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기도
녹취자: 허 혜숙
오늘 제가 관상기도에 대해서 강의를 해 드리겠는데 60분 정도 할 수도 있고 30분 정도에 끝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관상기도라는 것이 총회에서 문제가 제기 되었기 때문에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여러분들이 다음 세대에서 목회를 하면서 싸워야 할 잠재적인 커다란 신학적인 대적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독자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20권정도, 그렇지 않으면 100여권 가까이의 책을 읽어야 될텐데 경제적으로도 제 강의를 들으면서 정리를 하시면 훨씬 더 이다음에 목회를 할 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여러분들에게 서론적으로 조언을 드리자면 여러분들이 이 학교에서 대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조직신학, 성경 신학, 역사신학, 그 다음에 실천신학 이렇게 크게 네 가지 정도 분야를 가지고 공부를 해 나가야 하는데 그것만 공부해서는 안 되고 현대 사회를 공부해야 됩니다. 현대 사회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미국을 기준으로 유럽까지 가면 더 좋고 그 정도까지 안 되면 18세기 미국에 들이 닥쳤던 계몽주의부터 시작을 해서 미국과 캐나다의 역사를 읽으시고, 그 다음에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19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 도시화, 그 다음에 근대화와 그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 역사가 매우 중요합니다. 저의 이 충고를 가볍게 듣지 말고 아주 깊이 고민하세요. 이 짧은 시간에 그것을 제가 다 말씀 드릴 수 없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면 우리나라는 영국이나 유럽과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미국으로부터 대부분 선교를 받았고 미국과의 상호작용 하에 나라가 이렇게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이 충고를 가볍게 듣지 말고 작심을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역사신학, 주경신학 등등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공중에 붕 떠있는 공부가 되어서 공부 잘하고 목회 못하는 사람 못 만났습니까? 공부를 잘 하는데 목회가 안 되는 사람들 만나본 적이 없습니까? 있죠? 그것을 단순히 기도를 안 하고 실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정확하게 역사를 읽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들이 현실을 버리면 안 됩니다. 이 짧은 시간에 그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다 말씀 드릴 수 없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합니다.
타협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현대의 문화와 정신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절대로 온전한 목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신학교의 선생들이 하면 자기 전공에 대한 과장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물론 대학에서 가르치지만 선생도 아니고 내 아이덴티티가 그것도 서울도 아니고 시골(평촌)에서 목회를 하고 있으니까,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내가 여러분들한테 충고하는데 우선 열일을 제쳐놓고 ‘부흥과 개혁 출판사’에서 나온 ‘데이비드 5부작’부터 빨리 읽으십시오. 돈이 없으면 다른 책을 팔아서라도 사서 읽으십시오. 그것을 놓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기 시작하세요. 가능하면 웨일즈 교수의 모든 책을 구입을 해서 빠른 시간 내에 이번 방학 끝나기 전까지 그냥 쓱 훑어보지 말고 그 책을 읽기 전에 미국과 캐나다 역사책을 갖다 놓고 읽은 다음에 마크놀이나 이런 사람 책을 읽고 데이비드 웨일즈의 책을 놓고 가능하면 정확하게 앉아서 줄그으면서 정확하게 읽으세요. 가능하면 같이 모여서 읽으면서 discussion 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좌표를 여러분들이 읽어야 합니다. 그것 가지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훨씬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특히 복음주의 역사의 이 흐름들이 어떻게 해서 오늘 현대 신학까지 오게 되었고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면 한국 교회사까지 가능하면 한국 근대사까지 저쪽으로 나가면 14-15세기부터 시작이 되었던, 포르투칼부터 시작이 되었던 노르웨이, 포르투칼, 스페인 등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개척사, 경제 부흥사까지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면서 안목을 가지고 이 한국 사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어야 됩니다. 상당히 많은 양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안 하면 감히 목회가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이렇게 중요하게 이야기 하는 것에 여러분들이 호소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아,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쉬는 시간 포함해서 세 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해서 강의를 하겠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저 책을 모두 끝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가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10시까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읽고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나의 이 강의가 도전이 되어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이 잠재적인 선교의 위협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눈을 뜨고 마지막에 집에 돌아갈 때 그 동안 공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나는 오늘 강의를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관상기도'라는 말이 우리에게 유행이 되는데 '관상'이라고 할 때 ‘관’자는 볼 관자입니다. 그래서 이 관상이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로 ‘콘 탬플 라치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콘 탬플 라치오라고 하는 것은 보시다시피 ‘라치오’는 명사 접미이고 ‘콘’은 with ‘탬플’은 아시다시피 성전을 가리킵니다. 이 당시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로부터 추정을 해 보면 커다란 예배당 같은 신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댈포위 같은 곳에 가보면 옴파로스 돌멩이가 있고 여 사제들이 엎드려서 말하자면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스가 나오고 비몽사몽간에 뭐라고 막 중얼거리고 헤르메스들이 그것을 통역을 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신탁으로 받고 그것을 따라서 운명을 점치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탬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신과의 교통과 관계가 있는 그런 개념을 지시하는 단어가 있고 이것이 라틴어에서는 ‘테오레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사물을 오랫동안 죽 바라보는 것, 그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테오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관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이 결국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직관 혹은 체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물을 인간이 인식할 때 인식하는 방법이 직관으로 아는 방법이 있고 또 이성을 통해서 추론으로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추론하는 것을 ‘라치오’ ‘키나치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추론입니다. 그런데 이 직관은 ‘디알레티케’의 방법으로 아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이야기 할 때 변증이라고 부릅니다. 이 변증에는 사실은 ‘아폴레지게’라고 이야기 할 때의 그 변증이 아니라 어떤 사실들을 전달하는 방식이 a니까 b이고 b니까 c라는 논리의 방식이 아니라 무엇인가 번쩍 하고 비치는 무엇인가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스스로 명백한 어떤 사실로 다가오는 그 방식을 우리들이 변증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헤겔에는 정반합, 부정반합, 이렇게 나가는 이런 것들이 논리의 구조가 아니라 변증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는 기능을 가리켜서 ‘지성’이라고 부르는데 요쪽에 해당하는 것이 ‘오성’에 해당되는 것이고 이쪽에 해당하는 것이 ‘이성’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바로 이 오성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고전적으로 보면 오성의 개념이 훨씬 위에 있고 아래에 이성의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이성의 토대가 되는 보다 근본적인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오성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라든지 선과 악의 개념, 이런 것들, 양심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들은 논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오성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논리적인 추론의 기초가 되는 사실들에 대한 파악은 오성을 통해서 이루어 진 것이니까 고전적으로는 이 오성이 이성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데카르트와 칸트 시대에 와서 이것이 뒤바뀌면서 이런 종류의 직관을 통해서 아는 것을 신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이성이 위로 올라가고 오성은 단순히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감각하고 하는 이런 것들입니다. 칼빈도 이 오성의 기능을 이야기할 때 기독교 강요에서도 오성은 이성을 초월하는 진리로서 하나님을 파악하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각종 사물에 대한 인식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인식론적인 오류인 환타스 마타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이런 기능들이 이 오성 안에서 만들어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높은 기능과 가장 감각적인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것인데 데카르트와 칸트에 와서는 오성을 죽여 버리고 이성을 살렸기 때문에 오성이 이성보다 하위에 있게 되는 개념들이 철학사에 등장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이런 직관, 혹은 체관을 통해서 불교에서 도를 깨닫다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소위 이야기 하는 선험적 지식을 얻는 방법이고 선험적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전통적으로 우리가 기도라고 할 때에는 지성을 사용합니다. 내가 비몽사몽간에 기도하는 것은 개혁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나의 지성이 살아있는 가운데 그 지성이 내가 기도하여야 할 것이 무엇이고, 내가 기도하는 바가 무엇이고, 내가 기도하는 바가 무엇을 의미하고, 내가 기도속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이성으로 지성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언어로서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방언기도 하면 복잡 해 지니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방언기도를 하더라도 자기가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도에 대한 올바른 정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들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어떤 하나님을 죽 의식 속에서 응시함으로서 언어가 상실 되어서 그 분을 응시하고 직관하는 것, 그 자체를 기도라고 보는 상태가 되는 것을 관상기도, 명상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말로만 들을 필요가 없이 직접 하는 사람들 화면을 한 번 보겠습니다. (영상)
이 분이 목사님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합동 측 목사님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관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모아서 채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터뷰를 보면서 무슨 문제가 있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런 추종자가 될 다분한 소질을 가지고 계신 분들입니다. 저런 것들이 관상기도인데 얼핏 보면 저런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커다란 영향을 주겠느냐 하는데 설명을 들어보면 저런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저것이 뭔지도 모르니까 따라가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 굉장히 뿌리 깊은 사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관상기도의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관상기도의 사상은 뉴에이지 사상입니다. 우리는 뉴에이지 사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말 그대로 하면 새로운 세대, 혹은 새로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시대라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천문학적인 시대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성술에서 우리들에게 12간지가 있는 것처럼 별자리에 따라서 여러 가지 황소자리, 개자리, 쌍둥이자리 이런 것들이 있는데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서 3천년간 계속 되는 별 자리는 물병자리라고 하는데 물병자리 시대를 뉴에이지 시대라고 합니다. 왜 이 시대가 뉴 에이지냐면 다른 시대와 대비되는 독특성이 있는데 이 시대에는 인간이 오랫동안 위기였던 시대에서 깨어나서 자신 안에 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이 곧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과 신에게 이르기까지 신화되어 보편적인 신과 일치를 이루는 신화의 시대, 인간이 신화 되는 시대, 이런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는 시대가 바로 뉴에이지 사상입니다. 이런 뉴에이지 사상이 강하게 많은, 문학, 음악, 예술, 정치, 철학, 각종 학문에까지 파고들어서 인간이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 곧 신의 본질을 가진 존재이고 신화 되어야 할 존재다 라고 하는 사상이 현대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상기도는 이렇게 관상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높은 신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렇게 높은 신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 그것이 곧 자아에 대한 의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 이런 것들이 철학사적으로 보면 근대에 와서는 스피노자가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데 그 이전에는 이미 파르메니데스로 시작되어서 플라톤,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등등 많은 영향들을 끼치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신의 본질이 세계가 있고 이 세계 안에 인간이 있고 자연사물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 신이 있습니다. 이 세계 자체가 신의 또 다른 존재의 존재 양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특정한 존재 형태를 가지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만 이것들을 모두 증발시켜 버리면 사실 이 본질은 신의 본질과 일치를 이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자체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영적 본질에 의해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데 관상기도는 바로 이렇게 자신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라 본질상 신과 일치를 이루는 신적 본질들 속에서 존재하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해 주는 수단이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과 모든 세계를 통할하고 있는 이 본질의 정체가 무엇이냐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것들을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자의식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본질이 신과 세계의 본질 모두에 침투해 있는 궁극적인 본질이다 라고 보고 그래서 자신과 그리스도의 일체 됨, 본질적인 연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중세의 신비주의입니다. 관상기도의 뿌리가 삼학교구들에게서 발견이 됩니다. 삼학교구들 이전에도 이미 피타고라스학파나 플라톤, 신플라톤주의 학파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비주의 사상들은 이미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 신비주의 사상을 가지고 초기 기독교 수도원의 형태가 탄생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성 안토니우스입니다. 안토니우스라는 사람이 수도원을 만들어서 수도생활을 하게 되는데 지금도 이때 수도원의 흔적들에 가보면 수도원에 출입문이 없었습니다. 저 꼭대기에서 내려오려면 줄을 타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매우 불편했습니다. 매우 특별하게 빵이라든지 기구라도 들여오려면 그렇게 들여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수도원주의 운동이 계속 되면서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서 근심과 염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추구해야 된다 라고 하는 사상들이 강조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주 억제된 수면과 고행, 노동을 통해서 수도에 힘쓰게 됩니다. 이러한 중세의 신비주의는 기독교 안에서 오리겐 같은 교구, 이 사람은 원래 신플라톤주의 자였고 플로티노스의 제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의 사상에서 잘 나타나고 그 사람이 쓴 소위 이야기하는 신학원리라고 하는 쁘린띠피움이라는 책은 플라톤주의 철학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가 믿는 바를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최초의 조직신학 책 가운데 한 권입니다. 이렇게 해서 체계적으로 기독교사상을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인데 알렉산드리아의 필러 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중세의 신비주의 사상들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오리겐이 바로 그런 기독교의 선배들의 견해를 따랐고 알렉산드리아의 피고 같은 중간 사 시대 때에 디아스포라들이 자꾸 그리스 헬레니즘에 대한 모아 사상에 빠져서 유대교 사상을 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됩니다. 그 때에 필러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같은 사람들이 모세 오경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런 지혜가 나왔다 라고 하면서 방대한 저작들을 통해서 논증을 펼칩니다. 이렇게 유대교를 방어하는 운동들이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도 결국은 신비주의에 흐르게 됩니다. 오리겐이 그 후에 이런 것들을 답습하게 되고 특히 사람들은 특히 오리겐 같은 경우는 모든 만물이 일자로부터 나와서 그것들이 여러 가지 사물들의 형태로 존재하고 마지막에는 일자로 회기 한다 라고 하는 순환사상들을 만들어서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이 만물의 우주적 순환과정 그 자체가 우주의 존재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결국은 범신론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후에 대 마카리오스라든지 그 다음에 에바그리오스몬티쿠스라든지 중세후기에 와서는 이런 신비주의가 더욱 더 융성하게 발전을 해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빙엔의 힐데가드이라든지 씨에나의 가드린, 마에스트에카르트, 헬레수소, 끌레라보의 베르나르, 노치아느줄리아네 등의 신비주의자들이 대거 등장을 하면서 중세의 신비주의가 촉진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역사적으로 13세기 말에 카톨릭 안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때에 등장하는 것이 탁발수도사라든지 시터 교단의 개혁이라든지 프란시스칸 수도회 설립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일어났던 운동들이 얼핏 보면 윤리개혁운동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윤리개혁 운동을 하면서 이 사람들이 스콜라주의에 염증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성서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면서 이 사람들이 중시하였던 것이 복음서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던 그 모본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살자, 가난, 청빈, 고난, 침묵, 수도 이런 것들에 힘쓰면서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고 수도생활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신학적인 유산들을 소홀히 하고 단순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그것이 단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에 문을 열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비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유대교의 까발리즘입니다. 까다리즘은 ‘k'라고 시작을 해도 되고 'c'라고 해도괜찮습니다. 유대교의 카발리즘을 이야기 할 때는 k라고 시작하는 카발리즘을 쓰고 그것이 기독교화 된 것에 대해서는 c라고 쓰는 까바리즘을 씁니다. 어떤 것으로 써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유대주의 안에서 발생한 것인데 이 사람들은 지역적으로 보면 스페인 프로방스지방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게 된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가리키는데 원래 여러분 아시다시피 유대교는 신비주의 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중간사 시대를 거치면서 이 사람들이 신정론에 대해서 대답을 못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악을 허락하실까? 왜? 그 악의 소산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신정론에 대해서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방황을 하면서 어떤 설명을 찾아내느냐 하면 자기들의 시대를 가지고는 자기들이 왜 이렇게 끔찍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자기들을 향하여 자비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왜 이런 상황을 만드시는지에 대해서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윤회의 개념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당하는 이 고난은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지은 업보 때문에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서 신정론을 정당화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신비주의적인 해석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세베르하바히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런 신비주의 문헌에서 아예 공개적으로 영혼 윤회설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불교 영향을 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이미 기독교 안에 침투해 들어와 있던 히랍 철학들에 대한 요소들을 많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랍 철학에서는 업이나 윤회설은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일자인 신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나와서 다양한 형태로 시공간 안에서 갖게 된 후에 모든 우연적인 형태를 다 상실한 후에는 다시 신의 본질로 회기되고 회기 된 것들이 다시 형체를 입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네카 같은 사람이 만물들이 태어나고, 변전하고, 소멸하고, 사라져가는 그것들의 끊임없는 반복이 이 세계의 자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본 것이고 그렇게 보면 마니교에서 주장했던 선악에 대한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도 결국은 말하자면 유대교의 까발리즘적인 그런 사고방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니교 같은 경우는 하르낙에 의하면 우주와 인간과 신과 역사와 만물에 대해서 통일적인 해석의 전망을 내 놓으려고 했던 인류 최초의 사상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마니교는 기회가 닿으면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면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고 그런 문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 속에 상당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어떻든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에 귀의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만들었던 커다란 철학적인 오류가 있었는데 그것은 선과 악이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영원 선제한다고 본 것입니다. 선과 악이 영원히 선제하고 그 우주에 있는 선과 악이 인간 안에도 선과 악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그 안에 있는 선과 악이 서로 다투어 악이 선을 이길 때에는 인간이 악행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악행을 할 때에도 내가 잘못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내 안에 있는 악 한 것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의지의 개념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 자유의지가 아우구스누스의 사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떠올랐던 것도 이런 체험적인 이유 때문이고 자유의지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아우구스누스가 모든 것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아우구스누스가 기본적인 해답들을 내 놓습니다. 그 테두리를 못 떠나면서 자유의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는 필독서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똑바로 읽어야 합니다. 읽고 나서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면 책을 잘 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 이 문제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하면서 도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의지 문제를 공부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성화의 교리, 죄의 교리, 그 다음에 인간 책임의 문제, 하나님 심판의 문제, 그 다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인간의 의지를 감화시키는 이런 모든 문제들을 전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공부해야 됩니다. 아우구스누스가 사실은 ‘Eighty three questions’ 라고 하는 책을 씁니다. 이것이 중세의 신학자들에게 내 준 숙제입니다. 중세는 이 여든세 개의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우구스누스는 이미 자기는 죽어도 이후에 우리가 계속해서 풀지 않으면 이 기독교에 대한 설명이 분명해 지지 않을 여든 세 개의 위대한 질문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이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누스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아우구스누스는 중세 사상을 이전에 있었던 사상들을 모두 하나로 총합해서 서구문명을 여는 순회 역할을 했고 중세의 신학이 아우구스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1600년간을 지배를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품이 싫어서 반기를 들고 앙탈을 부리고 하지만 결국은 그 품으로 돌아와서 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우구스누스를 비판해 온 역사적인 인물들도 그 비판하는 방법조차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그 분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개혁신학을 놓고 아우구스누스를 놓고 이 사람은 개혁신학자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공부할 가치가 없다 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아우구스누스 시대 때에는 종교개혁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개혁신학이 없었습니다. 하나의 모든 사상들을 발전해 온 원천입니다. 약 256편의 저작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논문들을 꼭 읽어야 합니다. 아우구스누스란 사람을 도전을 해야 합니다. 특히 고백록, 참된 종교에 관하여, 삼위일체, 자유의지론, 무엇보다 중요한 신정론, 영혼의 크기에 관하여, 질서론, 데오레디네, 대학다리따, 참된 행복에 관하여, 이런 저작들은 주옥같은 것입니다. 그런 저작들을 깊이 파고 들어갔다가 나와서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강요를 읽다가 보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저 훌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에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하면서 좍 나옵니다. 절대적인 존경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빠지면서도 그것은 나에게 신나는 일이었다’ 왜? 자기가 악을 저질러 놓고도 자신도 피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니교에서 이원론 사상, 선과 악의 기원과 종말에 대한 마니교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나중에 영지주의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런 중세의 까발리즘이 르네상스 이후에는 기독교에 들어와서 기독교 까발리즘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해서 신비주의가 나오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관상기도 같은 것들이 아주 획기적으로 보급이 되는 것입니다. 명상기도 같은 것들, 조용히 앉아서 무념무상의 상태로 들어가서 관조에 진입하는 이런 사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심지어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는 나조차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지요? 불교의 무념무상과 많이 비슷합니다. 관상기도가 관상기도를 고유한 의미에서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오늘날 합동 측에서 이런 것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 밑바탕의 사상은 바로 통일적인 신학의 교리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종교개혁 시대부터 근대 이전까지의 신비주의 사상이 나옵니다. 20페이지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즈음에 한편으로는 이성주의 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신비주의 운동들이 활발하게 전개가 됩니다. 이런 신비주의 운동들은 르네상스 이후에 다시 활발해 져서 제스위티의 선교사인 이그나티스로열라, 아델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두란노에서 계속해서 찍어내고 있는 노란스 형제, 순교자로 유명한 조지 폭스, 잔느마리 귀옹 이런 인물들에 의해서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범신론과 내재신론 확산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확산된 범죄신론과 내재신론이 이 관상기도에 영향을 많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 학과 시간에도 열심히 공부를 했겠지만 우선 판데이즘과 판 앤 데이즘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판데이즘은 우리들이 범신론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사상에서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느냐의 교리를 이야기 할 때 플라톤이 두 개의 중요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에마네이션 그 다음에 레마네이션입니다. 에마네이션은 발추로 번역이 되고 레마네이션은 회기로 번역이 됩니다. 돌아간다는 뜻이죠. 무슨 뜻이냐면 세계가 그릇과 같은 것인데 여기에 신성이 충만하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어서 이 신성이 충만하게 차고 넘쳐서 바깥으로 흘러 나오는 것이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의 비의지적 유출에 의해서 자신의 신성이 바깥으로 차고 넘쳐서 형성 된 것이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형성된 세계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부피와 모양과 크기를 가지고 각양 사물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항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본질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무지 비싸잖아요? 연탄불 위에 한참 놓으면 이산화탄소가 되어서 싹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것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그 전제가 그것을 분해시키는 가스가 없는 공간 안에서만 형체를 갖는 것이지 그것을 분해시킬 수 있는, 산화 시킬 수 있는 공간 안에 들어가면 없는 것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 여기 이런 물건이 있는데 불을 피우면 확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있는 것인가 라는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그런 쪽에서 이런 특정한 시간, 공간 안에 있는 것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형체를 다 잃어버리고 다시 회기하게 되는데 이 회기가 신으로 회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물들이 없어지고 나면 소위 형상이라는 것이 남는데 이 형상이라는 것이 결국은 신과 일체를 이루면서 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순환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격은 없습니다. 다만 신성이 끊임없이 유출되고, 회기하고, 환원되는 거대한 흐름 속에 가변적인 존재로서 이 모든 인류의 운명과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 이것이 범신론입니다. 불교가 대표적입니다. 형태는 우연적이기 때문에 수시로 흐르는 것입니다. 자비한 생명 사상도 거기에서 온 것입니다. 쥐 한 마리도 너그럽게 대해야 됩니다. 왜? 그것이 우리 할머니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비이성적인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죽어서 화장터에 가서 확 태워버리면 한 시간 만에 하얀 뼈가 나오는데 그것을 빻잖아요? 그것도 더 센 불에 돌려 넣으면 그것도 원소로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원소들은 여러분들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원소는 수천 년 전에 쥐의 일부분일 수도 있는 것이고 나무의 일부분일 수도 있는 것이고 석탄의 일부분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비이성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소 자체도 상대적입니다. 왜냐하면 원소는 열에 의해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공간에 나가 보면 H밖에 없습니다. 수소밖에는 없습니다. 수소가 열이 가해져서 합쳐지면 헬륨이 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금을 만들어보기 위해서 무지하게 애를 써봤습니다. 못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50억 도의 열만 올릴 수 있다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50억 도의 열로 무한대의 금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원소라고 하는 것은 항구적이고 영원한 것만은 아닙니다. 아주 가변적입니다. 세슘 같은 원소는 자연적으로 생겨나지 않고 원자로가 폭발이 되면 생겨납니다. 그것을 감지해서 핵실험을 하잖아요? 그런 이유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의 회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고 플라톤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고, 힌두교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적어도 유럽은 오랫동안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오게 된 개념이 파넨데이즘의 개념입니다. 판데이즘 말고 판 앤 데이즘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럼 뭐냐 하면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 여기에서는 뭐만 다르냐면 이 설명들은 거의 같지만 비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신론적인 설명에다가 기독교의 옷을 입힌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론 가운데에서 인격적 신관을 덧입혀서 만들어 낸 것이 판 앤 데이즘입니다. 자, 그런데 이 판 앤 데이즘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하면 이것이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시대에 맛서서 싸워야할 커다란 오류의 신관입니다. 벌서 기독교에서 이것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신학사 시간에 화이트 해드나 핀랑이나 하트만 같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과정신학자들입니다. 데오리지하고 프로세스라는 이야기 들어봤죠? 과정신학이라는 이야기 들어봤죠? 그 프로세스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전통적으로는 여기에 세계가 있고 여기 인간이 있고 신은 이 모든 것 위에 초월해 계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안에 신이 섭리하시고 움직이고 하는 것이지만 신은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내재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신은 초월해 있는데 이 초월적인 이 신이 어떤 식으로든지 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설명해야 되잖아요? 예전에는 이 초월성이 강조된 가운데 관계로서 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이신론 데이즘에서는 법칙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전적인 기독교 신관에서는 이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면서 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해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본질에 있어서는 이 모든 피조물과는 완전히 다른 전적인 타자다 라는 사실을 못 박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인격적으로 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세계를 움직이고 관계를 이어가신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면 되어가는 것이니까, 인격적인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움직여 주시는 것이니까, 등록금이 없어도 기도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상하게 까마귀가 날아와서 등록금을 해결해 주시니까. 그런 것만 의지하고 공부하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하냐하면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있는데 여기에 신이 계시고 이 신이 마치 자비를 베풀 듯이 찾아오셔서 자신은 변하지 않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세계와 모든 것들을 움직이면서 섭리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신은 초월해 계실 뿐만 아니라 내재해 계시는데 이 내재가 본질의 내재라고 보고 본질이 내재할 뿐만 아니라 이 본질이 인간에게 영향을 주고 인간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여기에 다윈의 진화론이 도입이 되어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 가냐 하면 신은 처음부터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이 신 그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되고 순환되어 가는 진화론적이고 발전론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그 신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신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을 인간 안에 있는 신의 요소와 신 안에 있는 인간의 요소의 합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데 공부 열심히 해야 합니다. 특별히 지금 현대에 와서 엄청나게 이 개혁신학이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이 신론입니다.
혹시 개방신론에 대해서 들어봤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미래를 모른다, 계속 인간과 함께 배워간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이고 인간을 이 모든 우주와 가치체계의 중심에 하나님과 함께 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세속주의자들은 신은 없고 여기에 인간만 있다, 인간이 이 모든 가치체계의 중심이다 이렇게 보는데 그래도 조금 기독교적인 흔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신과 인간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개판 치면 하나님도 이 진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웃지만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지금 개혁주의적인 신관은 세계에서 마이너리티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 것입니다. 현대학에 있는 과정철학자 이런 사람들은 확 문을 여니까 모든 종교를 품에 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스며드는 것입니다.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생각 없이 해 보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식견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정치적 위력을 가지고 종교다원주의를 펼치는 것입니다. 이미 그 궤도의 전반적인선회가 1960년 대 제 2 바티칸 총회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한스킹이나 이런 사람들의 책을 주의 깊게 읽어야 됩니다.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보통 쓰면 800-1000페이지를 쓰니까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The other God’를 가르치고 목회자들은 ‘The other way to salvation’ 를 가르치고 성도들은 ‘The other motive of faith’를 찾고 있다. 3자가 연합해서 악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볼까요? 신학자들은 다른 하나님을 가르치고, 목회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을 가르치고,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 다른 동기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은 다른 종교화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케리그마를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속화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21page 르네상스 이후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일자 토온, 토핸, 토혼이라고 하는 이 존재가 어떻게 하여 세계와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범신론적이고 내재신론적인 주장들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관상기도 운동은 이러한 신관들의 지지를 받는 신비 사상에 의해 촉진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철학과 역사의 해석에 영향을 끼치면서 르네상스 이후 낭만주의 시대에까지 널리 유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죠르다노, 브르노, 스피노자, 헬리모어, 레싱, 헤르더, 슐라이더마흐 이런 사람들이 이 운동에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19세기 이후에 일어난 내재신론의 부흥은 관상기도에 대한 커다란 호소력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들이 결국은 악의 원인 이런 것들에 대한 미흡한 설명,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죄악, 영혼과 시간 사이에 있는 단절성, 이런 것들이 고전적 유신론을 강력하게 난타합니다.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합니다, 어떻게 찾겠습니까? 신앙에 속한 문제인데? 결국은 이러한 것들이 결국 고전적 유신론을 공급하면서 이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설명하면서 아까 설명한 하나님도 진화해 간다라는 것입니다. 이 진화론이 문제입니다. 이 진화론이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있으니까 모르지만 어린아이들이 이 진화론에 의해서 이 기독교의 전제를 다 상실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복음을 열심히 전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회개시킨 다음에는 성경책과 과학책 두 가지 책을 양쪽 손에 한꺼번에 들려줘야 합니다. 지금처럼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과학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아예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아이 씨, 6일만 창조했으면 한 거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성경이 그렇다고 하잖아’ 이렇게 우겨 치면 결국은 사람들이 이 기독교 신앙 자체도 신뢰를 안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린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역자들은 오늘 겨울이라도 진화론을 배우고 학생들을 이 진화론에 대해서 이것이 얼마나 허구가 많은지 파악을 하고 학생들을 이 진화론의 독서에서 탈선시킬 수 있을 정도의 설봉력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궁금하게 생각한다면 프란시스 쉐퍼의 책과 낸시 란돌프 피어시의 책을 읽어보세요. 그다음에 프란시스 쉐퍼의 저작들, 하우쉬드 리더만 올리브,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노스피어스가 공저한 책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더 거슬러 올라가면 헤르만 바빙크, 엘리모어 사이어 이런 사람들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러면서 이 문제들을 풀어가야 합니다. 20세기의 이 신론은 완전히 이슈입니다. 예전에 우리들이 믿었던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도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재신론들이 떼이아르데 세르뎅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을 설명을 하자면 카톨릭의 철학자 인류학자인데 이 분이 사제인데 아주 독특한 이론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사람들, 그 다음에 이안 바브, 폴 데이비스, 아스피포크, 필리 크레이턴, 퍼킨 홈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면서 사실 관상기도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한국교회에 관상기도가 확산되도록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레노바레 운동입니다. 이 레노바레 운동은 리차드포스터에 의해서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이 전개됩니다. 이 분이 쓴 책 중에서 ‘기도’라는 책이 나왔을 때 엄청나게 많이 팔렸고 리차드포스터의 기도가 나왔을 때만해도 무엇인가 이 분이 세속화 된 교회를 치료하기 위한 훌륭한 접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사실은 퀘이커교도입니다. 여러분, 퀘이커교도는 역사적으로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보다는 'inner light'라고 해서 내적인 광명을 더 믿고 성령의 조명, 신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강조하는 교파라는 것 정도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시죠? 그리고 이 사람들이 무교회주의라는 것도 알고 계시죠? 그런 계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을 위한 운동입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따라서 포스터는 인간 내면세계에 내적 광명이 있다고 믿고 진실한 자아체험을 통해서 진리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의 사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레노바레 운동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레노바레운동은 우리나라에 관상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알리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정적으로서의 신비가 아니라 관조적인 신비의 상태에서 만트라, 그러니까 불교에서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짤막한 어떤 어투를 반복을 함으로서 이런 명상의 상태의 만트라의 실천들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 이 레노바레의 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이 되고 지금도 서점에 가면 레노바레의 성경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생각없이 보면 흔히 보이는 성경 같지만 전체적으로 찬찬히 훑어보면 성경을 편집한 전체 의도가 우리를 어딘가로 데리고 가고자 그런 내용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성경 본문에 대한 견실한 해석을 통해서 그것을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그 속에서 문법적이고, 신학적이고, 역사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으로서 그 속에서 어떤 신학적인 결과물들을 끄집어내고, 그것들을 묵상하고, 그 진리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읽은 후에 자기 자신이 아까 거룩한 독서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신을 직접적으로 관조하는 명상의 상태에 들어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행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이 레노바레 성경이 나왔을 때 한국 교회에 있는 모든 신학대학교 총장들이 앞 다투어 추천을 했습니다. 저는 원칙적으로 제가 읽어보지 않고는 추천을 하지 않습니다. 써 달라고 하면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분들이 바쁜데 언제 그 책을 다 읽었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진심으로 신학해야 합니다.
사실 이 레노바레 운동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그 정체를 봐야 합니다. 단순한 이단 운동이 아닙니다. 아까 이야기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복음과 이교적인 혼합 속에서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기독교의 영성을 이끌어 갑니다. 이렇게 모여서 레노바레의 컨퍼런스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세련되어 있고 현대인의 요구들을 잘 수렴하고 있는 운동입니다. 그 다음에 관상운동이 펼쳐질 때 이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전통적인 신학하고는 너무 안 맞는다고 한 시간 정도 강의했는데 이런 것들이 빨려들도록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것들은 종교자체 안에 있는 어떤 힘만 가지고는 안 되고 사회문화적으로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기에 맞는 어떤 코드들이 형성 되었기에 이런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첫째, 현대 사회에 있어서 자아의 상실입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세계의 제화들이 대량적으로 생산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생존하면 될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을 소유해야지만 생존의 안정감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19세기 중반에 미국 사람들이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물질들을 아홉 개를 꼽았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와가지고는 256가지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핸드폰 없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겠지요? 컴퓨터가 없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겠지요? 옛날에는 그런 것들이 없어도 잘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제화를 손에 얻기 위하여 더 헌신적으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에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동창회 한다고 나가보면 죽 앉아서 식사 후에 모두 다 식탁 아래 아이 폰 내려놓고 다 그것 두드리고 있습니다. 회의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 내버려둬도 너무 재미있게 혼자서 잘 놉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점점 관계를 못 맺고 가상과 현실을 혼돈 하는 지경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도시화의 문제, 산업화의 문제, 그러면서 도시화 속에서는 익명성이 보장이 되지만 시골에서는 허튼 짓을 못합니다. ‘뉘집 아들, 뉘집 손자가 까불고 다니더라’ 완전히 집안 망신입니다. 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인간관계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예전에는 격자 간에 교통이나 통신 같은 것들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동아리 안에 들지 못하면 자기 자신이 존재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안에서 쫓겨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런 통신이나 이런 메스미디어들을 통해서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연락을 주고받고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계가 피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점점 자기가 누군지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6페이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러한 순간에 결국은 자기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웨일즈는 ‘삶이 점점 더 풍족해 지긴 했지만 훨씬 더 얄팍해지고 삶의 목적성도 모호해졌다. 사람들은 삶이 그 실제를 잃어버린다는 자기 느낌을 점점 더 뚜렷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통, 불면증, 정신병, 이런 질병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면서 인간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라는 자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불교는 요즘 중흥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외국 사람들이 몰려와서 Temple stay을 하고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점점 더 증가할 것입니다. 교회가 소외를 더 많이 느끼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Church stay를 만든다고 하는데 church에서 무슨 stay를 하겠습니까? 문화가 없는데 뭘 stay 하겠습니까? Temple stay를 찾는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려고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시 생활 속에서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Temple stay는 조용한 침잠 속에서 자아를 찾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천벌을 받을 죄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불길이 지나가니까 빨리 회개하고 주님께 구원받고 구원받은 후에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매일매일 눈물로 기도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그것을 좋아하겠습니까? 회개하라는 것도 싫거니와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회개하고 인간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옛날의 인간이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뉴 에이지이니까, 이것이 보통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이런 개혁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케리그마들을 존속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더 치열하게 영적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거의 기도 안하잖아요? 기도를 전혀 안하는 사람보다 거의 안 하는 인간이 더 나쁜 사람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은 절대 위선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 자기가 기도를 안 했기 때문에 기도를 한 것처럼 착각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들이 위선에 빠지고 더 나쁩니다. 예전에 여러분 선배들이 동산에 올라가서 그렇게 기도했으면 여러분들은 두 배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17년 전에 성도 7명을 데리고 열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17년 전 열린 교회 개척하던 시대와 지금과는 어떠냐고 묻는다면 저는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완전히 다른 시대입니다. 여러분 궁금하면 우리교회로 오면 내가 해답을 주겠습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전도지 들고 아파트에 전도하러 여섯 시간만 다녀보세요.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앉혀놓고 단 10분 만이라도 복음을 설명할 기회라도 얻으면 내가 박수를 쳐 주겠습니다. 그런 기회조차도 현대인들이 주지를 않습니다. 아파트에 접근이 불가능하고 접근을 해도 문을 열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에는 ‘다음에 나갈께요, 싫어요,’ 했는데 지금은 ‘개새끼’라고 막 욕을 합니다. 무섭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풀밭에서 노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는 아이들에게 ‘예수 잘 믿어라 ’하고 먹을 것 사주고 무슨 이벤트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한 번 현장에 가보십시오. 안 됩니다. 최근에 여러분 주위에서 개척을 하고 5년 안에 우뚝 하고 서게 된 교회 있으면 그런 교회가 있는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미래가 정말 걱정이 됩니다. 공부도 체계적으로 안 합니다. 옛날에는 열렬히 기도하고 우리가 신학부 학생일 때에는 약 1-2년 안에 한 두 명 정도는 학생들 중에도 40일 기도 들어간다고 학생들 중에도 휴학을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 안 하잖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안 믿는 시대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서 증오하는 세력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기독교에 물을 탄 복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먹어서 마귀가 죽지도 않고 병든 사람은 먹어도 살아나지도 않는 맹물 같은 그런 시대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주 설교를 듣습니다. 묻겠습니다. 최근 3년 동안 회개하라는 설교를 진실하게 외치는 설교자가 설교하는 설교 들어본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보십시오. 또 그것도 잘못하면 교회에서 쫓겨나잖아요?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실력 없지요, 영적인 능력도 없지요, 거기에다가 인간적인 수단이라도 좋으면 세속적으로라도 교회가 유지라도 되는데 그 재주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됩니다. 내 이야기가 과장이 아닙니다. 저는 현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기회를 줄테니까 가서 해 보라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그런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금 사회적으로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하층부에서 물질과 세계를 바라보는 견해가 극도의 과학주의적이고 우연적이고 인과율적인 접근을 하면 할수록 상층부에서는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만능주의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할 때 자연적인 신비주의적인 것들에 대한 호기심들이 계속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속에서 인간들은 점점 더 신비주의에 대해 선호하게 되고 이러한 기호들을 사실은 이런 관상주의를 비롯한 신비주의 운동들이 만족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경건은 매우 신비주의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인격적인 사람의 신비는 비인격적인 신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죄인이 깊이 회개해야 되고, 중생해야 되고, 회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의 신비입니다. 그러면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적시는 놀라운 신비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인격적인 신비입니다. 이런 인격적인 신비를 만난 사람들은 물리적인 신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까짓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난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잘 보세요. 복음이 강력하게 선포됩니다. 안 믿으려는 사람도 있지만 곳곳에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통회하고 거듭나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인격적인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아, 저런 신앙의 변화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은 이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의 신비가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이미 사라져가고 있고 설교를 하러 올라갈 때에 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해서 예수님 품으로 인도해야 되겠다라는 결단의 용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들으면 좋은 오프라 윈프리 쇼 같은, 아침마당에 나오면 좋을 것 같은 대사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서 돌려보내는 것을 성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 모이는 것이 성도가 아닙니다. 가슴이 따뜻해진 야수들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즈워드는 자기의 책 속에서 '회심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의 영향력이 거의 impact 가 사라져가고 있는데 현대인은 그런 신비에 대해서 동경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가오니까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상하잖아요? 어떻게 저런 황당한 이단이 말도 되지 않은 뻥을 치고 있는데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갈까? 그것이 이런 것들이 사회문화적인 요소입니다.
사실은 그런 자아중심적인 욕구 무슨 이야기냐면 심리학자인 에브라함 메슬로우라는 사람이 인간의 욕구 5단계를 설명합니다. 맨 처음에 생리적인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동아리 집단에 대한 욕구(사회적 욕구), 자기 존중의 욕구, 맨 마지막에 있는 욕구가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혹시 블랙 스완이라는 영화 보셨어요? 영화를 가끔 보시게 됩니다. 보는데 보러가서 팝콘 먹으면서 ‘와, 정말 재미있다’ 하고 오면 경건에 도움이 안 됩니다. 문화 코드를 가지고 정확하게 보고 왜 저런 영화에 현대인들이 열광 하는가?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양떼들이 저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런 것들을 짚어내서 그런 것들을 공부시간이나 설교시간에 해석을 해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불신앙의 코드가 무엇인가 찾아내서 그 일을 해독시킬 수 있는 신학적인 설교들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기적으로 영화관을 가야 합니다. 이상한 영화들 보지 말고 뭔가 시대 정치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그런 영화들을 보아야 합니다. ‘도가니’ 같은 영화가 그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그 다음에 예전에 나왔던 ‘밀양’이나 ‘아바타’나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그런 것들이 다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해리포터 작가는 그것을 쓰고 8조원인가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밤중에 하는 것으로 무대가 펼쳐지는데 컴컴하고, 정말 싫잖아요? 그런데 왜 현대인들이 이런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 말도 안 되는 빗자루 타고 날라 다니고 하는데 그것이 뭡니까? 타려면 제트스키 같은 것들을 타든지 하지 빗자루 그것도 싸구려 빗자루 타고 다니는 것들, 그런 것들이 어마어마한 열광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코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코드가 여러분들의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깔려있는 것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문제가 나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더니즘을 공부해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변종이고 사생아입니다. 모더니즘의 정신을 모르고서는 여러분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 파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단계가 뭐냐 하면 자아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확 실현하는 것, 그게 영광입니다. 예전에는 잘 먹고 잘 입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아를 마음껏 실현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 것, 그래서 비전, 꿈을 펼치는 것, 생각대로 T 그런 코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 선전 광고, CM 송 이런 것들이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최근에 소녀시대가 부르고 있는 노래들을 잘 듣고 가사를 옮겨 적어보세요. 잘 못 알아듣겠으면 인터넷에 들어가서 천천히 가사를 듣고 가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섯 곡만 듣고 따져보십시오.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기존의 가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기 자신을 우상화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신적인 존재로. 그런 속에서 이러한 인간을 신적존재로까지 보면서 인간 안에서 신의 내재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들이 우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 위에서 정신세계 속에서 거대한 틀을 가지고 여러분들 영화 ‘메트릭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정교하게 현대인들을 움직이면서 그 사상이 좍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 실체가 파악되지 않으면 현대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설교를 하면 계속 삽질하는 내용의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불만족 중의 하나가 뭡니까? 설교가 자신하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관이 있기 위해서 계속해서 치유, 현대인이 어쩌고 하면서 계속해서 방송국 아침마당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착하게 살자 밖에는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엘 오스틴처럼, 그 사람이 동성연애자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제가 아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감동적인 설교 같습니다. 그것은 쓰레기 같은 설교입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그러면 이 관상기도가 어떤 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
이제 그동안에 관상기도와 관련해서 비판한 논문들을 거의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해보니까 진지하게 비판들을 했는데 산발적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이 문제를 조사하면서 한번 조직신학적인 접근을 가지고 도대체 관상 표준적인 관상기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부류들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표준적인 관상기도의 신학을 지지하고 있는 표준적인 견해들이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적인 견해가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그 속에서는 이야기하는 조직신학의 주제들이 개혁신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들을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첫째가 무엇이냐면 인간론의 문제입니다. 이제 여기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면 인간이 개혁신학 내지는 성경적인 인간관과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르냐? 우선,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인간관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봅니다. 타락했다고 해서 아무 희망이 없다는 뜻이기보다는 구원에 관한한 절망적인 존재이지만, 죄의 영향이 인간의 모든 사고와 의지, 특별히 지성의 기능에 침투해 있기 때문에 이게 정상적인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없고, 그를 사랑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입니다. 더욱이 인간이 하나님 사이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현저히 다른 타자의 본질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근접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냐면 이 인간의 관상기도에서는 인간의 원죄와 부패성의 개념자체가 아주 모호해지는 것입니다. 우선, 그 문제를 따지기 전에 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면 인간 존재의 개념자체에 대한 비성경적인 요소입니다. 37페이지를 여러분들이 보시면, 토마스 머튼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이미 연합된 존재이며, 관상기도는 이미 그렇게 된 존재에 대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다음 그의 언급에서도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일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래된 일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견해는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사제인 레미안 쉐논은 [평화의 씨앗]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신과 하나임을 잊어버린 망각은 개인의 경험만은 아니다. 이는 인류의 집단경험이다. 게다가 이것은 원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원죄 그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과 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이것이 원죄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제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39페이지로 넘어가면 다시 아빌라의 테레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 보십시다. 맨 밑에 “여기에서는 마치 하늘에서부터 내리는 비가 강이나 샘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물만 있을 뿐이며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물과 강에 속한 물을 나누거나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 연합은 마치 두 양초의 끝이 결합된 것 같다. 거기서 나오는 빛은 하나가 되며 심지와 초와 빛은 모두 하나가 된다.” 말도 안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여러분이 신비주의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머튼이라는 사람을 꼭 알아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 토마스 키딩, 헨리 나우웬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리처드 포스터 이런 사람들이 갖는 관계들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토마스 머튼은 헨리 나우웬에게 영향을 미치고, 헨리 나우웬에게서 바로 이 리처드 포스터가 영향을 받게됩니다. 여러분 현대 경영학의 구로인 피터 드로커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이 사람의 정신적인 스승이 쉐암 키에르 케고르입니다. 어느 정도로 존경했느냐면 키에르 케고르의 책을 원서로 읽기 위해서 피터 드로커가 덴마크어를 공부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경영학 책에 보면, 명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면 빌 하이벨스입니다. 그래서 놀랍게 마케팅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비주의와 상당한 연관을 이루고 있고 마케팅 교회가 지금 거의 종말에 온 것은 여러분들도 알고계시죠? 마케팅 교회는 이제 거의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 예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마케팅 교회 이론을 따랐던 많은 교회들이 이머징 교회로 갈아탔습니다. 이머징 처치 운동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따로 글을 읽으셔야 합니다. 이머징 교회란 것이 떠오르는 교회 이런 것입니다. 무엇이냐면 다음 세대에 차세대의 교회의 유형이라고 보면 됩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큰게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도 파악하려면 미국의 사회사의 발전과 연관을 갖는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이야기하면 길어지는데 18세기 중엽까지는 넉넉 잡으면 그렇고, 인색하게 잡으면 17세기 초반까지 잡을 수 있는데 이때 까지만 해도 훌륭한 목사, 목사 자신이 어떤 사람이 주목을 받는 대상이 되어서 기업체를 이끄는 경영의 책임자처럼 이런 식으로 목회자들의 인식이 안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목회자가 등급이 있고, 목회자를 따라서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목회자를 따라서 교인들이 이동을 하고 하는 이런 사업주의적인 형태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형태들이 들어오기 시작된 것은 제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들이 형성되었는데 조지 휫필드의 부흥운동이 이제 한 몫을 하게 됩니다. 그게 왜 그랬느냐 하면 그 당시에는 어디를 가든지 간에 목사들이 지금의 의사들처럼 기본적으로 상당한 양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소양을 갖지 않으면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공부를 못해도 좋은데 꼭 좋은 대학을 나올 필요는 없지만 의사였으면 좋겠다. 자기는 학력 같은 것은 보지 않는데 의사였으면 좋겠다. 동네에 아무리 조그맣게 병원을 차리고 있어도 우리에게는 기본적인 신뢰가 있습니다. 저 병원에 가면 내 눈을 치료하다가 눈을 뽑아버리면 어떻하지? 이런 우려는 안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학력고사 1%에 들지 않으면 의대에서 원서를 안받아줍니다. 이런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 시골에 급해서 병원에 가도 우리는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목사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시골에 조그만 교회에 가도 철학과 신학, 역사 이런 것들을 다 공부해서 인간의 삶에 전체적인 체계로서의 기독교를 가르쳐줄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칙들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 1736년에 시작되고 40년대에 불이 붙기 시작을 하면서 엔필테 집회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때부터 들어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18세기 말에는 켄터키 부흥운동 같은 경우에는 "원더풀 프리덤"이라고 해서 성령만 받으면 누구든지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무디의 부흥운동이 커다란 기여를 했고 19세기 중반에 있었던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이 이런 것들을 아주 극대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일어났던 오순절 주의의 번성 같은 것들은 이런 상황을 더 부채질하게 되었고 특별히 근대주의가 깨지고 후기 근대주의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거대한 담론들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담론들 자체가 사라져 버리면서 무엇인가 사상이나 인간의 실천, 종교에 근본을 묻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누구든지 은혜 받으면, 제도권에서 안수만 받으면 목사가 되면 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사역 자체가 아주 간단해진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메시지를 외치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하늘나라다. 그다음에는 열심히 살면 된다." 이런 간단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뒤틀린 기독교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미래의 학자가 아니지만 자신 있게 예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목회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20년 후에 오늘의 내 강의를 회상을 하면 나도 20년까지는 살아있기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점점 안됩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가 운영이 안되어 문을 닫게 될 것이고 신학교를 찾는 인원도 많지 않고 현저히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대신 되는 교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교회들은 매순간 변천하는 정신을 따라서 세속적인 욕구들을 사람들에게 맞추어주는 교회들이 남을 것이고 일단 부류, 두 번째 부류는 어떤 교회냐면 인간과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서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설명을 줄 수 있는 사상을 가르치는 교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는 왜 생겨나게 되었고, 나는 누구이며, 그리고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스도 예수는 이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무슨 의미를 가지며, 중생과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예수 믿은 그 이후에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무엇이고, 이 세계는 어떤 정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정신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라고 말씀하시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은 특이하게 성장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아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이렇게 예수를 믿는 신앙을 매우 내용을 단순하게 하고, 세속적으로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제공해 주는 마케팅적인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카이퍼니안니즘에서 얘기하는 것 처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이고 철학인 교리적인 설명을 줄 수 있는 확고한 신학의 체계, 철학의 체계를 갖춘 그러한 가르침들이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생생한 영적인 경험, 이런 사고의 기반과 현실적인 종교의 영적인 경험들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교회는 견실하게 부흥할 것입니다. 확신합니다. 여기는 여러분들이 마케팅 교회나 제자훈련으로 성공하려면 여러분 친구들을 거의 경쟁상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 너도 나도 다 하니까 그러면 제가 말씀한 대로 하면 경쟁상대가 없습니다. 그리고 목회의 목표는 교회 부흥이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목표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그렇게 설교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필연성 때문에 외치고, 살고, 죽어가는 그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교회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나는 맹세코 17년 동안 교회를 살아오면서 이웃에 있는 교회나 다른 어느 교회를 경쟁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상대가 안돼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경쟁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려해서 나의 목회방침을 바꾸어 보거나 궤도를 수정해 본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냥 나는 내가 이렇게 설교할 수 밖에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는 사람은 오고, 안 오는 사람은 안오고, 안오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설명을 해주고 예수 믿게 돌보고 온 사람들에게는 더 깊이 이해하도록 가르칠 뿐이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너무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고 잘해주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이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절대적이고 이 신앙만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고 살든지 간에 확실하게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신념,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30년 동안을 신학을 해왔습니다. 지금도 나의 정체성은 학자는 더더욱 아니고, 큰 설교자도 더더욱 아니고, 나의 정체성은 학생입니다. 학생으로서 학생인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설교자 자신이 구도자이어야 합니다. 사업가가 돼서는 안됩니다. 구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회를 해서 무슨 개인 사업가도 아니고, 비즈니스도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 성공을 해야 할 텐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라는 존재가 여기 서서 나는 부족하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써 어떤 길을 따라서 생각하며 살아가야 될지를 난 찾았다. 이미 완전히 찾았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일관성 있는 그 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상의 내용이 되고, 그 사상이 내 안에 용해되어서 삶이되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외치는 설교이고, 그것이 목회이고, 그것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어야 합니다. 난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난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는 내가 비기독교인이 아닌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무한히 감사했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만나면서는 내가 다른 교파에 속한 교인이 아니라 개신교 교도인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를 만난 다음에는 내가 다른 교파가 아니라 개혁파에 속한 것에 대해서 한없는 영광을 돌렸습니다. 나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자부심을 느낍니다. 내가 개혁파 교인이라고 하는 것을 내가 이제껏 철이 들어서 만난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상 중 최고의 철학이고 최고의 사상이다. 현대철학, 마니교,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과정철학, 진화론, 유신론 다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대단해 보이지만 실존철학에 대해 한 때는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회심하기 전이지만 니체를 탐독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실존철학도 별 것이 아닙니다. 이 개혁신학은 철학 중에서도 최고의 철학인 철학을 완성한 신학입니다. 그런데 불쌍한 것은 여러분들이 개혁파라고 주장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유산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껏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중세는 종교개혁하고 다르니까 잘라내 버리고, 루터는 옆으로 너무 멀리 나갔으니까 처 버리고, 쯔빙글리와 블링거들은 잘 모르니까 치워버리고, 그 다음에 칼뱅 그 밑에 대제는 개혁신학을 이성주의를 도배질해서 잘라내 버리고 마지막에는 칼빈 하나 놓고 주석은 너무 기니까 그만두고 논문은 너무 어려우니까 치워버리고 마지막에는 외로운 성 하나 기독교 강요 3권만 남겨둡니다. 그것도 초판, 재판은 읽을 필요 없고 최종판만 읽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칼빈, 기독교 강요를 엎어놓고 팔을 비틀면서 고문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부터 원하는 것을 이 기독교 강요 안에 다 들어있다고 자백을 하라! 비트는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대단한 작품이고 속독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완독 안한 사람 많지요? 손들어 보라고는 안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절반도 안될 것입니다. 한글을 읽어야 합니다. 칼빈 신학대학원에 가서 60명 수업을 하는데 완독하신 분 손들어 보세요 하는데 3학년 가운데 60명 가운데 2명이 완독했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총신은 그보다 조금 나을 겁니다. 나머지는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것 하나가 개혁주의의 모든 칼날인냥 동의할 수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영원한 가치가 있는데 그 유산과는 비교도 안되는 어마어마한 유산들이 개혁파 정통주의 속에 있습니다. 이번에 리처드 멀러 교수님이 왔는데 그 분이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사람들이 잘 모르더군요 그분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가의 세계적인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 작품이 9만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 대부분을 제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유산을 드려다 보면 이런 명문가에서 태어났구나! 여러분은 조상을 잃어버린 어마 어마한 유산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음 세대는 틀림없이 탁월한 경건을 소유하고 공부를 많이 해서 이 기독교의 총체적인 설명, 이렇게 파편화된 것 말고, 총체적인 설명들을 토해낼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의 교회는 아주 특이하게 부흥을 할 것입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몇 십명 정도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소수일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이야기를 가볍게 듣지 마시고 그리고 지금서부터 이 정도 공부 가지고는 안된다고 굳게 믿으십시오. 어림도 없다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그런 신학적 유산을 가지고 오늘날 시대를 뜨겁게 사랑하고 공부하면서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예언자가 되어서 한 사람의 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토해놓아서 이 잘못 흘러가는 세상의 정신을 꾸짖고 일해야 되겠다는 각오를 여러분들이 갖지 않고 은사집회나 따라다니고 불이나 받으러 다니고 공부안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향길에 접어든 마케팅교회나 배우러 다니고 심리학이나 배우러 다니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통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로! 내가 이렇게 간절히 이야기를 해도 학생들은 자극만 받을 뿐이지 실제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신학교 선생님이니까 올 때 마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선생이니까 직업적으로 하는 이야기지 하겠지만 신학자가 아니라 그럴 야망도 없고 목회자로써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통절하게 공부에 헌신해야 합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어마 어마한 양의 공부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대에 대한 연구, 개혁주의라고 조금 공부를 가르쳐 놨더니 칼을 만들어서 그 칼을 복음주의 목에다 겨누는 것입니다. 저쪽에서는 이런 반기독교적인 사상들이 노도와 같이 밀여옵니다. 그렇다고 복음주의는 교정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칼을 갈았으면 복음주의는 나중에 손 좀 보고 쳐들어오는 블레셋 군대부터 같이 막고 평정이 된 다음에 따져보자 하고 해도 늦지 않는데 기껏 그 칼을 가지고 복음주의 목을 겨눕니다. 자기자신 조차도 이런 잘못된 사상이 현대사상에 삼킨바 된 것입니다.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나옵니다. 여러분 신학교는 좀 낫습니다. 다른 신학교는 더 상황이 나쁩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 자녀들의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여러분 당장 사역에서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 보십시오. 인간론에 대한 문제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40페이지를 넘어가면 죄와 타락의 개념들이 불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하냐면 관상 기도를 주창한 사람이 토마스 머튼인데 이사람은 종교 다원주의자입니다. 수도사였는데 나중에 베트남의 고승과 교류하고 일본의 고승들과도 교류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시도하고 본인은 자살로서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 사람이 쓴 책들이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한국에 유력한 목회자 한 사람이 토마스 머튼을 자기의 스승이라고 해서 맥락을 아는 사람들을 발칵 뒤집혔습니다. 기독교에 정상적인 영성을 가진 사람이 스승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토마스 머튼도 공부해야지 책을 읽어야지 알지 않겠습니까? 어마 어마한 독서량과 고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목회자의 삶이란 것이 잘못된 사상에 위협되면서 기독교 신앙에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진리의 올바름을 가지고 변증하고 논증하지 않는 것은 진리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고유한 의미의 관상기도를 지지하고 있는 집단들에게서는 이것을 어떻게 보냐면 인간의 죄를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반역이라든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이탈이라든지, 경향성이라든지, 하나님의 위엄 도전이라든지, 반감이라든지 이렇게 해석을 안하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은 때 묻었을 뿐이다. 그 때를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 무엇이냐면 명상이다. 명상을 통해서 이런 때들을 깨끗이 씻어내게 되면 인간은 더 없이 고상한 존재로서 스스로 신과 합일을 이룰 수 있는 존재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보석에 흙이 묻었는데 깨끗이 씻어내기만 하면 그 자체가 보석 그대로인 것과도 똑같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인간관은 생선과 같은 것입니다. 썩은 것입니다. 씻어내도 계속 해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이제 40페이지로 넘어가서 밑에 보면 정통신학에서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대항이 성화의 길이라고 봅니다. 타락의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41페이지에 보면 "타락이란 우리가 우주의 춤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리고 관상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체험한다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대명사이다." 무슨 말장난입니까? 자신이 신의 일부임을 잊고 있는 것 자체가 죄라고 보고 그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제 떼이아르드 샤르뎅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통일된 본질이 신적본질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우연적인 사물로써 이 껍질을 깨고 본질로서 회귀하면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일치하게 되는 그 때 점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메가 포인트입니다. 오메가는 희랍어에서 마지막 글자입니다. 그것이 예전에 우리들이 이야기했던 영화, 완성 혹은 극치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쓴 책이 어렵습니다. 어려우니까 상당한 내용이 있는가보다. 신학대학에서 박사 논문에 나오는데.. 카톨릭 안에서도 거짓 선지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연적 껍질을 깨고 우리들이 영혼의 본질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성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에 현대인들이 매료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고전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가 신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고, 인간은 접근할 수 없도록 너무 멀리 나간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이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너 잘못되었다. 돌아오너라!" 아니면 신이 "내가 용서할테니 돌아와라!"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자신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인간관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일부이고 이러한 모든 그리스도의 예수의 본질로서의 회귀가 극대화 되는 지점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오메가 포인트이다. 역사속의 오메가 포인트이며 극치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과 동일합니까? 이게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환영을 받는 이유는 인간을 신격화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과 완벽하게 코드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아바타의 한 장면을 보면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대지와 자연, 이와와 자연이 일치를 이루고, 자연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인간의 몸속으로 흐르고 이것이 인간의 골수 속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결국은 뭘 설명하냐면 신인 이와와 생명, 자연과 자연인 인간의 육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본질로 통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영화가 이렇게 엄청난 선풍적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단순한 감독의 발상의 전환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현대 코드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인간이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데 인간이 신화하면서 이 신적인 존재와 화하면서 신적 존재와 동일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데로 신을 형성하고 인간은 신에 대해서 형성되며 진화론적으로 함께 발전해 가는 생명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신과 인간을 놀랍도록 공존시키면서 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신으로 끌어올려 인간의 삶의 의미를 신의 존재의 의미와 일치가 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현대 사상에는 정확히 들어맞는 코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과학과 심지어는 학문에 까지 종교를 도입하는 것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뉴 휴직스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신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 한번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아보십시오. 신 물리학에서는 물리학의 엄정한 개념 안에 신비의 개념들을 도입을 해서 고전 물리학에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신 물리학에서 해명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요소를 과하게 도입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융합적인 시도들이 전 방면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보면 오늘날의 타로점이라든지 타트위스트들, 문신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상업들이 번창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은 기독교의 살 길은 무엇인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속에서 한편으로는 너무 과학적이고 철저한 인과율의 법칙을 믿는 과학주의적인 사고방식과 또 한편으로는 무 방비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신비주의에 대한 수용, 그러면서도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돌아가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아는 참된 사람, 이것들을 가르쳐주고 있는 고전적인 복음들이 설자리가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이제는 복음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버리고 새 것을 찾자고 마음을 먹게 되면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정면적으로 도전을 해서 승부할 것인가? 라는 문제와 어느 부분을 현대사상들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도 괜찮은가라는 문제, 어느 부분까지 태도를 분명히 하고 거부해야 될 것이라는 문제는 중요한 가치판단의 문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런 것을 잘못 다루었기 때문에 쇠퇴의 길을 가게된 것이 나의 개인적으로는 올드 프리스턴의 신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주의가 되면서 근본주의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근본주의가 나오게 되고 신복음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일련의 과정이 나타납니다. 이미 벌써 올드 프리스턴에서 조차도 이미 세계와 이 모든 인간의 삶과 하나님, 이 지구와 우주에 마지막 운명에 대한 총체적인 하나의 설명들을 이미 해주는 기능들을 교회가 상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제가 구약을 전공하려고 마음을 먹었고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면 성서신학 하나가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면 된다. 어떻게? 어떻게 성경으로 돌아갑니까? 누가 성경으로 안돌아 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상에 대한 이해, 조직신학, 역사신학에 대한 이해, 모든 총체적인 이해들이 필요하고 또 우리들이 고민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이미 앞서서 고민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내가 큰 스승으로 생각하면서 20년 이상 탐독하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런 것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을 줍니다. 자기 시대를 끌어않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를 하는 사람들의 중대한 임무입니다. 최근에 제가 철학자 강요한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둘이서 같이 매 주에 한 번씩 만나서 대담을 하면서 철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책을 이제 같이 쓰고 있는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계관 운동을 사람들이 수없이 했지만 영향력은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정말로 할 수 있는 사람을 목사님들밖에 없습니다. 목사님이 총체적인 철학과 세계관을 이 신학적으로 올바른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총체적인 진술해 낼 수 있는 사상가로서 사람들에게 설교 속에서 교화적인 방법으로 전파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 자신이 정동이 안돼있으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여러분 풀기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분 말에는 고분고분 머리 숙이는 사람들하고 이야기 하지 말고 전혀 기독교 신앙이 없는 청년들하고 대화를 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믿고, 확신하는 내용들을 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득을 시켜보십시오. 물론 우리는 설득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알고 선포하는 것과 모르고 앵무새처럼 선포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2가지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이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 둘 사이를 묶어주는 것이 무엇이냐면 영적인 은혜의 힘입니다. 이것은 비밀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경건의 비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터득해서 한편으로는 철저한 사상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가? 기독교인은 이 세계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품고 사는가? 오늘날에 외국인 이주민의 문제라든지, 생태신학의 문제라든지, 정치의 문제라든지, 환경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기독교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공부하고 한편으로써는 엄청나게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즐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그 두 개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두 개를 연결해주는 힘이 열렬히 기도하고, 기독교의 복음이 거짓이라고 설득을 하더라도 설득당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진실한 신앙,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은혜
(찬양)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체험적인 신앙,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눈물 흘리며 말할 수 있고, 부활의 위대한 영광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이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를 현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영적인 세계, 거기서 오는 은혜의 파워가 필요합니다.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신비주의 따라가서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것이나 배워와서 목회하라면 되겠습니까? 그런 사이비가 어딨습니까? 금이빨 만드는데나 뛰어다니고 말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해서 허망한 교주같이 인생을 망치려 합니까? 그러면 되겠습니까? 종교인을 떠나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집에 가서 꼼꼼히 읽어보고 뒤에 나오는는 친절하게 참고문헌까지 다 붙였습니다. 또 하나 만약에 그랬는데도 이것이 신통치 않다고 하면 열린교회의 홈피에 들어오면 2시간 30분짜리 하나, 1시간 20분짜리 하나 2개가 올라가 있는데 그 진도가 지금 공부한데까지 나갔습니다. 앞으로 2번 더 2시간 정도씩 강의가 이루어져서 끝까지 갈 것입니다. 그러면 훨씬 더 정돈된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토마스 머튼, 토마스 키딩, 윌리암 쉐논, 그다음에 헨리 나우웬 이런 사람들에 대한 작품을 애정을 가지고 탐독하지 말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탐독을 하고 그러면서 건전한 사상을 분명하게 가지고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확고한 자기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신론의 문제가 다 종합해서 치고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정말로 열심히 탐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숨이 위태할 정도로 까지 온 맘을 다해서 교회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꼭 필요한 사역하고 나머지는 온 맘을 다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읽어야 될 책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습니다. 그것을 고민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신학부터 종교개혁 신학부터 시작을 해서 현대의 조직신학, 뿐만 아니라 중세, 교회의 역사, 초대 교부들의 시대, 철학, 현대사상, 너무 너무 공부할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데이비 웰즈의 5부작을 비롯해서 읽어야 된다고 가르쳐준 책만 대충해서 40권정도 됩니다. 읽어야 합니다. 얘기만 듣고 그런가보다 생각하지 말고 공부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무릎이 닳도록 기도 좀 하고, 그래도 3일에 한번 씩은 울어야 하고 통곡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더럽고 무능한데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은 이렇게 어마어마 한데 능력도 없고, 실력도 없는데 매달여야 하지 않습니까? 힘이 없으면 진실하기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가 닳도록 매달려야 합니다. 스트로풀 엉덩이처럼 돌아다니지 말고 딱 붙어 앉아서,, 내가 아는 학생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데 딱 한달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100권의 책을 읽었답니다. 여러분들은 영혼을 돌보는 의사입니다. 깊이 고민하면서 지성에 대한 탐구를 해야합니다. 무엇보다도 목회의 성공을 위해서 목회하지 마십시오. 목회에 성공을 하면 고달픕니다. 쉴 시간도 없습니다. 안식년도 못갑니다. 월요일날도 휴일이 어디있습니까? 나는 월요일에 쉬어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하지 말고, 내가 나이기 때문에 이것을 외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 이외의 목회는 다 노가다 목회입니다. 정말로 사상이 있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칼 오저에게 불려가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도 달리는 어쩔 수가 없나이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그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진리를 소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상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발 그것 가지고 가서 툭하고 던져놓지 말고, 나도 피 말리면서 쓴 것입니다. 총회에서 2주만에 쓰라고 해서 무슨 논문이 슈퍼에서 아기 분유 사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해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하도 비서를 들볶아서 결국 했습니다. 어려울 것입니다. 자료 다 찾아보십시오. 없으면 편지하시고 내가 다 구해줄 것입니다. 공부해서 어떻게 하든지 단 20년을 목회하다가 죽어도 외칠 수 밖에 없는 그 진리를 외치다가 장렬하게 산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리 흔들, 저리 흔들리다가 죽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비참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데이비드 웰즈의 5부작을 반드시 읽으십시오. 빨리 읽고, 열심히 읽으십시오.
질문들어온 것 있습니까? 1-2개만 받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 개혁신학과 관상기도에 대한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관상기도를 집필한 이유는 총회에 부탁을 받고 했고, 현실적으로 그런 것들이 굉장히 복음적인 기도가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조그만 교회가 아니라 중형교회를 중심으로 아주 활발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했던 것처럼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목회자의 문제들이 합동 측에서 목사님에게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합동측 목사님에게만 많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이 합동 측에 있어서 합동측만 봐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카톨릭 부터 전반적인 문제입니다. 몇 년전 타임즈에 카톨릭 처치 캔 쉬 세이브 처치 라는 타이틀이 나왔습니다. 카톨릭에서 미국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 때문에 지불한 보상금이 5천억입니다. 어느 한 교구는 차압이 잡혀서 교구 한 재산이 다 날라갔습니다. 합동측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신교가 유난히 더 그런 것 같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현상이고 기독교, 개신교는 통일성이 없어서 뭔가를 관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노출이 되어서 다 난타를 당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런 것들을 철저하게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문제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각한 수준에 까지 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현대사상 속에서 목회자들 자신조차도 감염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윤리의식이 이완이 된 것입니다. 핍박없고, 고난없고, 시골 교회가서 봉사한다고 해도 시골교회는 없습니다. 교인이 10명 모이면 이력서가 20통이 들어온답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 한 사람이 35명 모이는 서울에 있는 교회 청빙 받아 갔는데 63:1이었습니다. 그 중에 8명이 박사학위 소지자 였습니다. 여러분 일자리가 없습니다. 비관이 아니라 없습니다.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러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 길을 정말 가려면 정말 무섯인가 이 기독교의 진리를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지적이고, 윤리적이고, 영적인 준비를 해야합니다. 사생결단을 해야합니다. 그러든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냥 남아서는 안됩니다. 다음세대, 앞으로 10년 후에는 더 심각해 질 것입니다. 노골적이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선배들도 개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찾는데 경쟁이 치열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다짐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윤리적인 문제 결국은 합동 측의 문제만이 아니고 모든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깊이 각성을 하고 올바른 지식, 철저한 윤리, 이런 것을 회복을 해야합니다.
세 번째, 큐티에 대한 질문입니다. 큐티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면 제일 시급한 것은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교리를 가르쳐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왜 썼습니까? 이렇게 여러분들 개혁신학의 표준서가 되게 하려고 기독교 강요를 쓴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기위한 입문서로서 기독교 강요를 쓴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성경을 읽는 것과 성경이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썼는가를 얼게를 알고 가전제품을 사면 사용설명서부터 읽지 않습니까? 물론 수시로 써보다가 사용방법을 익힐 수 있겠는데 손을 델 수도 있고 전기에 오를 수 도 있습니다. 똑같이 성경사용 설명서가 기독교 강요입니다. 특히 초판.. 그러면 예수 믿겠다는 사람에게 교리를 올바르게 잘 가르치고 그 다음에 성경을 가까이 하게 하면서 그러면서 큐티를 하면 공상을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우시고 큐티를 했는데 '하나님 나 피곤해요 나도 눕고 싶어요' 그게 무슨 큐티입니까?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정확히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을 깨닫고 거기에서 교리를 찾아내고 삶에 적용하고 묵상하고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 교리적인 훈련이 안되어 있으니까 성경을 들여다 보아도 매우 감상적이거나 엉뚱한 발상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큐티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큐티를 하는 사람이 올바로 성경을 다룰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쨌든 강의는 다 못끝냈지만 중심은 전달되었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음 세대에 영향력있는 지도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