심은 영적인 연합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함으로 구속하실 때 그 사람은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져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동시에 하나님 없이 망가졌던 그 영혼은 고쳐지고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과 사랑을 힘입음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예전에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없었던 자원을 공급받게 됩니다. 이런 자원을 공급해 주는 통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이 연합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생명적인 연합이고 이 연합은 사랑의 연합입니다.
B. 영적인 연합의 결과
이렇게 교회와 그리스도가 접붙여져 모든 교인들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일부가 되는 영적인 연합의 결과가 두 가지가 있다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첫째는 교회의 복종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교회의 몸을 구성하고 그 교회의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이 복종은 영적인 연합의 외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종은 사랑 없고 생명 없이 차가운 권위와 보복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무력에 의하여 강제되는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예수의 머리에 딸린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어지는 충만한 진리와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얼마나 존귀한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을 사랑함으로써 즐겁게 기꺼이 복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복종입니다. 당연히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외적인 복종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내적인 사랑의 충만함에 달려있고,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지성적으로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아름다운 교회의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인 연합의 결과로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희미하면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진리에 대한 가르침과 설교, 모든 교육은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데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고, 이 훌륭한 가르침이 바로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은혜를 부어주셔서 더러운 자기 사랑을 부인하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교회가 하나 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빛이 충만하고 은혜가 교회에 가득하여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체적으로 예수께 즐겁게 복종하는 순종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꿈꾸시는 바입니다. 우리가 왜 은혜를 받아야 합니까? 왜 우리가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생으로 살아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고, 예수를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이루신 이 한 몸된 연합의 결과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처럼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행하셨을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영적인 연합의 결과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획득한 전리품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드러낸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여 그 분과 연합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삼위일체의 하나님 안에 있던 사랑이 아버지를 통하여 아들에게 부어졌고, 아들에게 주신 사랑이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졌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그 큰 사랑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사랑으로 시작해서 다시 그 사랑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으로, 또 우리에게서 교회로, 교회를 통하여 이 모든 불신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까지 전파되는 것이 이게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산에 물이 끊임없이 흐를 때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열매 맺는 과목들과 값진 약초들이 번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런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될 때에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설립해 놓으신 그 본래의 의도대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교회가 입고 이 사랑 때문에 선과 진리, 사랑이 온전히 일치되어서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연합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것입니다. 결코 교회는 감히 그리스도께 당신이 우리를 조금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항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너희가 나를 조금 복종하기 때문에 나도 너희를 조금밖에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의 영적인 신비를 사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유비, 가장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가까운 최고의 유비로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장사꾼이나 혹은 무역하는 사람들의 매매하는 사람들의 흥정하는 상업적인 관계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남편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이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내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읽겠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III. 남편과 아내의 관계
A. 평화를 가져오는 기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조차도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교회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적인 연합을 구현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기보다는 싸움질이나 안하고 평화롭게만 살아도 좋겠다 라고 기준을 낮추어 잡습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남편이나 아내 누구도 기준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완력도 있고, 성적인 능력도 있고,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인 능력도 있고 그렇다면 남편은 자신이 아내보다는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자기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남편이 무능하고 오히려 여성이 경제력을 좌우하고 실제로 집안의 재산을 아내가 불려왔고 또 아내가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에 있거나 끊임없이 남편이 아내의 신세를 져야 하는 입장에 있다면 아내들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이 건강이 심히 약하거나 아내가 매우 연약할 때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자신이 남편이나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배우자는 자기를 기준점으로 움직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고 그저 자존심을 꺾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죽어버리면 그러면 다툼은 일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가정의 평화는 싸우지 않는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가 다투고 싸우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워낙 신앙에 관심이 없고 교회에 무관심하면 다툴 일도 없습니다. 그것도 싸우는 것도 무언가 기대가 있고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런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들이 이것을 방해할까 라고 생각하고 관심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이 싸움이 되는 거지 이미 아무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는 싸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가정의 평화를 이룬 성공 사례를 남편이 죽어지냈더니 아내의 마음대로 해서 가정이 행복했대 더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아내들은 감동을 받고 그 책을 사서 남편에게 열심히 읽으라고 권합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예로부터 조상들이 마누라와 북어는 패야지 된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다수가 있기 때문에 가정에서 폭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내를 꼼짝 못하게 눌러서 가정의 평화를 이룬 사람들은 또 그런 질서를 유교의 이름을 빌어 강요를 하고 그것이 성공 사례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아내가 남편에게 죽어지냄으로 가정의 평화를 이룬 상태를 서로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부러워해야 할 것은 그런 종류의 평화가 아닙니다. 진리를 기준 삼는 신앙이 없는 평화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평화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부부가 모두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다운 인간이 누구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아내, 주님이 바라시는 진정한 남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예수님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기 위하여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B. 남편에게 복종함
제일 먼저 성경은 아내에게 말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성경은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종교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남편은 말합니다. “그것 봐라. 성경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지 않느냐?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남편이 가정의 머리라고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렇게 남편이 아내를 짓밟는데 이용하라고 주신 교훈이 아닙니다. 남편은 22절과 23절을 읽으며 마치 자신에게 아내를 복종시킬 위대하고 폭력적인 권력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구절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남편들은 26절을 읽으면서 매일 가슴을 찢으며 아내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지 못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남편에게 주신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화되어 가야 할 한 하나님의 자녀인 아내에게 주시는 종교적인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평생 아내라고 하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자기를 돌아보며 내가 이렇게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고 남편을 가볍게 여기고 사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그리스도 예수께 온전히 귀이한 사람이 아니구나. 나의 이 부족한 것,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신자가 되기에는 아직도 먼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내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고 내 맘대로 남편을 주관하려고 하는 이 교만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하고 아내가 홀로 조용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며 온전히 남편에게 복종해 나아가는 모든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 되도록 하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그것 봐라. 네가 그러고도 아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렇게 남편에게 아내를 윽박지르라고 주신 권리를 부여하는 계명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그리고 있는 남편과 아내는 완전한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완전한 존재라면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온전하라고 사도가 명령했겠습니까? 이미 온전한 사람이면 그런 명령을 받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상정하는 남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그 복음 진리에 합당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거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 때문에 남편다운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사 구속하신 예수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남편다운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다운 아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2절과 23절을 읽으면서 교만해진 남편들은 회개하고 차라리 22절과 23절, 24절은 건너뛰고 25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의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하거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에 동의하는 아내는 별로 없습니다. 통계를 내보니까 남편 중에는 다시 태어나도 이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이 꽤 있는데 아내 중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몇 해 전 가정의 달 시리즈를 하면서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설교를 한 날이었습니다. 30대 젊은 부부가 집에 가면서 남편이 계속 투덜거렸습니다. 은혜를 못 받은 것입니다. “아 정말 여보 오늘은 예배 시간에 힘들어서 죽을 뻔 했어” 아내가 묻습니다. “왜?” “아니 교인 중에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온 교인이 이혼을 생각하는 것처럼 목사님은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를 설교하셨잖아. 그것도 이혼하지 말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말이야. 그런 사람은 아주 일부인데 왜 우리가 그런 설교를 그 장시간 동안 들어야 되냐구?” 그랬더니 옆에 있는 아내의 발언이 충격이었습니다. “여보 나 여러 번 생각했거든.” 남자는 이렇게 모릅니다. 바보입니다.
C. 아내를 사랑함
여기서 아내를 사랑하라고 할 때에 그 사랑이 배고프다고 할 때에 밥을 주고 목걸이 필요하다고 할 때 금목걸이 사주고 어디 여행가고 싶다고 할 때 데려가는 그것이 전부인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교만해질 남편이 더러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완견적인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저 물질로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는 외면적인 표시입니다. 시끄러운 게 싫으니까 어쨌든 마누라 해달라는 대로 해줘야지 하는 그것은 인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고. 이번 결혼기념일 또 잊어버렸다가는 이제 바가지로 욕먹지.” 그래서 남편들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인터넷에 들어가서 ‘아내 생일 1월 28일 음력’ 탁 쳐 놓고 클릭하면 매년 1월 28일 날 자동으로 카드가 날아갑니다. 메일로. 놀라지도 않네요. 자동으로. 자기는 보내고도 그 날이 그날인지도 모릅니다. “여보 고마워.” “뭐가?” 3년 전에 그렇게 해 놓았습니다. “뭐가?” “어, 결혼기념일 예쁜 카드 보내줘서 고마워.” 그제야 생각이 날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고 시집 장가가는 일은 성경에서 가장 거룩한 일로도 묘사가 되고 가장 세속적인 일로도 묘사가 됩니다. 극단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노아의 홍수가 날 때에도 인간들은 시집가고 장가갔느니라. 그 얘기는 어떤 예입니까? 심판이 다가와도 인간들은 제멋대로 욕망을 따라서 살기를 멈추지 않았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쪽에서는 이 남녀의 사랑과 결혼을 한없이 성스럽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둘 사이에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이라면 그것은 자기만족적인 행복을 추구한 가장 세속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사랑을 배우기도 하였지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이 사랑을 그 영혼 속에 넣어주셔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셨을 때에 아담이 언제 여성을 보고 사랑을 학습을 했겠습니까? 최초의 여자인데. 그런데 잠에서 깨어나 그 여자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사랑이 이미 역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으로 하나님이 묶으셨을 때에 그 사랑은 두 사람만을 묶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사랑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이 자식에게, 인류에게 계속 확장되어 나가게 하시기 위한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선을 구하는 교통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할 때에 그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자기에게 복종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말합니다. “도대체 나에게 복종을 좀 해봐. 그러면 사랑해 주지 않을 남편이 어디에 있겠어?” 아내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을 해봐. 복종하지 않을 아내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 그러면 남편은 말합니다. “일단 복종을 하면 사랑한다니까” 아내는 “먼저 사랑을 해봐. 복종이 나온다니까” 그리고 두 마리의 개가 꼬리를 물고 싸우듯이 뱅글거리고 돕니다. 이게 언제 해결이 되겠습니까? 이 모두 자기의 이익을 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꼬리를 무는 다툼입니다. 참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참 사랑은 자신에게 있는 사랑 때문에 상대방이 그것을 알던 모르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쏟아 붓는 관계의 충실함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IV. 적용과 결론
진정한 사랑은 둘 사이에 자기만족적인 이기심으로 머무르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펼쳐져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실 때도, 교회를 세우실 때에도 바로 당신이 부어주신 그 사랑이 그 가정을 통하여 끝없이 펼쳐져 나아가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할 때에 이것은 자기에게 복종한 만큼의 거래로서 이루어지는 애완견적인 사랑이나 상업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둘 사이의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구하는 교통적인 사랑이어야 하고 부족한 아내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읽으며 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엄성에 대한 경외심이 사랑의 발로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부족을 발견하거나 아내의 단점을 발견할 때마다 두 부부에게 사랑이 있다면 더욱 소명을 느낄 것입니다. 저런 결점이 있어서 보완하라고 이 부족한 여자의 남편으로 나를 삼았고, 이 부분에서는 내가 넉넉하고 아내가 부족하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내가 부족하고 아내가 넉넉하기 때문에 아내의 섬김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오히려 소명을 느낄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없는 그 무엇으로 보충해 주어서 남편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울 때에 사랑한다면 오히려 거기서 아내는 커다란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고 남편도 아내를 향하여 그러할 것입니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언쟁하는 부부들, 각자 감추어 두었으면 좋을 결점을 이웃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을 때에 사실은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내를 그 남편의 짝으로 지어주신 것이고 그렇게 아내의 단점이 많기 때문에 그 남편 아니면 그 단점을 보완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를 각각 그렇게 배필로 삼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의 부족입니다. 서로를 오래참고 긍휼히 여기며 인내로서 서로를 기다려 주는 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은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이고 그 관계를 온전히 발전시키고자 하는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이것이 적은 사람들은 잘 포기하고 이것이 강한 사람일수록 포기하지 않고 최악의 관계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이 가족과 부부의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모든 사랑의 원인이 남편과 아내의 아름다움과 예쁨에 있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다할 것이고, 언젠가는 그것에 싫증이 나게 될 것이고 이때에 우리 사랑도 함께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족을 하나님께 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은 아내에게는 만족하지 않지만 아내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아름다움이 끝이 없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 완전하신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내 아내를, 그 완전하신 하나님도 버리지 않고 여전히 붙들고 계시는 우리 남편을 내가 포기하고 버리는 교만의 죄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힘으로 서로를 보완하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편과 아내의 부르심을 주신 이유입니다. 아내를 이용하는 남편, 남편을 이용하는 아내는 모두 이 은혜의 힘을 공급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만족을 하나님께 두고 매순간 주님이 주신 하늘의 은혜로 남편과 아내의 부족을 용납하고 일생동안 서로를 사랑해 줌으로써 자신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었을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고 복종하며 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가정을 주신 대의인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이 십자가가 결코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아내, 온전한 남편이 되어가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녀들이 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5.남자와 여자를 지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2-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은 두 개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시며 당신이 직접 통치하셨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세계는 당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의 대리자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사람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사명이 막중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매우 특별하게 창조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동물들과는 구별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에게 영혼을 주셨고, 그래서 그는 지성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또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어떠한지를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지성뿐 아니라 하나님은 의지를 주셔서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명령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 선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인간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너그럽게 대하게끔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II. 사람을 지으심
A. 남자를 지으심
하나님이 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남김없이 모두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계는 인간의 노동과 헌신을 보탬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원래의 목적을 따라 더 아름답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계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을 대신해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고, 사람들끼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남자를 지으셨습니다. 그의 육체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사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땅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하나님이 땅을 명령하여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직접 빚으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어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 흙이라는 단어가 ‘아파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티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티끌들로 하나님이 육체를 창조하셨고, 그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영혼을 직접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고, 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B. 여자를 지으심
오늘 성경을 보면 제일 먼저 하나님이 남자인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여자를 창조하신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얼핏 보면 원래 하나님이 남자만 창조하셨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남자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보여서 여자가 필요하여 창조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기 전부터 여자인 하와를 함께 창조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꺼번에 두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창조하셔서 혼자 살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을 그도 느끼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는 이후에 창조될 하와를 진심으로 필요한 존재요, 사랑해야 할 존재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담처럼 흙으로 짓지를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남자의 몸의 일부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가지고 논쟁합니다. “바라 너희 여자들은 남자의 몸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되어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남자는 기껏해야 티끌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원재료가 남자의 몸의 일부입니다. 원재료를 보더라도 사람의 갈비뼈가 우월하지 티끌이 혹은 흙이 우월하겠습니까?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신제품이니 훨씬 품질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나님은 남자의 몸의 일부를 가지고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남자와 여자가 누가 우월한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둘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위해서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가 아니라, 남자에게 짓밟히도록 다리의 뼈가 아니라,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남자의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여성도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 창조되었고, 이렇게 해서 남자와 여자는 함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남자와 여자는 둘이 한 몸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자신들이 행복해지는 삶 사이에 어떠한 갈등이나 모순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III. 가정을 이루게 하심
A. 남자와 여자의 질서
이렇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변적이기는 하지만 만약에 타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아마 죄 없는 상태에서 수많은 인류들이 번성해 갔을 것이고 그래도 결혼제도는 존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 가지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류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긍휼히 여기며 한 가족처럼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부관계는 존재했을 것이고, 그 관계는 매우 특별한 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담이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이 고백은 넓게 보면 온 인류가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사랑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동시에 또한 부부로서 매우 특별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이 가정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질서로서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각각 서로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에게는 개척 정신과 모험, 그리고 육체적인 힘과 용기를 주셔서 정복과 개척하는 일에 적합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성은 하나님이 이미 정복하고 개척한 땅들을 잘 가꾸고 보존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적합한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에게 주신 명령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종교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그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명령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창조 명령이라고도 말하고 혹은 노동 명령, 혹은 문화 명령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에 나오는 단어, “다스리라”는 명령을 살펴봅시다. 히브리말로 “라다”라고 하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라다”는 바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임금이 선한 임금이라면 창칼로 무력을 사용해서 백성들을 다스리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이 나라를 올바른 법으로 질서를 세우고, 서로 행복해지고 존중하여 모두가 기쁘게 살아가는 나라가 되는 것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스리라는 명령이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복하라는 남성에게 적합한 명령이었지만 다스리라는 여성의 도움이 필요한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이렇게 다르게 창조하셨고, 서로 다름으로 결혼은 보완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의 질서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즉,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립되어야 할 질서는 사랑의 질서인데 그 질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있는 질서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마 역사상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 신학자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제일 먼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고, 아들에게 부어진 그 사랑은 그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졌고, 교회에 부어진 그 사랑은 바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들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교회의 한 지체로 이 충만한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의로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 있는 사랑을 당신의 아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어주셨는데 이 사랑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benevolence’, 당신 자신 안에 있는 박애로 말미암는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이렇게 사랑한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가정에 주신 사랑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듯이 그렇게 남편에게 아내가 사랑과 순종으로 질서를 이루는 것이 가정의 대의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가정의 기본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가 사랑 속에서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의 육욕에서 비롯되는 일시적인 충동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 존중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B. ‘돕는 배필’로 지으심
하나님은 이처럼 남자와 여자가 한 가정의 질서를 이룰 때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본받아 사랑과 복종의 질서를 이루어 가도록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홀로 있는 이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토대로 남성이 여성에 비하여 우월하다는 성경의 근거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위하여’라고 하는 전치사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 보면 분명히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위하여’라고 하는 전치사가 ‘케네게도(kennegedo)’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전치사는 복종을 의미하는 그런 종류의 이익을 염두에 둔 ‘for’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에게 맞먹는, 그와 상응하는, 영어로 말하자면 ‘corresponding to’ 그와 상응하는, 그에게 맞먹는, 그와 대응하는, 그와 짝을 이루는 이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대등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결국 여기에서 ‘위하여’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를 위하여가 아니라 내가 그에게 상응하는 혹은 그와 짝을 이루는 돕는 배필을 만들리라 라고 번역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 우리말 성경에 배필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에제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가장 풍부하게 쓰인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시편에서 이런 구절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며,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며,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돕는 자시여 라고 하는 이러한 표현 말입니다. 그때 그 도움 혹은 돕는 자가 바로 ‘에제르’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전쟁의 맥락에서 사용되면 응원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전투하다가 이제 적에게 기세가 꺾입니다. 그래서 폐색이 짙어질 때 저 멀리서 지평선에서 뽀얀 먼지를 휘날리며 천둥소리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나고 수많은 군사들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군인이 바로 우리를 돕는 응원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때에 폐색이 짙은 군인들의 마음속에는 용기가 솟고 그 응원군의 도움으로 전쟁을 승리로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바로 ‘에제르’라는 히브리 단어에 담겨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배필이라고 하는 단어는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의 열등한 상태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도움이 없이는 남성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여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존재이고, 하나님 앞에 창조된 의도를 따라 살아가기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오늘날 현실은 어떻습니까? 실제로 의학자들의 보고가 있습니다. 아내 없이 혼자 사는 남자는 평균 5년 빨리 죽는답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아내 없이 싱글로 혼자 살면 잘 먹고 병원 다녀도 평균 5년 빨리 죽습니다. 그러니까 아내 없는 남자는 일찍 죽는데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중에는 죽고 싶은 남자가 많답니다. 이것은 돕는 배필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끝내면 이 설교자도 남성우위론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예화를 들겠습니다. 여성도 남편 없이 살면 일찍 죽는답니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사는 여자 중에는 암에 걸리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배필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이렇게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게 하셨는데 서로가 도움이 되고 응원군이 되기는커녕 인생을 힘들게 만들어 주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은 한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서로 남편과 아내로서 사랑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C. 서로 사랑하게 하심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셔서 아담에게 이끌어 오실 때에 아담은 고백하기를 갑자기 시인이 되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최고의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기의 갈비뼈를 하나님이 꺼내실 때에 거기 갈빗살도 붙어 있을 테니까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살이기도 하다라는 표현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문학의 맥락에서 보면 이 무엇 중의 무엇이라는 이 고백은 ‘The Best’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최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결혼에 있어서 대치할 수 없는 하나의 원리, 곧 사랑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하는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 사랑은 항상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종종 이 사랑은 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성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서구의 전통에서는 사랑을 상당히 감정 쪽에 두려고 하는 해석을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동양에서는 철저하게 이 사랑을 이성의 기능에다가 두기를 좋아했습니다. 여러분은 “인·의·예·지·신 희(喜)·노(怒)·애(哀)·락·애(愛)·오(惡)·욕(慾)”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사단 칠정론입니다. 앞의 “인의예지”는 이성의 기능이고 “희노애락애오욕” 즉 기쁘고 슬프고, 부끄럽고 등등의 이 감정은 그야말로 감성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그 이성의 기능 중 첫 번째 기능을 동양 철학에서는 ‘인’ 즉, 사랑이라고 자리매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일종의 충동적인 육욕의 감정 파도스(pathos)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헌신을 동반하고 결혼 생활 내내 유지되어야 할 헌신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IV. 타락과 가정의 회복
A. 인간의 타락과 가정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아’는 말했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 인류는 추상명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끝까지 그 사랑에 책임을 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면 그는 인간성이 완성된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가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하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게 되고 이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부를 짝 지어주신 모든 원리들이 현실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타락과 가정의 회복을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아름답게 가꾸고 돌보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고, 이로 말미암아 가정을 주신 목적도 깨져 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타락하였을 때 결국은 관계의 파괴로 나타났습니다. 제일 먼저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는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과 영혼의 생명과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받음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답게 고귀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끊어졌고 그래서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없이 소외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들과의 관계도 깨졌고 그리고 자연관의 관계도 깨뜨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이기심으로 갈등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첫 열매인 자녀들 속에 나타난 살인사건으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명령에 순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였지만 결국 이 자연은 반역을 일으키고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으로부터 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속에서 가정을 가정답게 만드는 그 참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정이 온전한 기능을 계속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B.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제도는 오직 두 가지입니다. 가정과 그리고 교회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타락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고 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부모를 있게 하시고, 그 부모를 통해서 참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자녀들에게 배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은 영혼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었고, 극도의 이기심에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이 가정들은 산산이 파괴되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이웃을 모르고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는 그러한 무질서한 인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와 도덕, 그리고 학문, 법률,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이런 파괴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결코 성공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가는 일 없이는 그 모든 일들이 저절로 결실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그 충만한 사랑과 은혜 없이는 이 모든 회복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가정의 질서와 사랑의 관계도 산산이 파괴되었고 오늘날 이 세계 도처에서 깨어진 가정은 바로 이러한 죄의 질병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역사에 구원과 회복으로 개입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을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과 피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자기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게 해 주셨고 죄로 말미암아 망가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충만한 사랑이 공급됨으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인간으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과 성화와 그리고 영화를 통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러한 구원사의 맥락 안에서 남편과 아내에게 각각 어떠한 남편, 어떠한 아내가 되어야 할지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를 주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여성들은 이 성경 구절을 보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봐라. 당신에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남자들도 할 말이 있습니다. 5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아내들아 그러므로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함과 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남자는 말합니다. “먼저 복종해봐. 그러면 내가 사랑해 줄 테니까” 여자는 말합니다. “사랑 먼저 해봐. 그러면 내가 복종할 터이니” 마치 두 마리의 개가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언쟁의 언쟁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사랑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남편에게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몸을 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지만 이것은 여자들 들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남자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아내의 권리로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남편의 의무로서 남편에게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편에게 하나님이 머라고 말씀하시는지 너무 많이 신경 쓰지 말고 자기들한테 하나님이 머라고 그러셨는지 신경 써야 합니다. 아내에게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함과 같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예수님께 복종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심판이 무서워서 복종합니까? 그 분의 칼이 무서워서 복종합니까? 예수께 복종하지 않으면 내 사업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복종합니까? 아닙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가난하고 병들고 높은 사회적인 지위 없어도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어떠한 불순종도 꿈꾼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종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는 복종이지 노예와 같은 복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남편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편의 사회적인 지위나 완력이나 혹은 가정의 평화 때문에 순종하는 여자는 가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순종하기를 예수님 사랑하는 교회가 죽도록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남편에게 복종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는 아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이상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 아닙니다. 그리로 향하여 가라는 이상입니다. 끊임없이 그 길을 가기를 힘쓰고 그렇게 되기를 애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정도까지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좌표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참다운 남편의 도리를 다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고, 여자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 결혼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렇게 일평생을 두고 운명처럼 사랑해야 될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남자가 한 사람의 여자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이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충동적인 사랑 하나에 의해서 지탱될 수 있는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의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의 사랑은 언제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항상 묵상이 필요합니다. 남편의 불완전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의 사랑이 남편의 아름다움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사랑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힘겨울 때마다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오래 참고 끝까지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이 남편과 아내의 표준에 온전히 부합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압니다. 특히 아직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이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빛과 사랑의 불입니다.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실한 신자가 되는 바로 거기에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내가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아내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될 때에 거기에서 자신은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면 그는 정말 좋은 아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남편이 짐승처럼 살아가다가 복음 진리의 빛을 발견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그 분 앞에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기를 결심합니다. 이렇게 경건한 삶을 살게 되면 그는 반드시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더 밝은 진리의 빛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없을 때에는 살 수 없었던 삶을 그 은혜 때문에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남편이 아무리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앞에서 나만큼 잘못되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셔서 한 번도 나를 구원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언제나 돌아가 주님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만약에 내 아내가 모자란다면 주님 앞에 내가 모자라는 것만큼 그만큼이나 모자라겠습니까? 그렇게 부족한데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탕자와 같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렇게 깨어진 가정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멸시와 천대와 가시관을 쓰신 주님의 고난은 바로 이렇게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 멀리 떠나 타락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건설하기를 원하셨고, 이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은 번영하는 교회와 그리고 온전한 가정 없이는 세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최종적으로 당신의 주권에 의하여 도입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다함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건강한 가정이 되어서 이 세상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러한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들이 자라나고 그 아이들이 우리의 대를 이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33년 동안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땀으로 헌신한 노동의 생애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눈물을 흘리신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 스스로 화목 제물이 되어 쏟으신 피의 생애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온전한 순종과 사랑으로 자신을 드림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의 남편, 한 사람의 아내인 것과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부지런히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그 분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리며 가정의 대의를, 부부의 대의를 성취해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이 십자가의 사랑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이 사랑을 가지고 모자라는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부족한 아내를 사랑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남편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며,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내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가치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손과 발에 못 박혀 십자가에서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눈물로 기도하셨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당하게 될 두려운 형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은 자신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나이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눈물로 빌었고 똑같은 기도를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이 죽으면서 이 기도를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감동을 받은 자는 이처럼 기꺼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고 그 사랑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남편을 그리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 때문에 서로의 결점에 눈이 먼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무 가치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여러분도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그렇게 희생하고 가정의 대의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사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사랑이 없다면 남편과 아내의 결점을 볼 때에 “저런 인간에게 내가 어떻게 복종할 수 있겠어. 저런 인간을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 속에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아내의 결점을 볼 때에 고백할 것입니다. “아, 내 아내가 저런 결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와주라고 하나님이 나를 저 여자의 남편을 삼으셨습니다.” 남편의 결점을 발견할 때 “하나님 우리 남편에게 저런 약점이 있는데 혼자두면 저 약점 때문에 고통을 당하실 것이니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아내로 부르셔서 저런 약점을 잘 보완해 주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아내로 부르셨군요.” 하고 오히려 남편과 아내의 결점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 아닙니까?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할 때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의 사랑이 강물처럼 흐를 때 여러분이 교회의 결점을 보면서 아 이까짓 교회, 더러운 교회, 다 썩은 인간들이 모인 교회 그렇게 욕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아픔이 나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찰 때마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결점들은 나의 결점인 것처럼 내가 회개했고 누군가가 잘못하여 실족했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치 내가 실족한 것처럼 아파하고 지체들의 불행과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이 새로운 해석을 준 것입니다. 아, 그러니 우리는 결국 우리의 사랑 없음을 얼마나 많이 애통해야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기독교의 영성의 최고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은사를 능가하는 것이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연적인 특성들의 우수함보다도 탁월하고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도 바로 이러한 사랑의 탁월성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순례자로서 일생을 사는 동안 부족한 남편을, 모자라는 아내를 깊이 사랑합시다. 예수께서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고 사랑하는 교회가 주님께 온전히 순종한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고 복종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이루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가정을 보고 정말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어 하는 그런 가정이 되도록 그렇게 헌신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6.브니엘에서 만나자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2:21-3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우리들이 너무 잘 익숙한 이야기,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 앞에 깊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는 상태에서 형제와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과의 화목한 관계, 특히 가족과의 화목한 관계를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지고 망가진 우리의 가족 관계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려고 애써야 하고 또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형제와 맺힌 것을 풂
A. 에서의 원한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은 이미 뱃속에 있을 때서부터 서로 다투었던 사이입니다. 형 에서가 먼저 나왔고, 야곱은 그것을 시기하여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붙여 주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깊은 상처와 그리고 마음에 맺힌 관계의 파괴는 결국 가정의 불행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결국 반드시 형제와 맺힌 것을 풀어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에서의 원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소외된 자식이었고, 그는 어머니와 동생이 속여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축복을 빼앗긴 피해자였습니다. 그는 외향적인 아들이었고, 그래서 어머니는 가정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야곱과 더욱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이것은 결국 편애를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이삭은 처음 난 자식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풍습을 따라서 자신의 재산과 모든 축복을 장자인 에서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고, 이것은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자신의 욕망의 소산이었습니다. 사냥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음식으로 아버지를 섬겼고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결국 어느 날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장자로서의 모든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원한에 사무친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렸으니 이는 에서가 자기의 마음에 맺힌 원한을 야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원한에 맺힌 에서의 상처는 20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이것은 실제로 야곱에게 있어서 커다란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B. 야곱의 헌신
야곱은 어찌하든지 형과 맺힌 것을 풀고 싶어 했고 이 일을 위해서 야곱은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형과의 화해를 간절히 바랬으니 이는 형제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임한 커다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를 칠까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가 형과 화해하고 싶었던 것은 사랑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형과 화해하지 않으면 자신이 형의 축복을 대신 빼앗은 것에 대해서 반드시 보복당할 것이라고 하는 끔찍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과의 화해를 간절히 바랬고, 그래서 형을 만나기 전 소, 양, 염소, 낙타를 비롯해서 540마리의 가축을 선물로 준비하여 형에게 바치고자 하였으니 이는 선물이라기보다는 뇌물의 준비였습니다. 형을 만난 후에는 7번이나 땅에 자신을 굽혀 절을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종이 상전 앞에 경배할 때에 엎드리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본 딴 것이고 그것을 능가하는 자기 비하의 경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이러한 도모, 두려움 때문에 형과 화해하고 뇌물을 주어서 형의 마음을 풀려고 하는 이런 방식을 가지고 화해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따라서 위기를 넘겨보려고 하는 그러한 시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서를 만나기 전 먼저 야곱의 마음을 깨뜨림으로 형을 진정으로 용납하고, 그리고 형에게 지은 죄를 진심으로 자복하며 형과 화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밧단 아람으로 도망을 갈 때만 해도 그는 신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기름을 붓고 벧엘이라 이름 하였지만 거기서 하나님께 올린 서원도 알고 보면 상업적인 계약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는커녕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칭하였습니다. 그는 이제껏 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자신의 꾀와 술수를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야곱은 자기가 이제껏 까지 해온 술수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여기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다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집약과 그리고 꾀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많은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어 한 떼는 먼저 보내고 두 번째 떼는 나중에 보내었습니다. 형이 만약에 한 떼를 치면 나머지 한 떼를 데리고 도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축보다 소중한 것은 가족입니다. 가족을 데리고 형을 만나러 갈 때에도 그는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제일 사랑하지 않고 별 볼일 없는 아내는 앞으로 보내고 그 자식들도 앞으로 보냈습니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사랑한 여자는 오직 라헬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 언니 레아는 외삼촌 라반의 잔꾀에 넘어가 사기도 싫은 사은품으로 딸려온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와 아이들은 두 번째 대열에 세우고 마지막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요셉은 제일 뒤에 남겨 두어 앞에 있는 사람들이 죽더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살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모두 개울을 건너보내고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보고를 따르면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형으로서 동생을 맞으러 온다면 어찌 무장한 남자들을 데리고 오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의 손의 손을 잡고 와서 동생을 맞이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이 사람들은 이제 에서의 명령만 떨어지면 야곱을 공격할 사람들이었습니다.
C. 화해의 은혜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던 야곱은 홀로 남았고, 그때에 천사로 해석되는 어떤 사람이 와서 야곱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천사는 가고자 했지만 야곱이 그 천사를 가지 못하도록 붙잡으니까 둘 사이에 씨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생을 노동으로 단련되어 온 야곱은 힘이 강하였고, 결국은 이 천사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알고 야곱의 허벅지 위에 있는 뼈를 쳤으니 여기가 바로 환도뼈라고 하는 곳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니까 힘줄이 있었는데 그 힘줄을 쳤다고 했으니까 힘줄이 끊어지면서 뼈가 튀어나와 다리를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당연히 그 씨름은 야곱의 패배로 끝날 참이었습니다. 그래도 놓아주지 않으니까 “당신이 내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네 이름이 무어냐?” “야곱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2장이 보도하고 있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12장 4절과 5절에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천사가 허벅지의 관절을 친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고, 이 징계를 받은 후 야곱은 눈물로 울며 하나님께 회개를 하였다고 했고, 회개를 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빠진 기록을 호세아서로 보충해서 재구성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씨름하려고 인간적인 잔꾀로 매달리는 야곱의 환도를 징계로 쳤고, 그러자 그는 힘을 잃어버리고 울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며 회개하게 되었고, 이렇게 회개하는 야곱의 진실한 자기 깨어짐과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 천사로 하여금 야곱의 요청을 따라 축복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새로 붙여진 이 이름은 힘이 세서 육신의 힘으로 천사를 이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자기가 징계를 받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통렬히 회개하는 그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를 천사로 하여금 축복하게 하셨다고 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이긴 것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울며 통회하는 것, 이것은 야곱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일생을 잔꾀와 모략으로 살아온 이 사람이 울며 회개한다는 것, 어울리기나 하는 모습입니까? 통렬하게 자기가 깨뜨려져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형에게 준 큰 상처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며 통곡하고 있는 이 그림이 야곱에게는 어울리는 그림이 아닙니다. 야곱은 생애 처음으로 제대로 하나님을 만났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제는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 자신의 하나님이 되는 위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뜨려져 그 주권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원한 맺힌 수십 년의 깨뜨려진 형제의 관계를 하나님이 푸시기전 먼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야곱을 이렇게 철저히 깨뜨려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III. 화해하게 하시는 은혜
A. 야곱을 겸비하게 하심
어쩌면 야곱은 한 번도 자신이 에서에게 대하여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형을 그렇게 속이고 20년 세월동안 사는 동안에 행복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촌의 집에 갔더니 가나안에서는 자기가 최고의 고수였기 때문에 형도 가지고 놀고 아버지도 데리고 놀았는데 거기 가니 강호에 더 놀라운 고수가 있어서 자기를 다 벗겨 먹었습니다. 그뿐 입니까? 한 사람 말고는 아무도 원한 아내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라헬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냥 개평 주듯이 여자들을 막 주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밤이면 서로 신랑을 차지하겠다고 쌈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무슨 그렇게 커다란 행복이 있었겠습니까? 그 끔찍한 고통의 세월이 있었고, 여자들은 물건으로 거래를 하며 “오늘밤은 네가 내 신랑을 가져라. 내일은 니 신랑이 내 신랑이다.” 그러고 마치 물건처럼 주고받으면서 “오늘은 거래가 끝났으니까 저 집에 가서 자고 오슈. 내일은 이 집에 가서 자고 오슈” 이러면서 산 세월이 뭐가 그렇게 행복했겠습니까? 결국은 형의 모든 시도를 무효로 돌리시고 하나님이 큰 은혜로 복을 주셔서 그렇게 창성한 부자가 되게 하셨으나 야곱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피눈물 나는 밧단 아람에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형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안에 무엇인가 깨어지고 부서져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두려움 속에 휩싸여 홀로 밤을 지새우는 얍복 강가에서 그는 깊이 깨어지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옳다는 사실 생각하며 하나님께 용서의 은혜를 빌었고 회개하는 글을 하나님은 용납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여기서 자기한테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아야 했던 에서의 아픔에 대해서 최초로 느끼며 통회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경험은 다른 사람의 아픔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모든 씨름이 끝난 후 그가 이제 강을 건너 형을 만나러 갈 때에 브니엘을 지나게 되었고, 거기에서 아침 해가 찬란히 돋았고 그리고 그는 다리를 절뚝이며 걷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을 철저히 깨뜨려 당신 앞에 세우신 후에 이제 상처 나고 깨어진 형제의 관계를 화해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일 먼저 야곱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셨습니다. 복을 많이 받았으나 형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고, 이 얍복 강가에서 자기가 깨뜨려지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 신앙의 신령한 세계를 맛보게 되었고 그래서 이 야곱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만 바라보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브라함의 마음을 녹이시던 하나님, 이삭의 마음을 녹여 온유하게 하시던 하나님의 그 은혜를 깨달으며 비로소 이제는 내 조상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 주권 신앙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만을 겸비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이미 사람들을 통해서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고, 얍복 강까지 나아가 가족들을 모두 건네어 주고 야곱이 눈을 들어 에서를 대면할 때에도 여전히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에서는 집에서 출발하여 야곱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복수하리라는 일념을 접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가족들을 헤치고 짐승의 떼를 지나 드디어 원한에 부르르 떨고 지내왔던 에서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긴 여행길이었으니 옷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지고 몰골은 남루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전날 밤 먹지도 목하고 자지도 못한 채 천사와 씨름을 했으니 종종 땅 바닥에게도 굴러 온 의복에는 흙이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밤을 새우고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가슴이 찢어지도록 기도했으니 육신의 기력은 쇠하였을 것이고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통째로 속여서 빼앗았으면 금마차를 타고 백마를 이끌고 와야지 저 몰골은 도대체 무엇인가? 더욱이 그 종이 다리를 질질 끌며 절뚝거리며 자기 앞에 나아온 후에는 석고대죄 하는 죄인처럼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종이 상전에게 표하는 예를 넘어서 전쟁에 패배한 적장이 임금에게 표하는 경배처럼 그렇게 비굴하게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보면서 에서의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야, 인생이 무상하구나.’ 그러고는 20년 세월동안 가슴에 쌓였던 응어리졌던 원한이 물처럼 녹아 내렸고 이제 자신 앞에 저렇게 다리를 질질 끌며 와서 비굴하게 엎드려 있는 이 인간은 원수가 아니라 너무 가엾은 한 핏줄 동생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 맞추어 서로 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달려오는 것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였고, 끌어안은 것도 야곱이 아니라 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입을 맞춘 것도 에서였고 그리고는 둘이서 바로 거기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눈물로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서로를 용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그 전날까지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마음속에 아침 해가 돋고 나면 저렇게 이렇게 형 에서와 화해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형제와 불화하고 반목하며 산다면 그것은 제일 먼저 부모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불효는, 부모를 괴롭힐 수 있는 최고의 불효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형제간에 다투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에게 최고의 고통과 상처인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사랑해야 할 육신의 형제들끼리 반목하고 미워하고 통행도 하지 않고 의절을 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여러분이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잘한 사람, 잘못한 가해자와 그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중에 피해를 절대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당한 그 피해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작 처음에는 누군가 가해자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정확한 구별이 힘들어지고 미움과 원망이 꼬리를 물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B. 에서의 마음을 바꾸심
하나님은 먼저 야곱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이 형제와 화해하기 전에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은혜를 야곱에게 주시지 않고는 관계가 회복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야곱은 생애 처음으로 자기 깨어짐을 경험했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부수어져서 이기심과 모든 자기 사랑이 깨뜨려지는 은혜의 경험을 하고난 후에야 이 20년이나 되는 상처뿐인 형제의 관계가 끌어안고 용서하며 눈물을 흘리는 관계로 변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분명히 형제간의 불화와 반목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어쩌면 여러분이 절대적인 피해자일 수 있고, 여러분도 가해를 하기는 했지만 양쪽으로 볼 때에 여러분의 형제들이 더 큰 잘못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선악은 분별해야 하고 이 선악의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그 형제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는 자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주권에 맡기며 이 세상의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동안에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그 분이 나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려 희생하심으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심판할 대리자가 아니라 사랑할 중보자가 되어 주셨던 것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이러한 사랑의 모본을 훌륭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생애동안 어떤 사람에게도 폭력을 행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명백하게 하나님께 대적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폭력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따라 재판을 받으면 죽임을 당하여야 할 여인도 예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며 내가 너를 용서하노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이 여자에게 다시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거역하고 율법을 범하는 자들을 향한 궁극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굳게 믿었으나 예수님은 폭력으로 심판할 대리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이지 않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형제에게 입은 손해나 피해를 생각하는 동안에는 화해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해도 여러분과 거리가 멀어져 있던 육신의 형제들이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의 모습 속에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용서와 사랑의 자원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본을 훌륭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도 예수님은 자기의 당하는 고통보다는 이렇게 자신에게 고난을 주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이 미래에 받게 될 심판을 염려하시면서 그들이 당하게 될 미래의 고통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온전히 잊으시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받는 원수들이 하나님께 당하게 될 그 큰 고통을 기억하며 용서의 은혜를 아버지께 빌었으니 이는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마음을 녹이시고 야곱이 불신앙으로 지은 모든 죄를 통렬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자 야곱이 일평생 살면서 에서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놀라운 변화를 보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무조건 형제와 화목하십시오. 여러분이 잘못한 게 아니어도 그냥 잘못했다고 하고 화해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의 형제는 십자가 사랑 모르게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고 여러분에게 먼저 그 십자가 사랑 알게 해 주신 것은 더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 불공평이 바로 폭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에게, 죄인들에게 이 하나님의 불공평한 사랑을 그리워하게 만들어 회개하여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인간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베푸신 사랑을 생각하면 여러분에게 죄를 짓고 상처를 준 사람의 잘못은 그 사랑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악을 행한 사람을 용서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 용서의 은혜는 여러분을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보다 크지는 않습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IV. 적용과 결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될까요? 모든 인간 사회 하나님은 없고 자연의 법칙만 있다고 믿던 사람들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인간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동기는 무엇일까요? 물론 진리에 대한 아름다운 말의 증언도 사람들에게 그것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상처받을 수 없는 관계, 죽을 수밖에 없는 관계 속에서 그 상처를 사랑으로 바꾸고 그 고통과 원한을 은혜로 바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랑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드러나고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가 됩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도 인간의 모든 묘사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느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도 여러분, 주님은 사랑하라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라고 여러분에게 형제들은 받지 못한 그 큰 사랑을, 비할 데 없는 은혜를 먼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그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모든 사랑을 사람보고 베풀지 말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으신 우리 예수님을 생각하며 베푼다면 이 사랑을 베푸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도 우리에게는 달콤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망가지고 상처 난 가정의 선교사로 부르셨음을 가슴 깊이 새기고 죽는 날까지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아무리 나쁜 형제라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 그들을 주님 앞에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사랑과 가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