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랑 십자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은 3년 6개월 전 이곳에 우리들이 입당할 때에 여러분들에게 증거 했던 본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당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이 예배에 다시 입당할 때에 드렸던 그 말씀을 되새김으로써 우리들이 새로운 한 시대의 우리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말 못하고 생각할 줄 모르는 자연까지, 각기 자기의 자랑거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짓는다고 바쁘게 아침 일찍 나왔다가 밤 11시, 12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계속하다가 보니까 언제 겨울이 갔는지, 봄이 갔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날 문득 아침에 가다가 길거리에 먼 산을 바라보니까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어요. 야, 정말 대단하구나.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봄이 오나? 그 정말 자기의 자태를 뽐내는 것처럼 그렇게 꽃이 활짝 피었는데 정말 멋있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그루의 나무도 그렇게 꽃을 피워서 자기를 자랑하고 흐르는 시내에도 물소리가 있어서 새로운 가락으로 산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자기를 자랑합니다. 사람들에게도 이런 자랑거리가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을 뽐내기도 하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긍지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가 하면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바울은 이런 많은 보편적인 자랑거리를 모두 밀어버린 채 오직 한 가지를 자랑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당시로 말하자면 이 십자가는 죄 지은 범인을 죽이기 위해서 사용하는 사형집행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 이 문맥을 보자면 갈라디아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개척한 교회인데 이 교회가 사도 바울이 떠나자 거짓 선생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복음적인 교리를 부정하고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실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면서 사도 바울이 사도인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신앙심이 분명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되게 되었고 그래서 교회는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이 갈라디아서 전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1,2장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를 말하고, 2장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5,6장에서 그 적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갈라디아서 전체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복음적인 교리를 사수하고 있는 것인데 이 가운데에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강력한 고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자랑을 하다가 보니까 이제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들어오기 위해서 예전에 모두 버렸던 것들을 이제 다시 주서 섬기면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의로운 행실, 의로운 공로, 이런 것들을 자랑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 할례를 받은 것과 그리고 율법에 충성하는 것들이 구원에 도리라는 것처럼 공공연하게 자랑을 할 때에 사도 바울은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지만 내게는 우리 구주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는 불후의 고백과 함께 복음적인 교리를 향한 자신의 신앙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로서는 모든 사회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보편적으로 동의를 얻을 수 없었던 이 사형집행의 도구인 십자가를 이렇게 목숨을 걸고 사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이 사도는 모든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를 오히려 그것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크게 3가지로 집약된다고 봅니다. 우선 첫째는 사도 바울 자신이 이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전에 사도 바울은 철저한 유대교의 신앙 속에서 훈련받고 자란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으며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확신에 차서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신앙 속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그 구원의 은혜를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전해주신 복음을 통해서 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복음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노 받아 마땅한 저주 아래 있는 지옥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장본인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도 못한 채 사람들에게 교훈할 수 있었다고 믿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 그 허물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진노아래 있다 라고 하는 것과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그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커다란 저주와 진노의 골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그는 오랫동안 믿어오던 유대교 신앙의 암흑 속에 비쳐오는 한 줄기 복음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처음에는 비록 작게 비쳐왔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에 그 빛은 찬란하게 그의 어두운 마음을 비쳤고 그는 자신이 이단 중에 괴수요, 그리고 유대교 신앙을 훼방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나사렛 예수 그 분이 바로 자신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와 같은 죄인이 매달려야 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저주와 진노를 한 몸에 지고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임을 자랑하던 사람이 변하여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임을 스스로 자부했던 사람이 예수 죽인 것을 스스로 짊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자 이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다 하찮은 것들이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미 자신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죽어서 하나님과 어떤 생명도 누릴 수 없었던 주님의 진노아래 있던 자기 자신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을 깊이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들은 쓸모없는 것들이고 오로지 자신의 전 영혼을 압도하는 찬란한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으니 그리스도는 본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기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이 사도에게만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이런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마음 조리는 것도 많고 안타까운 일도 많고 또, 불만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또 중요한 일도 매일 매일 만나게 되지만 우리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그렇잖아요? 우리들이 만약에 구원받아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가진 것은 무엇이겠으며, 오늘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명예는 무엇이겠으며, 또 우리들이 자랑하고 있는 우리의 많은 자랑거리들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두 세상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모두 사라져가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구원받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을 것이고 구원의 은혜를 우리들이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주님의 생명도 우리 안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없는 삶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을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모든 발자취들은 주님을 거슬리고 주님을 대적하는 그런 대적들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전에 주님을 거슬리며 살았던 많은 죄를 불문에 붙이시고 심지어는 주님을 훼방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우리의 옛 행실을 모두 불문에 붙이시고 그야말로 그 은혜를 인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지혜로운 사람들도 많고 우리보다 선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보다 자비심이 많은 사람들도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보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많은 사람들을 제쳐놓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오직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이 해드린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거저 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의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그렇게 특별한 대접을 하나님 앞에 받아야 할 정도로 우리들이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진노의 자식이었고 죄와 어둠 속에 살아가던 하나님을 등지고 거역하던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측량할 수 없는 오묘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불러서 주님의 그 구원의 은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그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우리는 주님 앞에 그저 그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행한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구원이 거저 베풀어 주신 구원이었다고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왜 이 세상에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습니까? 왜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서 비천한 삶을 다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신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감당하시고 죽어 가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모두 우리에게 그 구원의 은혜를 거저 주시기 위해서 그 이전에 우리의 죄 값을 먼저 치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죽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형벌을 당하시므로 백지 수표를 쓰시고 그리고 그 수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써 놓아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이죠.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바로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참 생명과 은혜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항상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는 항상 가슴에 새겨야합니다. 자신에게 임한 이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이 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그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자기 때문에 죽으신 것임을 굳게 믿고 예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하며 그 십자가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치는 이유는 바로 자기가 먼저 개인적으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세상에 염려가 많이 밀려오고 잠시 지나는 이 세상이 너무 크게 보일 때 그때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나 같은 죄인은 용서함을 받아서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예수님의 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 죽인 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사랑의 부채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에요.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이 이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때문에 사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자랑하는 이유가 십자가 때문에 신자 되었기 때문이라면 두 번째는 십자가 때문에 사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키가 작고 이마가 벗어지고 그리고 얼굴이 못생겼으며 말도 잘 못하며 아주 교만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 속에서 그런 흔적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넣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그의 확신에 찬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전승이 사실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를 사람답게 만드시려고 하는 주님의 뜨거운 열심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참지 못하던 사람을 인내의 사람으로, 포악하기 짝이 없던 사람을 사랑의 사람으로, 교만하던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미 이전에 구약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조상들의 유전을 따라서 자신의 신앙의 열심을 내며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사람인데 그 탁월한 열심가 성경의 지식, 그리고 가문에 대한 자존심이 그를 새 사람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함께 자기 안에 들어온 예수의 생명이 그를 끊임없이 감화시키고 역사하시므로 그가 주안에서 사람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포악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람이 놀랍게 변화되어서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으며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온유하고 그 유명한 사랑의 장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지옥의 불길을 지피는 땔감이라고나 생각하던 사람이 변해서 이방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뜨겁게 끌어안고 나의 사랑하는 자녀, 나의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강퍅하던 마음은 변하여서 온유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변하되었고 날이 갈수록 거룩의 사람으로 바뀌어져 갔습니다. 그런 변화의 과정들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 되었고 그런 모든 일련의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붙들고 의지할 것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재미있는 공식이 하나 성립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구원 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십자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삶을 살면 살수록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가 정말 주님 앞에 바르게 살면 살수록 그 십자가를 더 사랑하게 되요. 무슨 뜻이냐면 이런 거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계속 죄 가운데 살고 불순종 가운데 살면 십자가가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살면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어요. 은혜가 없어요. 그런데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순종하려고 애쓰면서 분투하면서 사노라면 그가 그 십자가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요.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자신에게 더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 복음적인 사실 앞에 깨뜨려지고 그 앞에 참회하면서 정말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그 구원의 방법인 십자가에 대해서 감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더럽고 조잡한 모습을 보면서도 더더욱 뼈저리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더 철저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시작할 때에 정말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을 그래도 사람 만드셨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을 깨뜨려지지 않는 여러분들을 깨뜨려서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여러분들을 낮추셔서 완악하고 포악하기 짝이 없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온유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서 그나마 예수 닮은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만드신 장본인이 누구였습니까?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닮아가게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교만해질 때마다 우리는 죄인을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기까지 낮아지신 예수의 형상을 보며 다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교만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워갔습니다. 사랑이 없고 성품이 모질어 갈 적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행하신 그 희생의 족적들을 보며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갔습니다. 죄 하나도 없으신 그 분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시는 일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기를 드려 순종함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최고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어린 양처럼 세상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을 보면서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워갔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기적인 욕망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며 살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눈물겨운 희생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버림으로서 자신을 얻을 수 있다 라고 하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고 그것이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진 우리들을 변화시켜서 부족하나마 지체들을 위해 희생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드려 섬기며 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없었다면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흉내나 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힘에 넘치도록 성화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섬김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발자취를 자랑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를 자기되게 하신 그 십자가의 은혜만을 자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죠.
마지막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외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가 고통 하는 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동족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 하나님을 떠나 거짓된 신앙 안에서 메시야를 보지 못하는 그 정황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거대한 불신앙 앞에 맞서서 예수의 사랑을 온 몸으로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동족들에게 외쳤지만 그들은 폭력과 핍박으로 그를 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십자가 이외에는 결코 그들의 모든 인생에 대해서 해결해 줄 수 있는 정답이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들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하나님의 참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미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고백을 통해서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세상, 그리스도 아닌 것, 십자가 아닌 것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은 추후 1세기경에만 적용되는 사실은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은 개명한 시대에 최첨단의 과학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도 똑같이 이 세상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역사가 흐르고 세월이 많이 변천해도 죄인들을 구원하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주님의 그 끊임없는 감화와 은혜 속에서 짐승 같던 사람들이 변해서 하나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은혜를 가슴에 새길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제 인생의 남은 희망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전의 우리처럼 예수의 참 생명을 모르고 자신의 삶에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참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몰라서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를 전하고 이 십자가를 외치고 이 십자가를 알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마지막 대안이 아니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 앞에 받았으니까 이제는 이 사랑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자신의 건강도 자신의 소유도, 자신의 시간도, 심지어는 자신의 지식, 나아가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결국은 이 십자가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눠주기 위해서 주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많이 은혜 받은 사람들은 더 많이 섬겨야 하고 주님이 많이 주신 사람들은 더 많이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도 예전에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우리처럼 죄와 어두움 속에서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 칠흑 같은 어두음 속에서 슬피 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 견디기 힘든 영혼의 고독을 육체의 쾌락이나 그리고 세상에 대한 과도한 사랑으로 죄를 지으면서 그 영혼의 외로움을 잊고 살아가는 더 불행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의 참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구원의 은혜를 내게 주셔서 짐승 같은 사람을 신자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신 그 간증을 간직한 사람,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와 그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감화를 느끼는 그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사용하셔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교회당을 끝으로 이 여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측량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 가운데 주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선교지로 우리를 보내고 계시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매일 평촌을 지나가면서 저는 그 속에서 수많은 함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엔들 없으리요만은 주님이 우리를 다른 곳이 아니라 그곳으로 보내주신 것은 거기에 그렇게 우리 옛날에 우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이 아니셨다면 우리를 왜 그곳에 보내셨겠습니까? 많은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 교회당을 지으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건 작습니다. 이건 작습니다. 흩어져 유리하는 수많은 영혼들의 숫자에 비하면 이 교회당은 작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똑같이 구원받았습니다. 사도도 그리고 우리도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고 사도도 그 십자가의 은혜로 사람 만들어 가셨고 우리도 그 십자가의 은혜와 감화 속에서 짐승 같던 사람들이 주님의 사람답게 변화되어 갔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 안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넘어지고 깨뜨려지면서 걸음마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나는 싸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지켰고 지금도 그 싸움이 제 안에도 있는 바요, 여러분 속에도 있는 바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우리는 매우 부족하지만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연약합니다. 우린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승리를 굳게 믿습니다. 지금은 연약해도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자기의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자랑할 제목은 오직 하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입니다.
그러면 크게 두 번째로 우리는 어디서 힘을 받아서 어떠한 능력을 자원으로 삼아서 이렇게 예수를 위해서 살고 십자가 자랑하는 삶을 살수 있겠는가 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한 내가 세상을 대하여 세상이 나를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두개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자기를 향해 매달린 세상 십자가, 세상을 대하여 매달린 자기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 십자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화를 받지 못했을 때에는 세상이 자기를 향해서 펄펄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유혹하고 자기를 죄 가운데 데려갔습니다. 세상이 부르면 따라갔고 세상이 죄를 지으라고 가르쳐주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사도 바울에 마음속에 구원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화가 이 사람의 인격을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당하신 그 고난의 의미와 그 십자가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어주신 비할 데 없으신 크신 사랑을 한 몸에 경험하게 되자 이상하게 세상은 더 이상 자기를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유혹하는 것이 이젠 유치해보였고 세상의 유혹이 더럽게 느껴졌습니다. 또 하나의 십자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매달린 십자가였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삶은 육체의 욕심과 세상을 향해서 반응하던 것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넣기 위해서 달려가던 열심도 사실은 자기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예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진 사람이 되었고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베푸신 그 구원의 은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자 그는 더 이상 세상이 유혹하는 손짓에 자기를 맡길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어떻게 죽으셨고 그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오셨을 때에 지금 자기를 유혹하고 있는 이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세상 사랑과 결별하는 거룩의 비결을 터득해갔습니다. 자기의 육체의 욕심이 죄를 이루려는 소원을 가질 때마다 자기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를 못 박은 것과 그리고 예수의 생명이 그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 속에 나타난 것을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끊임없는 현재적인 감화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 자랑하며 살 마음을 갖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반드시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그 삶의 자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감화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그 십자가의 끊임없는 감화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커 보인다고 생각할 적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을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여러분들이 예수 죽인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아무 것도 아끼지 아니하고 모두 버리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종된 삶을 자청하는 그런 신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으니까 우리들은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일생동안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주후 110년에 안디옥에 이그나티우스라고 하는 교부가 살았습니다. 그 로마시대에 모든 사상과 정치권력에 굴하지 아니하고 청진한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로 인해서 고결한 사람이 된 이그나티우스는 체포가 되어서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고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 사람을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투옥을 안타까워했고 그의 고결한 성품을 기억하면서 그를 구금상태에서 풀어줄 것을 로마에 탄원했습니다. 어느 날 사형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그에게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이그나티우스 선생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 시민들이 모두 탄원서를 쓰고 있습니다. 아마 선생님은 곧 석방될 것이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불철주야 애쓰고 있습니다.” 그때 이그나티우스는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나를 구명하기 위한 운동을 즉시 그치시오. 나는 이 곳에서 밖에 있었더라면 드릴 수 없었던 내 최선의 것을 우리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순교의 잔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고 일평생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종처럼 주님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 주신 그 평촌 예배당에서 그렇게 십자가에 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 그 십자가의 감화 속에서 많은 영혼들에게 새 생명 나눠주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라도 혹은 다음 주에라도 교회당에 와서 좋은 것이 있으면 모두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실 영혼들을 위해서 주님이 베풀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섬김의 정신으로 예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다가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품에 안기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